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교회 (서울 종로구 도렴동)

2011. 3. 10. 01:04운영자자료/한국의 성지

종교교회 세번째 성전 (2001-  )

 

1896. 05 좌옹 윤치호의 요청으로 리드(C.F.Reid)목사 한국선교사로 내한 종교교회 시작

1900. 04. 15 캠벨부인이 설립한 배화학당 기도실에서 부활주일 예배드림 (자골교회라 칭함)

1901. 09 지금의 서울시경옆 내자아파트자리에 2층으로 된 붉은벽돌예배당신축

         (건축비기증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Louise Walker Chaple로 명명)

1904. 03 R.Hardie 선교사의 서울부흥회 주최하여 대부흥

1909  남감리회 최초의 한국인 목사로 초대 정춘수 목사 취임(민족대표33인중 한명)

1910. 06. 09 지금의 도렴동자리에 십자형벽돌 2층 성전 신축하고 종교교회라 칭함

1916. 01 웹?청년회가 종교 노동 야학강습소를 운영하고 영신축하동서양음악회 개최

1919 - 1921 양주삼목사 봉직

1930. 12. 08 북감리교회(정동,상동,동대문의 동자 계열)와 남감리교회(종교,자교,수표교등 교자 계열) 가 양주삼목사와 윤치호선생의 노력으로 통합. 양주삼목사가 통합감리교단 초대 총리사로 취임    (출처- http://chongkyo.net/)

 

종교교회 측면  

 

종교교회 측면 

 

종교교회 정면 

 

교회 입구

 

정문 

 

머릿돌

 

3번째 지은 성전

 

교회소개비 

 

교회 외벽

 

교회 외벽

 

첫번째 성전 벽돌 (1910-1958)

 

두번째 성전 돌 (1958-1999)

 

1층 로비 성화

 

층별 안내판

 

3층 예배실

 

강단

 

강단 십자가 

 

파이프올르간    

 

<종교교회 역사- 역사자료실, 종교교회사>

 

종교교회사 (1900-2004, 2005 발행)

 

역사자료실

 

역사자료실

 

역사자료실

 

역사자료실

 

역사자료실, 한국감리교회 시작과 윤치호 선생 시대

 

한국감리교회 시작 

 

한반도 선교의 시작은 미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가 1885년 정동제일교회를 세움으로 시작된다. 이어 남감리교의 리드 선교사가 1895년 10월 13일 제물포항에 도착함으로 한국선교가 활성화 되며 복음의 씨가 뿌려진다. 평양대부흥과 백만인 구령운동으로 한반도 부흥의 불씨를 지폈던 리드 선교사의 흔적이 남은 교회가 있다. 그곳이 바로 서울 종로구 도렴동에 있는 종교교회이다. 종교교회역사는 100년을 넘어 한국교회사와 그 맥을 같이 한다. 또한 교회사의 족적을 크게 남기므로 그 의미가 남다른 교회로 한국 개신교에 우뚝 서 있다. 종교교회는 리드 선교사 부부에 의해 세워진 남감리교 최초의 한국 개신교 교회이다. 

 

아펜젤러 선교사(정동교회, 배배학당, 감리교 최초 선교사), 스크랜턴 선교사(상동교회), 메리 스크랜턴(이화학당)

 

 좌옹 윤치호


본관 해평(海平). 호 좌옹(佐翁). 충남 아산(牙山) 출생. 일찍부터 개화운동에 투신, 1881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따라 일본에 다녀온 뒤 미국에 건너가 신학문을 배웠다. 1883년 한미수호조약(韓美修好條約) 비준 때 초대 주한(駐韓) 미국공사 L.H.푸트의 통역관으로 귀국하였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개화인사라는 이유로 의심을 받게 되자 상하이[上海]로 망명, 중서서원(中西書院)에서 3년 동안 공부하며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선교사 A.J.앨런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가서 밴더빌트대학과 에모리대학에서 영어·신학·인문사회과학 등을 공부하였다. 1895년 귀국, 총리대신 비서관을 거쳐 학부협판(學部協辦)이 되었으나, 춘생문(春生門)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 후 서재필(徐載弼)·이상재(李商在)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으며, 1898년 독립신문사 제2대 사장, 함경도 덕원부윤(德源府尹), 천안군수 등을 지냈다. 1906년 장지연(張志淵) 등과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 회장이 되어 교육사업에 힘썼다. 1910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을 조직한 후 대성학교(大成學校) 교장으로 있다가 11년 105인사건으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일제강점기 말에 한때 변절, 일본제국의회의 칙선 귀족원의원을 지냈다. 저서에 《우스운 소리》, 《영어문법첩경(捷徑)》 등이 있다.  윤치호와 남감리교회, 종교교회 시작에 공헌한 윤치호의 사적을 보면 수구파의 승리로 김옥균이 살해되자 절망한 윤치호는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는 본넬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아 한국인으로는 최초의 남감리교인이 된다. 윤치호는 동학란으로 야기된 청일전쟁으로 새 정부가 들어서게 되자 그는 귀국하여 정부요직을 맞게 되었고, 편지를 내 조선에 선교를 요청한다. 남감리교회 선교본부는 윤치호의 제안을 받아들여 동양선교 관리감독인 핸드릭스로 하여금 중국에서 활동중인 리드(C.F.Reid) 선교사에게 조선을 답사하도록 하였다. 이에 리드 선교사가 1895년 10월 13일 제물포항에 도착한다. 이때부터 남감리교회 선교가 시작되며 지금의 한국은행자리에 선교부를 설치하여 선교활동이 본격화 되었다. 

 

남감리교의 역사

 

1871년 신미양요에 의해 한미수호조약이 체결(조선대표 신현)되고, 이로 인해 푸트공사가 조선에 주재하게 된다. 푸트공사의 통역관으로 있었던 윤치호는 갑신정변에 그의 아버지 윤웅렬이 연루돼 입장이 난처해지자 상해로 망명겸 유학길을 떠나 남감리교회가 운영한 중서서원에 수학했다. 수구파의 승리로 김옥균이 살해되자 절망한 윤치호는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는 본넬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아 한국인으로는 최초의 남감리교인이 된다. 윤치호는 동학란으로 야기된 청일전쟁으로 새 정부가 들어서게 되자 그는 귀국하여 정부요직을 맞게 되었고, 편지를 내 조선에 선교를 요청한다. 남감리교회 선교본부는 윤치호의 제안을 받아들여 동양선교 관리감독인 핸드릭스로 하여금 중국에서 활동중인 리드(C.F.Reid) 선교사에게 조선을 답사하도록 하였다. 이에 리드 선교사가 1895년 10월 13일 제물포항에 도착한다. 이때부터 남감리교회 선교가 시작되며 지금의 한국은행자리에 선교부를 설치하여 선교활동이 본격화 되었다.

 

캠벨 선교사, 배화학당 시작

 

이후 1897년 캠벨부인이 입국하여 1898년 내자동에 배화학당을 시작하였다. 학교내에 예배처소를 세워 정기적인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자교와 종교교회의 시작이며 태동이 되었다. 1900년 켐벨 선교사에 의해 배화학당에 예배드리던 모임이 교회를 독립하게 되어 하나는 자하교 근처에서 시작하여 자교로, 그리고 다른 하나의 모임은 종침교 근처에서 예배 처소를 마련하여 종교교회라 이름하고 지금까지 예배드려오고 있다.

 

1902년 배화학당 학생들

 

1906년 배화학당 선교사와 학생들 

 

1895년의 제물포항

 

윤치호 선생 시대

 

윤치호 가족

 

윤치호 91865-1945)

 

미국 에모리대학 재학 당시의 윤치호

 

1976년 10월 인천 송도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윤치호의 동상

 

윤치호

 

윤치호

 

윤치호

 

윤치호 활동

 

1929년 통합전권위원회

 

1930년 남북감리교회 합동 총회

 

역사자료실, 양주삼 총리사 시대

 

양주삼 총리사

 

양주삼 총리사 

 

 

 

종교교회는 1910년 초대 정춘수 목사가 십자가형 교회를 지어 예배당으로 사용한 이래 세 번째 성전 건축을 하게 된다. 이후 감리교의 역사는 일제의 한국 침략과 지배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면서 민중계몽운동과 같은 민족의식 계발로부터 일제에 대한 무력저항운동에 이르는 다양한 민족운동에 참여하는 형태로 발전한다. 그리고 3.1운동과 종교교회는 그 역사적인 의미를 함께하는데 이는 5대·8대 담임 목사인 오화영 목사가 개신교 대표 중 한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며 민족 대표 33일 중 1인으로 참여한다. 또한 우리나라 감리교는 1920년대 말까지 미 남-북 교회가 운영하고 있었다. 이 때 국내 사역사 중심해서 단일 감리교회를 이룩하자는 합동 움직임이 활발해 졌으며 그 중심에 종교교회가 있었다.

 

순교자 양주삼 목사

 

1879년1월25일 평남 용강에서 출생했으며 중국 중서학원에서 공부하고 미국 밴더빌트 대학을 졸업하였다.  종교교회 목사와 협성신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1930년 남, 북 감리교 통합에 공을 세워 제1대 총리사가 되었다.  1924년 미 남-북 교회 안에 '진흥방침연구회'를 설치하는 것으로 시작된 미 남-북 교회의 합동 운동은 결국 1930년 12월 2일 '기독교조선감리회'라는 이름의 하나된 한국 감리교회를 탄생시킨다. 단일교단으로 새 시대를 열었던 기독교조선감리회는 창립총회에서 종교교회 4대 목사로 시무하였던 양주삼 목사를 초대 총리사(현재의 감독)로 선출하여 자치 교회 시대를 열며 감리교 역사의 큰 획을 긋는다. 얌주삼 목사는 6.25 때 8월23일에 공산군에게 납북되었다.

 

양주삼 총리사 활동 

 

1930년 양주삼 총리사 취임식

 

제1회 중, 동, 서부연회

 

1934년 제2회 총회 정동교회

 

1935년 부부연회 

 

시베리아, 만주선교 지역연회

 

종교교회 건축

 

최초의 교회당 (배화학당내에 세워짐) 루이스-워커교회당

 

남감리회와 종교교회 탄생


푸트공사의 통역관으로 있었던 윤치호는 갑신정변이 일어나서, 그의 아버지인 윤웅렬이 연루되어 입장이 난처해지자 상해로 망명겸 유학길을 떠나 남감리교회가 운영한 중서서원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수구파의 승리로 김옥균이 살해되자 절망한 윤치호는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는 본넬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아 한국인으로는 최초의 남감리교인이 되었다. 그곳 유학생활을 마치고 중국 상해로 가려고 준비하면서 켄들러 박사에게 편지를 띄웠다. "내가 모은 돈 200불을 당신께 보내오니 이 돈을 기초로 삼아서 조선에도 기독교 학교를 설립하여 내가 받은 교육과 같은 교육을 우리 동포도 받을 수 있게 하여 주소서. 만일 내가 상해로 가서 속히 조선으로 들어가면 내가 학교를 세우도록 할 것이요. 만일 나보다 먼저 조선에 가는 이가 있거든 그에게 부탁하여 학교를 세우게 하여 주되 5년이 지나도록 세우지 못하게 되거든 그 돈을 마음대로 처리해도 좋습니다." 라고 하였다. 윤치호는 동학란으로 야기된 청일전쟁으로 새 정부가 들어서게 되자 그는 귀국하여 정부요직을 맞게 되었고, 켄들러와 엘랜 중서원장에게 편지를 내 조선에 선교를 요청하였다. 남감리교회 선교본부는 윤치호의 제안을 받아들여 동양선교 관리감독인 핸드릭스로 하여금 중국에서 활동중인 리드(C.F.Reid) 선교사에게 조선을 답사하도록 하였다. 리드 선교사는 1895년 10월 13일 제물포항에 도착하였고, 이때부터 남감리교회 선교가 시작되었다. 지금의 한국은행자리에 선교부를 설치하여 선교활동이 본격화 되었고 1897년 캠벨부인이 입국하여 1898년 내자동에 배화학당을 시작하였다. 학교내에 예배처소를 세워 정기적인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자교와 종교교회의 시작이 되었다.

 

1906년 자골교회 교인들

  

첫번째 건축된 벽돌예배당 (1910-1958)

 

남감리회 교회성장


종교교회의 이름은 아무래도 종침교의 이름을 따서 종교화 한 것 같다. 이 종침교의 유래는 이러하다. 연산군의 통치하에 허종과 허침이란 형제신하가 있었다. 이들에게는 난설이란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녀는 그림을 잘 그리고 학식이 높은 시인이었다. 연산군의 폭정으로 그를 폐위시켜야 한다는 소문속에 왕의 생모인 폐비 윤씨에 관한 어전회의에 참석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두 형제는 이 회의에 참석하여 수락하든 거절하든 곤경에 빠질 정치적 입장에 놓여 난설이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녀는 두 오라버니가 입궁하러 가되, 적당한 장소에서 난동을 피워서라도 어전회의에 불참할 것을 권하였다. 두 형제는 양반의 체면에도 불구하고 경복궁 가게의 다리밑으로 떨어져 수선을 피워 시간을 끌다 어전회의의 참석을 면하여 의제 결정에 빠지게 되었다. 그 이후 이 다리를 두 형제의 이름을 따서 종침교라 불리워졌다. 이렇게 종침교의 이름이 시작되었다. 1900년 켐벨 선교사에 의해 배화학당에 예배드리던 모임이 교회를 독립하게 되어 하나는 자하교 근처에서 시작하여 자교로, 그리고 다른 하나의 모임은 이제 설명한 종침교 근처에서 예배 처소를 마련하여 종교교회라 이름하고 지금까지 이 자리를 지켜 100여년을 예배드려오고 있다. 1910년 초대 정춘수 목사가 십자가형 교회를 지어 예배당으로 사용한 이래 세 번째 성전 건축을 건축하게 된것이다.  이후 감리교의 역사는 일제의 한국 침략과 지배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면서 민중계몽운동과 같은 민족의식 계발로부터 일제에 대한 무력저항운동에 이르는 다양한 민족운동에 참여하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3.1운동 이후에는 침체된 교회 분위기를 쇄신하고 감소해가는 교세를 만회할 뿐 아니라 우리 민족과 상관없는 남-북 감리교회란 분열 체제를 극복하고, 단일 감리교회를 이룩하자는 두 감리교회의 합동 움직임이 나타났다. 1924년 두 교회 안에 '진흥방침연구회'를 설치하는 것으로 시작된 두 교회의 합동 운동은 결국 1930년 12월 2일 '기독교조선감리회'라는 이름의 하나된 한국 감리교회를 탄생시켰다. "진정한 기독교회", "진정한 감리교회", "한국적 교회"를 목적으로 형성된 기독교조선감리회는 창립 총회에서 "기독교조선감리회 교리적 선언"을 채택하였으며, 우리교회 4대 목사로 시무하였던 양주삼(梁柱三)목사를 초대 총리사(摠理使, 현재의 감독)로 선출하여 자치 교회 시대로 접어들었다.

 

첫번째 벽돌 예배당 (1910-1958)

 

임시예배 처소로 사용된 배화학교 체육관 (1958-1959)

 

두번째 건축된 양주삼 기념예배당 (1958-1999) 

 

두번째 건축된 양주삼 기념예배당 (1958-1999)

 

두번째 건축된 양주삼 기념예배당 (1958-1999)

 

역사자료실, 종교교회 이모저모

 

종교교회 이모저모 

 

윤치호 서체 등  

 

1928년 윤치호 의자, 1917년 부터 일한 중앙 YMCA 회장 당시 견지동 자택 거실에서 사용하던 것

 

윤치호 의자

 

윤치호 여행가방, 1880년 도미할 때 가져갔던 여행용 가방

 

옛 액자  

 

인물로 본 종교교회사

 

인물로 본 종교교회사

 

인물로 본 종교교회사

 

미 남북감리교회 연회장 및 감리교 감독

 

미 남북감리교회 연회장 

 

미 남북감리교회 연회장

 

미 남북감리교회 연회장  

 

전시물, 양매륜 장로 영결식순 등  

 

윤치호 생가 등

 

윤치호 관련 서적

 

윤치호 관련 서적

 

윤치호 여권, 고종황제 하사품 등

 

윤치호 일기장 

 

양주삼 총리사 출판물

 

반민 특위자료

 

초대교회 자료 

 

정초석 유물

 

정초석 유물

 

상소문 고종황제 어필  

 

전시물

 

전시물

 

돌 예배당 말씀단

 

전시물

 

당회록, 구역회록, 교회수첩 등

 

1920년대 종교교회 주변 지도   

 

 

 

 

 

 

 

1942년 주일학교

 

1943년 주일학교 교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