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헌금에 대한 소고

2020. 11. 7. 16:35운영자자료/5.논문자료 모음

교회 헌금에 대한 소고

이미 십일조와 헌금에 대한 내용을 말씀드린 적이 있었다. 교회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헌금을 언급한다. 비록 헌금을 강조하는 교회는 많지 않다 하더라도 교회는 어떤 여타의 조직체와 마찬가지로 돈(재정)이 필요한 기관이다. 돈이 없으면 우선 교회가 운영되지 않는다. 아무리 복음의 사역이라 하더라도 돈과 결부되지 않는 사회적 조직은 없다. 따라서 돈이 필요한 곳이 바로 교회이다. 문제는 이 재정에 관한 부분을 어떤 식으로 접근하여 사람들에게 알리고 설득하고 돈을 나눌 수 있게 하는가가 우리의 숙제이다.

많은 교회들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십일조라는 헌금을 강조해 이는 헌금이 아니라, 의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 헌금이 하나의 신앙과 믿음의 척도라고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더 악한 상황은 바로 이 헌금을 함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어떤 것이 성경적인 바른 접근인가에 대해 우리는 깊이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구약의 십일조에 대한 부분은 생략하기로 한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복음성경연구 카페 “예배학 강의”의 11번 :십일조와 성경적 헌금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선 신약시대만 살펴보고 넘어가기로 한다.

 

1. 신약시대의 십일조와 헌금.

(1) 십일조에 대해서는 언급이 거의 없다. (복음서 이외에는 전혀 없다.) 아마도 이 복음서의 예수님의 유일한 언급은 마 23:23과 눅 11:42에 나오는데, 바리새인들을 책망하기 위해 말씀하신 부분에서 등장한다. 예수님은 십일조를 폐기한 것이 아니라 그의 근본정신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담긴 올바른 십일조를 원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본문 때문에 그리스도인들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삼기에는 참으로 어려움이 있다. 일단 이 본문의 바리새인인 유대인과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십일조가 역사적으로 분명히 근거가 있는 내용이고, 그 십일조에 대해 바른 마음과 의도를 가지고 하라는 말씀이셨지,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이방인)도 해야 한다는 의미가 될 수는 없다. 더욱이 이 십일조를 드림으로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어떤 내용도 구약과 신약 전부를 통해 찾아볼 수가 없다. 말라기의 내용을 오해함으로 그런 내용으로 보는 사람들은 성경과 역사를 더 깊이 공부해야 할 것이다.

 

(2) 다음의 내용은 헌금의 양보다는 마음을 중히 보신 예수님에 관한 말씀으로 눅 18:9-14( 소득의 십일조 드리는 바리새인)과 (과부; 막 12:41-44, 눅 21:1-4)에 등장한다. 역시 이 본문은 주님이 헌금을 드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는 본문으로 볼 수 있다. 액수의 문제가 아니라, 그 마음의 진정성과 온전함으로 드리는 헌금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것이다. 역시 이 본문에서도 헌금을 드림으로 어떤 보상이나 축복이 주어진다는 개념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헌금을 드리는 것뿐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을 아시고 보시고 계신다. 그럼으로 헌금을 내는 것만 기억하고 보상을 주실 것이라는 식의 억지 해석은 금물이다. 삶과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교회에 대한 헌신을 기억하실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과 자세로 드리는지에 대해 모르실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말씀이다.

 

(3) 히 7:4-10. 구약의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언급(재해석)한 내용이 나온다. 여기에서 저자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은 멜기세덱의 권세가 그만큼 높은 것을 말하기 위함이며, 예수님은 바로 그 어떤 대제사장보다 다른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심을 강조하기 위해 예를 들어 설명한 것이다. 이 본문에서도 역시 십일조가 신약 백성의 의무라거나, 축복의 통로라는 어떤 점도 찾아볼 수가 없다. 사람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성경을 들여다보면 당연히 그 의도로 인해 성경이 곡해되는 점을 인정하기 바란다. 따라서 성경을 보는 사람들은 순수하고 깨끗한 심령이 아니라면 자신의 의도안에 스스로 빠지게 되어 있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는 것이다.

 

(4) 십일조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으셨던 사도 바울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당시 초대교회들은 거의가 개종한 유대인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던 이방인들의 개종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다수의 유대인이 교회안에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구약의 율법을 알고 배우고 철저히 지켜온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만일 그들이 개종한 후에 십일조에 대한 헌금을 계속하고 있었거나 그래야 한다는 어떤 설교가 있었다고 하면 그 많은 성경, 특히 바울의 서신서는 빼고라도, 다른 사도들의 글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바울이 그 부분을 생략한 이유는 아마도 그는 율법에 대한 철저한 배격을 하고(이것도 사실은 아니지만 그렇게 보는 사람드이 많다) 오직 이신칭의만을 강조한 사도였다는 점을 들 수 있고, 아마도 신약이후에 교회안에 십일조라는 헌금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은 십일조, 감사헌금, 주일헌금, 건축헌금과 같은 오늘날의 교회들의 헌금과는 달리 매우 단순히 연보를 언급했다. (다른 교회들지원과 구제하는 차원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도들(히브리인, 유대인들의 교회와 복음을 담당한 베드로를 비롯한 대부분의 제자들)은 왜 이 십일조와 헌금에 대해 전혀 언급을 하고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일조가 계속되어온 헌금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2. 다음과 같은 많은 질문들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교회들이 왜 헌금을 자꾸만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들에 과연 어떤 근거라도 있는 것일까?

(1) 교회는 꼭 헌금을 자발적으로 하게 하지 않고 언급하고 강조해야 하는 것일까? 헌금이 무슨 세금이라도 된다는 말일까?

(2) 헌금의 종류가 많은 이유(특별, 건축, 감사, 주일, 주정, 선교, 봉사, 절기-맥추, 부활, 추수, 성탄, 각종 회비, 등등)가 더 많은 헌금을 내게 하기 위한 목적은 아닐까?

(3) 헌금은 정말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께 대한 의무여야 할까? 정말 헌금이 하나님을 위해 드리는 것이 맞나?

(4) 헌금이 하나의 의무이고 주어진 임무라면 왜 헌금에 대한 축복기도를 하는 것일까?

(5) 헌금이 자발적인 의무이거나 아니면, 교인들의 의무이기 때문에, 헌금을 낸 사람들의 명단을 꼭 공개하고 그 액수를 주보에 매주 공개해야 하는 것일까?

(6) 미리 얼마를 내겠다는 작정헌금이란 것은 무엇인가? 헌금이 무슨 복권이라도 되며, 미리 액수를 정함으로서 더 많은 보상을 기대하는 것이 맞는 일인가? 아직도 작정헌금을 강요하는 설교자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이것이 심리적으로 사람을 유혹하는 것이 아닌 신앙의 길이라고 말할 근거가 충분한가?

(7)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정말 구약이래로 내려온 온전한 십일조라는 것을 알기나 할까? 그리고 정말 그렇게 십일조를 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참고로 구약의 십일조는 10%가 아니라 31%였었다. 오늘날 월급을 정확하게 받는 사람이외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십일조를 어떤 식으로 계산할 수 있을까?

(8) 교회는 왜 이렇게 불합리한 십일조라는 것을 통해 신자들의 수입의 10%를 교회에 내게 하려는 것일까? 그리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시험과 죄책감에 빠지게 하는 것일까?

(9) 교회의 헌금은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정말 하나님의 사업과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는가? 하나님을 위한 일, 하나님의 사업이란 무엇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그리고 정말 바르게 규정될 수 있는가?

(10) 하나님께서 신약의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정말 금전적인 부분에서 합당하게 이해되게 정의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가? 하나님이 정말 인간의 돈(금전)을 받으시는가? 그보다는 우리의 마음과 상한 심령을 원하신다는 말씀이 훨씬 더 많지 않은가?

(11) 교회가 신자들에게 연말마다 세금공제를 위한 현금 영수증이라는 것을 해 주어야 하는가? 헌금이 의무라면서 왜 세금 공제를 받으려 하는 것일까? 또 그것을 통해 헌금을 독려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12) 정말 교회나 신자들은 헌금을 하면서 어떤 보상이나 댓가를 바라지 않는가?

(13) 헌금안하고 교회를 다니는 일이 정말 가능한가? 헌금을 낼 수 없는 사람은 교회도 다니면 안되는가? 아니 눈치를 안보고 다닐 수 있는 교회가 있는가?

(14) 정말 헌금이 믿음의 척도라도 되는가? 돈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믿음의 차이가 되는 이 현실을 하나님이 만드시기라도 했다는 것인가? 그런 부자들이 천국에 가기 힘들다는 주님의 말씀은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

(15) 헌금을 많이 내거나 돈이 있는 사람이 더 대접을 받는 오늘날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진정 영적 교회들-인간의 영혼과 믿음과 영생을 위한-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16) 교회들은 헌금을 대부분 어디에 사용하고 있는가? 그들이 사용하는 헌금이 사람과 건물과 행사와 관련된 물질적인 것들이 전부이면서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는 말이 가능한가?

(17) 교회들은 헌금을 구제와 선교와 봉사와 장학금에 대부분 사용할 것처럼 선전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부분으로는 매우 작은 액수만 지출되고 대부분의 헌금은 건물 유지, 건축, 인건비, 공공요금, 목회자 자녀 교육비, 도서비, 등으로 지출되고 있는데, 그렇다면 왜 차라리 헌금은 하나님이 아닌 교회를 위해 내는 것이라고 떳떳이 말하지 않는 것인가?

(18) 교인이 헌금을 내야 하는 이유가 사실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금전이 필요하신 분이 아니다.) 우리가 유지해야 할 교회와 건물과 인건비에 있다고 합리적인 이유를 내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는가? 성경적으로 하나님을 이용하고 율법적으로 보상과 축복을 운운하는 미신적이고 종교적인 이유를 대는 것은 하나님께 큰 죄를 짓는 일임을 왜 알지 못할까?

(19) 탈세를 하면서도 헌금만은 꼬박꼬박 내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축복을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주와 모든 정의로운 질서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에게 과연 축복을 주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예수님은 헌금을 하셨다는 기록은 없지만, 자신이 내지 않아도 되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신데도) 성전세금을 내신 적이 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20) 과연 교회가 이렇게 신자들이 정부와 사회의 의무를 하지 않은 돈을 교회에 내는 것을 묵인하고 칭찬하고 축복하고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 일인가? 오히려 그런 신자들에게 정직하고 살고 국가와 사회에의 의무를 다하라고 가르쳐야 하는 것이 아닌가?

(21) 교회가 가진 재산으로 부동산 투기나 재산불리기, 이익을 위한 투자에 사용하는 것은 사회적으로나 영적으로 바람직한 것일까? 교회가 오히려 그러한 의도적인 투기나 졸부를 막아야 옳게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곳이 되지 않겠는가?

 

3. 적용

이제 저의 결론과 해결책을 말씀하려고 한다. 모든 부분을 저와 동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경을 믿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생각을 펴기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의 참 뜻과 정신을 받아들일 기본적인 생각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1) 초기 기독교공동체는 물질에 대한 변화된 인식과 행동을 보여주었다. (행 4:32-35)

(2) 십일조는 물질(돈)에 대한 명확한 신앙적인 입장을 정리하게 한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 자체를 문제삼을 수는 없다. 개인적인 결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가 십일조에 대해 바르게 가르치고 의무라거나 축복의 통로라는 식으로 오도해서는 안된다.

(3) 물질의 복은 축적의 복이 아니라 나눔의 복이다. 십일조를 드림으로 (다른 헌금들과 마찬가지로) 물질의 축복을 받겠다는 것은 율법적인 것이며 믿음의 세계는 아니다. 헌금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일을 위해 드리는 헌신이다. 헌금을 바르게 사용하는 경우, 신자들은 교회에 항의하고 바르게 사용해 나가도록 함께 노력해야 한다.

(4) 십일조는 강요나 의무가 될 수 없다. 교회가 헌금을 강요하거나 부담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교회의 욕심이다, (더 큰 교회 건물 건축, 기도원 건축이나 매매, 등)

(5) 예수께서 십일조를 언급하신 것때문에 교회가 십일조를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성경관이다. 예수님은 당시 율법에 정통하다는 유대인,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이 가진 율법안에서의 십일조의 바른 정신을 깨우쳐 주신 것이지, 오늘날 교회, 기독교가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우리는 율법이 아닌 믿음의 세계를 살아간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가진 것의 1/10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원하신다. 일부만(1/10) 교회에 바치고 나머지는 자의에 따라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것은 신자의 행동이 아니다. 우리의 전생활속에서 전부를 하나님의 의도에 맞게 써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헌금만 거룩한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그렇게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바른 청지기가 될 수 없다.

(6) 교회가 십일조를 비롯한 헌금을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믿음의 정도, 자신의 재산의 정도에 따라 자발적으로 헌신할 수 있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헌금은 목회적 입장(목회자와 유급직원들의 사례비, 건물 유지, 보수 등, 그리고 선교와 복음의 활성화, 구제, 사회적 기여)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어야 하며, 사치나 낭비, 과도한 욕망으로 운영되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 헌금의 이유가 축복이나 의무가 아니라, 우리의 공동체를 위한 기부이며, 헌신, 그리고 어려운 이웃과 교회를 돕는 연보라는 합리적인 이유를 사용해야 한다. 우리가 다니는 교회에 우리가 아니면 누가 경제적인 부분을 감당하겠는가? 교회가 어려움을 당한 교회들을 돕지 않으면 누가 교회를 돕겠는가? 교회의 일원이라면 당연히 그 부분을 감당해야 한다는 말이다. 다만 부담이 되지 않게, 형편대로 할 수 있게 자발성이 강조되어야 한다.

(7) 교회가 헌금의 종류를 늘린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헌금은 한 종류(감사)만 있으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자연히 하나님과 관련된 일에 재정을 부담하게 된다는 원리만 적용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교회는 영리기관이나 사업장이 아니다. 사랑이 전제된 조직체이다.

(8) 바른 교회는 성경과 복음을 바르게 전하는데 그 목적을 가진다. 목회자는 교회의 재정과 돈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한다. 교회의 재정관리는 믿음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성경적 재정관과 믿음의 도를 가진) 집사들과 전문가들이 맡으면 된다. 이 부분에서 목회자는 지시자나 운영자가 아닌 조언자 내지는 방향설정가 정도로만 참여하면 된다.

(9) 오늘날 교회들의 재정은 교회를 위한 사업(건축, 경비, 사례비, 운영비, 행사비, 인쇄비, 자체 활동비)으로 거의 지출되며, 외부적인 구제, 선교, 사회 장학 사업, 노인 복지, 낙태 반대 운동, 가정 살리기, 소년소녀가장 돕기 등에는 매우 적은 액수를 담당한다. 이는 성경적 헌금관이 부족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며, 교회의 상업화를 의미한다.

(10) 우리가 헌금을 드리는 목적은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발생하는 자발적인 행위여야 한다. 그리고 이로 인한 보상, 댓가, 혜택을 바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옳지 않은 생각이다. 헌금뿐만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어떤 일을 하는 것은 복음과 관련된 사역의 후원일 뿐이다. 그로 인해 축복이 온다던지, 상급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아는 자라 할 수 있겠는가!

(11) 교회의 헌금을 사용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청지기적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 어느 개인이나 교회의 재정 축적은 물론 재정에 관한 비리, 선한 의도가 아닌 재정의 사용에 대해 전능하신 하나님의 판단과 심판이 있다는 사실앞에 엄중해야 한다.

(12) 사람은 돈에 대해 매우 민감하다. 불신자들은 교회가 돈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매우 빠르게 반응하며 교회의 재정은 복음전도의 진정한 방해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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