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 24. 21:50ㆍ운영자자료/1.운영자 자료실 1
정병준 교수 (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Ⅰ. 1950년대 미국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WCC 반대이론
Ⅱ. 한국교회 안에 WCC 용공론의 전파
Ⅲ. WCC 단일교회론의 허구성
Ⅳ. WCC 선교 유예론에 대한 오해와 무지
Ⅴ. WCC에는 사회구원론만 있는 것이 아니다.
Ⅵ. WCC ‘게릴라 지원설’ 사실인가?
Ⅶ. WCC의 ‘종교혼합주의’와 ‘다원주의’ 논쟁
Ⅷ. WCC는 교회를 분열시켰는가?
세계교회협의회 중앙위원회(2009.8.31)가 2013년에 10차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를 한국의 부산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한 이후, 한국교회 안에서는 WCC 찬반 논쟁이 재현되었다.
WCC중앙위원회 (2009. 8.31)
WCC 총회를 유치한 측에서는 WCC 한국총회는 아시아에 주어진 기회이며, 세계교회를 한국으로 초대하는 것인 만큼 한국교회가 가능한 넓게 연합하여 이 총회를 잘 치루기를 바라고 있다. 특히 한국교회 안에서 에큐메니칼 교단, 복음주의 교회, 오순절 교회가 함께 연합하여 한국교회의 영성, 헌신, 성장, 선교의 역량, 한국교회가 타종교들과 평화적으로 공존해온 경험,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공헌들을 모아 세계 교회와 공유할 기회로 삼자고 호소한다. 또한 그들은 이 총회를 통해 한국교회가 세계 교회를 이해하고 WCC와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오해들을 불식시키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WCC총회 유치감사예배 (2009. 9.13)
WCC에 반대하는 신학정체성을 가진 개신교인들은 WCC 총회가 단순한 이웃집 잔치가 아니라 신학적으로 위험하다고 생각하며 WCC 가입교단들이 한국교회 전체를 대표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에 불쾌감을 표시하며 WCC 총회를 반대한다.
세계적으로 에큐메니칼 지도자들과 에반젤리칼 지도자들은 강조점의 차이는 있지만 교회의 선교가 영혼구원와 사회참여를 포괄하는 “통전적 선교”(wholistic mission)라는 점을 수용한다. 또한 그들은 ‘세계기독교포럼’(Global Christian Forum)이라는 대화의 광장에서 서로 만나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 안에서는 양자 사이에 날카로운 각이 서 있다.
2010년 3월 3일 세계복음주의연맹(WEA) 디렉터 제프 터니 클리프(Rev. Dr. Geoff Tunicliffe)와
세계교회협의회(WCC) 사무총장 올라프 트베이트(Rev. Dr. Olav Fykse Tveit)가 만나
2013년 한국의 WCC총회와 2014년 WEA총회에 서로 협력하기로 하였다.
참고로 2009년 6월 한기총은 WEA에 가입을 하였으나 WCC총회를 반대하고 있다.
WCC를 비판하는 입장은 크게 세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WCC의 구조와 신학에 대한 충분한 연구 없이 한 교파신학을 기준으로 삼아 비판을 하는 경우이다. 이들 중 일부는 학문적으로 불성실하게 WCC 문헌을 오용하고 WCC와 관계없는 내용을 가지고 비판을 하기도 한다. 이들의 비판을 종합하면 WCC에 대해 단일교회론, 용공성, 사회구원론, 선교무용론, 정치 참여, 종교 다원주의, 인본주의적 성경관, 한국교회 분열의 책임을 언급한다. 어떤 경우에는 WCC 문제를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둘째, 학문적으로는 성실한 태도를 가지고 있지만 신학적 보수성과 이념적 보수성이 강해서 WCC에 대해 이념적인 부분과 신학적인 부분을 집중적으로 비판을 하는 경우이다.1
셋째, WCC의 문헌에 대해 개방성을 가지고 학문적으로 접근하고, WCC신학의 장점과 단점을 지적하는 경우이다. 대표적으로 양낙홍 교수의 “WCC에 대한 공정한 평가와 한국 교회의 대응방향”은 WCC에 대해 종교다원주의 입장이 있다는 것에만 비판을 가하고 다른 여러 가지 비난에 대해서는 근거가 약하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양낙홍 교수는 한국 복음주의 교회들이 WCC 안에 들어가서 개혁하자는 입장을 전개한다.
“WCC는 로잔위원회 보다 훨씬 조직적이고 상설적인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어 보인다. 그런 점에서 WCC는 설령 그것에 다소 교리적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가볍게 포기해서는 안될 가치가 있는 기독교 단체이다.” 2
“한국의 보수 복음주의 교회들이 정말 자신들의 신학과 강조점의 건전성을 확신하고 그것에 자신감과 애착을 가지고 있다면 WCC에 들어가서 리더십을 발휘함으로 WCC의 이탈을 바로 잡는 적극적 역할을 하는 것을 검토할 수는 없을까?”3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WCC가 무엇인지? 역사적으로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체 자신들의 지도자들을 따라 서로를 적대시 하는 방향으로 이끌려가고 있다. 또한 한국교회는 비난과 방어에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면서도 서로 신뢰하기 어려운 갈등을 지속하고 있다.
이 글은 WCC를 비난하는 여러 가지 주장들이 어떤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보고 비난의 타당성을 검토하려고 한다. 그 결과 WCC의 문제에 대해 정직하고 발전적인 대화를 할 수 있도록 기여하는 목적이 있다.
Ⅰ. 1950년대 미국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WCC 반대이론
미국의 극우 반공주의자이자 근본주의 신학자였던 칼 매킨타이어(Dr. Carl McIntyre, 1906~2002)는 1948년 WCC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창립된다는 소식을 듣고 그 보다 앞서 암스테르담에서 국제기독교협의회(ICCC: 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를 조직했다. 이 조직의 성격은 “근본주의자들의 국제협의회” (Fundamentalist International Council)4였고, WCC를 반대하고 파괴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칼 매킨타이어는 우익교회들과 단체들의 지원을 받아서 WCC 총회가 열리는 곳마다 ICCC 집회를 개최하여 그 반대 효과를 높인다는 전략을 세웠다. 그는 생전에 언론, 출판, 강연 외에 늘 소수의 무리들과 함께 WCC 총회 주변에서 피케팅 시위를 하였다.
칼 매킨타이어
1948년 WCC창립시 같은 장소 암스텔담에서 ICCC를 조직
매킨타이어 사회주의 국가의 교회지도자들의 미국 입국 반대시위
칼 매킨타이어는 한국교회에 두 가지 악영향을 끼쳤다. 첫째, 근본주의 신학을 확장시키고, 재정지원을 통해 장로교 분열, 침례교 분열, 성결교 분열에 개입했고, 교회 분리주의자들을 양산시켰다. 둘째는 냉전 상황에 있는 한국교회 안에 WCC에 대한 흑색선전을 하였다.
매킨타이어가 쓴「WCC와 ICCC의 차이」(What is the difference) 라는 팸플릿에는 그가 WCC와 ICCC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잘 드러난다.5
그것을 요약하여 도표화 하면 다음과 같다.
|
세계교회협의회란? |
국제기독교협의회란? |
설립 |
1948년 8월 네덜란드 |
1948년 8월 네덜란드 |
회원 |
현대주의자, 복음주의자, 유니테리언, 그리스정교회, 통제받는 공산주의자를 포함한 교회그룹을 회원으로 가지고 있다. |
신앙고백의 순수성과 온전성을 유지하는 단체들의 회원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철저하게 복음주의적이고 개신교인들이다. |
목 표 |
자신들을 에큐메니칼 운동이라 칭한다. 궁극적으로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포함해서 모든 교회를 포함하는 하나의 에큐메니칼 교회를 세우려고 한다. |
20세기 종교개혁운동이라고 칭한다. 현대주의자, 신정통주의자, 신복음주의자, 하나님의 말씀이 금하는 교제에 참여하는 자들의 모든 공격으로부터 역사적 기독교신앙을 수호하려 한다. |
신 조 |
간단한 신앙진술을 가지고 있으며 13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그것을 수정하려고 한다. 하나의 기독교 교리를 만장일치로 수용하지 않는다. |
성경무오, 삼위일체, 동정녀탄생,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무죄, 대속적 죽음, 인격적 가시적 재림으로 역사적 교리를 요약한다. 만장일치로 동의를 요구한다. |
공산주의 |
임원회와 중앙위원회 안에 공산주의 국가에서 온 공산당에 가입한 성직자와 비밀경찰이 통제하는 교회의 성직자인 정부요인들이 끼여 있다. 공산주의 교회를 회원으로 받아들인다. |
공산주의는 악마적이고 세계적인 음모를 가지고 있다고 보고 WCC 안에서 종교를 이용하려는 음모를 폭로한다. WCC에 가입하지 않는 교회가 회원이 될 수 있다. |
교회일치 |
교회일치의 대의를 촉진시키고, 요한복음 17장의 주님의 기도를 오해하여 하나의 유기적, 가시적 세계단일교회를 추구한다. |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나타내기를 원하시는 일치는 영적인 것이다. 그리고 언어와 문화 및 기타 섭리에 의해 주어진 차이를 가진 교회는 주님과 영광 중에 연합할 때까지는 마지막 승리와 완성을 기다려야 한다. |
하나님 나라 |
하나님 나라를 가시적이고, 세계사회주의를 적극 촉진하는 사회질서로 받아들인다. |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질서이며 오직 중생의 기적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 |
정치문제 |
국제관계위원회(CCIA)를 설치하고 정부와 국제기구에 압력을 행사하고 UN에 로비를 한다. |
정치적이라고 느껴지는 것을 자신의 일로 간주하지 않고 그러한 로비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덕적인 문제에 대해서 공식적 단체에 적절한 방법으로 접근한다. |
조직구성 |
그 자체로 하나의 교단의 기능을 수행하려 하고 회원 교회들에게 속한 활동을 수행한다. |
제한된 활동 영역에서 교회의 대리자로 활동하고 소속 교단의 활동에 간섭하지 않는다. |
매킨타이어의 극단적 이분법이 드러난 이 팸플릿을 논박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WCC를 비난할 때 사용했던 논리들, 단일교회론, 용공론, 사회구원론, 정치개입설, 로마 가톨릭 같은 초교회(Super Church) 추구론은 1950년대 한국전쟁과 그 직후에 근본주의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교회에 소개되었고, 교회 내부 정치집단을 통해 확산되었다는 점이다.
Ⅱ. 한국교회 안에 WCC 용공론의 전파
1951년 6월, 25명의 국회의원들은 WCC가 용공단체이고 회원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도 용공단체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목사이며 국회의장인 이규갑은 「기독교와 용공정책」이라는 팸플릿을 발간하여 정계와 교계에 배포했다. 이것이 한국교회 안에서 WCC를 용공으로 매도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기독교 각파와 각단체가 한국기독교연합회를 조직하여 용공정책을 주장하는 세계기독교연합회(WCC)와 동아시아대회에 가맹연결된 것과 공산정책을 예찬하는 또는 관장하고 있는 세계기독교연합회로부터 구제금품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동단체와 자매관계를 가진 국제선교회(IMC)의 원조 받는 일도 진중한 사고를 경요(敬要)하와 …6
이규갑은 WCC와 현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의 전신 동아시아대회(EACC)까지 용공으로 몰았고, 국제선교협의회(IMC)가 보내주는 원조품도 의심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한국기독교연합회(NCC, 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대변인7은 다음과 같이 응답했다.
요청서와 팜푸레트를 보면 미국 내에서 세계교회협의회와 국제선교연합회(IMC)와 대립하여 싸우고 있는 국제기독교협의회(ICCC)에 소속한 모파의 모략에 의한 선전인 것 같다. … 그나마도 미국 내의 어떤 잡지에 발표된 편파적인 문서를 재료라고 하여 가지고 미국 내의 극소수의 보수주의자를 제외한 전세계 백오십여 교파의 연합기구인 WCC(세계교회협의회)와 현재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 장, 감, 구세군, 성결교를 위시한 각 교파의 선교회의 세계적 연합체인 IMC(국제선교협회)를 일방적으로 용공정책을 주장하느니, 예찬하느니, 권장하느니 하여 용공단체로 규명하는 것은 경거망동이 아닐 수 없다.8
요약하면 이러한 행위의 배후에는 미국의 극우단체 ICCC와 관계된 국내 집단의 모략이 있고, 칼 매킨타이어가 발행하는 「크리스찬 비콘」(Christian Beacon)의 내용을 대단한 재료라고 소개하는 것이 경거망동이라는 것이다.
이 사건의 배후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그의 측근 교계인사들이 있었다. 피난지 부산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송상석 목사, 이규갑 목사, 국회의원 황성수를 그의 관저로 불러 한국기독교연합회와 연대하고 있던 세계교회협의회의 용공정책에 관한 팜프렛을 주면서 한국교회도 세계교회의 용공적 움직임에 주목하고 대처해야 할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9 이규갑은 이 팸플릿을 번역해서 배포했다. 이승만은 칼 매킨타이어나 근본주의 선교사로부터 이 팸플릿을 받았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10 그렇게 추정할 수 있는 이유는 미국정통장로교회의 선교사 치솜(William H. Chisom, 한국명 최의손)이 한국 국회위원들의 WCC 비난성명서를 번역하여「크리스찬 비콘」지에 게재했기 때문이다. 당시 치솜은 정부 방송국에서 정기적으로 30분간 종교방송을 하였고, 칼 매킨타이어와 홀드크라프트 선교사가 내한해서 이승만과 만난 후에 정부 간행물에 그들의 활동을 보도했던 친 이승만계 선교사였다.
한국에 최초로 WCC 용공론을 불러일으킨 사건은 근본주의자들이 WCC와 한국의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를 비난하려고 만든 사건이었는데, 불행하게도 이승만 대통령은 ICCC의 선전에 말려들었던 것이다.
WCC는 창립될 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양쪽에 대해 특정 이념을 지지하지 않는 초월적인 입장을 천명했다. 그후 1950년 한반도전쟁이 일어난 후 7월 9~15일 캐나다 토론토에서 모인 WCC 중앙위원회는 〈한국 상황과 세계질서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북한군의 남침에 대처해서 유엔이 한국에서 경찰행동을 해줄 것을 촉구했다. 이로 인해 WCC 안에서 공산권 교회와 자유진영 교회가 갈라졌고, 중국교회는 의장직을 사임했다. WCC 회원교회들은 또한 한국을 구호하는데 많은 노력을 했다. 그래서 남한교회 대표들은 1950년 9월 1일 WCC 앞으로 감사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내 근본주의자들은 WCC에 대해 용공논쟁을 벌였던 것이다.
1954년 장로교회 총회는 미국의 에반스턴에서 열리는 제2차 WCC 총회에 한경직 목사와 김현정 목사를 대표로 파송할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한경직 목사에게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아서 그는 WCC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 대신 미국에서 공부하던 명신홍 목사와 김현정 목사가 대표로 유호준 목사가 옵서버로 참석했다. 김현정 목사는 에큐메니칼 지지파였고, 명신홍 목사는 복음주의협의회(NAE) 인물이었다.11 그러나 같은 해 7월 고신 측 목사 네 명이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리는 제2차 ICCC 대회에 참석할 때는 여권이 쉽게 발부되었다. 이때 칼 매킨타이어는 자신이 설립한 페이스 신학교(Faith Theological Seminary)12에서 한상동 목사와 박윤선 목사에게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이 학위 수여는 한국 안에 ICCC의 영향력을 강화시키려는 조치로 판단된다. ICCC는 고신 측 뿐 만이 아니라 장로교단 안에 복음주의협의회 인사들과도 넓게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54년 6월 5일자 「기독공보」에서 NAE 총무 조동진 목사는 한경직 목사가 여권을 받지 못한 이유는 “매카이 박사가 1951년 8월 경에 반공전선의 보루이요 가장 공산 禍를 입은 한국에 왔을 때에 용공주의적인 언사를 한바 있었는데 이것이 대한민국 이승만대통령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던 것이었다.”고 하면서 “동 대회에 참석하는 것은 반공주의 노선을 걷는 정부의 반공정책에 배치되는 행동” 이라고 노골적인 용공론을 펼친다.
그 후에 칼 매킨타이어는 프린스턴 신학교의 학장이며 세계개혁교회연맹(WARC)의 의장직(1954-1959)을 맡고 있었던 존 매케이(John A. MacKay)를 용공적이라고 비난했고, 한국교회 일부는 그 비판에 영향을 받았다. 존 매케이는 1956년에 미국 NCC의 ‘삶과 노동’(Life and Work) 및 ‘국내선교위원회’에서 중국 본토 교회와 재 접촉할 것을 주장했고, 1957년에 다시 ‘국내선교위원회’ 연구협의회에서 중국을 승인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과거 캐나다 YMCA총무를 역임하다 중국이 공산화되자 본국으로 돌아가 문화혁명기의 박해를 겪으며 삼자운동을 지도했던 중국의 팅(丁光訓) 주교가 1956년 세계학생기독교연맹(WSCF) 투칭 세계대회에 참석하자 중국교회를 지원하기 위해 이런 발언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분단과 전쟁을 겪고 반공 정책 아래 있던 한국교회는 중국 기독교를 이해할 여유가 없었다.
존 맥케이 박사와
팅 주교 (K. H. Ting 1956-헝가리 WCC중앙위원회)
또한 1959년 장로교회가 통합과 합동으로 분열될 때에도 NAE측 인사들은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WCC를 용공으로 몰아붙였다.13
1956 NAE주최 전국목회자 구국기도회
(NAE는 교권세력으로 성장했고 ICCC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1959년 ICCC주최 반공웅변대회
1960년대는 한국에서 WCC에 대한 비난이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예장 통합이 10년 동안 WCC 활동을 정지하였기 때문에 크게 정치적으로 이슈가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당시 정부는 각종 언론과 출판, 관공서의 교육을 통해 WCC를 용공단체로 매도하였다. 그것은 WCC가 한국의 민주화ㆍ인권운동과 산업선교 활동을 지원하였기 때문이다.
역사가 흐른 지금, 구소련과 동구사회주의가 붕괴되었고, WCC 용공논쟁은 역사적 해프닝으로 이미 끝이 났다. 여전히 과거 러시아 정교회 출신 WCC 임원들 중에 KGB 요원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WCC는 공개된 교회 조직이기 때문에 그 안에는 러시아 뿐 만이 아니라, 미국, 이스라엘, 각종 비밀요원들이 침투해 들어 올 수 있다. 그러나 교회 조직이 그러한 비밀요원들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한국의 냉전 상황에서 독재 정권들은 용공논리를 집권연장의 도구 및 정치적 반대세력을 탄압하는 도구로 사용하기도 했다. 한국장로교회 분열과정에서도 용공논리를 사용해서 상대방을 비난하는 비신사적인 행위가 있었다. 이제 WCC에 대한 용공시비는 중지되어야 한다.
Ⅲ. WCC 단일교회론의 허구성
WCC는 110개 국가에 속한 349개 교회와 교파들의 협의체로서 약 5억 6천만의 기독교인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협의회는 동방정통교회의 대부분과 영국성공회, 침례교회, 루터교회, 감리교회,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및 다수의 개혁교회들, 연합교회와 독립교회들, 오순절교회들을 포함하고 있다. 〈세계교회협의회 헌장〉은 그 정체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계교회 협의회란 성경을 따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세주로 고백하는 교회들의 친교(Fellowship)이다. 그러므로 세계교회 협의회는 한분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의 영광을 위한 공동의 소명을 함께 성취하려고 노력한다. 14
〈WCC 헌장〉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381년)에 근거하여 성경과 삼위일체 신앙을 교회의 연합의 기초로 삼고 있다. WCC는 인위적인 교회의 일치를 추구하지 않는다. WCC는 교회들 안에 하나님께서 주신 일치(God-given-unity)가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WCC는 그 일치를 가시적으로 표현하는 도구 역할을 할 뿐이라고 자신의 역할을 인식한다.
WCC는 단일교회(super-church)를 지향한다는 비판에 응답하기 위해 1950년 토론토 중앙위원회에서 "토론토 성명"이라고 불리는 〈교회, 교회들, 그리고 세계교회협의회〉(The Church, the churches and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성명을 채택했다. 이 성명은 이렇게 응답한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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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협의회는 단일교회(Super Church)도 아니고 결코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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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협의회의 목적은 교회간의 연합을 협상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교회간의 연합은 (연합을 원하는) 교회의 주도로 교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일뿐 (세계교회협의회가 하는 일은) 교회들이 서로 접촉하고 교회 일치 문제에 대한 연구와 토론을 촉진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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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협의회는 특정한 교회 개념에 기초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세계교회협의회는 교회론적 문제를 예단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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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협의회의 회원이 된다고 해서 그 회원교회가 자기 교회의 개념을 상대화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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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협의회의 회원이 된다고 해서 교회 일치의 본질에 관한 어떤 특정한 교리를 수용해야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WCC는 교파를 무시하고 하나로 통합하는 단일교회 운동이 될 수 없고 회원교단 위에 군림하는 교회가 될 수도 없다. WCC의 회원교회가 된다고 해서 회원교회가 특정 신학이나 교리를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일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일부는 WCC에서 추구하는 ‘가시적 일치’(visible unity)를 단일교회 운동으로 오해한다. WCC 안에 있는 다양한 교파들은 자신의 교회론을 포기하고 하나의 교단으로 통합할 생각이 없다. 그것은 가능하지 않고 처음부터 그럴 뜻이 없었다. 교회는 여러 교단으로 나뉘어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차원에서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신앙고백에서 말하는 공교회(Catholicity)이다. WCC는 하나님이 주신 일치(God-given unity)를 세상 앞에 드러낼 책임이 있다고 보고 그것을 “가시적 일치”라고 보는 것이다.
WCC는 가시적 일치를 드러내기 위해 “다양성 속에 통일성”의 원리를 적용한다. 즉 다양한 교파들은 교리와 의식, 예배와 예전, 전통들에 다양성이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성경, 삼위일체신앙, 니케아신조, 세례, 성만찬 등의 통일성이 있다. 통일성이 있다면 설사 다양성이 있더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다양성이 무한정 허용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본질에 속하는 통일성을 위협하거나 그것에서 벗어난 다양성은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교파 교리를 절대 기준으로 삼는 교회 전통에서는 타 교파와 신앙적 친교에 들어가는 것을 교리를 섞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거부하게 된다.
WCC는 교회의 ‘가시적 일치’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협의회적 친교”(conciliar fellowship)를 강조한다. 혹자의 오해처럼 이것은 세계교회협의회(WCC)로 다 통합하라는 뜻이 아니다. 다양한 교파들이 서로 일치를 추구할 때 협의회적 방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친교는 하나님의 삼위일체 사이의 상호내주(inter-dwelling)안에 나타나고 교회의 하나 됨은 이러한 친교를 통해 이뤄야 하는 것이다.
Ⅳ. WCC 선교 유예론에 대한 오해와 무지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은 선교운동에서 출발했다. 1910년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World Missionary Conference)는 1921년에 국제선교협의회(IMC: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의 창설로 이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서구교회는 봉사와 사회참여의 중요성을 깨닫고 1925년에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생활과 사업”(Life and Work) 위원회를 조직했다. 그 후 1927년에는 봉사에서 일치하는 것만이 아니라 교리적 일치를 협의하기 위해 “신앙과 직제”(Faith and Work) 위원회가 생겨났다. 그후 “신앙과 직제”와 “생활과 사업”의 인력과 경비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WCC를 창립했다. 그 후 IMC는 WCC와 꾸준히 협력을 하다가 1961년에 통합을 하게 되었다. 선교기구인 IMC가 교회기구인 WCC와 통합을 결정할 때는 교회를 선교적 교회(missionary church)로 만들어야 한다는 목적이 있었다. 이것은 선교는 선교단체의 직무를 넘어 교회의 본질이라는 사고를 가져오게 했다. 그래서 IMC는 WCC 안에 “세계선교와 전도위원회”(CWME: Committee for the World Mission and Evangelism)로 존재하게 되었다. 이렇게 WCC는 선교, 봉사, 신학이라는 3대 운동이 결합되어 있다.
WCC가 전도와 선교에 무관심하고 사회참여에만 관심을 갖는다고 비판하는 것은 WCC가 전통적인 의미의 선교 보다 새로운 상황화 선교에 더 집중을 했기 때문이다. 19-20세기 초반에 행해지던 전통적인 의미의 선교는 영혼구원과 교회개척에 집중했다.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선교는 서구중심주의, 선교지 문화에 대한 무시, 식민지 침략과 선교의 동맹이라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 인해 전통적 의미의 선교를 반성하고 새로운 선교론이 제기 되었다.
WCC 반대론자들은 WCC가 ‘선교유예’(mission moratorium)를 결정하고 심지어 일부는 선교사들의 퇴진까지 주장했다고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1971년 동아프리카 장로교회 총무 존 가투(John Gatu)는 서구 선교사들의 지도력과 재정지원이 현지교회의 자립과 자치를 막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우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래에 대해 각자(선교사와 토착교회) 입장에서 생각하기 위해 선교사들이 5년 동안 철수하자”는 제안을 했다.16 이것은 선교중지 요청이 아니라 생각할 시간을 요청한 것이고, 다른 아프리카 교회들과 아시아 교회들의 지지를 받았다.17
1972년 말과 1973년 첫날에 모였던 방콕 세계선교대회는 상황화, 통전적 선교, 선교유예의 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러나 선교유예는 결정되지 않았다. 우선 선교단체들에게 선교사 철수란 자체 존립 근거를 위협하는 위기감을 불러일으켰고, 현지교회 지도자들도 재정적 지원이 중단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래서 WCC는 선교유예 대신 파송교회와 현지교회가 평등 관계로 선교한다는 “선교의 동반자 관계”(partnership in mission)를 발전시켰다. 이것은 현지교회의 입장을 존중한다는 선교학적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복음주의권 선교단체들은이 1974년에 스위스에서 세계복음화 로잔대회를 발족하게 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선교유예 문제였다.
'WCC 선교유예론'을 말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이다. 그리고 아프리카 교회의 선교유예 요구는 한국의 네비우스 선교정책과 같은 삼자정책의 요구가 있었던 것임을 알아야 한다. 피선교지교회가 선교파송 교회의 지도력과 재정을 너무 오래 의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주체적인 교회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신학자들은 서양에서 발전한 신학을 그대로 수용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토양 속에 복음을 뿌리내리려는 상황화 신학을 전개했다. 그러나 모든 상황에 적용 가능한 유일한 보편신학이 있다고 생각하는 복음주의권과 일부 에큐메니칼 그룹은 이러한 시도를 복음과 현지 문화의 타협으로 보고 우려한다. 상황화 신학에 대한 입장 차이가 WCC 선교에 대한 비판의 한 요소가 되고 있다. 그러나 어떤 현장 선교사도 상황화없이 열정만으로 복음을 전할 수는 없다. 상황화의 문제는 부정할 것이 아니라 복음과 문화 사이의 관계를 현장에 맞게 판단 적용하는 문제이다.
Ⅴ. WCC에는 사회구원론만 있는 것이 아니다.
WCC는 전도와 영혼구원에는 무관심하고 사회구원 만을 주장한다는 비판이 있다. WCC는 구원의 수직적 영적차원과 수평적 사회적 차원을 놓고 상황에 따라 강조점의 차이는 있었지만 어느 한쪽을 버린 적이 없었다. 1968년 스웨덴 웁살라 제4차 WCC 총회는 사회구원과 인간해방의 문제를 가장 강하게 강조했던 총회였다. 당시 유럽에서는 강력한 학생저항운동이 일어났고, 미국에서는 마틴 루터 킹 목사와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고, 월남에서는 전쟁이 진행되는 상황이었다. 남미에서는 친미 군사독재정권들이 집권했고, 아프리카에서는 백인정부가 인종차별을 공식화했다. 그래서 웁살라 총회는 교회가 “가난한 자들, 무력한 자들, 학대받는 자들, 무시 받는 자들”의 편에 서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웁살라 총회는 복음의 회심사건을 놓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에게 전함으로 인간을 살리고 회심케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복음전도에 있어서 우리가 할 일은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반응할 수 있는 기회들을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것이다. … 그것은 중생이다. 18
1973년의 방콕선교대회는 WCC 안에 복음주의 계통의 신학자들의 영향으로 진보적 신학자들의 영향력이 상당한 정도로 제약을 받았다. 그래서 방콕대회는 개인구원과 사회참여의 조화를 이루었다.
우리는 교회의 성장을 두 가지로 정의한다. 하나는 양적이고 수적인 성장이요, 다른 하나는 각 개인 안에 있는 새 사람의 발전이다. 그런데 이 개인들은 개 교회에 참여하면서 사회에 참여한다.19
구원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개인들을 죄와 죄의 모든 결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통하여 이 세상의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작업이다.20
WCC 안에는 보수와 진보가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수평적 차원이 너무 강하면 그 다음에는 수직적 차원이 강조되는 균형 장치가 늘 함께 있다.
한편, 복음주의자들도 WCC의 영향으로 사회참여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1966년 휘튼 선언(The Wheaton Declaration)과 1974년 로잔대회가 사회참여를 언급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통탄할 죄를 범했다. …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격리되는 죄를 범했다. 이 격리는 비성경적이다. … 우리는 너무나도 빈번히 성경의 원리들을 인종차별, 전쟁, 인구폭발, 가난, 가정 붕괴, 사회적 혁명 및 공산주의 등의 문제에 적용하지 못했다.21
우리는 사회참여에 소홀히 해온 것과 때대로 복음전도와 사회적 관심이 상호배타적이라고 생각해 온 것을 회개한다. 비록 사람과의 화해가 하나님과의 화해는 아니고, 사회적 행동이 전도는 아니고, 정치적 해방이 구원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와 사회정치적 참여가 모두 그리스도인의 의무라는 것을 확증한다. …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중생하여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가면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의를 불의한 세상 한복판에서 알려야 하고 확장시켜야 하고 실현시켜야 한다.22
1974년 복음주의 로잔대회
최근 에큐메니칼 운동과 복음주의 운동 사이는 영혼구원과 사회참여를 통전적인 관점으로 보는 수렴(convergence)이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WCC가 영혼구원을 인정하지 않고 사회복음만 강조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은 복음주의가 현실은 무시하고 영혼구원만 힘쓰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좁은 시각이다. 참고로 WCC는 1990년 이후 영혼구원과 사회구원뿐만이 아니라 피조세계의 생명도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이해하고 있다.
Ⅵ. WCC ‘게릴라 지원설’ 사실인가?
WCC는 사회적 불의와 부정의를 선교의 과제로 이해하고 사회참여에 적극적이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1969년에 설립된 ‘인종차별정책 반대 프로그램’(The Program to Combat Racism)이었다.23 또한 WCC는 우리나라의 민주화 인권운동, 통일운동을 지원했다. 예를 들면 1987년 민주화운동의 중심역할을 했던 ‘국민운동본부’의 자금에도 WCC 지원이 있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난민문제와 평화운동에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과 로데시아의 소수 백인정권, 1970년대 한국의 박정희 정부, 이스라엘 정부는 WCC 활동에 용공혐의를 씌우거나 비난했다.
WCC의 정치참여를 비난하는 배경에는
첫째, 칼 매킨타이어의 영향,
둘째, 한국의 군사독재정권의 영향,
셋째, 미국의 대중잡지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거짓 저널리즘이 있었다.
1960년에 남아공의 샤프빌(Sharpeville)에서 경찰의 발포로 시위 중이던 흑인 69명이 죽었다. 1968년 제4차 WCC 웁살라 총회의 개막 연설자로 내정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총회 개막 4개월 전에 암살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웁살라총회는 ‘인종차별정책반대프로그램’(PCR)의 운영을 결정했다. 1969년 모잠비크 교수이며 에듀아르도 몬들레인(Eduardo Mondlane)은 WCC 워크숍에 주강사로 초청을 받은지 3일 만에 비밀경찰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 워크숍에는 아프리카 민족전선(ANZ)지도자와 반인종차별활동가들이 참여한 가운데 PCR 계획을 구체화했다. 이 프로그램은 1970년부터 지원금을 지급했는데 남아공과 일부 서유럽교회들 안에서 심각한 논쟁을 야기했다. 그러나 아프리카 교회들과 미국과 유럽의 주요 교단들은 이 프로그램을 꾸준하게 지원했다.24
샤프빌(Sharpeville)에서의 흑인 학살 (1960.3.21)
샤프빌에서 시신을 수습하는 남아공 경찰
1976년 남아공 소웨토(Soweto) 학생 봉기 1000명 사망
1967년 WCC본부를 방문한 마틴루터 킹
마틴루터 킹과 함께 시위에 나선 유진 블레이크(훗날 WCC사무총장)
1970년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WCC의 ‘인종차별정책 반대 프로그램’이 혁명 게릴라 활동에 참여한 14개의 단체를 지원하였고, 그 중의 일부는 공산당이고 소련의 무기를 사용한다고 주장했다.25 1977년에 『속이는 복음』(The Fraudulent Gospel)이 미국과 영국에서 출판되었는데 그 표지에는 사망한 흑인 로데시안 27명의 사진이 실렸고, “1976년 12월 WCC의 지원을 받는 동로데시아의 테러리스트에 의해 살육되었다”고 주장했다.26 1986년에 「리더스 다이제스트」와 CBS의 TV 60 Minutes는 WCC가 해방운동과 게릴라 군대를 지원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미국의 연합감리교회는 대중매체의 관심을 자극한 것은 ‘인종차별정책 반대 프로그램’ 때문이고, 지원금은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과 싸우는 단체와 다른 남아프리카 국가들의 독립과 자치를 위해 일하는 단체에 제공되었다고 확인했다. 27
「리더스 다이제스트」 유럽지국 수석 편집인 조셉 헤리스(Joseph A. Harris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70년 이후 인종차별정책 반대 프로그램이 1300만불을 30개 국가의 130개 이상의 조직에 배포되었는데 그중에 절반이 아프리카의 혁명적 막스주의자에게 갔다. 그리고 그 자금이 인도주의적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는지 확인되지 않았다. 10만 8천불의 보조금이 로데시아(지금의 짐바브웨)의 애국전선에 주어졌다. 그리고 207명의 백인과 1712명의 흑인, 9명의 선교사와 자녀들이 죽었다.28
조셉 헤리스(Joseph A. Harriss)는 「리더스 다이제스트」 1993년 1월호 판에서 “마르크스를 따르는 복음”(The Gospel According to Marx)29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WCC를 비판했다. 그는 소련의 비밀경찰(KGB)이 WCC를 조정하기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WCC 대표로 참석한 정교회 성직자들은 공산당의 지령을 따르는 KGB요원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KGB 요원으로 활략한 정교회 신부가 누구냐는 물음에 이름을 대지 못했다. 그는 WCC 중앙위원이었던 정교회 모스코대관구 해외 관계부 평신도인 “Alexei Sergeyevich Buevsky”를 요원이라고 지목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은 밝혀지거나 증명되지 않고 그대로 종결되었다.
한국에서 WCC가 용공 정치행위를 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글은 주로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글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리더스 다이제스트와 칼 매킨타이어가 사용하는 비난의 출처는 남아공 백인 정권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남아공 백인정부 입장을 대변하는「아프리카 인스티튜트 뷸레틴」에 실린 “테러지원”(Terrorist Sponsorship)이라는 글을 인용해 본다.
1974년 2월 WCC는 30만 루블을 6개 대륙의 29개 조직에게 나누어 주기로 결정했는데 그 중 절반(14만9천루블)이 남아공에 테러운동과 연결된 곳이고, 6만7천루블(가장 큰 액수)이 포르투기 가이아나에 포르투기 군대와 싸우는 운동에 주어졌다.30
그런데 이 자료는 WCC만을 테러지원단체로 언급한 것이 아니다. 아래의 도표에서 보여주듯이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조직을 테러지원단체로 언급하고 있다.
국제기구 |
유엔, 아프리카 일치기구 |
교회와 교회 운동 |
세계교회협의회, 범아프리카교회협의회, 루터교세계연맹, 영국교회협의회, 미국교회협의회, 미국연합장로교회, 네덜란드개혁교회들 |
정부 |
러시아, 중공, 동독, 루마니아, 불가리아, 북한, 다양한 철의장막 정권들; 탄자니아, 잠비아, 알제리아, 이집트, 에디오피아, 리비아, 다양한 다른 아프리카 정권들;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영국, 서독, 네덜란드 |
개인 단체 |
방어와 조력기금(Defence and Aid Fund), 반인종차별운동(Anti-Apartheid Movement), 런던의 여러 과격단체, 옥스팜 및 필요와의 전쟁(Oxfam and War on Want), 어버트 버미어 조직(Evert Vermeer organization) |
개인 |
퀸 줄리아나(네덜란드여왕) 하이네만(전 독일 대통령), 하산 왕(모로코) |
남아공 백인정부는 인종차별정책으로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자 반대조직을 테러지원 단체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그런데 WCC의 게릴라 지원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왜 유엔, 다양한 정부, 인도주의단체들, 개인들의 지원은 비난하지 않으면서 유독 WCC만을 비난할까? 너무도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WCC를 이렇게 비난하는 단체는 미국의 극우단체와 극소수 근본주의 기독교 조직들뿐이다. 한국의 일부 보수교단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거짓 저널리즘을 이용해서 WCC를 공격한다.
특별히 기독교 정권을 표방하며 반인륜적 인종차별을 정당화 했던 남아공 정부는 ICCC의 칼 매킨타이어의 활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WCC를 비난하도록 했다. 칼 매킨타이어는 남아공의 사주를 받아 1975년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제5차 WCC 총회가 개최되었을 때, ICCC 지지자들을 데리고 입국해서 WCC를 사탄으로 몰아붙이려는 시도를 했다. 그는 아프리카 해방운동을 공산주의 운동으로 비난했고,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을 옹호했다.31 그래서 케냐 정부는 7월 25일에 칼 매킨타이어를 추방했다.32 이 당시 WCC 총회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훗날 WCC 사무총장이었던 샘 코비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시 WCC는 인종차별 정책의 철폐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운동으로 규정하고 이를 철폐하기 위해 노력하는 남아공 흑인교회들을 지원하였습니다. 이러한 교회들에 대한 지원을 남아공 백인 인종차별정부가 WCC가 아프리카민족전선(ANC)의 무기구입자금을 지원하고 있다는 흑색선전을 하였고 이들의 재정을 지원받았던 ICCC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세계교회협의회가 교회의 헌금으로 무기구입자금을 지원하고 있다는 아주 비신사적인 행동을 하며 WCC총회를 방해하기 위해 나이로비로 모였습니다. 그러나 케냐 정부는 공개적으로 인종차별 정책을 지지하고 남아공의 아파타이트 독재정권으로부터 자금지원을 받는 ICCC는 흑인들의 국가인 케냐에 발을 딛을 수 없다고 집회를 불허한 것입니다.33
소수 백인의 억압을 받던 로데시아(Rhodesia)는 1980년 짐바브웨로 독립했고, 남아공은 1990년에 인종차별정책을 철폐했고 1994년에 만델라가 집권했다. 그리고 아프리카 민족회의(ANC)는 나라를 재건하는 일을 했다. 더 이상 남아공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칼 매킨타이어는 WCC 반대운동에 많은 사람을 동원할 수 없었다. 인종차별을 정당화했던 백인정권의 WCC 비난과 인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고 정의를 지원하려고 했던 WCC의 응답 중 과연 어느 쪽이 더 윤리적이고 진실에 가까운지 상식으로도 판단할 수 있다. 더 이상 WCC의 게릴라 지원설을 언급하면서 비난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Ⅶ. WCC의 ‘종교혼합주의’와 ‘다원주의’ 논쟁
WCC는 로마 가톨릭을 제외한 가장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대표하는 교회들의 협의체이다. 그럼에도 WCC를 다원주의 혹은 혼합주의라고 비난하게 된 근거는 1961년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제3차 총회 이후 전개된 “종교 간의 대화 프로그램” 때문이다. 뉴델리 대회에서 타종교와의 대화라는 표현이 처음 사용되었다. 아시아,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서 종교 간의 갈등과 정죄가 결국 온 사회를 분열, 갈등, 폭력으로 몰아넣는 것을 보면서 WCC는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68년 웁살라총회는 타종교인 5명을 초청하면서 대화를 행동으로 옮겼다. 그러나 웁살라는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대화와 선포 사이의 차이를 분명하게 언급하였다.
기독교인이 다른 종교인과 대화를 갖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며,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헌신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다른 종교인에 대한 진정한 기독교적인 접근은 인간적이며, 인격적이고, 적절하고,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대화 가운데서 말씀하시고 그를 모르는 이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며, 예수님을 아는 자라도 그의 제한되고 왜곡된 지식선포를 바로잡는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대화와 선포는 같지 않다. 대화는 선포를, 혹은 선포는 대화를 총체적인 증거 속에서 서로 보완한다.34
1970년 레바논의 아잘톤과 1974년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종교인 다자간 대화가 있었다. 1974년 복음주의자들이 모인 로잔대회에서는 15개항의 〈로잔언약〉을 발표했는데 그 중 6항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반 계시를 통해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거부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신의 불의로써 진리를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여하한 형태의 혼합주의를 거부하며 그리스도께서 어떤 종교나 어떤 이데올로기를 통해서도 동일한 말씀을 하신다는 식의 대화는 그리스도와 복음을 손상시키므로 이를 거부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하신 신인으로서 죄인을 위한 유일한 중보자이시다.”35
1975년 나이로비 WCC 총회는 종교간 대화가 “종교간 에큐메니즘”으로 흐르는 것을 우려하는 입장과 대화를 강조하는 아시아 신학자들의 입장이 대립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세대, 어떤 사회에서도 그들에게 예수를 증거 하지 않은 채로 방치하지 않으셨다고 진정 믿는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 밖에서부터 기독교인들에게 말씀하시고 계실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없다. 어떠한 형태의 혼합주의에도 반대하지만 상호이해와 실제적인 협력의 수단으로서 타종교인들 및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자들과 대화해야 할 필요성을 확신한다.”36
1979년에 WCC의〈타종교인들과 이데올로기와의 대화지침〉은 “혼합주의”의 위험성을 주의하도록 경계하고 있다.37
첫째 위험은 기독교 메시지를 문화적 배경에 맞추어 해석하려는 시도이고, 타종교와 이데올로기들에 접근할 때 기독교 신앙과 삶의 진정성을 타협할 정도로 멀리 가는 것이다. …
둘째 위험은 현존하는 종교를 자신의 언어로 해석하지 않고 타종교나 이데올로기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것은 학문과 대화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는 하나님께 가는 여러 방법들 중에 한 변종으로 보이게 됨으로 혼합주의가 될 수 있다. 타종교의 경우는 단지 기독교인들이 믿는 진리의 일부로 보이게 됨으로 혼합주의가 된다. …
그러나 1981년 WCC는 스리랑카의 감리교 신학자 웨슬리 아리아라자(S. Wesley Ariarajah)를 종교간 대화 책임자로 임명하면서 타종교와의 대화가 활성화 되었고 인도와 아시아의 종교 신학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1983년 제6차 밴쿠버 총회에 이르기까지 WCC 안에서는 종교간 대화를 놓고 우려하는 소리와 강화하자는 입장이 나타났으나 다원주의 문제가 심각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WCC 중앙위원회가 종교간 대화의 문제에 있어서 공식적인 입장을 밝힌 것은 1982년 〈선교와 전도: 에큐메니칼 확언〉이 유일한 것이었다.38 이 문서는 예수 그리스도안의 구원의 문제를 명시(42항) 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은 “어느 때와 어느 장소에서도 자신을 증언하시지 않은 적이 없었다”(43항)고 말하며 그리스도인이 타종교인과 대화에 임할 때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풍요와 인간을 다루시는 방법을 분별하려고 노력한다.”(43항)고 언급한다. 여기서도 다원주의 입장은 나타나지 않는다.
1989년에 WCC 세계선교와전도위원회 산안토니오 대회가 채택한 문서(Your Will be done and Christ’s Way)에는 논쟁을 야기할 수 있는 표현이 나타났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이 길이 있다고 지적할 수 없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에 어떠한 제한을 둘 수 없다.”39
한국 복음주의자들의 일부는 이 문서를 다원주의 문서라고 취급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인정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제한하지 않는다는 말은 타종교의 구원을 간접적으로 열어놓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 복음주의자들의 관점처럼 ‘경건한 불가지론’40 의 입장을 취하면 이 문제를 수용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제7차 캔버라 WCC 총회(1991년)의 정현경 교수의 초혼제와 1990년 WCC 대화소위원회가 발표한 〈바아르 문서〉(Baar Statement)은 WCC를 다원주의론으로 비판하는 핵심 원인이 되었다. 사무총장 카스트로는 캔버라 총회 개막연설에서 탈근대화 시대에 세계적으로 종교부흥현상이 일어나고 있는데, 교회는 성령이 모든 영성과 종교들 안에서 활동하는지 아니면 기독교 신앙 안에서만 배타적으로 활동하는지 답해야 한다고 언급했다.41 이런 배경에서 캔버라 총회는 “오소서 성령이여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를 주제로 성령론을 택했고 생명문제와 환경문제를 다루었다.42
정현경 교수
이 총회에서 동방정교회 측의 발표자는 성령은 위로부터 오시는 것이며 성령론은 정통 삼위일체론 안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정현경 교수는 성령은 위로부터 뿐만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고난 당하고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의 관점에서도 다룰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발표 중에 초혼제를 했다. 필자는 정현경 교수의 학문적 입장은 이해하지만 그 퍼포먼스는 부적절했고, 이로 인해 WCC에 큰 어려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교수의 입장을 WCC 입장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큰 무리가 있다. WCC 내부에서도 정교수의 입장을 혼합주의로 비판하는 세력이 강하게 있고, 동방정교회 참석자들의 일부는 초혼제 중에 퇴장하기도 했다. 정현경 교수는 모든 교회들은 혼합적이며, 특히 서구교회들은 물질주의, 가부장제도, 군사주의와 혼합되었다고 응수했다.
〈바아르 문서: 다원성에 대한 신학적 관점〉43은 웨슬리 아자아리아를 중심으로 모인 대화소위원회에서 작성한 것으로 제7차 총회에 연구문건으로 보고되었다. 복음주의자들은 세 가지 관점에서 그 내용을 비판한다.
첫째, 하나님의 구원역사에서 일반은총과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은총의 경계선을 약화시켰다.
비록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진술은 항상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경험한 구원을 향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제한할 수 없다.”
둘째, 기독론을 넘어서는 구원론을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분명한 개인적 헌신에 구원을 한정하는 신학을 넘어설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구원의 신비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양떼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어쩌면 유용하다.”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의 보편적 차원을 열어준다.”
셋째, 성령론의 범위를 타종교 내부에까지 넓혔다. 성령의 활동이 타종교 일반역사 안에 있다는 것은 문제 될 것은 없으나 그것이 구원론으로 확장되면 다원주의 혐의를 벗기 어렵다.
“성령 하나님은 산 신앙(living faith)의 사람들의 삶과 전통 안에서도 활동하신다고 솔직히 확언한다.”
〈바아르 문서〉의 기독론은 분명 전통 기독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우주론적 기독론”에 근거한 것이다. 전통 기독론은 인류학적 구원론(anthropological soteology)에 집중하고 있어서 바울과 종교개혁자들에게서 나타났던 자연의 해방과 구원의 문제를 다룰 수 없었다. 성경을 보면 모든 피조물은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소망한다(롬8:21). 하나님은 만유의 아버지시다(엡4:4).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는 만물(땅과 하늘에 있는)과 하나님을 화목하게 하신다(골1:20). 창조보전과 생명의 신학이 중요해진 이때에 우주적 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물의 화해자로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 에큐메니칼 운동의 일부에서는 역사적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삼위일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으로서의 성령론을 강조하고, 교회 밖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구원론의 지평을 확장하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바아르 문서의 문제는 우주론적 기독론이 인류학적 기독론과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종교 다원주의적 견해를 피하면서 우주적 기독론을 전개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울까 하는 질문이 일어나게 된다.
복음주의자들의 입장에서 정현경 교수의 주장과 바아르 문서를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WCC를 종교 다원주의로 몰지 말아야 한다. 바아르 문서는 연구보고문서로 제출된 것으로 WCC공식입장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그리고 성령론 논쟁에 있어서 WCC의 공식적인 입장은 캔버라 총회 제4분과 보고서에서 정통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입장을 그대로 수용했기 때문이다.44
성령은 성삼위일체의 삶과 분리해서 이해될 수 없다.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성령은 그리스도시오, 메시야며, 세상의 구세주 되시는 나사렛 예수를 가리킨다. 성령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백성에게 힘을 주어 공동체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그들의 사역을 성취하게 하신다. 성령은 성삼위일체의 본질 그 자체로서 ‘거룩’하시다. 성령은 이 세상의 다른 ‘영들’ ― 그것이 선한 영이든 혹은 악마적이든지 간에 ―과는 구분된다(요일 4:1-6) (81항)
영들은 분별되어야 한다. 모든 영이 성령께 속한 것은 아니다. 성령을 분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사실이다. 성령은 십자가와 부활을 지시하고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증거한다. … 이러한 기준들은 우리가 종종 다른 종교들의 심오한 영성과 접할 때 기억해야만 한다. (93항)
그러면 WCC의 종교간 대화 프로그램이 이러한 비난을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WCC의 구조가 한국의 교단 중심 교회구조와 다르기 때문이다. 첫째, WCC는 협의회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 교단처럼 신학적 입장을 하나로 통일시키고 매듭을 짓는 것이 간단하고 쉽지 않다. 둘째, WCC는 신학적 대화 과정에서 소위원회를 구성하고 신학자들과 종교 전문가들의 사이의 대화에 충분한 학문적 자유를 제공한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견해들이 표출된다. 그것을 연구문건으로 제출한다. 셋째, 그것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기구는 중앙위원회와 총회이다.45
WCC의 신학적 입장을 비판할 때는 다음의 세 가지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 개인 신학자들의 견해를 아무 설명 없이 WCC의 입장으로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WCC의 공식 입장인 〈총회보고서〉나 〈중앙위원회 보고서〉에 입각해서 비판해야 한다. 셋째, 비판받아야 하는 내용이 어디에서 인용된 것인지 출처를 분명히 밝히고 비판해야 한다. 한국에서 떠도는 많은 비난들 가운데 대부분은 이런 원칙이 없기 때문에 신뢰하기 어렵다.
또한, “WCC 공식입장은 다원주의가 아니라고 해도 WCC 안에 다원주의자들의 있지 않은가?” 하는 질문도 있다. 개교회 안에 종교다원주의 입장을 가진 교인이 있다고 해서 전교회가 다원주의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듯 이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또 그 논리에 따르면 신학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입장이 다른 사람들과 만나지 말아야 하며, 대화도 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WCC는 타종교의 문제에서 대화를 거부하지 않고 배타주의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 우리는 기독교가 소수자의 종교로서 박해를 받는 여러 나라들 안에서 종교간 대화는 그리스도인들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타종교의 상대적 진리를 인정하고 기독교 신앙을 유지해야 하는 많은 기독교인들의 진지한 고민들을 ‘종교다원주의’라는 단순논리로 배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신앙에 대한 열정이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 태도로 나타나는 한국교회 안에서 타종교에 대해 어떤 태도가 선교적인 입장에서 성숙한 것인지 살펴야 할 것이다. 종교인과의 대화에 대해 바른 태도를 지니려는 교회적인 노력이 없다면 비판은 성과 없이 끝나고 말 것이다.
Ⅷ. WCC는 교회를 분열시켰는가?
한국교회 안에는 WCC로 인해 교회가 분열되었다는 주장이 강하게 남아있다. 이러한 주장을 하려면 세계 곳곳에서 WCC가 교회분열을 일으킨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WCC에 대한 찬반 논의가 장로교회와 성결교회의 분열의 한 원인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작 1959년 한국장로교회의 분열과 성결교회의 분열에는 ICCC의 자금이 개입되어 있었고 WCC는 아무런 개입을 하지 않았다.
1959년 9월 제44회 장로교총회 (분열총회)
1950년대 냉전시기에 국제기독교협의회(ICCC)는 전쟁의 고난을 겪고 있는 한국교회 안에 자금을 뿌리면서 WCC에 대한 흑색선전을 감행했고, WCC 안에 공산주의권 교회가 있다는 사실은 WCC 용공성에 대한 혐의를 짙게 만들었다. 1959년 장로교회가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되는 과정에서 교권 싸움과 신학적 차이가 혼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분열된 장로교회의 한편에서 이 분열 문제를 WCC 문제라고 일반화 하면서 WCC를 원죄로 다루기 시작했다. 그 후 한국의 장로교회가 150개 이상의 교단으로 분열되는 과정은 반 에큐메니칼 교단내부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한국교회의 분열의 책임을 WCC 신학으로 돌리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맺는 글
이 글은 한국교회 안에 회자되고 있는 WCC에 대한 비판들 가운데 용공론, 단일교회론, 선교유예론, 사회구원론, 게릴라지원설, 다원주의론, 교회분열책임론에 대해 역사적 배경과 그 진실성에 접근하려는 시도를 했다.
필자의 견해로는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비판 외에 대부분은 설득력이 약한 정치적 비난성이 강한 견해라고 평가된다. 그리고 종교 다원주의에 대한 문제도 WCC 내부에 일부 다원주의 신학자가 있다고 해도 WCC는 균형을 유지해 가고 있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WCC가 다원주의를 보급하고 확대하는 집단인 것처럼 보도하고 확대 해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역사적인 교회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늘 비판과 교정에 대해 개방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WCC를 포함하여 어떤 교회 단체들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비판을 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근거와 상대방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WCC를 비판하는 내용들 가운데 한국교회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 깊이 듣고 성찰할 내용들이 있다. 그렇지만 1950년대부터 내려오던 부정적인 경험과 이야기들의 연장과 확대 재해석으로 이뤄지는 비판은 공정하지 않다. 공정하지 않은 비판은 한국교회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비판하는 주체의 신뢰성을 약화시키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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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한국기독교연합회 총무는 용산교회 담임목사인 유호준 목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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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9년 그레샴 메이첸 교수(Gresham Machen)를 중심으로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갈라져 나간 사람들은 펜실베이니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했고 1936년에 설립된 정통장로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37년 메이첸의 사망이후, 칼 매킨타이어와 그 일행은 웨스트민스터와 분립하여 페이스 신학교를 설립했다. 매킨타이어는 1937-2000년 까지 페이스 신학교의 이사장으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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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해 필리핀 감리교회의 에메로토 낙필(Emerito Nacpil) 역시 같은 주장을 하였고, 1974년 제3차 범아프리카 교회협의회(AACC)도 ‘선교유예’를 요청했다. Gerald H. Anderson, “모라토리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에큐메니칼 운동과 신학사전 I』(서울: 한들출판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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