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조는 무엇이며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2014. 11. 27. 20:43신학자료/9. 신앙고백서 모음

 

 

신조는 무엇이며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서론

요즈음 많은 교회에서 사도 신조를 고백하고 있고 신자들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이 사도 신조를 알고 있다. 그러나 사도 신조 이외에 다른 신조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교인들도 많은 것 같고 신조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더러는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여기서는 신조가 무엇이며 여러 가지 신조가 만들어진 배경과 신조들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신조(信條)를 뜻하는 영어 단어의 'Creed'는 라틴어의 'Credo'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Credo'라는 말은 'I believe'(나는 믿는다)라는 뜻이다. 신조는 믿음의 내용을 성서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즉 신조는 주제에 대하여 성경에 있는 내용을 정리해서 신앙의 내용을 밝히는 것이다. 이에 비교하여 교리는 성서의 진리나 교훈에 관한 신학적인 의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조와 교리는 다른 것이다. 신조는 교리적 의견보다는 주제별로 해당되는 성경 구절을 정리한 신앙 고백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신조는 시대적 필요에 따라서 그 시대에 고백해야 할 시대적 상황과 문제에 대해서 신앙적인 고백을 정리한 것이므로 시대마다 그 시대에 처한 문제에 대해서 적절한 성서적인 신앙고백이 새롭게 정리되어져 왔던 것이다. 과거 기독교 역사에서도 이단과 죄악과 세상의 악한 권세를 대적하며 싸우기 위해서 시대가 필요로 하는 당면 문제에 대해서 성서적인 신앙고백을 만들어 왔고, 이러한 신앙고백을 통해서 신앙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해 왔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신조는 여러 교파와 신앙 단체들의 믿음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으며 교파들이 발전함에 따라서 처음 교리들에 대한 보완과 수정의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해 왔던 것이다. 기독교회에 있어서 가장 오래된 신조는 사도 신조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예배 의식 가운데에 이 사도 신조와 니케아 신조와 아타나시안 신조를 공통으로 사용하고 있다. 동방 정교회는 니케아 신조만을 공식적인 유일한 신조로 채택을 했다. 그러나 동방 정교회는 후일에 서방 로마 카톨릭 교회가 니케아 신조에다가 추가한 성령이 성자에게서도 나온다는 필리오크(filioque)의 구절을 첨가하지 않았으므로 자기들만이 정통이라고 주장했다.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서 많은 개신 교회들이 신학과 교리 적인 많은 차이점들 때문에 새로운 신조의 작성을 필요로 했다.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은 루터의 소 교리문답서와 같이 세계적으로 루터 교인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대부분 초기 루터 교인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졌던 합의 신조(the Formula of Concord)는 받아들이는 범위가 좁아졌다. 영국 교회의 교리는 39개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안에 있는 장로교 신조 안에 요약되어 있으며, 유럽의 많은 개혁 교회는 스위스의 종교 개혁자 불링거에 스위스 신앙고백을 인정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칼뱅주의 자들은 하이델베르크 신앙 문답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한국의 장로 교인들은 사도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주로 따르고 있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만들어졌고 고백되어 왔던 여러 신조들을 살펴보면 기독교가 과거로부터 오늘까지 무엇을 믿고 고백해 왔는지에 대한 많은 지식을 얻게 된다. 역사적으로 교파마다 많은 신조들이 만들어져 왔지만 그 중에서 대표적인 신조들을 교파별로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는 각 신조들이 생긴 배경과 요점들을 정리했으며 지면 관계상 본문은 삽입하지 않았다.

사도 신조(2세기에서 5세기)

기독교 신조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것은 사도 신조(The Apostles' Creed)이다. 이 신조는 A. D. 200년경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세례 받는 후보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이 질문의 내용은 215년의 히폴리투스의 문답식 신조와 340년 마르셀루스의 고백적 신조와 404년 루피누스의 고백적 신조에 이르기까지 시대에 따라서 조금은 단어와 문장이 바뀌었지만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질문과 고백들이었다.

당신은 모든 것을 다스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하셨으며 본디오 빌라도를 통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올 것을 믿습니까? 당신은 성령과 거룩한 교회와 (신체의 부활)을 믿습니까?

세례 받기를 원하는 후보자들에게 이러한 질문들이 점차 설명 형식으로 바뀌면서 5세기에 이르러서는 현재의 것과 같은 공식적 신조가 되었다. 현재와 같은 사도 신조가 형성된 정확한 일자와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사도 신조는 로마 교회에서 채택되어 서방 기독교의 공통된 신조가 되었으며 현재까지 가장 널리 받아들여진 중요한 신조이다. 그러나 프로렌스 회의(1439년)에서 동방 교회 대표자들은 사도 신조에 대해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른다고 선언한 바 있다. 전설에 의하면 사도 신조 예수가 승천한지 열흘만에 성령의 감동으로 사도들이 만든 것이라고 하면서 권위를 주장했지만 발라(Lorenzo Valla)와 그 이후 학자들은 이것이 전설에 불과한 것임을 밝혔다. 그러나 이 사도 신조의 내용들이 사도들이 믿었던 신앙의 내용과 일치된 것임은 사실이다. 이런 면에서 사도 신조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초대 교회는 사도적 권위에 의해 모든 것이 받아들여졌다. 감독(bishop)은 사도적 후계자들(apostolic succession)이요, 정경(canon)은 사도적 문헌(apostolic writings)들이요, 신조(creed)는 사도적 가르침(apostolic teachings)이었다.

사도 신조 생긴 배경을 살펴보면 그 당시에 만연해 있었던 노스틱 이단 사상을 논박하기 위해 생긴 신조라고 할 수 있다. 노스틱 사상은 물질을 악하게 봄으로 신의 물질세계 창조와 예수의 육체 탄생을 부정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생긴 신조임으로 사도 신조 안에는 신의 천지창조와 예수의 육체 탄생과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살아나심을 신앙으로 고백함으로서 노스틱 이단 사상을 뿌리에서부터 근절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비록 초기의 것이 천지의 창조주라는 말이 없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속에는 이런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교회사에 있어서 초대 교부 이레네우스와 터툴리안은 이해했다.

로마 교회가 5세기까지는 고대 로마 신조(the Roman Symbol)인 사도 신조 세례에 있어서 공식적인 신앙고백으로 쓰다가 오도아케르(Odoaker)가 영도하는 오스트로 고트족(Ostro-Goths)이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 주의를 가지고 로마에 접근하자 고대 로마 신조인 이 사도 신조 대신에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는 니케아 신조를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것은 시대적 상황이 노스틱 이단 사상보다도 아리우스적인 이단 사상의 위협이 컸기 때문이다. 그 후 300 여 년 후에 8세기에 가서 다시 사도 신조가 세례와 예배 시에 사용되게 되었다.

니케아 신조(325년)

아리우스는 말씀 또는 아들로 표현되는 예수그리스도는 신의 피조물이며, 따라서 시작이 있고, 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에 대항해 325년 니케아에서 교회 대표자들이 모여 니케아 신조를 만들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의 주장이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성육신 신앙에 위배된다고 지적하고 아리우스와 논쟁에 들어갔다. 콘스탄틴 황제는 325년에 세계 교회 회의를 니케아에 소집했다. 안디옥 교회의 문제로 예루살렘에서 최초의 에큐메니칼 회의와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회의 이후 교회사에 나타난 명실공히 에큐메니칼 회의였다. 니케아 회의에서 결정된 니케아 신조에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 역사에 들어오셨으며 아들인 예수그리스도는 아버지인 하나님과 같은 본질이며,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참 하나님이며, 아버지로부터 나셨지만(begotten) 지음을 받지 않은(not created) 분이라는 내용을 신조의 골자로 결정했다. 이것은 예수를 하나님의 피조물로 단순한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아리우스의 이단적인 주장을 반박하고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했으며 318명의 감독들이 채택된 신앙고백에 서명하였다.

콘스탄티노플 신조(381년)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모인 에큐메니칼 회의에서 150명의 감독들이 모여 채택한 신조이다. 이 신조는 니케아 신조(325년)의 내용을 따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령의 완전한 신성을 고백한다. 이 신조의 원문에는 성령은 아버지에게서 나온다고 되어 있지만 서방 교회에서는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온다고 변경시켰다. 성령이 아버지뿐만 아니라 아들에게서도 나온다는 이러한 변경은 서방 교회의 신학, 특히 어거스틴의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수세기가 지날 때까지 로마에서도 신조의 일부로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589년 톨리도(Toledo) 회의에서 강하게 주장되었으며 점진적으로 신조에 첨가되었다. 이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아폴리나리우스의 사상을 정죄했다. 아폴리나리우스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을 때 사람의 이성이나 마음(영혼)이 차지하는 자리를 하나님의 이성이나 로고스가 대신 차지했다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이기는 하지만 완전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 안에는 사람의 이성이나 마음(영혼)이 없기 때문이다. 아폴리나리우스가 예수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강조한 점은 옳았지만 완전한 인성을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인간 예수 안에는 완전한 인간의 이성과 마음(영혼)이 있다고 함으로서 아폴리나리우스를 정죄하고 예수의 완전한 인성을 주장했다.

여기서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논쟁의 배경을 더 살펴보자. 고대 서방 교회의 로마와 더불어서 동방 교회의 두 신학적인 거점이었던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이 연합되어 있다는 것은 인정했다. 알렉산드리아의 시릴은 두 성품의 연합에 있어서 신성이 너무나 압도해서 인성은 뒷전으로 물러나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시릴의 제자들은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성은 신성에 삼켜져버려서 예수는 오직 하나의 성품(a divine-human nature)을 가지고 있다고 했으며 어떤 이는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Mother of God)라고 말했다. 이러한 입장에 대해 알렉산드리아는 지지했지만 안디옥은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이러한 차제에 안디옥 교회의 유명한 설교가 네스토리우스가 428년에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Patriarch)가 되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의 많은 교회 사람들이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믿는 데에 불만을 품고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안디옥의 가르침을 믿고 웅변을 다해서 안디옥의 입장을 대변했다. 이에 대해서 콘스탄티노플과 동방의 다른 곳과 특히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이것은 마리아와 그리스도의 명예를 빼앗는 것으로 보고 공격을 가했다.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시릴은 네스토리우스가 인간 예수만을 가르친다고 비난했다. 시릴이 자기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 황제와 로마 교황에게 편지를 썼으며, 네스토리우스도 로마 교황에게 편지를 썼으나 시릴이 더 외교적이었다. 결국 로마가 알렉산드리아를 지지하기로 했다. 네스토리우스는 신성과 인성 사이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둘로 나눈다는 오해를 받았으나 아주 부드러운 안디옥의 가르침의 형태를 따른 것으로서 오히려 시릴 보다 더 로마의 입장에 가까운 것이었다.

서방 로마 쪽은 동방의 안디옥이나 알렉산드리아처럼 갈라지지 아니하였고, 털툴리안과 암브로스와 어거스틴의 입장을 쉽게 따랐다. 이 견해가 곧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신성이 완전한 인성과 연합되어서 이 두 성품이 인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서의 황제들이 431년에 에베소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시릴과 그의 추종자들이 네스토리우스의 지지자들보다 먼저 도착해 회의를 개회하고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고 알렉산드리아의 입장을 지지했다. 네스토리우스의 지지자들은 늦게 도착해 회의를 개회하고 시릴을 정죄했다. 절차가 합법적이지 못했지만 황제나 교회가 시릴을 지지했다. 네스토리우스는 수도원에 들어가서 은퇴하였으나 많은 추종자들이 네스토리우스를 따랐고 제국 안에서는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페르시아인들은 그의 사상을 받아들였고, 7세기에 중국에까지 선교하게 되었다.

유티케스(Eutyches)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수도원의 나이 많은 대수도원장이었는데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에서 그리스도의 두 성품이 하나의 성품인 '하나의 신 인성'(One divine-human nature)으로 합쳐졌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시릴 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간 것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인 플라비안(Flavian)은 유티케스를 정죄했다. 유티케스와 플라비안이 다같이 교황 레오(Leo I)에게 호소하여 입장을 물었다. 레오는 이 답변에서 그리스도의 성품에 대한 서방 교회의 입장인 유명한 편지 '톰'(Tome)을 써 보냈다.

알렉산드리아는 시릴의 후계자 디오스코루스(Dioscorus)의 요구로 449년 에베소에서 회의를 소집하고 디오스코루스가 압도하는 분위기에서 레오가 보낸 편지 톰은 읽지도 아니하고 유티케스의 입장을 지지했다. 레오는 그것을 강도의 회의(Synod of Robbers)라고 불렀지만 황제는 그 결정을 지지함으로서 알렉산드리아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450년에 그 상황은 바뀌게 되었다. 데오도시우스(Theodosius II) 황제가 죽고 그의 누이 그의 누이 풀케리아(Pulcheria)와 그녀의 남편 마르시안(Marcian)이 제국의 권력을 잡게 되었다. 그들은 레오의 의견에 공감했다. 레오는 새로운 회의의 소집을 요구했고 황제는 451년 소아시아의 니케아에 가까운 칼세돈(Chalcedon)에서 회의를 소집해 600여명의 감독들이 참석했다. 레오가 보낸 대표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동쪽에서 온 감독들이었다. 그 회의는 털투리안의 기독론을 바탕으로 한 레오의 톰(Leo's Tome)을 채택했다. 그러나 그것은 털투리안의 사상을 넘어선 것이었다.

칼세돈 신조(451년)

니케아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말씀인 예수가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신성을 가진 분이라는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사람으로서의 인성을 가졌다는 문제와 그가 완전한 하나님이며 완전한 사람이었다면 그가 가진 신성과 인성의 두 가지 성품은 무엇을 의미하며 서로 어떤 모양으로 연합되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답변이 있었고 아폴리나리우스 주의는 인성을 부정함으로서 문제를 풀려고 했으며, 네스토리우스 주의는 양성의 조화를 깨뜨림으로서 문제를 풀려고 했으며 유티케스 주의자들은 인성을 신성 속에 흡수시켜버렸다.

칼세돈 회의에서의 기독론 논쟁의 해결은 고대 교회의 세 가지 신학적 갈래인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과 서방 기독교 신학의 통일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어느 한 갈래의 신학적인 입장만도 아니고 교회의 세 갈래의 입장을 포괄적으로 다 수용하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예수의 신성을 더욱 강조했고, 안디옥 학파는 예수의 인성 쪽을 더욱 강조했다.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Nestorius)는 예수그리스도의 양성은 독립과 구별이 되면서도 혼돈이나 분열이 없이 통일되어 있다고 주장했으나 신성의 우위를 고집한 시릴(Cyril)의 지지자들에 의해 정죄되었다. 그러나 신성 우세를 과격하게 주장한 유티케스(Eutyches)는 예수는 신성만을 가진 것이라는 단성론에 빠지고 말았다. 이러한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고 정통 신조를 확립할 목적으로 로마의 감독 레오(Leo)는 449년 6월 13일에 플라비안 황제에게 톰(The Tome)이라는 편지를 써서 보내어 논쟁의 해결을 위한 신학적 입장을 밝혔다. 451년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는 칼세돈에서 회의를 개최해 기독론 문제의 해결을 보았는데 니케아 회의의 신조 내용을 그대로 따르면서 로마의 감독 레오가 보낸 편지 톰의 내용을 수용해서 결정한 것이었다. 그 내용은 예수는 하나님과 같은 완전한 신성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와 같은 완전한 인성을 가지고 있지만 죄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신성은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성부에게서 나셨고, 그의 인성은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마지막 날에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 그리스도 안에는 두 완전한 성품인 신성과 인성이 있으며 이 둘은 한 인격 안에 연합되어 있다고 했다. 이 두 성품의 연합은 혼합되지 않으며(Unmixed), 변화되지 않으며(Unchanged), 나누어지지 않으며(Undivided), 분리될 수 없다(Inseparable)는 것이었다. 기능과 영역에 따라서 대립되지도 않으며, 각 성품의 구분은 연합으로 무효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에서 혼합되지 않고,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입장을 공격한 것이며, 나누어지지 않고,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은 안디옥의 입장을 공격한 것이었다. 알렉산드리아는 두 성품을 혼합과 변화를 통해서 두 성품을 합쳐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었고, 안디옥은 두 성품을 나누고 분리시킴으로서 따로 떼어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시릴의 추종자들과 유티케스는 그리스도가 언제나 두 성품을 가진다고 말하지 않으려고 했으므로 그들을 단성론자들이라고 불렀다. 단성론(Monophysites)은 모노피자이트(Mono=one, phusis=nature)라고 불렸으며 시리아와 팔레스타인과 이집트, 알메니아와 에티오피아에 강하게 퍼졌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론에 있어서 잘못된 사상이었다.

결국 기독론 논쟁에 있어서 동방 교회는 오랜 논쟁 끝에 칼세돈 회의에서 서방 교회의 입장을 받아들임으로서 기독론 논쟁의 큰 부분은 일단락되었다.

아타나시안 신조(Athanasian Creed)

서방 기독교에서 널리 사용된 신앙고백의 하나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아타나시우스의 이름을 딴 것이지만 실은 많은 신학자들의 작품으로서 4세기 후반이나 5세기 초반에 이루어진 것 같다. 451년 칼세돈 신조의 신학적 입장과 일치하며 542년경에 알레스의 케사리우스(Caesarius of Arles)에 의해 신조라고 처음 언급되었다. 이 신조는 예수그리스도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에 관해 사도 신조 니케아 신조에서도 간략하게 언급된 것처럼 삼위일체와 성육신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이다. 이 신조의 시작과 마지막은 구원을 받기 위해 신조를 믿는 필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13세기에는 아타나시안 신조가 사도 신조 니케아 신조와 동등한 권위를 인정받기도 했다. 이 신조는 로마 카톨릭 교회와 성공회에 의해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종교개혁 지도자들은 이 신앙고백을 인정했을지라도 많은 개신교회들은 이 신조를 오늘날에는 사용하지 아니하고 있으며 어떤 교회에서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17세기 이후에 러시아 정교회는 이 신조를 예배 의식의 일부로 받아들였으나 다른 동방 교회는 일반적으로 믿음의 표준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

오렌지 회의(529년)

인간론은 어거스틴(354-430) 신학과 그의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통해 교회적 관심의 전면에 부상했다. 논쟁의 요점은 아담의 범죄로 인간의 의지와 인격의 손상의 범위가 어디까지이며 인간성 회복에 있어서 신의 은혜의 역할의 범위가 어디까지이냐는 것이었다. 오렌지 회의에서는 반(半)펠라기우스 주의자들(Semi-Pelagians)을 반대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죄로 말미암아 아주 약화되었으므로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믿을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다. 은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필요하며 이 은혜는 유일한 길이라고만은 할 수 없지만 세례에 연결되어 있다. 이중 예정은 거부되었고, 거절할 수 없는 은혜는 빠져 있다. 결국 온건한 어거스틴 주의를 채택했다고 볼 수 있다.

3차 콘스탄티노플 회의 (제6차 에큐메니칼 회의, 681년)

451년의 칼세돈 회의에서 기독론 논쟁은 대체로 종결되었으나 알렉산드리아 학파 측에서는 불만을 가졌다. 그리하여 553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제5차 에큐메니칼 회의를 소집해 칼세돈의 입장을 알렉산드리아 학파들이 납득하도록 재해석하는 선언문을 채택한 바 있었다. 기독론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성품(性品, Nature)에 관한 문제는 자연적으로 그리스도의 의지(意志, Will)에 대한 문제로 연장되었다. 그리스도의 의지에 대한 문제는 그리스도 안에 의지가 하나냐? 둘이냐? 하는 것이었다. 638년에 헤라크리우스 황제는 단성론자들의 입장을 따라서 그리스도는 하나의 의지(신의 의지)를 가졌다고 했다. 그러나 649년 로마 교회는 칼세돈의 입장을 따라 그리스도는 두 의지(신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를 가졌다고 했다. 때마침 이때 회교도들이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에서 동로마 제국을 위협했으므로 동로마제국은 기독교 제국인 서방 로마와의 타협과 협조가 필요했다. 680년과 681년 사이에 동로마제국 황제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제6차 에큐메니칼 회의의 개최를 요구하고 거기서 로마 교회의 견해를 승인하고 그리스도는 두 가지 의지를 가졌으며 그의 인간적 의지는 그의 신적이고 전능한 의지에 복종해서 따른다고 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자신의 뜻을 행하기 위함이 아니고 다만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함이라"고 하신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는 두 의지가 있고, 육신의 의지는 신적인 의지에 복종해서 따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칼세돈의 결정을 재확인하고 그리스도는 하나의 의지만이 있다는 단의론(單意論, Monothelitism)을 배격한 것이다. 이로서 그리스도의 성품과 의지에 대한 교리 적이고도 신학적인 긴 토론은 결론을 짓게 되었다.

성상논쟁(聖像論爭, The Image Controversy), 콘스탄티노플 노회(The Synod of Constantinople, 753년)

예수 그리스도의 성상의 찬반론 논쟁은 726년 소아시아 출생 황제 레오 3세의 칙령에서 비롯되었다. 레오 황제의 칙령의 의도는 발칸 반도를 중심 한 동방의 저속한 미신으로 변한 기독교를 정화시키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레오의 칙령은 물의를 일으키고 반란을 일으켰으며 교황 그레고리 2세는 레오의 칙령을 정죄했으며 이태리의 여러 도시들도 반발을 일으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753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노회가 소집되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분리될 수 없으므로 그리스도를 단순한 인간의 모습이나 어떤 다른 모습으로든지 표현하는 성상(聖像, ikon)을 금지시키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유일하게 표현하는 방법은 성만찬 예식에 나오는 떡과 포도주뿐이며, 이 형상(Form) 또는 이 형식(Type)외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선택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성상논쟁(聖像論爭, The Image Controversy), 니케아 회의 (제7차 에큐메니칼 회의, 787년)

콘스탄티노플 노회(753년)의 성상 금지 결의는 성상을 안치하고 그 앞에서 경건한 생활을 실천하던 서방교회 신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787년 니케아에서 제7차 에큐메니칼 회의를 소집하여 753년에 있었던 콘스탄티노플 노회의 결정을 무효화하고 성상을 숭배하거나 예배할 수는 없지만 존경하고 절하며 입맞출 수는 있다고 결의했다. 니케아 회의의 결정을 보면 생명을 주는 귀중한 십자가의 형상과 마찬가지로 그림으로나 모자이크로나 다른 어떤 적당한 재료로서 만들어진 존경할 만한 거룩한 성상들도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에 안치되어야 하며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와 천사들과 성자들에 대한 형상들이 예술적인 모습으로 제시되면 보는 사람들이 신성에게만 드릴 예배를 성상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 형상의 원형을 쉽게 기억하여 존경을 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상들에게 분향하며 촛불을 켜는 것은 고대의 경건한 습관에 따라 허용될 수 있으며 성상들을 높이고 존경하는 것은 성상들이 묘사하는 대상을 높이고 존경하는 것이 된다는 내용을 결정했다.

동방정교회와 서방 로마 천주교가 다 같이 이 결정을 수용했다. 이러므로 787년의 제7차 에큐메니칼 회의를 끝으로 기독론 문제는 그리스도의 성상 문제에까지 종결을 고하게 되었다. 그러나 815년에는 양 교회가 성상 문제로 다시 분쟁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기독론 논쟁은 460년 동안 교회와 제국의 정치적 쟁점이 되어 왔으며 7차에 걸친 모든 회의가 황제들에 의해 소집되었으며 결국 황제들 자신이 신학자들이 되고 신학적이고도 교회적인 칙령을 내렸던 것이다. 이 기독론 논쟁은 니케아에서 시작해 니케아로 끝났으며 모든 회의가 동방교회가 위치한 동쪽에서 개최되었지만 최종 결정은 서방교회의 중심인 로마교회의 견해가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각기 중요한 회의의 요점을 보면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다’라는 것이었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다’라는 것이었으며, 431년 에베소 회의는 ‘그리스도의 인격은 하나다’라는 것이었으며, 451년 칼세돈 회의에서는 ‘그리스도의 본성은 둘이다’라는 것이었다.

제4차 라테란 회의 (중세 로마카톨릭 교리, 1215)

1215년 제4차 라테란 회의는 중세의 회의들 중 가장 큰 것이었다. 이 회의는 중세의 교황들 중 가장 권력이 막강했던 교황 인노센트 3세가 성지를 회복하며 전체 교회의 개혁을 위해 소집한 것이다. 이 회의에서 결정된 많은 규칙들 가운데서 규칙1은 중세 로마 카톨릭교회의 신학을 함축하여 정확하게 요약한 것이며 그 중에는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이 공식 승인을 받았으며 사제의 권한이 강조되어 있다. 믿는 자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가 있으며 이 교회 밖에서는 누구에게도 전혀 구원이 없다. 이 교회 안에서 사제와 희생 제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며, 그의 몸과 피가 떡과 포도주의 외형 아래 있는 제단의 성례(Sacrament) 안에 실제로 담겨져 있으며 신적인 능력으로 떡은 그의 몸으로 포도주는 그의 피로 본질이 변화(Transubstantiation)되며, 이렇게 됨으로써 우리의 연합의 신비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며 그가 우리에게서 받은 것을 우리가 그에게서 받는 것이다. 규칙21은 성인이 된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적어도 일년에 한번씩 교구 사제에게 모든 죄를 고해 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만일 다른 교구의 사제에게 자기의 죄를 고백해야 할 합당한 이유가 있는 사람은 먼저 자기 교구 사제의 허락을 받아야 하며 사제는 죄인의 고백을 폭로하지 말아야 하며 고백을 받는 자리에서도 그 죄인이 숨기고 있는 죄를 캐내려고 시도하면 사제 직분을 파면하고 수도원에 보내서 여생을 참회로써 보내도록 할 것을 선포했다.

우남 상탐(Unam Sanctam, 1302년)

중세 서양 역사에서 교회 권력과 국가 권력의 관계는 중요한 문제였다. 동방 비잔틴 제국에서는 일찍부터 동방교회가 황제의 권력 아래서 자유와 자율을 상실하고 국가 교회 형태로 발전했다. 그러나 서방 로마교회는 황제의 권력의 간섭으로부터 멀어져서 자유롭게 발전했다. 이러한 전통 속에서 서방교회는 신성로마제국 안에서도 세속 권력의 교회에 대한 간섭을 완강히 배격하였다. 그러나 때로는 세속 권력이 교회에 간섭하려는 때도 있었고, 때로는 교회 권력이 세속적인 세계에 깊이 관여하려 할 때도 있었다. 봉건제도 하에서 봉건영주나 귀족이 자기 영지 안의 교회와 성직자를 마음대로 다스리거나 성직자의 임면을 주관하는 폐단도 있었다. 이러한 폐습을 교황청은 늘 반대했다. 교황은 황제나 국왕에게 왕관을 씌워 주는 대관식 등과 십자군 전쟁에 군대를 동원하는 등 세속 권력에 깊이 관여하는 일들이 많았다. 중세시대에 교회와 국가는 양자의 영역과 권한 사이에서 늘 이해관계의 충돌이 많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교황 보니페이스(Boniface) 8세와 프랑스의 왕 필립(Philip) 4세의 충돌이었다. 이때 교황이 교령으로 발표한 것이 유명한 '우남 상탐'(Unam Sanctam)이다. 이 교령에서 교황은 '하나의 거룩한 교회'의 개념을 말하면서 국가도 이 교회 안에 있고 교회의 지도를 받아야 된다고 했다. 이것은 모든 피조물은 구원을 얻기 위해 반드시 로마 교황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그 중에는 영적 권세와 물질적 권세가 있다. 영적 권세는 교황과 사제들에 의해 행사되며, 물질적 권세는 황제와 국왕에 의해 행사되되 영적 권세를 가진 교황과 사제들의 허락과 뜻을 따라 행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서에 나오는 두 자루의 칼이 있는데, 하나는 영적인 칼이요 하나는 물질적인 칼이다. 영적인 칼은 사제들에 의해 사용되어야 하고, 물질적인 칼은 왕과 장군들에 의해 사용되어야 하되, 사제의 뜻에 따라서 또 사제의 허락을 받아서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교황은 황제를 판단하고 심판할 수 있지만 교황을 심판하는 것은 황제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옛 사도의 증언대로 '영적인 사람이 모든 것을 심판할 수 있되 아무에게서도 그는 심판을 받을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플로렌스 회의 (7곱 가지 성례의 교리, 1438-45년)

동방교회인 희랍정교회와 서방교회인 라틴교회(로마 천주교)사이의 분열을 다룬 플로렌스 회의는 성례에 대한 의미 있는 표현을 했다. 이 회의는 알메니아 교회의 대표자들과 같이 만나서 성례에 관한 중요한 가르침의 칙령(decree)을 발표했다. 이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중세 신학의 성례에 대한 교리의 요약인 7가지 성례를 말하고 있다. 즉 세례(Baptism), 견신례(Confirm‍!ation), 성만찬(The Eucharist), 고해성사(Penance), 종부성사(Extreme Unction), 성직 안수(Orders), 그리고 혼배성사(Marriage)이다. 세례를 통해 영적으로 거듭나며, 견신례를 통해 은혜 안에서 자라며 믿음 안에서 힘을 얻고, 성만찬을 통해 신령한 양식을 공급받는다. 만일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영혼에 병이 생기면, 회개를 통해 영적 치료를 받을 뿐만 아니라 육적으로도 치료를 받고 기름을 바르는 종부성사를 통해 영혼의 유익을 얻게 된다. 혼배성사를 통해 육적으로 자랄 뿐만 아니라 성직 안수를 통해 교회는 다스려지고 영적으로 자라게 된다. 위의 7가지 성례 중 세례와 견신례와 성직 안수는 같은 사람이 한번만 받는 것이요 다른 성례는 자주 받는 것이다.

트렌트 회의(Council of Trent, 1545년-1563년)

로마 천주교에 의해 19차 에큐메니칼 회의로 불리는 회의이다. 교황 바오로 3세에 의해 소집되어 교황 특사의 사회로 모임을 가졌다. 1차에서 8차까지의 모임은 1545년 12월 13일부터 1547년 3월 11일까지 트렌트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황제의 반대로 볼로냐(Bologna)로 옮겨서 1547년 4월 21일부터 1548년 1월 23일까지 9차에서 10차까지의 모임을 가졌다. 그러다가 다시 트렌트로 장소를 옮겨서 1551년 5월1일부터 1563년 12월 4일까지 11차에서 16차까지의 모임을 가졌다. 교황과 황제 측의 갈등으로 모임 절차가 상당히 느리게 진행되었으며 개신교 국가에서도 1551년 대표자들을 보냈으나 개신교 측의 주장은 교황 측의 우세로 좌절되고 말았다.

트렌트 회의에서는 개신교 신학에 도전하는 결정들을 내렸다. 이 회의에서 결정한 주요 결정들을 살펴보면, 구약성경 중 개신교가 정경에서 제외시킨 외경들, 즉 토비트(Tobit), 유디트(Judith), 지혜서(Wisdom), 집회서(Ecclesiasticus), 마카비서 상과 하(I and II Maccabees)를 구약성경에 포함되었다, 동시에 사도들이 그리스도나 성령으로부터 받은 것으로서 문서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교회가 지켜 온 전통에 대하여도 같은 존경을 해야 된다는 것이 주장되었다. 또한 라틴어 번역인 불가타(the Vulgate)만이 권위 있는 성경이라고 했다. 의롭게 된 열매로서 선행이 강조되었으며 7가지 성례가 상세하게 설명되었다. 성만찬에 있어서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이 주장되었으며 성직에 있어서 주교들은 사도들의 후계자들이라고 했다. 이 회의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전통적인 교리들을 다시 확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로마 천주교에 있어서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로마천주교회 교리(성모의 무흠 수태, 1854년)

로마천주교회의 교황 비오 9세는 1854년에 성모 마리아의 무흠 수태 교리를 그의 교령에서 발표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타고난 원죄도 없음을 천명한 것이다. 이 교령은 근대에 로마 천주교가 발표한 중요한 교리적 선언의 하나이다. 로마천주교회는 일찍부터 성모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theodokos)라고 불러 왔다. 5세기에 안디옥 교회의 감독 네스토리우스는 이에 반대하고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말 대신에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온당하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는 큰 신학적 논쟁이 되고 네스토리우스는 이단으로 규탄을 받았다. 일찍부터 서방 로마 천주교는 동정녀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불렀으며 성모 마리아에 대한 존경심은 민간신앙의 형태로 발전하였고 결국 로마 교황은 그것을 교리화했다.

로마천주교회 교리(동정녀 마리아의 승천 교리, 1950년)

로마천주교회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존경은 더욱 깊어져서 이제는 그의 승천을 교리화했다. 이 교리는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의 선포로 온 세계에 알려졌으며 개신교도들은 이 교리는 성서적 근거가 없다고 반박하고 비판하면서 경악했다. 그러나 오래 동안 성모 마리아에 대한 존경과 경건을 지켜 온 천주교 신도들은 당연한 교리로 받아들였다.

로마천주교회 교리(제2 바티칸공의회 헌장, 1963년)

1963년 12월부터 1965년 12월초까지 교황 바오로 6세는 제2 바티칸공의회를 소집해 로마천주교회가 현대 사회에서 선교하고 가르치는 데에 필요한 제도와 신학과 교리적인 문제들을 다루었다. 이들 중에는 성모 마리아 공경에 대한 것과 교회 일치 운동에 대한 것을 포함하여 많은 문제들을 다루었다.

종교개혁과 개신교 신앙고백

종교개혁은 신조 형성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를 예고했다.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주장하는 개신교는 성경 외에 그 어떤 신조도 절대적 권위를 가지거나 오류가 없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개신교의 여러 교파마다 제각기 신조를 형성하여 많은 신조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것은 개신교의 각 교파마다 은혜에 대하여, 믿음에 대하여,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성례에 대하여 각기 해석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 Church)는 서방 로마 카톨릭 교회(Roman Catholic Church)가 16세기에 경험한 것과 같은 종교개혁이 없었지만 서방 로마 카톨릭 교회는 종교개혁을 통해 수많은 개신교회로 갈라지게 되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갈라진 개신교의 갈래를 대체적으로 크게 구분해 보면 루터교회(Lutheran Church)와 개혁교회(Reformed Church), 성공회(Anglican Church)와 재세례파(Anabaptist) 등으로 볼 수 있다. 16세기는 개혁자들의 종교개혁 시대였으며 17세기는 개혁자들의 후계자들이 그들의 선구자인 16세기 개혁자들의 신앙을 교파별로 재해석하여 신조를 형성한 신조 주의 시대라고 할만큼 많은 신조들이 만들어 졌다. 이러한 신조의 수립은 비단 개신교도들뿐만 아니라 로마 카톨릭교회도 마찬가지였다. 트렌트 회의에서 교리적인 정비를 다시 가다듬고 그 이후에도 제 2 바티칸공의회 등을 통해 신조를 보충했던 것이다.

루터교 신앙고백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 1530년)

루터교 신앙고백은 독일에서 루터와 멜랑히톤에 의해 작성되었다. 루터교 신앙고백은 루터의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루터의 강조점을 반영하고 있다. 루터교 신조는 고대 교회의 니케아와 칼세돈의 신학과 사도 신조 아다나시우스의 신조를 그대로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이루어져 있다.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은 1530년에 아우그스부르크의 국회에서 찰스 5세에게 제출하기 위해 루터의 승인 하에 필립 멜랑히톤(Philip Melanchthon)에 의해 작성되었다. 이 당시 루터교 신자들은 로마 천주교편에 있는 엑크와 그의 추종자들의 신학적인 공격과 과격한 개혁파들에게 쉽게 휩싸일 지경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우그스브르크 신조는 28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반 21개조는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한 루터의 교리를 요약하고 있으며, 후반부는 성찬식에서 평신도들에게 떡은 배분하면서 잔을 거부하는 것과 사제들의 결혼을 반대하는 잘못과 그에 대한 처방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아우그스부르크 신조는 온건하고 보수적이다. 그러면서도 루터교의 기본 교리를 명확히 밝혔고, 특히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이 신조는 한편으로는 역사적 중요성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본질적인 장점 때문에 모든 루터교 신조들 가운데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조가 되었다. 아무튼 이 신조는 로마 카톨릭교회 신조 외에 국회에서 공인된 최초의 것이었으며 1530년 6월 25일 황제 칼 5세 앞에서 독일어로 낭독되었다. 루터가 한때 쯔빙글리(Zwingli)와 화해하기 위해 만든 15개항의 신조들이 있었는데 그것이 루터교회의 기본적인 신조를 이룬 비텐베르그(Wittenberg) 신학자들이 작성한 슈바바하 신조를 형성했고, 이것이 확대되어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으로 발전했다. 아무튼 이 신앙고백은 루터교회가 받는 오해를 풀어주며 교회 생활의 개혁의 필요성과 개신교회의 신앙을 천명한 것이었다. 사제들의 독신에 대해 만일 엄격한 결혼 금지법을 더 오래 견지한다면 장래에는 사제와 목사가 부족하게 될 것이며 정욕으로 불타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전 7:9)고 했다. 고해에 대해서도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죄의 소상한 설명을 강요할 필요가 없으며 크리소스톰의 말을 빌어서 공중 앞에서 자신의 과오를 폭로하거나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들을 고발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너의 길을 주 앞에 보이라'고 말한 예언자의 말씀에 복종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참된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양심적으로 고하면 된다고 했다. 로마 천주교의 고해성사는 교회가 만든 것이지 성서의 가르침은 아니라고 했다.

말틴 루터의 소교리 문답서 (1529년)

루터의 소교리 문답서는 신학적으로 무지한 기독교인들이 많다는 그의 깊은 관심에서 나온 것이다. 기독교의 교훈에 대한 신자들의 무지는 목사들의 태만과 가르칠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경우가 많음을 알았다. 루터는 교역자의 가르치는 의무를 강조하고 교리의 가르침을 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불신자라고 말했다. 그는 처음에는 동료들에게 문답서를 만들 것을 요구했으나 결국은 자신이 이 일을 맡았다. 그는 이 교리문답을 작성하기 위해 그 내용들을 제목으로 잡아 설교함으로 이 일을 준비해서 1529년에 출판했는데 사람들이 크게 존중하여 '평신도들의 성경'(The Layman's Bible)이라고 불렀다. 루터는 종전의 교리문답서처럼 사도 신조 십계명과 주기도에 대한 강해를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다가 세례와 고백, 성례전, 그리고 아침기도와 저녁기도, 가정의 식탁의 은혜와 기독교인의 의무를 첨가했다. 가장이 가정에 쉽게 가르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합의 교리서(The Book of Concord)

1580년에 출판된 신앙고백서를 수집한 책으로서 루터교회에 의해 인정받고 있다. 이 책에는 세 개의 에큐메니칼 신조인 사도 신조와 아타나시안 신조와 니케아 신조가 들어 있다. 그리고 여섯 개의 특별한 루터교회의 신앙고백이 들어 있다. 즉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의 변증, 슈말칼트 신조, 루터의 대소(大小)교리문답, 합의신조(The Formula of Concord), 그리고 일부 교부들의 글 등이다.

합의신조는 1580년에 나타난 것인데 독일연방의 86개 주에서 승인받은 것이다. 그 내용으로는 다음과 같은 신학적인 이슈의 조항들이 포함되어 있다. 즉 원죄, 자유의지, 성만찬, 예정론, 신앙의 규칙과 신조, 의롭게 되는 것, 선행, 율법과 복음, the third use of the law, 그리스도의 품격, 그리스도의 지옥에 내려가심, 그리고 이단과 분파주의에 관한 부록을 포함해서 교회의 풍속 등이다. 이 합의교리서(the Book of Concord)의 출판은 루터교 운동의 분파적 성격을 치료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였다. 이 책은 모든 곳에서 구속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루터교 정통주의를 위한 기본서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개혁교회의 신조들(Reformed Creeds)

개혁교회란 말은 쯔빙글리와 칼뱅에 바탕을 둔 종교개혁 교회들을 말한다. 어떤 면에서는 모든 종교개혁 교회들이 다 개혁교회이지만 더 엄격하게 말하면 쯔빙글리와 칼뱅에 관계되는 교회들을 말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교회개혁에 있어서 이들 교회들이 루터교 보다 더 급진적이었기 때문이다. 개혁교회는 상당히 넓은 지역과 여러 세기에 걸쳐서 교파마다 개혁 신조를 만들었기 때문에 60개 이상의 많은 신조들을 만들었다고 추정되지만 정확하게 헤아릴 수는 없다. 이 다양한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은 단순한 역사와 지리의 산물이 아니고 심지어 교리의 우상화까지 포함해서 모든 우상에 열정적으로 반대하는 개신교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모든 신조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있으며, 그 어떤 신조도 절대적이라고 여겨질 수 없다. 이러므로 개혁신학자들은 안도감을 가졌다. 불링거(Bullinger)와 유다(Judae)는 성경을 벗어난 그 어떤 신앙규칙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으며 우리가 존중하는 것은 사실 자체와 진리이지 표현되는 말이 아니라고 했다. 또한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자기의 교회를 위해 적당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자유를 인정해야 하며 우리 자신도 distortions에 대항해서 이러한 신앙고백의 참된 의미를 수호하는 데에 이 자유를 이용해야 한다고 했다. 개혁교회의 많은 신조들 가운데서 중요한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제일 스위스 신앙고백(The First Helvetic Confession, 1536년)

스위스의 개혁교회에서는 여러 가지 지역적인 신앙고백들과 신앙문답들이 나왔으나 공동 신앙고백으로서 처음 나온 것이 스위스 신앙고백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1536년 스위스의 바젤, 쯔리히, 베른 등 개혁 운동이 추진되고 있던 도시의 지도자들의 합의에 따라 추진되었다. 1536년 바젤에 모여서 신앙고백의 초안자로 불링거(Bullinger), 그리네우스(Grynaeus), 미코니우스(Myconius) 등 몇 사람을 지명하여 이들이 작성한 것을 여러 도시의 개혁 운동가들이 검토하여 서명했으며 자연적으로 개혁교회의 사상을 담고 있었다. 처음에는 라틴어로 쓰였다가 나중에는 독일어로 번역되었다.

하이델베르크 신앙 문답 (Heidelberg Cathechism, 1563년)

1546년 루터가 죽던 해에 하이델베르크(Heidelberg) 또는 파라티나테(Palatinate) 시에서도 종교개혁이 단행되었다. 이 도시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이 있었고 이 대학에는 멜랑히톤이 두 번이나 교수로 초청된 적이 있었다. 이 도시에는 루터파, 칼뱅파, 쯔빙글리파에 속한 사람들이 있었고 또 멜랑히톤의 제자들도 있었다. 이들 사이에서 신학 논쟁이 치열했고 교회 성단 앞에서 난투도 벌어졌다. 이 문제를 조정하기 위해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에게 위촉해 공동 신조인 하이델베르크 신조를 만들게 되었다. 이 신앙문답 안에는 칼뱅의 제네바 신앙고백과 다른 개혁파 사상이 크게 반영되었으며 멜랑히톤의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멜랑히톤은 칼뱅의 신학사상과 상통하는 점이 많았다. 이 신조 내용에는 격론이 일기 쉬운 성찬론에 있어서는 번거로운 이론은 극력 피하는 등 온건하고 중용을 취한 것이어서 교리 논쟁은 어느 정도 조정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널리 애용되었다. 파라티나테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이 신조 작성을 위해 멜랑히톤이 별세하기 수개월 전에 자문을 요청했고, 멜랑히톤은 온건한 조언을 했으며 그의 두 젊은 제자 쯔카리아스 우르지누스(Zacharias Ursinus)와 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Caspar Olevianus)를 시켜 초안을 만들게 했다. 우르지누스는 칼뱅, 베자, 불링거와도 친분이 있었고, 올레비아누스는 제네바와 쯔리히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므로 개혁파 신학에 정통했다. 그러므로 이들이 작성한 하이델베르크 신앙문답의 기조는 개혁교회 신학을 많이 반영한 성공적인 작품이었다. 대개 로마서에 근거하였으며 회심과 신앙과 사랑을 골자로 하였다. 제1부에서 인간과 죄의 비참함에 대해 설명하고 제2부에서 어떻게 구속을 받았는지와 제3부에서 이러한 구원에 대해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를 설명했다. 1563년 1월에 출판되어 11월에 그곳의 '교회 규정'안에 편입되었다. 이것은 미국의 화란과 독일 개혁교회의 표준적인 신조이다.

제2 스위스 신앙고백(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 1566년)

이 신앙고백은 처음에는 쯔리히에서 쯔빙글리의 후계자인 불링거의 개인적인 신앙고백으로 써졌다. 1566년 프리드리히 3세가 그의 개혁신앙을 정당화할 필요가 있어서 불링거에게 신앙고백 작성을 요청하면서 공식화되었다. 동시에 이때 스위스 교회는 공동으로 고백할 신앙고백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터였다. 프리드리히는 불링거가 제출한 신앙고백에 대단히 만족했고 스위스 교회는 이를 약간 수정해서 비준했으며 이것은 1566년 3월 12일에 쯔리히에서 출판되었다. 이 신앙고백은 개혁교회가 자리를 잡고 신학적인 성숙함에 도달했을 때에 나온 것으로서 개혁신학을 온건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1560년에 나온 스코틀랜드 신앙고백(Scots Confession)과 유사한 것이지만 벨기에 신앙고백(Belgic Confession)이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s)과 같은 정교함은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신조는 예배와 교회 질서, 특히 목회와 결혼 생활의 질서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 신앙고백은 개혁교회 신조로서 가장 널리 수용되었다.

제네바 교회 신앙 문답서(1542년)

1536년 3월에 바젤에서 '기독교 강요'의 초판을 발행한 칼뱅은 그해 7월에 파렐(Farel)의 간청을 받아들여 같이 제네바에서 종교개혁 운동을 했다. 1537년 2월에 파렐과 칼뱅은 제네바 교회개혁을 위해 '제네바 교회에서 사용할 신앙의 훈련과 고백'이라는 신앙문답서를 발표했다. 이것은 기독교강요와 유사한 순서로 짜여졌다. 칼뱅과 파렐은 신앙고백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성찬을 베풀 수 없다는 강경론을 폈으나 반대가 너무 심했고, 철저한 종교개혁을 추진하다가 반대세력의 반항으로 제네바를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1541년 9월에 칼뱅이 제네바의 초청을 다시 받고 돌아와서 1542년에 새로운 구상을 가지고 문답형식으로 만들었다. 처음에는 프랑스어로 썼고 1545년에는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다시 수정을 했다. 이것이 '제네바 교회 신앙문답서'이다. 1548년 칼뱅은 이것을 55 성일로 나눠서 주일마다 저녁 예배 시간에 설명하고 가르쳤으며 이 신앙문답서의 내용 중심은 칼뱅의 신앙을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예배에 있다. 이것으로 그는 제네바 교회의 아동들을 훈련했다. 이 신앙문답서는 '요리 문답서'라고도 불리며 목사와 아동이 문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문답서는 신앙과 율법과 기도와 성례전(하나님의 말씀) 등 크게 네 부분에 대해 373개의 문답형식으로 되어 있다. 개혁교회 교회교육의 전통은 이렇게 하여 시작되었으며 칼뱅은 제네바 교회에서 종교교육에 성공했던 것이다. 소요리문답은 1536년에 프랑스에서, 대요리문답은 1541 또는 1542년에 프랑스에서 출판되었다. 이 두 요리문답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고 개혁교회의 표준으로 인정되었다.

프랑스 신앙고백(1559년)

칼뱅은 만년에 자기 조국인 프랑스에서 소수파로 박해받고 있는 개신교회를 위해 원숙한 신학과 개혁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신앙고백을 준비한 것이 프랑스 신앙고백이다. 칼뱅의 제자 산데이우(De Chandieu)가 개편했으며, 이것이 1559년 파리 노회에서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칼뱅의 동역자이며 후계자인 베자(Beza)가 1561년 프랑스 왕 샬 9세에게 발송했다. 1571년에는 프랑스의 개신교회 전국 총회가 로쉘에서 모였을 때 이것을 정식으로 승인했으므로 '로쉘 신앙고백'이라고도 부르지만 통용되는 명칭은 '프랑스 신앙고백' 또는 '갈리칸 신앙고백'이다. 프랑스는 강력한 로마 천주교 국가였기 때문에 개신교도들은 늘 심한 박해를 받았다. 앙리 4세가 왕이 되었을 때 개신교도들을 동정하고 이 신앙고백을 공인하게 되었다. 프랑스어로 써진 이 신앙고백은 칼뱅의 신학을 기조로 했으며 16세기에 작성된 유명한 신앙고백 가운데 하나이다.

내용으로는 하나님과 그의 계시, 인간과 그 죄, 예수 그리스도, 구원 사업, 교회와 그 성격, 교회와 그 조직, 성례전, 정부의 권위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스코틀랜드 제 1 신앙고백(1560년)

이것은 존 낙스(Knox)와 그의 선배 및 동료들이 스코틀랜드에서 로마천주교의 세력과 투쟁하면서 개혁운동을 추진할 때에 존 낙스가 개혁 원리로서 만들어서 사용하던 것으로서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신학과 신앙을 잘 표현한 것이다. 낙스는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칼뱅 신학과 개혁운동을 직접 배운 사람으로서 칼뱅의 개혁사상을 잘 이해한 사람으로서 이 신앙고백서에서 칼뱅의 사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로마천주교와 대결하면서 참된 교회의 표지로서 복음의 설교와 성례전의 올바른 집행과 교회적 훈련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1560년에 된 이 신앙고백을 제 1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유는 1580년에 제 2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신앙고백이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이 제 2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에서는 로마 천주교의 트랜트 회의의 결정들을 강력하게 반박하면서 발표된 것이다.

그러나 1648년 스코틀랜드 개혁교회가 영국의 칼뱅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국회에서 정식으로 공인하여 전국 교회에 시달하여 표준적인 신앙고백으로 삼게 된 후로는 낙스의 신앙고백은 종전과 같은 권위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벨기에 신앙고백(The Belgic Confession, 1561년)

칼뱅의 개혁교회 운동은 벨기에와 네덜란드 지방으로 번져나갔다. 이 벨기에 신앙고백(The Belgic Confession)은 기 데 브레이(Guy De Bres)가 이 지방의 개혁교회를 위해 작성한 것인데, 그는 1567년에 순교했다. 이 신앙고백은 개혁자에 대한 심한 박해에 대항해 싸운 신앙인들의 신앙과 정신을 살린 것이며 내용도 신앙의 여러 분야를 훌륭하게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개혁교회 신앙고백 중에서 아주 우수한 것 중의 하나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 신앙고백은 1571년 엠덴(Emden) 개혁교회 노회에서 채택되었고 1619년에는 도르트(Dort)에서 모인 전국 총회에서 수정되었으며 명실공히 벨기에와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고백이 되었다.

도르트 노회 신조(1618년)

화란의 신학자 아르미니우스(Arminius, 1560-1609)의 가르침에서 발전한 아르미니우스 주의와 칼뱅주의 정통파들의 신학적 갈등 때문에 네덜란드의 도르트(Dort)에서 1618년 11월 13일부터 이듬해 5월 9일까지 국제적인 대규모 회의가 개최되었다. 여기에는 독일과 스위스와 영국의 개혁교회 대표자들이 참석했다. 칼뱅의 엄격한 예정론을 반대했던 아르미니우스 주의자들은 이 회의에서 정죄되었고 칼뱅주의 정통파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렸다. 이 회의에서 하나님의 이중 예정론과 예지(豫知)가 조건이 아닌 무조건적 선택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는 거절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이라는 엄격한 칼뱅주의 체계가 수립되었다. 칼뱅주의를 대표하는 신학자는 화란의 고마루스(Gomarus, 1563-1641)였다. 아무튼 이 회의에서 채택된 칼뱅주의의 5대 강령이 채택되었다. 이 5대 강령은 인간은 범죄로 인해 품성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인간의 전적인 타락(Total Depravity of Man)과 하나님의 선택은 어떠한 조건을 보고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무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Election)과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선택받는 사람을 위해 죽은 것이라는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와 하나님의 은혜는 거절할 수 없다는 불가항력적인 은혜(Irresitable Grace)와 성도의 인내(Perseverance of Saints) 등이다. 이 5대 강령의 영어 첫 글자를 따면 TULIP이 된다. 이러한 내용들은 벨기에 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크 신앙 문답과 함께 200년 이상 화란 개혁 교회의 신학적인 기초가 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1648년)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영국 국교에 대한 중도 노선적인 개혁이 과감한 개혁을 원하던 청교도들에게는 불만을 품게 했다. 이어서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서 6세가 영국 왕이 되어 제임서 1세가 되었을 때 청교도들은 그의 신앙 배경을 생각하고 영국 국교의 과감한 개혁을 기대했으나 그 또한 실망하게 되었다. 찰스 1세가 왕이 되었을 때 청교도 장군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을 중심으로 한 혁명군이 국군을 물리치고 집권해 청교도 공화국을 수립했다(1640년). 크롬웰은 1643년 7월에 웨스트민스터 회의를 소집하여 교회개혁을 논의했으며 이때 모인 151명의 교역자들은 대부분 장로교 계통의 청교도들이었다. 이때 장기 국회를 통하여 교회의 많은 개혁을 이룩했다. 영국 국교의 공동 기도서를 폐지하고 새로운 예배지침서를 만들어 장로교회 신학으로 기울어졌으며 이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작성되어 1646년 11월에 완성되었고, 거기에 대소(大小)요리문답도 첨부되어 1648년에 영국 국회에 상정되었다. 그러나 이 신앙고백이 중심이 되어 장로교회가 영국의 국교가 되는 것을 염려한 회중 교파와 다른 파의 반대로 정식 통과는 보류되었다.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영국 국교와 투쟁하면서 국왕의 군대와 청교도 군대가 싸울 때 준비된 것인데 아일랜드 청교도들의 고백인 우셔(Ussher)의 신앙고백을 토대로 하여 작성된 것이며 교회 회의에 제출하여 수정 과정을 거쳐 통과한 것이다. 이 신앙고백은 아르미니우스 주의적 색채는 전연 없으며 칼뱅주의적 정통주의자들이 토론하여 만든 것으로서 칼뱅주의적 개혁교회 신앙 내용을 담고 있다. 영국적인 바탕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이후 장로교회의 표준적인 고백이 되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1649년에 국회릍 통과하여 신자들의 가정에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 요리 문답을 비치하도록 하고 개인의 양심에 이 고백을 강요했다.

회중교회 신조(케임브리지 헌장, 1648년)

케임브리지 헌장은 미국의 초기 영국 식민지인 뉴잉글랜드 주에 이민해 온 회중교회의 교회 정치에 관한 헌장이다. 영국의 청교도 칼뱅주의자들 가운데서 회중교회 제도를 채택한 사람들의 일부가 이민 와서 회중교회를 세우고 1646년 9월 1일에 케임브리지 노회라고 불렀다. 이 노회에는 매사추세츠, 플리머스, 뉴 헤이븐과 코네티커트의 교회들이 초청을 받았다. 이 노회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받아들여 회중교회의 신조로 삼고 교회 조직과 행정은 회중교회 형식을 취하였다. 회중교회는 자발적이고도 평민적인 민주적 교회이다. 최초로 미국에 이민 와서 형성한 회중교회의 이러한 민주적 제도의 이념과 실천이 미국 민주주의 제도와 이념의 발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케임브리지 헌장은 회중교회뿐만 아니라 미국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최초의 헌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스위스 일치 신조(정통파, 1675년)

쯔리히의 존 헨리 하이데거(Heidegger)가 스위스 국회의 요청을 받고 작성한 것으로서 극단적인 보수주의적 신앙고백이다. 칼뱅주의에 대한 수정을 해야 된다는 사상이 대두됨에 따라서 엄격한 보수주의자들은 더욱더 보수적인 경향으로 기울어졌다. 이 신앙고백은 17세기 극단 보수주의 또는 정통파를 대표하는 것으로서 프로테스탄트 스콜라주의 신학의 표본처럼 인식되고 있다. 프로테스탄트 스콜라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중세 로마카톨릭의 스콜라 신학과 성격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중세 로마카톨릭의 스콜라주의를 비판하던 개신교가 다시 스콜라주의에 빠지게 된 것이다. 17세기는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에 대한 해석과 발전을 둘러싸고 보수 양 진영에서 심각한 교리 논쟁이 전개되어 교회의 평화와 발전은 사라지고 선교 사업은 약화되었다. 스위스 일치 신조는 극단적인 보수주의 개혁교회 신학을 대변하는 것으로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보다도 더 철저한 보수신학을 대변하는 것이 되었다. 이 신조는 스위스에서 약 반세기 동안 사용되다가 후퇴하고 말았다.

쿰버랜드 장로교회 신앙고백(1829년)

미국 독립이 성취된 후 미국의 장로교 신파와 구파가 합쳐서 1789년 최초의 장로교 총회를 조직하고 미국 합중국 장로교회 총회라고 불렀다. 이 총회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그대로 받아들였음으로 이 고백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분리되어 나와서 쿰버랜드 장로교회(Cumberland Presbyterian Church)를 조직했다. 그런데 1903년 미국 합중국 장로교회 총회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몇 가지 조항을 약간 수정하고 성명서를 발표했을 때에 쿰버랜드 장로교회는 그 교회와 합동을 결정했다. 그러나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합동을 반대하고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쿰버랜드 장로교회 신조는 아르미니안적인 요소를 내포하는 것이다. 쿰버랜드 장로교회 신앙고백은 1813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수정하여 채용한 것인데 1829년에 다시 수정하였다.

1967년도 미국 연합 장로교회 신앙고백(1967년)

미국 연합 장로교회는 1967년도에 당시 긴박했던 동서 냉전 등 세계대전의 어두운 정치적 상황을 실감하고 인류의 화해와 평화를 호소하기 위해 이 신앙고백을 제정하여 총회의 결의를 거쳐 전 세계에 발표했다. 미국 연합 장로교회는 이전에 있었던 역사적인 신조들 가운데서 특별히 니케아 신조와 사도 신도,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하이델베르크 신앙문답, 제2 스위스 신앙고백(1566년), 17세기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소요리문답, 20세기의 바르멘 선언 등의 신앙고백을 인정하고 그 영향을 많이 받아 왔다. 미국 연합 장로교회의 1967년도 이 신앙고백은 이전에 있었던 개혁교회 신앙고백을 수정하거나 폐지하려는 것이나 새로운 교리체계를 수립하려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당면한 세계의 위기를 보고 성서에 입각한 화해의 복음을 세계가 받아들이도록 호소하는 신앙 성명이었다. 이러한 신앙고백은 긴박한 상황에 처한 인류 사회의 구원을 위해 시대적 필요에 의해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는 독일의 바르멘 선언과도 비슷하다.

영국 성공회 신조(Thirty-nine Articles, 1563년)

이 신조는 '39개 신조'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헨리 8세는 영국의 종교개혁을 주도한 왕으로서 로마카톨릭으로부터 결렬했으나 신앙은 전통적인 것을 고수했다. 그의 후계자 에드워드 6세 때 토마스 크랜머(Cranmer)가 1553년에 프로테스탄트 신학 특히 루터교의 아우그스버그 신앙고백의 영향을 받아 '42개 신조'를 작성했으나 햇빛을 보지 못하고 메리 여왕 때 순교를 당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42개 신조를 약간 수정하여 '39개 신조'(Thirty-nine Articles)를 만들어 영국 교회의 신조로서 1563년에 라틴어로 선포했다. 영국 성공회는 신학에 있어서 로마카톨릭과 개신교의 중간적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신조는 개혁교회 신학적 색채가 짙은 것이다. 영국 국교 안에서 보수파는 이 신조가 너무 개신교적이라는 이유로 불만을 품고 있다.

아르미니우스 신조(1610년)

16세기 후반에 와서 네덜란드 지방에서는 신학과 신앙에 있어서 이성을 강조하는 인문주의적 경향이 나타나면서 도덕적 실천 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진보주의 사상이 종래의 교리를 강조하는 교리적 칼뱅주의에 도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17세기에 접어들면서 더욱 크게 퍼져 나갔으며 진보사상의 대표자는 야곱 아르미니우스(Jacob Arminius, 1560-1609)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편성과 인간의 자유의지설을 주장하면서 칼뱅의 예정설과 원죄설을 부정하였다. 그는 또한 칼뱅주의자들의 주요 신조인 벨기에 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크 신앙문답의 수정을 주장했으므로 칼뱅주의적 정통파의 많은 반대와 공격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 후 유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를 비롯한 진보주의 학자들과 정치가들이 아르미니우스의 사상을 지지하고 일어나서 1610년에는 네덜란드 국회에 정통주의에 도전하는 항의문을 제출하였음으로 이들을 '레몬스트란트'(Remonstrant) 곧 '항의자'라고 불렀다. 이 항의문은 칼뱅주의의 5개 요점을 거부하고 그 대신 자기들의 5개 요점을 기록한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은혜의 보편성과 믿는 자는 다 구원받는다는 만인 구원설과 하나님의 은혜에 협력하는 신자의 노력을 강조하는 협동론과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 항거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아르미니우스 자들의 주장에 반대해서 칼뱅주의자들이 1618년에 도르트(Dort)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칼뱅주의의 5대 강령을 다시 천명하게 된 것이다.

재세례파 신조(Anabaptist Confessions)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의 한 지류로서 재세례파의 개혁운동을 빼 놓을 수 없다. 재세례파는 루터와 쯔빙글리의 개혁운동에 만족하지 못하고 뿌리와 가지에서 더 근본적인 개혁을 원했다. 과격한 개혁자들과 종교개혁의 좌익들을 네 가지 형태로 분류할 수 있다. 1. 재세례파들 (이 중에는 스위스 형제들, 남부 독일 형제들, Hutterites, 화란 메노나이트들이 포함된다), 2. Anti-Trinitarians(반 삼위일체론자들), 3. Spiritualizers(신령파들), 4. Revolutionary Prophets(혁명적인 예언자들) 등이다.

재세례파들은 신앙은 스스로 깨달아서 세례를 받아야 하며 스스로 깨달을 능력이 없는 어린아이들의 세례를 반대했다. 신앙은 부모의 신앙을 맹목적으로 이어받을 수 없으므로 유아 세례를 받은 사람은 장년이 되어서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세례파의 이러한 주장은 정통 개혁자들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 또한 재세례파들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평등사상을 주장했다. 재세례파는 종교와 정치의 완전한 분리를 내세우며 국가 교회를 반대했다. 그 이유는 종교개혁 시대에 개신교와 로마천주교와의 마찰에서 각 지방의 위정자의 종교가 그 지방인의 종교가 되게 한 협의사항이 있었고, 이 협의사항이 때로는 지방 위정자와 신앙이 다른 개인의 신앙 양심을 유린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제세례파 운동은 귀족들로부터도 많은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이 재세례파 운동은 16세기부터 쮸리히와 제네바를 비롯한 스위스, 남부 독일, 네덜란드 등 유럽 여러 지역에 퍼져 있었고, 그들의 교파 이름은 형제단(Brethren), 또는 메노나이트(Mennonites) 등이었다. 재세례파는 주의 만찬의 해석에 있어서는 기념설을 주장했으며 교회의 권위주의도 반대했다. 이러한 그들의 교회 개념은 회중교회의 자발적인 개교회주의와 제도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나중에 영국에서 생긴 침례교회는 재세례파와는 역사적인 관련이 없이 칼뱅주의 신학의 일파로 생긴 것이다. 재세례파의 신앙은 슐라이타임 신앙고백과 도드레트 신앙고백에 나타나 있다.

재세례파 신조(슐라이타임 신앙고백 1527년)

재세례파는 처음에 쮸리히와 제네바에서 크게 성행하고 있었다 이 슐라이타임(Schleitheim)신앙고백은 스위스의 형제단(Swiss Brethern)이 1527년 2월 24일에 가진 회의에서 발표한 것이다. 이것은 재세례파들 사이에서 널리 퍼졌으며 쯔빙글리와 칼뱅은 이 신앙고백을 신랄하게 논박했다. 이 신앙고백을 기초한 사람은 미카엘 사틀러(Michael Sattler)이었으며 기독교 신앙의 전반적인 것을 다룬 것은 아니고 개신교주의(Protestantism)와 구분되는 재세례파 신앙과 실천의 특징들을 수록한 것이다. 1527년 5월에 그는 이 신앙고백을 그의 목숨과 바꾸었다.

재세례파 신조 (메노나이트) 신앙고백, 1632년)

도르트 또는 도드레트(The Dordrecht Confession) 신앙고백은 1632년 4월 21일 네덜란드의 도르트(Dort) 시(또는 도드레트 시라고도 부름)에서 메노나이트(Mennonites) 신도들이 채용한 것으로서 초기의 재세례파의 신앙고백보다도 성숙한 것이었다. 재세례파 운동이 박해를 받아 광신적으로 되어 가고 과격한 복음주의 개혁 운동가들이 재세례파 운동에 휩쓸려 들어갈 때 네덜란드의 재세례파는 광신적인 것을 배제하고 평화로운 개혁운동을 추진하려는 화란의 개혁가 메노 시몬즈(Menno Simons)의 지도를 받고 메노나이트 신도들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 고백은 메노나이트 신도들의 교리와 실천을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재세례파의 본래의 신앙고백과 같은 것이다.

퀘이커 신조(1675년)

영국의 청교도 혁명 치하에서 소 종파들이 많이 생겼으며 형제단(Society of Friends)이라고 불리는 퀘이커 교회도 프로테스탄트의 한 지파로서 생겼다. 퀘이커라는 말이 나타난 것은 1647년이었으며 영국의 평신도 설교가 조지 폭스(George Fox)의 지도하에 발전되어 갔다. 청교도 치하에서 박해를 받고 폭스와 신도들은 많이 투옥되었다. 그들은 성령에 사로잡혔을 때 몸을 떨었으므로 '떠는 사람'(Quaker)이라는 명칭이 교파 이름이 되었다. 그들은 전통적 교회의 제도와 의식과는 많은 차이를 가진 독립된 신앙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영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내적인 빛', '내적인 그리스도' '내적인 계시'를 강조하고 형식적인 신조를 반대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집회를 가졌으며 회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삶을 지도하는 영으로 임재할 것을 기다렸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했다. 미리 준비된 프로그램이나 설교가 없고 하나님의 계시는 즉흥적이고 개인적이기 때문에 침묵 가운데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기다리면서 예배를 드렸으며 모든 참여자들이 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특별히 유급 성직자를 의지하지 않았다. 그들은 교회와 국가의 권위를 반대했다. 어떠한 조직 교회도 반대했으므로 영국 교회에 십일조를 내려고 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들은 영국 교회 이외의 어떤 예배도 금지시킨 1664년 비밀집회법을 위반하여 그들 자신들끼리 공중 예배를 위해 모임을 가졌다. 그러나 오늘 미국에서는 절반 이상의 퀘이커 교회에서 보수를 받는 목사와 준비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선행을 강조하고 사치를 피했다. 남녀평등과 집총 거절, 절대 평화주의 등 과격한 혁신을 부르짖었음으로 박해를 받았다.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하고 평신도의 지도력을 믿는 재세례파의 형식을 따랐다. 퀘이커교회의 '내적인 빛'(Inner Light)의 교리에 대한 완전한 주석은 스코틀랜드 퀘이커주의자 로버트 바클레이(Robert Barclay)가 썼는데 당시 지배적인 영향력을 가졌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신학과는 큰 차이가 있다.

웨슬리주의 신조 (감리교회 종교 강령, 1784년)

감리교회는 18세기 영국에서 영국 국교로부터 독립해 나온 존 웨슬리(John Wesley)의 전도 운동에서 생긴 것이다. 그는 감리교회의 신조를 만들기 위해 영국 국교의 39개 신조를 줄이고 고쳐서 만든 것이 이 '종교 강령'(The Articles of Religion)이며 1784년 감리교 총회에서 정식으로 채택했다. 웨슬리는 영국 교회의 39개 신조 가운데서 칼뱅주의적인 색채가 나는 것은 제외하고 아르미니우스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의 신학사상은 17세기의 고전적 개신교 신학과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 사이의 중간적 위치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는 거룩과 은혜를 경험적으로 강조하는 경건주의 신학으로서 성화를 강조했다.

구세군 교리(Salvation Army, 1877년)

국제적인 종교 단체이며 자선기구인 구세군 운동은 1865년 영국 런던에서 감리교 목사 윌리암 부우스(William Booth)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근본적으로 런던 빈민가 사람들에게 복음적이고 사회사업적인 일을 하려는 시도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활동은 신속히 확장되어서 1878년에는 오늘날과 같은 군대식으로 다시 조직되어 구세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윌리암 부우스는 영국 국교나 감리교회의 관료적인 목회에 항의하면서 빈민 전도를 전개했다. 말로만 복음을 전할 것이 아니라 죄인들과 노동자들,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에게 뛰어들어 직접 도와주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했다. 구세군 운동은 신학이나 교리나 교회 의식에 대한 운동이 아니고 가난과 실의에 빠진 영혼들을 위해서 군인과 같은 전투 정신으로 뛰어들어 도와주고 구원하자는 운동으로 전세계에 널리 보급되었다.

바르멘 선언(1934년)

독일에서 제 3 공화국이 일어나고 히틀러의 획일 정책으로 '독일적인 기독교'가 탄생하려는 무렵에 독일에 있는 개혁교회와 루터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대표들이 1934년 5월 29일과 30일 양일간에 걸쳐서 바르멘(Barmer)에 모여 공통된 신앙고백을 발표했다. 정치와 종교 사이에서 전쟁 마당과 같은 긴장이 감도는 상황에서 외친 이 선언의 배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주권을 강조하는 칼 바르트(Karl Barth)의 신학이 있다. 이 선언은 기독교의 신앙이나 신조에 대한 포괄적 설명이 아니고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말할 필요가 있었던 한 가지 즉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에게만 귀를 기울여야 된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남인도 교회 헌장(1947년)

인도는 큰 나라로서 힌두교와 같은 지배 종교가 있었고, 회교도를 비롯한 많은 소 종교들이 번성한 나라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를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서는 여러 기독교의 교파라는 것이 장애 요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연합의 필요성에서 1908년 개혁파 교회와 장로교회와 회중 교회가 합동하여 남인도 연합 교회(The South India United Church)를 조직했다. 그런데 이 남인도 연합 교회와 감리교회와 성공회가 1947년 9월 27일에 합동하여 남인도 교회(The Church of the South India)가 되었다. 이 합동은 비슷한 교파끼리의 합동이 아니라 성격을 크게 달리하는 교파끼리의 합동이므로 의의가 있으며 세계 다른 나라 기독교 교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남인도 교회의 헌장은 선교를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합치게 된 남인도 교회 합동의 목적과 성격을 설명하고 남인도 교회 신앙적인 원칙과 복음적인 소명 등 15장으로 된 헌장을 발표했다.

세계 교회 협의회(W.C.C.) 성명서

21세기를 앞두고 20세기를 돌이켜 볼 때 20세기의 세계 기독교 운동 가운데서 빼놓을 수 없는 혁신적인 운동 가운데의 하나가 1948년 암스텔담에서 제1차 총회를 개최한 세계 교회 협의회(The World Council of Churches)의 에큐메니칼 운동이다. 제1차 총회 때 가입 교파는 147개였던 것이 1975년 제5차 총회 때는 286개이었다. 이 W.C.C.는 교파를 하나로 통합하자는 운동이 아니고 함께 친교하고 선교하자는 연합 운동으로서 오늘날에는 320개의 개신교와 성공회, 로마천주교회와 정교회들이 정식 회원 또는 비회원으로서 참가하여 세계적인 친목을 도모하는 일치 운동이다. 본부는 제네바에 있으며, 뉴욕에도 사무실이 있다.

세계 교회 협의회가 밝히는 헌장에 의하면 '성경에 입각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주로 고백하는 교회들의 친교로서 한 분 하나님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영광을 위한 공동의 부르심을 함께 실천하고자 함이라'고 했다. 이러한 연합 사업을 통해 안으로는 서로간의 친교와 밖으로는 선교와 각종 봉사 사업을 벌여 왔다. W.C.C.가 벌여 온 사업은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로마천주교회는 정식 회원은 아니지만 총회와 그 밖의 부서들의 회의에 참관 대표를 파송하며 연구와 봉사 사업에도 동참하고 있다. W.C.C.는 끊임없이 교회 일치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 왔고 3차 총회가 인도의 뉴델리에서 1961년에 모였을 때는 교회 일치에 대한 진술서가 발표되었다. 도처의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의 신앙으로 같이 성찬식에 참여하여 떡을 떼며, 말과 문화가 달라도 공동 기도를 드리며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의 한 부분임을 진술한 것이다. 1975년에 열린 제 5차 총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자유하게 하시며 연합하게 하신다'는 공동의 주제를 가지고 18일 동안 회합하였다. 제5차 총회의 메시지에서는 문화와 민족과 성(性)과 계급의 장벽을 넘어서 일치의 기쁨을 경험한 것을 서술하면서 지구의 보존과 모든 사람의 자유와 선교와 하나님의 이름에 영화와 찬양을 돌리기 위한 공동 기도문을 서술하고 있다. 세계 교회 협의회 성명서는 신앙에 대한 전반적인 교리를 다룬 것이 아니라 성경의 하나 되게 한 것을 중심으로 일치 운동을 천명한 것이다.

결론

이상에서 여러 신조들을 살펴보면 신조들을 크게는 세 갈래로 구분해 볼 수 있다. 1.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 Church)의 신조와 2. 서방 로마카톨릭 교회(Roman Catholic Church)의 신조와 3. 개신교회(Protestant Church)의 신조이다. 어떤 신조들은 다같이 공동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어떤 신조들은 특수한 교파들만이 고백하고 있다.

신학적인 논쟁에 있어서는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 간의 예수의 신성에 관한 논쟁,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간의 인간론에 대한 논쟁, 칼뱅과 아르미니우스 간의 예정론에 대한 논쟁들을 크게 들 수 있다.

개신교회의 신앙고백은 주로 종교개혁자들과 그들 제자들 간에 있어서 보수파와 진보파의 신학적 해석에 대한 논쟁으로 많은 신조들이 생겨났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칼뱅 신학의 엄격한 예정 사상과 그의 교회 정치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오는 논쟁들이 많았다. 장로교회와 회중교회와 침례교회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골격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으며 감리교회는 영국 교회의 39개 신조들을 일부 수정하여 교회의 신조로 삼고 있다. 신앙고백과 신조는 신앙과 행위와 교회 기강에 있어서 성서의 내용을 토대로 하여 작성되고 해석되었으며 그 어떤 신조도 성서의 권위를 능가할 수 없는 것이다. 성서는 변할 수 없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으나 성서 해석의 차이에서 생기는 신조와 신앙고백은 절대적이 아니며 언제나 수정될 수 있으며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신조는 각 교파의 특징을 나타내었다고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