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마15-21)기도하고 응답받고.
2005. 2. 3. 00:55ㆍ목양자료/1.기독교자료
기도하고 응답받고
마 15:21-28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 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태복음 15:21-28)
성경 안에는 여러 사람이 드린 여러 가지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녀를 위한 부모의 기도, 가족을 위한 가장의 기도, 국가와 민족을 위한 지도자의 기도와 왕의 기도, 그 시대를 위한 선지자의 기도 등 다양한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기도는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35을 보면 예수님도 “새벽미명에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셨다”고 했고 요한복음 17장을 보면 제자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의 경우 가장 좋고 바람직한 기도는 자신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누구보다 내가 나를 제일 잘 압니다. 내 사정을 내가 제일 잘 압니다. 그런데 나는 기도안하면서 남더러 나를 위해 기도 해 달라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기도할 수 없고 기도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를 위해 대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이런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가장 힘 있는 기도가 되려면 나 자신도 기도하고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귀신들린 딸을 위해 예수님을 만난 어떤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22절을 보면 그녀는 “가나안 여자였다”고 했습니다. 가나안 여자라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이미 그 땅에 살고 있던 원주민의 후손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가나안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 개나 돼지처럼 여기고 취급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생활이 우상숭배를 했고 도덕적으로도 음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여자에게 딸이 하나 있었는데 흉악한 귀신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당사자는 제정신이 아니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어머니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짐작컨대 온갖 노력을 다했을 것이고 백방으로 방법을 찾아 이것저것 다 해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증상은 더 악화되어 갈 뿐 고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이 그 고을을 다녀가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평소 그녀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딸을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본문은 그녀가 예수님을 만나 딸을 살린 과정과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경해석학자들은 그녀가 예수님을 만나 딸을 고치고 살린 과정을 기도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바클레이는 “그녀는 자기 딸의 고통을 내 것으로 받아드렸다”고 했고, “그녀의 신앙은 물러설 줄 모르는 신앙이었으며 시험받고 응답받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그녀의 기도가 어떤 기도였으며 어떻게 응답 받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1. 벽을 넘어선 기도였습니다.
21절을 보면 그녀가 살던 지역을 “두로와 시돈 지방”이라고 했고 22절을 보면 그녀를 ”가나안 여자“라고 했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이방인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특히 시돈지방은 바알우상을 섬겼던 아합 왕의 처 이세벨의 고향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가기조차 꺼리는 그런 지방이었습니다. 거기다 그녀는 가나안 사람이었습니다. 가나안 사람은 본래 팔레스타인에 살던 원주민들입니다. 그들은 우상을 섬겼던 탓으로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더러운 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들과의 접촉을 꺼렸고 개나 돼지처럼 취급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23:23-24을 보면 하나님은 가나안 사람을 끊어버리겠다고 하셨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그들의 신을 숭배하지 말라, 섬기지 말라,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라, 그것들을 부셔라 그리고 하나님만 섬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민수기 33:52-53을 보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할 일을 명하셨습니다.
“그 땅 거민을 다 몰아내라. 우상과 신당을 다 파괴해 버리라 그 땅을 취하라 거기 살아라.”고 하셨습니다.
살 가치조차 없는 가나안 원주민의 후손입니다. 그런 여자가 유대인 예수를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모든 벽을 뛰어넘었습니다. 편견도 법도 체면도 손가락질도 딸을 살리려는 어머니의 기도를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기도하는데 뭐 그리 체면과 입장이 중요합니까? 체면 때문에 예수를 포기하고 기도를 포기하는게 옳습니까, 아니면 체면을 접더라도 예수 믿고 기도하는게 좋습니까?
올림픽 체조, 수영경기를 지켜보았습니다. 출전선수들의 옷차림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입은 건지, 벗은 건지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들이 체면 때문에 긴 바지에 티셔츠 입고 넥타이 메고 구두까지 신고서야 어떻게 메달을 딸 수 있겠습니까? 기도의 금메달 응답의 금메달에 방해되는 것들을 집어던집시다.
2. 소리 질러 기도했습니다.
22절을 보면 “나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라고 했습니다. 소리 질렀다는 것은 사람들이 에워싸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소리가 예수님께 들리도록 고함을 쳤다는 것입니다. 그 소리를 예수님도 제자도 에워싼 군종도 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어떤 기도라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들리지 않는 기도, 상달되지 않는 기도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독백에 불과합니다. 혼자 중얼거리면 뭐합니까?
건강한 사람은 대화를, 믿음이 있는 사람은 기도를 합니다.
혼자 남이 듣거나 말거나 중얼거리는 것을 독백(Monologue)라고 합니다. 둘이서 도란도란 얘기하는 것을 대화(Dialogue)라고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영적대화, 하나님과의 대화를 기도(Prayer)라고 합니다.
성경은 소리 질러 찬송하고 소리 질러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딸을 살리느냐 포기하느냐의 마지막 기회 앞에서 소리 못 지를 이유가 없었습니다.
“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영적세계에서는 기도소리 찬송소리 큰 사람이 이깁니다. 소리 질러, 소리 내어, 내 소리로 기도합시다.
3. 무관심을 넘어선 기도였습니다.
23절을 보면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내 딸이 흉악한 귀신들렸습니다. 내 딸을 살려 달라”며 소리 지르고 뒤 따라 가는 그녀를 본척만척하신 것입니다. 단 한마디도 뭐라고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철저하게 무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인격적으로 대접받고 인정받기 위해 그녀가 예수를 따라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딸 살리는 것이 주목적입니다. 응답이 없고 관심이 없어 보이더라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종합병원에 가면 기분상할 때가 많습니다. 접수구에서 기다리면서 간호사들이며 의사를 만날 때, 치료받을 때 자존심 상하고 기분이 나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병원에 가는 것은 대접받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뭐래도 병 고치면 되는 것입니다. 대접 안하고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예수를 떠나고 교회를 떠나고 기도를 포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4. 의도적 방해를 넘어선 기도였습니다.
23절을 보면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했습니다.
미친 여자처럼 소리 지르고 귀찮게 굴며 따라옵니다. 따끔하게 야단쳐 돌려보내십시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할 짓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오히려 예수님께 그녀를 도와주시라고 부탁하고 중보 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린 여기서 자칭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람들, 예수님의 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예수를 오래 믿고 교회를 오래 다니는 사람들, 직분을 맡고 교회를 섬긴다는 사람들이 취할 자세를 발견하게 됩니다. 헬퍼, 중보자,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녀에게 제자들의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겠습니까?
5. 거절과 모욕을 넘어선 기도였습니다.
24절을 보면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너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네 청을 들어줄 수 없다는 거절인 것입니다. 그러나 25절을 보면 “여자가 와서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했습니다. 반대도 방해도 무관심도 거절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바클레이의 말대로 물러설 줄 모르는 신앙이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26절입니다. 그녀가 물러서지 않고 간청하자 주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마저 그 여자를 보통 유대인들처럼 개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녀의 대답입니다. 27절을 보면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오해, 불평, 항의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들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개로 인정했습니다.
[개]를 말하는 세 가지 낱말이 있습니다.
케레브는 전투견 짖다, 공격하다, 뻔뻔한 남자, 매춘부라는 뜻입니다. 퀴온은 큰개, 사냥개를 뜻합니다. 퀴나리온은 강아지, 애완용 작은 개를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사용하신 단어는 퀴나리온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여자를 전투견이나 더럽고 사나운 큰 개로 보지 않고 애완용 개라는 단어를 쓰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퀴나리온이라고 부르시는 그 말씀을 알아듣고
‘주여 옳소이다.’라고 응답한 것입니다.
경기가 나빠지면서 애완용 개를 길거리에 버리는 것이 1만 7천여마리가 넘는다고 합니다만 우리나라 애완동물 시장 규모를 대략 1조원으로 봅니다. 애견 인구는 약 100만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개팔자가 상팔자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애완견용품을 보면 실감이 납니다.
애견용 바바리코트 15만5천원, 레인코트 17만5천원, 캐리백 17만5천원, 담요 37만원, 이태리 시노벨카 제품 가죽 목걸이 19만9천원, 금사각 메달 체인 15만 3천원, 애견가방 14만9천원, 프랑스 향수 오마이독 4만5천원, 소파 4만7천원, 정수기 9만원, 자동급식기 40만원, 헤어드라이 30만원, 개 호텔 1박 10만원, 기저귀생리대 10만원, 장례비 60만원(화장 납골당 안치비 포함)
일본, 미국의 경우 호텔에서 생일잔치하고 결혼식 합니다. 신혼여행도 해외로 데리고 갑니다.
이것이 퀴나리온이 받는 예우가 되는 것입니다.
그녀가 말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 것입니다. 누구라도 이 정도로만 기도하면 응답 못 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너는 개라고 몰아붙여도 주여 옳소이다 은혜를 주옵소서라며 매달리고 기도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왜 응답을 안 하시겠습니까?
결론은 응답입니다.
28절을 보면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그녀가 시험을 참고 믿음이 클 때까지 연단하셨고 그녀는 응답주실 때까지 참고 매달리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응답을 받아낸 것입니다.
만일 그녀가 예수님이 모른 척 했을 때 제자들이 방해하고 딴죽을 걸었을 때 예수님이 정면으로 거절하고 모욕을 주었을 때 집어 팽개치고 그곳을 떠났다면 그 여자는 딸 때문에 길고 긴 세월동안 고통하며 절망 속에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주경가 벵겔은 “드디어 주님은 그녀에게 응답하셨다”고 했습니다.
왜 기도를 안 하십니까? 왜 무엇 때문에 기도를 포기하셨습니까? 자존심 때문입니까? 감정 때문입니까?
우리 모두 신령한 귀를 열고 주님의 음성을 들읍시다. “기도하라 내가 응답하리라 그 여인의 소리를 들읍시다.
“나는 기도하고 응답받았습니다.
기도하면 응답받습니다. 시험받고 응답받습니다. 기도하고 응답받고! 할렐루야!
마 15:21-28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 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태복음 15:21-28)
성경 안에는 여러 사람이 드린 여러 가지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녀를 위한 부모의 기도, 가족을 위한 가장의 기도, 국가와 민족을 위한 지도자의 기도와 왕의 기도, 그 시대를 위한 선지자의 기도 등 다양한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기도는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35을 보면 예수님도 “새벽미명에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셨다”고 했고 요한복음 17장을 보면 제자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의 경우 가장 좋고 바람직한 기도는 자신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누구보다 내가 나를 제일 잘 압니다. 내 사정을 내가 제일 잘 압니다. 그런데 나는 기도안하면서 남더러 나를 위해 기도 해 달라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기도할 수 없고 기도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를 위해 대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이런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가장 힘 있는 기도가 되려면 나 자신도 기도하고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귀신들린 딸을 위해 예수님을 만난 어떤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22절을 보면 그녀는 “가나안 여자였다”고 했습니다. 가나안 여자라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이미 그 땅에 살고 있던 원주민의 후손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가나안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 개나 돼지처럼 여기고 취급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생활이 우상숭배를 했고 도덕적으로도 음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여자에게 딸이 하나 있었는데 흉악한 귀신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당사자는 제정신이 아니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어머니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짐작컨대 온갖 노력을 다했을 것이고 백방으로 방법을 찾아 이것저것 다 해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증상은 더 악화되어 갈 뿐 고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이 그 고을을 다녀가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평소 그녀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딸을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본문은 그녀가 예수님을 만나 딸을 살린 과정과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경해석학자들은 그녀가 예수님을 만나 딸을 고치고 살린 과정을 기도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바클레이는 “그녀는 자기 딸의 고통을 내 것으로 받아드렸다”고 했고, “그녀의 신앙은 물러설 줄 모르는 신앙이었으며 시험받고 응답받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그녀의 기도가 어떤 기도였으며 어떻게 응답 받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1. 벽을 넘어선 기도였습니다.
21절을 보면 그녀가 살던 지역을 “두로와 시돈 지방”이라고 했고 22절을 보면 그녀를 ”가나안 여자“라고 했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이방인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특히 시돈지방은 바알우상을 섬겼던 아합 왕의 처 이세벨의 고향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가기조차 꺼리는 그런 지방이었습니다. 거기다 그녀는 가나안 사람이었습니다. 가나안 사람은 본래 팔레스타인에 살던 원주민들입니다. 그들은 우상을 섬겼던 탓으로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더러운 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들과의 접촉을 꺼렸고 개나 돼지처럼 취급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23:23-24을 보면 하나님은 가나안 사람을 끊어버리겠다고 하셨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그들의 신을 숭배하지 말라, 섬기지 말라,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라, 그것들을 부셔라 그리고 하나님만 섬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민수기 33:52-53을 보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할 일을 명하셨습니다.
“그 땅 거민을 다 몰아내라. 우상과 신당을 다 파괴해 버리라 그 땅을 취하라 거기 살아라.”고 하셨습니다.
살 가치조차 없는 가나안 원주민의 후손입니다. 그런 여자가 유대인 예수를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모든 벽을 뛰어넘었습니다. 편견도 법도 체면도 손가락질도 딸을 살리려는 어머니의 기도를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기도하는데 뭐 그리 체면과 입장이 중요합니까? 체면 때문에 예수를 포기하고 기도를 포기하는게 옳습니까, 아니면 체면을 접더라도 예수 믿고 기도하는게 좋습니까?
올림픽 체조, 수영경기를 지켜보았습니다. 출전선수들의 옷차림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입은 건지, 벗은 건지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들이 체면 때문에 긴 바지에 티셔츠 입고 넥타이 메고 구두까지 신고서야 어떻게 메달을 딸 수 있겠습니까? 기도의 금메달 응답의 금메달에 방해되는 것들을 집어던집시다.
2. 소리 질러 기도했습니다.
22절을 보면 “나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라고 했습니다. 소리 질렀다는 것은 사람들이 에워싸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소리가 예수님께 들리도록 고함을 쳤다는 것입니다. 그 소리를 예수님도 제자도 에워싼 군종도 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어떤 기도라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들리지 않는 기도, 상달되지 않는 기도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독백에 불과합니다. 혼자 중얼거리면 뭐합니까?
건강한 사람은 대화를, 믿음이 있는 사람은 기도를 합니다.
혼자 남이 듣거나 말거나 중얼거리는 것을 독백(Monologue)라고 합니다. 둘이서 도란도란 얘기하는 것을 대화(Dialogue)라고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영적대화, 하나님과의 대화를 기도(Prayer)라고 합니다.
성경은 소리 질러 찬송하고 소리 질러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딸을 살리느냐 포기하느냐의 마지막 기회 앞에서 소리 못 지를 이유가 없었습니다.
“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영적세계에서는 기도소리 찬송소리 큰 사람이 이깁니다. 소리 질러, 소리 내어, 내 소리로 기도합시다.
3. 무관심을 넘어선 기도였습니다.
23절을 보면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내 딸이 흉악한 귀신들렸습니다. 내 딸을 살려 달라”며 소리 지르고 뒤 따라 가는 그녀를 본척만척하신 것입니다. 단 한마디도 뭐라고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철저하게 무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인격적으로 대접받고 인정받기 위해 그녀가 예수를 따라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딸 살리는 것이 주목적입니다. 응답이 없고 관심이 없어 보이더라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종합병원에 가면 기분상할 때가 많습니다. 접수구에서 기다리면서 간호사들이며 의사를 만날 때, 치료받을 때 자존심 상하고 기분이 나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병원에 가는 것은 대접받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뭐래도 병 고치면 되는 것입니다. 대접 안하고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예수를 떠나고 교회를 떠나고 기도를 포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4. 의도적 방해를 넘어선 기도였습니다.
23절을 보면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했습니다.
미친 여자처럼 소리 지르고 귀찮게 굴며 따라옵니다. 따끔하게 야단쳐 돌려보내십시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할 짓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오히려 예수님께 그녀를 도와주시라고 부탁하고 중보 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린 여기서 자칭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람들, 예수님의 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예수를 오래 믿고 교회를 오래 다니는 사람들, 직분을 맡고 교회를 섬긴다는 사람들이 취할 자세를 발견하게 됩니다. 헬퍼, 중보자,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녀에게 제자들의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겠습니까?
5. 거절과 모욕을 넘어선 기도였습니다.
24절을 보면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너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네 청을 들어줄 수 없다는 거절인 것입니다. 그러나 25절을 보면 “여자가 와서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했습니다. 반대도 방해도 무관심도 거절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바클레이의 말대로 물러설 줄 모르는 신앙이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26절입니다. 그녀가 물러서지 않고 간청하자 주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마저 그 여자를 보통 유대인들처럼 개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녀의 대답입니다. 27절을 보면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오해, 불평, 항의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들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개로 인정했습니다.
[개]를 말하는 세 가지 낱말이 있습니다.
케레브는 전투견 짖다, 공격하다, 뻔뻔한 남자, 매춘부라는 뜻입니다. 퀴온은 큰개, 사냥개를 뜻합니다. 퀴나리온은 강아지, 애완용 작은 개를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사용하신 단어는 퀴나리온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여자를 전투견이나 더럽고 사나운 큰 개로 보지 않고 애완용 개라는 단어를 쓰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퀴나리온이라고 부르시는 그 말씀을 알아듣고
‘주여 옳소이다.’라고 응답한 것입니다.
경기가 나빠지면서 애완용 개를 길거리에 버리는 것이 1만 7천여마리가 넘는다고 합니다만 우리나라 애완동물 시장 규모를 대략 1조원으로 봅니다. 애견 인구는 약 100만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개팔자가 상팔자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애완견용품을 보면 실감이 납니다.
애견용 바바리코트 15만5천원, 레인코트 17만5천원, 캐리백 17만5천원, 담요 37만원, 이태리 시노벨카 제품 가죽 목걸이 19만9천원, 금사각 메달 체인 15만 3천원, 애견가방 14만9천원, 프랑스 향수 오마이독 4만5천원, 소파 4만7천원, 정수기 9만원, 자동급식기 40만원, 헤어드라이 30만원, 개 호텔 1박 10만원, 기저귀생리대 10만원, 장례비 60만원(화장 납골당 안치비 포함)
일본, 미국의 경우 호텔에서 생일잔치하고 결혼식 합니다. 신혼여행도 해외로 데리고 갑니다.
이것이 퀴나리온이 받는 예우가 되는 것입니다.
그녀가 말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 것입니다. 누구라도 이 정도로만 기도하면 응답 못 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너는 개라고 몰아붙여도 주여 옳소이다 은혜를 주옵소서라며 매달리고 기도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왜 응답을 안 하시겠습니까?
결론은 응답입니다.
28절을 보면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그녀가 시험을 참고 믿음이 클 때까지 연단하셨고 그녀는 응답주실 때까지 참고 매달리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응답을 받아낸 것입니다.
만일 그녀가 예수님이 모른 척 했을 때 제자들이 방해하고 딴죽을 걸었을 때 예수님이 정면으로 거절하고 모욕을 주었을 때 집어 팽개치고 그곳을 떠났다면 그 여자는 딸 때문에 길고 긴 세월동안 고통하며 절망 속에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주경가 벵겔은 “드디어 주님은 그녀에게 응답하셨다”고 했습니다.
왜 기도를 안 하십니까? 왜 무엇 때문에 기도를 포기하셨습니까? 자존심 때문입니까? 감정 때문입니까?
우리 모두 신령한 귀를 열고 주님의 음성을 들읍시다. “기도하라 내가 응답하리라 그 여인의 소리를 들읍시다.
“나는 기도하고 응답받았습니다.
기도하면 응답받습니다. 시험받고 응답받습니다. 기도하고 응답받고! 할렐루야!
출처 : (마15-21)기도하고 응답받고.
글쓴이 : Moses.cane.you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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