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개혁의 역사

2012. 2. 25. 14:36신학자료/1.신학자료

기독교 개혁의 역사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함
여러 세기 동안 수 만 명의 크리스챤들이 순교를 당했으나, 신앙과 기독교의 힘은 사라지지 않았다. 순교자들이 순교의 피를 흘리면 흘릴 수록 더 많은 크리스챤들이 생겨났다. 핍박과 고문과 죽음은 그리스도교를 없앨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신앙을 피로 인쳤고, 그것으로 인하여 복음은 더 널리 전파되었다.


그런데 이제 그런 핍박의 시대가 지나가고 겉으로 볼 때 크리스챤들에게 평화스러운 듯이 보이는 시대가 도래되었다. 그 이유는 바로 주후 312년경, 콘스탄틴이 로마의 황제로 등극하여 사용한 로마의 융화정책으로 온 변화 때문이었다. 콘스탄틴 황제는 이교도들과 크리스챤들을 모두 수용하여 국가를 통합하려는 정책으로 그 자신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던 토요일 안식일을 이교도들이 태양신을 경배하던 일요일로 바꾸어 그 날을 공식적인 국가의 예배일로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계명인 넷째 계명이 사람의 권한으로 바뀌어지는 일이 생겼다. 이런 일들과 함께 기독교에는 많은 이교의 가르침과 예배 형식이 스며들었고, 핍박을 받을 때는 순결하던 하나님의 참 교회는 세속과 타협하게 되었다.


또한 이 일은 사도 바울의 예언한 것처럼 법왕권의 일어남과 그것이 초래할 큰 배도에 대한 길을 열어주었고, 또 교회 안에 스며 들어온 오류들로 법왕권의 가르침이 더욱 확립되도록 만들었다. 일찍이 바울은 법왕권과 적그리스도에 관하여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살후 2:3,4)리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한 계속하여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살후 2:7)다고 형제들에게 경고하였다.


이교의 관습은 거의 드러나지 않게 조금씩 조금씩 교회 안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양보와 순응주의적 정신은 교회가 이교 아래서 견뎌낸 맹렬한 박해로 말미암아 한동안 방지되었었다. 그러나 이제 박해가 그치고 그리스도교가 왕궁 안으로 들어가게 되자, 교회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도들의 겸손한 단순성을 버리고 이교의 제사장이나 방백들의 교만과 허식을 따르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율법을 사람의 이론과 유전으로 대체시켰다. “불법의 비밀”은 처음에는 조금씩 비밀리에 진전되었으나, 나중에는 세력이 커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더욱 공공연하게 기만적이요, 참람된 교리를 진척시켰다.

로마 천주교의 등장과 세력
크리스챤들의 교회는 벌써 오래 전에 이교도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교의 가르침과 기독교의 교리가 적당히 섞여진 채로 로마는 기독교 국가처럼 행세하였고, 고대제국의 영역 안에서 거의 모든 세계는 로마를 신앙의 지상도성으로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6세기에 법왕권은 확고하게 확립되었다. 그의 권좌는 로마에 위치하게 되었고, 로마의 감독은 모든 교회의 머리가 된다고 공포되었다. 그들은 교황을 하늘의 가시적 중재자로 보았다. 이교는 그의 지위를 법왕에게 넘겨 주었다. 곧 용이 짐승에게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계 13:2)를 준 것이다. 이리하여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서 예언된 1260 년간의 법왕권의 박해가 시작되었다(단 7:25; 계 13:5-7 참조).


이제 교회와 교회의 의식, 감독, 성직자들을 위하여 세워진 듯한 로마는 크리스챤들을 다스리는 거대한 힘을 강화시켰으며, 교회는 교황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과 가장 높은 교회의 공직을 차지한 사람들을 폭군으로 만듦으로써 그 사명의 끝을 맺었다. 어느새 교황의 힘과 그가 임명한 사람들의 힘은 절대적이 되었고, 그들이 세운 교회의 법이나 의식을 항거하거나 변화시키는 것은 한치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가장 성경적이고 본질적인 신앙을 지키는 크리스챤들은 억압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로마의 전권적 율형에 대항하여 감히 그들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자마자 “이단”이 되었다.


교황권이 하나님의 법을 변경시키게 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태양신을 섬기는 이교도였던 로마 제국의 콘스탄틴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의 지지를 얻음으로써 자신의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 교회로 개종하면서 기독교회를 로마의 국교로 삼았는데, 이것을 기점으로 해서 수많은 정치인들과 이교도들이 황제의 뒤를 따라 그리스도교회 안으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기독교회로 새로 개종한 황제는 이교도들의 반발을 막기 위하여 그들의 풍습과 전통인 우상을 만들어서 신전에 세우는 관습과, 그들이 태양신에게 예배 드리는 날을 기독교회가 수용해 줄 것을 요구하였는데, 교황권의 지도자들은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기록하신 십계명을 변경시킴으로써 황제의 요구를 수락하였던 것이다.

암흑의 세력에 대항한 왈덴스인들

이렇게 신실하게 신앙을 고수하며 법왕권의 침입을 저항한 사람들 중에서 왈도파 - “왈덴스인” (Waldenses)들이 최선봉에 섰다. 수백 년 동안 그들은 알프스 산맥 동부에 위치한 험한 산골짜기에서 피난처를 찾고 거기서 살았다. 그들은 법왕의 지위가 확립되어 있는 나라에 살면서도 그 허위와 부패를 꿋꿋이 저항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고 그들의 믿음의 순결을 그대로 보존하고자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깊은 산골짜기나 험준한 산 속으로 피해 가서 거기서 자유로이 하나님을 경배하였다.


“왈덴스”교도들이 몇 세기 동안 가르쳐 온 신앙은 로마로부터 나온 허위의 교리와 현저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들의 종교적 신조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되었다. 세상과 차단된 궁벽한 곳에서 날마다 양떼를 치며 포도원을 가꾸는 매일의 고역에 시달리고 있는 비천한 그 농부들은 배교한 교회의 교리와 이설(異設)에 반대되는 진리를 자기들 스스로가 발견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종교적 신조는 그들의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왈덴스인들의 신앙생활

첩첩이 싸인 알프스 산악의 높은 성채들은 여러 세기를 통하여 박해를 받고 압박을 받는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이 곳에서 중세기의 암흑을 뚫고 진리의 횃불이 계속하여 타올랐다. 후에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말틴 루터도 왈덴스인들의 가르침과 성경을 통하여 진리를 깨우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들 머리 위에 높이 솟아 불변의 위엄을 지니고 있는 산들을 자녀들에게 가리키면서 언제나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하나님에 대하여 또는 그 말씀이 영구히 서 있는 묏부리처럼 영원하신 이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었다. 그들은 고생스러운 그들의 운명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았고, 궁벽한 산중에 외로이 있으면서도 결코 외롭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들의 분노와 강포를 피할 수 있는 한 피난처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자유롭게 경배할 수 있는 것을 기뻐하였다. 때때로 원수들의 추격을 받았지만 험준한 그 산들이 견고한 산성이 되었다. 그들은 높은 절벽 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으나 로마의 군대들은 그들의 감사의 찬미를 침묵시킬 수 없었다.

 

종교 암흑시대에 일어난 순교자들


프랑스 왈도파 사람들이 당한 초기의 박해
교황은 왈도파(왈덴스인)들의 신앙이 계속 퍼져나가는 것을 보자, 로마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증오스러운 종파를 영원히 지상에서 종식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는 왈도파를 그들의 골짜기에서 끌어내려고 크레모나의 대집사 알베르트 카피타나이스를 프랑스로 보냈고 대규모의 군대를 일으키는데 성공하였다. 군인들이 왈도파 사람들을 잡으려고 알프스의 어느 골짜기에 도착했을 때 집들은 비어 있었고 사람들을 아무도 찾을 수 없었다. 그곳 사람들이 벌써 군인들이 오는 것을 알고 동굴이나 바위에 숨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온갖 수단을 다하여 그들을 찾아내고 추적하여 많은 사람들을 잡아 낭떠러지에서 거꾸로 떨어뜨려 죽게 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비밀 통로를 이용하여 동굴에 피해 있었다. 군인들이 그들을 붙잡을 수가 없게 되자, 동굴을 찾아내어 어귀에 나무를 쌓아 놓고 큰 불을 질렀다. 동굴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연기와 열로 질식되어 죽었다. 불이 다 탄 후 동굴을 뒤지자 1,000여명이나 되는 시체가 발견되었고 그 가운데 대부분은 여자들과 어린이들이었다. 이 공격에서 죽은 사람들은 3,000명에 달했다.


그 외에도 알프스 산의 북쪽인 이태리 북방으로 가서 산 사람들, 알프스의 또 다른 산맥에 사는 사람들도 이와 유사한 핍박들과 죽음을 당하였다. 긴 세월 동안 많은 어린이들과 여자들과 노인들, 아니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주 골짜기를 습격하는 십자군 (무서운 죄를 지은 죄수들로 구성된 군대로서, 만일 그들이 이단을 믿는 크리스챤들을 많이 죽이면 용서해 준다는 조건으로 만들어진 군대) 에 의해 무섭고도 매우 잔인한 죽음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불타는 신앙은 칼로도 화형으로도 창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알비젠스파 사람들
알비젠스파 사람들은 남프랑스 알비라고 불리는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역사상에 언급된 것은 주후 약 1100년부터이다. 100년 후에는 그 수가 대단히 많아졌는데, 그들도 왈도파와 같이 예배형태를 로마교회와 달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로마의 성직자들이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 서 있다는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으므로 그들의 신앙은 후대의 프로테스탄트의 의견과 같은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천주교 교황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는 면죄부를 돈을 받고 팔고 있는 실정이었다. 교황 이노쎈트 3세는 알비젠스파 사람들을 완전히 격파시키기에 충분한 대규모의 병력을 일으키기 위하여 전 유럽에 통신문을 내었다. 왜냐하면 몇 세력있는 귀족들도 알비젠스를 지원하였는데, 그 중에는 세력있는 백작들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알비젠스 사람들의 순교
알비젠스파 사람들 중에 특별히 툴루스의 백작 레이몽 같은 사람은 브지에르 시와 신실한 알비젠스파들을 보호하려고 교황의 그 많은 군대와 끝까지 저지하고 싸우다가 힘의 부족으로 지게 되어 브지에르 시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 일이 역사에 나온다. 교황의 군대들은 그들에게 로마 교회의 예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자비가 섞이지 않은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말했으나 사람들이 이에 굴하지 않자 군인들은 그 성과 마을들을 맹공격 하였고, 그 마을은 피를 물처럼 쏟고 누워 있는 사람들의 신음소리와 자기의 아이들을 데려다가 자기들의 눈 앞에서 칼로 난도질 받는 것을 보고 있던 어머니들의 울부짖는 소리와 큰 시가지를 휩쓸고 있는 불타는 소리로 가득 찼다. 로마의 군인들이 놓은 불길은 불쌍한 주민들을 거리로 몰아냈고 자기 집에 숨어있던 사람들이 불을 피해 밖으로 나오다 모두 칼에 맞아죽임을 당하여 거리는 피로 물들여졌다. 잔인한 교황의 대사는 이 무서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그 대량학살의 작업을 즐기었고 그 일을 하고 있는 군대를 격려하기까지 하였다. 군인들이 살해를 다했을 때, 30,000명 이상이나 되는 송장들이 아름다웠던 브지에르 시의 폐허에 누워 있었다. 그렇게 많은 수의 참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들의 신앙을 위해 장렬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왈도파가 당한 마지막 박해
왈도파 사람들 중 일부는 이태리 북부로 갔다. 거기서도 그들은 로마 교황이 보낸 군대에 의해 많이 죽었으나, 산으로 도망하여 가서 산 사람들 중, 후에 그들의 후예들의 수가 크게 증가하였다. 그들은 땅을 갈고 파는 근면한 사람들이어서 번창하였고 얼마간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예의 주시를 하던 로마 투린의 대감독은 결국 그들의 피난처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군대들을 보내어 많은 난폭한 짓을 했고 수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그러나 그들의 수가 많아 때때로 파견된 군대가 그들의 저항을 받아 포기하고 돌아가는 일도 있었다. 수백 년을 그칠 줄 모르는 박해가 계속되었지만 그들의 신앙과 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1650년 로마 의회는 희년을 맞아 “신앙을 전파하고 이단들을 파괴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법을 통과시키는 중, 왈도파 사람들을 상하고 괴롭게 하려는 법과 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유난히 심하게 추운 겨울에 왈도파 모든 주민과 이미 공개된 지역사람들은 삼일 안에 그들이 로마교회로 개종하지 않으려면 그들의 집을 떠나 산으로 은퇴하라는 것이었다. 놀라운 이야기지만, 그들 가운데 한 사람도 주저하지 않고 그 조건들을 수락하였다. 그들은
“우리는 온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 한분 만을 믿는다. 그리고 성경을 따라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법대로 구원을 얻는다. 우리는 인간이 만든 어떤 교리와도 타협할 수 없으며, 어떠한 세력도 우리를 우리의 신앙에서 떠나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며 그들의 거처와 집들을 포기하였고, 눈속에서 강을 건너며 어렵게 급류를 통과하여 동굴이나 불쑥불쑥 내민 바위 아래 안식처를 마련하였다. 15,000명의 군대가 즉시 그 골짜기로 파견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거기를 떠나려는 것을 허락받지 못하고 야만스럽게 살해되었다. 남은 사람들은 그들의 고향 땅을 강제로 빼앗기게 되었고 피드몬트의 다른 도성에 있는 감옥에 감금되었다.

12,000이나 넘는 남녀 성인이 어두컴컴한 토굴에 갇혀서 가장 잔인한 취급과 고문을 받았다. 그들은 아주 형편없는 빵을 먹었으며 썩은 물을 마셨다. 그들의 유일한 침대는 맨 돌이나 썩은 짚이었다. 그들은 일부러 사람들을 매우 빽빽하게 차게 했기 대문에 열병과 다른 질병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을 죽게 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로마교회로 개종하려는 의사를 나타내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신앙을 계속해서 고수하였다. 그러한 취급을 받는 가운데 몇 개월 안에 그들의 수가 12,000명에서 3,000명으로 감소되었다. 그러나 동굴 안을 늘 채웠던 찬송소리는 그들의 기도와 함께 하늘로 올라갔다.


핍박하는 일에도 막대한 경비와 인원이 요구되자 싫증이 난 박해자들은 왈도파의 나머지 남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정배를 가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혹독하게 추운 겨울에 강제로 행군하여 가게 되었고 또 매우 빨리 재촉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길에서 죽었다. 그리고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스위스에 가서 정착하게 되었다.

 

비록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신앙 때문에 목숨을 잃고 죽었지만, 그러나 결국 그들의 이러한 고난과 시련, 또 죽음을 불사한 신앙열, 수없이 흘려진 귀한 순교의 피 때문에 후대에 저 위대한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귀중한 성경을 우리가 가질 수 있게 되었고, 또한 그 성경에서 비쳐 나오는 진리를 믿고 깨달아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정말 고맙고 놀라운 순교자들이 아닐 수 없다!


순교자의 신앙을 본받아서

 

현 시대처럼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고 마음껏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시대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순교자”라는 단어는 생소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순교”라는 것은 옛날 초기 기독교 시대나 중세기 때처럼 종교의 자유가 없던 시대에나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머지않은 장래에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요한 계시록 6장 9~11절은 다섯째 인을 떼실 때(다섯째 인 시대에) 순교자들이 많이 생겨날 것을 예언하였고, 앞으로도 순교자들이 생겨날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순교자들의 수가 차기까지 또 다른 순교가 있을 것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뒷받침하며 요한 계시록 13장 15~18절은 마지막 때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과 뜻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참 백성, 남은 무리들은 환란과 핍박과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물론 그들이 종내는 승리하여 하늘을 보상으로 받을 것이지만...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계 13:15).

옛날,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중세기 종교 암흑시대를 지나는 수백 년의 세월에 걸쳐 하나님께 충성하는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를 위하여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그들은 아주 작은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계명에 어긋나는 일은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으며, 성경과 맞지 않는 오류나 가르침에는 목숨을 걸고 반대하였을 뿐 아니라, 한치의 타협함도 없이 진리를 고수하기 위하여 고문과 핍박과 고통을 감수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할”(히 11:15) 사람들이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순교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런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자신의 목숨보다, 자신의 가족보다, 자신의 명예보다, 자신의 안일한 삶보다, 세상의 인정보다, 무엇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경의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그리하여 온 우주에 누가 과연 목숨을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과 진리에 충성하는 당신의 참 백성인지를 들어 올리시고 보이시기를 원하고 계신다.

 

종교 개혁의 시작과 발전 과정 


영적 암흑이 칠흙같던 12세기, 참다운 구원의 길을 제시해야 할 교회의 가르침이 중세기 로마 교회의 배도로 심각하게 오염되어, 더 이상 구원의 신앙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저기서 생명의 빵과 물을 구하는 애타는 영혼의 절규가 울려 퍼졌으며, 진리를 갈급하는 영혼들이 개혁의 선봉에 서기 시작하였다.

1. 개혁의 선두주자, 왈덴스인들 (종교 개혁의 밑거름)


언제나 먼저 목마르고 굶주린 것은 평신도였다. "교황권의 대낮은 세계의 한 밤중이었다" 는 역사가 윌리의 표현처럼 로마 천주교회의 전성기였던 12세기는 참으로 영적인 한 밤중이었다. 마침내 1170년경 프랑스 남부로부터 그들의 지도자의 이름을 따라 왈덴스인으로 불리는 일단의 평신도들이 일어나, (1) 로마 교회의 전통을 거부하고 순수한 성서신앙을 제창했으며, (2) 연옥교리를 부정하고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를 반대했으며, (3) 성만찬의 빵과 포도즙이 사제의 기도로 실제적인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형한다는 화체설을 부인했다. (4) 로마 천주 교회는 결코 잘못할 수가 없다는 무류설을 반대하고 평신도의 전도할 권리를 요청했다. (5) 이들 가운데 성서적 안식일인 제칠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무리도 일어났음이 역사가들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험준한 알프스 골짜기를 피난처로 삼고 행상을 하며 전도한 이들은 로마 천주교회의 혹독한 핍박으로 수없는 희생자를 내며 유럽의 22개국으로 번져나갔다.
왈덴스인 교회는 아직도 이태리에 남아있는 최초의 개신교이다.

2. 종교 개혁의 새벽별, 영국의 위클립 (사데 교회 - 종교 개혁 시대의 시작)


왈덴스인들이 외롭게 이어 온 진리의 빛은 위클립에게 옮겨졌다. 왈덴스인의 개혁이 영국에까지 이른 무렵, 14세기 유럽의 최고 명문인 옥스포드 대학의 가장 유능한 학자요 국왕의 궁중 사제였던 위클립이 일어나 왈덴스인의 가르침을 신학적으로 정립하여 선포했다. 그는 (1) 교회의 유일한 머리는 그리스도시며, 교황은 "적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선언했다. (2) 연옥을 부정하고 성자 예배와 유물 숭배를 반대했으며, (3) 화체설을 공박했으며, (4) 고해성사와 교회의 무류를 부정하고, (5) 구원은 인간 공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받는다고 가르쳤다. (6) 1382년, 금서였던 성경을 라틴어에서 영어로 번역하여 백성들의 영적 안목을 회복시켰으며, (7) 왈덴스인의 본을 따라 롤라드로 알려진 평신도들을 훈련시켜 전국을 순회하며 전도하게 했다.

3. 종교 개혁의 큰 별, 마틴 루터와 루터교

성경에는 전혀 근거가 없는 연옥 교리를 소개하여 속죄의 필요를 역설한 중세 천주 교회는 고해성사와 함께 고행을 강조하며 면죄부로 자신의 죄의 형벌을 감면할 뿐 아니라, 연옥에 있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신속히 천국에 보낼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로마 천주교회의 배도와 잘못된 가르침은 이미 요한 허스가 일으킨 개혁에 자극을 받아, 행함이 아닌 믿음에 의한 구원을 체험한 젊은 신부요 신학 교수였던 마틴 루터로 하여금 진리의 횃불을 높이 들게 만들었다. 루터는 그 동안 자신의 신앙적 양심을 괴롭혀 온 로마 천주 교회의 문제점을 폭로하는 95개조 논제를 1517년 10월 31일 정오에 위턴베르그 성당문에 게시하였는데, 이로써 세계 역사를 바꾼 대 종교 개혁의 막이 올랐다.


마틴 루터는 즉시 교황권에 의해서 이단으로 고발되었으며, 신성 로마제국의 국회로 소환되어 1521년 4월 18일 심문을 받고 그의 주장을 포기하도록 요청받았으나 이를 담대히 거부함으로써 종교개혁의 분수령을 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와 신성 로마제국에 잡히면 화형에 처해지는 이단의 선고를 받은 루터의 대표적 가르침은, (1) 신앙의 최종 권위는 로마 교회의 전통이나 권위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성경"에 있으며, (2)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사람의 선행이나 로마교회의 사제가 나누어주는 공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의며, (3) 구원은 그러한 믿음을 통해 누리는 "오직 은혜"로 주신 선물이며, (4) 또한 신자들은 신부나 사제를 통하지 않고도 직접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는 만인 사제직을 제창했고, (5) 연옥 교리와 함께 그것을 뒷받침하는 영혼 불멸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조건적 불멸을 가르쳐 부활신앙을 강조했다. "영혼이 불멸한다는 신조는 터무니없는 다른 견해들과 함께 로마 교황권의 교리집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되어 진다." The problem of immortality, p256 , 1520년 11월 29일에 발표한 41개 신조. 루터의 개혁은 개신교 신앙의 기초를 놓으며 후에 장로 교회의 주춧돌을 놓은 요한 칼빈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4. 재침례파가 비춘 보다 밝은 빛

독일에서 루터가 개혁을 시도하는 동안 스위스에서는 독일보다 더 철저한 개혁이 별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경건한 로마 가톨릭의 사제요, 학자며 애국자였던 쯔윙글리는 성경을 연구한 결과로 얻은 확신에 따라, 로마 가톨릭의 이교적인 예배의식과 면죄부 제도를 전면 부정하고, 극도에 달한 성직자들의 도덕적 퇴폐를 공박하는 대담한 개혁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화체설을 반대하고, 성만찬의 빵과 포도즙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기념이라고 가르쳤다.


루터나 쯔윙글리보다 더 철저한 개혁을 원하는 일단의 개혁자들이 스위스의 쮜리히에서 일어났다. 재침례파, 혹은 "형제들"로도 알려진 이들은, (1) 신앙의 유일한 근거로 깊은 성경연구를 강조하고, (2) 국가와 교회의 철저한 분리를 주장했으며, (3) 죄를 깨닫지 못하고 회개할 수도 없는 어린 아이들에게 베푸는 로마가톨릭의 의식인 유아세례가 비성경적인 것이므로 무효라고 선언하고, 성인 신자에게 이를 다시 베풀었때문에 재침례파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4)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죽음을 수면과 같은 무의식 상태라고 가르치고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속한 재림을 강조하는 신앙을 받아 들였다. (5) 교회로부터 각종 성상들과 이교적 의식들을 일체 제거할 것을 주장하고, (6)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존중하고 맹서를 금했으며, (7) 전쟁을 반대하고 무기 사용을 금했으며, 핍박을 받을지라도 대항하거나 원수를 갚지 않았으며, (8) 모든 교회는 신자들이 자율적으로 믿고 다스려나가는 회중제도를 택했다.

5. 메노나이트가 발전시킨 진리의 등대 빛

핍박을 받은 많은 재침례파 신자들은 홀랜드로 도피했는데, 로마가톨릭 사제였던 메노 시몬스가 카톨릭의 교리 중 하나인 화체설에 의문을 품고 성경을 연구하던 중 가톨릭 신앙의 오류를 깨닫고 1536년 재침례파로 개종하여 그들의 유능한 지도자가 되었다. 재침례파의 모든 가르침과 함께 요한복음 13장의 교훈에 따라 성만찬 전에 서로 발을 씻기는 세족예식도 시작했다. 지도자의 이름을 따라 불리는 메노나이트 재침례파 신자들은 당시에 알려진 가장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었으나 가톨릭 뿐만 아니라 그 당시 미처 그들을 신앙을이해치 못한 개신교도들로부터 혹독한 핍박을 받아 많은 순교자를 냈으나 때마침 열린 신대륙으로 건너가 1683년 이후부터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메노나이트와 같은 계통인 퀘이커 교도들과 함께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고, 비무장 평화주의, 의료봉사를 통해 미국의 인권옹호와 민주사회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6. 종교 개혁의 총아, 요한 칼빈과 개혁(장로) 교회

철저한 가톨릭 신봉 국가였던 프랑스는 루터의 개혁 신앙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대대적인 핍박을 시작하였다. 루터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던 20세의 젊은 청년 요한 칼빈은 핍박을 피하기 위해서 스위스로 피난하여 제네바를 중심으로 신정정치까지 베풀며 루터의 개혁과 양대 주류를 이루는 개혁을 추진시켰다. 칼빈이 강조했던 점은, (1) 신앙은 성서에 기초해야 하고 그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는 성서신앙을 강조하고, (2) 창조와 구속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하나님의 영광을 강조했다. (3) 예배 의식에서 중세 로마교회의 우상적이고 이교적인 요소를 일체 배제하여 개신교 예배의 기초를 놓았다. (4) 은총만을 치우치게 강조한 루터와는 달리 의와 성화의 표준으로 율법의 기능을 적절히 강조했다. (5) 교회행정에 있어서는 감독제도와 회중제도의 중간인 장로제도를 채택했으며, (6) 루터와 쯔윙글리보다 성만찬의 영적 의미를 한층 깊게 했다. (7) 교육을 강조하고 직업을 소명으로 가르치는 등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된다.


기본적으로 칼빈의 개혁 신앙은 루터의 사상을 계승하여 이를 체계적으로 조직하고 철저하게 규명하여 발전시킨 것으로써 종교개혁의 진전에 있어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칼빈의 개혁신앙을 따르는 교회는 유럽에서는 "개혁 교회"로 알려졌고, 영국 등 영어를 쓰는 지역에서는 "장로 교회"로 불리워지고 있다.

7. 영국 국교회의 태동


16세기 종교개혁이 유럽 대륙에서, 독일의 루터파, 스위스의 재침례파, 칼빈의 개혁교회와 같은 세 주류를 이루며 진전되고 있는 동안, 섬나라인 영국에서는 별도의 이유로 별도의 개혁이 전개되고 있었다. 14세기 옥스포드의 학자인 위클립이 일으킨 개혁의 파문은 보헤미아의 개혁자 허스를 통하여 루터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으나 막상 영국에서는 가톨릭 교회가 주도한 정치적 여건으로 개혁이 진전되지 못하였다. 독일에서 일어난 루터의 개혁사상이 영국에서 문서로 소개되자 헨리 8세는 이를 글과 힘으로 분쇄하여 천주 교회의 교황으로부터 "믿음의 옹호자"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그러나 헨리 8세는 교황이 자신과 스페인의 왕녀요 죽은 형의 미망인인 왕후 캐더린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자, 1534년 영국 교회를 로마카톨릭으로부터 독립시켰다. 이리하여 성공회의 모체인 영국 국교회가 탄생했으나, 머리가 바뀐 것 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루터파 개혁자인 대주교 크랜머는 헨리 8세와 그의 아들 에드워드 4세를 도와 칼빈의 개혁 신앙을 흡수하여 국교회를 크게 개혁해 나갔다. 그러나 헨리 8세의 가톨릭 왕후 캐더린이 낳은 딸 메리가 왕위에 오르면서 개혁은 역전되어 개혁신앙을 가진 3백명의 학자와 성직자가 화형에 처해졌고 8백여명은 대륙으로 피난했으며 1,200명의 성직자들은 직분을 빼앗겼다. 경건한 학자요 감독이었던 리들리와 라티머는 가톨릭 화체설과 이교의 제사 방식인 미사 예배 형식을 끝까지 반대한 죄로 1555년 10월 16일 화형에 처해졌다. 집행 전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오래 기억되고 있다. "리들리 선생, 용기를 가지고 사내답게 처신합시다. 오늘 우리는 확신하는 바 하나님의 은혜로 결코 꺼지지 않는 불을 영국에 붙이게 될 것이요."


화형이 두려워 개혁 신앙을 취소했던 크랜머 대주교도 다음 해 자신의 개혁 신앙을 재천명한 뒤 화형주에 올라, "교황은 그리스도의 적이요, 그의 거짓 교리와 함께 적 그리스도로서 그를 거절한다"고 선언한 다음, 지난 날 개혁신앙 포기를 자술했던 오른 손을 먼저 불 속에 넣어 태우면서, "이 손이 범죄하였도다"라고 부르짖으며 불꽃에 사루어졌다.


이러한 뼈저린 희생을 치루며 지켜온 한가닥 한가닥 개혁 신앙의 귀중함을 망각하고, 성서적으로 명백한 오류임을 깨닫고도 개혁의 의지를 상실한 채, 신앙적 양심에 아무 부담도 느끼지 않고, 개혁을 위한 어떠한 희생도 원치 않는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은 진정한 종교개혁의 후예들인가? 오늘날 누가 과연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진리의 맥을 이어 가기 위해 일어설 것인가?

8. 칼빈주의 개혁 신앙의 진수, 청교도


1558년에 즉위한 메리 여왕의 이복 동생 엘리자벳 여왕은, 자신을 합법적인 후사로 인정치 않는 교황권에 맞서 살아남기 위하여 정치적 이유로 개혁 신앙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 하에서 지난 날 대륙으로 피신했던 개혁자들이 대부분 칼빈주의 개혁신앙을 가지고 속속 영국으로 귀국하였다. 카톨릭 신앙에 칼빈과 루터의 개혁신앙을 혼합한 국교회 신앙에 만족하지 않고, 이를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철저히 개혁하여 순결하게 하려는 칼빈주의 청교도들이 이들로부터 일어났다. 1648년 칼빈주의 개혁신앙의 헌장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구성을 주도한 것도 청교도들이었다. 영국에서 진리의 맥은 청교도들이 이어갔다.


그들은 이교적인 예배의식, 사제들의 복장,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각종 제일들, 사제와 신부의 면죄 행위, 십자가 사용, 대부모 제도의 폐지와 함께 성일로 간주된 일요일의 철저한 준수 등을 요구했다. 그들은 교황 대신 교회의 머리가 된 국왕이 감독들을 앞세워 교회를 다스리는 성공회의 감독제도를 반대했다.

9. 청교도 신앙의 진수, 회중교회


영국의 국왕이 머리로 남아있는 영국 국교회가 완전한 개혁을 받아들일 전망이 어두워지자, 영국 국교회를 떠나 완전한 분리를 원하는 보다 철저한 청교도들이 1581년 캠브리지 출신의 지도자 브라운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영국 국교회로부터 "분리주의자들"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는데, 이들 청교도들은 국왕이 머리가 된 국교회를 부정하고, 여러가지 속박을 가져오는 칼빈의 장로제도도 배제하고,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언약으로 연합된 회중이 자율적으로 목사 등 지도자들을 선출하고, 성경에 의하여 계발된 신앙양심의 판단에 따라 믿음을 행사하도록 촉구했다. 이리하여 칼빈주의 청교도 신앙의 진수에서 최초의 회중 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10. 회중 교회의 장자, 침례 교회


엘리자벳 여왕 이후의 영국 왕들도 국교주의를 고집하며 분리주의 회중파 청교도들[회중교]에 대한 핍박이 계속되자, 대부분의 신자들은 고국을 떠나 보다 나은 신앙의 자유가 있는 홀랜드로 피난했다. 당시 영국의 게인스보로에 있던 일단의 회중파 청교도들은 국교회의 목사에서 개종한 스미스 목사의 지도 아래 1608년 홀랜드의 암스텔담에 정착했다. 그들은 거기서 홀랜드의 재침례파인 메노나이트 신자들과 교제하면서 그들의 경건한 생활에 감명을 받았으며, 동시에 가톨릭의 의식인 유아세례가 비성서적임을 깨닫게 되었는데, 1609년 스미스 목사는 자신을 비롯하여 동료 헬위스 등 36명에게 침례를 줌으로써, 침례를 베풀고 회중이 교회를 다스리는 최초의 침례교회가 홀랜드에 세워졌다. 그들은 1611년 영국으로 돌아와, 1612년 영국에서는 최초로 런던에 침례교회를 세웠다. 이처럼 최초의 침례교회는 분리주의자로 불리우던 청교도들의 모임이었던 회중교회에서 시작되었다.


침례교회는 17세기 영국의 신앙 부흥과 신대륙에서의 신앙과 양심의 자유 등 개신교 신앙 정착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복음을 설교한 죄로 12년간 옥살이를 하며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 흑암과 빈곤의 대륙 인도 선교를 위해 몸을 사룬 윌리암 캐리, 신대륙 미국에 신앙과 양심의 자유의 원칙을 심어준 로저 윌리암스, 구속사적인 재림운동을 일으켜 세상을 각성시킨 윌리암 밀러 등이 모두 자랑스런 침례교인들이다.


오늘날 미국에만도 2,900만의 신자를 가진 최대의 교파인 침례교는 다른 개혁 교회들처럼 고정된 신앙고백이 없이 신자들이 계발된 신앙양심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고 확신한 바대로 살도록 권장하고 있어 새로운 진리에 대해 개방적이다. 침례교의 기본적인 교리는 일반 개신교와 같지만, 그 밖에도 (1) 유아세례와 물을 뿌리는 세례를 비성서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물에 잠기는 침례만을 인정하며, (2) 회중제도의 교회조직과 (3) 국가와 교회의 완전 분리, (4) 개인의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극도로 존중히 여기는 점들은 루터나 칼빈 등이 추진한 개혁을 더욱 진전시켰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 근원에 재침례파의 신앙이 포함되어 있음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러한 침례교의 근원으로부터 후에 종교개혁의 절정인 안식일 진리를 발견한 제칠일 침례교회가 탄생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11. 회중 교회의 장녀,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


영국 국교회 목사였다가 개종한 경건한 지도자 로빈슨 목사의 지도를 받던 일단의 회중파 청교도[회중교]들은 1609년 핍박을 피하여 홀랜드로 건너가 레이든에 정착했다.
그러나 거기서도 생활의 안정이 어려워지자 신앙의 자유를 찾아 국왕도 없고 교황도 없는 땅인 신대륙 미국으로 건너갈 결심을 하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1620년 9월 평신도 지도자 브루스터의 인도 아래 102명의 신자가 돛배인 메이플라워 호를 세내어 위험한 항로인 대서양을 건너 11월 21일 마사추세츠주의 플리머스 항에 도착했다. 그들 중 절반은 추위와 질병으로 첫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갔는데 이들이 바로 미국의 건국 조상이 된 "필그림 파아더즈"들이다. 회중교회가 신대륙에 출가시킨 위대한 맏딸이었다.

12. 청교도 운동에서 시작된 십계명의 회복


16세기 후반에 출현한 청교도들이 창조한 새 역사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들은 회중교와 침례교의 산모가 되었으며, 신대륙에 이룩한 신앙과 양심의 요람인 미국을 건설한 조상을 낳았다. 그뿐만 아니라 청교도들은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우며, "역대의 파괴된 기초"인 안식일을 다시 "수축"하는(사 58:12, 13) 역꾼이 되었다.


청교도들은 진지한 성경 연구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언약을 중시하게 되었으며, 율법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임을 이해하게 되었다(출 19:5,6). 그리고 그 언약의 내용인 십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언약 유지의 수단으로서, 선택이 아니라 의무임을 깨달았다. 또한 인간의 죗된 본성은 율법(계명)을 기뻐하지 않지만(롬 7:19, 20) 성령으로 거듭난 마음은 율법(계명)에 순종함으로 속박이 아니라 참다운 자유를 누릴 수 있음도 깨달았다(약 2:12). 왜냐하면 십계명은, "애굽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출 20:2) 후에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십계명을 언약의 내용으로 이해하게 되자, 언약을 보증하는 인 곧, "표징"이 되는 안식일의 의미와 중요성을 비로소 올바르게 깨닫게 되었다(출 31:13,16,17). 청교도들은 진지한 성경연구를 통하여 마침내 칼빈의 가르침처럼, 주일 중 하루가 특별히 거룩해서가 아니라 "교회 중에서 질서를 보존함에 필요한 방도로서 그 날을 지킨다"는 해석이 성경에 어긋남을 깨달았다. 그들의 조상보다 더 밝은 빛을 가진 자손이 태어난 것이다.
이러한 확신은 청교도 지도자 바운드의 저술과 가르침에 나타나 있다. 그는 사람이 범죄하기 전인 창조시에,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창 2:3)다는 말씀과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출 20:10)이라고 선언된 십계명의 내용을 상기시켰다. 그는 또한, "주님과 그의 사도들이 스스로 실천함으로 그 날을 일으켜 세웠"음을 상기시키고,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도 안식일이 필요했을진대, 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바된 세상은 더욱 더 안식일이 필요하다"고 설파했다. 그리하여 청교도들은 일요일을 칼빈의 가르침처럼 단순히 예배하는데 편리한 하루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거룩한 날로 믿고, 주일에는 각종 오락을 금하고 속된 일을 삼가는 등 성수 규정까지 마련했다. 그들의 안식일 준수는 오늘날 한국의 보수적이고 경건한 고신 계통의 장로교 신자들의 주일 성수와 흡사하다.


자신들이 깨달은 만큼의 진리를 옹호하고 실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 청교도들은, 개신교라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계 3:1)였던 종교개혁 시대를 나타내는 "사데[교회]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 명"(계 3:4)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역사와 진리의 맥은 언제나 이 몇 명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계승된다는 사실을 다시 보게 된다. 지금 받은 빛과 진리에 충성하는 사람에게만 더 크고 온전한 빛과 진리가 주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16세기의 청교도들은 칼빈의 한계를 벗어나, 회중교회를 통하여 그들의 가문을 잇는 또 다른 자손인 침례교에서 17세기에 참된 제칠일 안식일을 쉽사리 싹티울 수 있도록 터전을 마련하였다.

13. 침례교회의 상속자, 제칠일 침례교회

마침내 아침이 밝아왔다. 일요일을 제칠일 안식일로 믿고 성수하는 등 받은 바 빛에 충실하며 최선껏 살아온 청교도들에게 보다 밝은 참 빛이 이르러 온 것이다. 영국 국교회를 떠나 회중파 청교도 목사로 활약하던 트래스크는 1616년 런던의 밀 야드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던 중 그를 따르던 회중 가운데 한 사람인 잭슨에게서 제칠일 안식일을 소개받고 상당수의 회중과 함께 안식일을 준수하게 되었다. 결과로 1617년 밀 야드 교회는 회중제도를 유지하며 유아세례를 부인하고 제칠일 안식일을 준수하는 최초의 제칠일 침례교가 된 것이다.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극히 존중하고, 각 사람이 성령의 인도로 계발된 양심을 따라 자유롭게 성경을 연구하고 스스로의 믿음을 지켜 나가며, 신자에게 물에 잠기는 침례를 베푸는 등 정통 침례교의 모든 신조에 충실하면서, 성경상의 제칠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제칠일 침례교야말로 침례교가 낳은 훌륭한 맏아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단으로 고발된 트래스크 목사는 혹독한 고문과 해상 감옥에서의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신념을 굽혔으나 그의 회중은 흩어지지 않았다. 그의 아내 도로시는 16년간의 옥고를 치르면서 참으로 고결한 신앙을 지키다가 옥사하고 말았다.


역사의 기록에 남은 밀 야드 제칠일 침례교의 두번째 목사는, 영국의 세 국왕,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와 2세의 궁중 의사였던 챔블린이었다. 제3대 목사는 제임스였는데, 그는 1661년 10월 19일 안식일 설교 중에 체포되어 다음 달 26일 교수형에 처해진 뒤, 목을 잘라 장대에 꽂은 뒤, 시무하던 밀 야드 교회 뜰에 전시하여 안식일 준수의 댓가로 위협했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선(계 12:17) 사단의 분노가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표현된 것이다.


다음 해인 1662년 개혁 신앙 때문에 투옥되었던 영국 국교회 목사 뱀필드는 개인적인 성경연구 끝에 제칠일이 성서적인 안식일임을 깨닫고, 9년 간의 복형기간 동안 계속 전도하여, "제칠일 침례교 도르체스터 감옥교회"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출감 후 또 다시 안식일을 가르친 죄목으로 1684년 70세의 고령으로 춥고 습한 뉴게이트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14. 미국으로 이민 간 네째 계명의 빛

순교자의 죽음은 언제나 진리의 씨앗이 되어 더욱 불어나게 마련이다. 영국의 뱀필드 목사가 목회하던 교회로부터 나온 열성있는 신자인 멈포드가 일어나 안식일 기별을 가지고 1664년 미국의 로드 아일랜드로 건너갔다. 그는 그 곳에 있는 침례교에 나가며, 십계명의 불변성과 제칠일 안식일 준수를 열심히 가르친 결과 몇 명의 청교도 신자들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 곳의 침례교회마저 그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핍박하자 1671년 12월 23일 멈포드 내외를 비롯한 7명의 신자들이 거기서 나와 신앙 공동체의 언약을 맺고 신대륙에서 첫번째가 되는 제칠일 침례교를 로드 아일랜드의 뉴포트에 세웠다. 마침내 신대륙에 안식일의 진리가 뿌리를 내린 것이다. 제칠일 침례교는 1840년대 중반에 일어난 초교파적인 재림운동의 결과로 형성된 일단의 재림신자들에게 그들이 목숨을 바쳐 수호한 안식일 진리를 전달함으로써, 안식일 계명의 빛은 계속해서 전수될 수 있었다. 이러한 등대지기들의 충성과 희생을 통하여 16세기에 일어난 미완성의 종교개혁을 마무리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마지막 시대에 이루어 질수 있게 되었다.
 

종교 개혁의 마지막 주자 (현대 종교 개혁 -결론)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 내용은 노아 홍수시대 이전부터 거슬러 올라가 믿음을 지켜온 노독들의 생애와 그 신념에 대하여 기록해 놓은 것이다. 이 믿음 장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믿음으로 노아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모세는...". 그들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었고 믿음으로 타락과 부패를 헤치고 나아간 자들이었다. 그들은 믿음으로 승리하였고 믿음을 가지고 핍박과 죽음을 당하였다는 것이다. 이번 호의 내용에 비추어 히 11:33-40의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 보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란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위의 성경절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싸워온 선조들의 생애를 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기에 충분하다. 믿음을 가진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행하는 것이다. 믿음은 어떤 논리를 인정하는 동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살아 있는 삶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믿음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다. 믿음은 능동적인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진리가 타협되거나 바뀌어지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지 아니한다. 종교 개혁을 가능케 한 것은 개혁자들이 가진 바로 이 살아 있는 믿음이었다. 알면서도 가만히 중립을 지키고 있는 자들은 사실상 믿음을 가졌다고 볼 수가 없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말하고 있는 한가지 중요한 사상이 있다. 그것은 이 지구 역사의 믿음의 싸움에 있어서 마지막 주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 주자가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이 믿음의 싸움이, 아니 계속되어 가고 있는 종교개혁의 사업이 온전히 이루어 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목숨을 다하여 진리를 발견하고 내세우며 보존하여 왔다. 그들은 진리를 위하여서라면 모든 것을 버리고 희생하는 일을 즐거이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으로 그 결과를 바라보기만 하였지 아직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모든 믿음의 싸움의 결과와 끝은 세상의 종말에 살고 있는 마지막 주자인 우리들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11:40절 하단).


빛이란 점진적인 것이다. 아침의 태양이 서서히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잠 4:18). 하나님을 알기 시작한 자가 단번에 진리를 다 꿰어 차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 요구된다. 진리를 이해해 나가는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예수께서 세워 놓고 가신 초대 교회는 그 진리를 알고 실천하는 면에서 완전하였었다. 그들은 온전히 회개하였으며 성령을 충만히 받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 후예들에게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돈에 대한 사랑과 권력에 대한 다툼과 정치와 타협하고 진리를 쉽게 변조시켜버리는 일들이 난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서서히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 당시의 사람들은 채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그냥 지나쳐 버린 경우들이 많게 되었다. 그러나 영적으로 깨어 있는 주의 종들이 그때마다 종교 개혁을 부르짖으며 전쟁을 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관한 것이었고 또한 그 진리들로 말미암아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깨닫게 되며 구원을 얻게 되는 기초석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중세기에 진리는 그 빛을 잃게 되었다. 이 세상은 암흑 속으로 깊숙하게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한 위기 때에 하나님께서 개혁자들을 일으키신 것이다. 그들의 출현도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서서히 밝음을 비추이기 시작하였다. 인간의 역사의 흐름과 그 성정은 진리를 단번에 소화하거나 개혁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아울러서 진리의 원수인 사단의 방해와 공격이 또한 큰 변수로 늘 작용해 오고 있지 않은가!
이 종교개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진리의 빛이 온전한 분량에 도달 할 때까지 계속 전진되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이 시작한 진리의 개혁은 그 후예들에게 와서 중단되어 버렸다. 중단은 후퇴를 뜻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