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6-15세기 선교] 선교상황

2013. 5. 10. 18:14운영자자료/5.논문자료 모음

[13-15세기 선교] 선교상황

 

 

 
 

II. 교회 상황

 

A. 로마카톨릭교회

 

로마는 5세기 게르만족의 침입이 있은 이후에 비잔티움의 정치적 라이벌 이었던 게르만족의 신성-로마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1054년 분열 이후 로마 대관구는 교회정치 행정적으로 로마 주교인 교황을 중심적으로 교황중심적 왕정체제와 같은 단일체제의 기독교회(Christemdom)로 발전하였으며, 지리적으로는 종교개혁 시대까지 전 유럽과 북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확장되었으며, 신학적으로는 스콜라주의를 형성. 고딕식 교회건물이 유럽에 퍼지고 교황 Innocent III (1160-1216)에서 교황권의 정점에 도달했다가 Boniface VIII (c. 1234-1303)에서 쇠퇴하기 시작한다(1302년 칙령 "Unam sanctum"을 통해 교황의 우선성을 선포한 것부터 쇠토로 들어감). 1309-1377년은 교회의 바벨론 포로시기이다. 교황은 프랑스의 아비뇽에 거주함으로써 프랑스 왕의 통제아래 있게된다.

 

1378-1417은 대분열시대로서 2-3명의 교황이 서로 자신이 교황임을 주장한다. 이 시기에 신비주의가 유럽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데 특히 독일에서 강하게 나타난다(Meister Eckhardt의 영혼의 불꽃,  Catherine of Siena의 신비적 결혼, 1305-1314년 단테는 당시의 기독교에 대상으로 희곡(Divine Comedy)을 쓴다. 그리고  John Wycliffe는 옥스퍼드를 영국의 영적인 중심지로 만들고 성경을 권위와 진리의 유일한 출처로 본다. 이로인해 1382년 옥스퍼드에서 축출된다. 그리고 그는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고 평신도 설교자를 훈련하여 성경을 퍼트린다. 1398년 John Hus 는 프라그 대학에서 신학을 강의하기 시작하고 위클리프의 사상을 퍼트린다. 1414 -1417년 콘스탄스회의(Council of Constance) 대분열을 마무리하고 존 후스를 이단으로 몰아 화형에 처하고 존 위클리프를 정죄했다. 그리고 종교적 신앙의 문제가 정치적 관심사가 되었다. 그런 반면 토마스 아켐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쓴다. 1451년 프랑스 여성 농부 Joan of Arc가 마녀라는 명목으로 화형당하낟. 1453년 동로마가 멸망하고 성소피아성당이 이슬람 사원이 된다. 같은해 Johann Gutenburg는 인쇄술을 발명하고 처음으로 성경을 인쇄한다. 1479년 스페인에서 이단재판소가 교황의 허락아래 왕에 의해 세워진다. 1498년 이탈리아 플로렌스의 설교자인 Savonarola가 개혁을 회치다 화형당한다. 그런데 이 플로렌스는 메디치 가문의 도움으로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되고 Brunelleschi, Donatello, Michelangelo, Botticelli, and Leonardo da Vinci 등은 기독교적인 주제로 중요한 작품활동을 하기도 하나 교황권의 지지자가 된다.

B. 동방정교회

 

4세기부터 11세 기에 이르기까지 콘스탄티노플은 東方 기독교의 중심지였을 뿐만이 아니라,東 로마제국 또는 비잔틴 제국의 수도이기도 하였다. 반면에  1054년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간의 분열이 일어나던 당시, 동방 정교회 세력은 '신로마'로 불리며, 기독교 문명세계의 수도로 인정받던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여 중동, 발칸반도, 및 러시아에 분포되어 있었다. 동방의 4개 대관구(콘스탄틴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는 사도시대부터 그러했듯이 집단 지도체제를 (the collegiality)중심으로 교회체제를 운영하였으며, 7-8세기에는 아랍계 이슬람교도들의 침략을 이미 받았고, 이어서 터어키의 이슬람군대의 위협으로 인하여 많은 고난을 겪는 가운데 신학적으로 문화적으로 신비주의적인 성향을 형성하였으며, 게다가 1453년 동 로마제국의 수도이자 동방 정교회 세계의 중심지였던 콘스탄티노플 이 터키 모슬렘군대에 의하여 무참히도 파괴당하고 멸망당한 역사적 사건 이 후에 동방 정교회 세계에서 가장 유능하다고 추정되는 지도력을 가진 나라는 러시아뿐이었다. 불가리아, 세르비아도 이미 터키에 의하여 정복당하였으며, 그 나머지 정교회 지역들도 오래 전에 모슬렘 세력 속으로 흡수되고 말았다.
http://www.cyberspacei.com/jesusi/inlight/religion/christianity/catholicism/eastern/eastern.htm#_Toc501896944

C. 아시아교회: 13-14 세기 교회는 몽골제국 치하에서 생존했다.

 

1. 기독교의 상황:

 

팍스 몽골, 기독교의 확장을 위해 길을 열어준, 짧은 기간의 상대적인 평화와 대륙의 통합, 그리고 종교의 자유, 비단길을 따라 Herat, Samarkand, Kashgar, Almalik(or Tangut), Navekath(위구르 경내), 북경에 독립적인 대주교구 설정.

 

a. Keraits(Turko-Mongolian) 선교:

 

12세기 혹은 13세기에 전 종족이 기독교인이 된 것으로 사료된다. 이 종족은 훗날 한 몽골족의 시시한 족장이며 징기스칸의 아버지인 예수게이를 친절히 대해주었다. 12세기말 케레이트족의 기독교 족장인 Toghrul Wang Khan)은 테무친의 보호자가 되었다. 실제로 이 사람은 프레스터 요한의 이야기의 진원지가 되었다. 나중에 징기스칸에 의해 정복당했으나 케레이트 네스토리안은 징기스칸의 성문법인 야사(yasa or yasak)의 많은 부분을 체계화시켰다. 그리고 결혼관계를 통해 몽골 황실에 기독교의 뿌리를 내렸다. 징기스칸은 케레이트를 병합한후 토오릴의 동생 자아 감보의 세딸을 가족으로 맞이한다.
Ibaka-beki  -징기스칸의 아내
Bektulmish- 징기스의 장남 Jochi의 정실
Sorkaktani- 징기스칸의 4남 Tolui의 아내(3아들은 나중에 몽골의 대칸, 중국의 황제, 일칸)

b. 몽골제국: 13세기는 아시아 기독교의 전성기

 

Jochi-바투 Golden Horde(ordu는 군주들이 머무는 천막을 말한다. horde는 여기에서 나온 말이며 유목민은 군주의 천막을 중심으로 이동한다) 사후 기독교인 아들 사르탁이 승계한다.
Chagatai-트랜스옥시아나와 Turkestan을 포함한 동부중앙아
Ogetai(2대 대칸)-kuyuk(3대 대칸)
Tolui(핵심부 통치자)-기독교도 왕비 Sorkaktani 와의 소생 중 3명이 칸에 오름
     몽케-4대 대칸(기독교인을 아내로 맞이함) 세계정복의 꿈 가짐
     쿠빌라이-중국 정복, 5대 대칸, 원황제
     훌라구-무슬림 페르시아 정복하고 일칸국 창시자됨
     몽케의 막내동생 아릭 부케-기독교인/ Then Arabuccha came out to meet his brother the Chan, and the monk and we perceiving that he would have to pass beside us, advanced toward him with the cross. He recognized us, for he had been previously to our oratory, and held out his hand and made the sign of the cross at us like a bishop. 루브룩의 기록에서
      
소르칵타니 베기-사후 성녀로 숭배와 제사의 대상으로 승화된다.
대립관계: 첫째와 넷째- 둘째와 셋째

1) 원나라에서 기독교

 

쿠빌라이의 집권(1260-1294): 종교에 대한 혼합주의적 관대함, 동생 아릭부케는 독실한 기독교도로서 자신과 뜻을 같이한 몽골 기독교인 모임과 기독교 비밀 결사의 도움으로 쿠빌라이와 권력 투쟁(1260-1264)을 하나 실패한다. 그리고 쿠빌라이의 사촌이자 기독교도인 Nayan은 1287년 중앙아 통치자 카이두의 반란에 동참하여 군기에 십자가를 달고 싸웠으나 졌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하지 않는다. 쿠빌라이는 몽고 전통에 따라 모든 종교에 관대하였다. 그 이유는 실용적이고 정치적인 것에 있었다. 쿠빌라이는 샤머니즘에 기초를 두면서도 자신의 불교도 왕비를 따라 불교에 관심을 가졌다(밀교형태). 그러나 무슬림을 제국의 재정과 조세징수 분야에 사용하고 유교 사당을 수도에 세우고 황제숭배를 포함한 조상숭배를 장려했다. 그리고 기독교를 옹호하기도 한다.

 

쿠빌라이는 고도로 문명화된 한족을 다스리기 위해 중재자를 통하여 통치하는 형태를 취했으므로 기독교인을 포함한 외국 관료들의 힘을 신장시켰다. 원 제국은 4계급으로 통치하였다. 즉 제1계급은 몽고적 특권계급, 제2계급은 이방인들로서 제색목인(여러종류의 사람들이라는 뜻)이라하는데 한족이 아닌 신하들과 모사들이다. 중앙아와 서아시아인들, 페르시아인들. 마르코 폴로같은 서양인들이 속했다. 제3계급은 북중국인이며 제4계급은 남중국인이다. 기독교인들은 이 계급에서 제1과 제2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1289년 쿠빌라이는 늘고있는 기독교인들을 관리하는 관청을 만들었고 쿠빌라이의 모사 이사(Ai-hsueh, 서아시아 출신으로 여러 언어에 능통하고 점성술과 의학을 공부한뒤 구육시대에 관도에 올랐고 쿠빌라이기 즉위한 뒤 1273년에 정섬과 의학을 담당하는 부서-후일 광혜원-를 관장했고 일칸국의 아르군에게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1275년 황실도서관에 해당되는 비서감을 관할)라는 네스토리안 기독교도 사무를 총괄하는 승복사의 장이 되었다. 그는 나중에 유명한 한림원의 승지가 되어 수세기에 걸쳐 유명한 전중국의 학문적 역할을 했다. 그는 황제에게 행하는 현명한 충고로 유명했다. 그의 5 아들이름은 엘리야, 덴하, 흑총, 기와르기스(조오지), 루가 등이었고 고관을 역임했다.  원서(Yuan Shi)에 따르면 이 기관은 동방교회를 관장하며 그 장은 원제국에서 위에서 두 번째에 해당하는 계급이었다. 그리고 원서에는 1289-1320년 동안 72개의 교회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1330년 경 원제국내 네스토리우스교도의 수는 3만명정도이며 매우 부유했다.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나타난 네스토리안의 분포도

 

사마르탄트, 카슈카르(자신들이 교회와 종교를 가지는 투르크인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들오 약간있다), 야르칸드(주민들은 마호메트교를 믿지만 일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들도 있다), 탕구트(주민들은 우상숭배자이지만 일부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이고 사라센들도 있다), 긴긴 탈라스(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우상숭배자들과 마호메트를 숭배하는 사람들과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들이다), 숙주(기독교도도 있고 우상숭배자들도 있다), 감주(주민들은 우상숭배자이지만 마호메트를 숭배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기독교도들도 있는데 그들은 이 도시에 세 채의 크고 아름다운 교회를 가지고 있다), 에르주울(대부분의 주민들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이고 우상숭배자와 마호메트 숭배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링주(주민들은 우상숭배자이며 마호메트를 숭배하기도 하고 약간의 기독교도들도 있다), 에그리가야(사람들은 우상숭배자이지만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들의 교회도 세 채가 있다).

남송이 멸망한후 남중국에도 기독교가 확산된다. 대표적인 예가 마르세르기스의 일곱교회이다. 마르 세르기스는 네스토리우스교도, 1277년 양자강 하류에 있는 진강로 총관부의 부다루가치로 임명되어 5년 재임하면서 그곳에 여섯군데에 교회를 건립했고 항주에도 한 군데에 교회를 세운 인물이다. 동기는 꿈에 계시였다. 그가 세운교회는 다음과 같다.

 

(a) 대흥국사: 철옹문 근처에 있던 자신의 사택에 세운 것으로 원명은 Bash Humra 즉 머리된 교회
(b) 운산사: 서진에 있는 수토산에 지은 것으로 원명은 Tash Humra 즉 반석교회
(c) 취명산사: 수토산위치, 원명은 Duta'ur Humra 즉 안쪽에 위치한 교회
(d) 사독안사: 단도현 개사에 세운 것, 원명은 Talui Humra 즉 거울교회
(e) 고안사: 등운문 밖 황산에 세운것, 원명은 염카야 훔라
(f) 감천사: 대흥국사 옆에 위치. 원명은 Mar Giwargis Humra 즉 마르 기와르기스교회
진강부에 교회와 기독교인 거주(인구의 1%)했고 주교가 초청받아왔다(불국에서 마르카시야마르시레문아피스코파)
기독교도는 진강외에도 양주, 천주, 장주등지에도 확인된다.

만주와 고려에서의 기독교: 12세기초 요금 교체기에 기독교가 만주에 존재했다는 증거가 있고 교려에 들어와 활동하던 네스토리우스 교도에 대한 분명한 기록이 있다(1300년 정도행성의 평장사로 임명되어온 기와르기스(활리길사)).

2) 중앙아 몽골에서의 기독교

 

  대칸 경쟁에서 패배한 차카타이는 중앙아를 누비며 유목민으로 산다. 투르크어를 사용하고 동서양의 대상 교역로를 장악하나 1269년 두부분으로 나뉜다. 즉 동, 서 투르키스탄이다. 그리고 1266년 여섯째칸인 무바락이 이슬람으로 개종했으나 진심은 아니었다.

동투르키스탄은 오그타이계 카이두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는 샤머니즘을 고수하였으나 종교에 대해서는 관대하였다. 기독교도나 이슬람교도를 보호해주었다.

서투루키스탄은 차카타이 후손들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들은 점점 타쉬켄트, 보카라, 사마르칸트로 집중되면서 국가 행정은 무슬림 관리들에게 맡겼다. 왜냐하면 이 지역은 이미 9세기부터 이슬람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큰 도시에서 기독교인과 교회가 존재했다. 전쟁외의 모든 부분은 이슬람의 영향력 속에 있었다. 1301년 카이두 사후 동투르키스탄의 많은 부분이 서투르키스탄에로 편입되었고 기독교는 점점 더 무슬림에 의해 압박을 받게 된다.

 

1326년 도미니칸 선교사인 Mancasol의 도마가 방문하여 사마르칸드에 세례 요한을 기념하는 교회를 세우자 교황은 도마를 사마르칸드의 감독으로 임명한다. 1334년 통치자 부잔은 네스토리우스교에게 교회를 재건할 수 있게 했고 프란시스칸이 차카타이 칸국의 수도 알말릭에서 사역하게 했다. 차카타이 칸국의 마지막 칸인 칭쉬(1334-1338)은 카톨릭을 옹호했으나 살해 당한다. 칭쉬의 사후 알말락에서 기독교인들이 대량 학살된다(알말릭의 감독 리차드와 여섯명의 프란시스칸 순교). 마리뇰리의 방문으로 교회 하나를 세울수 있었고 세례를 행하고 설교하였다. 이시쿨 호수 부근 차카타이 칸국의 핵심부에 기독교 공동체가 존재했다(1249년과 1345년 사이에 죽은 공동묘지 발굴).

2) 몽골 페르시아(일칸국)에서의 기독교

 

Hulegu(1256-1265): 기독교인 도쿠즈 카툰(토오릴의 손녀로 톨루이의 부인이었다가 톨루이사후 훌라구에게 인계됨)을 아내로 맞이한다. 도쿠즈 카툰은 서방원정시 훌레구를 동행한다.  압바스조를 공격할 때 몽골군의 첨병대 지휘관은 네스토리안 기독교인이며 서방으로 이동시 중앙아시아와 남러시아 지방의 기독교를 믿는 종족들이 대거 합류. 1258년 바그다드를 멸망시킬때 교회로 피난한 기독교인은 보호되었다. 새로운 콘스탄틴으로 부상된다.  1259년 기독교 장군이 이끄는 후레구의 군대는 시리아를 접수하였다. 그리고 십자군에 의해 개척된 지중해 해안의 기독교 통치자와 연합으로 무슬림 이집트를 점령하려고 진군한다. 그러나 이집트에 패배한다. 이유:

 

1. 1259년 대칸 몽케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대권 승계 문제로 후레구는 1만여명의 군사만 남기고 몽골로 철수,

2. 몽골왕실의 내분,

3. 십자군들의 배신(몽골보다 무슬림 이집트를 도움),

4. 살라딘 사후 이집트는 노예전사들이 주축이 세운 터키왕조인 마멜룩조에 의해 전문적으로 준비된 강한 군사력을 보유했다. 그리하여 몽골군은 시리아에서 떠나 유프라테스로 돌아갔다. 쿠빌라이의 대권승계후 페르시아로 돌아온 훌라구는 수도를 Maragheh로 정하고 관대한 페르시아인 역사학자 Juvani를 바그다드의 통치자로 임명했다. 후레구는 기독교에 대해 우호감을 가졌으나 말년까지 세례받지 않았으며 마지막에는 기독교보다는 불교로 개종했을지도모르는 샤머니스트 절충주의자였다. 1265년에는 후레구와 기독교인 아내 도쿠즈와 네스토리안 총대주교 Makika가 사망한다.

훌라구의 아들 Abaqa(1265-1282)은 이슬람으로 둘러싸인 국제 관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기독교를 보호하고 기독교국과 동맹을 맺기위해 비잔틴의 황제 Michael Paleologus의 딸 마리아와 결혼하고 로마의 교황과 아라곤의 제임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에게 사절단을 파견한다. 그러나 별 외교적 성과는 없었다. 아바카의 부인 Kotai는 기독교인이었고 기독교에 호의적이었다.

이 시기의 중요인물: 바르 헤브레우스(1226-1286) 역사학자이며 1264년 페르시아 야곱파 대주교로 임명된다. 야곱파 신도들에게 소망과 신뢰를 주었고 파괴된 야곱파 교회를 재건하였다. 몽골 왕정의 신뢰를 얻었으며 1284년 성직체제를 재편하면서 12명의 새주교를 서품하였다. 그는 네스토리안과 상호관계성을 좋게 하려고 노력했다(교회일치운동).
http://www.newadvent.org/cathen/02294a.htm
http://syrcom.cua.edu/Hugoye/Vol2No2/HV2N2GLane.html

Ahmad Teguder(1282-1284) 기독교도인 Kutai 카툰과 훌레구사이에 태어났고 세례를 받고 니콜라스라는 영세명을 가졌다. 그러나 칸 취임식에서 자신의 이슬람 개종을 공식적으로 선언했고 Ahmad라는 이슬람 이름을 얻었다. 기독교를 탄압. 분개한 장군들은 무슬림보다 아바카의 장남 Arghun의 주위에 집결하였고 Teguder는 처형되었다.

Arghun(1284-1291) 호라산의 태수요 아바카의 아들로서 불교도와 기독교의 지원으로 테구데르를 제거하고 칸이됨.  아르군의 부인 우룩 카툰은 케레이트족으로 도쿠즈 카툰의 질녀이자 기독교도였다. 또 다른 부인은 툭탄인데 아바카의 후실이었는데 기독교도였다. 1287년 교황과 유럽의 기독교 왕국에 네스토리안 랍반 소마를 파견하였다. 1289년과 1290년에 무슬림 이집트에 대한 기독교 유럽과의 동맹을 시도했으나 실패한다. Arghun의 죽음과 1291년 예루살렘에 있던 십자군의 라틴 왕국의 최후 요새가 이집트인들에 의해 함락되면서 십자군 전쟁은 끝난다.
http://chass.colostate-pueblo.edu/history/seminar/sauma/saumaletter.htm

중요인물:

 

마르 야발라하 3세:

 

본명 Mark, 1245년 내몽골의 토잔에서 부제였던 바이엘의 네 아들중 막내로 출생, 웅구투(Ongut)족이다. 신심이 깊었고 종교적 수련을 위해 북경에서 은둔자로 유명한 랍반 소마을 찾아가서 수도사된다. 예루살렘 순례를 결심하여 순례하다가 1280년 35살에 Cathay 와 Ong의 대주교로 임명된다. 1281년에 네스토리안 총대주교로 임명된다. 몽골제국의 터키적 요소와 몽골적 요소를 결합하였고 페르시아, 중국, 동아시아. 중앙아시아의 모든 요소를 결합하여 전아시아의 총대주교의 역할을 잘 감당했다.

랍반 소마:

 

북경에 살던 순회사제 위구르족 시반과 아내인 케암타사에에서 태어났다. 늦게까지 자식이 없어서 오랜 기도와 금식 끝에 얻은 아들이었으므로 이름도 Bar Sawma 즉 금식의 아들이다. 어려서 신심이 깊었고 북경의 한 교회의 집사로 있었다. 20세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불타오르고 은둔자되기로 결심하여 3년뒤 모든 것을 버리고 수도사가 된다. 북경의 대주교 마르 기와르기스에게서 체발을 받고 수도원에 들어가 7년간 수행하다 산중의 동굴에 들어가 은거한다. 마르코스를 제자로 받고 그의 제안으로 예루살렘 순례를 결심한다. 1287년 로마로 파송된 몽골 외교관이며 감독
http://chass.colostate-pueblo.edu/history/seminar/sauma.htm
http://www.nestorian.org/rabban_bar_sawma.html
http://www.yorku.ca/inpar/sawma_budge.pdf 로마카톨릭과 네스토리안의 신학적 토론 173-177

 

And the Cardinal said unto him, "For what purpose hast thou come hither?" And RABBAN SAWMA said unto him, "The Mongols and the Catholicus of the East have sent me to Mar Papa concerning the matter of Jerusalem; and they have sent letters with me." And the Cardinals said unto him, "Fro the present rest thyself, and we will  discuss the matter together later"; and they assigned to him a mansion and ccaused him to be taken down thereto

 

Three days later the Cardinals sent and summoned RABBAN SAWMA  to their presence. And when he went to them they began to ask him questions,  saying, "What is thy quarter of the world, and why has thou come?" And he  replied in the selfsame words he had already spoden to them (57). And they said unto him, "Where doth the Catholixus live? And which of the Apostles taught the Gospel in thy quarter of the world ? " And he answered them, saying, "MAR THOMAS, and MAR ADDAI, and MAR MARI taught the Gospel in our quarter of the  world, and we hold at the present time the canons [or statutes] which they  delivered unto us." The Cardinals said unto him, "Where is the Throne of the Catholicus?" He said to them, "In BAGHDAD." They answered, What position hast  thou there?" And he replied, " am a deacon in the Cell of the Catholicus, and the director of the disciples, and the Visitor-General." The Cardinals said, "  It is a marvellous thing that thou who art a Christian, and a deacon of the Throne of the Patriarch of the East has come upon an embassy from the king of the Mongols."And RABBAN SAWMA said unto them, "Know ye, O our Fathers, that many of  our Fathers have gone into the countries of the Mongols, and Turks, and Chinese and have taught them the Gospel, and at the present time there are many Mongols  who are Christians. For many of the sons of the Mongol kings and queens  (58) have been baptized and confess Christ. And they have established churches in their military camps, and they pay honour to the Christians, and  there are among them many who are believers. Now the king [of the Mongols], who  is joined in the bond of friendship with the Catholicus, hath the desire to take  PALESTINE, and the countries of SYRIA, and he demandeth from you help in order  to take JERUSALEM. He hath chosen me and hath sent me to you because, being a Christian, my word will be believed by you. "And the Cardinals said unto him, "What is thy confession of faith? To what 'way' art thou attached ? Is it that which Mar Papa holdeth to-day or some other one?" RABBAN SAWMA replied, "No man  hath come to us Orientals from the Pope. The holy Apostle whose names I have mentioned taught us the Gospel, and to what they delivered unto us we have clung to the present day." The Cardinals said unto him, "How dost thou believe? Recite thy belief,  article by article." RABBAN SAWMA replied to them, saying:--

 

"I believe in One God, hidden, everlasting, without beginning  and without (59) end, Father, and Son, and Holy Spirit: Three Persons, coequal and indivisible; among Whom there is none who is first, or last, or young, or old: in Nature they are One, in Persons they are three: the Father is  the Begetter, the Son is the Begotten, the Spirit proceedeth.

 

"In the last time one of the Persons of the Royal Trinity, namely the Son, put on the perfect man, Jesus Christ, from MARY the holy virgin;  and was united to Him Personally (parsopaith), and in him saved (or redeemed) the world. In His Divinity He is eternally of the Father; in His  humanity He was born [a Being] in time of MARY; the union is inseparable and indivisible for ever; the union is without mingling, and without mixture, and without compaction. The Son of this union is perfect God (60) and perfect  man, two Natures (keyanin),and two Persons (kenomin)--one parsopa (. . .)

 

The Cardinals said unto him, "Doth the Holy Spirit proceed from  the Father or from the Son, or is it separate?" RABBAN SAWMA replied,

 

"Are the Father, and the Son, and the Spirit associated in the things which appertain to the Nature (keyana) or separate?" The Cardinals  answered, "They are associated in the things which concern the Nature (keyana) but are separate in respect of individual qualities." RABBAN SAWMA said, "What are their individual qualities?" The Cardinals replied, "Of the Father, the act of begetting: of the Son the being begotten: of the Spirit  the going forth (proceeding). RABBAN SAWMA said, "Which of Them is the cause of  that Other?" And the Cardinals replied, "The Father is the cause of the Son, and the Son is the cause of the Spirit." RABBAN SAWMA said, "If they are coequal in Nature (keyana), and in operation, and in power, and in authority (or  dominion), and the Three Persons (kenome) are One, how is it possible for  one of Them to be the cause of the Other? For of necessity (61) the  Spirit also must be the cause of some other thing; but the discussion is extraneous to the Confession of faith of wise men. We cannot find a  demonstration resembling this statement of yours.

 

"For behold, the soul is the cause both of the reasoning power and the act of living, but the reasoning power is not the cause of the act of living. The sphere of the sun is the cause of light and heat, and heat is not the cause of light. Thus we think that which is correct, namely, that the Father is the cause of the Son and the Spirit,  and that both the Son and the Spirit are causations of His. Adam begot Seth, and made Eve to proceed [from him], and they are three; because in respect there is  absolutely no difference between begetting and making to go forth (or proceed)."

 

Then the Cardinals said unto him, "We confess that the Spirit proceedeth from  the Father and the Son, but not as we said, for we were only putting thy modesty [or, religious belief?] to the test. "And RABBAN SAWMA said, "It is not right that to something which is one, two, three, or four causes should be [assigned]; on the contrary I do not think that this resembleth our Confession of Faith.  "Now though the Cardinals restrained (62) his speech by means of very  many demonstrations, they held him in high esteem because of his power of argument.

 

Then RABBAN SAWMA said unto them, "I have come from remote countries neither to discuss, nor to instruct [men] in matter of the Faith, but  I came that I might receive a blessing from MAR PAPA, and from the shrines of  the saints and to make known the words of King [ARGHON] and the Catholicus. If it be pleasing in your eyes, let us set aside discussion, and do ye give attention and direct someone to show us the churches here and the shrines of the saints; [if ye will

Gaykhatu(1291-1295):

 

아르군의 동생, 친기독교적 입장을 유지, 바이두에 의해 살해당함.

Baydu(1295)

 

훌레구의 손자, 마지막 기독교도 칸. 개인적으로는 기독교인임을 공헌하고 십자가 목걸이를 매고 다녔지만 무슬림이 무서워 무슬림에게는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고 말했다. 바이두가 정권의 중요한 자리를 기독교인에게 주자 불만을 품은 무슬림은 호라산에 세력을 둔 아르군의 아들 가잔을 설득하여 이슬람으로 개종케 하며 반란을 일으켜 바이두를 처형한다.

Mahmud Ghazan(1295-1304)

 

불교도였다가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무슬림의 지지를 받아 바이두를 몰아내고 칸이됨. 이슬람이 다시 페르시아의 공식 종교가 된다. 일등공신 나우르즈는 모든 교회와 불교사원과 시나고그를 파괴하고 사제들을 능욕하고 공납과 세금을 바치게 한다. 총대주교 야발라하 3세는 감금당하고 고문당한다. 가잔은 일 칸이 아니라 이슬람의 제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대칸과 독립된 위치에 있음을 나타낸다. 무슬림은 기독교도를 핍박하고 1297년에는 아르빌에서 대학살을 감행한다. 그 외 바그다드, 하마단, 타브리즈, 마라게에서도 교회가 파괴되었다. 무슬림 극단주의자들의 박해와 무질서로 가잔은 기독교도를 보호해주기도 한다.

Oljeitu, Muhammad Khudabanda (1304-1316):

 

가잔의 동생, 어머니는 케레이트의 공주 우룩 카툰, 어려서 세례도 받고 니콜라스라는 세례명도 받았으나 성장해서는 무슬림으로 개종하고 기독교에 대해 냉담, 마음으로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1307년 기독교국 그루지아의 왕과 백성들에게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명령하고 교회를 파괴하라는 명을 받았다. 1310년에 아르빌의 기독교인들이 다시 한번 대학살당함, 기독교도를 거의 보호해주지 못한다.

아부 사이드(1316-35):

 

마지막 군주. Oljeitu의 아들, 12살에 일칸이 된다. 기독교도를 보호할 여력없었다. 분열의 늪에 빠지고 5개의 속국으로 갈라졌다.
1317년 총대주교 야발라하는 사망하고 14세기 말 기독교는 쇠락하였다.

c. 인도의 기독교

 

6세기 이전에는 인도 기독교 공동체는 페르시아 총대주교의 권위와 시리아어, 네스토리안 신학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7세기에 페르시아 교회의 대주교구로 승격되면서 구조적인 독립성을 가지게 되었다. 7-8세기에 인도의 기독교 공동체는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10세기에 정치적으로 일종의 독립적인 인정을 받았던 것으로 사료된다.

기독교의 쇠퇴(13세기 전성기, 14세기 쇠퇴기, 16세기 소멸기)

 

동아시아에서 1294년 쿠빌라이의 죽음, 서아시아에서 1295년 일칸 가잔의 이슬람에로의 개종은 아시아 기독교의 쇠퇴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흑사병으로 네스토리우스교의 공동체 파괴(이시클 호반 부군의 공동묘지와 600여개의 비석은 1337-9년의 흑사병에 대한 증거),

14세기 말 광신적 무슬림인 티무르의 30년에 걸친 정복전으로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아의 기독교 공동체의 파괴와 동서간의 교역단절. 티무르는 냉혈적인 잔인함과 정치적 계산하에서 기독교인과 무슬림, 힌두교도들을 학살하였다.

1368년 원의 멸망후 명대의 기독교는 명대 중반까지 존재했으나 16세기 중반에는 거의 사라진다(기독교인은 무슬림이나 유대인인이나 불교도로 흡수되고 교회는 불교사원으로 바뀐다).

몽골족에서는 1578년 알탄 칸이 티베트 불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고 몽골인들에게 개종을 강권하기 전에는 기독교가 잔존했다. 서아시에에서는 14세기 말 티무르의 공격과 학살로 신자들은 우르미아 호수와 반 호수 사이에 있는 히카리 산지로 피신하고 열악한 상황에서 총주교 선출방식이 특정 가문에서 세습되는 형태로 바뀐다. 총대주교는 독신이므로 숙질계승이 이뤄지고 이로 인한 암투로 교단은 분열된다: 신파(교황청과의 연맹 추진)와 구파(전통적인 교단의 독립성을 고수)로 분열된다. 구파가 카톨릭으로 선회하자 신파는 반카톨릭으로 선회한다. 1843년 쿠르즈족과의 충돌로 10만 신도가운데 2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1차 대전중 쿠르드족과 터키정부의 탄압으로 4만 신도들이 히카리 산지를 떠나 이라크 북부의 모술 평원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독립국을 세우려는 희망으로 연합국에 협조하며 터키와 싸웠다. 그러나 전후에도 소망이 이뤄지지 않았고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에 흩어져 살았다. 이라크 독립후 이라크의 지배를 거부하고 시리아로 들어가려던 신도들은 입국을 거부당하고 귀환도중 이라크 정부군과 쿠르즈족, 베두인들이 공격으로 거의 몰살당한다. 신파에 속하는 총주교 마르 시몬은 1940년 시카고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동방 앗시리아 교회’로 알려진다. 이라크 영내에 남아있던 신자들은 바그다드에 근거를 둔 구파 총주교의 감독을 받게 된다.

15세기 말 페르시아 총대주교가 외곽으로 피하여가자 인도 기독교 공동체는 페르시아 교회와의 관련성이 소멸된다. 교회는 쇠퇴하여가며 로마카톨릭의 거대한 선교물결과 조우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a. 서아시아에서의 쇠퇴원인:

 

페르시아교회의 신학은 종교 통합적이기보다 배타적이었다. 그리고 시리아 종교와 비잔틴 종교와의 관련성에 대한 의혹은 있었으나 로마적이라거나 외래적이지 않았다. 페르시아교회는 늘 자신들을 로마나 비잔틴교회와 신중하게 분리해왔다. 그리고 몽골인들에게 네스토리안은 페르시아적으로 보였고 무슬림보다 더 많은 신용을 받았다. 그러나 교회의 지도력이 사회의 지도력보다 열등한 것과 정부의 의존은 심각한 패망의 원인이 되었다. 일 칸국 지배층의 이슬람으로의 개종과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기독교의 보호장치가 사라져버리자 서아시아에서 기독교는 몰락을 경험한다(이슬람의 도전).

 

b. 동아시아에서의 쇠퇴원인:

 

중국적 관습과 이념에 물들어서 종교적 활력의 상실(한화), 카톨릭 선교로 인한 내부 균열(네스토리우스교나 카톨릭이나 선교의 대상은 한인이 아니라 외지인이었다. 그리하여 카톨릭이 선교한 주된 지역은 네스토리우스교의 근거지였던 북경과 천주, 양주, 항주 등이었다).

3. 아시아교회의 특징과 쇠퇴원인

 

   a. 특징

 

    1) 철저한 훈련-수도원적 교육
    2) 복음전도의  열정
    3) 적응  

 

   b. 쇠퇴원인:

 

장벽을 돌파하지 못했고 협곡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래서 타자성과 외래성이 기독교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1) 교회의 고립:

 

초기 아시아교회(에뎃사를 중심한 시리아시대 250년 이전)는 주변의 교회의 분리되고, 고대 아시아교회(니시비스와 셀루키아 테시폰을 중심한 페르시아시대 661이전)에는 기독교 서방뿐아니라 시리아교회와 분리되고, 중세 아시아교회(바그다드를 중심한 아랍시대 14세기말이전)는 교구의 지리적 광대함과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교구간의 분리가 심화되고, 근대 아시아교회는 로마카톨릭과 개신교와 분리되어 하나의 소외된 종파로 여겨졌다.

 

    2) 기독교인의 인구 비율:

 

아시아 교회는 아시아의 역사를 변화시킬수 있는 충분한 숫자의 신자를 가지지 못했다. 1000년까지 서방의 기독교인수는 3천 500만명 정도이며 동방의 기독교인수는 1천 200만명 정도였다. 숫적으로 소수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3) 박해:

 

4세기의 가혹한 페르시아의 박해, 일종의 소수종족으로 간주되어 끊임없는 받는 사회적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불이익.

 

    4) 권력자에의 의존:

 

아시아 교회는 서방의 콘스탄틴같은 인물이 없었다. 제국의 호의를 일시적으로 받은적은 있으나 국가종교로 등장하지 못했다. 기독교의 운명은 비기독교인 통치자의 관대함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초기 몽골시대외에는 권력자들이 비기독교적일 뿐 아니라 반기독교적이었다. 아시아 제국은 소수 종족을 핍박하기보다 통제하면서 허약하게 만들었다. 교회는 사회에서 고립되었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소외로 인해 교회는 확장보다 생존에 초점을 두게 된다. 기독교 게토.

 

    5) 종교적 내향성:

 

아시아에서 기독교는 외래적이었으나 타자성을 강하게 가졌다. 인도에서 기독교인들은 시리아인으로 불렸고, 남인도에서는 하나의 카스트와 같은 공동체가 되었다. 페르시아에서도 기독교인은 교회예배용 언어가 시리아어여서 시리아인으로 불렸다. 아시아교회는 종족적 입장에서 소외된 것이 아니라 종교문화적인 입장에서 소외되었다. 당나라에서 기독교는 시리아교나 페르시아교로 불렸다. 교인은 현지인이 주였으나 지도자는 페르시아인이었다. 몽골에서도 기독교는 페르시아교나 어떤 부족의 종교가 되었다. 기독교는 우주성을 가지고 현지에 뿌리내리고 토착화가 되지 못했다. 기독교는 아시아에서 시작되었으나 서구에 가서 서구의 종교가 되었던 것과 반대로 다른 아시아권에서는 문화적 패쇄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이로인해 기독교의 타자성과 외래성이 아시아에서 광범위하게 형성되었고, 근대 제국주의적 서구선교의 결과로 기독교는 서구의 종교가 되어버렸다.

 

    6) 아시아 종교와의 조우:

 

서방에는 이방종교가 사라져갔으나 아시아에는 조로아스터교, 힌두교, 불교, 유교, 도교, 이슬람의 강력한 저항을 경험한다. 이들은 강력한 국가종교가 되어 기독교로의 개종을 반대하고 기독교를 박해하면서 거대한 사회적, 지적, 종교적 장벽을 구축하였다.

 

    7) 교회의 분열:

 

7세기의 니시비스 학교의 분열, 다투는 감독들, 확립되지 못한 성직자들의 삶과 체제는 기독교에 대한 호감을 가진 권력자들의 개종을 막았다.

 

    8) 신학적 미성숙-

 

서방에는 기독교 신학이 철학의 도전으로 인해 성숙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시아에는 신학을 발전시킬수 있는 도구가 없었다. 기독교에 대한 종교의 도전은 본질적으로 종교적이거나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이었다.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소외된 기독교는 신학을 성숙시킬 여유와 도전을 가지지 못했다.

III. 선교적 확장

 

1300년 기독교인 인구의 23.9%(백인 66%, 비백인 34%), 복음화율 27%, 성경번역 26개언어
1400년 기독교인 인구의 24%(백인 75%, 비백인 25%), 북음화율 27%, 성경번역 30개언어
1500년 기독교인 인구의 19%(백인 92.6%, 비백인 7.4%), 복음화율 21%, 성경번역 34개언어, 총 순교자 9,200,000명(누적 기독교인의 0.3%)

A. 인디아 선교

 

1292년-93 년: 중국으로 가던 몬테코르비노의 요한은 인도에 온 최초의 로마 카톨릭 성직자, 13개월 머물면서 성도마 묘지를 방문하고 100명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기록을 남김.
1319년 : 중국으로 가던 4명의 프란시스칸이 봄베이의 살세트 (Salsette)에서 무슬림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1323년 : 포르데논의 오도릭(Odoric of Pordenone)이 자바, 보르네오, 수마트라에 가다.
1329년 : 퀼론 (Quilon)의 주교 카탈라니의 요한(John of Catalani).

이러한 것들은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접촉들일 뿐이었다.   특히 인도의 남서지방에의 동방 전례를 따르는 크리스찬들과 함께 그러하였다.

1321년- 1330?  :

 

도미닉 Jordanus는 무슬림 선교를 위해 세워진 도미닉의 society of wanderers의 일원으로 페르시아의 Tabriz에서 선교한 프랑스인이다. 인도를 목적으로 와서 선교한 최초의 로마 카톨릭 선교사이다. 구자랏에서 선교하여 한 3마을에서 137번 세례를 주었다고 기록한다. 그러면서 네스토리안 교회의 불화가 생기면서 1328년에 교황 요한 22세에게서 케랄라의  Quilon의 감독으로 서품 받는다. 그는 무슬림을 개종시켜야 했고 네스토리안들을 카톨릭에 연합시켜야 했다.


B. 아프리카 선교

 

1270년경: 아비시니아 (Abysinia)에의 도미니코 회원들.
1300년경: 도미니코 회원들이 모잠비크에 도달하다.
1351년: 깔멜회원 베르나르도가 까나리 (Canaries)인들의 초대 주교가 됨.
1419년: 마데이라(Madeira)가 '그리스도의 교단(The Order of Christ)‘에게 임무를 맡기다.
1456년: 또한 미래의 모든 포르투갈 식민지들에게.

여기서도 역시 이러한 이니시어티브들은 대단히 소박한 것들이었으며, 앞으로 다가올 보다 위대한 일들의 전주곡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제한된 그러나 중대한 영향과 그리고 자기들의 강한 교계적인 조직 안에 진실된 성과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선교들은 후에도 잘 지속될 수 있었으며 다만 박해하에서만 소멸되었다. 이 시기의 가장 특징적인 현상들과 가장 본질적으로 성취된 것들은 다음과 같다 : 교황권은 그리스도교 국가의 국경들을 넘어선 교회의 확장을 증진시키기 위한 의무로서 활발히 실행되었고 보다 더 잘 이해되었다 : 그리고 성 루이와 같은 군주들은 선교적 노력을 효과적으로 지지하는 일에 관여했으며, 새로운 수도회들인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는 선교를 자기들의 일반적 사도적 성소의 가장 집중적이고 영웅적인 형태로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고려하여, 「기사 수도회」 (Societates Peregrinantium)를 만들었는데 자기들 고유의 회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그룹들은 교황들에 의하여 영적인 총애를 받았었다.  대학들은 아직 크리스찬 세계에 속하지 않는 문화들과 언어들을 연구할 필요성을 주목하게 되었다.  예, 아라비아어 강좌.   그리고 미래의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과업을 위하여 방법적으로 준비되어져야 했다. 무르시아 (Murcia)에서의 언어학교들 (O.P) : 미라마르 (Miramar)에 있는 아라비아어 학부 때때로 교사들은 선교체험을 실제적으로 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레이몬드 륄, 혹은 그의 뒤를 이은 루브뢱의 요한과 같은 이들이 있다.

 

교회내에서 선교는 그 가치가 보다 잘 인식되어지게 되었으며, 보다 잘 조직되었고 보다 더 전문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향상들은 덜 바람직한 요인들에 의해서 상쇄되었다. 그리스도교 국가는 전체적으로 이전처럼 열광적이진 못했다.  왜냐하면 외교인들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너무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십자군 전쟁 때 전투하기 위해 모여들었던 군대들은 선교적 대화에 있어서 그들이 참여하는 데에는 기꺼이 응하지 못했다.

C. 로마카톨릭의 대몽골선교:

 

몽골의 야만성에 서방기독교는 매우 놀라지만 이슬람을 대항한 연합의 가능성으로 최후의 십자군을 희망하였다. 그러므로 대몽골 선교는 정치적인 목적이 종교적인 목적보다 더 중요시되었다. 정치적인 목적은 몽골의 침입에 대한 예방이며 종교적으로는 개종을 목적으로 했다. 선교사들은 프란시스칸과 도미니칸이었다. 이들은 전통적인 수도원주의와 달리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선교를 분명히 강조하는 가난과 구제를 서약한 걸식 수도회였다. 이들은 본질상 선교공동체였다. 1242년에서 1342년 어간의 선교는 길고 긴 여행이 수반되었다. 이들은 재정적으로 황제의 도움을 받았고 자유롭게 설교할 수 있었다. 몽골의 종교정책은 관대했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종파를 따라 살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유대인들과 무슬림에게서 개종자를 찾지 못했으며 불교도에게서 많은 수의 영세자를 얻었으나 바른 기독교인으로 살지 못함을 보게된다.

 

카톨릭은 경교보다 더 외래적인 인상을 주었고 원의 멸망과 함께 몽골의 보호를 받던 외국인에 대한 학살과 외래종교의 박해로 소멸되었다.

a. 탁발 수도사 플라노 카르피니의 요한(John of Plano Carpini 1245-1247) 교황 이노센트 4세(1243-54)에 의해 파송된 프란시스칸으로서 같은 프란시스칸 폴란드인 베네딕(Benedict the Pole)과 함께 여행하여 몽골에 도착한 최초의 서방 선교사, 바투를 만나 대칸 구육에게 압송되고 네스토리안에 둘러싸인 대칸을 발견한다. 몽골의 개종가능성에 대한 낙관적인 소식을 가지고 리용의 교황에게 돌아왔다.
http://depts.washington.edu/uwch/silkroad/maps/carpini.html
http://depts.washington.edu/uwch/silkroad/texts/carpini.html  

 

XII. This Emperor may be forty or forty-five years or more old ; he is of medium stature, very prudent and extremely shrewd, and serious and sedate in his manners; and he has never been seen to laugh lightly or show any levity, and of this we were assured by Christians who were constantly with him. We were also assured by Christians who were of his household that they firmly believed that he was about to become a Christian. As signal evidence of this he keeps Christian clerks and gives them allowances, and he has always the chapel of the Christians in front of his great tent, and (these priests) chant publicly and openly and beat (a tablet) according to the fashion of the Greeks at appointed hours, just like other Christians, and though there may be ever so great a multitude of Tartars and of other people. And the other chiefs do not have this.

  b. 탁발수도사 포루투갈의 로렌스(Lawrence of Portugal, 1245- ?) 프란시스칸, 카르피니에 의해 파송되고 몽골 야영지에만 도착한 것으로 사료됨

 

  c. 탁발수도사 롬바르디의 안셀름(Anselm of Lombardy 1247-1250) 도미니칸

 

  d. 탁발수도사 롱구미유의 앤드류(Andrew of Longumeau, 1249-1251) 도미니칸
http://www.wikipedia.org/wiki/Andrew_of_Longjumeau

 

  e. 탁발수도사 루브룩의 윌리암(Wiiliam of Rubruck 1253-1255) 프란시스칸, 교황의 두 번째 사절로서 카라코룸에 가서 대칸 몽케를 만난다.
http://depts.washington.edu/uwch/silkroad/maps/rubruck.html
http://depts.washington.edu/uwch/silkroad/texts/rubruck.html

 

Living mixed among them, though of alien race [J: alien status] (tanquam advene), are Nestorians and Saracens all the way to Cathay. In fifteen cities of Cathay there are Nestorians, and they have an episcopal see in a city called Segin [=Hsi-king], but for the rest they are purely idolaters. The priests of idols of the nations spoken of all wear wide saffron-colored cowls. There are also among them, as I gathered, some hermits who live in forests and mountains and who are wonderful by their lives and austerity [J: leading lives that are extraordinarily ascetic] . The Nestorians there know nothing. They say their offices, and have sacred books in Syrian, but they do not know the language, so they chant like those monks among us who do not know grammar, and they are absolutely depraved. In the first place they are usurers and drunkards; some even among them who live with the Tartars have several wives like them. When they enter church, they wash their lower parts like Saracens; they eat meat on Friday, and have their feasts on that day in Saracen fashion. The bishop rarely visits these parts, hardly once in fifty years. When he does, they have all the male children, even those in the cradle, ordained priests, so nearly all the males among them are priests. Then they marry, which is clearly against the statutes of the Fathers, and they are bigamists, for when the first wife dies these priests take another. They are all simoniacs, for they administer no sacrament gratis. They are solicitous for their wives and children, and are consequently more intent on the increase of their wealth than of the faith. And so those of them who educate some of the sons of the noble Mo'al, though they teach them the Gospel and the articles of the faith, through their evil lives and their cupidity estrange them from the Christian faith, for the lives that the Mo'al themselves and the Tuins [=Buddhists, from Chinese T'ao-yen: "man of the path." The term properly refers only to priests but Rubruck applies it here to all Buddhists] or idolaters lead are more innocent than theirs.

Of the city of Caracarum you must know that, exclusive of the palace of the Chan, it is not as big as the [J: not as fine as the] village of Saint Denis, and the monastery of Saint Denis is ten times larger than the palace [J: is worth ten of the palace]. There are two quarters in it; one of the Saracens in which are the markets, and where a great many Tartars gather on account of the court, which is always near this (city), and on account of the great number of ambassadors; the other is the quarter of the Cathayans, all of whom are artisans. Besides these quarters there are great palaces, which are for the secretaries of the court. There are there twelve idol temples of different nations, two mahummeries [mosques] in which is cried the law of Machomet, and one church of Christians in the extreme end of the city. The city is surrounded by a mud wall and has four gates. At the eastern is sold millet and other kinds of grain, which, however, is rarely brought there; at the western one, sheep and goats are sold; at the southern, oxen and carts are sold; at the northern, horses are sold.

f. 폴로가의 2 형제:

 

선교사 없는 첫 여행(1260-1269), 원나라에 도착한 최초의 유럽인.

 

쿠빌라이는 이들을 환대했고 그들의 왕들과 나라에 대해 그리고 기독교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이들이 돌아갈 때 백명의 선교사를 요구하는 서한을 교황에게 보냈다. 그리고 선교사의 조건으로 다음을 제시한다.

기독교의 종교성과 교리들에 정통한 지혜로운 사람들...... 그들은 일곱가지 기술들을 알아야 하고 그의 백성을 가르칠 충분한 능력을 갖추어야 하며, 다른 모든 종교들의 오류들을 그와 그의 숭배자들, 그리고 다른 모든 계급의 백성들에게 변증하고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 그리고 그들은 기독교의 종교성과 그 교리들이 그 외의 다른 모든 종교들보다 우수하며 진리에 더 근접해 있음을 사리에 맞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한다.

폴로가의 2형제는 쿠빌라이의 서한을 교황 그레고리 10세에게 전달하나   두명의 도미니칸 선교사(Nicolas of Vicenza, William of Tripoli)만을 파송한다. 폴로가의 2형제와 17세 마르코와 선교사들과 동행한 두 번째 여행(1271-1295)을 시작한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중앙아에서 발발한 전쟁에 심히 낙심하여 중도에 포기한다. 그리하여 폴로가의 3명만 중국에 1275년 도착한다.
http://www.askasia.org/silk_roads/l000098/l000098h.htm

 

g. John of Montecorvino (1291-1328):

 

1246/7년 태생으로 26세에 프란시스칸이 되기전에 황제 프레드릭 2세의 군사로, 행정관으로 의관으로 활동했다. 8년후 1280년에 몽골 페르시아로 선교사 파송받는다. 선교활동 마치고 이탈리아로 온지 얼마 지나지 않은 1290년경 프란시스칸 수도회는 동양 선교를 위해 두 개의 교구를 조직하였는데 북 타타르와 동 타타르가 그것이다. 요한이 파송받은 곳은 동타타르며 그는 인도를 거쳐 북경에 이르는 길고 험한 여행을 해야했다. 1294년 쿠빌라이가 사망한 직후 북경에 도착한 요한은 새황제 티무르의 환대를 받는다. 반면 경교도들은 반기지 않는다. 북경으로 오는 과정에서 웅구트족의 수령 기와르기스를 만나고 그는 카톨릭으로 개종하게 된다. 기와르기스로 인해 상당수의 웅구트족이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교회가 선다(로마교회 Ecclesia Romana, 1299년 기와르기스사후 네스토리우스교로 회귀). 이에 대해 경교도들은 분노하였다. 그리하여 교황의 사절이 아니라 첩자요 마술사요 백성을 미혹케하는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1299년 북경에서 카톨릭 교회를 세울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1305년에 6000명의 개종자를 얻게 되었고, 1306년에 두 번째 교회를 건축하기 시작했으며 작은 학교하나를 세워 7-11세 사이의 아이들을 가르쳤다(선교의 주된 대상은 알란족 군사집단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알란족은 원래 카스피해와 카프카스 북방에 거주하던 사람들로서 몽골치하에서 대칸의 친위군으로 기용되고 원대 후기에는 조정의 군사력을 장악하며 군주의 폐립에 간여할 정도로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한다). 1307년 교황 클레멘트 5세에 의해 북경의 대주교로 임명받았고 총대주교에 해당하는 모든 극동 지역의 감독으로 임명됐다. 남중국선교하요 자이툰(천주)에 교구형성. 1318년 교황 요한 22세는 아시아를 두개의 선교구역으로 나누었고 하나는 프란시스칸 수도회에(북경에 대감독교구두고, 나머지 하나는 도미니칸 수도회에 맡겨 관할케 했다(페르시아의 수도 Sultaniyeh).
http://www.fordham.edu/halsall/source/corvino1.html

 

I have built a church in the city of Cambaliech, in which the king has his chief residence. This I completed six years ago; and I have built a bell-tower to it, and put three bells in it. I have baptized there, as well as I can estimate, up to this time some 6000 persons; and if those charges against me of which I have spoken had not been made, I should have baptized more than 30,000. And I am often still engaged in baptizing.

h. 프란시스칸 선교 보강 (1307-1311):

 

교황에 의해 계속적으로 프란시스칸이 파송되었다. 1307년 7명의 프란시스칸 수도사를 보좌주교로 파송(인도에서 무슬림에게 4명이 피살되고 1313년 북경도착은 3명 제라르, 페레그린, 앤드류), 1310년 12월 피렌체 출신의 피터를 주교로 임명하여 보냈다. 1311년에 제롬과 토마스라는 사제를 파견했다.

 

i. 탁발수도사 Odoric of Pordenone(1322-1328)

 

1265년 생으로 프란시스칸 수도사이며 유럽에서 인도를 거쳐 중국남부에 도달하는 오랜 여행으로 1322년 자이툰에 도착하여 사역하였다. 1330년 귀환하면서 기록한 여행기는 유명했으며 1331년 사망했다.
http://www.win.tue.nl/~engels/discovery/odoric.html
http://www.romanization.com/books/odoric/

 

j. John of Marignolli(1342-1346)

 

북경의 임명된 마지막 감독, 1338년 5월에 프랑스 남부 아비뇽에 머물던 교황에게 앤드류라는 사람이 알란인으로 보이는 15명과 함께 찾아와서 몽골의 마지막 대칸인 토곤 테무르(순제, 1333-1368)의 친서를 가지고 왔다.  이 편지는 상호간의 서신교환과 축복기도를 요청하고 있었다. 또한 북경에 거주하는 기독교도 알란인의 수령이름의 서신도 가지고 왔는데 거기에는 몬테코르비노의 후임자 파견요청이 있었다. 교황 베네딕투스 12세는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파리 대학교의 교수역임한 니콜라 보네를 북경 대주교로 임명하고 마리뇰리의 요한을 포함한 32명의 프란시스칸을 보낸다. 1338년 12월에 아비뇽을 출발하여 나폴리-콘스탄티노플(니콜라 보네의 귀환)-흑해 북안의 카파-킵차크 칸국의 수도 신 사라이-중앙아의 알말릭-하미와 탕구트-1342년 32명의 사절단은 북경에 도착한다. 마리뇰리는 1346-7년경 천주에서 배를 타고 귀환(인도양에서 후르무즈도착-육로로 지중해 동부연안- 키프로스-1353년 아비뇽 도착).   http://www.newadvent.org/cathen/16060b.htm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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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

[6-8세기 선교] 역사적 배경

 

 

6-8세기 : 동서양의 재조정기
530년경 유럽
http://www.ucalgary.ca/applied_history/tutor/firsteuro/imgs/map22.html
565년경 유럽 http://www.ucalgary.ca/applied_history/tutor/firsteuro/imgs/map23.html
600년경 유럽
http://www.ucalgary.ca/applied_history/tutor/firsteuro/imgs/map24.html
768년경 유럽
http://www.ucalgary.ca/applied_history/tutor/firsteuro/imgs/map25.html
814년경 유럽
http://www.ucalgary.ca/applied_history/tutor/firsteuro/imgs/map26.html
880년경 유럽
http://www.ucalgary.ca/applied_history/tutor/firsteuro/imgs/map27.html
910년경 유럽
http://www.ucalgary.ca/applied_history/tutor/firsteuro/imgs/map27.html
스티븐 니일, 3장; 김호동 2장; 사무엘 마펫11장-16장; 허버트 케인 2장;

I. 역사적 상황

 

A. 게르만족 왕국

    http://www.fordham.edu/halsall/sbook1f.html#Romanized%20Goths

 

1. 프랑크의 메로빙거가문의 주도권-

 

클로비스왕(465-511)의 프랑크왕국 통일-파리에 수도(현프랑스, 이탈리아, 독일)/클로비스사후 혼란/
http://www.fordham.edu/halsall/maps/526eur.jpg
http://www.ucalgary.ca/applied_history/tutor/firsteuro/f.rank.html

2. 카롤링거왕조:

 

732년 카알 마르텔의 대이슬람 승리후 실권장악/서로마교황의 협력으로 아들 피핀의 카롤링거왕조 등장, 교황에게 교황령의 땅을 주었다-아들 샤를마뉴대제는 모든 게르만왕국을 정벌하여 800년 12월 24일 교황 레오 3세는 로마황제로 등극/서유럽에 법과 질서, 문명, 기독교가 뿌리내리게 했다.
http://www.fordham.edu/halsall/maps/800eur.jpg
http://www.fordham.edu/halsall/sbook1h.html

3. 신성로마제국-

 

사늘마뉴대제 사후 후계자 분쟁으로 3부분으로 분할(서프랑크, 중프랑크, 동프랑크), 에스파니아에 이슬람침공, 바이킹의 일파인 노르만의 침공/ 동프랑크의 오토 1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 962년-300여개의 갈라져 싸우다가 오스트리아왕이 황제관을 차지 1806년 나폴레옹에게 점령될때까지 900년 가까이 명목상 황제로 있었다.
참고자료:
http://www.fordham.edu/halsall/maps/900eur.jpg

B. 비잔틴제국(동로마) 콘스탄티노플에 수도, 황제 교황, 성상논쟁/그리스정교
    비잔틴
http://www.fordham.edu/halsall/sbook1c.html 

 

   1. 서로마 멸망후 500년간 생존을 위한 투쟁-게르만족을 대항하여

 

      유스티니아누스 (483-565)황제는 동고트족으로부터 이탈리아 탈환, 반달족으로부터 북아프리카 탈환하여 동로마제국의 영토 확장. 아테네의 철학 아카데미를 폐쇠하고 이독교적 도덕율을 반영하는 시민법을 제정, 콘스탄티노플에 소피아 성당을 건립하고(532-537), 로마의 수도승 Dionysius Exiquus (d. c. 550)는 서력기원을 정하는 새로운 날자를 정한다(Anno Domini). 그리고선교사를 중국에 보내어 누에를 밀수한다(551).

   2. 이후 500년간 페르시아인들을 대항하여 생존 투쟁

 

      헤라클리우스 황제-627년 니네베 전투에서 페르시아인 전멸시키고 동로마를 지켰  다. 그러나 북쪽의 게르만족과 남쪽의 모슬렘에게 영토를 빼앗겨 갔다가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됨.

C. 아바르 족의 침입:

 

552년 돌궐에 패배한 유연은 서쪽으로 가서 유럽에서 정착한다.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안은 이들에게 상납하고 발칸반도를 위협하는 훈족과 슬라브족을 점령하게 한다. 6세기 말에 전성기를 맞아 볼가강과 다뉴브강 사이의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에 두었다. 이후 내분으로 약화되다가 796년 프랑크와 불가리아의 연합 공격을 멸망됨).
600년의 유럽
http://www.ucalgary.ca/applied_history/tutor/firsteuro/imgs/map24.html

D. 사산조 페르시아의 몰락
    488-531 Kavadh I:  기독교 관용

 

◦ 531-579:  Anshurwan the Just (Chosroes I) 기독교 박해(540-545) 이후 관용, 페ㅅ그시아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 페르시아의 전성기, 동로마와 전쟁 승리후 안디옥 쟁취(기독교인 포로들을 위해 새도시 군데샤푸르를 건립하였고 이곳은 페르시아내의 강력한 기독교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동쪽의 헤프탈 족을 중앙아시아로 쫓음, 아라비아 주변의 페르시아만에 함대보내어 예멘에 있던 이디오피아인들을 아프리카로 쫓음, 사산조에서 가장 공정하고 정비되고 효과적인 통치행함,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부인이 기독교인이었다. 왕의 주치의와 동역자들, 사무관들, 궁전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었다. 이들은 박학하였고 근면하였으며 국제적인 교류를 가졌다.

 

▫ 533: 로마와 평화조약

 

▫ 551: 두 명의 수도사가 비단 누에고치를 빈 대나무속에 넣어 중국에서 밀수하여 서방으로 가져온다.

 

▫ 540-562: 로마와 전쟁

 

◦ 579-590: Hormizd IV 기독교 관용, 조로아스터교와 기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도록 명령함;“나의 왕관은 두개의 종개가 아닌 네 개의 종교, 즉 마기교와 조로아스터교뿐아니라 유대교와 기독교 등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통치 후기는 동부에서는 투르크족의 침입과 서부에서 비잔틴 로마에 의해 심각한 패배로 시민전쟁일어나고 측근의 쿠데타로 폐위되어 잔인하게 처형됨

 

◦ 590-628:  Khusru Parviz(Chosroes II) 608년전 까지는 기독교 관용, 페르시아 최후의 위대한 왕,

 

▫ 590-602: 시민전쟁에서 왕권을 잃어버려 콘스탄티노플로 피난가서 비잔틴 황제 마리우스의 도움과 기독교인의 도움을 받고 그 도움으로 왕권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동로마황제의 도움으로 신변을 유지하였다. 그리하여 마리우스가 죽을 때까지 로마와 전쟁을 하지 않고 기독교의 개종설까지 나올 정도로 기독교인에 대한 우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내들과 3천명의 첩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기독교 여왕인 아람인 시린(Sirin)이었다.

 

▫ 603-610: 비잔틴 로마와 전쟁-602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쿠데타가 일어나고 황제 마리우스가 처형되자 코스로에스는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고 콘스탄 티노플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페르시아는 에뎃사와 안디옥을 점령하였다.

 

▫ 610: 아랍이 페르시아군을 Dhu-Qar에서 패배시킴

 

▫ 610-620: 로마와 전쟁 -페르시아는 비록 비잔틴이 쿠데타의 주동을 몰아내고 새황제 헤라클리우스가 등극하고 평화를 제의했으나 계속전쟁을 행했다. 615년에는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교회와 기독교인 수천명을 살육했고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하여 콘스타티노플을 포위했다. 페르시아의 영토는 흑해에서 아프리카 사막까지, 로데스 섬요새에서 인디아까지의 광활한 제국 통치.

 

▫ 622-627: 제국을 재정비한 로마황제 Heraclius 가 4만명의 터키족인 카자르 군대와 연합하여 Assyria 와 Mesopotamia를 침공하고 페르시아 제국을 유린하였다. 이 기간에 페르시아내의 기독교는 박해를 받았고 교회는 재산을 압수당했다. 코스로에스 왕은 왕위를 단성론자인 왕후 시린의 아들로 하려다 네스토리안 야당의 주동자 샴타의 쿠데타로 살해당하고 황태자 시로스는 카바드 II로 페르시아 왕으로 등극한다. 이 전쟁으로 사산조는 급격히 쇠약해져서 아랍의 침략에 쉽게 굴복한다. 그리고 카자르족은 transcaucacus 지역에 자신들이 영토를 확보한다.

 

◦ 628 Kavadh II  9개월 동안 왕으로 있으면서 비잔틴 로마와 평화관계를 가졌으나 자신의 모든 형제들을 살해하고 어떤 상속자 없이 죽었다.

 

◦ 628-630 Ardshir III

 

◦ 630-632 혼란의시기-Shahrbaraz, Boran and others  왕위계승전 치열

 

◦ 632-651:  Yazdegerd III 코스로에스 II의 손자

 

▫ 633: 무슬림의 이락 침공

 

▫ 642: Nehawand에서 페르시아 군의 패배후 동쪽 발흐로 피난

 

▫ 651년 부하에게 피살당함, 아들 피로쯔(Piruz) 3세는 토카라에 피신하여 왕위에 오르고 677년 당의 장안으로 피신하여 왕권회복을 꿈꾸나 이루지 못하고 사산조는 끝이난다.


D. 이슬람의 도전  
http://www.fordham.edu/halsall/sbook1d.html
    http://www.ucalgary.ca/applied_history/tutor/islam/index2.html
    http://www.ucalgary.ca/applied_history/tutor/islam/caliphate/
    6세기
http://ccat.sas.upenn.edu/~bvon/images/map1.gif
    깐수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200108/nd2001080500.html
    김대용
http://www.islamjeju.or.kr/knowledge_11.htm 

 

     1. 무함마드: 570-632

 

        a. 아라비아인:

 

이스마엘의 후손(베두인), 우상숭배와 여러 신을 믿었다. 마호메트는  자라나면서 영향을 받은 종교는 진이라는 정령을 숭배하는 애니미즘(animism)과 신령과의 특별한 중매인(무당)을 두고있는 샤마니즘(Shamanism)을 비롯해 유태교, 기독교, 그리고 그 외 아라비아 반도내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던 토속종교들이다.         

 

  이슬람이 있기 이전의 아라비아 반도에는 복잡하기 이를데 없는 종교적 혼합상을 이루고 있었다. 당시 아라비아에 사는 각 부족이나 공동사회는 각기 숭배하는 다양한 우상신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은 신과 정령의 보호를 받기 위해 독특한 종교의식들을 거행하곤 했다. 메카의 꾸라이쉬 부족과 그 인근 부족들은 라트와 웃자, 마나트라는 세 여신을 신봉했을 뿐만 아니라, 카아바라는 육면체 운석(隕石)과 그 주변에 산재한 수백개의 돌도 아울러 숭배했다. 그들은 메카에 중앙 제전인 카아바신전을 두고 매년 특정한 달에 희생제물을 바치며 공동의 종교축제를 벌였다. 특별한 의식을 수반하는 매년의 순례행사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메카는 언제나 축제가 펼쳐지는 분위기였다. 그 신들 가운데서는 지고의 신인 '알라'(Allah)가 동시에 숭상되고 있었다. 당시의 아라비아에는 여러 종류의 다양한 신적인 존재들이 있어서 사람들을 통해 숭앙 되었던 것이다. 그 신들은 모두 동일한 힘과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떤 신들은 좀 더 힘이 세고 높았으며, 또 다른 어떤 신들은 약하고 지위가 낮았다. 그 지역에 산재해 있던 다양한 신들 가운데는 대표적으로 마나트(Manat), 우짜(Uzza), 알라트(Allat)등이 있었는데, 그 신들은 지고신인 '알라'에게 예속되어 이었다. 그러므로 '알라'는 무하마드가 창출해낸 신이 아니라 아라비아 지역에 있던 여러 신들 가운데 가장 높은 신이었던 것이다. 즉, 무함마드는 당시 지고신이었던 알라를 유일신화하는 작업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 당시 무함마드의 고향이자 종교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메카의 카바에서는 360개의 다양한 우상들이 숭배되고 있었는데, 무함마드는 후에 카바 곧 석신을 알라와 동일시하였다.

        b. 아라비아의 메카에서 꾸라이시족의 명망있는 하심가문 출생(힘야리트 족의 한 족장이며 이디오피아 기독교 정권의 침략에서 승라하여 메카를 지켜낸 아브드 알 무탈립(Abd al-Muttalib)의 손자이며 정령숭배적인 순례무역 소유권을 지탱했다. 특히 메카의 카바신전을 단성론 기독교의 손에서 구원하였다). 고아로 자람 

 

        c. 젊은 시절 양치기

 

        d. 상인이 되어 낙타 대상을 이끌고 여러 나라 돌아다녔다.-유대인과 기독교인들  과 접촉해서 그들의 종교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e. 25세에 15세 연상의 부유한 과부 하디자와 결혼한후 생활의 안정으로 구도에 전념하며 외진 곳에서 명상하기를 좋아했고 40세에 가브리엘에게서 계시받았다고 주장(접신현상)/ 관찰과  명상/ 40세에(610년) 이슬람교 창시. 메카에서 10년간 포교  70여명의 교도 -도시 지배층의 압력 거세짐(다신교 배척하고 부의 분배요구)

 

        f. 622년 헤지라; 야스리브(메디나)로 도피, 초기 유대 공동체와 제휴하고 메디나에서 지도권을 가지게 되자 아랍 세력 결집을 위해 유대인을 배척한다. 630년에 메카 점령하면서 아라비아 반도의 연합을 추구하였고 기독교 아랍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그리하여  이슬람교를 중심한 아랍부족 연합체가 탄생, 632년 무하마드 사망. 아내 16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정략적인 결혼동맹의 결과였다. 무하마드가 가장 사랑했던 아내는 아이샤로서 9세에 결혼한 콥틱 기독교도였고 그의 소생중에는 유대교도와 기독교도도 있었다. 그러나 무하마드는 자신의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했다.

 

     2. 기본 교리

 

        a. 알라는 위대하고 무하마드는 그의 예언자다.
        b. 중계하는 영을 통한 선행-2 천사가 선악을 알라에게 보고한다.
        c. 코란(무하마드에게서 거룩한 책은 성경이었다. 코란은 무하마드 사후에 기록).
        d.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모두 선지자다. 무하마드는 가장 위대한 선            지자
        f. 부활, 심판, 낙원

 

     3. 기본적인 신앙행위

 

        a. 하루에 다섯 번 메카를 향해 기도
        b. 자비(희사, 연1회 1년 수입의 1/40)
        c. 라마단 단식(1개월)
        d. 메카로 순례

 

     4. 정복활동-로마제국의 절반 정복/이 지역에서는 동로마제국에 대한 반란이 무르익고  있었다.  

 

632-661 정통칼리프시대:

 

신의 예언자인 무하마드의 대리인이자 후계자, 대화를 통해서 선발되었다(1대 아부 바크르와 2대 우마르 1세는 무하마드의 장인이며 3대 우Tm만 4대 알리는 무하마드의 사위였다. 우마르는 자신의 페르시안 노예에게 살해당했고, 우트만과 알리는 동료 무슬림에 의해 살해당했다), 시리아와 이집트를 정복했고 사산조  페르시아를 정복. 3대 칼리프시대에 코란(읽어야만 하는 것) 작성. 알리를 추종하는 쉬아파와 메카의 우마야드족을 중심한 우쓰만을 따르는 순니파(무함마드의 관행을 따르는파) 사이의 시민전쟁이 발발한다. 순니파의 승리. 이 시기에는 공화주의였고 단체의 동의에 의해 칼리프를 선출했으며 중심지를 페르시아에 두었다. 635년 시리아의 다마스커스 점령, 636년 야르묵 전투에서 비잔틴 제국이 패배함으로 시리아 전역확보, 638년 예루살렘 점령, 637년 카디시야 전투에서 페르시아 격퇴하고 641년 페르시아 전역을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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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1-750 Umayyad 칼리파 시대(다마스커스가 수도): 661년 4대 칼리프인 알리가 암살되자 라이벌이었던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가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서 스스로를 칼리프라 칭하며 우마위아조를 세웠다. 이후 14명의 세습 칼리프로 왕조 형태가 된다. 비잔틴 문명을 강하게 받은 아랍제국(아랍인의 특권주장), 정복운동을 통해 최대의 영토보유. 아랍민족주의 강화되고 무슬림으로의 개종 장려, 모든 공문서가 아랍어로 기록되고 개종한 자에게 세금 감면과 사회적 차별 철폐.

 

661-750 Umayyad http://ccat.sas.upenn.edu/~bvon/images/mexpan.jp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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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0- Abbasid 칼리프 시대(바그다드가 수도): 시아파의 반체제 운동으로 우마위야조가 혼란에 빠지자 750년에 알 아바스가 이란인의 반체제 운동을 이용하여 정권을 빼앗고 아바스조를 세우고 그 중심을 사산조의 영역으로 옯기고 쉬아파를 탄압하고 아랍인의 특권을 폐지하고 모든 이슬람교도는 평등하다는 이슬람법으로 통치. 국제적인 이슬람제국 세움, 우마위야조의 칼리프 일족은 이베리아 반도로 도망가서 756년 코르도바를 수도로 하는 후우마위야조를 세우고(756-1031) 이슬람은 동서로 분열됨. 751년에 당나라를 중앙아의 탈라스 전투에서 물리치고 비단길로 진출. 종이제조법이 이슬람세계로 전해진다.

 

압바스조 http://www.ucalgary.ca/applied_history/tutor/islam/fractured/
786-809 Abbas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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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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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
http://ccat.sas.upenn.edu/~bvon/images/bmap3.jpeg
이슬람의 동진
http://depts.washington.edu/uwch/silkroad/exhibit/religion/islam/islam.html 

 

     5. 기독교인의 운명
        . 711-718년: 스페인 정복
        . 피레네 산맥 지나 프랑크 왕국의 골 중심부까지 진격
        . 732년 투르 전투: 카알 마르텔(망치의 뜻)
        . 1492년 그라나다 함락으로 유럽에서 모슬렘 격퇴/ 무어인

 

     6. 기독교 패배의 원인
        a. 기독교인의 분리와 적대감/ 유순함과 전투력 상실/ 종교가 형식화/ 복음전도            실패
        b. 기독교는 종족 종교로 전락했고 복음 전도는 피상적
        c. 지배자의 종교로 전락- 다수족의 종교가 안되었다.
        d. 정교일치-동로마제국

 

E. 아시아:

 

동아시아 문화권 형성시기(수, 당 6세기말-10세기, 한국의 삼국-통일신라 668-935, 일본 다이가-나라-헤이안(794-857)), 중동의 이슬람 문화권 형성, 

 

   1. 중국: 

 

     a. 수나라 (589-)
      
http://depts.washington.edu/uwch/silkroad/exhibit/sui/sui.html

 

수 문제(541∼604) :

 

수의 초대 황제인 양견(楊堅)으로 북주의 공신 수국공 양충의 아들. 북주의 무제는 양견의 장녀 여화를 황태자 비로 삼았는데, 587년 선제(宣帝)가 즉위하자 외척으로서 조정에서 부동의 위치를 확립했다. 580년 여화의 아들 정제(靜帝)가 즉위하고부터, 양 견은 더욱 권력을 집중하여 위 지회 등의 반대파를 배제하고, 581년 정제의 선양을 받아 수의 황제가 되었다. 북변의 돌궐을 압박하는 한편, 587년에 남조의 양(梁)을, 589년에는 진(陳)을 멸망시켜, 남북의 통일을 실현, 3세기에 걸친 중국의 분열에 종지부를 찍었다. 내정으로는 5성(省) 2대(臺) 11시(市)의 중앙 관제의 정비, 구품 관인법의 폐지, 부병제·균전제의 확충, 화폐 제도의 통일, 대운하 광통거의 건설, 주군제(州郡制)의 개혁과 향관의 폐지 등, 귀족 세력을 통제하고 집권 체제의 확립을 기하여, 다음에 나타나는 당조를 위하여 세계 제국 건설의 기초를 다져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재위 24 년만에 사망했는데, 그의 아들 양제(煬帝)에 의한 모살이라고 전해진다.

양제(楊帝: 569∼618) :

 

수의 제2대 황제(604∼618)로 문제(文帝)의 둘째 아들. 582년 부친의 즉위와 함께, 진왕(晉王)이 되어 북변의 방비를 맡았으며, 586년 진(陳)을 토벌하여 이듬해 이를 멸망시키고 중국의 통일을 달성했다. 600년 형인 용(勇)이 폐적당한 뒤를 이어 황태자가 되었는데, 이 사건의 배후에는 중신 양 소(楊素)와 결탁한 양제의 음모가 있으며, 또 604년 문제의 죽음도 그들의 모살이라고 한다. 양제는 즉위하자 뤄양에 동도(東都)를 건설, 지방의 거상을 모으고 605년에 남녀 100만 명을 동원하여 황하와 회수를 연결하는 통제거(通濟渠)를, 608년에는 황하와 탁군을 연결하는 영제거(永濟渠)를, 또 610년에는 강남하(江南 河)를 개통했다. 이 운하들은 춘추 시대로부터 한대를 거쳐 반 자연, 반 인공적으로 된 수로를 양제가 보수 확장한 것이다. 현재의 대운하는 원,명 시대에 수리하여 회수로부터 북으로 산동, 텐진을 거쳐 베이징에 이르는 것이며, 전장 1,800km의 세계 최장의 운하이다. 강남의 경제 지대를 정치적·경제적으로 수도 대흥(大興)에 연결시켜, 남북을 일관하는 대동맥을 완성시켰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이리하여 609년에는 토욕혼을 토벌하여 칭하이를 병합하고 고창(高昌)을 입공(入貢)시켜 서역에의 길을 열었다. 남방에는 임읍(林邑)을 정벌하고, 적토국(赤土國)의 입공을 재촉하며, 유구(琉球: 오키나와)까지도 정벌하였다 게다가 612년 이후, 매년 고구려 원정을 감행했는데 모두 강력한 반격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이러한 외 정의 실패와 가혹한 수탈은 국내의 모순을 격화시켜 마침내 613년 양소의 아들 양현감(楊玄感)의 반란 을 계기로 천하는 혼란에 빠졌다. 양제는 동란의 확대와 더불어 더욱 향락에 빠지다가 618년 우문화급 (宇文化及)을 수령으로 하는 금위군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b. 당나라(618-907)
http://depts.washington.edu/uwch/silkroad/exhibit/tang/tang.html

 

이 연(李淵 ;566-635) :

 

당의 창시자(618∼626). 고조(高祖). 조상은 오호(5胡) 시대의 서량 왕 이호(李蒿)라고도 하고 또 귀화 한 선비족이라고도 한다. 장안에서 태어난 이연은 도량이 넓고 솔직한 인물로서 수 문제의 인척이어서 그의 총애를 받았다. 여러 주의 자사(刺史)를 역임하고 수말에 내란이 일어나자 관중의 치안을 맡았는데, 호걸들과 친분을 맺어 양제의 의심을 받기도 했다. 617년 태원 유수가 되었고, 내란이 격화하여 양 제가 있는 강도(江都)가 고립하자, 그 고장의 호족을 모아 거병, 돌궐의 도움으로 장안을 점거하여 양제의 손자 유를 옹립하였다(공제:恭帝). 이듬해 양제가 살해되자 스스로 제위에 올라 무덕(武德)으로 개원하고 장안을 도읍으로 정했다. 다음해인 619년 조,용,조 제를 개정하고 624년엔 대체로 군웅을 평정하여 당 왕실의 기초가 확고해졌다. 626년 둘째 세민에게 양위하였다.

이 세민(李世民 598-649) :

 

당의 제2대 황제 태종으로 고조 이 연의 둘째 아들. 휘(諱)는 세민인데「20세가 되어 제세 안민(濟世 安民)의 사업을 성취할 사람이다」라는 예언에 의하여 명명되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생각이 깊었으며 결단력이 풍부하였다. 수의 멸망을 예지하고, 협객·군도(群盜)를 기르다가 부친에게 권하여 거병, 내내 전군을 지휘하면서 관중으로 들어갔다. 이후 그 군사적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부친으로부터「천하는 모두 네가 이룩하여 놓은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인망이 높아, 형인 황태자 건성(建成), 아우 원길(元吉) 등의 질시를 받았으나, 기선을 제압하여 626년 현무문에서 형제를 사살하고 그 해에 즉위하였다. 국내 통일의 일단락을 짓자, 이민족의 제압에 착수하여, 630년 강적 동돌궐의 힐리가한을 사로 잡은 것을 위시하여, 토욕혼·토번·고창·서돌궐·설연타를 정복하였으므로 북변·서변·서역이 모두 당의 영토가 되었고, 남방 제국을 조공시켜 미증유의 판도를 이루었다. 정복지에는 이른바 기미 정책을 실행하여, 황제는 여러 수장으로부터 천가한의 칭호를 받아 번한 공통의 군주가 되었다. 국내 통치에도 주력하여 부역·형벌의 경감, 사치의 금지, 관제의 정비, 인재의 등용에 용심하였다. 수 멸망의 전철을 피하기 위해, 항상 신료와 치도를 논하고 황태자를 위하여 '제범(帝範)' 4권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또 '진서(晋書)' '양서(梁書)' '진서(陳書)' '주서(周書)' '수서(隋書)' 등 전대의 역사를 편찬케 하고 '진서(晋書)'는 친히 붓을 들었다. 한편 수말의 내란 때 성장한 군웅들을 어떻게 당조에 심복시키는가는 태 종조의 중요 문제였다. 태종은 그들을 관료제에 의하여 흡수하려고 하여, 문학·유학을 장려하였으며 홍문관을 두고 국자감을 확장하였다. 또 '오경정의'를 편찬케 하여 전대 이래의 해석을 통일하였다. 이러 한 외정·내치에 기여한 공신 20여 명의 초상화를 능연각(凌煙閣)에 걸게 했다. 그 치세는 정관(貞觀)의 치(治)라 하여 후대 황제의 모범이 되었다. 다만 만년에 손을 댄 고구려 원정은 고구려인의 불굴의 저항으로 실패하였다. 이 전쟁의 피해는 멀리 쓰촨에까지 미치어 각지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동아시아 문화권의 형성 :

 

아시아 세계에서 문명의 발생과 그 발전 지역을 문화의 유형에 따라 살펴보면, 황하 문명에서 시작된 동아시아 문화권과 인더스 문명을 중심으로 하는 인도 문화권,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시작된 서아시아 문화권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한대에 형성되기 시작한 동아시아 문화권은 위·진·남북조의 혼란과 분열 시대를 거쳐 마침내 당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동아시아 문화권의 4대 기본 요소가 되는 유교와 불교, 그리고 율령 체제와 한자가 지속적으로 발전되어 내려오다가 당대에 이르러 거의 완성 단계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6세기말의 수의 중국 통일과 이를 이은 당 제국의 출현은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와 동맹한 당의 침략에 의해 멸망하여, 한반도에 통일 국가가 출현했으며, 만주에는 발해가 건국하여 당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당 제국의 영토적 확대와 6도호부의 설치로 아시아 각국 이 직접 당과 정치·군사면에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기미(羈靡) 정책이나 책봉 체제(冊封 體制) 에 의한 조공 관계로 긴밀한 문화적 교류관계를 갖게 되었다. 특히 당의 개방주의 정책으로 당과 주변 국간의 정치·문화면에서의 교류가 촉진되어, 8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문화적 교류가 절정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통일 신라의 찬란한 문화나 나라·헤이안 시대의 일본 고대 문화, 그리고 발해의 문화는 다같이 자국 문화의 기반 위에 당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결과이다. 그러나 당 왕조가 멸망하는 10세기 초를 시작으로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는 붕괴되고 동아시아 문화권도 새로운 형태로 변형되어 나갔다
        
   2. 인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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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타왕조가 훈족에게  멸망된 후(550) 많은 소국으로 분리됨.
      
   3. 중앙아시아:

 

6세기 시작시 아시아 정세 http://depts.washington.edu/uwch/silkroad/exhibit/juan_juan/images/map.jpg

 

552년 돌궐제국 형성:

 

유연의 쇠퇴는 헤프탈의 북진에 좋은 조건을 부여하였고, 그 지배 아래 있던 돌궐(Turkit)의 발흥을 촉진하였다. 돌궐은 남북조 시대 중엽에서 당 초에 이르는 동안 몽고 고원과 알타이 산맥 지방을 중심으로 활약한 투르크계의 유목 기마 민족 또는 그들이 지배한 국가명을 일컫는다. 투르크 종족은 B.C. 3 세기 말엽부터 정령(丁零)·고차(高車)·철륵(鐵勒) 등의 명칭으로 중국 사료에 나타나 있다. 처음에는 유연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6세기 초 돌궐족은 알타이 지역에서 대장장이 일을 하며 지내다가 552년 우두머리인 부민칸이 서위의 도움으로 유연을 격퇴하고  오르콘 강 근방으로 본거지를 옮겨 돌궐제국을 세운다. 이 돌궐은 그 뒤 더욱 강대해져 사산 조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어 헤프탈을 멸하고, 이어서 멀리 로마에 사신을 보내어 동맹을 맺어 페르시아를 협공코자 하였다. 이리하여 돌궐은 북은 시베리아, 남은 중국, 동은 만주, 서는 페르시아에 접하는 유목민족 미증유의 큰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이 돌궐도 581년 이후 내분이 일어나 동서로 갈라져 부민칸의 아들 무한은 동돌궐로 내, 외몽골을 장악했고 부민칸의 동생 이스테미는 서돌궐을 세워 일리 강을 중심으로 한 서투르키스탄을 차지하였다(야브구국(Yabghu, 현재의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그리하여 중국, 사산조 페르시아, 비잔티움은 돌궐제국에 많은 시달림을 받는다.  

동돌궐 :

 

당은 동돌궐의 힘을 빌려 나라를 세웠던만큼 항상 그들의 멸시를 받았다. 동돌궐의 오만한 태도에 이 를 갈고 있던 당 태종은 동돌궐에 내분이 일어나 철륵 제부족의 이반함을 보자, 철륵 제부족 가운데서 도 가장 강한 시르타르더스(Syrtardus, 설정타)와 손을 잡아 동돌궐을 쳐부수고, 시르타르더스가 강성해지자 이번에는 시르타르더스에서 이반한 위구르(Uyghur)와 손을 잡고 이를 쳐부셨다. 이리하여 당 태종은 연연도호부를 두고 내외몽고를 지배하였다. 고종때에는 다시 위구르를 쳐 위구르 영내의 오르콘 강 근방에 안북도호부를 두어 외몽고를 지배하고, 내몽고의 운중에 단우도호부를 두어 내몽고를 지배하였다. 이리하여 동돌궐의 전지역은 당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러나 7세기 이후 당의 국내에 동요가 일어나자 다시 동돌궐이 일어나 716년에 즉위한 빌게(Bilge)와 그의 동생 퀼테긴(KulTagin) 시대에 강대 해졌다. 1889년에 발견된 오르콘 비문은 이 두 사람의 공적비로서, 이에 의하여 동돌궐이 북방민족 최초의 문자 사용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동돌궐도 퀼테긴이 죽은 뒤 쇠하여 망하였다(8세기).

서돌궐 :

 

서돌궐도 그 뒤 내분이 일어나 동부·서부로 나뉘어 서로 싸웠다. 당태종때 서부의 중신 하노(賀魯)란 자가 망명해 와 태종의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태종이 죽자, 그 부하를 이끌고 탈라스(Talas)방면으로 달아나 당에 배반하고 자립하여 샤프라가한(可汗)이라 일컬었다. 그는 그 뒤, 서돌궐 제부족을 통일하여 서역 제국을 지배하는 큰 세력이 되었다. 이에 당의 고종은 그와 사이가 좋지 못한 진주엽호가한과 손을 잡고 샤프라가한을 멸하였다(657). 이리하여 당의 세력은 드디어 파미르 고원을 넘어 서투르키스탄까지 미쳐 661년 토하라(Tokhara)에 기념비를 세웠다. 당은 중앙아시아에 8 도독부를 두어 통치하고, 이를 다시 동투르키스탄의 쿠차(Kucha)에 설치한 안서도호부로 하여금 통할하게 하였다. 서돌궐 중에서 576년 카우카수스 산맥을 넘어서 유럽에 Khazar Khanate로 알려진 최초의 국가를 남부 러시아에 건설(The name Khan derives from the Turkish word Kagan, the ruler of a nomadic empire). 8세기 중반에 지배층은 유대교를 신봉하여 자신들의 종교로 받아들였고, 10세기에는 쇠퇴하다가 키에프 공국에 의해 소멸된다(650-1016).
수는 동돌궐과 화친을 맺어 서돌궐에 대항하였다.

카자리아:

 

유럽에 세워진 최초의 터키 국가, 유대교를 국교로 한 유일한 비유대인 국가. 기독교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완충지대이며 7-8세기 아랍카자르 전쟁으로 알려진 사건을 통해 이슬람이 카우카스 산맥 북쪽으로 확장하지 못하게 한 장벽역할을 했다.

 

전체정보  http://www.khazaria.com/
역사: http://www.khazaria.com/khazar-history.html
지도
http://www.geocities.com/ayatoles/
http://198.62.75.1/www2/koestler/

토번(吐蕃) :

 

아라비아의 동진을 저지한 것은 토번의 서역 진출과 중앙아시아의 서돌궐 잔여 세력이었다. 토번은 중국에는 저족, 강족으로 알려진 티벳계의 민족이 지금의 티벳 지방에 세운 나라로, 스롱 쓰안 감 포 (Sronbtsam sgam po, 617∼650)왕 때에 라싸에 도읍하고, 당의 공주를 맞아들여 왕후로 삼고, 중국·인 도의 문명을 받아들여 독특한 문자를 만들었다. 이 돌궐은 당 태종의 일격을 받았으나, 즉시 회복하여 고종 때에는 청해 지방을 점령하고 안서 4진을 함락시키고, 중국의 사천·감숙에도 진출하였다. 토번의 전성기는 티스론 떼스안(걸립찬, 755∼797) 때인데, 그는 당의 안사의 난 때에 당으로 쳐들어가 장안을 함락시켰다. 즉시 당의 반격을 받아 물러갔지만, 토번의 하서·용우의 점령은 당말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었다. 또 그는 불교를 일으켜, 이 결과 인도승으로서 티벳에 오는 이가 많았다. 그 중에서도 파드마산 바바는 티벳 고유의 토속 종교(본보교)에 인도의 밀교를 보태어 라마교(lamaism)를 일으켰다. 군사적으로 문화적으로 강성을 자랑하던 이 토번도 9세기 이후 차츰 쇠하였다.

소구드족  
http://depts.washington.edu/uwch/silkroad/exhibit/sogdians/sogdians.html
http://www.silk-road.com/artl/sogdian.shtml
600년 세상
http://www.hyperhistory.com/online_n2/History_n2/a.html
768년 세상
http://www.ucalgary.ca/applied_history/tutor/firsteuro/imgs/map25.html

  II. 그리스도인의 상황

 

A. 유럽: 중세교회형성    http://www.fordham.edu/halsall/sbook1e.html  
  1. 게르만족의 침략으로 로마 세계가 재형성된다.
  2. 영웅적인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전 유럽으로 기독교의 확산
  3. 수도원주의로 교회의 세속화를 견제하고 학문과 성경을 보전하며 선교와 교육을 담담한다.
  4. 교황제가 시작된다. 교황 그레고리1세는 오늘날의 미사형태를 확정한다.
  5. 장원제도가 형성된다.
  6. 교회와 국가의 상호관계가 형성된다.
  7. 교회 분리의 위협이 표면화된다. 동로마: 519년 이후 단성론 포기(Henoticon 포기)함으로 서로마와 화해하나 정통주의, 단성론, 네스토리안의 분리는 가속화된다.
  8. 이교도의 문화가 기독교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한다.
  8. 이슬람이 기독교의 중심지를 장악하고 기독교의 가장 강력한 위협으로 등장

B. 아시아:
   1. 사산조 페르시아 치하의 기독교(- 651): 페르시아 교회의 도약기  

 

  a. 교구확장

 

1) 410년 1차 페르시아교회 공의회: 1명의 총대주교, 5명의 대주교, 38명의 주교.  
   424년 제3차 공의회: 1명의 총대주교, 6명의 대주교, 54명의 주교.
  
2) 5세기말 6세기 중엽의 페르시아교회의 교구: 유프라테스 강의 동쪽에서부터 시작하여 서쪽으로 확대하여 이집트, 시리아, 아라비아, 소코트라, 메소포타미아. 갈디아. 페르시아. 메디아, 박트리아(백훈족), 힐카니아, 서남인도;
  페르시아 셀류키아 테시폰 총대주교(Patriach: seleucia-Ctesiphon) 바바이 시대(497-502)의 관할 대교구(metropolitan provinces)와 직할 교구(bishoprics)

 

   (1) Province of Patriarchalis. Metropolitan at Kaskar, a bishop at Hira(아라비아교회들이 소속됨).
   (2) Province of Nisibis, Metropolitan at Nisibis, a bishop at Bakerda.
   (3) Province of Teredon. Metropolitan at Basrah, a bishop probably at Destesana, and a church, if not a bishopric, at Nahar-al-Marah.
   (4) Province of Adiabene. Metropolitan at Erbil, bishops at Honia and Maalta.
   (5) Provinces  of Garamaea. Metropolitan at Karkha, bishops at Sciaarchadata and Dakuka.
   (6) Province of Khurasan.  Metropolitan at Merv.
   (7) Province of Atropatene. Metropolitan at Taurisium.
   (8) Province of Susiana. Metropolitan at Jundishapur, bishops at Susa, Ahwaz, Suster(522년).
   (9) Provinces of Rawardshir.
   (10) Provinces of Rai
   (11) Provinces of Herat.

   대교구에 소속되지 않은 교구: Maiperkat, Ninevdh, singara, Arangerda, Ispahan, Nishapur, Segestan

3) 수도원 Mount Izala near Nisibis(원장은 페르시아교회의 총대주교 다음의 위치에 있을 정도로 큰 영향력을 가짐), Dorkena near Seleucia(총대주교의 무덤이 위치), Tela, Baxaja, Haigla, Henda, Zarnucha, Camula, Anbar, Beth-Zabda, Chuchta, Kuph.

4) 522년 여행하고 547년 저작 완료한 이집트 네스토리안 수도승인 Cosmas Indicopleustes의  Christian Topography에 따르면 "Even in Taprobane(현재의 Ceylon), an island in Further India, where the indian sea is, there is a Church of Christians, with clergy and a body of believers, but I know not whether there be any Christians in the parts beyond it. In the country called Male(현재의 Malabar), where the pepper grows, there is also a church, and at another place called Calliana(현재의  there is moreover a bishop, who is appointed from Persia. In the island, again, called the Island of Dioscorides(Socotra), which is situated in the same Indian sea, and where the inhabitants speak greek, having been originally colonists sent thither by the Ptolemies who succeeded Alexander the Macedonian, there are clergy whod receive their ordination in Persia, and are sent on to the island, and there is also a multitude of Christians(3장 178).”

 

... "And so likewise among the Bactrians and, Huns and Persians, and the rest of the Indians, Persarmenians, and Medes and Elamites and throughout the whole land of Persia there is no limit to the numver of churches with bishops and very large communities of Christian people, as well as many martyrs, and monks also living as hermits. So too in Ethiopia and Axom, and in all the country about it; among the people of Happy Arabia-who are now called Homerites-through all Arabia and Palestine, Phoenicia, and all Syria and Antioch as far as Mesopotamia(3장 179).”

 

... “There is a large aceanic island lying in the Indian sea. By, the Indians it is called Sielediba, but by the Greeks Taprobane, .... The island has also a church of Persian Christians who have settled there, and a Presbyter who is appointed from Persia, and a deacon and a complete ecclesiastical ritual. But the natives and their kings are heathens(11장 336, 337).”

5) Assemani quotes Cosmas as having in the year A.D. 525 found Christians not only in Socotra and Ceylon but in the Ganges valley, Pegu, Cochinchina, Siam and Tonquin.(Bibliotheca Orientalis, Vol. III, part 2.)

6) 총대주교

 

Babai (497-502) 497년 제5차 공의회에서 페르시아내의 단성론자(베이트 라파트 감독이며 페르시아교회의 서열 2위이며 페르시아 교회내의 단성론자의 대부)를 징계함으로서 페르시아교회의 단성론 콘스탄티노플에서 독립, 기독교의 쇠퇴기(도덕적 타락)

Silas (505-523) 교회족벌주의, 교회보다 가정(공처가)이 품고있던 야망실현에 더 관심

Narses and Elisaeus (524-539) 교회의 혼란스러운 분열, Elisaeus는 Silas의 사위였는데 족벌 정치에 반대하여 감독들이 Narses를 총대주교로 지명. 교권쟁탈전,

Paulus (539) 샤의 친구이며 Beit Papat, Gundeshapur의 주교였으나 2달만에 사망

Mar Aba I, (540-552) 교회 개혁시기, 가장 위대한 총대주교, 조로아스터교에서 개종자, 페르시아와 콘스탄티노플간의 22년간 전쟁 시작, 재직 기간중 7년을 감옥이나 망명상태에서 교회를 치리, 교회는 318명의 주교가 있었다.

 

두드러진 업적

 

  1. 교회를 완전히 재조직: 떠돌아 다니는 공의회 실시로 두명 이상의 동일 교구를 정비, 544년 마르 아바 공의회에서 최종 정비

  2. 신학교 교육을 정비하고 활력불어 넣음, 모든 교인들이 쉽게 이해하고 고백할 수 있는 신앙고백문을 만들었다. 수도인 셀루키아 테시폰에 신학교 설립추진

  3. 교회를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부흥시킴: 분열기간에 기독교인들은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타락하고 비도덕적이고 지나치게 탐욕스럽고 사치스럽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제자같기보다 조로아스터교 신자같이 되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기독교적 단순성으로 복귀. 수도원 운동의 부활 독려, 정치에 지배당하는 교회구조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으며 교회가 새로운 힘의 중심지가 되게 했다. 

  4. 기독교인의 연합에 전력하였다. 544년 공의회에서 칼케돈회의의 신조와 포고문을 채택함으로서 정통주의에 합류. 교회의 기본입장이 니케아회의와 동일함을 선포. 반면 서방은 일치운동을 거부

   544년경의 기독교 박해에서 마르 아바는 개종했고 개종시켰다는 명목으로 재판받았다. 이후 긴 박해와 음모와 위기에서 기독교를 수호하고 페르시아왕의존경을 받았다. 552년경 헤프탈의 대표가 와서 자신의 나라의 감독으로서 기독교 지도자를 임명해달라는 용청을 함.

Joseph (552-567)

 

코에로에스 1세의 개인 의사였고 왕의 임명받은 비양심적이며 독재적인 폭군. 감독들에 의해 퇴위당했으나 570년까지 왕에의해 파면되지 않았다. 이 시기에 동로마의 황제 저스티니안(Justinian)은 아프리카와 시리아의 단성론파를 되찾고 자신의 제국을 통합하려는 의도로 553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세명의 네스토리안 지도자(데오도렛, 사이러스의 데로도로, 에뎃사의 히바)의 공식적인 유죄판결을 이끌어냈다.

Ezechiel (570-581)

 

총대주교 마르 아바의 전직 빵굽는 자로서 567년 선출되었으나 570년 왕이 허락하기까지 임명되지 못했다. 이 시기에 헤나나가 니시비스의 지도자로 되었다(571년). 그는 전통적으로 인정되어온 데오도렛의 성경해석 방법보다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인 요한 크리소스톰을 선호했다. 신학도 서방 정교회편을 들었다. 이에 따라 네스토리안 추종자들은 네스토리안 신학을 옹호하는 벳 사데학교를 세우고 이즈라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가르쳤다.

Yeshuyab I (582-595)

 

페르시아왕 로르미즈 4세의 총애를 받았으나 코에로에스 2세의 집권시기에 총애를 잃고 망명중 사망, 585년 제9차 총회에서 헤나나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590년의 종교회의에서는 헤나나를 칭찬했다.

Sabaryeshu I (596-604)

 

성자로서 왕의 가장 총애받은 부인인 시린에게 존경을 받음, 은둔자로서 선교사로서 유명, 선출시 감독들의 천거된 5명의 명단에 없었으나 왕에 의해 임명됨, 기독교인에 대한 우호감을 가지고 있는 페르시아왕 코스로에스 2세는 기독교인들을 위해 많은 네스토리안 교회를 건축했다. 그리고 헤나나를 두둔했다. 그런데 왕비 시린과 왕의 주치의인 가브리엘이 단성론으로 개종하였다. 596년 종교회의에서 헤나나는 니시비스 신학교에 계속 있었으나 교회에서의 기반은 상실하고 교회는 단성론과 네스토리아파로 분리되고 헤나나의 영향력도 학교에서 끝이나면서 분열되었다. 학생들의 대다수는 니스비스를 떠나 다른 학교로 흩어져서 페르시아 기독교의 지적 중심지가 흩어졌다(주로 개혁 수도원의 중심지인 이즈라산의 대수도원, 세루키아 테시폰의 학교, 코스로에스 1세가 콘스탄티노플의 기독교 포로들을 위해 세운 군데샤푸르 학교-의학과 성서연구와 희랍 철학자들의 작품번역을 전문으로 하는 철학연구의 중심지)

Gregory (605-608)

 

계략으로 임명되었다. 왕은 강경한 정통파 니시비스의 감독인 그레고리를 지명했으나 감독단들은 얼마전 추방한 그레고리를 거부하고 이름이 같은 셀루키아 테시폰의 네스토리안 교사를 선택한다. 이에 왕은 더 이상 총대주교를 선임해주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공석 (608-628)

 

왕은 새로운 총대주교를 임명하지 않았다. 네스토리안과 단성론파가 교권다툼함. 이때에 이즈라 산의 대 수도원 원장인 대바바이는 페르시아 전역을 순회하며 교회를 관리하였다.

Yeshuyab II (628-643)

 

기독교회로부터와 조로아스터교 페르시아 사람들에게도 인정받은 뛰어난 행정가며 정치가인 헌신된 성직자, 감독사절단을 인도하여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전쟁 종료를 요구하고 신학적으로 탁월한 황제 헤라클리우스와 논쟁하며 콘스탄티노플의 정통주의에 맞추려고 노력하여 평화를 이룩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이단시비에서 지혜롭게 처신하여 교회의 평화를 이끌었으며 침략하는 무슬림과 평화적 관계를 정착하기 위해 아랍과 호이적인 상태로 연합했다. 그리고 인디아에 첫 대주교구를 만들었으며 당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페르시아교회가 아시아교회가 되게 하였다.

Maremes (647-650)
Yeshuyab III (650-660)  1명의 총대주교, 9명의 대주교, 96명의 주교.
  
  b. 수도원 운동의 부흥

 

6세기에 기독교 수도원 운동의 부흥이 페르시아 전역에 퍼졌다. 카스카르의 아브라함(491-586)이 주도. 페르시아의 수도사들과 금욕주의자들은 기독교인들의 본이 되었다. 5세기 후반에 규율이 완화되고 수도사가 공개적으로 부인을 두고 살게 되었고(484년 공의회에서 주교의 결혼 허용) 교회의 쇠퇴기로 들어간다.  아브라함은 니스비스 학교에서 베이트 랍반의 아브라함에게서 공부한 후 아라비아와 남동쪽에 국경을 대하고 있는 히라(Hira)의 거의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는 락미드 왕국에 거주하는 아랍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었다. 거기에서 이집트로 여행하다가 Scete 주변에 있는 대사막내의 수도원에 거주하는 수도사들의 금욕적인 규율과 엄격한 생활방식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귀환후 니시비스 근처의 산간 지역에 은둔하면서 이즈라(Izra)수도원을 세운다. 그리고 페르시아 교회의 영적인 토대가 된다. 규칙은 성경의 권위들과 교부들의 전통에 크게 의존하고 엄격한 기도와 예배를 고집하며 사랑 가운데 관대하고 하나되는데 전력을 다한다. 네스토리우스식의 삭발을 고안했다. 

 

  d. 페르시아에서 서방과 단성론과 네스토리안의 신학적 갈등과 세력 다툼

 

   동로마에서는 황제 제노와 아타스타시우스의 치세하에서 단성론이 득세하였다. 그러나 동서로마의 통합을 시도한 제스틴 1세(518-527)와 그의 조카 저스티니안(527-565통치)에서는 칼케돈주의자들이 득세했다. 이로써 동서교회의 분열은 끝이 났다(487-519). 그리고 단성론에 대한 박해는 시작되고 많은 단성론 성직자들이 추방되어 페르시아로 들어갔다. 그리고 비잔틴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아시아의 많은 지역이 단성론에 대한 대중적 지원이 있었다. 특히 조직과 선교의 천제인 야곱 바라대우스(Jacob Bardaeus-헝겁누더기 야곱)의 활동으로 박해속의 단성론은 정교회 안에서 콘스탄티노플에서 페르시아국경까지의 영역에서 독자적인 교단으로 발전했다(불신자 1만명을 개종시키고 27명의 감독과 2명의 총대주교 임명, 시리아 단성론을 야곱파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있다). 그리고 단성론파의 평신도들이 페르시아와 교역하며 자신들의 신앙을 전파하였다. 그리고 페르시아와 로마의 전쟁에서 많은 수의 기독교인들이 포로로 페르시아에 정착하게 된다. 선교에 열정적인 단성론자들은 이러한 동로마 포로들에게 선교하고 페르시아내의 네스토리안 멜렛내의 소수파로 남아있게 된다. 그러나 시린 왕후가 단성론으로 개종하면서 페르시아 내의 단성론은 네스토리안에게 도전하게 된다. 

 

   네스토리안의 그리스도의 개체에 대한 신학적 입장은 “한 위격(parsopa=prosopon=person) 안에 두 성품(keyane=physis=nature)과 두 본체(qenuma=hypostasis or )"로서 두 성품의 각각의 독립적인 특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니케아회의 결정후에 약화되는 경향이 있는 그리스도의 인성의 중요성을 표현하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단성론은 "한 인격(hypostasis)과 하나님과 인간으로 구성된 한 성품(physis)”으로서 두 성품의 분리로 인한 신성의 약화를 우려하여  하나의 성품 즉 신성안에 인성을 말함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중요시한다. 한편 서방이 중심되어 형성한 칼케돈회의는 “한 위격 안의 두 성품(two natures in one person)"을 말하며 두성품의 독립적 성격을 규정함으로 단성론의 반발을 가져왔고 하나의 위격(hypostasis)을 말함으로 네스토리안의 불만을 가져왔다.  단성론자들은 네스토리안을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이라 공격했으며 서방교회는 네스토리안을 외적으로만 일치된 두 위격으로 분리하는 자들(양성양체자들 또는 양성단체자들)이라 했다. 이에 대해 네스토리안은 서방교회의 주장(킬케돈회의 결정사항)를 받아들이며 그리스도를 두 위격으로 나주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칼케돈회의의 하나의 위격이라는 말이 양성의 독립된 분리를 약화시킴으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태초부터 존재하는 연합을 가지신, 말씀이신 하나님 사이에 놀라운 결합과 파괴될 수 없는 연합이 있다. 이 사실이 우리들에게 알리는 바는 시작도 없이. 만세 전에 아버지에 의해 신성을 가지고 태어났고, 마침내 다윗의 딸인 성녀 마리아의 인성르 가지고 탄생한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하나의 위격을 우리가 아는 것이다.”

 

    신학 논쟁에서 네스토리안은 자신들이 서방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주장함으로 단성론과의 신학논쟁에서 승리하였다. 그러자 단성론자인 가브리엘은 네스토리안 지도자인 수도사 조오지가 조로아스터교에서 개종한 불법자임을 고소한다. 사실 이 조항은 박해시 외에는 사용되지 않는 법이었다. 그리하여 개종을 당당히 인정한 조오지는 사형을 당하게 된다.

 

    신학대논쟁 후에 가브리엘의 영향력으로 숫자의 증가를 본 단성론파는 605년 쿠르디스탄 출신의 에뎃사에서 교육받고 돌아온 마루타의 지휘아래 벌어진 선교운동으로 진정한 확장을 맞이한다. 마루타는 가브리엘과 셀루키아 테시폰의 단성론 감독인 사무엘의 친구로서 학교를 조직하고 전 제국을 개종시키기 위해 선교사를 보냈다. 628년 코스로에스 사후 네스토리안이 새로운 총대주교를 선임할 때 단성론자들도 야곱파 시리아 총대주교의 권위아래에 있는 페르시아 내의 첫 번째 야곱파 교회의 마프리안으로 마루타를 선임한다. 그리하여 페르시아내에서 기독교는 하나의 통일된 멜렛이 아니라 두개의 멜렛이 생기게 된다.

  c.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 

 

    기독교인은 의사, 통역사, 학자, 유능한 사무관, 재무관, 상인, 기능공등으로 국가의 중요 직책을 맡았으나 페르시아는 제국내의 소수파를 통제하는 장치인 멜렛(Melet)제도법은 기독교인들을 인정받은 지위에 있게 했으나 제국의 일반 문제들로부터 격리되고 억제된 그룹이 되게했다. 지주나 봉건영주나 그의 가족들에게서 기독교인은 없었고 군인에게는 전무했다. 문관은 상당한 숫자가 기독교도이고 법관은 교회법이므로 종교에 따라 배분되고 의학계는 기독교가 독점,  정치적인 중립, 기독교인은 기독교 멜렛에서만 정치권력을 행사했다. 국교인 조로아스터교 교도와 동등하지 않은 신분이고 열세였다. 기독교인 독특한 양식의 복장을 입어야 했다(기독교인의 겸손한 옷). 6세기의 페르시아 기독교인은 부유해지고 영향력이 커졌으나 사회적으로는 중류층이거나 그 이하로 구성되었다. 개종은 불법이었으므로 조로아스터교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페르시아에서 조로아스터교 다음의 힘있는 종교가 되었다.

   2. 인디아 기독교

 

      a. 여러 가지 흔적과 회중의 존재가 있었음에도 4세기까지 독자적인 인도교회 기관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b. 5세기 초반 페르시아교회와 인도교회의 유대는 조직화되고 강화되었다. 인도 기독교 공동체는 페르시아 교회로부터 교회 정치상 독립되었다. 인도교회에 대한 페르시아 교회의 통치는 페르시아와 인도간의 직항해상로에 있던 레와다쉬르 주교구에 속해 있었다. 이 주교구는 410, 420년경 대주교구로 승격되었고 인도교회에 대한 사법권을 가졌다. 인도교회에서 사용된 언어는 시리아였다.  인도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사제를 페르시아에 보내 공부시켰다. 6세기 초 코스마스의 기독교 지형학에서 스리랑카에 페르시아 교회가 있고 사제가 있음을 말한다. 6세기 중반에 인디아 기독교는 감독과 사제와 신자들로 구성된 조직 교회였고, 페르시아 네스토리우스 교회와 깊이 관련되어 있었으며, 인도에서 소수 공동체로 존재했다. 초대교회와 연결된 전통과 국제적인 기독교 조직망과의 연계성과 인도방식의 토착화된 예배형식을 지닌 기독교 집단이었다. 7세기 초에는 인도기독교도 확장되어서 인도교회는 대주교구가 되어 독자적인 치리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3. 아라비아 기독교: 기독교의 중심지는 아라비아 반도의 북서에 위치한 가산 왕국, 북동의 락미드 왕국, 남서의 힘야리트 왕국이었다. 그러나 가산왕국은 이미 4세기에 비잔틴로마에 속국이 되었고 락미드왕국은 페르시아에 흡수되었다. 힘랴리드왕국은 독립국으로 있다가 유대교와 단성론 기독교의 대립관계로 인해 결과적으로 외국의 지배하에 있게 된다.

 

  유대교 아랍인들과 단성론파 기독교 아랍인들의 대립상황에서 기독교인은  이디오피아 기독교인의 도움을 호소했고 523년 이디오피아의 기독교인 통치자는 아라비아 통치권을 요구하며 침략하였고 유대교와 이교도들이 힘을 합친 힘야리트 족은 기독교도와 이디오피아 동맹군을 무찌르고 주변에 있는 기독교도를 대량학살한다(427명의 성직자를 화형에 처하고 4252명의 신자들을 죽였고 1297명의 유소년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이디오피와 다시 전쟁하고 이디오피아가 승리하자 이번에는 유대인에 대한 대량학살이 자행된다. 그리고 기독교도 왕인 아브라하의 이디오피아 정권이 세워진다.  아브라하는 당대의 가장 화려한 성당을 자신의 수도에 건축하여 메카에 있는 카바신전에 필적하는 아라비안 종교 순례의 중심지가 되게 했다. 그런데 베두인들이 이 성전을 더럽히자 571년 경 아브라하는 코끼리를 타고 메카를 침공한다. 그러나 무하마드의 조부인 아브드 알 무탈립에 의해 패배한다. 그리고 이 정권은 575년경 페르시아에 의해 정복되어 페르시안 걸프만의 헤랏에 귀속되어 페르시아의 인도양 해상로 장악의 연결점이 되었다. 

 

   아라비아의 초기 기독교 선교는 매우 미약하여 이슬람이 발흥하기 전에 아랍 기독교가 형성된 지역은 모두 외국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아라비아의 기독교는 모두 토착적인 형태가 아니라 외래적인 형태가 되었고 성경이 아랍어로 번역조차 되지 못했다.

   2. 이슬람치하에서 기독교: 참고 서원모의 이슬람과 기독교
http://cafe.daum.net/overview 자료실-전체교회사-23번

 

이슬람은 유럽교회를 황폐하게 만들었으나 페르시아의 기독교에게는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았다. 페르시아 기독교는 아랍인들을 조로아스터교의 박해로부터 해방시킨 자들로 간주하고 환영했으며 아랍정복자들도 기독교도를 자신의 권익을 위해 이용하였다. 그러나 아랍 기독교도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던지 죽음을 선택하던지 둘 중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비아랍인 기독교도에게는 딤미로 알려진 종교 거주지로 몰려 점점 쇠퇴해가던지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선택이 주어졌다. 페르시아를 정복한 아랍은 도시를 피하여 바스라와 쿠파와 같은 지역에서 캠프를 치며 문명지대를 통치할 제도를 만들었다. 아랍인들은 기독교도를 사회에서 분리시켰고 타지역으로 집단 이주시켰고 자신들의 공동체를 형서하게 하고는 정치적인 권리를 제한시키면서 특수한 일에 이들을 고용하였다. 물론 군대 봉사는 금지되었다. 기독교도와 유대인들은 의사, 음악가, 상인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특히 당시에 최상의 교육을 받은 기독교도들은 아랍 집권자들의 행정적인 비서로, 철학자로, 설계사로, 과학자로. 예술가로서 일을 하였다. 몇몇은 국가적으로 또는 지역정부에서 최고로 존경받는 위치에 까지 올라갔다. 아랍 점령 초기에는 제국의 비아랍 행정은 아랍어가 아니라 헬라어나 페르시아어나 콥틱어로 행해졌으므로 수많은 기독교도 비서관이 등용되었다.

 

    페르시아의 네스토리안들은 아랍에 가장 적극적인 호의를 보인 기독교였다.  그리하여 총대주교는 페르시아의 수도인 셀루키아 테시폰에 거주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단성론자들의 신분은 오히려 개선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통치하에서는 법적위치를 인정받지 못했으나 이슬람 정권은 이들을 법적으로 인정해주었다. 아랍제국 하의 시리아 단성론인 야곱파는 유프라테스에 위치한 케네쉐르 수도원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네스토리안의 니시비스학교와 견줄 야곱파 학교에서 배출한 두 명의 지도자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에뎃사의 야곱(633-708)과 아랍족속의 감독인 조오지(686-724)였다. 전자는 완역판 시리아어 구약성서와 시리아 예식서를 만들었고, 후자는 시리아어 주석을 만들었다.

 

    수도를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로 옮긴 우마위야 제국은 거의 1세기 동안 기독교도에게 상당한 관용을 베풀고 도움을 받아 존재했다. 정통주의자들은 교회 사무에서 비잔틴 왕들의 간섭을 받지않았고, 단성론은 박해에서 벗어났으며 네스토리안은 신분의 상승을 경험했다. 그리고 같은 아시아인이며 언어적 기원과 오랜 역사적 친숙함은 그리이스 로마인의 외래적 경향과는 구별되는 것이었다. 이 이시대에 기독교인들은 아랍제국의 기초를 다졌다. 이슬람 언어로 쓰여진 최초의 과학서적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시리아 기독교 사제에 의해서 만들어진 의학논문이며, 이것은 페르시아 유대인 의사에 의해서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우마위야 제국의 재정담담 최고 책임자였던 이븐 우탈 (Ibn Uthal) 은 기독교인 의사였다. 다마스커스시대의 첫째 칼리파인 무야위야(Muawiya 1세 680-683)의 주치의로 있다가 그의 신실함으로 재정행정가로 승진한다. 그리고 그의 아들도 행정관으로 지내게된다. 그리고 알 아크달(al-Akthal)은 고등법원에서 일하고 제국의 계관시인으로 불리워졌다.

 

    그리고 이븐 우탈의 손자로서 태어나서 행정가로 일했다가 나중에 수도승이 되어서 헬라교회의 마지막 신학자와 최초로 이슬람에 대한 기독교 변증가가 되었던 다마스커스의 요한(657-749)는 이 시대의 대표적 기독교인이었다(무슬림의 하나님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니다. 요한의 하나님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그는 아랍어와 헬라어에 능숙한 사람이었고 그의 저작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의 모델이 되었다. 그는 쌀쌀하게 무함마드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그는 논쟁하기를 좋아하며 도전적인 태도를 가졌다.
http://www.ccel.org/fathers2/NPNF2-09/Npnf2-09-25.htm#P2545_1610599
http://www.balamand.edu.lb/theology/WritingsSJD.htm
http://home.it.net.au/~jgrapsas/pages/Damascus.html
http://answering-islam.org.uk/Books/MW/john_d.htm
http://answering-islam.org.uk/index.html 

 

    8세기부터 아랍민족주위가 강화되면서 이슬람으로의 개종이 장려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도는 자신들이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다. 기독교 신앙을 공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금지되었고 세금을 더 많이 내야했고 2등시민의 대접을 받았고 아랍어를 사용해야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이에 적극적인 대응을 시작했다; 묵시문학, 기독교 신앙을 변증함, 신약성서를 아랍어로 번역한다. 그러나 아랍제국의 종교적 제재, 사회적 제재, 경제적 제재는 기독교인을 고립시키거나 개종시키는 형태로 나타난다.

 

    아랍제국에서 아랍 딤미(종교적으로 최하층의 거주지)로서 기독교인들은 페르시아에서의 멜렛보다 더 나은 조건에서 살게된다. 기독교인들은 “코란경의 사람들”로서 사산조시대의 군인징집과 노역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나 아랍제국은 비무슬림을 제국의 안전을 위해서 군사의무에서 면제시키는 대신 추가 세금을 내야했다. 사실 이 세금압력은 아랍제국에 속한 비아랍인들을 비아랍개종자가 되게 만든 주요인이 되었다(아랍제국에서의 신분: 아랍 무슬림-비아랍무슬림-비무슬림). 중간층인 비아랍무슬림(mawali)에는 주로 조로아스터교나 기독교에서 개종한 사람들이며, 최하층은 주로 기독교도, 유대인, 조로아스터교도, 마니교도들로서 구성되었는데 자신의 종교의식을 자유롭게 실행하는 데에 상당한 벌금을 내야했다. 이를 오마르 계약이라한다(이 계약은 그 근거를 2대 칼리파에게 두고 있으나 실제로는 800년 정도에 최종적인 법적 편집이 이뤄진다.  http://www.fordham.edu/halsall/jewish/jews-umar.html   http://www.fordham.edu/halsall/source/pact-umar.html ).  이 계약에는 벌금이 얼마인지를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것이 종교적인 제재였다. 비록 수도원이 파괴되거나 교회안에서의 예배는 허락이 되었으나 기독교의 종교예배에 대한 여러 가지 금지와 전도 금지 무슬림도시에서의 기독교 예배행위 금지등이 나타난다. 이로써 기독교의 선교를 본질적으로 막는다.

 

    사회적 제재는 차별정책으로 나타난다. 이는 사회적인 굴욕감을 형성시킨다. 기독교도들은 처음에는 허리둘레에 구별되는 수건을 매도록 명령받았고 나중에는 외투 앞 뒤로 커다란 노란 헝겊을 달아서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표시해야 했고 머리도 앞 머리를 짧게 깎아야 해고 말 타는 방식도 달라야 했으며 길 갈 때 길 중앙으로 다녀서도 안되면 길 가다 무슬림을 만나면 길을 피해주어야 했다. 모임에서도 중요한 자리에 앉는 것이 금지되었다.

 

    경제적 제재는 가장 심각한 기독교의 쇠퇴를 가져왔다. 기독교도는 자신의 신앙을 유지하는 대신 그 댓가를 돈으로 지불해야했고 예배는 두 배의 세금을 내야만 가능했다. 기독교인에 대한 세금의 의무는 그가 죽었을때에 끝이난다. 그러나 개종하면 모든 무거운 세금에서 면제되었다. 반면 이슬람에로의 개종은 철회될 수 없으며 배교는 죽음의 형벌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 아랍왕조는 얼마가지 못해 종교상 소수집단의 문제가 아니라 내분으로 멸망한다. 

 

   경교비문에 기록된 당시의(781) 네스토리우스교의 성직조직은 크게 3부분으로 분류된다. 감독의 역할을 하는 주교, 예배를 주관하는 사제, 보조업무를 수행하는 집사이다.

 

a. 감독(bishop)   1) 총주교(patriarch, catholicus)
                 2) 대주교(archbishop, metropolitan)
                 3) 주교(bishop, episcopus)

 

b. 사제(prsbyter) 4) 사제(chorepiscopus)
                 5) 부제(archdeacon)
                 6) 순회사제(periodeutes)

 

c. 집사(deacon)   7) 집사(deacon)
                 8) 집사보(sub-deacon)
                 9) 독경사(reader)

 

[9-12세기 선교] 역사적 배경

 

 
 

I. 역사적 상황

 

http://www.fordham.edu/halsall/maps/800eur.jpg
http://www.fordham.edu/halsall/maps/900eur.jpg
http://www.fordham.edu/halsall/maps/1090map.htm
마펫 15-17장, 김호동 2-3장, 스티븐 니일 3-4장, 허버트 케인  2-3장

기독교력이 1000년을 향해 움직이자 기독교국가들은 심판과 종말이 임박했다고 생각하며 두려움과 공포와 기대로 가득찼다. 그리고 새천녕이 시작되면서 스코틀랜드와 스카디나비아에서 프러시아와 폴란드, 발칸반도에 이르는 마지막 이방지역인 북부 변두리르 복음화하려는 시점에 와있다. 지중해 연변에는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한 비잔틴정통과 안디옥을 중심한 시리아 정통이 있으나 분리되어 결집력을 가지지 못했다. 반면 아시아 제국들은 월력이 다른 관계로 1000년이라는 시간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그러나 당나라가 멸망하고(907) 5대 10국의 혼란의 시기(907-970)이어지고 송(960-1127)이 들어서나 변방의 유목민에게 밀리게 된다. 아시아의 동쪽이 혼란으로 흔들리고 있었다면 아시아 서쪽끝의 아랍제국은 자신들의 제국 동쪽 변경은 터키족에게, 서쪽 변경은 페미티드 이집트와 기독교 콘스탄티노플에게 잃어가고 있었고 정권은 터키족의 꼭두각시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시아의 남쪽인 인도에는 터키 유목민들이 들어와서 가즈니왕조를 세우며 인도를 흔들었다. 중국에서의 경교는 사라져갔고 중앙아와 인도북부에서는 기독교가 이슬람으로 대체되어가고 있었다. 다만 남부인도에서는 도마 기독교가 강성했으나 소수카스트로 간주되어 고립되어있었다. 그러나 페르시아에서의 기독교는 자신들의 관할지역(딤미, dimmis)외에는 기독교가 거의 보이지 않았으나 교회는 생존했다.

A. 유럽:

 

1. 바이킹의 이동

 

http://darkwing.uoregon.edu/~atlas/europe/static/map16.html

 

   a. 9세기 봉건주의 / 샤르마뉴 대제 이후 3분된 정치 공백(843년)으로 / 외부의 침략세력-스칸디나비안과 무슬림으로 / 도시보다 시골에서 살았다. 땅이 부의 기준/ 봉신,가신

 

   b. 교회와 사회의 생존/ 교황권의 쇠퇴, 교회는 봉건적이되고 정치 세력이 되었다. 교회나 수도원은 귀족들의 생존 투쟁의 수단으로 전락

 

   c. 바이킹의 약탈
http://campus.northpark.edu/history/WebChron/WestEurope/VikingRaids.html 

 

   1) 790-840년: 시절을 따라서 연계성없이 영국과 프랑스의 소규모 해안 강변 기습(3척),  Noirmountier 수도원은 상습적으로 약탈당하였다.
   2) 841-875년: 대규모의 약탈(350척), 지중해 연안 공격, 육지에 기지를 둠(Aquitaine)
   3) 876-911년: 영국과 프랑스의 해협을 대규모로 약탈하며 식민지화 하고, 상주하기 시작(Ireland, Iceland, and areas in Russia around Novgorod and Kiev), 영국은 군대를 재조직하며 바이킹을 격퇴하나 서프랑크의 왕 Charles는 911년 Normandy를 바이킹에게 준다. 바이킹의 지도자인 Rollo는 충성을 맹세하고 세례받고 다른 바이킹의 공격을 막는 역할을 한다.

 

2. 슬라브족의 이동

 

3. 십자군전쟁 http://www.fordham.edu/halsall/sbook1k.html 

 

   732년 프와티에 전투에서 이슬람의 서유럽진출이 저지되면서 서방기독교권에서는 이슬람에 대한 직접적인 접촉이 별로 없었다. 이슬람의 지배하의 스페인은 고립되었다. 그리고 1100년 이전 서유럽에서는 이슬람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고 지식도 거의 전무했다. 그러나 10세기 말부터 서유럽에서는 아랍에게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려는 시도가 남부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일부 지역, 시칠리아섬에서 일어났고 수복한 지역의 무슬림을 개종시킬 수 있었다. 십자군 전쟁의 기본적 동기는 무슬림을 선교하려는 것보다 이슬람 치하의 교회와 기독교인을 해방시키기 위함이다. 그러나 전쟁의 과정에서 개종자도 나타나면서 12세기 중엽에는 개종이 십자군의 목적이 된다. 이러한 와중에 무슬림에 대한 강제 개종도 자주 나타난다. 십자군 전쟁으로 이슬람을 알게 된 서유럽은 12세기에 이슬람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도 시작하고 1143년에 코란경이 라틴어로 번역되고 무함마드의 생애와 이슬람 교리, 기독교 변증을 모은 이슬람 전집이 클루니 수도원자인 페테루스(1092-1156)에 의해 출판되었다. 그리고 12세기부터 아랍학자들을 통해 들어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중세신학을 정립하는데 큰 기여를 한다. 13세기에 몽골이 등장하면서 서방 기독교 세계는 몽골을 복음화하고 몽골과 연합하여 이슬람 세력을 함께 공격할 것을 기대했지만 실패한다. 십자군 전쟁은 동로마의 황폐를 불러오고 결국 1453년 동로마는 멸망한다.

B. 이슬람권

 

1. 서아시아

 

압바시드 왕조(750-1258)와 분열된 지역 왕조들
http://www.ucalgary.ca/applied_history/tutor/islam/fractured/

Buyid or Buwayhid조(945-1055): 페르시안 르네상스

 

사산조 페르시아가 아랍에게 멸망했으나 페르시아인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를 계속 유지했으나 종교는 조로아스터교에서 이슬람으로 돌아섰다. 이들은 쉬아파를 따랐다. 세금을 바그다드로 보내지만 동쪽에서 들어오는 터키족과 대면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불안을 인식한다. 그래서 샤머니즘을 믿는 터키족을 자신들의 도시로 데리고와서 우월한 문명과 부에 감명받게하며 이슬람화를 시켜나갔고 정치적 기회를 본다. 945년 카스피해 남서해안의 산악군인의 쉬아파 지도자(Ahmad ibn Buwayh)는 사산왕조의 마지막 황제의 직계임과 쉬아파 무슬림으로 자신의 종교적 권위를 주장하며 바그다드를 침범하여 순니파 아랍의 칼리파를 왕위에서 몰아내었다. 비록 왕권은 자신이 가졌지만(자신을 amir로 지칭) 종교적 지도자로는 순니파 압바스조를 칼리파를 놓아두었다.

 

1100년 http://ccat.sas.upenn.edu/~bvon/images/bmap4.jpeg

셀주크 왕조 1055-1194 : 751년 탈라스 전투 이후 트란스옥시아나에 대한 아랍지배의 확림은 한세기가 끝난 뒤 이란계 사람들에게 유리한 결과를 가져다 주었고, 발흐 근처의 사만에서 기원한 가문을 지배층으로 한 순수한 이란계 사만조는 875년부터 999년까지 Bokhara 를 수도로 Transoxiana의 패자로 군림하다가 992년에 봉건적인 혼란상을 계기로 붕괴되어 동부이란과 트란스옥시아나의 이란인들의 영역은 카쉬가리아의 카라한조들과 아프카니스탄의 가즈나조 술탄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10세기 즈음에 Karakhanid 터키족이 페르시아 문학의 중심지며 학문과 종교가 잘 정비된 Bokhara 와 Transoxiana 로 들어간다. 이들은 999년에 이곳을 다스리던 사만조에게서 권력과 부를 빼앗았으나 그들의 종교인 이슬람을 받아들인다. 당시의 터키족에게 선교한 이슬람 선교는 비단길을 통해 무역하며 규칙적인 공중기도로 자신들이 신앙을 실제적으로 증거하는 무역업자들과 발크에 있는 옥수스강 건너에 하나의 중심부를 두고 있던 Sufis들이었다. 

 

   수피즘(가장 경건한 무슬림 신비주의자, 아랍어로는 수피야, 혹은 타솻우프.  신도들은 수피유, 혹은 무타솻위프, 어원은 수행자들이 양털, 즉  suf로 짠 거친 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다닌데서 유래)은 7세기말, 8세기 초 당시 우마위야조 사회에서 성행한 사치풍조에 대한 반동으로 출현하여 8세기 중엽에 이르러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 및 인도사상의 영향을 받아 점차 하나의 신비주의적 파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11세기에 al-Ansari가 신비주의를 이슬람교의 정통교리에 접목시킨 후 13세기 Ibn al-Arabi가 범신론적 사상체계로 집대성했다.는 이 당시에 조직되면서 선교를 강조하고 있었다. 12세기부터 미-Qadri, al-Rifai, al-Shadhri 등  개인을 중심으로 한 교단이 형성되어 각자 특유의 교단명이나 상설기구와 조직을 갖추고 광범위한 이슬람세계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수피즘은 통일된 교단이나 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수피즘은 무아의 경지에 이르러 알라와의 융합체험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부단한 꾸란경 송독과 예배, 기도, 염송, 속세의 고행과 금욕을 통하여 6가지 단계를 거친다( 참회와 회심-율법준수-은둔과 독서-청빈과 금욕-마음과의 싸움-알라에 대한 절대적 믿음). 자위야(Zawiyah)는 수피들이 은거하여 수행하는 장소이며 학자들의 연찬장이며 자선장이다. 일명 작은 사원이다.  14세기에는 이러한 자위야가 이슬람 세계 도처에 성행하여서 여행자들이 숙소가 되기도 하나 주된 기능은 거대한 포교망을 형성하여 이슬람 선교의 교두보역할을 하는 것이다. 

 

   최초의 이슬람 터키왕조라 부르는 카라카니드조는 보카라에서 카스카르와 사막으로 연결되는 비단길의 요충지를 999-1074년 까지 지배했다. 그런데 이 터키족을 따라온 셀주크족(Turkomans, or  Ghuzz)은 카라카니드 터키족을 돕기위해 왔다가 아프카니스탄의 가즈니 터키족이 인도를 침범하는 것을 돕기위해 남쪽으로 이주한다. 그러나 자신들의 위치에 불만을 품고 반역하여 극 동부 페르시아에 있는 호라산에 자신들의 제국을 시작한다. 그리고 1055년 서쪽으로 밀고 들어가며 바그다드의 부와이드조를 멸망시키고 순니파 칼리파를 해방시킨다. 이들은 순니파로서 중동의 새로운 무슬림 군주가 되었다(정복자 Toghril Beg). 칼리프는 투르크 왕에게 술탄(권위라는 뜻의 세속군주) 칭호를 내려서 자신의 후견인으로 삼는다.  이 투르크인들은 자신의 제국은 아랍인들의 제국 위에 덮어 씌워 그것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강화시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도 한다. 그 다음 30년간 셀주크 터키족은 서쪽으로 진군하며 정복해간다. 1070년 예루살렘 점령하고 , 1071 아르메니아와 소아시아점령, 1095년 예루살렘 회복을 위한 교황 우르반 2세기 십자군 선포, 1099년 십자군의 예루살렘 회복, 1187년 셀주크의 예루살렘 재점령. 이렇게 범 이슬람권의 술탄이 된 셀죽은 그들의 전례에 충동되어 동일한 모험을 하려는 중앙아시아의 각종 투르크-몽골인들의 길을 막으려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결국 1194년 토그릴 3세가 호레즘 투르크 인들의 공격에 굴복하여 페르시아에 대한 셀주크의 지배는 끝이 난다. 이후 셀주크와 적대 관계에 있던 키라키타이와 호레즘은 세력을 확장하다 몽골에 침략을 당한다

압바스왕조의 쇠퇴요인: 이슬람 자체의 종족 당파성과 국가적 적대감과 일시적인 권력을 승계하기위한 피를 부르는 전쟁, 그리고 이슬람 율법과 신학에 있어서 영적 권위의 중심체가 되기위한 해결되지 않는 논쟁등.

 

a. 종교적 요인:

 

이슬람 내란은 두 라이벌 정통인 순니파와 쉬아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들의 신학적 분란은 9세기와 10세기의 아랍통일을 파괴했다.

 

b. 정치적 요인:

 

정교일치로 종교적인 분란은 정치적인 분란을 가져왔다. 세 개의 적대세력; 우마위야조의 스페인(순니파), 파티미아조의 이집트(쉬아파), 압바스 아시아(순니파와 쉬아파의 동맹이나 다수의 순니파와 소수의 페르시아 쉬아파와의 불안한 혼합)

 

c. 인종적 요인:

 

3가지 중첩되는 시기를 통해 주도적 인종이 변했다. 초기 아랍족의 통치(9세기 중반까지), 중기 페르시안 르네상스(850-1000), 말기 터키족의 번영(1000-1300)

2. 서부중앙아

 

가즈니 왕조(Ghazni ;962∼1186) : http://ccat.sas.upenn.edu/~rs143/meast.jpg

 

아프가니스탄의 가즈니에서 일어난 투르크 계통의 이슬람 왕조. 이란 계통의 사만 왕조의 노예 출신으로 호라산 태수가 된 알프티긴이 배반의 혐의를 받자 부하를 이끌고 도주하여 카불 남쪽의 가즈니에 창건하였다. 10세기 후반 제 5대인 수북티긴은 왕조의 기초를 확립하고 호라산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의 아들 마하무드는 이 왕조 최대의 영주로서 사만 왕조로부터 독립하여 전 아프가니스탄 지역을 제패하고, 이후 1024년에 이르기까지 수십 회에 걸쳐 인도에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였다. 또한 마흐무드는 서쪽으로도 영토를 확장하여 동은 펀잡의 라호르, 북은 사마르칸드, 서는 이스파한에 이르는 이 왕조 최대의 영토를 이룩하였다. 한편, 마흐무드는 군사적 제패와 동시에 페르시아 문예를 보호 장려하여 이슬람 세력의 인도 진출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궁정에는 문인ㆍ학자가 운집하여 시인 피르다우시는 ‘샤나메’를 저술하고, 비루니는 '인도사'를 기술하였다. 그러나 마흐무드의 사후, 그 전제 정치의 모순이 드러나 셀주크 족에게 서쪽 영토를 침탈당하고, 다시 1186년에는 애프간 계의 구르 왕조에 의해 수도를 공략 받아 그 후 멸망하였다.

3. 인도 :

 

인도에 최초로 이슬람교도가 들어온 것은 8세기초인데, 조직적인 인도 정복이 시작된 것은 아프가니스탄에 가즈니, 고르 왕조가 등장하고부터였다. 10세기말에는 가즈니 왕조가, 12세기 후반에는 고르 왕조가 인도 침입을 되풀이 하여 분립, 할거하는 힌두 제 왕국을 격파하고 점점 인도 지배의 발판을 굳혔다. 고르 왕조는 아프가니스탄의 고르에 있던 터키계의 이슬람 왕조로 가즈니 왕조의 예속에서 벗어나 서북 인도 영토의 지배자가 되었다. 13세기초에는 고르 왕조가 분열됨에 그 왕조의 부장이었던 아이바크(Aibark)가 독립하여 델리를 수도로 새로운 이슬람 왕조를 건국하였는데 아이바크가 투르크 인으로 노예 출신이기 때문에 노예 왕조라고 한다. 그 후 약 300년간 델리에 힐지 왕조, 투그루크 왕조, 사이드 왕조, 로디 왕조 등 5개의 이슬람 왕조가 흥망하였으며, 14세기초에는 최남단을 제외한 인도의 대부분이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

4. 우마야드 스페인:

 

1301년까지 코르도바에서 남부 스페인을 통치

 

5. 파티미드 이집트:

 

10세기 초 자신이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 쪽으로 7대 이맘의 세습자임을 주장하는 한명의 쉬아파가 있었다. 그는 현 튀니지에서 통치권을 강탈하여 그곳에서부터 모로코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영토를 장악한다. 이 왕조는 이맘과 칼리파로서 정교를 장악하였다. 969년 이들은 다마스커스를 탈환하고 바그다드를 위협하였고 1000년경에는 북아프리카의 대서양 해안지방에서부터 예루살렘과 레바논 북부 베이루트까지 이르는 지중해를 통치했다.

C. 중앙아시아

 

http://www.grifterrec.com/coins/maps/m_casia_districts.html
http://www.grifterrec.com/coins/maps/m_casia_cities.html

 

1. 위구르(Uighur, 回紇) :

 

위구르라는 이름은 A.D. 8세기에 몽골리아에서 흑해까지 돌궐제국이 확장될 때 튀르크계 유목민족 명으로 나타나는데, 그 "연맹, 군집"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북위시대(A.D. 384-534)에는 고차(高車), 수나라(581-618) 때는 위홀(韋系乞), 당나라(618-907)때는 회골(回 ), 송나라(960-1279)와 원나라(1260-1368) 시대에는 외오아(畏吾兒) 등으로 불렸다.

 

위구르족은 흉노족의 먼 후예이고 직접적인 조상은 퇼뢰스 부족 연맹에 속하던 DFLEO 부족이었다. 퇼뢰스는 중국의 조정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돌궐과는 계속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퇼뢰스 부족연맹이 7세기 초에 와해됨으로써 위구르족은 지금의 외몽골 지역에 독자적인 왕국을 건설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중국의 조정(당나라)은 이미 629년에 위구르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위구르는 당시 돌궐제국 내부에 계속되던 분란을 조심스럽게 이용하며, 641년 경에는 이미 동부 스텝지대의 상당한 부분을 지배할 수 있었다. 이즈음 위구르는 소위 구성(九姓: 9개의 씨족으로 이루어진 연맹)이라고 알려진 토쿠즈-오구즈(Toqus-Oghuz) 연맹을 새로이 건설하여 종주가 되었다. 비록 8세기 초에 위구르족과 전체 토쿠즈-오구즈 연맹은 다시 돌궐의 지배하에 들게 되었지만 소멸되거나 와해되지 않고 중국과 우호 관계를 가지면서 실크로드를 장악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였다.

 

위구르족은 545년부터 745년까지 약 2세기 동안 유라시아 대륙의 스텝지대를 통일했던 돌궐제국의 빌게카간이 사망한 후 혼란기에 바스밀, 카를룩의 두 돌궐부족과 연맹을 결성하여 돌궐제국을 분쇄시킨 후, 몽골리아 외트켄(오르혼강 유역)을 중심으로 오르혼(Orkhon) 위구르 국가(744-840)를 건설하였다. 곧이어 위구르 부족은 동맹부족이자 경쟁 세력이었던 돌궐계 카를룩 부족을 서부 스텝 지대로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국가는 위구르 부족이 9개의 부족 연맹(토쿠즈-오구즈 연맹)을 통합하여 건설한 것이기 때문에 온위구르(On Uhgur, 10 Uygur)라고 불리웠다. 친 중국계 위구르 부족의 집권으로 당시 상징적이나마 존재해 있던 투르크 부족들 간의 통일 형태는 완전히 와해되었다. 그 후 민족의식과 전통이 강한 대부분의 돌궐계 부족 연합체들은 각각 집단을 구성하여 서부 스텝과 러시아의 스텝 지대로 진출하였고, 위구르만이 중앙아시아의 중심 지역에 남아 거의 1세기 동안 중남부 스텝지대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750년 당나라와 아랍 압바스 이슬람 왕조 사이에서 발발한 전쟁(탈라스 국제전)에서 당나라 편에서 싸웠던 위구르는 전쟁에서 아랍군이 승리한 이후 파미르 고원 서쪽에 대한 영향력을 크게 상실하였다.  

 

골력배라(骨力裵羅) 통치 시대에 위구르국은 그 세력을 크게 팽창해 나갔으며 이리하여 골력배라는 쿠틀룩 빌게 퀼 카간이라는 황제 칭호를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통치시기에 진정한 오르혼 위구르 "제국"이 되었던 것이다. 골력배라 통치 이후부터 위구르는 중국의 황제들이 사용한 왕호를 사용하면서 중국과 대등한 제국으로 행세하였으며 755년 중국(당나라)의 안사의 난 때에는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중국 수도까지 4000명의 기병을 파병하고 반군을 무찌르고 수도 장안과 낙양을 탈환시켜주었다. 이들이 중국에 머물 때 그곳에 있던 마니교도 소그드인들과 접촉하게 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지배층이 마니교도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후 위구르제국은 중국 내정에 간섭할 정도까지 국력이 팽창하였다. 위구르는 당을 업신여겨 공물과 공주를 바치게 하였다. 그 뒤 약 100년 동안 위구르와 당의 내왕은 빈번하여 위구르는 말을 보태고 당은 비단·옷감, 기타의 생필품을 보냈다. 호시(互市)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위구르에게 유리하였던 모양인데, 이렇게 위구르를 교사한 자는 지금의 사마르칸드 방면에 있던 교활한 소그드인(Sogdians)이었다 한다. 어떻든 위구르인이 소그드인과 교섭을 갖고 있는 동안에, 소그드인 사이에 유행되고 있던 마니교를 일반적인 위그구르인들이 받아들이며 762년에 국교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마니교는 위구르 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유목민족 최초로 집단적으로 정착민의 종교를 갖게 되면서 위구르인들의 정착화는 가속되었다. 특히 위구르의 카간인 뵈괴의 적극적인 보호하래 마니교도는 크게 융성했다. 그리고 소그드인들의 수가 위구르제국에 급격하게 증가했고 내정과 외교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779년 뵈게가 쿠데타로 제거되고 알프 쿠틀루쿠 빌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소그드인 2천명을 학살하고 마니교를 탄압한다.

 

유목민인 위구르가 외래종교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종교적인 이유보다 이 종교가 가진 경제적 문화적 기여 때문이었다. 소그드인들은 당시 내륙교육을 장악하던 국제 상인들이었고 유목민에데 문자를 가르쳐주고 정주문화의 이점을 전달해주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위구르인들은 선대의 고지(故地)인 산악지대로부터 정착을 위해 스텝의 평야지대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으로서는 최초로 성곽도시를 건설하였다. 위구르 문명의 발전 과정에서 마니교는 위구르족의 정착화와 도시화를 이루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자도 제공하였다. 그리하여 위구르인들은 스텝 민족 사상 최초로 문학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위구르인들은 정착화 과정을 거치면서 스텝 민족의 특성을 상실하게 되었고 결국 군사력도 약해지게 되었다. 이것은 마니교 이외에도 그들이 부분적으로 받아들인 불교와 같은 정착민 종교들이 육식을 금하게 하고 사랑과 평화를 강조하는 등 위구르인들의 세계관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위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약화된 위구르는 840년, 알타이 산맥 북부 스텝에 할거하던 전통적 유목민족이었던 10만명의 키르기즈족에 의해 멸망당했다. 패망한 위구르족은 유목민족으로 되돌아가지 않았고 키르기즈에 흡수되지도 않았다. 위구르족의 오르혼 제국은 여러 개의 다양한 씨족 연맹으로 분열되어 각각 상이한 방향으로 분산되었다. 일부는 중국으로 도피하여 감주지방의 최서부 지역에 정착하여 甘州國과 沙州國을 세우고 1028년 서하에 의해 병합될 때까지 독립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중심세력은 천산산맥 북쪽기슭의 비시발리크 및 남쪽 기슭의 高昌(현재 투르판시 부근)을 거점으로 삼아 Kocho (瓜州國, Gaochang, ca. 860-1284)왕국을 건설하여 동투르키스탄을 지배하였으나 거란족의 카라키타이(Kara Kitay, 흑거란, 西遼)에 예속되었고, 칭기즈칸이 일어나자 1209년 그 밑에 복속되었다가 몽골제국이 분할되었을 때 차카타이 칸국에 구획되어 독립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지금의 감숙성과 신강성(동투르키스탄)지역으로 분산되어 내려온 위구르인들 중에서 지금의 신강성 동부로 내려온 사람들은 그 곳에 정착하여 농업인구로 변화되면서 오아시스 도시를 이루어 '칸'이 다스리는 소왕국들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몽골족이 돌궐제국 붕괴 이후 800년부터 1200년까지 소왕국들이 난립하던 과도기를 청산하고 새로운 제국인 몽골제국을 세우면서 위구르인의 소왕국들은 몽골제국으로 흡수되었다. 오르혼 위구르 제국은 돌궐제국 붕괴 이후, 몽골제국이 등장하기까지의 과도기(800-1200)에 등장한 여러 제국들 중 하나로서, 정착문화와 유목문화의 혼합적 성격을 띤, 스텝지역의 이례적인 문명이었다.

 

한편 감주국의 세력이 점점 서쪽으로 확장되면서 먼저 위구르족으로서 최초로 이슬람화된 카라한 왕조와 접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10세기경부터 위구르인들은 이슬람교를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남강 타림분지의 남북 가장자리는 모두 불교가 성행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슬람교가 이 지역에서 전파되고 발전하는데 시종 불교세력과의 마찰과 투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聖戰(자하드)정신으로 불교와의 전투에서 우세를 점하기 시작했고, 11세기 초(1006년)에는 불교를 국교로 하던 우전국(현재 호탄)의 이씨왕조를 멸망시킴으로써 남강에서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15세기까지 이슬람교는 꾸준히 동진하여 신강지역의 위구르족 전체를 무슬림으로 만들었다

 

이 위구르의 서역 점령은 동양 역사상 두 개의 의의를 갖고 있다. 하나는 이란계 민족의 거주지였던 서역이 투르크계 민족의 거주지로 되어, 이 지방을 오늘날 터키라 일컫는 원인을 만들었고, 다른 하나는 유목 생활을 하던 투르크인이 농경 생활을 하게 된 일이다. 유목에서 정착 생활로 옮아간 위구르는 닥치는 대로 주위의 고도의 문명을 흡수하였다. 중국식의 달력을 만들고 중국식의 돈을 만들어 중국 문명을 받아들이는가 하면, 마니교 이외에 불교를 숭상하고, 페르시아·티벳의 불전을 위구르 문자로 번역하여 인도·티벳·페르시아의 문화를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10세기경에는 이슬람교가 위구르인 사이에 널리 퍼져 오늘날 중국인이 이슬람교를 회교라 일컫는 원인을 만들었다.

 

http://depts.washington.edu/uwch/silkroad/exhibit/uighurs/uighurs.html
http://fieldinfo.hosanna.net/center/jaryo/uygur/%EC%A0%95%EC%B9%98%EA%B2%BD%EC%A0%9C.htm

2. 타타르인: 위구르 제국 붕괴후

 

D. 중국

 

http://depts.washington.edu/uwch/silkroad/exhibit/khitans/khitans.html
http://depts.washington.edu/uwch/silkroad/exhibit/song/song.html 

 

   1. 당말기의 황소의 난(875-884)

   2. 5대 10국시대(907-979)

 

주전충에 의해 당이 멸망하고 중국은 5대10국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후량(後梁)ㆍ후당(後唐)ㆍ후진(後晉)ㆍ후한(後漢)ㆍ후주(後周) 등 5왕조와 전촉(前蜀)ㆍ후촉(後蜀)ㆍ오(吳)ㆍ남당(南唐)ㆍ오월(吳越)ㆍ형남(荊南)ㆍ민ㆍ초(楚)ㆍ기(岐)ㆍ연(燕)ㆍ남한(南漢)ㆍ북한(北漢) 등 10여 개국이 난립하고 있었다. 이를 5대10국이라 한다. 5대 10국 이후에는 귀족 불교가 몰락하였다고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불교가 민중과 가장 긴밀하게 밀착되었던 시기라고도 볼 수 있다

   3. 거란(Kitai)의 요나라(907-1125)

 

a.  4세기 이래, 요하의 상류 시라무렌 강 유역을 본거지로 하고 있었던 반목 반농의 동호족(東胡族)으로 서 처음에는 위구르에 속하였으나 위구르가 쇠약해진 틈을 타고 일어나, 당말에 질라부(迭喇部)로부터 옐뤼아 바오지가 등장하여 907년에 거란족을 통일하고 제위에 올랐다. 그는 내, 외몽고를 합치고 발해를 멸하였으며(926), 한인을 초치하여 중국 문화를 받아들였다.

 

b. 태종은 국호를 요(遼)로 고치고 (937) 남변 농업 지대의 침략을 개시하여 5대의 하나인 후진(後晉)의 건국을 도와 그 보상으로 지금의 북경, 대동을 중심으로 하는 연운 16주를 얻어 중국 영토의 일부를 지배하였다(燕雲 十六州  936년 석 경당이 거란의 원조를 얻어서, 후당을 멸망시키고 후진(後晋)을 세운 대가로 거란에게 할양 하여, 이후 분쟁의 불씨가 된 땅. 지금의 베이징(北京, 燕), 다퉁(大同, 雲)을 중심으로 해서 장성의 남쪽 에 해당하는 탁·계·단·순·영·막·울·삭·웅·신·규·유·무·환의 16주를 말한다. 후에 후주의 세종이 영·막의 2주를 회복하였으나, 송대에 역주를 잃었기 때문에 15주가 되었다. 한편 장성 이남이기는 하지만, 일찍부터 거란 령에 속했던 평·난·영의 3주는 이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 c. 전성기인 성종때 대군을 이끌고 남침하여 전연의 맹을 맺어 송으로 하여금 해마다 막대한 양의 은과 비단을 바치게 하였다. 이 결과 송의 상품이 대량으로 유입되어 요의 귀족의 생활을 풍족하게 하였으나 그 반면에 사치에 물들어 북방 민족 고유의 강건하고 검소한 기풍을 잃었다. 성종은 그 뒤 송과 통한 여진과 고려를 쳐서 그 영토가 만주에서 신쟝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거란(kitai), 곧 cathay는 멀리 서방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성종때를 고비로 그 이후 차츰 쇠퇴하여 송, 금 양국의 협공을 받아 망했다(1125). d. 그 뒤 일족인 옐뤼 따시(야율대석(耶律大石))가 중앙 아시아에 들어가 셀주크의 복속국인 위구르계의 카라한조(940-1132)를 1132/1141년 카타완 평원의 전투에서 멸하고(실제적으로 이슬람맹주였던 셀주크왕조의 산자르와 싸움)  Karakitai, 곧 서요(1132∼1211)를 세워 약 80년 동안 나라를 유지하였다.

 

e. 거란은 민족 의식이 강하여 중국의 문화에 대항할 만한 새로운 문화의 창조에 노력하였다. 그 현저한 예가 문자의 발명이다. 요의 거란 문자는 태조때 만들어진 것으로, 돌궐 문자를 한자 모양으로 조합하여 만든 것이라 한다. 대자·소자의 두 종류가 있어서 공문서 등에 쓰였으며 후에 서하 문자나 여진 문자의 제작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와 같이 요는 중국의 문화에 대항하는 태도를 취하였지만 그 우수한 문화에는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중국의 유교문화는 중국인 통치의 편법으로서 국가통치의 고등기술로서 받아들인 데 불과하였으나, 불교는 샤아머니즘의 원시적 종교밖에 모르던 거란인에게 큰 흥미를 돋구어 주었던 모양으로 크게 유행하였다. 특히, 성종·흥종·도종은 불교를 애호하여 사찰을 건립하고 법회를 열고 대장경을 간행하여, 이 때문에 재정에 큰 영향을 끼쳐 요 쇠망의 유력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요의 대장경은 송의 대장경과 더불어 고려에 전해져 고려 대장경의 기초가 되었다

   4. 여진의 금(女眞 Jurchens 1115-1234): 

 

  a. 10세기 전반에 발해국이 망한 뒤, 그 땅에 퉁구스계의 여진족이 나타났다. 요는 처음 송화강의 서남방에 살고 있던 여진족을 숙여진(肅女眞)이라 하여 요의 적에 넣어 직접 통치하고, 송화강 동쪽에 살고 있던 여진을 생여진(生女眞)이라 하여 송화강 근처에 관청을 두어 지배하였다. 이들 생여진은 동북 만주의 각지에 할거하여 아무런 통일도 없이 반농, 반수렵의 생활에 종사하였다. 

 

  b. 11세기 말에 하르빈 부근에 있던 완옌부의 추장 아구타가 생여진 제 부족을 통일하고 요에서 독립하여 나라를 세워 금(1115∼1234)이라 하였다. 이가 곧 금의 태조이다. 태조는 송과 연합하여 요를 공격, 이어 태종때 요는 멸망하였다. 금과 송이 직접 국경을 접하게 되면서 연운 16주룰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나 금군이 대거 남하하여 1127년 수도 변경( 京:지금의 開封)을 함락시키고 송의 휘종, 흠종의 부자 2제를 비롯한 황족과 신하 3천여 명을 포로로 하고 화북의 여러 지방을 손에 넣었다. 여진인이 중국의 내지에 깊숙이 들어가 한인과 동거함에 따라 차츰 중국 문화에 동화되기 시작하였다. 금은 국초이래 여진인의 한화를 경계하여, 한자와 거란 문자를 참고하여 여진 문자를 만들었으나 복잡하여 도리어 한자가 많이 사용되고, 한문학이 유행하여 유학·시문에 능한 자가 많이 나타나고, 공식의 의례는 물론 일상의 생활까지도 중국식을 따랐다. 게다가 화북에 배치된 맹안·모극부의 여진인들은 농사일은 오로지 고용된 중국 농민에게 맡기고 자기네는 유락에만 열중하였다. 그리하여 차츰 중국인의 경제적 압박을 받아 토지를 잃게 되고 그 결과 군의 규율이 허물어지고 무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c. 세종(1161∼1189)은 토지를 정리하여 맹안·모극의 우대법을 강구하는 동시에, 여진인의 관리 지망자에게 여진어와 여진 문자를 배우게 하고, 학교를 세워 자제를 양성하는 등 중국 문화의 침투를 방지하는 데 힘썼으나, 여진인 한화의 대세는 막을 길이 없었다. 이리하여 한문학이 더욱 유행하였으며 송의 교자를 모방한 교초(지폐)가 발행되고 불교가 유행하여 각처에 절이 생기고 대장경이 간행되었다. 도교의 전진교가 유행하여 천사도의 계통을 받은 강남의 정일교와 더불어 도교의 2대 종교를 형성하였다. 

 

  d. 금은 남송과 대립 항쟁하다가 북방에서 일어난 몽고에게 망하였다.(1234) 이후 여진인은 몽고족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14세기 후반에 명이 흥하여 만주를 경략하자, 명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명말에 이르러 건주 여직에서 누르하치가 나와 여진인을 통합하여 후금(後金)을 세우고 후금국한(後金國汗:황제)이 되어 연호를 건원(建元)이라 하였다.(1616). 그 후 태종은 1636년 국호를 청(淸)이라 고치고, 여진인이라 하지 않고 만주인이라 일컬었다
  
   4. 서하(黨項, 西夏, xi xia: 1038-1227)

 

a. 송의 서북방 감숙·섬서방면에 있던 티벳 계의탕구트(Tangut, 黨項)는 당말 황소의 난 때 공을 세워 당으로부터 절도사로 임명되고 이어서 송에 복속하였으나 요가 일어나자 요에 복속하여 하왕의 책봉을 받았다. 송·요가 대립 항쟁하는 틈을 타 차츰 세력을 뻗쳐 11세기 중엽 이원호(1032∼1048)가 독립하여 황제를 칭하고 대하(大夏)라는 나라를 세워 요령성 흥경에 도읍하였는데 송은 이를 서하라고 불렀다.

 

b. 서하의 주요 산업은 목축이었으나, 하서 오르도스 지역에서는 관개 농경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비단길의 요지를 차지하고 있어서, 중개 무역의 이익이 많았다. 이 원호는 그는 숙적 위구르와 토번을 친 뒤 송의 변경을 침공하여 1044년에 화약을 맺어, 서하는 송에게 신하의 예를 행하며, 송은 매년 서하에게 비단 153,000필, 은 72,000량, 차 30,000근을 제공하며, 국경에 각장( 場; 관영 무역장) 2개소를 설치하고 호시 (互市)를 행할 것 등을 정하였다. 원호의 말년이래 서하·요 관계는 악화, 다음의 이 양조 때에 요에 굴복했고, 요와 금이 항쟁할 때 서하는 처음에 요와 동맹을 맺었으나, 1124년부터는 금의 번신이 되어 송을 공격하여 오로도스 동부의 땅을 얻고, 1137년에는 적석주(積石州)등 3주를 합쳐서 서하 최대의 판도를 이루었다.

 

c. 송의 남천으로 송·서하의 항쟁은 끝나고 이 인효의 시대에는 내정에 힘을 쓸 수가 있어 경제·문화상의 발전이 눈부시어, 유교·불교 등을 기조로 한 서하 문화가 번성하여 명승 석학도 적지 않게 출현하였다. 이 순우의 말년부터 몽골의 침입을 받았으나, 금과 형제의 관계를 맺고 이에 대항하였으나 서하 최후의 왕 현(睍)이 살해됨으로써 서하는 이원호 이래 10왕 190여년으로 멸망하였다. 서하의 문화는 그 지리적 위치에 따라 중국 문화와 티벳·위구르를 경유하여 들어온 서방 문화의 혼합이었는데, 특히 중국 문화의 수입에 힘써 관직·제도를 중국식으로 하고 한자를 기초로 서하 문자를 만들어 썼다. 이 나라에는 유교·불교·도교 등이 성행하였다.

   5. 북송(960-1126)

 

   6. 남송(1127-1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