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세기 : 동서양의 재조정기 530년경 유럽 http://www.ucalgary.ca/applied_history/tutor/firsteuro/imgs/map22.html 565년경 유럽 http://www.ucalgary.ca/applied_history/tutor/firsteuro/imgs/map23.html 600년경 유럽 http://www.ucalgary.ca/applied_history/tutor/firsteuro/imgs/map24.html 768년경 유럽 http://www.ucalgary.ca/applied_history/tutor/firsteuro/imgs/map25.html 814년경 유럽 http://www.ucalgary.ca/applied_history/tutor/firsteuro/imgs/map26.html 880년경 유럽 http://www.ucalgary.ca/applied_history/tutor/firsteuro/imgs/map27.html 910년경 유럽 http://www.ucalgary.ca/applied_history/tutor/firsteuro/imgs/map27.html 스티븐 니일, 3장; 김호동 2장; 사무엘 마펫11장-16장; 허버트 케인 2장;
I. 역사적 상황
A. 게르만족 왕국
http://www.fordham.edu/halsall/sbook1f.html#Romanized%20Goths
1. 프랑크의 메로빙거가문의 주도권-
클로비스왕(465-511)의 프랑크왕국 통일-파리에 수도(현프랑스, 이탈리아, 독일)/클로비스사후 혼란/ http://www.fordham.edu/halsall/maps/526eur.jpg http://www.ucalgary.ca/applied_history/tutor/firsteuro/f.rank.html
2. 카롤링거왕조:
732년 카알 마르텔의 대이슬람 승리후 실권장악/서로마교황의 협력으로 아들 피핀의 카롤링거왕조 등장, 교황에게 교황령의 땅을 주었다-아들 샤를마뉴대제는 모든 게르만왕국을 정벌하여 800년 12월 24일 교황 레오 3세는 로마황제로 등극/서유럽에 법과 질서, 문명, 기독교가 뿌리내리게 했다. http://www.fordham.edu/halsall/maps/800eur.jpg http://www.fordham.edu/halsall/sbook1h.html
3. 신성로마제국-
사늘마뉴대제 사후 후계자 분쟁으로 3부분으로 분할(서프랑크, 중프랑크, 동프랑크), 에스파니아에 이슬람침공, 바이킹의 일파인 노르만의 침공/ 동프랑크의 오토 1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 962년-300여개의 갈라져 싸우다가 오스트리아왕이 황제관을 차지 1806년 나폴레옹에게 점령될때까지 900년 가까이 명목상 황제로 있었다. 참고자료:http://www.fordham.edu/halsall/maps/900eur.jpg
B. 비잔틴제국(동로마) 콘스탄티노플에 수도, 황제 교황, 성상논쟁/그리스정교 비잔틴 http://www.fordham.edu/halsall/sbook1c.html
1. 서로마 멸망후 500년간 생존을 위한 투쟁-게르만족을 대항하여
유스티니아누스 (483-565)황제는 동고트족으로부터 이탈리아 탈환, 반달족으로부터 북아프리카 탈환하여 동로마제국의 영토 확장. 아테네의 철학 아카데미를 폐쇠하고 이독교적 도덕율을 반영하는 시민법을 제정, 콘스탄티노플에 소피아 성당을 건립하고(532-537), 로마의 수도승 Dionysius Exiquus (d. c. 550)는 서력기원을 정하는 새로운 날자를 정한다(Anno Domini). 그리고선교사를 중국에 보내어 누에를 밀수한다(551).
2. 이후 500년간 페르시아인들을 대항하여 생존 투쟁
헤라클리우스 황제-627년 니네베 전투에서 페르시아인 전멸시키고 동로마를 지켰 다. 그러나 북쪽의 게르만족과 남쪽의 모슬렘에게 영토를 빼앗겨 갔다가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됨.
C. 아바르 족의 침입:
552년 돌궐에 패배한 유연은 서쪽으로 가서 유럽에서 정착한다.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안은 이들에게 상납하고 발칸반도를 위협하는 훈족과 슬라브족을 점령하게 한다. 6세기 말에 전성기를 맞아 볼가강과 다뉴브강 사이의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에 두었다. 이후 내분으로 약화되다가 796년 프랑크와 불가리아의 연합 공격을 멸망됨). 600년의 유럽 http://www.ucalgary.ca/applied_history/tutor/firsteuro/imgs/map24.html
D. 사산조 페르시아의 몰락 488-531 Kavadh I: 기독교 관용
◦ 531-579: Anshurwan the Just (Chosroes I) 기독교 박해(540-545) 이후 관용, 페ㅅ그시아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 페르시아의 전성기, 동로마와 전쟁 승리후 안디옥 쟁취(기독교인 포로들을 위해 새도시 군데샤푸르를 건립하였고 이곳은 페르시아내의 강력한 기독교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동쪽의 헤프탈 족을 중앙아시아로 쫓음, 아라비아 주변의 페르시아만에 함대보내어 예멘에 있던 이디오피아인들을 아프리카로 쫓음, 사산조에서 가장 공정하고 정비되고 효과적인 통치행함,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부인이 기독교인이었다. 왕의 주치의와 동역자들, 사무관들, 궁전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었다. 이들은 박학하였고 근면하였으며 국제적인 교류를 가졌다.
▫ 533: 로마와 평화조약
▫ 551: 두 명의 수도사가 비단 누에고치를 빈 대나무속에 넣어 중국에서 밀수하여 서방으로 가져온다.
▫ 540-562: 로마와 전쟁
◦ 579-590: Hormizd IV 기독교 관용, 조로아스터교와 기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도록 명령함;“나의 왕관은 두개의 종개가 아닌 네 개의 종교, 즉 마기교와 조로아스터교뿐아니라 유대교와 기독교 등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통치 후기는 동부에서는 투르크족의 침입과 서부에서 비잔틴 로마에 의해 심각한 패배로 시민전쟁일어나고 측근의 쿠데타로 폐위되어 잔인하게 처형됨
◦ 590-628: Khusru Parviz(Chosroes II) 608년전 까지는 기독교 관용, 페르시아 최후의 위대한 왕,
▫ 590-602: 시민전쟁에서 왕권을 잃어버려 콘스탄티노플로 피난가서 비잔틴 황제 마리우스의 도움과 기독교인의 도움을 받고 그 도움으로 왕권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동로마황제의 도움으로 신변을 유지하였다. 그리하여 마리우스가 죽을 때까지 로마와 전쟁을 하지 않고 기독교의 개종설까지 나올 정도로 기독교인에 대한 우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내들과 3천명의 첩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기독교 여왕인 아람인 시린(Sirin)이었다.
▫ 603-610: 비잔틴 로마와 전쟁-602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쿠데타가 일어나고 황제 마리우스가 처형되자 코스로에스는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고 콘스탄 티노플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페르시아는 에뎃사와 안디옥을 점령하였다.
▫ 610: 아랍이 페르시아군을 Dhu-Qar에서 패배시킴
▫ 610-620: 로마와 전쟁 -페르시아는 비록 비잔틴이 쿠데타의 주동을 몰아내고 새황제 헤라클리우스가 등극하고 평화를 제의했으나 계속전쟁을 행했다. 615년에는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교회와 기독교인 수천명을 살육했고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하여 콘스타티노플을 포위했다. 페르시아의 영토는 흑해에서 아프리카 사막까지, 로데스 섬요새에서 인디아까지의 광활한 제국 통치.
▫ 622-627: 제국을 재정비한 로마황제 Heraclius 가 4만명의 터키족인 카자르 군대와 연합하여 Assyria 와 Mesopotamia를 침공하고 페르시아 제국을 유린하였다. 이 기간에 페르시아내의 기독교는 박해를 받았고 교회는 재산을 압수당했다. 코스로에스 왕은 왕위를 단성론자인 왕후 시린의 아들로 하려다 네스토리안 야당의 주동자 샴타의 쿠데타로 살해당하고 황태자 시로스는 카바드 II로 페르시아 왕으로 등극한다. 이 전쟁으로 사산조는 급격히 쇠약해져서 아랍의 침략에 쉽게 굴복한다. 그리고 카자르족은 transcaucacus 지역에 자신들이 영토를 확보한다.
◦ 628 Kavadh II 9개월 동안 왕으로 있으면서 비잔틴 로마와 평화관계를 가졌으나 자신의 모든 형제들을 살해하고 어떤 상속자 없이 죽었다.
◦ 628-630 Ardshir III
◦ 630-632 혼란의시기-Shahrbaraz, Boran and others 왕위계승전 치열
◦ 632-651: Yazdegerd III 코스로에스 II의 손자
▫ 633: 무슬림의 이락 침공
▫ 642: Nehawand에서 페르시아 군의 패배후 동쪽 발흐로 피난
▫ 651년 부하에게 피살당함, 아들 피로쯔(Piruz) 3세는 토카라에 피신하여 왕위에 오르고 677년 당의 장안으로 피신하여 왕권회복을 꿈꾸나 이루지 못하고 사산조는 끝이난다.
D. 이슬람의 도전 http://www.fordham.edu/halsall/sbook1d.html http://www.ucalgary.ca/applied_history/tutor/islam/index2.html http://www.ucalgary.ca/applied_history/tutor/islam/caliphate/ 6세기 http://ccat.sas.upenn.edu/~bvon/images/map1.gif 깐수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200108/nd2001080500.html 김대용 http://www.islamjeju.or.kr/knowledge_11.htm
1. 무함마드: 570-632
a. 아라비아인:
이스마엘의 후손(베두인), 우상숭배와 여러 신을 믿었다. 마호메트는 자라나면서 영향을 받은 종교는 진이라는 정령을 숭배하는 애니미즘(animism)과 신령과의 특별한 중매인(무당)을 두고있는 샤마니즘(Shamanism)을 비롯해 유태교, 기독교, 그리고 그 외 아라비아 반도내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던 토속종교들이다.
이슬람이 있기 이전의 아라비아 반도에는 복잡하기 이를데 없는 종교적 혼합상을 이루고 있었다. 당시 아라비아에 사는 각 부족이나 공동사회는 각기 숭배하는 다양한 우상신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은 신과 정령의 보호를 받기 위해 독특한 종교의식들을 거행하곤 했다. 메카의 꾸라이쉬 부족과 그 인근 부족들은 라트와 웃자, 마나트라는 세 여신을 신봉했을 뿐만 아니라, 카아바라는 육면체 운석(隕石)과 그 주변에 산재한 수백개의 돌도 아울러 숭배했다. 그들은 메카에 중앙 제전인 카아바신전을 두고 매년 특정한 달에 희생제물을 바치며 공동의 종교축제를 벌였다. 특별한 의식을 수반하는 매년의 순례행사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메카는 언제나 축제가 펼쳐지는 분위기였다. 그 신들 가운데서는 지고의 신인 '알라'(Allah)가 동시에 숭상되고 있었다. 당시의 아라비아에는 여러 종류의 다양한 신적인 존재들이 있어서 사람들을 통해 숭앙 되었던 것이다. 그 신들은 모두 동일한 힘과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떤 신들은 좀 더 힘이 세고 높았으며, 또 다른 어떤 신들은 약하고 지위가 낮았다. 그 지역에 산재해 있던 다양한 신들 가운데는 대표적으로 마나트(Manat), 우짜(Uzza), 알라트(Allat)등이 있었는데, 그 신들은 지고신인 '알라'에게 예속되어 이었다. 그러므로 '알라'는 무하마드가 창출해낸 신이 아니라 아라비아 지역에 있던 여러 신들 가운데 가장 높은 신이었던 것이다. 즉, 무함마드는 당시 지고신이었던 알라를 유일신화하는 작업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 당시 무함마드의 고향이자 종교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메카의 카바에서는 360개의 다양한 우상들이 숭배되고 있었는데, 무함마드는 후에 카바 곧 석신을 알라와 동일시하였다.
b. 아라비아의 메카에서 꾸라이시족의 명망있는 하심가문 출생(힘야리트 족의 한 족장이며 이디오피아 기독교 정권의 침략에서 승라하여 메카를 지켜낸 아브드 알 무탈립(Abd al-Muttalib)의 손자이며 정령숭배적인 순례무역 소유권을 지탱했다. 특히 메카의 카바신전을 단성론 기독교의 손에서 구원하였다). 고아로 자람
c. 젊은 시절 양치기
d. 상인이 되어 낙타 대상을 이끌고 여러 나라 돌아다녔다.-유대인과 기독교인들 과 접촉해서 그들의 종교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e. 25세에 15세 연상의 부유한 과부 하디자와 결혼한후 생활의 안정으로 구도에 전념하며 외진 곳에서 명상하기를 좋아했고 40세에 가브리엘에게서 계시받았다고 주장(접신현상)/ 관찰과 명상/ 40세에(610년) 이슬람교 창시. 메카에서 10년간 포교 70여명의 교도 -도시 지배층의 압력 거세짐(다신교 배척하고 부의 분배요구)
f. 622년 헤지라; 야스리브(메디나)로 도피, 초기 유대 공동체와 제휴하고 메디나에서 지도권을 가지게 되자 아랍 세력 결집을 위해 유대인을 배척한다. 630년에 메카 점령하면서 아라비아 반도의 연합을 추구하였고 기독교 아랍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그리하여 이슬람교를 중심한 아랍부족 연합체가 탄생, 632년 무하마드 사망. 아내 16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정략적인 결혼동맹의 결과였다. 무하마드가 가장 사랑했던 아내는 아이샤로서 9세에 결혼한 콥틱 기독교도였고 그의 소생중에는 유대교도와 기독교도도 있었다. 그러나 무하마드는 자신의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했다.
2. 기본 교리
a. 알라는 위대하고 무하마드는 그의 예언자다. b. 중계하는 영을 통한 선행-2 천사가 선악을 알라에게 보고한다. c. 코란(무하마드에게서 거룩한 책은 성경이었다. 코란은 무하마드 사후에 기록). d.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모두 선지자다. 무하마드는 가장 위대한 선 지자 f. 부활, 심판, 낙원
3. 기본적인 신앙행위
a. 하루에 다섯 번 메카를 향해 기도 b. 자비(희사, 연1회 1년 수입의 1/40) c. 라마단 단식(1개월) d. 메카로 순례
4. 정복활동-로마제국의 절반 정복/이 지역에서는 동로마제국에 대한 반란이 무르익고 있었다.
632-661 정통칼리프시대:
신의 예언자인 무하마드의 대리인이자 후계자, 대화를 통해서 선발되었다(1대 아부 바크르와 2대 우마르 1세는 무하마드의 장인이며 3대 우Tm만 4대 알리는 무하마드의 사위였다. 우마르는 자신의 페르시안 노예에게 살해당했고, 우트만과 알리는 동료 무슬림에 의해 살해당했다), 시리아와 이집트를 정복했고 사산조 페르시아를 정복. 3대 칼리프시대에 코란(읽어야만 하는 것) 작성. 알리를 추종하는 쉬아파와 메카의 우마야드족을 중심한 우쓰만을 따르는 순니파(무함마드의 관행을 따르는파) 사이의 시민전쟁이 발발한다. 순니파의 승리. 이 시기에는 공화주의였고 단체의 동의에 의해 칼리프를 선출했으며 중심지를 페르시아에 두었다. 635년 시리아의 다마스커스 점령, 636년 야르묵 전투에서 비잔틴 제국이 패배함으로 시리아 전역확보, 638년 예루살렘 점령, 637년 카디시야 전투에서 페르시아 격퇴하고 641년 페르시아 전역을 지배.
632 http://ccat.sas.upenn.edu/~bvon/images/map2.gif 661 http://ccat.sas.upenn.edu/~bvon/images/bmap1.jpeg
661-750 Umayyad 칼리파 시대(다마스커스가 수도): 661년 4대 칼리프인 알리가 암살되자 라이벌이었던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가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서 스스로를 칼리프라 칭하며 우마위아조를 세웠다. 이후 14명의 세습 칼리프로 왕조 형태가 된다. 비잔틴 문명을 강하게 받은 아랍제국(아랍인의 특권주장), 정복운동을 통해 최대의 영토보유. 아랍민족주의 강화되고 무슬림으로의 개종 장려, 모든 공문서가 아랍어로 기록되고 개종한 자에게 세금 감면과 사회적 차별 철폐.
661-750 Umayyad http://ccat.sas.upenn.edu/~bvon/images/mexpan.jpeg 750 http://ccat.sas.upenn.edu/~bvon/images/bmap2.jpeg 750 http://www.fordham.edu/halsall/maps/islam2map.gif
750- Abbasid 칼리프 시대(바그다드가 수도): 시아파의 반체제 운동으로 우마위야조가 혼란에 빠지자 750년에 알 아바스가 이란인의 반체제 운동을 이용하여 정권을 빼앗고 아바스조를 세우고 그 중심을 사산조의 영역으로 옯기고 쉬아파를 탄압하고 아랍인의 특권을 폐지하고 모든 이슬람교도는 평등하다는 이슬람법으로 통치. 국제적인 이슬람제국 세움, 우마위야조의 칼리프 일족은 이베리아 반도로 도망가서 756년 코르도바를 수도로 하는 후우마위야조를 세우고(756-1031) 이슬람은 동서로 분열됨. 751년에 당나라를 중앙아의 탈라스 전투에서 물리치고 비단길로 진출. 종이제조법이 이슬람세계로 전해진다.
압바스조 http://www.ucalgary.ca/applied_history/tutor/islam/fractured/ 786-809 Abbasid http://ccat.sas.upenn.edu/~bvon/images/map3.gif 9세기 http://ccat.sas.upenn.edu/~bvon/images/map4.gif 900 http://ccat.sas.upenn.edu/~bvon/images/bmap3.jpeg 이슬람의 동진 http://depts.washington.edu/uwch/silkroad/exhibit/religion/islam/islam.html
5. 기독교인의 운명 . 711-718년: 스페인 정복 . 피레네 산맥 지나 프랑크 왕국의 골 중심부까지 진격 . 732년 투르 전투: 카알 마르텔(망치의 뜻) . 1492년 그라나다 함락으로 유럽에서 모슬렘 격퇴/ 무어인
6. 기독교 패배의 원인 a. 기독교인의 분리와 적대감/ 유순함과 전투력 상실/ 종교가 형식화/ 복음전도 실패 b. 기독교는 종족 종교로 전락했고 복음 전도는 피상적 c. 지배자의 종교로 전락- 다수족의 종교가 안되었다. d. 정교일치-동로마제국
E. 아시아:
동아시아 문화권 형성시기(수, 당 6세기말-10세기, 한국의 삼국-통일신라 668-935, 일본 다이가-나라-헤이안(794-857)), 중동의 이슬람 문화권 형성,
1. 중국:
a. 수나라 (589-) http://depts.washington.edu/uwch/silkroad/exhibit/sui/sui.html
수 문제(541∼604) :
수의 초대 황제인 양견(楊堅)으로 북주의 공신 수국공 양충의 아들. 북주의 무제는 양견의 장녀 여화를 황태자 비로 삼았는데, 587년 선제(宣帝)가 즉위하자 외척으로서 조정에서 부동의 위치를 확립했다. 580년 여화의 아들 정제(靜帝)가 즉위하고부터, 양 견은 더욱 권력을 집중하여 위 지회 등의 반대파를 배제하고, 581년 정제의 선양을 받아 수의 황제가 되었다. 북변의 돌궐을 압박하는 한편, 587년에 남조의 양(梁)을, 589년에는 진(陳)을 멸망시켜, 남북의 통일을 실현, 3세기에 걸친 중국의 분열에 종지부를 찍었다. 내정으로는 5성(省) 2대(臺) 11시(市)의 중앙 관제의 정비, 구품 관인법의 폐지, 부병제·균전제의 확충, 화폐 제도의 통일, 대운하 광통거의 건설, 주군제(州郡制)의 개혁과 향관의 폐지 등, 귀족 세력을 통제하고 집권 체제의 확립을 기하여, 다음에 나타나는 당조를 위하여 세계 제국 건설의 기초를 다져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재위 24 년만에 사망했는데, 그의 아들 양제(煬帝)에 의한 모살이라고 전해진다.
양제(楊帝: 569∼618) :
수의 제2대 황제(604∼618)로 문제(文帝)의 둘째 아들. 582년 부친의 즉위와 함께, 진왕(晉王)이 되어 북변의 방비를 맡았으며, 586년 진(陳)을 토벌하여 이듬해 이를 멸망시키고 중국의 통일을 달성했다. 600년 형인 용(勇)이 폐적당한 뒤를 이어 황태자가 되었는데, 이 사건의 배후에는 중신 양 소(楊素)와 결탁한 양제의 음모가 있으며, 또 604년 문제의 죽음도 그들의 모살이라고 한다. 양제는 즉위하자 뤄양에 동도(東都)를 건설, 지방의 거상을 모으고 605년에 남녀 100만 명을 동원하여 황하와 회수를 연결하는 통제거(通濟渠)를, 608년에는 황하와 탁군을 연결하는 영제거(永濟渠)를, 또 610년에는 강남하(江南 河)를 개통했다. 이 운하들은 춘추 시대로부터 한대를 거쳐 반 자연, 반 인공적으로 된 수로를 양제가 보수 확장한 것이다. 현재의 대운하는 원,명 시대에 수리하여 회수로부터 북으로 산동, 텐진을 거쳐 베이징에 이르는 것이며, 전장 1,800km의 세계 최장의 운하이다. 강남의 경제 지대를 정치적·경제적으로 수도 대흥(大興)에 연결시켜, 남북을 일관하는 대동맥을 완성시켰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이리하여 609년에는 토욕혼을 토벌하여 칭하이를 병합하고 고창(高昌)을 입공(入貢)시켜 서역에의 길을 열었다. 남방에는 임읍(林邑)을 정벌하고, 적토국(赤土國)의 입공을 재촉하며, 유구(琉球: 오키나와)까지도 정벌하였다 게다가 612년 이후, 매년 고구려 원정을 감행했는데 모두 강력한 반격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이러한 외 정의 실패와 가혹한 수탈은 국내의 모순을 격화시켜 마침내 613년 양소의 아들 양현감(楊玄感)의 반란 을 계기로 천하는 혼란에 빠졌다. 양제는 동란의 확대와 더불어 더욱 향락에 빠지다가 618년 우문화급 (宇文化及)을 수령으로 하는 금위군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b. 당나라(618-907) http://depts.washington.edu/uwch/silkroad/exhibit/tang/tang.html
이 연(李淵 ;566-635) :
당의 창시자(618∼626). 고조(高祖). 조상은 오호(5胡) 시대의 서량 왕 이호(李蒿)라고도 하고 또 귀화 한 선비족이라고도 한다. 장안에서 태어난 이연은 도량이 넓고 솔직한 인물로서 수 문제의 인척이어서 그의 총애를 받았다. 여러 주의 자사(刺史)를 역임하고 수말에 내란이 일어나자 관중의 치안을 맡았는데, 호걸들과 친분을 맺어 양제의 의심을 받기도 했다. 617년 태원 유수가 되었고, 내란이 격화하여 양 제가 있는 강도(江都)가 고립하자, 그 고장의 호족을 모아 거병, 돌궐의 도움으로 장안을 점거하여 양제의 손자 유를 옹립하였다(공제:恭帝). 이듬해 양제가 살해되자 스스로 제위에 올라 무덕(武德)으로 개원하고 장안을 도읍으로 정했다. 다음해인 619년 조,용,조 제를 개정하고 624년엔 대체로 군웅을 평정하여 당 왕실의 기초가 확고해졌다. 626년 둘째 세민에게 양위하였다.
이 세민(李世民 598-649) :
당의 제2대 황제 태종으로 고조 이 연의 둘째 아들. 휘(諱)는 세민인데「20세가 되어 제세 안민(濟世 安民)의 사업을 성취할 사람이다」라는 예언에 의하여 명명되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생각이 깊었으며 결단력이 풍부하였다. 수의 멸망을 예지하고, 협객·군도(群盜)를 기르다가 부친에게 권하여 거병, 내내 전군을 지휘하면서 관중으로 들어갔다. 이후 그 군사적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부친으로부터「천하는 모두 네가 이룩하여 놓은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인망이 높아, 형인 황태자 건성(建成), 아우 원길(元吉) 등의 질시를 받았으나, 기선을 제압하여 626년 현무문에서 형제를 사살하고 그 해에 즉위하였다. 국내 통일의 일단락을 짓자, 이민족의 제압에 착수하여, 630년 강적 동돌궐의 힐리가한을 사로 잡은 것을 위시하여, 토욕혼·토번·고창·서돌궐·설연타를 정복하였으므로 북변·서변·서역이 모두 당의 영토가 되었고, 남방 제국을 조공시켜 미증유의 판도를 이루었다. 정복지에는 이른바 기미 정책을 실행하여, 황제는 여러 수장으로부터 천가한의 칭호를 받아 번한 공통의 군주가 되었다. 국내 통치에도 주력하여 부역·형벌의 경감, 사치의 금지, 관제의 정비, 인재의 등용에 용심하였다. 수 멸망의 전철을 피하기 위해, 항상 신료와 치도를 논하고 황태자를 위하여 '제범(帝範)' 4권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또 '진서(晋書)' '양서(梁書)' '진서(陳書)' '주서(周書)' '수서(隋書)' 등 전대의 역사를 편찬케 하고 '진서(晋書)'는 친히 붓을 들었다. 한편 수말의 내란 때 성장한 군웅들을 어떻게 당조에 심복시키는가는 태 종조의 중요 문제였다. 태종은 그들을 관료제에 의하여 흡수하려고 하여, 문학·유학을 장려하였으며 홍문관을 두고 국자감을 확장하였다. 또 '오경정의'를 편찬케 하여 전대 이래의 해석을 통일하였다. 이러 한 외정·내치에 기여한 공신 20여 명의 초상화를 능연각(凌煙閣)에 걸게 했다. 그 치세는 정관(貞觀)의 치(治)라 하여 후대 황제의 모범이 되었다. 다만 만년에 손을 댄 고구려 원정은 고구려인의 불굴의 저항으로 실패하였다. 이 전쟁의 피해는 멀리 쓰촨에까지 미치어 각지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동아시아 문화권의 형성 :
아시아 세계에서 문명의 발생과 그 발전 지역을 문화의 유형에 따라 살펴보면, 황하 문명에서 시작된 동아시아 문화권과 인더스 문명을 중심으로 하는 인도 문화권,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시작된 서아시아 문화권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한대에 형성되기 시작한 동아시아 문화권은 위·진·남북조의 혼란과 분열 시대를 거쳐 마침내 당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동아시아 문화권의 4대 기본 요소가 되는 유교와 불교, 그리고 율령 체제와 한자가 지속적으로 발전되어 내려오다가 당대에 이르러 거의 완성 단계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6세기말의 수의 중국 통일과 이를 이은 당 제국의 출현은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와 동맹한 당의 침략에 의해 멸망하여, 한반도에 통일 국가가 출현했으며, 만주에는 발해가 건국하여 당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당 제국의 영토적 확대와 6도호부의 설치로 아시아 각국 이 직접 당과 정치·군사면에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기미(羈靡) 정책이나 책봉 체제(冊封 體制) 에 의한 조공 관계로 긴밀한 문화적 교류관계를 갖게 되었다. 특히 당의 개방주의 정책으로 당과 주변 국간의 정치·문화면에서의 교류가 촉진되어, 8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문화적 교류가 절정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통일 신라의 찬란한 문화나 나라·헤이안 시대의 일본 고대 문화, 그리고 발해의 문화는 다같이 자국 문화의 기반 위에 당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결과이다. 그러나 당 왕조가 멸망하는 10세기 초를 시작으로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는 붕괴되고 동아시아 문화권도 새로운 형태로 변형되어 나갔다 2. 인디아: http://depts.washington.edu/uwch/silkroad/exhibit/guptas/images/map.jpg 굽타왕조가 훈족에게 멸망된 후(550) 많은 소국으로 분리됨. 3. 중앙아시아:
6세기 시작시 아시아 정세 http://depts.washington.edu/uwch/silkroad/exhibit/juan_juan/images/map.jpg
552년 돌궐제국 형성:
유연의 쇠퇴는 헤프탈의 북진에 좋은 조건을 부여하였고, 그 지배 아래 있던 돌궐(Turkit)의 발흥을 촉진하였다. 돌궐은 남북조 시대 중엽에서 당 초에 이르는 동안 몽고 고원과 알타이 산맥 지방을 중심으로 활약한 투르크계의 유목 기마 민족 또는 그들이 지배한 국가명을 일컫는다. 투르크 종족은 B.C. 3 세기 말엽부터 정령(丁零)·고차(高車)·철륵(鐵勒) 등의 명칭으로 중국 사료에 나타나 있다. 처음에는 유연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6세기 초 돌궐족은 알타이 지역에서 대장장이 일을 하며 지내다가 552년 우두머리인 부민칸이 서위의 도움으로 유연을 격퇴하고 오르콘 강 근방으로 본거지를 옮겨 돌궐제국을 세운다. 이 돌궐은 그 뒤 더욱 강대해져 사산 조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어 헤프탈을 멸하고, 이어서 멀리 로마에 사신을 보내어 동맹을 맺어 페르시아를 협공코자 하였다. 이리하여 돌궐은 북은 시베리아, 남은 중국, 동은 만주, 서는 페르시아에 접하는 유목민족 미증유의 큰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이 돌궐도 581년 이후 내분이 일어나 동서로 갈라져 부민칸의 아들 무한은 동돌궐로 내, 외몽골을 장악했고 부민칸의 동생 이스테미는 서돌궐을 세워 일리 강을 중심으로 한 서투르키스탄을 차지하였다(야브구국(Yabghu, 현재의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그리하여 중국, 사산조 페르시아, 비잔티움은 돌궐제국에 많은 시달림을 받는다.
동돌궐 :
당은 동돌궐의 힘을 빌려 나라를 세웠던만큼 항상 그들의 멸시를 받았다. 동돌궐의 오만한 태도에 이 를 갈고 있던 당 태종은 동돌궐에 내분이 일어나 철륵 제부족의 이반함을 보자, 철륵 제부족 가운데서 도 가장 강한 시르타르더스(Syrtardus, 설정타)와 손을 잡아 동돌궐을 쳐부수고, 시르타르더스가 강성해지자 이번에는 시르타르더스에서 이반한 위구르(Uyghur)와 손을 잡고 이를 쳐부셨다. 이리하여 당 태종은 연연도호부를 두고 내외몽고를 지배하였다. 고종때에는 다시 위구르를 쳐 위구르 영내의 오르콘 강 근방에 안북도호부를 두어 외몽고를 지배하고, 내몽고의 운중에 단우도호부를 두어 내몽고를 지배하였다. 이리하여 동돌궐의 전지역은 당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러나 7세기 이후 당의 국내에 동요가 일어나자 다시 동돌궐이 일어나 716년에 즉위한 빌게(Bilge)와 그의 동생 퀼테긴(KulTagin) 시대에 강대 해졌다. 1889년에 발견된 오르콘 비문은 이 두 사람의 공적비로서, 이에 의하여 동돌궐이 북방민족 최초의 문자 사용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동돌궐도 퀼테긴이 죽은 뒤 쇠하여 망하였다(8세기).
서돌궐 :
서돌궐도 그 뒤 내분이 일어나 동부·서부로 나뉘어 서로 싸웠다. 당태종때 서부의 중신 하노(賀魯)란 자가 망명해 와 태종의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태종이 죽자, 그 부하를 이끌고 탈라스(Talas)방면으로 달아나 당에 배반하고 자립하여 샤프라가한(可汗)이라 일컬었다. 그는 그 뒤, 서돌궐 제부족을 통일하여 서역 제국을 지배하는 큰 세력이 되었다. 이에 당의 고종은 그와 사이가 좋지 못한 진주엽호가한과 손을 잡고 샤프라가한을 멸하였다(657). 이리하여 당의 세력은 드디어 파미르 고원을 넘어 서투르키스탄까지 미쳐 661년 토하라(Tokhara)에 기념비를 세웠다. 당은 중앙아시아에 8 도독부를 두어 통치하고, 이를 다시 동투르키스탄의 쿠차(Kucha)에 설치한 안서도호부로 하여금 통할하게 하였다. 서돌궐 중에서 576년 카우카수스 산맥을 넘어서 유럽에 Khazar Khanate로 알려진 최초의 국가를 남부 러시아에 건설(The name Khan derives from the Turkish word Kagan, the ruler of a nomadic empire). 8세기 중반에 지배층은 유대교를 신봉하여 자신들의 종교로 받아들였고, 10세기에는 쇠퇴하다가 키에프 공국에 의해 소멸된다(650-1016). 수는 동돌궐과 화친을 맺어 서돌궐에 대항하였다.
카자리아:
유럽에 세워진 최초의 터키 국가, 유대교를 국교로 한 유일한 비유대인 국가. 기독교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완충지대이며 7-8세기 아랍카자르 전쟁으로 알려진 사건을 통해 이슬람이 카우카스 산맥 북쪽으로 확장하지 못하게 한 장벽역할을 했다.
전체정보 http://www.khazaria.com/ 역사: http://www.khazaria.com/khazar-history.html 지도 http://www.geocities.com/ayatoles/ http://198.62.75.1/www2/koestler/
토번(吐蕃) :
아라비아의 동진을 저지한 것은 토번의 서역 진출과 중앙아시아의 서돌궐 잔여 세력이었다. 토번은 중국에는 저족, 강족으로 알려진 티벳계의 민족이 지금의 티벳 지방에 세운 나라로, 스롱 쓰안 감 포 (Sronbtsam sgam po, 617∼650)왕 때에 라싸에 도읍하고, 당의 공주를 맞아들여 왕후로 삼고, 중국·인 도의 문명을 받아들여 독특한 문자를 만들었다. 이 돌궐은 당 태종의 일격을 받았으나, 즉시 회복하여 고종 때에는 청해 지방을 점령하고 안서 4진을 함락시키고, 중국의 사천·감숙에도 진출하였다. 토번의 전성기는 티스론 떼스안(걸립찬, 755∼797) 때인데, 그는 당의 안사의 난 때에 당으로 쳐들어가 장안을 함락시켰다. 즉시 당의 반격을 받아 물러갔지만, 토번의 하서·용우의 점령은 당말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었다. 또 그는 불교를 일으켜, 이 결과 인도승으로서 티벳에 오는 이가 많았다. 그 중에서도 파드마산 바바는 티벳 고유의 토속 종교(본보교)에 인도의 밀교를 보태어 라마교(lamaism)를 일으켰다. 군사적으로 문화적으로 강성을 자랑하던 이 토번도 9세기 이후 차츰 쇠하였다.
소구드족 http://depts.washington.edu/uwch/silkroad/exhibit/sogdians/sogdians.html http://www.silk-road.com/artl/sogdian.shtml 600년 세상 http://www.hyperhistory.com/online_n2/History_n2/a.html 768년 세상 http://www.ucalgary.ca/applied_history/tutor/firsteuro/imgs/map25.html
II. 그리스도인의 상황
A. 유럽: 중세교회형성 http://www.fordham.edu/halsall/sbook1e.html 1. 게르만족의 침략으로 로마 세계가 재형성된다. 2. 영웅적인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전 유럽으로 기독교의 확산 3. 수도원주의로 교회의 세속화를 견제하고 학문과 성경을 보전하며 선교와 교육을 담담한다. 4. 교황제가 시작된다. 교황 그레고리1세는 오늘날의 미사형태를 확정한다. 5. 장원제도가 형성된다. 6. 교회와 국가의 상호관계가 형성된다. 7. 교회 분리의 위협이 표면화된다. 동로마: 519년 이후 단성론 포기(Henoticon 포기)함으로 서로마와 화해하나 정통주의, 단성론, 네스토리안의 분리는 가속화된다. 8. 이교도의 문화가 기독교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한다. 8. 이슬람이 기독교의 중심지를 장악하고 기독교의 가장 강력한 위협으로 등장
B. 아시아: 1. 사산조 페르시아 치하의 기독교(- 651): 페르시아 교회의 도약기
a. 교구확장
1) 410년 1차 페르시아교회 공의회: 1명의 총대주교, 5명의 대주교, 38명의 주교. 424년 제3차 공의회: 1명의 총대주교, 6명의 대주교, 54명의 주교. 2) 5세기말 6세기 중엽의 페르시아교회의 교구: 유프라테스 강의 동쪽에서부터 시작하여 서쪽으로 확대하여 이집트, 시리아, 아라비아, 소코트라, 메소포타미아. 갈디아. 페르시아. 메디아, 박트리아(백훈족), 힐카니아, 서남인도; 페르시아 셀류키아 테시폰 총대주교(Patriach: seleucia-Ctesiphon) 바바이 시대(497-502)의 관할 대교구(metropolitan provinces)와 직할 교구(bishoprics)
(1) Province of Patriarchalis. Metropolitan at Kaskar, a bishop at Hira(아라비아교회들이 소속됨). (2) Province of Nisibis, Metropolitan at Nisibis, a bishop at Bakerda. (3) Province of Teredon. Metropolitan at Basrah, a bishop probably at Destesana, and a church, if not a bishopric, at Nahar-al-Marah. (4) Province of Adiabene. Metropolitan at Erbil, bishops at Honia and Maalta. (5) Provinces of Garamaea. Metropolitan at Karkha, bishops at Sciaarchadata and Dakuka. (6) Province of Khurasan. Metropolitan at Merv. (7) Province of Atropatene. Metropolitan at Taurisium. (8) Province of Susiana. Metropolitan at Jundishapur, bishops at Susa, Ahwaz, Suster(522년). (9) Provinces of Rawardshir. (10) Provinces of Rai (11) Provinces of Herat.
대교구에 소속되지 않은 교구: Maiperkat, Ninevdh, singara, Arangerda, Ispahan, Nishapur, Segestan
3) 수도원 Mount Izala near Nisibis(원장은 페르시아교회의 총대주교 다음의 위치에 있을 정도로 큰 영향력을 가짐), Dorkena near Seleucia(총대주교의 무덤이 위치), Tela, Baxaja, Haigla, Henda, Zarnucha, Camula, Anbar, Beth-Zabda, Chuchta, Kuph.
4) 522년 여행하고 547년 저작 완료한 이집트 네스토리안 수도승인 Cosmas Indicopleustes의 Christian Topography에 따르면 "Even in Taprobane(현재의 Ceylon), an island in Further India, where the indian sea is, there is a Church of Christians, with clergy and a body of believers, but I know not whether there be any Christians in the parts beyond it. In the country called Male(현재의 Malabar), where the pepper grows, there is also a church, and at another place called Calliana(현재의 there is moreover a bishop, who is appointed from Persia. In the island, again, called the Island of Dioscorides(Socotra), which is situated in the same Indian sea, and where the inhabitants speak greek, having been originally colonists sent thither by the Ptolemies who succeeded Alexander the Macedonian, there are clergy whod receive their ordination in Persia, and are sent on to the island, and there is also a multitude of Christians(3장 178).”
... "And so likewise among the Bactrians and, Huns and Persians, and the rest of the Indians, Persarmenians, and Medes and Elamites and throughout the whole land of Persia there is no limit to the numver of churches with bishops and very large communities of Christian people, as well as many martyrs, and monks also living as hermits. So too in Ethiopia and Axom, and in all the country about it; among the people of Happy Arabia-who are now called Homerites-through all Arabia and Palestine, Phoenicia, and all Syria and Antioch as far as Mesopotamia(3장 179).”
... “There is a large aceanic island lying in the Indian sea. By, the Indians it is called Sielediba, but by the Greeks Taprobane, .... The island has also a church of Persian Christians who have settled there, and a Presbyter who is appointed from Persia, and a deacon and a complete ecclesiastical ritual. But the natives and their kings are heathens(11장 336, 337).”
5) Assemani quotes Cosmas as having in the year A.D. 525 found Christians not only in Socotra and Ceylon but in the Ganges valley, Pegu, Cochinchina, Siam and Tonquin.(Bibliotheca Orientalis, Vol. III, part 2.)
6) 총대주교
Babai (497-502) 497년 제5차 공의회에서 페르시아내의 단성론자(베이트 라파트 감독이며 페르시아교회의 서열 2위이며 페르시아 교회내의 단성론자의 대부)를 징계함으로서 페르시아교회의 단성론 콘스탄티노플에서 독립, 기독교의 쇠퇴기(도덕적 타락)
Silas (505-523) 교회족벌주의, 교회보다 가정(공처가)이 품고있던 야망실현에 더 관심
Narses and Elisaeus (524-539) 교회의 혼란스러운 분열, Elisaeus는 Silas의 사위였는데 족벌 정치에 반대하여 감독들이 Narses를 총대주교로 지명. 교권쟁탈전,
Paulus (539) 샤의 친구이며 Beit Papat, Gundeshapur의 주교였으나 2달만에 사망
Mar Aba I, (540-552) 교회 개혁시기, 가장 위대한 총대주교, 조로아스터교에서 개종자, 페르시아와 콘스탄티노플간의 22년간 전쟁 시작, 재직 기간중 7년을 감옥이나 망명상태에서 교회를 치리, 교회는 318명의 주교가 있었다.
두드러진 업적
1. 교회를 완전히 재조직: 떠돌아 다니는 공의회 실시로 두명 이상의 동일 교구를 정비, 544년 마르 아바 공의회에서 최종 정비
2. 신학교 교육을 정비하고 활력불어 넣음, 모든 교인들이 쉽게 이해하고 고백할 수 있는 신앙고백문을 만들었다. 수도인 셀루키아 테시폰에 신학교 설립추진
3. 교회를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부흥시킴: 분열기간에 기독교인들은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타락하고 비도덕적이고 지나치게 탐욕스럽고 사치스럽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제자같기보다 조로아스터교 신자같이 되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기독교적 단순성으로 복귀. 수도원 운동의 부활 독려, 정치에 지배당하는 교회구조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으며 교회가 새로운 힘의 중심지가 되게 했다.
4. 기독교인의 연합에 전력하였다. 544년 공의회에서 칼케돈회의의 신조와 포고문을 채택함으로서 정통주의에 합류. 교회의 기본입장이 니케아회의와 동일함을 선포. 반면 서방은 일치운동을 거부
544년경의 기독교 박해에서 마르 아바는 개종했고 개종시켰다는 명목으로 재판받았다. 이후 긴 박해와 음모와 위기에서 기독교를 수호하고 페르시아왕의존경을 받았다. 552년경 헤프탈의 대표가 와서 자신의 나라의 감독으로서 기독교 지도자를 임명해달라는 용청을 함.
Joseph (552-567)
코에로에스 1세의 개인 의사였고 왕의 임명받은 비양심적이며 독재적인 폭군. 감독들에 의해 퇴위당했으나 570년까지 왕에의해 파면되지 않았다. 이 시기에 동로마의 황제 저스티니안(Justinian)은 아프리카와 시리아의 단성론파를 되찾고 자신의 제국을 통합하려는 의도로 553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세명의 네스토리안 지도자(데오도렛, 사이러스의 데로도로, 에뎃사의 히바)의 공식적인 유죄판결을 이끌어냈다.
Ezechiel (570-581)
총대주교 마르 아바의 전직 빵굽는 자로서 567년 선출되었으나 570년 왕이 허락하기까지 임명되지 못했다. 이 시기에 헤나나가 니시비스의 지도자로 되었다(571년). 그는 전통적으로 인정되어온 데오도렛의 성경해석 방법보다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인 요한 크리소스톰을 선호했다. 신학도 서방 정교회편을 들었다. 이에 따라 네스토리안 추종자들은 네스토리안 신학을 옹호하는 벳 사데학교를 세우고 이즈라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가르쳤다.
Yeshuyab I (582-595)
페르시아왕 로르미즈 4세의 총애를 받았으나 코에로에스 2세의 집권시기에 총애를 잃고 망명중 사망, 585년 제9차 총회에서 헤나나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590년의 종교회의에서는 헤나나를 칭찬했다.
Sabaryeshu I (596-604)
성자로서 왕의 가장 총애받은 부인인 시린에게 존경을 받음, 은둔자로서 선교사로서 유명, 선출시 감독들의 천거된 5명의 명단에 없었으나 왕에 의해 임명됨, 기독교인에 대한 우호감을 가지고 있는 페르시아왕 코스로에스 2세는 기독교인들을 위해 많은 네스토리안 교회를 건축했다. 그리고 헤나나를 두둔했다. 그런데 왕비 시린과 왕의 주치의인 가브리엘이 단성론으로 개종하였다. 596년 종교회의에서 헤나나는 니시비스 신학교에 계속 있었으나 교회에서의 기반은 상실하고 교회는 단성론과 네스토리아파로 분리되고 헤나나의 영향력도 학교에서 끝이나면서 분열되었다. 학생들의 대다수는 니스비스를 떠나 다른 학교로 흩어져서 페르시아 기독교의 지적 중심지가 흩어졌다(주로 개혁 수도원의 중심지인 이즈라산의 대수도원, 세루키아 테시폰의 학교, 코스로에스 1세가 콘스탄티노플의 기독교 포로들을 위해 세운 군데샤푸르 학교-의학과 성서연구와 희랍 철학자들의 작품번역을 전문으로 하는 철학연구의 중심지)
Gregory (605-608)
계략으로 임명되었다. 왕은 강경한 정통파 니시비스의 감독인 그레고리를 지명했으나 감독단들은 얼마전 추방한 그레고리를 거부하고 이름이 같은 셀루키아 테시폰의 네스토리안 교사를 선택한다. 이에 왕은 더 이상 총대주교를 선임해주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공석 (608-628)
왕은 새로운 총대주교를 임명하지 않았다. 네스토리안과 단성론파가 교권다툼함. 이때에 이즈라 산의 대 수도원 원장인 대바바이는 페르시아 전역을 순회하며 교회를 관리하였다.
Yeshuyab II (628-643)
기독교회로부터와 조로아스터교 페르시아 사람들에게도 인정받은 뛰어난 행정가며 정치가인 헌신된 성직자, 감독사절단을 인도하여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전쟁 종료를 요구하고 신학적으로 탁월한 황제 헤라클리우스와 논쟁하며 콘스탄티노플의 정통주의에 맞추려고 노력하여 평화를 이룩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이단시비에서 지혜롭게 처신하여 교회의 평화를 이끌었으며 침략하는 무슬림과 평화적 관계를 정착하기 위해 아랍과 호이적인 상태로 연합했다. 그리고 인디아에 첫 대주교구를 만들었으며 당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페르시아교회가 아시아교회가 되게 하였다.
Maremes (647-650) Yeshuyab III (650-660) 1명의 총대주교, 9명의 대주교, 96명의 주교. b. 수도원 운동의 부흥
6세기에 기독교 수도원 운동의 부흥이 페르시아 전역에 퍼졌다. 카스카르의 아브라함(491-586)이 주도. 페르시아의 수도사들과 금욕주의자들은 기독교인들의 본이 되었다. 5세기 후반에 규율이 완화되고 수도사가 공개적으로 부인을 두고 살게 되었고(484년 공의회에서 주교의 결혼 허용) 교회의 쇠퇴기로 들어간다. 아브라함은 니스비스 학교에서 베이트 랍반의 아브라함에게서 공부한 후 아라비아와 남동쪽에 국경을 대하고 있는 히라(Hira)의 거의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는 락미드 왕국에 거주하는 아랍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었다. 거기에서 이집트로 여행하다가 Scete 주변에 있는 대사막내의 수도원에 거주하는 수도사들의 금욕적인 규율과 엄격한 생활방식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귀환후 니시비스 근처의 산간 지역에 은둔하면서 이즈라(Izra)수도원을 세운다. 그리고 페르시아 교회의 영적인 토대가 된다. 규칙은 성경의 권위들과 교부들의 전통에 크게 의존하고 엄격한 기도와 예배를 고집하며 사랑 가운데 관대하고 하나되는데 전력을 다한다. 네스토리우스식의 삭발을 고안했다.
d. 페르시아에서 서방과 단성론과 네스토리안의 신학적 갈등과 세력 다툼
동로마에서는 황제 제노와 아타스타시우스의 치세하에서 단성론이 득세하였다. 그러나 동서로마의 통합을 시도한 제스틴 1세(518-527)와 그의 조카 저스티니안(527-565통치)에서는 칼케돈주의자들이 득세했다. 이로써 동서교회의 분열은 끝이 났다(487-519). 그리고 단성론에 대한 박해는 시작되고 많은 단성론 성직자들이 추방되어 페르시아로 들어갔다. 그리고 비잔틴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아시아의 많은 지역이 단성론에 대한 대중적 지원이 있었다. 특히 조직과 선교의 천제인 야곱 바라대우스(Jacob Bardaeus-헝겁누더기 야곱)의 활동으로 박해속의 단성론은 정교회 안에서 콘스탄티노플에서 페르시아국경까지의 영역에서 독자적인 교단으로 발전했다(불신자 1만명을 개종시키고 27명의 감독과 2명의 총대주교 임명, 시리아 단성론을 야곱파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있다). 그리고 단성론파의 평신도들이 페르시아와 교역하며 자신들의 신앙을 전파하였다. 그리고 페르시아와 로마의 전쟁에서 많은 수의 기독교인들이 포로로 페르시아에 정착하게 된다. 선교에 열정적인 단성론자들은 이러한 동로마 포로들에게 선교하고 페르시아내의 네스토리안 멜렛내의 소수파로 남아있게 된다. 그러나 시린 왕후가 단성론으로 개종하면서 페르시아 내의 단성론은 네스토리안에게 도전하게 된다.
네스토리안의 그리스도의 개체에 대한 신학적 입장은 “한 위격(parsopa=prosopon=person) 안에 두 성품(keyane=physis=nature)과 두 본체(qenuma=hypostasis or )"로서 두 성품의 각각의 독립적인 특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니케아회의 결정후에 약화되는 경향이 있는 그리스도의 인성의 중요성을 표현하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단성론은 "한 인격(hypostasis)과 하나님과 인간으로 구성된 한 성품(physis)”으로서 두 성품의 분리로 인한 신성의 약화를 우려하여 하나의 성품 즉 신성안에 인성을 말함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중요시한다. 한편 서방이 중심되어 형성한 칼케돈회의는 “한 위격 안의 두 성품(two natures in one person)"을 말하며 두성품의 독립적 성격을 규정함으로 단성론의 반발을 가져왔고 하나의 위격(hypostasis)을 말함으로 네스토리안의 불만을 가져왔다. 단성론자들은 네스토리안을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이라 공격했으며 서방교회는 네스토리안을 외적으로만 일치된 두 위격으로 분리하는 자들(양성양체자들 또는 양성단체자들)이라 했다. 이에 대해 네스토리안은 서방교회의 주장(킬케돈회의 결정사항)를 받아들이며 그리스도를 두 위격으로 나주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칼케돈회의의 하나의 위격이라는 말이 양성의 독립된 분리를 약화시킴으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태초부터 존재하는 연합을 가지신, 말씀이신 하나님 사이에 놀라운 결합과 파괴될 수 없는 연합이 있다. 이 사실이 우리들에게 알리는 바는 시작도 없이. 만세 전에 아버지에 의해 신성을 가지고 태어났고, 마침내 다윗의 딸인 성녀 마리아의 인성르 가지고 탄생한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하나의 위격을 우리가 아는 것이다.”
신학 논쟁에서 네스토리안은 자신들이 서방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주장함으로 단성론과의 신학논쟁에서 승리하였다. 그러자 단성론자인 가브리엘은 네스토리안 지도자인 수도사 조오지가 조로아스터교에서 개종한 불법자임을 고소한다. 사실 이 조항은 박해시 외에는 사용되지 않는 법이었다. 그리하여 개종을 당당히 인정한 조오지는 사형을 당하게 된다.
신학대논쟁 후에 가브리엘의 영향력으로 숫자의 증가를 본 단성론파는 605년 쿠르디스탄 출신의 에뎃사에서 교육받고 돌아온 마루타의 지휘아래 벌어진 선교운동으로 진정한 확장을 맞이한다. 마루타는 가브리엘과 셀루키아 테시폰의 단성론 감독인 사무엘의 친구로서 학교를 조직하고 전 제국을 개종시키기 위해 선교사를 보냈다. 628년 코스로에스 사후 네스토리안이 새로운 총대주교를 선임할 때 단성론자들도 야곱파 시리아 총대주교의 권위아래에 있는 페르시아 내의 첫 번째 야곱파 교회의 마프리안으로 마루타를 선임한다. 그리하여 페르시아내에서 기독교는 하나의 통일된 멜렛이 아니라 두개의 멜렛이 생기게 된다.
c.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
기독교인은 의사, 통역사, 학자, 유능한 사무관, 재무관, 상인, 기능공등으로 국가의 중요 직책을 맡았으나 페르시아는 제국내의 소수파를 통제하는 장치인 멜렛(Melet)제도법은 기독교인들을 인정받은 지위에 있게 했으나 제국의 일반 문제들로부터 격리되고 억제된 그룹이 되게했다. 지주나 봉건영주나 그의 가족들에게서 기독교인은 없었고 군인에게는 전무했다. 문관은 상당한 숫자가 기독교도이고 법관은 교회법이므로 종교에 따라 배분되고 의학계는 기독교가 독점, 정치적인 중립, 기독교인은 기독교 멜렛에서만 정치권력을 행사했다. 국교인 조로아스터교 교도와 동등하지 않은 신분이고 열세였다. 기독교인 독특한 양식의 복장을 입어야 했다(기독교인의 겸손한 옷). 6세기의 페르시아 기독교인은 부유해지고 영향력이 커졌으나 사회적으로는 중류층이거나 그 이하로 구성되었다. 개종은 불법이었으므로 조로아스터교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페르시아에서 조로아스터교 다음의 힘있는 종교가 되었다.
2. 인디아 기독교
a. 여러 가지 흔적과 회중의 존재가 있었음에도 4세기까지 독자적인 인도교회 기관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b. 5세기 초반 페르시아교회와 인도교회의 유대는 조직화되고 강화되었다. 인도 기독교 공동체는 페르시아 교회로부터 교회 정치상 독립되었다. 인도교회에 대한 페르시아 교회의 통치는 페르시아와 인도간의 직항해상로에 있던 레와다쉬르 주교구에 속해 있었다. 이 주교구는 410, 420년경 대주교구로 승격되었고 인도교회에 대한 사법권을 가졌다. 인도교회에서 사용된 언어는 시리아였다. 인도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사제를 페르시아에 보내 공부시켰다. 6세기 초 코스마스의 기독교 지형학에서 스리랑카에 페르시아 교회가 있고 사제가 있음을 말한다. 6세기 중반에 인디아 기독교는 감독과 사제와 신자들로 구성된 조직 교회였고, 페르시아 네스토리우스 교회와 깊이 관련되어 있었으며, 인도에서 소수 공동체로 존재했다. 초대교회와 연결된 전통과 국제적인 기독교 조직망과의 연계성과 인도방식의 토착화된 예배형식을 지닌 기독교 집단이었다. 7세기 초에는 인도기독교도 확장되어서 인도교회는 대주교구가 되어 독자적인 치리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3. 아라비아 기독교: 기독교의 중심지는 아라비아 반도의 북서에 위치한 가산 왕국, 북동의 락미드 왕국, 남서의 힘야리트 왕국이었다. 그러나 가산왕국은 이미 4세기에 비잔틴로마에 속국이 되었고 락미드왕국은 페르시아에 흡수되었다. 힘랴리드왕국은 독립국으로 있다가 유대교와 단성론 기독교의 대립관계로 인해 결과적으로 외국의 지배하에 있게 된다.
유대교 아랍인들과 단성론파 기독교 아랍인들의 대립상황에서 기독교인은 이디오피아 기독교인의 도움을 호소했고 523년 이디오피아의 기독교인 통치자는 아라비아 통치권을 요구하며 침략하였고 유대교와 이교도들이 힘을 합친 힘야리트 족은 기독교도와 이디오피아 동맹군을 무찌르고 주변에 있는 기독교도를 대량학살한다(427명의 성직자를 화형에 처하고 4252명의 신자들을 죽였고 1297명의 유소년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이디오피와 다시 전쟁하고 이디오피아가 승리하자 이번에는 유대인에 대한 대량학살이 자행된다. 그리고 기독교도 왕인 아브라하의 이디오피아 정권이 세워진다. 아브라하는 당대의 가장 화려한 성당을 자신의 수도에 건축하여 메카에 있는 카바신전에 필적하는 아라비안 종교 순례의 중심지가 되게 했다. 그런데 베두인들이 이 성전을 더럽히자 571년 경 아브라하는 코끼리를 타고 메카를 침공한다. 그러나 무하마드의 조부인 아브드 알 무탈립에 의해 패배한다. 그리고 이 정권은 575년경 페르시아에 의해 정복되어 페르시안 걸프만의 헤랏에 귀속되어 페르시아의 인도양 해상로 장악의 연결점이 되었다.
아라비아의 초기 기독교 선교는 매우 미약하여 이슬람이 발흥하기 전에 아랍 기독교가 형성된 지역은 모두 외국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아라비아의 기독교는 모두 토착적인 형태가 아니라 외래적인 형태가 되었고 성경이 아랍어로 번역조차 되지 못했다.
2. 이슬람치하에서 기독교: 참고 서원모의 이슬람과 기독교 http://cafe.daum.net/overview 자료실-전체교회사-23번
이슬람은 유럽교회를 황폐하게 만들었으나 페르시아의 기독교에게는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았다. 페르시아 기독교는 아랍인들을 조로아스터교의 박해로부터 해방시킨 자들로 간주하고 환영했으며 아랍정복자들도 기독교도를 자신의 권익을 위해 이용하였다. 그러나 아랍 기독교도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던지 죽음을 선택하던지 둘 중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비아랍인 기독교도에게는 딤미로 알려진 종교 거주지로 몰려 점점 쇠퇴해가던지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선택이 주어졌다. 페르시아를 정복한 아랍은 도시를 피하여 바스라와 쿠파와 같은 지역에서 캠프를 치며 문명지대를 통치할 제도를 만들었다. 아랍인들은 기독교도를 사회에서 분리시켰고 타지역으로 집단 이주시켰고 자신들의 공동체를 형서하게 하고는 정치적인 권리를 제한시키면서 특수한 일에 이들을 고용하였다. 물론 군대 봉사는 금지되었다. 기독교도와 유대인들은 의사, 음악가, 상인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특히 당시에 최상의 교육을 받은 기독교도들은 아랍 집권자들의 행정적인 비서로, 철학자로, 설계사로, 과학자로. 예술가로서 일을 하였다. 몇몇은 국가적으로 또는 지역정부에서 최고로 존경받는 위치에 까지 올라갔다. 아랍 점령 초기에는 제국의 비아랍 행정은 아랍어가 아니라 헬라어나 페르시아어나 콥틱어로 행해졌으므로 수많은 기독교도 비서관이 등용되었다.
페르시아의 네스토리안들은 아랍에 가장 적극적인 호의를 보인 기독교였다. 그리하여 총대주교는 페르시아의 수도인 셀루키아 테시폰에 거주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단성론자들의 신분은 오히려 개선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통치하에서는 법적위치를 인정받지 못했으나 이슬람 정권은 이들을 법적으로 인정해주었다. 아랍제국 하의 시리아 단성론인 야곱파는 유프라테스에 위치한 케네쉐르 수도원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네스토리안의 니시비스학교와 견줄 야곱파 학교에서 배출한 두 명의 지도자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에뎃사의 야곱(633-708)과 아랍족속의 감독인 조오지(686-724)였다. 전자는 완역판 시리아어 구약성서와 시리아 예식서를 만들었고, 후자는 시리아어 주석을 만들었다.
수도를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로 옮긴 우마위야 제국은 거의 1세기 동안 기독교도에게 상당한 관용을 베풀고 도움을 받아 존재했다. 정통주의자들은 교회 사무에서 비잔틴 왕들의 간섭을 받지않았고, 단성론은 박해에서 벗어났으며 네스토리안은 신분의 상승을 경험했다. 그리고 같은 아시아인이며 언어적 기원과 오랜 역사적 친숙함은 그리이스 로마인의 외래적 경향과는 구별되는 것이었다. 이 이시대에 기독교인들은 아랍제국의 기초를 다졌다. 이슬람 언어로 쓰여진 최초의 과학서적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시리아 기독교 사제에 의해서 만들어진 의학논문이며, 이것은 페르시아 유대인 의사에 의해서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우마위야 제국의 재정담담 최고 책임자였던 이븐 우탈 (Ibn Uthal) 은 기독교인 의사였다. 다마스커스시대의 첫째 칼리파인 무야위야(Muawiya 1세 680-683)의 주치의로 있다가 그의 신실함으로 재정행정가로 승진한다. 그리고 그의 아들도 행정관으로 지내게된다. 그리고 알 아크달(al-Akthal)은 고등법원에서 일하고 제국의 계관시인으로 불리워졌다.
그리고 이븐 우탈의 손자로서 태어나서 행정가로 일했다가 나중에 수도승이 되어서 헬라교회의 마지막 신학자와 최초로 이슬람에 대한 기독교 변증가가 되었던 다마스커스의 요한(657-749)는 이 시대의 대표적 기독교인이었다(무슬림의 하나님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니다. 요한의 하나님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그는 아랍어와 헬라어에 능숙한 사람이었고 그의 저작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의 모델이 되었다. 그는 쌀쌀하게 무함마드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그는 논쟁하기를 좋아하며 도전적인 태도를 가졌다. http://www.ccel.org/fathers2/NPNF2-09/Npnf2-09-25.htm#P2545_1610599 http://www.balamand.edu.lb/theology/WritingsSJD.htm http://home.it.net.au/~jgrapsas/pages/Damascus.html http://answering-islam.org.uk/Books/MW/john_d.htm http://answering-islam.org.uk/index.html
8세기부터 아랍민족주위가 강화되면서 이슬람으로의 개종이 장려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도는 자신들이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다. 기독교 신앙을 공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금지되었고 세금을 더 많이 내야했고 2등시민의 대접을 받았고 아랍어를 사용해야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이에 적극적인 대응을 시작했다; 묵시문학, 기독교 신앙을 변증함, 신약성서를 아랍어로 번역한다. 그러나 아랍제국의 종교적 제재, 사회적 제재, 경제적 제재는 기독교인을 고립시키거나 개종시키는 형태로 나타난다.
아랍제국에서 아랍 딤미(종교적으로 최하층의 거주지)로서 기독교인들은 페르시아에서의 멜렛보다 더 나은 조건에서 살게된다. 기독교인들은 “코란경의 사람들”로서 사산조시대의 군인징집과 노역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나 아랍제국은 비무슬림을 제국의 안전을 위해서 군사의무에서 면제시키는 대신 추가 세금을 내야했다. 사실 이 세금압력은 아랍제국에 속한 비아랍인들을 비아랍개종자가 되게 만든 주요인이 되었다(아랍제국에서의 신분: 아랍 무슬림-비아랍무슬림-비무슬림). 중간층인 비아랍무슬림(mawali)에는 주로 조로아스터교나 기독교에서 개종한 사람들이며, 최하층은 주로 기독교도, 유대인, 조로아스터교도, 마니교도들로서 구성되었는데 자신의 종교의식을 자유롭게 실행하는 데에 상당한 벌금을 내야했다. 이를 오마르 계약이라한다(이 계약은 그 근거를 2대 칼리파에게 두고 있으나 실제로는 800년 정도에 최종적인 법적 편집이 이뤄진다. http://www.fordham.edu/halsall/jewish/jews-umar.html http://www.fordham.edu/halsall/source/pact-umar.html ). 이 계약에는 벌금이 얼마인지를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것이 종교적인 제재였다. 비록 수도원이 파괴되거나 교회안에서의 예배는 허락이 되었으나 기독교의 종교예배에 대한 여러 가지 금지와 전도 금지 무슬림도시에서의 기독교 예배행위 금지등이 나타난다. 이로써 기독교의 선교를 본질적으로 막는다.
사회적 제재는 차별정책으로 나타난다. 이는 사회적인 굴욕감을 형성시킨다. 기독교도들은 처음에는 허리둘레에 구별되는 수건을 매도록 명령받았고 나중에는 외투 앞 뒤로 커다란 노란 헝겊을 달아서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표시해야 했고 머리도 앞 머리를 짧게 깎아야 해고 말 타는 방식도 달라야 했으며 길 갈 때 길 중앙으로 다녀서도 안되면 길 가다 무슬림을 만나면 길을 피해주어야 했다. 모임에서도 중요한 자리에 앉는 것이 금지되었다.
경제적 제재는 가장 심각한 기독교의 쇠퇴를 가져왔다. 기독교도는 자신의 신앙을 유지하는 대신 그 댓가를 돈으로 지불해야했고 예배는 두 배의 세금을 내야만 가능했다. 기독교인에 대한 세금의 의무는 그가 죽었을때에 끝이난다. 그러나 개종하면 모든 무거운 세금에서 면제되었다. 반면 이슬람에로의 개종은 철회될 수 없으며 배교는 죽음의 형벌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 아랍왕조는 얼마가지 못해 종교상 소수집단의 문제가 아니라 내분으로 멸망한다.
경교비문에 기록된 당시의(781) 네스토리우스교의 성직조직은 크게 3부분으로 분류된다. 감독의 역할을 하는 주교, 예배를 주관하는 사제, 보조업무를 수행하는 집사이다.
a. 감독(bishop) 1) 총주교(patriarch, catholicus) 2) 대주교(archbishop, metropolitan) 3) 주교(bishop, episcopus)
b. 사제(prsbyter) 4) 사제(chorepiscopus) 5) 부제(archdeacon) 6) 순회사제(periodeutes)
c. 집사(deacon) 7) 집사(deacon) 8) 집사보(sub-deacon) 9) 독경사(read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