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크리소스톰의 성직론

2010. 12. 24. 01:08신학자료/1.신학자료

요한 크리소스톰의 성직론

 

들어가는 말

 

한국교회는 바야흐로 전환기에 서있다.

한국교회는 지금 안팎으로 근본적인 변화와 지속적인 갱신을 요구받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교회는 지속적으로 개혁되어야 된다”(Ecclesia semper reformands)는 종교개혁 운동의 정신을 다시금 기억해야 할 중요한 시점에 이르렀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 그동안 교회가 시름시름 앓고 있었던 병적 현상들이 이제는 심각한 정도에 이르렀으며 그 현상들이 조금씩 추하고 일그러진 몰골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이러한 위기 상황에 놓이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라 자처하는 목회자들에게 일차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죄와 욕심, 무지와 탐욕이 오늘의 상황을 초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목회자들이 하나님 앞에서나 교인들 눈에 보기에 목회자답지 못함으로써 한국교회는 각종 병리현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를테면, 교파주의와 교권주의, 교권에 대한 탐욕, 학벌 지향적 목회자, 타락한 교계선거, 교회의 계급주의적 제도, 목회세습, 대형교회 지향적 목회관, 교회의 자기과시와 허세, 교회 지도자의 부도덕성, 목회자의 개인 경건과 영성의 황폐화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교회의 각종 부조리와 문제들에 맞서 싸워야 할 목회자들이 그러한 문제들의 해결 자가 아니라 그 같은 문제들을 구성하는 '문제 자체'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성직론』은 목회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목회자들에게 성직의 순수성과 중요성 그리고 엄격성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에 집중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당대에 요구되었던 성직자의 자질을 보여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진정한 주의 종들의 길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에 내 자신을 비롯하여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취해야 할 올바른 목회자 상을 찾아보고자 요한 크리소스톰의 『성직론』을 배경으로 살펴보려한다.

 

본 론

 

Ⅰ. 크리소스톰의 생애와 사상

A. 생 애

크리소스톰이란“황금의 입”이란 뜻을 가진 6세기 명칭인‘크리소스토모스’(chrysostomos)에서 기인한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이자 안디옥의 위대한 설교자로서, 그의 탁월한 웅변술로 인하여 후대 사람들로부터 부여받은 요한의 별명이기도 하다. 경건한 기독교 가문, 헌신적인 어머니, 학문의 중심지에서 쌓은 우수한 교육으로 단단히 뒷받침된 그는 하나님의 강한 인도의 손길에 이끌림 받는 한평생을 보냈다. 믿음의 고향 안디옥이 경박한 생활과 성적문란으로 물들어 갔을때 매우 솔직하고 설득력 있는 신앙운동을 펼쳤고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로서의 정치적 타락과 불의와 압제에 과감히 맞섰던 대설교자 크리소스톰. 그는 정의를 외치다가 고통당하고 생명까지 빼앗겼지만, 그의 하나님께서는 30년 후 그의 유해를 옛 도시로 조용히 개선시키셨고 수많은 크리스챤들의 마음속에 영원한 승리의 선포를 남겨주시었다.

 

B. 사 상

1. 시대적 배경

콘스탄틴 황제가 주후 313년 기독교를 로마 제국내의 종교로 공인하면서 무섭고 가혹한 박해를 받았던 종교가 황제의 비호하에 교회가 양성화되어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급증하였으나, 문제는 황제가 교회 안에 실력을 행사함은 물론 기독교의 교리와 신앙에도 강력한 압력을 가하여 교회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져주었다. 이를 소위“가이사의 교회지배”라고 한다. 따라서 교회는 황제의 세력의 간섭이 너무 많아서 국가교회 혹은 신정제도라고 볼 수 있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기독교는 니케아회의 시대로 접어든다. 국가적으로 로마제국이 콘스탄틴 황제의 사후부터 계속되는 왕위계승 싸움으로 국력이 크게 소모되어 쇠퇴하여 갔고 이민족의 계속된 침략 속에 마침내 서로마 제국이 북방의 게르만 민족에게 멸망당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크리소스톰은 교회를 이끌어 간 교부이다.

 

2. 신학적 배경

안디옥에서 출생한 크리소스톰은 반드시 안디옥이 아닐지라도 수리아어 사용권에서 발달된 신학전통인 안디옥 신학에 속해 있었다. 이 신학은 수리아어 사용권에서 수리아어로만 발전된 것이 아니라 헬라의 여러 도시에서 헬라어로 발달되어 왔기 때문에 같은 헬라어를 사용하면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병행하여 발달되어 둘 사이의 분간이 확실치 않을 때가 적지 않으나 안디옥 학파는 그 신학 사상에 있어서 대체로 히브리적 특색을 가진다. 안디옥 신학의 역사는 다른 학파들의 경우와 달리 어떤 위대한 창조적 사상가를 처음에 가지고 그 신학 사상을 신학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아니다. 즉,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창조적 고백을 보태기 보다는 히브리 고유의 혹은 구약적인 신앙에 입각한 학파인 것이다. 크리소스톰은 이들 중에 속한다.

 

Ⅱ. 요한 크리소스톰의『성직론』

A. 제 1권 크리소스톰의 속임

크리소스톰과 바실은 374년에 그들이 감독에 임명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게 된다. 만약 사제단이나 백성들에 의해서 성직에 피택 되면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강제로라도 성직을 받아야만 했던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교회 관례였다. 바실은 이 중대한 문제를 크리소스톰에게 공동대처 하자고 제안하지만 크리소스톰은 짐짓 동의를 하고서 은근히 바실로 하여금 성직을 받도록 유도하였다. 이것은 바실이 성직에 아주 합당한 인물이었지만 자신은 성직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바실은 후에 크리소스톰의 속임수를 호되게 질책하였으나 일종의‘선의의 거짓말’로 여긴 크리소스톰은 바실이 고민과 분노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서 기쁨의 웃음과 함께 자기 계획이 성공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했다.

크리소스톰은 이제 자신의 행위를 옹호하며 의로운 목적을 위해서 재치와 기술을 가지고 하는 거짓말은 때로 유익하고 정당화될 수 있다고 말하다. 그때 이후로 그의 전 생애를 통해 볼 때 그는 그의 두드러진 성품 가운데 하나가 담대하고 언행이 일치하는 곧은 성품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B. 제 2권 목회사역의 어려움

제 2권에서 크리소스톰은 성직의 위엄과 거룩성, 그리고 성직에 따라다니는 어려움과 위험에 대해서 논한다. 그것도 일차적으로 크리소스톰이 살던 당시의 교회와 사회상황에 대한 내용이지만 동시에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까지 교훈하는 바가 크다. 크리소스톰은 성직자가 되어 찾아온 바실에게 목회자의 위엄에 대해 말하길...

『그는(목회자)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히 뛰어나야 되고 사울이 그 외모가 모든 히브리인들보다 준수하여 빼어났던 것처럼 영적으로 뛰어난 인물이어야 한다. … 목자와 양의 차이는 이성적인 인간과 비이성적인 피조물의 차이만큼이나 엄청난 것이다.』

이 말은 어찌 보면 목회자와 평신도를 계급 내지 신분적으로 구분을 짓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일 것이다. 크리소스톰은 오히려 그만큼 목회자에게는 그에게 맡겨진 양들을 그리스도께 올바르게 인도해야할 막중한 책임감이 요구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목회자가 양들을 어떻게 인도해야 하는 것일까? 우선 크리소스톰은“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는 누가 알리요...”(고전 2:11) 라는 성경을 인용하며 방황하는 자들의 구원에 대하여 성령님의 도우심을 바랄 것과 그들이 다시 돌아오도록 더 많은 노력과 인내와 기다림을 가질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결코 강압적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요 오직 설득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을 악에서 돌이키게 하실 때 강압적으로 하지 않으시고 선택하여 돌이키게 하시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한바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고후 1:24)처럼 목회자는 사려 깊은 분별력과 거룩한 심령을 가지고 오직 돕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크리소스톰은 이러한 목회자의 위엄과 중요성을 인식하여 자신이 그 귀한 직분을 받을 만한 자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내가 만약 살찌고 튼튼한 양들을 맡아서 나의 부족함으로 인하여 그들에게 해를 입힌다면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구원과 구속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시기까지 하신 하나님께 대하여 잘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오늘날 소명감 없이 목회자가 되거나 직분의 남용 및 그 자질의 검토 없이 - 물론 목회자의 자질을 사람이 판단하기엔 많은 어려움이 따르지만 - 무분별하게 주어지는 안타까움을 볼 때 크리소스톰의‘목회자 상’에 대한 마음을 우리는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C. 제 3권 성직과 성직자

제 3권에서 크리소스톰은 자신이 교만하고 세상영광을 구하기 때문에 성직을 거절했다고 의심하는 자들을 논박하여 그들이 잘못된 성직자관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그 거룩한 직분을 피하는 것이 책망 받을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위대한 사도 바울 조차 성직을 고려했을 때 두려워 떨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성직자에게 아주 특별한 덕목과 거룩성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성직자는 가장 지혜롭고 신중해야 하며, 사려 깊고 명철해야 하고, 심지어 자신이 비난받고 모욕당할지라도 인내하며 참아야 한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육보다 영이 귀한 것처럼 한 나라보다 더 귀중한 성직을…』

목회자 직분은 영을 담당하는 것으로 과연 한 나라보다 귀중한 것이다. 크리소스톰은 이런 직분의 영광을 계속하여 말한다.

 

『성직자의 사역은 땅 위에서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하늘나라에 기록된다. 성직은 사람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고 천사장도 아니며, 어떤 피조물의 능력도 아닌 오직 보혜사 성령께서 제정하신 것으로서 사람들이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 천사의 사역을 대표하도록 하신 것이다』

크리소스톰의 말로 볼 때 이 얼마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자리란 말인가? 이런 직분을 감당하기에 목회자의 모습과 행실이 어찌해야 하겠는가? 크리소스톰의 말대로 목회자는 마치 자신들이 하늘에 있는 것과 같이 순수해야만 하는 것이다. 또한 크리소스톰은 바울의 모습을 비추어 목회자의 자세를 제시한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전 2:3)라며 고백했던 바울.

『하나님의 계명뿐 아니라 그 이상의 것도 준행하고, 자기 자신의 권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양들의 권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일하는 자가 그 직분의 위엄 때문에 항상 두려워한다고 하는데, 과연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크리소스톰은 바울의 이 위대한 목회자 모습이야말로 바로 성직자가 가져야 할 모습이라고 역설한다.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나의 형제를 위해서 철저히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들을 주님께 인도해야만 한다는 자기희생의 사랑이야 말로 목회자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상(像)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이러한 영광된 직분과 자기 헌신의 직분이 중요한 만큼 그 어려움 또한 크기에 크리소스톰은 성직에로의 부름을 가능한 대로 피해야 함을 언급한다. 이것은 그 직분의 중대성을 깊게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이며 내적, 외적 소명을 다시 한 번 성찰해 보아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 무분별하게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경험부족으로 눈 뜬 장님이 되어버리고, 그들을 세워 주었던 수많은 성도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부과시키게 되는 것이다』

라는 크리소스톰의 염려를 그대로 나타내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성직자는 명예를 향한 인간적 야심을 버려야 하며, 영적 분별력이 있어야 하며 노하기를 더디 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성직자의 무절제한 분노는 목회자 자신의 영혼을 학대하고 건강한 상태를 완전히 전복시킬 뿐만 아니라 더 무서운 것은 직분 자에게 맡겨진 수많은 사람들을 실족시키는데 있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들은 지금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사역현장에 있는가? 스스로 뒤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D. 제 4권 성직자와 설교

제 4권은 성직에 자격이 없고 능력 - 특히 설교 능력 - 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강요된 성직을 받는 자들의 괴로운 운명을 말하고 있다. 좋은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는 당시의 헬라인들과 유대인들, 그리고 이교도들, 특히 마니 교도들과 발렌티누스의 추종자들, 말시온, 사벨리우스와 아리우스, 이모든 자들의 공격에 대비해 준비를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의 경우 그는 이적의 능력뿐 아니라 말씀의 능력도 대단 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크리소스톰은, 인간의 질병을 고치기 위해 약품을 개발하고 기구를 고안하고 요법을 하듯 목회자는 영혼을 위해 단 한가지의 적용, 곧 강력한 말씀(설교)에 대해 언급한다. 이 방법 외에 다른 모든 것들은 다 쓸모가 없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이 방법을 통해서 우리는 영혼의 무기력을 극복하고, 타오르는 불길을 잠재울 수 있다. 또한 지나친 것을 삼갈 수 있고, 부족한 것을 채울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이 방법은 영혼의 건강에 기여하는 모든 것을 하는 것이다』

또한 사도들이 과부 돌보는 일을 스데반과 그 동료 집사들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말씀을 전하는 사역에 힘썼듯이 사방의 보이지 않는 세력들과 맞서 싸우며 오히려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 말씀의 무기로 무장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크리소스톰은 역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풍성히 거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하는 것이다.

목회자는 모든 적(마귀)들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고 비판력과 언변의 능력을 가지고 담대히 물리쳐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변의 능력은 왜 있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운데서도 어리석은 말들을 하는 자들이 있다는 점에 있다.

『그것들은 (교회)밖에서부터 우리를 공격하는 것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가르치는 자를 곤혹스럽게 하기도 한다 … 이성으로 깨달을 수도 없고 설사 깨달아 알 수 있다 해도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는 문제들을 붙잡고 씨름하고 있다』

이럴 경우 많은 어려움이 따르게 되는데 가르치는 자는 재치를 가지고 말씀의 능력으로 능히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하여 이 능력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크리소스톰은 그러한 예로 바울을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물론 놀라운 이적도 행하였지만 그보다 말씀을 더욱 중시 하였다는 것이다. 바울은 사역한 교회들에 보낸 서신들을 통해, 거짓교리를 반박하고, 진리를 세우게 하는데 유익할 뿐 아니라 선한 삶을 위해서도 많은 유익을 주며 교회를 가르치고 훈련시키며 영적인 아름다움을 갖도록 인도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까지 인류가 존재하는 한 계속해서 이 서신들은 성도들의 유익을 도모해 줄 것이다. 이로 볼 때 사도바울이 얼마나 말씀의 사역을 위해서 힘썼는지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고 크리소스톰은 말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목회자는 준비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도중 하나가 이단 사설에 현혹되어 교회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다면 아무리 훌륭한 목회자의 경건 생활이라 하더라고 그 지도자는 그의 머리에 끔찍한 저주가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E. 제 5권 참된 설교자

제 5권은 소위“설교자 교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크리소스톰은 여기서 설교자가 얼마나 부지런히 노력해야 하는지를 역설하고 있으며 그에 따르는 위험들을 지적하고 있다. 훌륭한 설교자는 설사 성공했다 할지라도 교만해서는 안 되고,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더 칭찬을 받는다고 질투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설교자의 첫째가는 목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귀에 거슬리는 비판도 들을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크리소스톰은 설교자는 많은 노력과 연구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성도들에 의해 말씀이 삶 가운데 수행 되어질 때 구원에 이르도록 도와주기도 하며 많은 유익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설교자에게 두 가지가 요청되는데 그것은 칭찬에 무관심 하는 것이요, 말씀을 잘 증거 하는 것이다. 만약 목회자에게 이 두 가지 중 어느 한 가지가 부족하다면, 그 있는 한 가지 능력마저 쓸모없게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말할 수 있는 능력이 모자란다면, 그는 교인들로부터 멸시를 받게 되고 그의 거룩한 마음으로 부터는 아무런 유익도 얻을 수가 없게 된다. 반면에 그가 말씀 증거 하는 일에는 완벽하지만 사람들의 창찬하는 소리에 노예가 되었다고 하면, 그는 자신에게와 교인들에게 모두 해를 끼치게 된다』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참된 유익을 주기 위해 이 두 가지 모두 충족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칭찬 받는 일에 무관심한 것에만 있어서는 아니 되며 유익을 원한다면 더 확장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의 비방과 질투에 또한 무관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목회자는 그러한 말에 염려해서도, 또한 완전히 무시해서도 안 되며 오히려 그들을 납득시켜서 의혹을 사는 일을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목회자는 교인들이 칭찬한다고 해서 우쭐해서도 안 되고, 비난한다고 해서 낙심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며,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목회자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크리소스톰은 잘 보여주고 있다. 이에 더하여 크리소스톰은 오직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는 설교를 하라고 권면한다. 성도가 그 설교를 칭찬하건 반발하건 목회자의 양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설교를 생각하여 시행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최선을 다한 것이요, 다른 어떤 것보다도 나은 것이 된다고 위로의 말을 삼가지 않는다.

F. 제 6권 수도사와 목회자

마지막 제 6권에서는 활동적인 삶과 명상 수도적인 삶을 비교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크리소스톰은 항상 수도사적인 삶으로 유명하며 또 실제로 수 년 동안 홀로 수도 생활을 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그것보다는 활동적인 삶이 더 훌륭하다고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세속의 활동적인 삶은 수도사의 삶보다 더 넓은 아량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크리소스톰은 수도 생활에 있어서의 어려움과 위험들은 성직자의 목회생활의 그것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역설한다. 수도사는 단지 자신의 죄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지만 목회자는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한 책임까지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에게는 수도사들보다 더 완벽한 모습이 요청되는데, 이런 점에서 수도생활이 목회자의 성직 생활보다 수월하다고 말한다.

『그는(목회자) 또한 세상일에 관하여서 세상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어야 하되, 산 속에서 은둔하고 있는 자들보다 더욱더 그것들로부터 초연해야 하다』

이렇듯 지금까지 성직자 친구 바실을 향한 요한 크리소스톰의『성직론』이 제시되자, 바실은 요한을 향하여“너는 내가 지고 있는 짐 위에 또 다른 짐 하나를 더 얹어주어 돌려보내고 있다”는 말로 부담감을 표하였다. 이때 요한 크리소스톰은 친구를 향하여“사랑하는 형제여, 용기를 가지라!”고 격려하면서 끝을 맺는다

 

나가는 말

 

목회자는 모든 예술적 특징들을 가진 자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세상의 죄악 된 삶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찾아온 성도들을 향해 때론 음악가처럼 좋은 찬양으로 심령을 위로하며 때론 화가처럼 복음의 펜으로 참된 인생의 밑그림을 그려주며, 때론 조각가처럼 그들의 영혼을 다듬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이 같은 역할을 올바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영혼에 흠집이 나지 않도록 부단히 자신을 점검해야 할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바 그렇지 못할 경우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맡겨진 수많은 영혼들을 그리스도의 은혜를 저버리고 마귀에게 고스란히 안겨주는 꼴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목회자들이 이기적인 야심과 부끄러운 경쟁으로 인한 출세제일주의에 사로잡혀 사람들의 박수갈채와 명예를 얻는 데에 더 혈안이 되어있다. 그들은 하늘을 바라보기 보다는 땅을 보며, 하늘의 상급보다는 땅위의 것을 더 사랑하는 듯하다. 강단에서의 그들의 외침과 실제 삶은 너무도 달라 그들을 따르는 많은 양무리 들을 실족케 하고 있지 않은 가 생각해 본다.

목회를 주님이 허락하신 소명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단순히 먹고 살기위한 생계유지 수단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심지어 교회를 왕국으로 착각해 목회세습도 서슴지 않는다. 그 외에도 수많은 일그러진 모습들이 이 시대 목회자들 안에, 내 안에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작금의 세태와 다를 바 없었던 시대에 살았던 요한 크리소스톰의『성직론』을 통해 우리의 일그러진 모습들을 회복시키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성직론』을 읽고 가장 마음에 남는 것은 목회자 직분에 대한“두렵고 떨림”이다. 이것은 결코 매우 소극적인 모습이 아니다. 이것이야 말로 바울이 고백했던바“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처럼 맡겨진 양무리에 대한 책임과 사랑을 보여주는 매우 적극적인 모습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기뻐하시는 목회자가 되기 위해 주님께서 친히 자신의 제자들에게 요구 하셨듯이, 자기를 날마다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것을 매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소원해 보아야 할 것이다. 언제나 검소하고 절약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며 겸손히 성도들을 섬겨, 섬기는 자로서의 리더십을 잘 갖추며 부단한 성경연구와 풍부한 독서를 통해 말씀에 대한 깊이와 지경을 넓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습관을 좇아 기도하신 주님을 본받아 기도에 온 힘을 기울이는 무릎 꿇는 목회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내 의지로 할 수 없음에 나의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1. 요한 크리소스톰,『성직론』채이석 역, (도서출판 엠마오, 1992)

 

2. 주도홍,『세계교회사』, (개혁주의신행협회, 2003)

 

3. 류호준,“한국교회 어디로 가야하는가? : 성경과 신학과 삶”, 제2회 바른목회 컨퍼런스

주제연설 전문, 2001, http://www.rbc2000.pe.kr

 

4. 교회사 대사전Ⅲ, (기독지혜사, 1994)

 

5. 기독교 대백과 사전 Vol.14, (기독교문사 1991)

 

6. 그말씀, (도서출판 두란노, 1996.6월)

 

7. 민륭기,『요한크리소스톰의 생애와 설교연구』, (기독신학대학원 학위논문 Th.m, 1994)

 

8. 이동현,『21C 바람직한 목회자 상』, (기독신학대학원, 학위논문 Th.m,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