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종교개혁사

2008. 8. 8. 14:06목양자료/1.기독교자료

종교개혁사




제1장 구원을 찾는 한 수도사

교회를 개혁해야 했던 운동이 출발한 곳은, 16세기 초, 인구 2천명에 프리드리히가 최근 세운 대학을 가진 작은 촌락에 불과했다. 루터는 이 종교개혁 운동의 창시자로 이 운동의 지배적 인물이었다.

1. 개혁적 발견

마틴 루터(1483-1546)는 아이즈레벤에서 본래 농부출신으로 열심히 일해 비교적 유복하게 된 한 광부이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막데부르크와 아이제나흐에서 예비 수업과정을 마친 후, 1501년에는 에르프르트 대학에 입학하여 그곳에서 인문과학을 공부하였고, 1505년 1월 7일에 그는 석사 학위 시험에 합격했다. 여기에서 유명론자들의 전통에 따라 아리스텔레스의 철학을 배웠다.
석사 시험을 치르고 나서, 그는 법률학을 공부하는 동시에 인문과학부에서 강의를 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루터에게는 그의 생애에서 중대한 국면을 맞게 되는데 그것은 다름아니라 1505년 여름에 천둥과 폭우 속에서 St.Anne에게 수도사가 되기로 서원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에르푸르트에 있는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러부터 2년이 지난 다음, 그는 사제에 임명되었으며, 계속해서 수도원의 연구과정에 따라 신학을 공부했다. 일년 동안 비텐베르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대한 강의를 마친 1509년에, 그는 이른바 [조직신학의 교사]가 되어, 피터 폼바르드의 조직신학에 관한 강의를 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1510년, 루터는 어거스틴 수도회 안에서의 논쟁과 관련된 문제를 처리하기 위하여 로마로 갔다가, 당시 로마를 순례하고 온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 처럼  그곳의 타락상을 보고 충격을 받지만 신앙은 흔들리지 않은채, 에르푸르트로 돌아와 얼마동안 있다가 1511년 비테베르크로 옮기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계속해서 슈타우피츠의 후원과 지도로 학문연구와 설교에 헌신하게 되는데, 그 다음해인 1512년에  그는 신학 박사의 학위취득과 함께, 대학에서 성경학을 강의하는 정식 교수로 부임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강의를 통해서 시편(1513-1515), 로마서(1515-1516), 갈라디아서(1516-1517), 히브리서(1517-1518), 그리고 다시 시편을 주석했다.
루터는 수도원에 들어간

이후로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하여 고통스러운 투쟁을 했다. 그리하여 그는 교회의 규율과 전통에 충성을 다했다. 그러나 자신이 바랐던 평화를 얻지 못했다. 그는 선행을 행하되 그리스도께서 그 선행을 보고  호의를 베풀 때까지 해야 할 것으로 믿었다. 그리하여 그는 금욕적인 행위에 복종하면 할수록 자신의 공로가 불완전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충분한 공로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 죄의 용서를 부여해 주었어야 할 회오와 완전한 회개가 그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못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시험해 보고 나서 스스로가 무능하다고 여겼다.
결국 자신의 구원을 의심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페험하지 않는 한, 버림받은 자가 아닌지를 스스로 물어야 했다.
여러가지 치료를 시도했다. 어거스틴, 베르나르, 제르송 등은 그에게 "비교적 위안"을 주었다. 슈타우피츠도 어느 정도 위안을 주었다. 그러나 루터에게는 그의 비극적인 죄의 개념과 하나님에 대한 지고한 개념에 상응하는 해결책이 필요했다. 루터는 오랜 과정을 거쳐 그 해결책을 찾아야 했고 그것은 결국 로마서 1장 17절에서 나타났다.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죄에 매여 있는 인간을 그의 사랑으로 감싸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총안에 수납된 신자는 의인이자 동시에 죄인이다. 그가 의인인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죄를  전가하시길 거부하시고 믿음을 통해 그를 의의 자리에 두시기 때문이다. 그가 죄인인 것은 악을 원함이 그 안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개혁적인 발견의 시기를 대답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중에서 1518년 봄, 혹은 여름으로 많은 연구가들은 본다. 그는 루터의 발견이 "말씀의 신학"의 발견이라고 여긴다. 베텐베르크의 수도사가 로마서 1:17을 통해  배운 것은 "의가 복음안에 계시되어 있다"는 사실이고 이 "복음 안에서"라는 말이 그때까지 풀리지 않다가 그 의미를 갖고 나타났다는 것이다. 어쨌든 많은

의견이 있지만 모든 역사가들이 공통적으로 확실히 판단을 내리는 한가지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루터의 발견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발견은 루터가 자신의 문제의 열쇠를 보았다간 놓치고 하는 수많은 접근적 시도 끝에 얻어진 것이었다.

2. 면죄부 논쟁

1516년 10월 31일, 루터는 공개적으로 처음 한 설교에서 면죄부 문제를 취급했다.
그는 면죄부 문제가 양무리들에게 야기한 끔찍한 결과들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피상적 경건을 조장했고, 기독교인들을 구원의 참된 근원에서 멀어지게 했다.
교회는 면죄부라는 수단을 통해서 죄인을 징벌과 허물에서부터 건져낸다고 주장을 했다. 그 결과 단순한 사람들에게 교황청의 면죄부는 완전 용서와 동의어가 되었다. 혼동은 심각했다. 식스투스4세 교황(1476)이후 면죄부가 연옥의 영혼들을 위해서도 팔릴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면죄부에 대한 첫 설교를  한지 일년 후, 루터는 만성절에 이 문제를 다시 취급했다. 당시에 레오 10세가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 증축을 위해 면죄부 판매령을 1515년에 재가하고 면죄부의 판촉 설교가 독일 북부 지방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루터는 신학자들을 일깨워 이 문제를 숙고하게 할 필요를 느끼고, 1517년 10월 31일 "면죄부 효능"을 묻는 95개 조항을 작성한 것이다.
루터는 95개 명제에서 다만 교회가 이제까지 가르쳐 왔던 것을 상기해보자는 제안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저자의 의도와는 어긋나게 로마의 재정을 위해  신앙을 이용 착취했던 방법에 분개했던 모든 이들에게 이 95개 명제들은 일종의 해방 선언문과도 같이 등장했다.
이내 종교재판의 책임을 부여 받고 있던 마인즈의 대주교와 도미니크 파는 루터를 로마에 고발했으며, 독일에서는 논쟁이 벌어졌다. 1518년 초 테첼이 반박하였고 엑크가 비난했다. 이에 루터도 응수했다.
한편 레오10세는 어거스틴 수도회의 임시 총회장이었던 가브리엘 델라 볼타에게 임무를 부여하여 슈타우피츠로 하여금 그 밑에 있는 부하를 회개시키도록 했다. 그러나 루터는 자신이 진리에서 떠나지 않았음을 확신하고 철회를 거부했다. 이렇게 해서 1518년 4월,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어거스틴

참사회 앞에 불려 나갔다. 그곳에서 그는 "역설"이라는 이름으로 두가지 논제들을 제출했다. 면죄부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다만 칭의론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한 뒤 스콜라 철학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정당화 했다. 그러나 그는 심문자들을 설복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젊은 수도사들 가운데서 열렬한 제자들을 얻었는데 그중에 마틴 부쳐와 요한 브렌즈가 있었다.
하이델베르크 참사회는 95개 명제가 터뜨린 논쟁을 종식시키지 못했다. 교황청 재무국에서 행한 조사에서 루터는 1518년 7월 초 두달 안으로 로마에 출두하라는 소환을 받는다.

3. 로마와의 결별

교황청의 신학자들이 루터가 그들 앞에 출두하기도 전에 벌써 적대감을 보였기 때문에, 루터는 현자 프리드리히에게 로마에 중재하여 독일에서 재판을 받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결국 레오 10세는 현자 프리드리히의 요구를 받아들여  카제탕 추기경으로 하여금 국회가 열리고 있던 아우그스부르크에서 루터의 말을 들어 보고 그 견해를 취소케 하되 그렇지 않을 경우 정죄된다는 사실을 알리게 했다. 1518년 10월 12일 루터는 카제탕 앞에 출두했다. 교회와 성례들의 문제에 대해 질문을  받고 루터는 성경의 증거에 의지하는 한 교황에게 그의 오류를 입증할 수 있다고 여겼고, 또한 성례들의 효과는 받는 자의 신앙과 관계되어 있다고 말하며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심각한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현자 프리드리히의 보좌관들은 그로 하여금 몰래 아우그스부르크를 빠져 나가도록 해주었다. 카제탕의 임무가 실패하자 교황청은 재부 담당 샤를르 드 밀티즈를 시켜 군주로부터 루터를 인도받아 오게 했다. 그러나 이 또한 계속되는 논쟁으로 인하여 실패하게 되었다. 엑크가 1518년 말에 12개의 명제를 출간하여 루터를 공격하였다. 따라서 루터는 교황의 권한에 대한 해설서를 삽입한 13개 논제를 출판하였다.
이 논쟁이 1519년 7월 라이프치히에서 열렸다. 가장 큰 쟁점은 루터가 13번째 논제에서 문제시한 교황의 최고권이었다. 루터는 교회란 그리스도께서 그 머리이시기 때문에 지상의 우두머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이 교회는  교황제의 반석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반석 위에 서 있다고 주장했다.
곧 그는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의 합법적 권위인 성경의 권위밖엔 없음을 주장한 것이다.
교황청은 루터에 대한 조사를 재개했다. 이 조사가 진행되는 중 루터는 [로마교황제에 대하여]라는 소논문을 내놓았고, 한방 먹은 교황청은 1520년 6월 15일 엑수르게 도미네라는 교서를 공포했는데 이 교서에 따르

면 루터는 60일 내로 잘못을 인정치 않으면 파문 되리라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루터는 폭 넓은 논쟁을 벌릴 결심을 했다. 인문주의에 가담한 수많은 인사들은 루터가 로마의 독재로부터 독일을 건지는 데 앞장서기를 바랐다. 루터는 1520년 8월, 이들에게 [기독교 국가 치료에 대한 독일 기독교 귀족에의 호소]문을 보냈다.
이어서 그는 특별히 신학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1520년 10월에 간행된 [교회의 바벨론 포로]를 썼다. 여기에서 그는 교회가 그 자유를 상실했고 성례들을 사제들의 손에서 노예화의 수단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성례에 대해 새롭게 이해할 것을 제안했다.
결국 루터는 엑수르게 도미네 교서를 읽고 분노 섞인 고통을 느꼈으며 교황이 적그리스도라고 말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동기의 진지함을 로마에 증명해 보이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다.
[기독교인의 자유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써서 1520년 10월에 레오 10세에게 보냈다. 여기에서 그는 "기독교인은 가장 자유로운 인간이다. 만물의 영장인 그는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또한 기독교인은 매사에 있어서 종들 가운데 가장 잘 섬길 줄 아는 자이다. 그는 모든 이에게 종속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에게 가해진 위협을 없애지 못했다.
칼5세와 협력하여 로마는 루터를 진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루터는 오히려 공의회의 소집을 다시 요청하고 엑수르게 도미네 교서를 공개적으로 불살랐다. 로마는 1521년 1월 3일, 새 교서를 내려 루터와 그 일당의 파문을 선포했다. 결별은 이뤄졌다. 그러나 그것은 "서구 기독교 국가들의 절반이 출애굽"하는 결과를 야기하고 말았다.

제 2 장  루터의 종교개혁

사실 루터는 분리할 생각도 없었고 또 분파의 창시자적 기질도 없었다. 보편 교회의 통일성을 누구보다 귀중한 것으로 여겼으며, 그가 원한 것은 이 보편  교회에 대한 개혁이었다. 그가 자기의 이상에 동조한 공동체들에게 하나의 조직을 부여할 생각을 한 것은 수년이 지나고 난 뒤였다.

1. 비텐 베르크 운동

수년의 전투기간 동안, 루터는 비텐베르크를 복음주의 교리의 보루로 삼았다. 여기에서 그는 칼슈타트, 니콜라, 요나스, 부겐하겐, 스팔라틴, 멜랑히톤을 자신의 입장에 가담시키거나 그들의 존경과 우정을 획득하였다.
그러므로 새 황제 칼5세가 주재한 보름스 국회에 루터가 불려 갔을 때,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세속당국은 민중봉기가 두려워 로마의 종교재판에 넘기기를 거부하고, 그에게 다시 한 번 철회의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위험의 경고를 듣고서도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기 위하여 갔다.
1521년 4월 17,18일 양일에 루터는 국회 앞에 소환되었다. 여기에서 루터는 성경의 증거에 의해 자신의 오류라고 확신케 되지 않는 한, 자신의 작품들을  철회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칼5세는 분노하였다. 하지만 군주들에 의해 본의 아니게 루터를 굴복시킬 목적에서 계속적인 대화를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루터는 4월 26일 황제가 발급해준 통행증을 휴대하여 보름스를 떠났다.
현자 프리드리히는 루터에게 닥친 위험을 이미 예상했다. 그는 도중에 루터를 빼돌려 바르트부르크 성에 피신시켰다. 이곳에서 루터는 10개월간의 은둔기간 중에 그는 [시편 연구]를 계속했고, [성모 마리아 송가 주석]을 완성했다.   또한 [교회 설교집]을 작성하는 한편, [신앙고백에 대하여]를 써서 의무적 고백을 반대하고 자발적인 고백을 권장했다. 그리고 비텐베르크의 자기 제자들의  관심사에 대답하는 [수도원 서약에 대하여]와 [개인 미사의 폐지에 대하여]를 쓰기도 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약성서 번역에 전념하였다.
한편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 머무는 동안, 개혁운동의 흐름이 젊고 수줍은 멜란히톤의 태도에서 벗어나 급진적인 칼슈타트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는 1521년 10월, 빵과 포도주 두가지로 성찬을 거행했다. 그리고 성탄일에는 독일어로 미사를 드렸다. 1522년 1

월, 교회의 성상들을 없애고 나서 "비텐베르크시의 규칙"을 포고했다.
결국 2월에 그는 기독교 백성이 스스로 통치할 권리가 있음을 선포하였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 계시를 받았다는 두 명의 방적공들의 영향을 받아 조명주의 경향을 기울었고, 이것은 그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의 권위보다 성령의 내적 운동들을 더 좋아하게 하였다.
루터는 자신이 시작해 놓은 이 운동의 전개를 불안하게 보다가 은신처를 떠나 비텐베르크의 의회와 대학 호소에 응하러 갔다. 그 시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설교를 시작했다. 이 영향으로 칼슈타트가 너무 빨리 해놓은 혁신들이 다시 거부되었다.
문제들이 어느정도 해결되자, 루터는 로마의 신학자들에 맞서서, 그리고 예언자들에 맞서 새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여기 저기 다니며 설교를 하였다. 또한 밀도있는 작품활동을 계속하여 [교회 사역을 세움에 대하여]와 [기독교 회중이 교리 문제를 판단하고, 설교자들을 청빙, 위임, 면직할 권리와 권세를 가짐에 대하여]라는 논문들을 출판하였다.

2. 결정 적인 거절들

라이프지히 논쟁 직후, 후텐을 선두로한 소 귀족 대표들은 루터를 로마의 보호에서 해방되어 쇄신된 독일의 선구자로 존경했었다. 이러한 오해는 기사들의 반란이 터지자 잘 드러났다. 그들은 이내 패퇴하였다. 이들이 루터에게 그들의 운동에 가담해 줄 것을 요청했을 때, 루터는 자신의 대의명분을 그들의 것과 일치시키를 거부했다. 루터에게 있어서 그가 수호하려 했던 기독교인의 자유는  국민(국가)의 자유와 혼동될 수 없었던 것이다.
2년 후, 루터는 농민들이 자신들의 대의명분을 지지해달라는 요구를 또 다시 거부했고 이 결과는 심각했다. 반란이 지나가는 곳은 어디나 폐허가 되었다.  군주들의 진압도 또한 끔찍했다.
농민들의 개혁안에 의견을 제시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루터는 [슈바벤 농민의 12조항에 대한 평화의 촉구]라는 글을 써서 대답하면서 그는 기독교인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연결시키기를 거부했다. 이런 태도는 자기들의 사회적 조건의 변화를 기대했던 사람들을 깊이 실망시켰다.
루터는 목숨을 걸고 튀링겐의 반도들과 접촉을 시도한 뒤, [범죄적이고 약탈적인 농민집단을 반대함]이라는 맹렬한 비방문을 작성하였다. 이 비방문은 시골 주민들 가운데 그를 지지했던 수많은 민중들을 잃는 결과를 낳았다. 반면에 그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군주들 편에서 그에 대한 신망이 커져갔다.
농민 봉기 그에게 가져온 염려에서 해방되자, 루터는 환속한 수녀 카드린 폰 보라와 결혼한 후, 1525년 말, 에라스무스 쪽을 향하여 그와 그의 찬미자들 모두를 거부한다고 통고할 수 있었다.
에라스무스는 카톨릭의 압력에 의해 1524년 [자유의지를 혹평함에 대하여]라는 글을 출간하여 루터를 공박했다. 이에 루터는 [노예 의지론]에서 응전했는데 이 작품에서 그는 [오직 믿음으로만]과 [오직 은혜로만]의 교리를 설명함으로써, 인간의 죄의 심각성을 들춰냈다.
이처럼 1522년에

서 1525년까지 "자신의" 복음에 충실하였던 루터는 기독교인의 자유를 국가(민족)적 자유, 정치적 자유, 그리고 자유의지와 혼동시키기를  거부했다.
그는 이 세번에 걸친 거부를 통해 기사들의 민족주의, 농민들의 "사회중의" 그리고 기독교 인문주의와 결별을 한 것이다.

3. 복음의 파급과 변호

농민 전쟁이 끝나자 게오르그 폰 작센은 농민 폭동을 미연에 방지하고 국가들의 힘을 강화하기 위하여 중부와 북부 독일의 여러 군주들을 데쏘동맹에 집합시켰다.
1526년에 이 데쏘 동맹에 토르고 또는 고타 동맹이 맞섰다. 토르고 동맹의 회원들은 복음주의 신앙을 수호하는데 심려를 아끼지 않았지만, 또한 그들은  그때까지 불규칙적이었던 복음 신앙 전파에 질서를 세워야 할 것으로 여겼다.
이러한 조직을 위한 노력을 루터는 그다지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그가 군주들의 보호하에서 복음주의 교회들의 창설 문제에 망설이며 신중을 기하긴 했지만 결국 농민 폭동 때 교훈을 받아 자기의 힘있는 보호자들의 간청에 양보하고 말았다. 이러한 복음 메시지의 설교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세속 당국에 의뢰했던 이 결정은 심각한 결과를 가져왔다. 1525년 이전에는 자체의 힘으로 전개되던 "자생적 민중 운동"이었던 종교개혁이 농민 전쟁을 치루면서부터 군주들의 일거리가 되었고, 남부와 서남부에서는 도시의 문제가 되고 말았다.
복음주의 교회 조직의 첫 시도는 1526년 10월 홈베르크 대회 이후, 수도사였던 아비뇽의 랑베르의 도움으로 필립 폰 헤세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조직은 루터가 시기 상조요 신중치 못한 것으로 탐탁치 않게 여겼기 때문에, 헤세 지방에선 적용되지 못했다. 종교개혁에 가담한 군주들은 새로운 교회법을 만들어내기 보다는 루터의 제안을 고려했다. 다시말해 그들은 그들 국가들에서 복음의 이상이 승리하도록 하기 위해 감찰에 의지한 것이다. 첫 감찰이 실시되자 많은 교회 성직자들의 영적 비참함이 드러났고, 따라서 그들의 양무리들의 종교적 비탄이 들춰졌다. 멜란히톤은 그들을 위해 교육서들을 작성했고 루터도 이들을 염두에 두고 1529년 [대 소 교리문답]을 작성했다.
1526년 프랑소아 1세는 칼 5세와 싸우기 위해서 교황 클레멘트 7세와 제휴했다. 그러자 황제는 토르고 동맹

의 구성을 허용해야 했고, 슈파이어 국회에서(1526년 6월) 보름스 칙령의 적용 요구를 거부하고 새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교의 모든 자유를 군주들에게 허용할 것을 채택해야 했다.
이렇게 일시적 휴전이 체결됨으로 개신교 군주들은 "새" 복음 확산에 상당히 봉사를 했으나 이 휴전은 1529년 4월 슈파이어 2차 국회시, 매우 위협을 받게 되었다. 칼 5세는 보름스 칙령의 적용 뿐만 아니라, 차기 공의회까지 종교개혁의 확장을 중지할 것과 복음에 가담한 영토내의 카톨릭 예배 허용을 요구하였다. 국회의 참여자들은 대다수가 카톨릭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황제의 결정에 박수를 보냈다. 소수의 복음주의자들은 3년 전 슈파이어 국회에서 부여받은 자유를 위반하는 이 결정에 대해 항의했다(이 항의라는 말에서 종교개혁의 가담한 이들에게 <프로테스탄트>란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이 개신교 소수 가운데 군주들과 독일 고지대의 대표들이 있었지만 황제와 카톨릭 국가들의 세력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필립 폰 헤세의 선동으로 <프로테스탄트들>은 비텐베르크와 독일 고지대 사이에 존재하는 교리적 차이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여기에는 츠빙글리 및 스위스 프로테스탄트들도 포함되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이 계획을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수년 전부터 성찬에 대한 견해로 츠빙글리와 싸워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립 폰 헤세가 교리적 상호이해를 통해 카톨릭 세력에 저항할 수 있는 개신교 동맹을 준비하려는 열망에서 1529년에 독일과 스위스 신학자들을 마르부르크에 소집하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양측은 논쟁 대결을 벌렸다.  그러나 3일간의 힘든 대화 끝에, 두 파는 서로 용납할 수 있는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헤어졌다.
마르부르크 회담의 실패는 필립 폰 헤세의 계획을 돕지 못했다. 오히려 더 상황이 심각해졌다. 그래서 칼 5세는 1530년 여름 내내 아우그르부르크에 국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스위스인들은 국회

에 참석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츠빙글리는 취리히에서 높이 평가되는 교리 설명서를 [황제에게 드리는 신앙의 지침]이라는 표제를 붙여 황제에게 보냈다. 한편 독일 고지데 도시들에서는 고유의 신앙고서인 [4도시 신앙고백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작센이나 헤센같은 독일 지방 국가들은 루터 대신에 멜란히톤을 그들의 해설자로 삼았다. 멜란히톤은 슈바바흐 헌장에서  영감을 받아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으로 알려진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다.
이처럼 평화적이고 능숙한 기교를 부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국회에 참석했던 가톨릭 국가들의 대표자들의 눈에 호의롭게 보이지  못했다. 그들은 엑크를 시켜 멜란히톤에게 응전을 하여 [카톨릭 논박]이 나오게 되었는데 이것을 칼 5세가 수정하여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에 대한 응답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멜란히톤은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옹호했고 칼 5세는 거부함으로 끝났다. 황제는 1530년 11월 19일 국회를 끝내면서, 프로테스탄트들에게 1531년 4월 15일 이전에 로마에 굴복하라고 경고했다.
위험에 직면한 복음주의 군주들과 종교개혁에 가담한 독일 고지대 도시들은 필립 폰 헤센과 작센의 요한의 지휘하에 서로의 동맹을 꾀화여 1531년에 슈말칼덴 동맹이 형성되었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황제는 개신교와 타협하여 1532년 7월 23일에 누렘베르크 휴전 조약을 체결했다.

4. 루터주의의 투쟁과 확립

누렘베르크 휴전 조약이 체결되던 때, 이미 독일 내부에 깊이 심어진 종교개혁은 유럽의 북부와 동부에 뻗어나가 있었다.
종교개혁이 전진을 계속하는 동안 조명주의가 다시 이번엔 화란과 독일 저지대에 모습을 보였다. 멜키오르 호프만이라는 수아브 모피상인이 앞장섰는데, 사람들은 자주 재세례파라는 칭호를 주었다. 호프만은 자신이 받았다는 계시에 항상 빠져 복음의 가르침에서 멀어졌다. 그는 세상의 종말을 1533년으로 예언하고 스트라스부르가 "새 예루살렘"이 될 것이라고 선포했다. 그러나 그는 스트라스부르 당국에 의해 종신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멜기오르파는 호프만이 투옥되자, 요한 마티스를 새 영적 지도자로  삼아 뮌스터가 예언들이 실현될 장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있지 않아 몰려 들었고 이들은 지배 계급에 불만을 품고 있던 직공들의 협력으로 권력을 탈취했다. 그러나 뮌스터의 주교가 도시를 공격했을 때, 열광적으로 저항했다. 1534년 부활절에 마티스가 탈출하다 살해당하였고, 1535년 6월 24일 밤중에 한 배신자가 도시의 문을 포위군에게 열어주어 주교와 군주의 연합군이 들어와 조명파들의 "공산주의 신정정치"를 종식시켰다.
뮌스터의 참변은 카톨릭이 보기에 비테베르크 운동의 결과들 가운데 하나로 보였으며, 또한 로마에 충실한 제국가들에게 "새" 신앙에 대한 적대감을 야기시키는 일이 되었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트들"은 그들과 뮌스터의 예언자들과는 전혀 공통된 점이 없음을 지적하였고, 루터는 1536년에 [세속 당국이 재세례파들을 육체적 형벌로 맞서야 할 의무]라는 논문을 쓰고, 칼뱅도 [왕께 드리는 서한]을 작성하여 프랑소아 1세에게 복음의 가담자들이 폭도도 혁신자들도 아님을 보이려 했다.
스트라스부쳐의 개혁자인 마틴 부쳐의 성찬의 문제를 위한 수고는 비텐베르크 협약으로까지 나아갔고, 루터주의의 영향력을 독일 고지대에 더욱 증가시켰다. 그리하여 1539년 종교개혁에 가담한 두개의 또

다른 국가들이 합류하였다.
그런데 종교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로마는 무슨 일을 했는가? 사실 로마는 프로테스탄트들의 갈망에 진정으로 응답해 주거나 그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폴 3세는 1537년 만토바에 공의회를 소집함으로서 보다 호의롭게 보였지만 개신교 제국가들이 참석하지 않은 이유로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개신교 제국가들이 슈말칼덴에서 보여준 강경태도는 가톨릭 제국가들로 하여금 1538년 "방어동맹"인 누렘베르크 동맹을 결성케 했다. 그러나 황제는 1539년 프랑크푸르트 휴전 조약 체결을 하여 신학적 대화를 통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연합을 장려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540년과 1541년 사이에 아그노, 보름스,  라티스본 회담들이 열렸다. 그러나 어떤 일치된 협약에 도달하지 못한채 회담들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로인해 독일은 두파로 계속 분열되어 긴장된 균형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1540년 개신교의 참피온인 필립 폰 헤세가 중혼을 함으로서 이 균형은 깨어지고 만다. 그는 황제 앞에서 1541년 6월 13일 슈말칼덴 동맹에 더이상  새 회원을 받지 않고, 또 외국 세력과 협정을 체결치 않겠다고 약속함으로서 자신의 범죄를 속죄하였다. 1543년 칼 5세는 영토을 확장을 하였고, 이때 프로테스탄트 제 국가들이 보여준 머뭇거림은 결과적으로 라인강 유역 지방에 종교 개혁을 확립시키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칼 5세는 여기에 만족치 못하고 개신교파를 분열시키고 종교개혁에 가담한 국가들을 끝내기 위하여 교황 폴 3세로부터 트렌트에서 공의회를 소집할 것을 약속 받아 1545년 3월 15일로 개회 날자를 정하고 소집을 하였다.
개신교의 참여를 바라지 않는 황제의 계산대로 개신교도들은 트렌트 회의를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였다. 이에 칼 5세는 1546년 슈말칼덴 전쟁을 터뜨려 슈말칼덴 동맹에 가담한 국가들을 처벌하고자 하였다. 전투는 결국

슈말칼덴 동맹이 사라지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모리츠 폰 작센이 황제에게 패해 무력해진 개신교 군주들의 선두에 선 독일 개신교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아우그스부르크를 점령하고 칼 5세를 인스브룩크에서 쳐부수는 개가를 올리게 된다. 이 승리로 인해 독일 개신교는 파사우 조약(1553년)을 통해 개신교들에게 다음 국회소집 때까지 관용을 베풀겠다는 약정을 얻어냈다. 다음 국회는 1555년 아우그스부르크에서 일어났고, 이 국회는 종교개혁에 대해 그동안 계속해온 투쟁들을 끝맺고 말았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내 새로운 세력에 의해서 위협을 받았는데 그것은 칼빈주의와 반동 종교개혁이었다. 이 두 세력의 등장으로 독일 내부에서 고유의미에서의 종교개혁 시기는 끝을 맺는다.


제 3 장 츠빙글리 및 부쳐의 종교개혁

종교개혁은 출발시 비텐베르크를 전파의 요람으로 가졌으나, 츄리히와 스트라스부르와 같은 곳도 중심지가 되었다. 이 두곳은 지리적으로나 역사적 이유들로 인해 큰 영향력을 끼쳤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스트라스부르와 취리히가 종교개혁의 세기에 무게있는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마틴 부쳐와 울리히 츠빙글리의 덕택이었다.

1. 츠빙글리와 츄리히 종교개혁

츄리히의 종교개혁은 본질적으로 울리히 츠빙글리의 작품이었다. 그는 1484년 1월 1일 토겐부르크의 작은 산골마을인 빌트하우스에서 태어났으며 재산이 좀 있고 많은 자녀가 있으며 교회와는 인연이 깊고 사회적 책임에 민감한 가정에 속해 있었다. 어린 시절 5년 동안 사제였던 삼촌에게 맡겨졌었다. 1498년 비엔나 대학에 등록하고 수년을 머물렀으며 1502년 바젤대학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문학사와 문학석사(1506)를 취득했다. 22살의  나이로 그는 대학을 떠나 글라루스의 신부 자격으로 교회 봉사를 시작했다.
이곳에서 그는 공부를 계속하였고, 1513년부터는 공적인 일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종군신부의 자격으로 노바라 전투와 마리그나노 전투에 참가했다.
그러나 그는 프랑소아 1세에게 스위스 군대가 패배한 뒤, 용병제도를 반대하고 중립을 권장했는데 이것이 교구신도들과의 마찰을 일으키게 되어 그는 글라루스를 보좌신부에게 맡기고 떠나 1516년 아인지델른에 설교자가 되었다.
많은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한 츠빙글리의 설교는 이내 아인지델른 밖에까지 명성을 높에게 했다. 그리하여 1518년 말 그는 추리히의 "성직자 교회의 설교자 겸 신부"로 임명되었고 1519년 1월 1일부터 그 직분을 수행했다. 그는 에라스무스적 의미에서 개혁 작업을 끌고 갈 결심을 하고, "연속 강해"원칙에 따라 강해설교를 견지했다. 또한 문학써클을 형성하여 신학과 헬라어를 연마했다.
그러나 얼마있지 않아 츠빙글리는 에라스무스 형태의 쇄신에서 결연한 개혁적 태도로 나아갔다. 1519년 페스트가 창궐했던 츄리히에 그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들어갔다가 이 전염병에 걸리고 나서 인간의 연약성과 은총의 전능성을 느꼈다. 그리고 1521년 그가 글라루스의 신부로 있던 시절부터 로마에게서 받아오던 연금을 거절했다. 이렇게 그는 개인적 탐구 끝에 에라스무스적 "기독교의 재생"에 회의를 품고 개혁자가 되었다. 비

록 루터의 책에서 섭취한 것이 있다해도, 역시 그는 자신의 독창성을 끊임없이 간직했다.
이러한 인문주의에서 개혁자 진영으로 츠빙글리를 인도한 발전의 열매들은 1522년 맹백히 나타났다. 그해 초, 그는 사순절 기간 동안에 쏘세지를 먹은 인쇄업자 프로샤우어를 변호하여 금식과 관련된 교회법의 불법적 성격을 확신하였다. 또한 교회의 독신제도가 성경적 기초를 갖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1522년에  애국자의 과부와 결혼하고 콘스탄스 주교에게 결혼 자유권을 요구했다. 결국 그해 여름에 아폴로게티쿠스 아르케텔레스를 출판하여 여기에서 오직 유일한 권위인 성경의 권위만을 인정하겠다고 선포했다.
츠빙글리의 설교와 행동이 야기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하여 츄리히 당국은 신학 논쟁을 위하여 각 도시의 사제들과 대표자들을 소환했다. 이 논쟁에 대비하여 츠빙글리는 67개 논제를 작성하였고, 이 교리는 신앙은 말씀의 중재없이 성령의 직접적 주입으로 인간에게 생겨난다고 가르친 일종의 영성주의적 색체를 가진 그리스도 중심주의의 성격을 띄었다. 츄리히의 첫 신학 논쟁이 1523년 1월 29일 열려서  신속한 토론을 거친 후, 당국은 67개 조항에서 나온 개혁안을 채택했다.
논쟁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독일어로 출판된 최초의 복음주의 교의학 논문인 [67개 논제 해설서]를 작성하였다. 또한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라는 설교에서 사회문제를 비판했다. 예배의식의 개혁에도 전념하여 예배에서 라틴어를 없애 버리고, 성찬에 모든 제사적 성격을 부인했다. 이렇게 하면서도 개혁의 기초를 놓되 이것이 위정자의 보호하에 질서있게 시행되어야 할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츠빙글리의 이러한 의도는 몇몇 성상파괴자들이 1523년 9월 성전에 성화들과 성상들을 파괴함으로 말미암아 실패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당국은 1523년 10월 제2차 츄리히 논쟁을 소집했다. 이 회담에서 우선 신자들 마음에 팽배해 있는 우상숭

배 사상을 타파할 것을 결정했고, 또한 이 예배의 유물들을  제거할 날자를 시의회에 위임해서 결정하도록 승인했다. 성상철폐는 1524년 6월에 가서야 비로소 실시되었다.
츠빙글리만이 교회 갱신 작업을 한 것은 아니었다. 츄리히 사람으로 츠빙글리를 지지한 최초의 인물들 가운데 하나인 그로스만과알자스인 레오 주트, 그리고 루체른 사람인 오스발트 미코니우스 등이 있었다. 이런 인물들이 팀을 이루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은 전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1524년 수도원들이 세속화되었고 그들의 재산이 빈민구제를 위해 분배되었다. 같은 해, 츠빙글리의 선동으로 교회 참사회의 재산과 수익금들이 1525년에 문을 연 성경주해학교 창설을 위해 쓰여졌다. 그러나 이러한 주도적 행동이 물론 중대했긴 했어도 츄리히를 온전히 개혁된 도시로 만들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1525년에야 미사를 페지하였고, 대신 극도로 간소화된 예배의식으로 대체되었고 미사와 전혀 다른 성찬은 일년에 4번만 거행하도록 되었다.
종교개혁이 이처럼 츄리히에 심어져 혼인 재판소 설립으로 미풍양속에까지 확산되는 동안, 그리고 츠빙글리가 [참종교와 거짓 종교의 해설]을 1525년 출판하여 프랑소아 1세에게 헌정하는 동안, "새"신앙에 가담한 이들 가운데 반대세력이 생겨났다.
재세례파로 알려진 참을성이 없고 급진적인 기독교인들은 콘라드 그레벨과 펠릭스 만츠였다. 이들은 1523년부터 츠빙글리가 교회 개혁들을 세속권의 결정에 연결시켰다고 비난하면서 그로부터 등을 돌렸다. 위정자의 권위를 문제삼고, 모든 선서를 거부하며, 군대의 힘에 의뢰하는 것도  거부하고, 자기들의 목사들을 스스로 임명할 권리를 요구하며, 유아세례를 거절하면서, 그들은 성도의 교제를 보이는 방법으로 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츠빙글리는 그를 반대하는 자들을 설득시키려고 펜을 들고 혹은 특별대담과 세 번의 공개 토론을 가졌지만 그들이 "오류들"에서

돌이키도록 하는데에는 실패하였다. 결국 시의회가 직접 우두머리를 감옥에 쳐넣었지만 이들을 잠잠케 할 수는 없었다. 끝내 시의회는 1527년 만츠를 "물로 범죄했기 때문에 물로  처벌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호수에 익사시켰다. 이 비극적인 처형이 있은 뒤로, 세례파 운동은 츄리히에서 멀리 떠났다.

2. 스위스에서의 개혁의 확산과 중단

츄리히가 종교개혁에 가담한 사실은 스위스 연방에 깊은 동요를 일으키게  했다. 어떤 주들에서는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기도 하였고 혹은 진압되기도 하였다. 반대로 바젤에서는 1529년에, 베른에서는 1528년에 공식적으로 도입이 되었다. 그리고 잔크트 갈렌에서는 1528년에 승인되었다.
이런 "이단"의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가톨릭 주들은 1524년에 베켄리이드 동맹을 결성하였다. 이에  위험을 느낀 츠빙글리는 [경건한 연방주들에게 보내는 신실하고 진지한 권면]을 통하여 스위스 사람들이 서로 싸우지 말것을 권면했다. 그러나 그의 호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공동관할 구역들에서는 양 신앙고백의 참여자들 사이에 긴장이 커져갔다. 가톨릭 주들은 종교개혁을 "뿌리채 뽑고, 금지하고 처벌하고 제거하기로" 결심하고는, 1526년 종교문제를 끝내도록 결정했던 국회를 대비하여 바덴에서의 회담을 소집하였다.
1526년 5월 21일에 열린 이 회담에 로마 교회는 상황이 자기에게 유리했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대표단을 파송했다. 이에 종교개혁 측에서는 변호를 위해  바젤의 외콜 람파디우스와 베른의 할러를 보냈다. 엑크는 루터와 츠빙글리의 성찬론 견해를 대립시키는 능숙함을 보였고, 결국 개신교 진영에 불화의 씨를 심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예상했던 대로, 바덴 논쟁은 가톨릭의 승리로 끝났다. 츠빙글리는 파문되었고, 국회는 츄리히로 하여금 츠빙글리를 포기하되 그렇지 않으면 연방에서 제외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츄리히는 츠빙글리 편에 있었고, 또한 베른과  바젤, 및 샤프하우젠 등이 반대했다.
바덴 논쟁이 있은 다음, 츄리히만이 복음적 교리에 전적으로 가담했다. 바젤과 베른에서는 "새"신앙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한 정치적  사건이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1527년 한 해 동안에 여러번의 선거에서 종교개혁의 가담자들이 베른 시 대의회의 다수를 점령한 것이다. 시의 대의회는 종교 문제에

대한 광범위한 토론회를 개최하도록 결의했다.
이렇게 해서 1528년 1월 베른 논쟁이 열렸고, 로마 교회는 2류급 인사들을 파견했다. 반대로 종교개혁측은 일단의 탁워란 신학자들이 대변했다. 토론은 복음주의 교리의 옹호자들이 승리함으로서 끝났고, 그 결과 베른에서는 종교개혁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것은 중요한 사건이었는데, 이로인해 종교개혁이 쥬네브에 발을 붙일 수 있었고 프랑스 개신교의 운명에 큰 영향을 끼쳤다.
베른 논쟁 이후, 1524년 베켄리이드 동맹을 체결한 바 있는 가톨릭 주들에 응전하기 위해 조직을 강화했다. 그러자 가톨릭 주들은 국가적으로 스위스인들의 원수인 오스트리아와 결탁하면서까지 반발하였다. 전쟁의 선전포고까지 다다른 때에, 글라루스의 책임자가 화해를 성공시킴으로 인해 양측은 화해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카펠 평화 조약에 뒤따르는 몇달을 이용하여 츠빙글리는 1529년 10월 마르부르크에 가서 성찬문제로 루터와 토론했고, 1530년 부쳐의 주도하에 막 [4도시 신앙고백]문서를 작성한 독일 고지대 도시들의 신학자들과 대화를 개시했다. 1531년에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 [간단하면서도 분명한 요점]을 프랑소아 1세에게 헌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츠빙글리의 노력은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 못했다. 츄리히에서 그는 "교회적 구속력" 문제로 시의회에 사임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시의회는 사임을 거부하였다. 1531년 10월, 가톨릭 주들은 츄리히를 공격하여 카펠에 모인 츄리히 군대를 패주시켰다. 츄리히의 원정군에 속했던 츠빙글리는 전투 도중 살해되고 말았다.
이 참패 이후, 개신교 주들은 패배를 만회할 방법을 도모하지 않고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인해 비록 츄리히에서는 새 신앙의 독립과 그 예배를 보장해주었으나, 그 조약은 종교개혁의 확장을 분명 중지시키고 말았다.
츠빙글리의 죽음 이후, 알자스 사람 레오 쥬드와 브렘가르텐 출신의 젊은 성

직자 하인리히 불링거가 츠빙글리를 승계하였다. 특히 불링거는 카펠에서 패배한 뒤 츄리히에 나타난 가톨릭의 반동을 제지할 줄 알았다. 그는 세례파의 재출몰이 종교개혁에 다시 퍼지게 될 위험을 미리 예방했다. 그리고 복음 사역의 권리를 옹호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그의 공로는 성찬 문제로 나뉘어진 개혁파를 하나로 묶는 작업을 한데 있다. 사실 그는 1536년 스위스 제1신앙고백서에 츄리히 등의 도시들이 서명케 했다. 1540년 부터 성찬 문제에 해결책을 찾을 목적으로 칼벵과 담판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그는 쥬네브 개혁자와 더불어 "츄리히 협정"을 체결하였다(1549). 이렇게 그는 개신교사에 상당한 영향을 행사했다. 왜냐하면 이것은 츄리히와 쥬네브를 연합시킴으로 츠빙글리의 종교개혁과 칼벵의 종교개혁을 지속적으로 접근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영국 성공회에 대해 조언자의 역할을 해주었다. 나아가 종교 개혁의 교회들에게 그들의 가장 훌륭한 신앙고백서들 가운데 하나인 제2스위스 신앙고백을 작성하였는데, 이 문서는 1566년 팔츠 선거 후에 의회 신앙고백으로 채택된 뒤, 같은 해 쥬네브 교회와 대부분 스위스 개혁파 교회들에 의해 인정되었다. 또한 프랑스에서도 수용되었고, 스코틀랜드, 헝가리, 폴란드, 오스트리아에서도 채택되었다.

3. 부쳐와 스트라스부스 종교개혁

비텐베르크의 수도사 루터가 보름스 국회에 출두했을 무렵(1521년), 루터의 작품을 읽고 그 영향을 받은 스트라스부르 성당 신부인 마태우스 젤은 통속적인 어조와 복음적 영감으로 로마서를 강해했다. 그는 주교에게 이단으로 고소되었고, 1523년 스트라스부르 종교개혁의 첫 성명서로 여겨질 수 있는 "기독교인의 책임"이란 글을 간행했다.
이렇게 투쟁에 뛰어들면서 젤은 카피토와 특히 마틴  부쳐라는 동역자를 얻게 된다. 카피토와 반대로 1523년 당시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부쳐는 하이델베르크 논쟁 당시(1518년), 루터에게 사로잡혀 수도원 서약을 스스로 풀어 버렸다. 그리고 결혼하여 슈파이어 주교가 자신을 쫓아냈던 비셈부르크에서 종교개혁을 설교했다.
젤의 제안으로 부쳐는 스트라스부르에서 성직자와 평신도를 위해 성경을 강의했다. 그리고는 1523년 [누구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살아야 할 것]과 [비셈부르크에서의 설교 요약]을 펴냈다. 이 두 작품의 영향을 커서  대성당의 참사회가 개혁 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부른 명성있는 설교가 헤디오 역시 "새" 신앙에 가담하게 된다.
당국은 부쳐와 카피토를 청빙하여 성경의 여러 곳들을 공적으로 강해하게 하였다. 이 말씀의 사역자들이 이곳에서 자리를 잡자 예배의 개혁이 뒤따랐다.  1524년 초 니그리가 "독일어 미사"를 시작했고, 동년 말, 부쳐는 츠빙글리의 관점을 가지고 스트라스부르 예배의식에 도입된 변화들을 옹호하는 [쇄신의 기초와 명분]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처럼 종교개혁의 일원들이 기획한 교회의 재조직은 대성당과 교회 참사회 회원들을 불안케 했다. 그러나 당국의 능숙한 타협 끝에 그들은 중립을 지키자 쇄신운동은 승리의 발걸음을 계속했다. 교구개혁과 병행하여 수도원과 학교 개혁도 수행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스트라스부르는 황제와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된다. 스트라스부르는 제2차 슈파이어 국회 때(1529년

), 보름스 칙령을 적용해서 종교개혁의 확장을 금한다는 황제의 결정에 "항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스트라스부르 시는 신학적방어를 준비해야 했다. 이때 부쳐와 카피토가 콘스탄츠, 린다우, 메밍겐 등의 동의를 얻어 [4도시 신앙고백서]라는 이름의 문서를 작성했다. 이럼으로 인해 스트라스부르는 제국에 그대로 머무를 수 있었다. 더우기 종교적 영역에서 독일 여러 지방 국가들과 스위스 사람들 사이에서 중개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개신교 세력들 가운데 탁월한 위치를 확보했다. 그러나 카펠의 참사이후, 스트라스부르는 비텐베르크와 그 위성 지역 쪽으로 가까이 하게 되었다.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은 도시 내부에서도 난관이 있었다. 비록 가톨릭은 이곳에서 신속히 사라졌지만, "열광파들"은 심각한 위협적 존재가 되었다. 칼 슈타트가 이곳에 정착하러 찾아왔지만 그는 이내 그의 분리적 행동 때문에 당국에 의해 쫓겨났다. 더 위험했던 것은 재세례파와 온갖 종류의 영성주의자들로서, 이들은 자유스런 분위기를 틈타 도시에 만연했고 심지어 카피토의 동정을 얻기까지 했다.
조명주의가 종교개혁에 퍼뜨린 위험을 막을 목적에서, 부쳐는 시 책임자에게 "열광파들"을 추방하라고 부추겼다. 그는 교회에 치리를 보다 강화하는 일에 전념했다.
1531년 각 목사에게 "감독회"를 딸려 붙여주었으며, 교회에 법적 기능을 부여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조처들은 분파적 운동들을 약화시키고 총회의 주래를 맡은 부쳐의 권위를 강화시키는데 상당히 공헌했다. 그리고 그는 목사들과 필요한 인물들을 키울 수 있는 기관을 1538년 고등교육학교를 창설함으로 해결하였다. 이 학교의  총장은 요한 슈트름이었으며, 부쳐, 카피토, 헤디오, 베르미글리, 그리고 칼벵도 한때 가르쳤다.
스트라스부르가 속해있던 슈말칼덴 동맹이 패배는 이곳의 종교개혁의 "황금시대"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에 종지부를 찍었다. 1547년 "최고 책임

자" 야곱 슈트름은 황제에게 도시를 대표하여 공개적인 사죄를 해야 했다. 그리고 부쳐는 황제와 주교의 연합 압력에 항거한 시당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549년 4월 스트라스부르를 떠나야 했다. 그는 영국에 가서 매우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도착한 지 채 2년이 못된 1551년 사망했는데, "기도서" 개작에 수고하였고 [그리스도의 통치론]을 에드워드 6세에게 헌정함으로 영국교회의 개혁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다.
스트라스부르 종교개혁은 슈말팔덴 전쟁으로 매우 축소되었다. 부쳐 대신 교회총회를 주재했던 헤디오는 상황을 바로 잡을 시간이 없이 1522년 페스트로 사망했다.
그후 스트라스부르의 개신교의 입장을 재확립시킨 이는 헤디오의 후계자 요한 마르바흐였다. 그가 가져온 이 공로는 부쳐의 종교개혁의 목숨을 잃게 하는 값 비싼 지불이었다.
마르바흐는 루터주의에 양보하여 교회에 권위 체계를 강요했다. 나아가  1555년부터 4도시 신앙고백에 모든 규범적 가치를 부인하기를 모색했고 결국 1563년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과 비텐베르크 협정을 신앙 규칙으로 인정케 함으로서 그 목적을 달성했다. 그는 1560년이 지나면서, 개신교 예배를 추방한 대성당과 여러 교회들에 그 예배를 회복시켜 놓게 하였다. 가톨릭에 대한 이런 승리는 우리가 볼 때 성공이라고 여길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개신교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를 잘 드러내는데 곧 교리적으로 뻣뻣해지는 시대요, 고백적 정통들의 시대이다.


제 4 장 칼벵의 종교개혁

1. 종교 개혁에 가담한 인문주의자

1509년 피카르디 지방 노아용 시에서 태어난 쟝 칼벵은 지방 성직자를 위해 일하는 사업가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는 14살 때 교회 성직록의 혜택을 받게  되자 파리로 가서 부친의 계획에 따라 사제직을 가는데 필요한 공부를 계속했다. 몽테커 학교에 들어가서 1528년 초에 문학석사를 받았다.
철학 수업이 끝나자, 칼벵은 파리를 떠나 당시 법과대학으로 유명했던 오를레앙에 갔다. 왜냐하면 노아용 참사회와 사이가 틀어진 그의  부친이 생각을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친이 죽자, 자기가 가장 원하던 기호에 부응하는 생애를 자유롭게 택할 수 있게 된 그는 문학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1533년에 오를레앙 대학에서 법학사를 받은 것으로 보아 법학을 완전히 내버리지 않은채 파리에 세운 왕실학교에 다녔다. 그곳에서 그는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을  준비해 1532년에 출판함으로 일약 인문주의자들 가운데서 유명해지게 되었다.
법학공부를 끝내러 오를레앙으로 갔다가 1533년에 돌아온 칼벵은 파리에서 상황이 성경파들에게 호의롭게 된 것을 보았다. 칼벵의 친구로서 대학의 새 총장이 된 인문주의자 니콜라콥은 1533년 만성절, 개학식에 총장 훈시 시간에 8복 설교를 했는데 이 설교에서 그는 에라스부스와 루터에게서 열감을 받아, 종교개혁의 귀중한 테마들 특히 믿음으로 얻는 칭의 테마에 접근했다. 의회는 대학 총장을 기소하자 콥은 외국으로 도망했고, 칼벵도 위협을 느끼고 친구이며 신부인 루이 뒤 티에가 사는 앙굴렘으로 피신했다.
1533년 적어도 에라스무스적 쇄신주의의 일원이었던 그가 종교개혁에 가담하게 된 시기를 그가 성직록을 포기하기 위해 1534년 봄에 노아용을 방문하기 전 몇달 기간으로 위치한다고 본다.
노아용에서 돌아와, 이미 복음주의사상에 사로잡힌 칼벵은 여러 곳에서 머물렀는데 특히 오를레앙에서 자신의 최초의 신학 작품인 [영혼의 수면]을 써서 재세례파들에 대항하였다. 그러다 1534

년 가을 사건 하나가 그로 하여금 프랑스를 떠나게 했다. 이 위험을 피하여 칼벵은 바젤로 도망했다. 그곳에서 그는 1년도 채 안돼서 [기독교 강요]를 썼고, 1536년 앞에 프랑스 왕에게 드리는 변증적 서간문을  달아 출판했다.
[강요]의 인쇄 교정을 끝낸 칼벵은 이탈리아로 갔다가 잠시 머문뒤, 바젤로 돌아와서 이내 프랑스로 출발하여 재산을 다 정리하고 결정적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된다. 그의 계획은 스트라스부르에 자리잡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때문에 파리를 떠나 쥬네브를 거쳐 우회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1536년 7월 쥬네브에 도착했고 그러기가 무섭게 기옴 파렐은 이곳에 남아 자기를 도와 종교개혁을 공고히 하자고 그를 독촉했던 것이다.

2. 칼벵 과 쥬네브 종교 개혁

제네바인들이 그들의 독립을 보존하고 확립하기 위해 싸우고 있을 무렵, 복음주의사상은 그들 가운데 점차 퍼져 나갔다.
칼벵은 파렐에 의해 쥬네브에 붙들려 그로부터 "성경 강사"의 직무를 맡았다.  칼벵은 대성당에서 바울 서신들을 강해하였고 종교개혁에 가담한 쥬네브 교회를 서둘러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는 파렐과 협력하여 4개 [조항]을 작성한 뒤 시의회에 맡겼다. 그리고 [쥬네브 교회에서 사용하는 교육서와 신앙고백]을 작성했고, 파렐과 함께 21개 조항으로 된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여 모든 쥬네브 시민들로 하여금 각자 서명하게 하려 했다.
이러한 노력은 강한 저항을 야기시켰다. 1538년 시 당국과 개혁자들 사이에 잠재해 있던 갈등은 첨예한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칼벵과 그의 동료들이 신앙고백에 반대하는 자들을 성찬에서 제외시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시의회는 성찬이 누구에게도 거절되어서는 안된다고 결정했다. 이 결정은 세속권으로 교회의 주인이 되게 했다. 또한 시의회가 그 권한을 넘어서서 베른의 의식을 채택하기로 결정했을 때, 개혁자들은 맹렬히 반대하면서 1538년 부활절에 강단에 올라 설교는 하되, 성찬 거행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당국은 칼벵과 파렐과 코로를 면직시키고, 3일 안으로 쥬네브를 떠나라고 처분을 내렸다.
칼벵은 바젤에 정착할 생각을 했지만 부쳐의 절박한 부름에 계획을 바꾸었다.
1538년 9월, 그는 종교의 이유로 스트라스부르에 피난해 온 프랑스인들의 공동체를 책임졌다. 이곳에서 그는 스트라스부르의 개혁자들과 접촉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프랑스 교회 목사의 직책외에도, 교수로서 그리고 문학방면 등에서도 자신의 역량을 보여줬다. 그는 [로마서 주석]을 내놓았고, [사돌레에게 주는 편지]를 작성했고 [성만찬 소고]를 썼다.
칼벵이 스트라스부르에 체류하는 동안, 쥬네브 교회는 심각한 분쟁으로 시련을 당했다. 추방된 개혁자들의 지지세력인 기

에르멩들에게 호의적인 선거가 치뤄지고, 그에따라 쥬네브 당국은 칼벵을 다시 부르기로 결정했다. 칼벵은 쥬네브인들의 간청이 점점 더 절박해지자, 그는 결국 1541년 9월 교회의 다소간 질서를 회복하기에 필요한 시간만 머물 의도로 쥬네브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23년의 사역을 마치고 생애를 끝내야 했다.
쥬네브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칼벵은 교회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는 1541년 11월에 [교회법]이란 이름으로 시당국이 채택한 치리서를 만들었는데 여기에서 교회 안에 44가지 직분을 구분했다. 1542년에는 문답형식으로 된 [신앙교육서]를 작성하였고, 많은 요소를 스트라스부르에서 빌어온 예배 모범서인 [교회의 기도와 찬송의 형식]을 만들었다.
이렇게 종교개혁의 기초가 놓여지자, 칼벵은 "도시-교회"로 만들기 위해 험난한 전투에 들어갔다. 이러한 그의 의지는 수많은 반동을 야기시켰고 더나아가 1546년부터 기에르멩파의 우두머리인 페랭과 등을 지게 되었다. 급기야 1548년 선거에서 페래의 지지자들이 승리하여 7년 동안 이들은 시의회 의석의 대다수를 점유하여 교회와 국가간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칼벵이 교회 치리에 대해 가졌던 매우 엄격한 개념이 많은 원한을 사게 했다면, 복음 진리를 옹호하려는 그의 의지 역시 적지 않은 수의 적을 만들었다.  1543년 애가서의 정경성을 부인함으로써 성경의 권위를 문제시한 세바스티앙 카스텔리용을 나무랐다. 8년 뒤, 예정론 교리를 부인하고 자기를 향해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라고 비난한 제롬 볼섹의 공격과 맞서야 했다. 1533년에는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한 세르베투스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처럼 그는 "잘못된" 교리들을 쥬네브에서 제거한 뒤, 외부의 적과도 논쟁을 하였다.
쥬네브는 개혁파의 피난처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유럽에 광채를 던지는 영적인 모국이었다. 칼벵은 종교개혁에서 나온 교회들을 모으기 위해 츠빙글리의 제자들과 더불

어 1549년 [츄리히] 협정]을 체결하는데 성공했다. 루터의 후계자들과도 마찬가지로 담판을 시작했으나 성찬문제에서 합의를 보지 못했다.   또한 그는 영국 국교도들과도 서신 연락을 취했으며, 에드워드 6세와 서머세트 공작인 에드워드 세이무어경에게 영국교회의 감독제를 존중하는 개혁안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칼벵은 "연합적" 노력들 이상으로, 아카데미 창설에도 힘을 썼다.  1559년 아카데미를 창설하였고 바로 이곳에서 필립 마르닉스와 가스파르 올레비아누스 등과 같은 학생들도 있었다.
아카데미의 창설이 끝나자, 그는 1561년 [교회법] 개정에 전념하였다. 그는 "교회에 모든 신자들을 복종케 하고 하나님을 참되게 섬기도록 할 뿐만 아니라 물의를 일으킨 자들을 못하게 하고 교정시키기 위해 존재해야 할 최고 감독직"을 강조하는데 성공했다.

3. 칼벵 과 프랑스 종교 개혁

프랑스의 개신교는 에라스무스적 개신교였다. 이들은 기존 교회의 예배의식에 참여하고 평신도들은 자기 자녀들의 세례를 기존 교회에 요구했고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미사에 참석했다. 사제들은 자신의 직무 수행을 거절하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칼벵에 의해 1544년 부터 "니고데모파"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니고데모파들이 종교개혁을 위태롭게 하고 있음을 의식한 칼벵은, 1537년부터 두 편의 중요한 서신 속에서 복음주의 신앙과 기존 예배에 참여하는 것 사이에 온갖 타협이 있음을 고발했다. 그러나 이 편지들은 내적으로는 가담하지 않으면서 그 의식자체는 큰 문제로 여기지 않는 자들의 신학적 입장이 야기하는 위험을 쫓아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1543년에 이 문제를 [교황주의자들 가운데 있을 때 복음의 진리를 아는 신자가 행해야 할 것을 보이는 소논문]을 작성했다. 이러한 권면은 프랑스에서 복음에 가담한 수많은 사람들을 동요케하였는데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오히려 칼벵을 비인간적이라고 비난했다. 칼벵은 다시 [니고데모파에게 주는 글](1544년)에서 응답했다.
니고데모파가 정죄되자, 이번엔 다른 위험이 프랑스 복음주의 회중들을 위협하였는데 그들은 곧 조명주의의 위험이었다. 이에 대하여 칼벵은 [영성파로 불리우는 자유파란 환상적이고 광란적인 분파를 논박함](1545년)과 [자유파의앞잡이인 어떤 프란치스코 수도사를 논박함](1547년)이라는 두 팜플렛에서 말하였다.
쥬네브 개혁자 칼벵은 프랑스 동료들을 조직하는 또 다른 일에도 봉사했다. 1555년부터 기도와 교화로 모인 작은 그룹들이 감독회가 고무적인 활동을 하고 또 성례거행 능력이 있는 말씀의 사역자를 갖춘 회중들로 변형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조직된 교회를 지도하기 위해서 칼벵은 편지를 통해서 복음을 표방하는 이들에게 용기를 북돋우고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하지만 칼벵이 프랑스 종교개혁의 조직을 이루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쥬네브

에서 파송된 설교자들을 통해서였다. 이들은 프랑스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로서 개혁교회들의 설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칼벵의 권면에 따라 "세워진" 최초의 교회는 파리 교회였다. 뒤이어 동년, 모, 앙제르, 포아티에, 루뒹 교회들이 설립되었다. 1561년 말, 670개의 개혁파 교회들이 당시 프랑스 영토에 조직되었다. 이 교회 안에는 평민뿐만 아니라 수많은 중산층, 사업가, 지식인, 수도사, 사제, 귀족들이 있었고, 이들이 개신교당의 뼈대를 이루었다.
"세워진" 교회들 사이의 확실한 결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연결기관이 필요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대회체제에서 발견했다. 1557년 또는 1558년 목사회는  어떤 문제이든지 전 교회의 대표들이 모인 자리에서 소송 절차에 따라 토의되어야 할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이 원칙에 따라 1559년 5월 프랑소아 드 모렐  목사의 주재 하에 프랑스 개혁 교회의 첫 총회가 파리에서 열렸다.
칼벵은 근심어린 눈으로 바라보다 그들에게 신앙고백서 초안을 작성하여 보냈다. 총회 마지막 날 도착한 이 문서는 프랑스 개혁 교회 대표자들에 의해 다소간 수정을 거친 후 신앙고백서로 채택되었다. 이 문서는 제7차 총회(1571년)에서 결정적으로 인정된 후, 라 로셸 신앙고백이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
파리 총회가 끝난 며칠 뒤, 앙리 2세는 에쿠앙 칙령에 서명을 하고 냉혹한 박해를 시작하였다. 개신교자들 중에 1560년 3월 앙보아즈 성에 대한 점령 계획을 하였지만 이 음모는 모든 개신교 음모자들이 대량학살 당하고 끔찍하게 진압됨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런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개혁 교회들은 새로운 조직 설립을 그치지 않았다. 종교개혁당을 완전히 멸할 수 없음을 안 카트린느 드 메디치는 가톨릭과 복음주의자들을 화해시킬 목적으로 포아시 회담(1561년)을 소집했다. 칼벵의 또 다른 자아였던 테오도르 드 베즈는 개혁 교리의 주요 사항들을

훌륭하게 진술했다. 그러나 회담은 왕이 바랐던 화해로 이끌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섭정 카트린느는 필립 2세가 후원했던 삼두체제에 대항하기 위해 개혁파의 도움을 확보하려는 열망에서 그들에게 1562년 1월 칙령의 특혜를 주었다. 그들에게 대회로 모일 권리와 도시 밖에서 예배드릴 권리를 부여하면서, 그녀는 "새 종교"를 인정했다. 하지만 승리의 기간은 짧았다. 1562년 3월 1일 바시의 대학살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도시 안에서 예배를 드리던 70명 이상의 개신교도들을 부하를  시켜 죽이게 함으로서, 프랑소아드 기즈는 제1차 종교전쟁을 터뜨리고 말았다.


제 5 장 영국의 종교개혁

대륙과 스크틀랜드에서의 종교개혁이 교회의 인물들에 의해 기도되었다면,  영국종교개혁은 국가의 보호하에 보다 정확히 말하면 군주제의 보호하에 준비되고, 세워지고, 재건되었다. 헨리 8세는 로마와 결별하면서 종교개혁을 준비하였고, 서머세트 공과 노덤버랜드 공이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 종교개혁을 세웠으며, 엘리자베드가 "옛 종교"로 자기 백성을 끌고간 메리 튜더의 죽음이후, 종교개혁을 회복시킨 것이다. 영국에서도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수많은 써클들을 통해 교회 갱신을 갈망했다.

1. 헨리 8세의 분열

16세기 초, 영국의 종교적 상황은 이중의 양상을 띄었다. 한편에서는 경건운동이 꽃을 피워 전통신앙에 매달려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많은 사회계층에서 교회세금과 교황 지상권에 대한 모종의 적개심이 표출되었다.
헨리 8세는 통치 초기에 토마스 월세이 추기경을 이용하여 수도원을 개혁하고 성직자 양성을 줄이는 시도를 했다. 이 일을 하면서도 그는 전통 신앙에 충실히 남아있었다.
이처럼 헨리 8세가 "신앙의 수호자"로 자처하던 무렵, 루터주의는 영국 대학들에서 최초의 지지자들을 맞이했다. 특히 캠브리지에서는 서클 하나가 "백마"라는 여관에 모여 비텐베르크 사상을 논했다. 대부분이 성직자들로 구성된 이들은 토마스 크랜머, 존 프릿, 윌리암 틴데일 등이 끼어 있었다.
헨리 8세는 1509년 자기 형의 과부인 캐터린과 결혼을 하였다. 이 결합으로 6명의 자녀가 태어났는데 오직 메리라는 딸하나만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남자 상속인을 갈망하는 헨리 8세는 궁정의 젊은 여인 앤 볼린과 사랑을 느낀다.   그리하여 그는 1527년, 캐터린과의 결혼을 교황청이 무효화 해주기를 바랬다.  교황 클레멘트 7세는 영국 왕의 간청과 분리하겠다는 위협에 양보할 마음이 있었으나 캐터린이 칼 5세의 숙모였고, 당시 교황을 마음대로 하였던 칼 5세가 캐터린이 버림받는 것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거절하였다.
그러자 헨리 8세는 토마스 크랜머를 시켜 큰 대학에 자문을 구하여 호의스런 대답을 받고는 1531년 자신을 영국 교회의 "최고 우두머리"로 인정케 하였다.  1532년에 그는 성직자가 교황에게 소득세를 바치지 못하게 하였고, 성직자로부터 교회법의 전면 수정에 대한 의사 표시권을 얻어냈다. 나아가 1533년에 은밀히 앤 볼린과 결혼을 하였다.
이에 클레멘트 7세는 반발하였고, 헨리 8세도 영국 교회에 대한 재판권을 박탈하는 법률을 의회로 하여금 채택케하여 응수했다. 이 법률로 국왕이 성직자

의 소득세를 받았고, 수장령(1534)에 이르러서는 헨리 8세와 그 후계자들에게 "지상에서 영국교회의 최고 우두머리"라는 칭호를 주었다. 헨리 8세는 토마스 크롬웰에게 이 법률을 적용할 임무를 맡겼다. 물론 저항이 일어났지만 착실히 진행되었다.
이렇게 흐르는 동안 헨리 8세는 앤 볼린을 간통죄로 꾸며 참수시키고 제인 세이무어와 결혼하였다. 제인은 결혼 생활 17개월 뒤 아들을 하나 낳고 죽었는데 미래의 에드워드 6세였다. 이렇게 사랑에 있어서 변덕스러웠던 왕은 종교문제에 있어선 훨씬 일관된 정신을 보여줬다. 그는 교황과는 거리를 두었으나 정치적 이유로 정통에 머무르려 했다. 칼 5세와 프랑소아 1세 사이에 있을 수 있었던 동맹을 저지하기 위해서 1535년과 1536년에 독일 개신교 군주들의 지지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타협의 결론은 그다지 보잘것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헨리 8세는 1536년 "소집"된 성직자회에서 채택된 [10개 조항]을 통해 루터파와 가까와졌다.
비록 [10조항]이 루터주의에 최소한의 양보밖엔 하지 않았지만 이 조항의 의미를 설명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1536년과 1538년의 [왕의 지령]은 보다 분명한 개신교적 어조를 간직했다. 이 [지령]은 성상, 성유골, 순례행각 등을 비난하였고, 특히 신부들에게 신자들 각자가 성경을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도록 권면하라고 당부했다. 이로인해 번역성경들이 나타났다.
1538년 6월, 발로아 가문과 합스브르크 가문 사이에 체결된 니스 휴전 조약은 헨리 8세를 불안하게 하였다. 교황은 프랑스와 스페인이 영국을 토벌하기를 원했다.
영국 왕은 크롬웰의 조언에 따라 작센 선거후의 처제인 안나 폰 콜레베와 결혼하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정통 신앙의 증거를 가톨릭에게 보이기 위하여 [6개 조항]법률을 가결시켰다(1539년).
[6개 조항]이 보여준 신학적 경직현상은 1540년부터 두드러졌다. 전쟁

은  발로아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 사이에서 재발되기 직전에 있었고, 칼 5세는 영국의 도움이 필요했다. 따라서 헨리 8세는 독일 개신교 군주의 지원이 없어도  되었으므로 그는 안나 폰 클레베와 이혼하였다. 그리고 루터파와의 연합 정치로 부추켜 왔던 크롬웰을 참수 시켰다. 1543년에 반 개신교적이인 [필요한 교리]란 책을 출판하였다. 헨리8세는 1547년에 죽었다.

2. 에드 워드 6세 통치하의 종교개혁

헨리 8세를 계승한 에드워드 6세는 제인 세이무어의 아들이었다. 겨우 9살에 왕위에 오른 그는 종교개혁의 확고한 지지자였다. 그러나 혼자 통치할 능력이  없는 그대신 삼촌 에드워드 세이무어가 사실상 권력을 장악했다.
세이무어는 선한 의지의 인물로서 확신있는 개신교도였다. 보호통치 초기부터 영국교회를 종교개혁으로 차차 이끌어 가는데 진력했다. 그는 협력자로 캔터베리 대주교인 토마스 크랜머를 삼았다.
"개신교의 공세"는 1547년 7월의 [왕의 지령]이 발간되면서 시작되었다.  [왕의 지령]이 나온 지 몇달 뒤, 국회는 데 헤레티코 콤부렌도 법과 [6개 조항]을 폐지했다.
1548년에 더 나아가 성상들의 철거를 명했고, 사제들의 결혼을 인정했다.
크랜머가 주재한 12명의 신학자 위원회는 새 예배모범의 초안을 작성하여 이 초안을 통일령(1549년)으로 채택되었고 [공동 기도서]라는 이름으로 시행되었다. 이것은 교황주의와 비 국교주의 사이의 "중용의 길"에 성공적으로 들어선 형태였다.
당국이 개혁을 신중하게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1549년 7월 여러 곳에서 폭동들이 일어났다. 폭도들은 "옛 종교"로 돌아올 것을 요구했으나 훨씬 정치적이요 사회적이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세이무어는 농민들의 편에 서서 대지주들의 욕망에 제동을 가하려 했기 때문에 대지주들은 그를 비난하였다. "보호자"의  직분에서 면직된 그는 1549년 10월, 런던 탑에 수감되었고 반란자들을 진압했던 존 다들리로 대체했다. 다들리는 노덤버랜드 공작의 칭호를 획득한 뒤 세이무어를 참수시켰다. 그는 종교개혁 쪽을 택했다.
노덤버랜드 세력이 도래한 몇달 뒤, 새로운 "성직 수임식 순서"가 만들어 졌다. 이후 종교개혁 지지파는 그동안 수많은 비판을 받아온 [기도서]를 개조하여 크랜머는 1522년 두번째 [공동 기도서]를 출간하였다. 같은 해 이것은 제2의 통일령의 힘으로 강제성을

띠었고, 이것은 1549년의 것보다 훨씬 대륙적 개신교의 특징을 지녔다.
영국 교회에 복음으로 영감된 예배모범을 제공한 크랜머는 이제 그 교회에 신앙고백을 갖도록 하였다. 1538년 그는 루터파와 협상하여 [13개 조항]에 착상을 얻어, 최종적으로 1553년 왕이 인정하여 노력 끝에 만든 [42개  조항]으로 간행 허락을 받았다. 이 [조항]은 1522년의 [기도서]보다도 더 개신교적이었다.
[42개 조항]을 승인한 지 한달 만에, 에드워드 6세는 16세의 나이로 죽었다(1533년).
노덤버랜드 공은 메리 튜더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서 헨리 8세의 종손녀인 제인 그레이를 후계자로 지명하도록 부추겼다. 그리고 이 목표가 달성되자 그는 자기 아들들 중 하나와  제인을 결혼시켰다. 그러나 노덤버랜드 공의 평판이 크게 나빴고, 메리 튜더의 합법성이 논란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캐터린의 딸을 여왕으로 인정하고 만다.

3. 메리 와 엘리자베드 통치하의 가톨릭 복귀와 영국교회의 확립

메리 튜더는 열렬한 가톨릭이었다. 그녀는 헨리 8세와 캐터린의 결혼 유효를 인정하는 길은 영국에서의 교황 재판권 회복에 달려 있으며, 따라서 새 여왕의 합법성에 대한 비준도 그것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자기 사촌인 칼 5세의 조언에 따라 메리는 먼저 에드워드 6세 통치 하에서 포고된 교회법들을 폐지하였다. 예배 의식들도 헨리 8세가 죽기 얼마 전에 만들었던 형태로 되돌아 갔다. 복음 사상에 가담한 주교들은 면직되었고 대신 헨리파 성직자들로 대체  되었다. 크랜머는 감옥에 들어갔고 대륙의 개신교 신학자들은 그들의 신앙을 따랐던 수많은 영국인들을 데리고 영국을 떠나야 했다.
메리는 의회와 백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왕위에 오르게 될 칼 5세의 아들과 1554년 7월 결혼했다. 그녀는 부군의 지원을 받아 영국의 분리를 해소하기 위해 협상을 하여 영국의 동포들에게 교황의 사면을 전하였다.
로마의 권위가 인정되자, 희회는 1529년 이래 선포된 모든 반 교황적 법들을 폐지했고, 재산은 되돌려주지 않은 채, 헨리 8세 통치 초기의 상황으로 교회를 재건시켰다. 1554년 말, 의회는 옛날 이단자들을 사형으로 처벌했던 법들의 효력을 다시 인정하였다. 이런 법률을 이용하여, 무자비한 박해가 터져 성경을 편찬한 존 로저스와 복음주의적 4명의 주교들이 화형대에 올랐다. 대주교 크랜머는 개신교를 버림으로 자기 생명을 구하려 했으나 메리의 형벌을 피할 수 없게  되자 용감히 자기 신앙을 고백했다.
이 박해는 민중 계층에도 전개되어 불과 4년도 안되는 동안 약280명의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 박해는 결국 그녀가 1558년 11월에 죽고나서야 끝났다.
메리의 이복 동생인 엘리자벳 튜더는 앤 볼린의 딸로서 영국 왕위에 오를 때 나이 25세였다. 자기 어머니의 결혼 유효성을 놓고 로마 교회가 한 비판 때문에 자연히 개신교가 되었다. 그러나 참된 종교적 확신으로 이끌림 받았다.


국가의 대신 윌리암 세실의 조언을 받아가며 엘리자벳은 용의주도하게 일을 처리했다. 의회는 [수장령]의 효력의 재인정을 가결했다. 그녀는 "영국 교회의 최고의 우두머리"라는 칭호 대신에 "영국교회의 최고 통치자"라 하였다.
새 [수장령]의 포고와 동시에, 새[통일령]이 선포되었고, 이것은 1522년의  [공동 기도서]의 사용을 강요했다. 이처럼 가톨릭 측의 마음을 가라앉힐 목적에서 1559년의 [기도서]는 수정되거나 삭제되었다.
대부분의 하급 성직자들은 1559년의 [수장령]을 받아들였으나, 메리 통치때 자리잡은 대다수의 주교들은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므로 계급제도를 다시 만들어야 했다. 매튜 파커가 캔터베리 대주교의 보좌에 올랐다. 주교단은 [42개 조항]의 개정에 착수하여 성직자 회를 통해서 [39개 조항]을 승인케 했는데, 바로 이것은 오늘날도 여전히 "영국 교회의 교리적 정책강령"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 [39개 조항]은 애매한 데도 있지만 대륙의 종교개혁, 보다 정확히 말해서, 칼벵의 종교개혁에 소중한 개념들을 제시했다. 이렇게 [39개 조항]은 영국 교회에 매우 다양한 신학적 경향을 공존케 하였다. 또한 동시에 [조항]은 이중의 반발을 야기시켜야 했다. 자기들의 신앙이 정죄되어 있음을 본 가톨릭의 반발과, 온전한 개혁 촉진을 염려하여 개혁의 개신교적 알맹이를 평가절하한 퓨리탄의 반발이 그것이다.

                              결     론

루터의 종교개혁은 거의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지방으로 유독 퍼져서, 주위 상황으로 인해 강력한 국가교회의 형태로 확립되었다. 부쳐의 종교개혁은 아우그스부르크 임시안이 선포된 직후, 요한 마르바흐의 완고한 루터주의 때문에 스트라스부르에서 질식하고 말았다.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점차적으로 그 특징있는 모습들을 상실하고, [츄리히 협약] 이후 칼벵의 종교개혁의 공동의 지류를 형성하였다. 루터파 형태나 영국 국교 형태와 대조적으로 개혁파란 칭호를 일반적으로 갖게 된 이 지류는 장소에 따라 공권력의 보호하에 그 뿌리를 내렸는 바, 쥬네브, 스위스 도시들, 프랑스뿐만 아니라, 독일 일부 지방, 화란, 스코틀란드, 항가리, 그리고 폴란드 등에서 그리했다. 영국 종교개혁은 왕실과 밀접하게 연합된, 그러면서도 카톨릭에 대한 향수와 대륙의 개혁자들의 복음적 급진주의로 이루어진 국가 교회 조직에 도달했다.
이처럼 16세기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개신교의 품에는 루터파, 개혁파, 영국국교의 세 가족이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루터의 파문(1521년) 이래 서구 기독교권 내부에서 반세기 동안 일어난 엄청난 변화를 측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개혁의 선구자들이 가장 열렬히 소원했던 대로, 교회 안에서 일어났어야 했던 종교개혁은 결국 교회 밖으로 쫓겨났다. 교회의 통일성이 깨어진 것이다. 16세기는 기독교 역사의 가장 후회스런 비극들 가운데 하나로 여겨질 수 있다. 왜냐하면 형제를 살해하는 싸움을 400년 이상이나 치루고  난 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연합운동의 품 안에서 이 갈라진 틈새를 때우려 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 종교개혁사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