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설교(고전 15:20-28)

2010. 3. 24. 00:49목양자료/5.절기자료

부활절 설교(고전 15:20-28)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셨다는 복음은 고린도에 있는 몇 사람을 감동시켰으므로 그들은 기쁨에 넘쳐 고백하기를 그리스도가 이미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났으니 그를 믿는 우리는 부활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대 사람들이 예수 시대에, 이미 오래 전에 헬라 세력의 지배 아래서 그들의 조상인 많은 의인들이 살해당하고 학대받았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장차 부활로써 갚아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마카비2서 7장). 그런데 일부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마지막 날의 부활을 앞당겨서 현재에 누릴 것이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미 우리가 구원을 확보 받았다고 한다면 유혹, 범죄, 고통, 병고가 들끓는 세상은 우리와 어떤 관계에 있겠습니까? 영을 존중하고 육신은 천한 것으로 멸시한다면, 그같은 세상의 환경이 심령을 영향주지 않는단 말입니까? 확실히 우리의 몸은 언젠가 썩고 소멸될 것인데 그때 우리가 존중하는 우리의 참된 자아, 보이지 않는 영의 입김, 하늘의 빛을 비춰들일 심령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육체와 심령을 구별할 수 있고 그런 구별은 유익하지만, 육신이 세상에서 시들고 상하고 썩어버린다면 그때 심령이 어디에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그것은 원래 하나님의 입김이요, 사람을 “산 영”(창 2:7)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는데, 다만 그리스도의 영을 안내하는 것으로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자체로는 육체가 부패한 다음에 자력으로 생존을 유지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생명이기 때문에 사람을 영원히 살게 합니다(비. 고전 2:10∼16). 심령적 사람은 쇠퇴하고 나중에 몰락해 버릴 세계에 속하기 때문에, 악과 인간성이 교차하는 현상세계로부터 도피하여 환상 중에서 살려고 하더라도 세계와 함께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쇠퇴할 운명에 붙여진 세상에 속한 우리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줌으로써 육신을 움직여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로 하늘의 시민으로 영원한 것을 희망하고 살 수 있게 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이 영원한 것에 대한 희망을 끌어당기는 것들이 많은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번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을 받고 들떠서 세상의 얽매이는 생존의 지반들을 쉽게 이탈하고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우리의 가장 가까운 육신의 친구들은 아직 세상에 속하여 있어서, 더 나은 생활 조건을 위해 재촉하며 땅에서도 남에게 지지 않고 불편 없는 생활을 위해 힘써 달라고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우리는 전보다 더 세상의 짐과 고통을 짊어져야 하게 됐습니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악의 세력의 뿌리가 매우 깊다는 것을 저 부활의 소식으로 들뜬 고린도의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에게서 사랑이 가장 높은 은사라고 들었지만 그들의 해방의 감각이 형제자매의 짐을 나눠지는 윤리적 의무감과 결합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스스로 영적인 자로 자인하는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물로 마음껏 먹을 때 율법에 의하여 규제 받고 양심이 약해진 사람을 고려하지 않고 믿음의 자유를 즐기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경건의 외투 속에 교만과 무책임이 깃들인 것을 보고 바울은 매우 번뇌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사람이 만일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죄 가운데 있으며, 그들이 바라는 것이 이 생의 것에 국한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오늘의 본문 안에서 바울은 사람이 끼어있는 생존의 틀을 아담과 그리스도라는 연관에서 가르쳤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다시 살게 되는 것이다” 합니다.

사람은 모두 아담의 자손입니다. 아담에게서 받는 것은 육체적 생과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속한 민족의 전통과 긍지를 자랑할지라도, 그것은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것과는 배치됩니다. 신학자 바르트는 자기가 스위스인이라는 것은 죄인이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민족문화”라는 것도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은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해서 무엇이라고 판정하시든지 그것에 순종하고 심판을 넘어 그의 허락대로 사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께서도 부활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가 없다고 한다면 다른 쪽도 없는 것이 됩니다. 부활하지 않은 예수는 성서가 전하는 나사렛 예수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에게 속하므로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반성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에까지 이르려고 하는 자극한 열의를 갖게 됩니다(빌 3:11). 그리스도의 부활절 때문에 “마지막으로 멸망 받을 원수는 죽음이라”는 표준으로 내 자신을 격려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셨기 때문에, 세상의 삶에서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가 잘못 달리지 않을까 두려워할 때 쳐다보아야 할 표지판입니다.

그 표지판이 우리에게 지시하는 길은 넓고 안락한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깊은 웅덩이 위를 달리며 골짜기를 통하는 산의 오솔길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번 낭떠러지 위를 크게 뛰어 모험하려고 모든 용기를 다합니다. 우리는 앞이 명료치 않아 우리가 어디로 뛰는지 거의 모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경험에 의하여 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많이 변해 갑니다. 상대하는 사람들의 이해관계도 달라지고 조건들도 달라졌습니다. 사는 원칙은 같은 것일 텐데 그 원칙을 따르러 애쓰지 않아도 모두 즐겁게 살아갑니다. 우리는 피곤하고 내면적으로 부셔졌습니다. 또 다시 계속해서 뛰지 못합니다. 거기에 갑자기 예수의 부르심이 다시 이르렀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린이와 어머니의 울음소리를 지나쳐 듣지 못할 만큼 아직 좋은 귀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직 자기의 생존을 위해서 비상한 수단을 강구해야 하지만 동시에 이웃의 곤경과 변화에 따르는 여러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교회 강단에서 울려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소원과 설계에 대한 응답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같이 우리의 희망을 만회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하나도 잡지 못했는데 이제 당신이 말씀하시니 감행하려 하옵니다.”


처음 사도들이 “이 예수가 배반당하신 것은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뜻과 계획에 따라 된 일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내어 다시 살리셨습니다”(행 2:23∼24)고 증거 하신 것을 그리스도인은 믿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같은 불가해한 계획으로 고난과 실패와 불행들이 있지만 궁극에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모든 눈물을 그들의 눈에서 씻어주시며, 결국 원수인 죽음을 진멸하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결코 땅의 감옥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줄 해방자로 인정하지 못하며, 결국 진멸해 내어야 하는 원수로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권능을 믿음으로써 편히 잠잘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생에서 죽음의 세력을 결코 경멸해서 안되겠습니다. 죽을 병에 들었다는 진단을 결코 우리는 무시해서 안되며,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이해관계의 대적을 경히 생각해서 안되겠습니다.


옛적에 마게도냐의 왕 필립포스 2세는 사환을 시켜 매일 아침 “필립포스 왕이여 당신은 죽을 것을 기억하시오”라고 일러주도록 했다고 합니다. 죽음의 공포를 이겨나기 위해서 이런 방법을 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예수의 생애를 거듭 반성하고 그 걸으신 길을 뒤따라 보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그의 수난의 역사를 되새겨 봅시다. 그것은 한 순간 한 순간 다가오는 죽음을 대결해 싸운 역사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부활절 아침의 기록을 수난사에서 떼어서 생각하려고 얼마나 애썼습니까? 그러나 그 빈 무덤의 발견을 말하지 않는 예수의 생애는 나사렛 예수의 생애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없다면 예수께서는 이루지 못한 소원도 안고 골고다에서 피흘리시고 많은 사람에게 비통한 후회를 남긴 분에 지나지 않겠습니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 예수를 믿는 것이 죽음을 이기는 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는 길의 표지판이 예수의 부활이라고 했습니다. 그 길은 개인으로 가는 길이 아니고 믿는 자의 공동체 안에서 가는 길입니다. 이 믿는 자의 공동체는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면서 모인 역대의 교회이며 그 신앙을 오늘의 교회에까지 전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살 충동을 받은 사람들의 충분한 경험을 나눠 갖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생의 출발점은 의롭고 선하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회개로써 시작하는 길입니다. 남을 공격하고 남의 약점을 쳐서 자기의 건설을 보탬 하려는 설계는 그리스도 공동체에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세계에는 이러한 사례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이같은 방식으로는 세워지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싸움과 파멸이 있을 뿐입니다.


신앙은 사람의 현실의 모습을 아름다운 것으로 분장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죄와 허물을 하나님 앞에 다 고해 놓았기 때문에, 조금도 가리운 것 없는 투명한 심령의 고백입니다. 어떤 분은 신앙을, 자기의 힘으로 더 일할 수 없는 쾌적한 노인과 비교하였습니다.

그의 현재의 생애는 자기의 걱정과 곤경이 작게 보입니다. 그는 욕심스럽게 자기를 위해 긁어모으기보다 자기의 주변을 오랫동안 쌓은 지혜로써 비출 수 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빌라도 앞에서 유대인들은 놓아주기를 거부하고 대신 살인한 사람을 놓아달라고 하여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주를 죽인 것을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가 죽음을 영구히 정복하시고 그를 믿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신앙은 지나간 부활의 사건이 참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 소식을 기뻐하여,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께서 죽음과 악한 세력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분이심을 우리의 몸에서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결코 환상 속에서 이미 부활을 획득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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