***< 이 페이지의 사진은 6월 20일쯤 발간될 일제 만행 사진집 에
실릴 내용 입니다 >***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지난 일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
취지와 목적은 전쟁으로 희생당한 영혼을 위로하고
잘못된 과거를
다시 재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넷티즌 여러분께 공개하는 것입니다 .
이들사진들은 일본 역사 왜곡에 대한 항의 표시로 공개 합니다. |
<참고로 이 페이지의 사진은 강화도 조약관련 사진이다> |
신헌이가 강화 조약체결에 전체 책임을 졋는데 고종은 강화 조약에 옥쇄를 찍은 사실이 없다고 했다.. 학계에서는
강화조약에 사용된 옥쇄는 위조 된 것으로 판명이 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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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 조약 강요 여기 문서 서명은 강화조약 사진집에 나온것이다 1876년 2월 26일 강화도에서 강제로 한일 수호 조약을
체결 했다 강화도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청의 간섭을 받지 않고 한반도를 정복 지배 하려는 저의가 깔려 있다 조선 개항을 성취한
일본은 부산 원산등을 개항 한반도 침략의 발판을 구축 했고 1880년 서울에 공사 관을 개설 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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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성 (갑곶돈대와 석수문) (1876년) |
동. 서로 두 개의 수문이 있었다 보초 수비병들이 경계심으로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고 있다 프랑스 함대와 미국함대가 첫 발포 했던
해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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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성 진해루 전경 (1876년) 일본군들이 진해루 정문 출입을 금지 시켰다. 일본 협상단은 이미 성안에서 협상을 강요
할시기다 오른쪽에 보트 까지 끌고 와서 조인 강요 대기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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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도 남문 (1876년) 일본군은 성문을 굳게 닫고 여러날 출입을 금지 시켰다 성문밖에 모인 주민들은 조약의 경위를 알려고
성문 주변에서 성문만 바라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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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관사 [열무당(閱武堂)] (1876년) 일본군은 조약 강요 하기위해 대문앞에 대포까지 동원했다. 강압 수단으로 체결을
요구하는 일본인들은 조약의 진정한 의미를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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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도 진무영 전경 (1876년) 이곳에서 조약 협상을 위해 대문 앞에 역시 대포를 끌고 왔다
(진무영內에 있는
연병장과 로열박스(열무당)의 모습으로 江華鎭撫營의 최고지휘관인 鎭撫使 겸임 강화유수가 군대를 사열하고 훈련시키던 곳) 일본군들이
여기에다 대포4문을 거치해 놓고 위협하는 가운데 바로 뒤에 있는 진무영 본청에서는 朝日회담이 보름여
진행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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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조약 대표숙소(진무영 본청(HQ)의 정문입니다) 숙소 입구에 일본군들이 보초를 세우고 민간인 출입을 금지
시켰다 이시기에 강화도 성안에는 계엄령 같은 분위기로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지 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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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진무영의 본청으로 조일회담의 회담장) |
일본 대표들이 왼쪽에 자리 잡고 있다 처마 및까지 커텐을 치고 무슨 궁리를 하는지 힘없는 나라 백성은 볼모가 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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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진무영 병자 수호조약 체결 때 일본군은 이곳에서 협상을 강요 했다 이곳은 강화군 옛시장
공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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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옛성터 강화성과 강화도 성곽이 만리 장성 처름 느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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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강화성의 남문을 측면에서 본 모습입니다.남산의 능선을 타고 내려 온 성줄기 끝에 문루가 보이며 문루 왼쪽이 성
밖이고 오른쪽이 성 안쪽입니다). 아직 눈이 녹기전 강화도 전경이다 조용하게 보이지만 한일 조약 관계로 불안하여 거리에
사람이 두문 불출 한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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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강화 진입 (1876년) 일본군들이 성곽 주변에 행진하고 있다.. 일본병력은 수병 800 병과 군함 수송선 8척이
파견되었다 조약체결을 위해 무력시위 까지 시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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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내성의 서문밖 풍경 (1876년) 서문은 강화성 4대문 가운데 서쪽에 있다 성곽을 끼고 도로가 있어 외군을
관찰하는데 쉽게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강화성 서문을 바깥쪽에서 찍은 사진. 앞에 보이는 것은 논바닥으로 연무당은 오른쪽으로 길게
뻗은 성벽 안쪽에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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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도 하수문(下水門) (1876년) 성곽여첩이 선명하게 보인다 외군을 막기 위해 성곽을 설치 했으나 성곽 구실은 하지
못했다 성곽 높이가 4미터 정도가 되어 쉽게 넘어 갈 수가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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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도 동영 기슭 (1876년) 이곳은 군사 중요지역으로 산에 나무 까지 벌목 했다 감영이 함께 자리 잡고 있어 인사,
관사, 비서들이 근무 하던곳이다 (별효사청 별영-別驍士廳에는 두개의 軍營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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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도 해안수구 운동장 처름 보이는 곳은 일본군은 이침마다 이곳에서 총검 훈련을 하던 곳이다 해안에서는 간혹 함포
사격도 실시하여 주민 생활은 공포에 시달렷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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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동영 (1876년)앞에 보이는 기와집이 바로 동영, "별효사청의 동영"입니다. 현강화도 교육청자리이다 .. 강화 수비
군들은 야산에 올라 군사 훈련을 하던곳이다. 앞에 보이는 와가 집은 군영(軍營)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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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도 조일 조약(朝日) 행사 학교 운동 장에 모여 조약 체결 행사를 준비 하고 있다 이곳 주민들은 왼쪽 입구에 모여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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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강화도 덕진 성곽 포졸들이 성곽위에서 무심코 이방인(일본) 일본인
들을보고 한결같이 침통한 표정들이다.(눈이녹기전 겨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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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남문 원형 (1890년) 독일 함부르그 박물관 소장 작품 이다 재물포 세창양행(무역회사)를 건립했던 마야가 촬영
한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