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3. 10. 00:54ㆍ운영자자료/한국의 성지
내리교회 연혁 (1885.7- 1964.2. )
1885.7.29 아펜젤라 선교사에 의해 내리교회 시작 - "한국의 어머니교회 출범"
1890 한국 최초의 교회당 건축 "노병일씨 6간 회당 건축"
1891.8. 제물포웨슬리 기념교회 건축
1892.3.12 영화학교 설립 "한국 최초의 초등학교설립"
1893 한국 최초의 여선교회 조직 "보호여회: 존슨부인과 백헬렌 전도부인"
1894 한국 최초의 자비교회당 건축 "여자 예배당 6간을 26원으로 건축"
1895 한국 최초의 자비 개척교회 설립 "담방리 교회(현 만수교회)를 10원으로 개척"
1897 내리 엡�청년회 조직 "한국 최초의 기독청년회 조직"
1899.12.12 한국 최초의 신학회 조직 개강 "감리교신학대학 전신"
1901.5.4 본 교회 초대교인 김기범목사 안수 받음 "한국 최초의 목사안수"
1901.11.1 한국 최초의 지방회 조직 "한국 서지방"
1901.12.25 내리교회 예배당 신축봉헌 "십자가형 교회"
1902.3 본 교회에서 한국 최초의 남북 감리교회 합동신학회 개최
1902.11 한국 최초의 하와이 이민선 제1호선에 내리교인 50명이 이민감
1902.12.22 한국 최초의 해외선교사 홍승하 전도사를 하와이로 파송
1903.11.3 한국 최초의 해외 개척교회 설립 "현 호놀루루 미연합감리교회"
1904 연회에서 한국 감리교회중 최우수 교회로 표창받음
1906. 6.13 엡�청년회 해산당함
1907.10 한국최초 예배당 남녀 칸막이 철폐
1908.4 엡웟청년회 독자부활조직
1919 여자청년회 조직
1923 소년회 조직
1925 내리 조선 소년 척후대 조직
1954.12 한국 최초의 메시아 전곡 발표
1958.12.22 교회당 완공봉헌"건평 323평 2층"
1961.4 내리유치원 설립
1964.2.26 교회당 완전전소
내리교회
머릿돌
머릿돌
100주년 기념교회
창립 122주년 맞는 인천내리교회 (사진, 글 출처- 내리교회 홈페이지, http://www.naeri.org/)
120년전 구한말 쇄국과 개국이 대립하며 국가의 진로가 불투명한 시절. 4월5일 제물포항에는 일단의 미국 선교사들이 발을 디뎠다.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 일행이 바로 그들이다. 공식적인 개신교의 첫 선교사로 이 땅을 찾은 이들로 인해 향후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난 발전상을 거듭하고 있는 한국 교회의 태동은 시작됐다. 또한 이날은 인천 내리교회(담임목사·김흥규)가 창립된 날이다. 올해로 꼭 120주년을 맞는 내리교회는 한국 교회의 모교회로서 그 역사적 의미가 남다르다.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의 첫 설교로 시작된 인천의 기독교는 바로 그대로 한국 교회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5년 4월5일, 인천에서는 내리교회의 창립과 최초의 선교사 도래를 기념하는 대대적인 행사가 열린다. 인천을 필두로 전국의 개신교회가 모두 참여, 기독교의 참 뜻을 기리고 한국교회의 각성을 촉구하는 대성회가 펼쳐진다. 인천기독교총연합회 주관으로 한국기독교 총연합회와 기독교 교회협의회 등 교파를 초월해 모든 기독교인들이 참여, 오전 10시 서울 양화진 외국인 공원묘지에 안장된 아펜젤러 묘소를 찾아 120주년 기념비 제막식을 갖는다. 이어 오후에는 한국 선교 120주년을 기념하는 감사 예배 및 1천200만 성도 대각성 부흥성회를 개최한다. 인천 월미도 선교100주년 기념탑에서의 경배와 찬양을 마친 뒤 신도들은 내리교회까지 도보로 행진, 내리교회 본당에서 대규모 부흥성회 발대식을 가질 예정이다. ‘한국교회 1천200만 성도 대각성 부흥성회 발대식’을 기점으로 전국을 순회한 뒤 서울에서 부흥성회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한국 교회의 모교회로서 창립 120주년을 맞은 인천 내리교회. 120년전 인천을 찾은 아펜젤러 부부와 당시 한국 기독교의 주춧돌을 놓았던 내리교회 및 신도들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본다.
(조태현기자/ 종이신문정보/20050405일자 1판 12면 게재)
한국 선교 120주년 기념비
한국 선교 120주년 기념비
인천기독교총연합회 주관으로 한국기독교 총연합회와 기독교 교회협의회 등 교파를 초월해 모든 기독교인들이 참여, 2005.4.5.오전 10시 서울 양화진 외국인 공원묘지에 안장된 아펜젤러 묘소를 찾아 120주년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다.
한국 선교 120주년 기념비
교회 내부
교회 내부
교회 내부
스테인드글라스
스테인드글라스
내리 역사 전시관
내리 역사 전시관
내리 역사 전시관
내리 역사 전시관
내리 역사 전시관
내리 역사 전시관
내리 역사 전시관
내리 역사전시관
역대 교역자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
인천 중구 중앙동1가 18. 인천항이 바라보이는 작은 언덕에 ‘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이 탑은 한국 교계가 1986년 기독교 선교 100주년을 맞아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제물포항에 내린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조형물이다. 약 50평의 대지 위에 17m 높이로 세워졌으며, 높이 2.7m의 3인 청동상,3개의 탑신,6면의 부조 및 원형의 석조 계단으로 구성돼 있다.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사를 표현한 3인의 청동상 밑엔 아펜젤러 선교사가 제물포항에 내리면서 드렸던 기도문이 새겨져 있어 선교 121년을 맞은 우리에게 가르침과 도전 정신을 준다.
1880년대 제물포의 모습
1895년 내리교회 모습
1901년 신축 봉헌된 십자가형의 교회당
경인철도 기공식에 참석한 데실러 선교사
1913년에 건축된 영화여학교
여성전용 예배당 (출처- http://cafe.daum.net/coreasan1)
1895년 웨슬리교회(현 내리교회)에서 세웠던 여성전용 예배당이다. 남녀가 유별하였던 시대적 상황속에서 칸막이를 치고 예배를 드렸던 것과는 달리 여성들만 사용하는 예배당을 마련하였다. 여인들은 빨래를 빨아서 받은 돈을 헌금하였고 남자들은 예배당건축에 직접 나섰다고 한다.
존스 목사의 부인인 벵겔선교사로 인천 영화여학교 설립자이다.
존스 목사의 부인인 벵겔선교사 82세때 모습
존스 선교사 (조원시 선교사) 가족, 1895년 출생한 장녀 캐서린과 부부
강세실리아(좌) 벵겔 부인(중앙) 이백헬렌 전도부인(우) (출처-http://cafe.daum.net/kchistory)
이백헨렌 전도부인
1905년 하와이 이민을 방문한 존스 목사 내외
1918년 영화여학교 헤스 교장 송별회 기념 사진 (출처- http://cafe.daum.net/coreasan1)
영화남학교
1915년 영화학교 사진첩 (출처- http://cafe.daum.net/coreasan1)
1915년 영화학교 사진첩
1915년 영화학교 사진첩
1915년 영화학교 사진첩
1915년 영화학교 사진첩
1915년 영화학교 사진첩
1926년 신흥식 목사 시절 엡웟청년회
1954년 성탄절 한곡 최초 메시아 전곡 발표회
1964년 에배당 전소 전 예배당 내부 모습
1964년 예배당 전소된 후 불탄 예배당에서 예배 드리는 모습
내리교회 창립 120주년 기념 흉상 제막 (아펜젤라, 조원시 목사, 2005.7.17, 한국 최초의 목사 김기범 목사 흉상 제막식, 2005.10.16)
흉상 제막의 글
초대 아펜젤러 목사 (1885-1890)
미 감리교회의 한국 최초 선교사. 드루신학교를 졸업한 아펜젤러는 1885년 2월에 목사안수 받고 그 이튿날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일본을 경유해서 4월 5일 부활절에 제물포에 입항했다. 아펜젤러 목사는 서울에 들어가기까지 제물포에 머물면서 내리교회를 세웠고 이후 배재학당, 정동교회를 창립했으며 1902년 6월 성서번역위원회 참석차 목포로 가던 중 군산 앞 바다에서 해상 사고로 순교하기까지 17년을 한국 백성을 위해 선교사로서, 교육자로서 헌신했다.
한국 감리교 첫 예배당세운 아펜젤러 목사
“가마 하나에는 8명의 가마꾼이 따랐습니다. 4명이 한 조가 되어 가마를 나릅니다. 가마꾼들은 평균 1시간에 4마일 정도의 속도로 빠르게 달립니다. 교대할 때는 교대할 팀이 같은 속도로 옆에서 걸어가면서 가마의 손잡이를 잡고 멜빵을 한 쪽 어깨에 걸치면서 들어오면 다른 편은 물러가는 식으로 상당히 민첩하게 교대하는데 걸음이 멈춰지거나 늦어지지 않습니다.” 1890년 인천에서 가마를 타고 서울에 들어온 셔우드 홀이 기록한 가마꾼에 관한 기록이다. 이 기록을 통해 처음 복음이 전해질 무렵 가깝고도 먼 인천의 모습을 어림풋이 떠올릴 수 있다. 부산과 원산에 이어 1883년 개항된 인천은 외국문물의 집산지로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개항 후 일본지계가 설정되고 후에 청국지계 그리고 서구열강의 공동지계가 설정되어 인천은 그야말로 서양문물의 전시장이 되어갔다. 지계(地界)란 외국인 거주지역으로 치외법권이 인정된 우리 나라 속의 외국이었다. 인천의 외국지계는 제물포를 중심으로 그 영역을 확대해 갔다. 개항이후 인천에는 외국의 물건을 하역하는 일에서부터 도로작업 그리고 가옥건축에 이르기까지 장정들의 일손이 많이 필요해 졌다. 이런 소문을 듣고 찾아온 장정들로 인천은 거대한 노동시장으로 변모해 갔다. 서울에 선교의 터를 구축한 감리교 선교사들은 곧 매력적인 인천선교에 착수하여 1889년 청국지계 내에 초가집 2채를 구입하여 책방을 열었다. 그리고 노병일을 이곳에 파송하여 책을 팔면서 전도를 하게 했다. 그러나 청국지계에서는 선교가 거의 불가능했으므로 아펜젤러는 선교의 근거지를 내동 언덕으로 옮기도록 했다. 그 후 노병일은 2년여 동안 인천에 거주하면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으나 선교의 결실이 거의 없었다. 노병일의 지나친 열정과 지방정부의 선교탄압이 그 원인이었다. 노병일은 밤에 잠자리를 방해할 정도로 크게 외치고 다니는가 하면 행인들에게 격분한 표정으로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라고 외치고 다녔다고 한다. 때가 아직 이르지 않은 상태에서 말이다. 유교문화에 젖어 있던 지방관리들은 이런 꼴을 가만 놔 둘 리 없었다. 그들은 서양종교를 외치고 다니는 노병일에게 전도를 금할 것과 만일 어길 시 퇴거를 명한다는 경고를 하였다. 관리들의 이런 서슬 시퍼런 태도를 보면서 서민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인천은 여전히 매력적인 선교지였다. 이런 판단에 따라 1891년 6월 내한한 굿셀감독은 아펜젤러를 인천(제물포)지역의 선교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아펜젤러는 매주 말을 타고 인천에 와서 주일을 보낸 후 배재학당의 강의를 위해 월요일이면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서 인천까지 말을 타고 걸리는 시간은 7시간 정도였다. 이렇게 말을 타고 다니면서 전도하면서 아펜젤러는 인천에 한국 최초의 예배당을 짓는다. 아무래도 한국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작지만 특이한 건물이 필요했다. 건물은 1891년에 짓기 시작하여 그 해 겨울 아직 완공되지 않은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겉에는 하얀색 석회를 발랐고, 지붕은 일본식 기와를 얹었다. 방은 두 개였고,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다. 내부는 아주 단순했다. 설교단 하나만 덩그러니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10평이 겨우 넘는 집에 방 두 개를 넣었으니 큰 방이 기껏해야 6평을 넘지 못했을 것이지만 바닥에 앉으면 설교자를 제외하고 성인 12명은 능히 예배드릴 만한 크기였다. 그래도 이 집은 한국에서 지은 최초의 감리교 예배당이란 기념비적인 의미를 갖는다. 아펜젤러는 이 예배당을 지은 후에도 말을 타고 내려와 예배를 인도했다.
초대 아펜젤러 목사
초대 아펜젤러 목사
제2대 조원시 목사 (존스, 1892-1903)
아펜젤러 목사를 이은 내리교회 초창기의 뛰어난 지도자가 바로 조원시 (존스) 목사이다. 그는 1888년 5월에 약관 20세의 나이로 선교사로 내한하여 약 5년간 배재학당에서 교편도 잡고 문서출판 사업도 하다가 1892년부터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펼쳤다. 아펜젤러가 선교의 터를 닦았다면 조원시 목사는 그 터 위에 전도와 교육 전반에 걸쳐 괄목할만한 업적을 쌓은 내리의 아버지라 할만한 분이다. 그는 1892년에 한국 최초 초등교육기관인 영화학교를 개설했고 강화, 연안, 해주, 남양 지방에 전도를 시작했고 1894년에는 한국인 자력으로 교회당을 건축 봉헌했으며 한국 최초의 신학회를 조직하여 이동신학교를 개설했고 1901년 성탄절에는 내동 현 위치에 십자가형 벽돌 예배당을지었고 교인 다수가 하와이로 이민함에 따라 홍승하 전도사를 하와이에 파송하기도 했다. 한국 교회 찬송가 보급에도 공한한 그는 그 후 서울에서 신학월보를 창간하고 The Korea Review를 편집발간하였고 서울 YMCA 창립에 공헌했으며 1905년에는 초대 신학당 (현 감신대) 당장에 취임하였다. 조원시 목사는 1919년 5월 뉴욕에서 51세로 별세했다.
조원시 목사의 노년기 모습
김찬희 박사가 입수, 지난 7월18일 인천내리교회에서 열린 '내리교회 창립 120주년 기념 학술 세미나'에서 처음으로 공개 했다.
제2대 조원시 목사
제2대 조원시 목사
제2대 조원시 목사
제3대 김기범 목사 (1903-1905, 1907-1910)
김기범 목사는 내리의 초대교인으로서 노병일의 전도를 받아 교인이 되었다. 김 목사는 한국인으로서는 김창식 목사와 더불어 목사 안수를 받음으로써 한국감리교회는 물론 한국 개신교 전체를 통틀어서 최초로 목사가 된 분이며 또한 내리교회의 첫 한국인 담임목사가 되신 분이다. 그는 내리교회의 전도사를 거쳐 신학회 전도사과정을 이수하고 원산으로 파송되었다가 1901년 5월 14일에 서울 상동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같은 해에 내리교회의 초대 한국인 목사로 파송되었다. 김기범 목사는 신병으로 1905년에 휴직하였다가 1907년에 다시 복직하여 1910년까지 시무하였다. 김기범 목사가 시무하던 해에 을사조약이 있었고 당시 교회의 엡�청년회가 항일운동에 가담하였다 하여 해체당한 일도 있었다. 일찍이 교육에 관심을 두었던 김 목사는 존스 선교사를 도와 영화학교를 창립하는데도 공헌했다.
제3대 김기범 목사
제3대 김기범 목사
제3대 김기범 목사
내리교회 하와이 이민사 및 선교 역사
1902.11 한국 최초의 하와이 이민선 제1호선에 내리교인 50명이 이민감
1902.12.22 한국 최초의 해외선교사 홍승하 전도사를 하와이로 파송
1903.11.3 한국 최초의 해외 개척교회 설립 "현 호놀루루 미연합감리교회"
내리교회 하와이 이민사
내리교회 하와이 이민사
내리교회 하와이 이민사
내리교회 하와이 이민사
내리교회 하와이 이민사
내리교회 하와이 이민사
내리교회 하와이 이민사
내리교회 하와이 이민사
내리교회 하와이 이민사
내리교회 하와이 이민사
내리교회 하와이 이민사
내리교회 하와이 이민사
내리교회 하와이 이민사
내리교회 하와이 이민사
내리교회 하와이 이민사
내리교회 하와이 이민사
내리교회 하와이 이민사
내리교회 하와이 이민사
내리교회 하와이 이민사
초기 감리교 대표 '학자 선교사' 조원시
“만일 딱 한 문장으로 선교사로서의 조원시 박사를 말한다면 이것이 될 것이다. 그는 인간에 대한 심원한 이해와 깊은 동정심을 지닌 학자의 본능과 습관을 가진 분이었다.” 인천내리교회 제2대 담임자 조원시(George Heber Jones, 1867~1919) 목사의 삶은 선교사 윌리엄 노블(William A, Noble)의 이같은 추모의 글로 압축된다. 조원시 목사는 '인천, 강화, 남양, 황해도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선교 초기 감리교회의 대표적인 '학자 선교사'다. 특히 선교활동은 물론 교육사업, 하와이 이민, 학술 연구 등 그가 인천에서 남긴 업적은 괄목할만하다. 1867년 8월14일 뉴욕 주 모호크(Mohawk)에서 태어난 조원시 목사는 20세 약관의 나이에 미북감리회의 한국선교사로서 1888년 5월14일 제물포에 첫발을 내디뎠다. 서울 배재학당에서 수학 등을 가르치면서 아펜젤러의 사역을 돕는 일로 한국생활을 시작한 그가 인천에 온 것은 1892년. 그가 내리교회를 선교 거점으로 삼아 선교활동을 펼친 1903년까지는 인천 강화지역에 가장 왕성한 감리교 운동이 일어난 시기였다. 강화 교항교회, 홍의교회, 고비교회, 담방리교회(현 만수교회), 부평 굴재교회, 하리교회, 연압읍교회 등 수많은 감리교회들이 이 당시에 설립됐다. 선교활동 외에 조원시목사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교육사업이다. 그가 인천에 와서 제일 먼저 한 일 또한 교육사업으로 배재학당 시절, 자신의 한국어 선생 부부를 인천으로 이주시켜 '소년 소녀 매일학교'(영화학교의 전신)를 세웠다. 조원시 목사는 한국 역사와 문화, 전통 종교에 대한 학술 연구에도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한국어 사전을 직접 편찬해 한국어에 서툰 선교사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문서 선교를 통해 인쇄 출판 분야에서도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1892년 루이스 로쓰와일러(Louis C. Rothweiler)와 공동으로 한국 최초의 찬송가를 편찬했으며 1892년 창간된 한국 최초의 잡지 'The Korean Repository'의 발간과 편집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00년 12월에는 제물포 우각현(현 영화학교 자리)에서 최초의 우리말 신학연구지인 '신학월보'를 창간, 사장 겸 주필로서 깊이 있는 논설들을 많이 남겼다. 그가 창간한 'The Korea Methodist'는 1905년 장로교에서 발간한 'The Korea Field'와 함께 'The Korea Mission Field'로 통합됐는데, 이 통합잡지는 일제 강점기의 한국 교회사를 서술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조원시 목사가 인천에 끼친 영향과 관련해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이 그가 한인들의 하와이 이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1902년 12월22일 한국 최초로 하와이 이민을 떠났던 121명 가운데에는 내리교회 교인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바로 이 하와이 이민을 실질적으로 주선하고 지원했던 주인공이 조원시 목사였다. 이어 조원시 목사는 1903년 미주 최초의 한인 교회인 오늘의 그리스도 연합 감리교회가 태동되도록 하기도 했다. 김진형 목사(죽림교회 담임목사)는 '하와이 이민과 조원시'란 세미나 발표자료를 통해 조원시 목사가 하와이 이민에 적극적이었던 데 대해 “당시 극심한 가뭄이 중부지방을 휩쓰는 등 한국에서의 삶이 힘든 상황에서 하와이에서의 생활이 한국에서의 생활보다 훨씬 낫고 신앙의 자유도 누릴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파악했다. 조원시 목사는 1909년 5월 노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한국 선교를 위해 많은 일을 하다가 1919년 5월11일 52세의 나이로 플로리다의 마이애미에서 별세했다. ⓒ 경인일보
김기범 목사
지난 1901년 5월14일 오후 2시 새로 건축된 서울 상동교회에서 한국 개신교의 역사를 새로 쓰는 제17회 한국선교회가 열렸다. 이날 무어 감독(Bishop D. H. Moore)의 주례로 시란돈, 조원시, 로보올 등 서양 목사 보좌를 받아 대한기독교감리회 인천내리교회 초대 교인인 김기범(1868~1920년)이 김창식 등과 함께 한국인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김기범은 목사 안수를 받은 그 해 한국 개신교의 씨앗이 뿌려졌던 인천 내리교회의 초대(외국인 목사 포함하면 3대) 한국인 목사로 파송됐다. 미국 감리교회는 1885년 한국 파견 최초 선교사로 인천내리교회의 선구자였던 아펜젤러 목사와 2대 조원시 목사의 뒤를 이어 최초의 한국인 목사를 임명함으로써 신앙과 선교활동의 폭 넓혀 가기 시작했다. 김기범은 1903~1905년, 1907~1910년까지 두차례에 걸쳐 인천내리교회 담임목사로 재직하면서 교세 확장은 물론 교육운동과 항일운동등 민족적 자긍심을 키우는 목회활동에 주력했다. 김기범은 황해도 연안의 부농 양반가정에서 태어나 순탄한 성장기를 보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보부상의 중심지였던 개성에서 태어난 만큼 서울을 자주 오가며 서양 문물을 접한 것으로 보인다. 1889년 보부상과 함께 인천(당시 제물포)을 찾은 김기범은 아펜젤러 목사를 도와 전도활동에 매진하던 노병일 권사, 백혜란 전도사 등과 인연을 맺는다. 그는 한발 더 나가 이명숙, 장경화, 복정채 등과 함께 인천내리교회의 초대 교인으로 본격적인 신앙인의 길을 택한다. 인천내리교회가 지난 1985년 펴낸 '내리 100년사'는 “(김기범은)노병일씨의 전도로 후임 내리교회 전도사가 돼 1899년 신학회 전도사 과정을 이수하고 그 해 원산(元山)으로 파송됐다가 1901년 한국인 최초의 목사 안수를 받은뒤 그 해 내리교회의 초대 한국인 목사로 파송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천내리교회 초대 한국인 목사로 봉직하던 김기범은 교회 안에 영화학교를 설립해 인가를 받아내고 1904년엔 벽돌로 된 교사(校舍)를 신축하기도 했다. 일본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 때 교회 청년회가 항일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해체되기도 했다. 김목사는 1902년 11월 미국 하와이로 50여명의 교인들이 이민을 떠난 뒤 급격히 교세가 위축되자 헌신적 교인을 모으고 신앙심을 회복시키는 데 주력했다. 특히 김목사는 당시 언어가 통하지 않아 선교활동에 애를 먹던 외국 선교사들과 달리 학식과 언변이 뛰어나고 성실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신망 두터웠다고 한다. 덕분에 교세가 확장됐지만 김목사는 건강을크게 해쳐 서양 선교사들처럼 1905년 유급 안식을 요구한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한국인 목회자를 경시했던 개신교의 풍토에서 김목사가 유급 안식년을 받아낸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유급 안식년제 요구가 교단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김목사는 스스로 교회일에서 손을 떼고 안식년에 돌입한다. 이런 연유로 인해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쓰여진 연례보고서를 비롯, 각종 선교사 자료엔 이후 행적이나 활동이 전혀 기록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김목사는 교계의 미움을 산 것으로 추측된다. 향토사학계와 한국기독교계 일부 인사들은 “미국 선교사들보다 훨씬 능력있는 지도자로 추앙받던 김기범의 1905년 이후 행적이 기록에서 사라진 것은 백인우월주의의 귀결”이라고 평가한다. 거부의 아들인 김기범이 안식과 돈 때문에 미국 선교본부에 유급 안식년을 요구했을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김기범의 유급 안식년 요구는 7년마다 1년씩 갖는 인식년 적용을 한국인 목회자에겐 허용하지 않는 서양 선교사들의 민족차별에 항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 개신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김기범의 구체적인 행적과 활약상은 변변한 자료나 고증도 없이 영영 역사 속에 묻히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최영호 인천내리교회 행정목사는 “한국 개신교의 족적을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김기범 목사님의 흔적을 찾는데도 힘쏟고 있으나 자료 발굴이 매우 어려워 안타까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김기범의 장증손녀 김민자(46)씨는 “할아버지는 안식년은 물론 인천내리교회 담임목사를 마친 뒤로도 지금의 북한 지역과 옹진군 섬지방을 돌며 선교활동에 힘 써 왔다고 선친들로부터 들었다”고 전한다. 그녀는 또 “이 과정에서 당시 서해안 곳곳에서 출몰하던 해적들이 쏜 화살에 어깨를 맞아 병을 앓게 됐고 병환이 심해져 결국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 1920년 영면한 이후 그의 묘지는 수봉공원에 있었으나 1972년 지금의 서구 왕길동 묘역으로 옮겨 졌다. /경인일보
(사진, 글 출처- 내리교회 홈페이지, http://www.nae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