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

2010. 3. 12. 00:39교회사자료/4.종교개혁사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 (1)

  • ▲김명혁 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대표, 강변교회 담임)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성취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복음의 진리를 마르틴 루터는 깨닫게 되었다.”

“개혁 전야의 독일”

종교개혁 전야의 독일은 매우 종교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3만명이 거주하는 콜론(Cologne)이란 도시 안에 1백여개 이상의 교회와 기도 처소가 있었고 1백여개의 수도원이 있었다. 감동을 주는 종교의식이 곳곳에 성행했고 모든 주위가 온통 종교적인 것으로 특징을 이루고 있었다. 그 당시 베스트셀러의 하나는 「옳게 죽는 방법」(The Art of Dying) 이라는 종교 서적이었고, 성자와 성물의 숭배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성자의 이름을 따라 아이들의 이름이 지어졌고 신도들은 거의 매주마다 어떤 성자를 기념하는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다.

삭소니(Saxony)의 영주 프레데릭(Frederick)이 모아 놓은 성물은 엄청나게 많았다. 프레데릭은 유럽 각처를 여행하며 성물들을 모아 들였는데 1509년에는 5,005가지의 성자의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었고 그것은 연옥에서 1443년간의 형벌을 감할 수 있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는 예수님의 이마를 찔렀던 가시를 비롯하여 성 제롬의 이빨 하나, 성 크리소스톰의 이빨 4개, 성 버나드의 이빨 6개, 성 어거스틴의 이빨 4개, 성모 마리아의 머리카락 4개, 옷 3조각, 허리띠 4조각, 예수님의 피가 묻은 마리아의 면사포 7조각, 예수님의 강보 한조각, 구유 13조각, 한단의 짚, 동방 박사가 가져 왔던 금 한조각, 몰약 3개, 예수님의 수염 1개, 예수님의 손을 못박았던 못 1개, 최후의 만찬 때의 떡 한조각, 예수님이 승천할 때 딛고 섰던 돌 한조각, 모세의 불붙는 떨기나무 한가지 등등을 소장하고 있었다.

1520년에는 성자들의 뼈만 해도 19,013개에 달했는데, 이와 같은 성물들을 보고 교황이 하사하는 면죄부를 산다면 1,902,202년 270일간의 연옥에서의 형벌을 감할 수 있다고 했다. [Roland Bainton, Here I Stand: a Life of Martin Luther (New York: Abingdon Press, 1950), pp.69f].

즉 종교개혁 전야의 독일은 매우 종교적이었으나 그것은 미신적 종교 의식에 치우친 생명력을 상실한 종교였다. 한편, 교황은 유럽 각국의 교회에 대한 절대적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으니, 모든 승려와 감독들은 교황에 의해 선출•임명되었고 승려와 감독들은 그 나라 통치자에 의해 지배되지 않고 직접 교황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세금도 직접 교황에게 바치고 있었다.

“루터와 그의 청년 시절”

교회 역사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룩한 16세기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1483년 11월 10일 중부 독일의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7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루터의 아버지 한스(Hans)는 본래 농부 출신이었으나 광부로 전향한, 자주 정신이 강하고 엄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의 어머니 마가레타(Margaretta)는 부지런하고 충실하고 단순한 성격의 여자였다. 그들은 경건했으나 그 당시 미신적인 중세 가톨릭교회의 신앙을 따르는 신자들이었다.

루터는 어려서부터 엄격한 종교교육을 부모로부터 받았고 만스펠트(Mansfeld)에서 초등교육을, 1497년 마그데부르그(Magdeburg)에서는 고등교육을, 1498년 아이제나하(Eisenach)에서는 대학 예비 교육을 받았고, 18세 되던 1501년 5월에는 ‘작은 로마’라고 불리는 에르푸르트(Erfurt) 대학에 입학했다. 1502년 9월에 학사학위(B.A)를, 1505년 1월에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루터는 대학에 재학하는 동안 경건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양심적이고 부지런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그는 깊은 죄의식을 항상 느끼고 있었다. 루터가 깊은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던 환경적 요인을 몇가지 들 수 있다.

첫째, 엄한 가정교육이 루터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루터는 기록하기를 “어머니는 내가 호도 한개 훔쳤다고 피가 나도록 회초리로 때렸다”고 했고 “한번은 아버지가 나를 회초리로 때려서 도망친 일이 있는데 아버지가 밉게 느껴졌다”고도 기록했다.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으므로 하나님도 엄하게 보였을 것이다. 둘째, 엄한 학교교육이 루터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학교에서 어떤 때는 하루 아침에 아무 이유없이 15대의 회초리를 맞았다. (라틴어의) 명사와 동사 변화를 반복해야 했는데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었다”고 기록했다. 셋째, 그 당시 독일에 만연된 미신 사상이 루터의 마음을 어둡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숲과 바람과 물 속에 요정들과 귀신들과 유령들과 마녀들이 모여서 산다고 믿고 있었다. 루터 자신도 기록하기를 “곳곳에 귀신들과 마녀들이 들끓고 있다”고 했다. 넷째, 중세 교회의 가르침이 루터의 마음을 공포에 사로잡히게 했다. 중세 교회는 의도적으로 공포와 소망을 번갈아 가며 주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지옥의 공포와 아울러 성례와 면죄부를 통한 사죄의 길을 제시해 주었고 하나님을 때로는 아버지로, 때로는 무서운 심판자로 보여 주었다. 그리스도도 때로는 구속주로, 때로는 무서운 심판자로 보여주었는데 성모 마리아와 그리고 그의 어머니 성 안나를 통해 그리스도의 진노를 무마시킬 수 있다고 가르쳤다. 루터는 심판자 그리스도의 모습 앞에서 완전히 공포에 사로잡혔었다고 고백했다.

종교적으로 민감한 청년 루터는 에르프르트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해인 1505년 찌는 듯이 무더운 7월 어느날 슈토테른하임(Stotternheim) 마을 근처의 시골길을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마을 가까이 왔을 때 하늘이 어두워지고 소나기가 쏟아지며 천둥이 대지를 흔들기 시작했다. 어둠을 가르는 번개와 뇌성 벽력에 루터는 땅에 엎드려지고 말았다. 그리고 공포에 사로잡혀 부르짖었다. “성 안나여, 나를 도우소서. 나는 수도사가 되겠습니다.”

베인톤 교수가 그의 루터 전기 「Here I Stand」의 첫 페이지에서 지적한 대로 “성자의 이름을 부른 이 청년이 나중에는 성자 숭배를 배격하게 되었고,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약한 이 청년이 나중에는 수도원 제도를 거부하게 되었고, 가톨릭 교회에 충성을 바치겠다고 하던 이 청년이 나중에는 중세 가톨릭주의의 구조를 깨뜨려 버렸고, 교황에 대한 헌신을 다짐했던 이 청년이 나중에는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부르게 되었다.”(Here I Stand, p.21)

 

 

“로마여 안녕!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자들은 모두 로마를 떠날지어다. 로마에서는 모든 것이 허용되지만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루터는 로마를 향해 서글픈 이별을 고했다.

“수도사가 된 루터”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약한 청년 루터는 두 주 후인 1505년 7월 17일 에르푸르트에 있는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가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것은 수도사의 소명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영혼을 죽음의 공포에서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천국에 이르는 지름길이 수도사가 되는 길이라는 중세 교회의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부원장 앞에서 엄격한 수도원 생활의 규칙을 따를 것을 서약했다. 즉 자신의 의지를 죽이고, 소량의 음식을 먹고, 남루한 옷을 입으며, 밤에는 기도하고, 낮에는 일하며, 육체를 죽이고, 가난의 치욕과 구걸의 부끄럼을 당하며, 수도원에 갇힌 싫증나는 생활을 감당해 나갈 것을 엄숙히 서약했다.

성가대가 노래하는 가운데 채발식이 거행되고, 수도사의 옷으로 갈아입음으로 1년 동안의 견습 수도생활이 시작됐다. 루터는 최선을 다해 견습 수도생활을 영위해 나아갔다. 수도원에서 인정을 받았고 1년 후에는 수도사의 서약을 하고 수도사가 되었다(Bainton, Here I Stand, pp.30-38).

그러나 루터가 사제로서 첫 미사를 집행했을 때 그는 또 하나의 벼락에 맞는 듯한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제단 위에 빵과 포도주가 사제의 성례 집행으로 하나님의 살과 피로 바뀌는 변화의 이적이 일어나고 갈보리의 희생이 반복된다고 생각했을 때 루터는 두려워 떨었다. “나는 티끌과 재이며, 죄로 가득한데 어떻게 감히 살아계시고 영원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대면하고 말할 수 있는가?” 루터는 벼락을 맞은 듯 떨며 부르짖었다. 번뇌(Anfectung)의 시련을 경험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번뇌와 시련은 오랫동안 루터의 영혼을 사로잡게 되었다.

그러나 루터는 계속 수도 생활에 최선을 다했다. 때로는 3일씩 금식했다. 그는 수도원 규칙 이상으로 몸을 괴롭히고 기도에 힘썼다. 루터는 그 당시의 형편을 후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는 훌륭한 수도사였다. 나는 수도원의 규칙을 매우 엄격히 지켰다. 만약 수도사가 그의 수도에 의해 천국에 간다면 그것은 바로 나였다.”

그와 같은 수도의 모든 노력이 루터에게 평안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 루터의 근본적인 번뇌는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는 데 있었다. 산상 보훈의 말씀이 너무 높고 너무 어려워 아무도 그것을 지킬 수 없다고 괴로워 했다(Bainton, Here I Stand, pp.39-46).

중세 교회는 죄의 형벌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를 비롯한 성자들에 의해서 축적된 많은 공로가 교회에 의해서 죄인들에게 부여될 수 있다는 면죄부(indulgences) 제도를 만들었다. 특히 성자들의 유물을 바라보며 규정한 면죄부를 살 때 죗값으로 받아야 할 현세와 연옥에서의 형벌이 수천년씩이나 감면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로마는 성자들의 유물을 수없이 많이 소장한 거룩한 도시요 영원한 도시였다.

마침 1510년 에르푸르트의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논쟁이 생겼는데 이에 대한 교황의 자문이 필요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대표가 선정되었는데 루터가 그 일원으로 선정되어 로마를 방문하게 되었다. 로마에 한 달 머무는 동안 루터는 교황의 자문을 받는 사무를 마친 후 모든 시간과 정력을 성자의 공로를 힘입어 자기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바쳤다. 성당에서 매일 미사를 드렸고 카타콤과 유적들을 방문했다.

“로마여, 안녕!”

루터는 후에 기록하기를 그 당시 이태리 사제들의 무식함과 경박함과 부도덕과 불신앙을 목격하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루터는 절망하지 않고 라테란 성당을 찾아가 그곳에 있는 Scala Sancta라고 불리는 28계단으로 된 ‘빌라도의 계단’을 손과 무릎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빌라도 앞에서 그리스도가 올라섰던 계단이라고 전해지는 계단을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면 연옥에서의 형벌이 감해진다고 중세 교회가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터가 계단마다 입을 맞추면서 28계단을 다 올라 갔으나 그의 마음에는 아무런 평안이 없었다. 그는 부르짖었다. 전설이 전하는 바대로 이때 루터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외치지 않았고 “이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라고 중얼거렸다(Bainton, Here I Stand, pp.46-51).

로마에 대한 루터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로마에서 발견한 것은 종교적 경건이 아니라 시궁창과 같은 부패였다. 부푼 기대를 가지고 로마를 찾아왔으나 서글픈 환멸을 안고 로마를 떠나게 되었다. “로마여 안녕!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자들은 모두 로마를 떠날지어다. 로마에서는 모든 것이 허용되지만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루터는 로마를 향해 서글픈 이별을 고했다.
린지(Lindsay)는 그의 「종교개혁사」에서 웅변조로 지적하기를 “루터는 하나의 중세 신학자로 로마에 갔다가 하나의 개신교도가 되어 돌아왔다”고 했으나 이는 과장된 표현이다. 루터 자신이 지적한 대로 “양파를 가지고 갔다가 마늘을 가지고 돌아왔다”고 묘사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로마에서 돌아온 루터는 에르푸르트에서 비텐베르그(Wittenberg)의 어거스틴 수도원으로 옮겼다. 여기서 어거스틴 종단장 슈타우피츠(Johann von Staupitz)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영적인 지도자로 루터의 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루터는 후에 고백하기를 “내가 슈타우피츠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지옥에 빠졌을 것이다”라고 했다.

비텐베르그는 당시 프레데릭(Frederick the Wise) 선제후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는 후에 루터의 정치적 보호자가 되었다. 루터는 자기 영혼을 죄악의 공포에서 구원하기 위해 선행의 방법을 시도해 보았으나 자기 자신을 구원할 만큼 충분한 선을 행할 수 없음을 발견했다. 성자들의 공로를 힘입어 보려 했으나 결국 의심과 회의로 그치고 말았다. 루터는 이제 비텐베르그에서 새로운 ‘참회’의 방법으로 영혼의 평안을 얻어 보려고 힘썼다. 한번 죄에 대해 고해(penance)를 시작하면 때로는 6시간 동안 계속하기도 했다. 작고 보잘것없는 것에서도 그는 깊은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버림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나 자신이 버림을 당하는 것은 얼마든지 타당한 일이다. 나는 약하고 불순하고 불경건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약하지도 불순하지도 불경건하지도 않으신데…. 어째서? 어째서?” 다음 순간 루터는 벼락에 맞은 듯한 놀라움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버림당한 그리스도를 만난 루터”

로마에서 돌아온 루터는 비텐베르그(Wittenberg)의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새로운 참회의 방법으로 영혼의 평안을 얻어 보려고 힘썼다. 한번 죄에 대해 고해(penance)를 시작하면 때로는 6시간 동안 계속하기도 했다. 작고 보잘것없는 것에서도 그는 깊은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수도원장 슈타우피츠는 화를 내곤 했다. “마르틴, 하나님은 그대에게 화를 내지 않는데 어째서 그대는 하나님에게 화를 내는가?”

참회는 루터에게 평안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깊은 죄의식과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무 잎사귀 하나가 바람에 불려 떨어져도 부들부들 떨었다. 꿈 속에서 마귀는 자기를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하는데 자기를 도우려는 천사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나님은 계속 무서운 심판주로만 보였다(Bainton, Here I Stand, pp. 52-56).

신비주의자였던 슈타우피츠는 루터에게 신비주의적 방법을 제시했다. 인간적 노력을 포기하고 대신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과 그의 사랑 가운데 빠져 버리는 방법이었다.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 자기 주장과 자기 노력을 포기하고 마치 하나의 물방울이 대양 속으로 촛불이 태양의 광채 속으로 빠지듯, 피조물이 창조주의 품 속으로 빠져버리는 방법이었다. 루터는 때로 천사들의 찬양 속으로 높이 이끌려 간듯한 황홀경을 체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하나님과 끊어진 듯한 절망의 늪에 깊이 빠지곤 했다. 하나님은 접근하기에는 너무 거룩하고 장엄하게 보였다.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애를 써 보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미움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나님은 심지어 공의롭지 못하고 변덕스럽게 보였고 자기는 잊어버린 자로 느껴졌다. 루터는 태어난 것을 한하며 하나님을 미워한다고 부르짖었다.

슈타우피츠는 어느날 수도원 정원의 배나무 밑에서 루터에게 마지막 방법을 제시했다. 성경을 연구하여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라는 것이었다. 루터는 한숨을 쉬며 15가지 이유를 들어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루터는 슈타우피츠의 권면을 받아들여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년만인 1512년 9월에 신학박사 학위를 획득했고 1513년 8월부터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시편 강해를 시작했다(Here I Stand, pp.56-60).

루터는 드디어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을 강해하는 가운데 복음을 접하는 종교적 체험을 했다. 첫번째 종교적 체험이 슈토테른하임의 뇌성 벽력 가운데서 죽음의 공포로 임했고, 두번째 종교적 체험이 제단에서 미사를 집행할 때 소멸하는 불과 같은 공포로 임했는데, 이번에는 세미한 음성으로 임했다. 성경 연구와 성경 강해는 루터에게 다메섹 도상과 같았다.

1514년(혹은 1513년) 가을 어느 날 루터는 비텐베르그 어거스틴 수도원 탑 속 서재에서 소위 ‘탑 속의 체험’이라고 불리는 복음적 체험을 가졌다. 시편 22편을 읽고 있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루터는 자기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그려 보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 시편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묘사한 글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묘사한 글이었음을 생각했을 때 이해할 수 없는 놀라움에 사로잡혀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다. “어째서? 어째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버림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나 자신이 버림을 당하는 것은 얼마든지 타당한 일이다. 나는 약하고 불순하고 불경건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약하지도 불순하지도 불경건하지도 않으신데…. 어째서? 어째서?” 다음 순간 루터는 벼락에 맞은 듯한 놀라움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하나님으로부터 끊어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는 나 루터 대신, 그리스도가 친히 하나님으로부터 끊어버림을 당했다! 죄 없으신 그리스도가 내 대신 죄를 담당하시고 나 대신 죄가 되셨다!”

루터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모습은 이제는 더 이상 무서운 심판자가 아니라 사랑과 용서로 가득 찬 구주의 모습이었다.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으신 구주의 모습이었다. 하나님의 모습도 전혀 새로워졌다. 진노와 심판의 하나님이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으로 나타났다.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인간의 어떠한 노력이나 성취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믿음은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얻어지는 선물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루터는 또한 로마서를 읽으며(1515년 또는 1516년) 하나님의 공의와 칭의와의 관계를 깨닫게 되었다. “나는 바울의 로마서를 이해하기를 그렇게도 소원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공의’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 말을 하나님이 공의로우셔서 공의롭게 심판하시는 것으로만 이해했다. 그리고 죄인인 내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공의로우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를 미워했고 불평을 늘어 놓았다. 그러나 나는 밤낮 묵상하면서 그 뜻을 이해하기를 원했다. 드디어 ‘하나님의 공의’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란 말을 연결시킴으로 그 뜻을 깨닫게 되었다. 이 ‘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들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을 의롭다고 여기시는 하나님의 ‘의’인 것을 깨달았다. 이 진리를 깨달았을 때 나는 새로 태어난 것 같았다. 마치 천국의 문이 열려서 내가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가졌다. 이제 모든 성경은 나에게 새로운 의미를 던져주었다. 전에는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 나의 마음 속에 미움으로 가득 채웠으나 이제는 너무나 달콤한 사랑으로 채워준다. 사도 바울의 이 말이 나에게 천국으로 가는 문이 되었다.”

 

루터는 자기 대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탑 속의 체험’을 한 후 이제는 선행도 고행도 성자 숭배도 종교 의식도 아닌 성경과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을 기독교의 핵심으로 삼게 되었다.

“개혁의 봉화”
루터가 처음부터 종교개혁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루터가 그 당시 중세 교회의 사치와 탐욕과 무지를 통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복음 진리를 체험한 후에도 비텐베르그(Wittenberg)의 수도원과 대학과 교구에서 연구, 저술, 교수 및 설교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1517년 루터가 개혁의 봉화를 들어야 할 기회가 왔다. 자기 교구의 양떼들이 면죄부를 얻기 위해 성 밖으로 몰래 빠져 나가는 것을 목격했을 때 루터는 이를 묵과할 수 없었다.

면죄부(indulgences) 제도가 성행하기 시작한 것은 십자군 때부터였다. 성지를 회복하기 위해 이교도들과 싸우며 생명을 내건 사람들에게 면죄의 특혜를 베풀기 시작했고, 후에는 성지 탈환에 직접 참여하는 대신 기부금을 바치는 사람들에게까지 같은 혜택을 부여했다. 면죄부 제도가 교황청의 중요한 재원이 되기 시작하자 중세 교회는 성당, 수도원, 병원들의 건축을 위해 기부금을 바치는 사람들에게까지 면죄부를 배부하게 되었다. 그 당시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은 막대한 비용을 투자하여 100년 이상이나 공사하여 왔지만 완공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교황 레오 10세(Leo X)는 성당을 신속히 완공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한편 독일에서는 브란덴부르그의 알버트(Albert of Brandenburg)가 할베르슈타트와 마그데부르그의 감독이었는데 그 당시 가장 큰 교구인 마인츠(Mainz)의 감독직이 비게 되자 교황에게 마인츠의 감독직을 요청했다. 교황은 그 대가로 12,000 두캇(ducats)을 요구했고 이에 대해 알버트는 7,000 두캇을 내겠다고 했다. 결국 10,000 두캇을 내기로 합의가 이루어졌고 그 대신 레오 10세는 알버트가 후거(Fuggers)가의 은행에서 빌려온 빚을 갚게 하기 위해 그의 영토 안에서 8년 동안 면죄부를 팔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그리고 면죄부 판매금의 반으로 빚을 갚고 반은 베드로 성당 완공을 위해 교황에게 바치게 했다. 알버트 감독은 면죄부 판매와 수금을 위해 도미니칸 교단의 수사이며 웅변가인 텟젤(John Tetzel)을 선정했는데 그가 비텐베르그 성밖에서 면죄부를 팔고 있었다. 교황의 권위를 나타내 보이는 십자가와 교황의 면죄부 교서를 군중들 앞에 높이 내세우고 텟젤은 웅변조로 설교하기 시작했다.

“여러분들, 들으시오. 하나님과 성 베드로가 여러분들을 부르십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의 구원과 세상을 떠난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의 구원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승려들, 귀족들, 상인들, 처녀들, 부인들, 청년들, 노인들, 여러분 모두 지금 성 베드로의 교회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가장 거룩한 십자가를 방문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이 세상의 유혹과 위험 가운데서 맹렬한 시험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리고 앞으로 여러분들이 하늘나라에 갈 수 있게 될지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죄를 슬퍼하고 죄를 고백하고 그리고 기부금을 바친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죽은 친척들과 친구들이 여러분들을 향해 애원하며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오. 우리는 무서운 고통 중에 빠져 있는데 당신들은 적은 돈으로 우리들을 건져낼 수 있지 않소.’ 여러분들은 저들을 건져내기를 원치 않습니까? 여러분들의 귀를 여십시오. 아버지가 아들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애원하며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우리가 너희들을 낳고, 양육하고 기르고 재산까지 남겨 주었는데 너희들은 어찌 그렇게도 잔인하고 인색해서 조그만 돈을 내어 우리들을 건져 내려고도 하지 않느냐?’ 여러분들은 지금 여러분들의 부모들을 구해낼 수가 있습니다. 동전이 부모들을 구해낼 수가 있습니다. 동전이 궤 속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영혼이 연옥에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저들의 영혼을 낙원으로 인도하기를 원치 않으십니까?”(Here I Stand, p.78).

면죄부의 가격은 신분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임금, 왕후, 대감독은 금화 25 풀로린, 수도원장, 고위 성직자들, 귀족들은 금화 20 풀로린, 하위 성직자들과 귀족들은 금화 6 플로린, 평민들은 금화 1 플로린을 지불하고 면죄부를 샀다.

루터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1517년 만성절 전날 밤인 10월 31일 루터는 비텐베르그의 성곽교회(Castle Church)의 문에 95개 조항(The Ninety-Five Theses)을 게시하고 이에 대한 논쟁을 벌이기를 원했다. 95개 조항의 주장들은 간결하고 대담했으며 절대적이었다. 95개 조항은 라틴어로 씌어졌는데 그 내용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베드로 성당 건축을 반대했다. 성 베드로 사원 신축을 위해 그렇게 많은 돈을 허비함은 불합리하다. 이 사원이 기독교가 공유하는 보화라고 하는 데는 조소를 보낸다. 우리가 할 것은 먼저 산 성전(living temples)을 지어야 할 것이요. 다음에는 마을의 교회, 그리고 나중에 베드로 성당을 지어야 할 것이다. 양들의 가죽과 살과 뼈로 지을 바에는 차라리 베드로 성당을 재가 되게 버려 두는 것이 나을 것이다.

둘째, 교황이 연옥을 다스릴 수 있다는 주장을 반대했다. 교황은 연옥에 있는 영혼들의 형벌을 면제할 수 없다. 교황은 자신의 판단이나 교회법에 의해서 부과된 형벌을 면제할 의사나 능력을 갖지 않는다. 교황은 죄책을 면제할 수도 없다. 교황이 연옥을 다스릴 수 있다면 왜 사랑으로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다 구원하지 않는가?

셋째, 면죄부 제도의 해로움을 지적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하셨을 때 신자의 생활 전체가 참회의 생활이 될 것을 요구하신다. 면죄부를 사는 사람은 죄를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것은 기독교 교리와 맞지 않는다. 면죄부를 삼으로 구원의 확신을 얻었다고 믿는 자들은 영원히 저주를 받을 것이다. 면죄부는 가장 악독한 제도이다. 방종하게 만들고 결국 구원을 해치기 때문이다. 구원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자기 안에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 부르짖어야 하는데 면죄부는 이것을 파괴한다. 죄인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죄의 공포로 불타야 한다. 이것이 연옥의 고통이다. 연옥이 어디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연옥의 고통을 경험할 수 있음을 나는 안다. 이와 같은 고통으로부터 구원이 시작된다. 자신이 완전히 끊어버림을 당했다고 믿을 때 구원의 빛이 비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믿음을 통해서 평화가 임한다. 이와 같은 경험이 없는 자는 비록 교황으로부터 백만번 사함을 받을 지라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Here I Stand, pp.79-83)

 

루터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1517년 만성절(All Saints) 전날 밤인 10월 31일 루터는 비텐베르그의 성곽교회(Castle Church)의 문에 95개 조항(The Ninety-Five Theses)을 게시하고 이에 대한 논쟁을 벌이기를 원했다.

교황청의 반응

루터가 95개 조항을 성곽교회 정문에 게시했을 때 그것을 널리 퍼뜨려 대중을 선동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다만 그 책임자에게 도전하여 그 설명을 들으며 학자들 사이에서 토론을 하려는 것이었다. 루터는 95개 조항의 한 사본을 마인츠의 알버트 감독에게 보내며 다음과 같은 글을 첨부했다. “땅의 찌끼와 같은 제가 존귀하신 당신께 접근함을 용서하소서. 거룩하신 당신께서 먼지와 같은 이 글을 살피시고 나의 탄원을 들으소서. 당신께서 나의 명제들을 살펴 보신다면, 면죄부의 교리가 얼마나 의심스러운 교리인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알버트는 그 사본을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냈다. 교황은 그것을 보고 나서 다음과 같은 논평을 했다고 전해진다. “술 취한 독일 사람이 그 글을 썼는데 술에서 깨어나면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루터의 95개 조항은 인쇄공에 의해 수주 안에 독일 전역에 퍼져 읽혔다. 독일 국민의 반 이탈리아 감정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당황한 교황청은 루터의 행동을 제재할 대책을 세웠다. 루터가 속해 있는 어거스틴 교단을 통해 루터를 제지해 보려고 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교황은 도미니칸 교단의 실베스터 프리에리아스(Sylvester Prierias)를 사절로 보내어 루터에게 답변하도록 했다.

1518년 7월 프리에리아스는 루터를 대면하고 그의 입장을 공격했다. 초점을 면죄부에 두지 않고 교황의 권위에 두며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보편적 교회는 실제로 로마교회를 말한다. 로마교회는 추기경들로 구성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교황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편적 교회가 신앙과 도덕에 있어 오류를 범할 수 없음과 같이 종교회의나 로마교회나 교황은 공적 지위에서 말할 때 잘못을 범할 수 없다. 누구나 로마교회나 교황의 가르침이 무오한 신앙의 규칙이며 성경의 권위를 부여하는 근원이 됨을 부인하는 자는 이단이다. 면죄부와 관련해서 로마교회가 실제로 하는 일을 부인하는 자는 이단이다.” 프리에리아스는 루터의 잘못을 반박하며 그를 가리켜서 놋쇠 머리와 철의 코를 가진 문둥병자 같은 녀석이라고 욕을 했다.

이에 대해 루터는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반박했다. “내가 텟젤을 멸시했지만 그는 너보다는 똑똑했다. 너는 성경이라곤 하나도 인용하지 않는구나. 너는 주장만 하지 이유를 대지 않는다. 너는 악독한 마귀와 같이 성경을 왜곡한다. 너는 교회가 교황으로 구성된다고 말하는데, 교황들의 꼴을 보아라. 율리우스 2세의 피 흘린 범죄, 보니페이스 8세의 잔학한 독재를 보아라. 그들은 격언이 말하는 대로 늑대와 같이 나서 사자와 같이 다스리고 개 같이 죽지 않았느냐? 너는 교회가 추기경들로 구성되었다고 말하니 종교회의는 무엇으로 구성되었는가? 너는 나를 문둥병자라고 부르는데 그래도 나에게 약간의 진리가 있음을 인정하니 다행이다. 너는 교황을 권력과 폭력을 누리는 황제로 만드는데 막시밀리안 황제와 우리 독일 국민은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루터의 답변의 극단적인 점은 교황과 종교회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지만 오직 성경만이 궁극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 점이다.

한편, 교황은 이미 6월에 루터의 로마 소환을 명하는 소환장을 보낸 일이 있는데 이 소환장이 1518년 8월 7일 루터에게 도달했다. 60일 이내에 로마에 출두하여 이단에 대한 심문을 받으라는 내용의 소환장이었다. 루터는 이튿날 프레데릭(Frederick) 영주에게 편지하여 이전의 약속대로 자기의 심문이 로마에서 행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끈질긴 협상 끝에 루터의 심문이 독일의 보름스 국회(Diet of Worms)에서 행해지도록 합의됐다. 그러나 보름스 국회에서의 심문이 있기 전에 아우그스버르그(Augusburg)에서 열리는 제국의회에서 추기경 카제탄(Cajetan)과의 개인적인 심문을 하기로 프레데릭 영주가 주선했다.

교황 레오 10세와 황제 막시밀리안은 이 계획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루터를 잡게 되기를 바랐다. 교황은 프레데릭 영주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사랑하는 아들이여, 사도의 축복이 그대 위에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듣는 대로 죄악의 자식인 마르틴 루터가 하나님의 교회를 공격하고 있다는데 그가 당신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것이오. 그것이 헛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당신의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기를 바라오. 루터의 가르침에 이단이 섞여 있다는 충고를 들었으므로 이제 그를 추기경 카제탄 앞에 서도록 했소.”

아우그스버르그로 가는 루터는 공포와 근심에 사로 잡혀 있었다. 그때의 공포는 3년 후 보름스 국회에서도 보다 훨씬 심했다고 나중에 술회했다. “나는 이제 죽는구나.” 루터는 중얼거렸다. 그는 도중에 위장염으로 기절할 뻔할 정도였다. 그는 또한 자기 자신만이 옳고 모든 세대가 잘못에 빠졌다고 주장하는 자기 주장이 참으로 옳은가 하는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루터는 드디어 아우그스버르그에 도착하여 10월 12일부터 14일까지 3일간 카제탄과의 논담을 벌였다. 첫날 카제탄을 만났을 때 루터는 겸손히 무릎을 꿇었고 카제탄은 손을 들어 그를 일으켰다. 그리고 루터를 향해서 그의 잘못을 취소하라고 했다. 잘못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카제탄은 가장 큰 잘못은 교회가 소장하고 있는 공로의 보화(Treasury of Merit)를 루터가 부인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교황 클레멘트 6세의 교서를 보여주며 여기 “그리스도의 공로가 면죄의 보화이다”(that the merits of Christ are a treasure of indulgences)라고 씌어 있지 않느냐’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루터는 교서가 정말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면 취소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교서는 “그리스도가 그의 희생으로 보화를 획득했다”(that Christ by his sacrifice acquired a treasure)고 기록하고 있지 않느냐고 따졌다. ‘이다’와 ‘획득했다’는 같은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독일 사람들이 문법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고 했다.

이와 같은 답변은 사리에 맞지 않는 억지 답변이었다. 궁지에 몰린 당황한 루터가 교서의 권위를 부인하지도 않고 자기의 입장을 취소하지도 않으려 하면서 만들어낸 억지 답변이었다. 카제탄과의 두번째 논담에서 루터는 보다 담대했다. 이번에는 교황의 권위와 아울러 교서의 권위를 부인했다. 사람이 만들어낸 불확실한 교서 하나 때문에 분명한 성경의 증거들을 취소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리고 종교회의는 물론 성경의 권위와 이성으로 무장된 신자는 교황보다 우월하다고 했다

 

카제탄과의 두번째 논담에서 루터는 보다 담대했다. 이번에는 교황의 권위와 아울러 교서의 권위를 부인했다. 성경의 권위와 이성으로 무장된 신자는 교황보다 우월하다고 했다.

카제탄과의 두번째 논담

이에 대해 추기경 카제탄은 성경은 해석되어야 하는데 교황이 성경의 해석자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교황은 종교 회의보다도 성경보다도 그리고 교회 안의 무엇보다도 우월하다고 했다. 루터는 “교황이 성경을 우롱하고 있다. 나는 교황이 성경보다 우월함을 부인한다”라고 응수했다. 케제탄 추기경은 화가 나서 다음과 같이 호통을 쳤다. “루터가 ‘철회한다’고 말하지 않는 한 여기를 떠나서 결코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때 루터는 고향에 편지하기를 카제탄은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으니 마치 당나귀가 하프를 타는 격이라고 했다. 그 당시 만화가들은 교황을 그리면서 하프를 타는 당나귀 모습으로 그렸다.

카제탄은 곧 냉정을 되찾고 슈타우핏츠와 저녁을 먹으면서, 루터에게 슈타우핏츠보다 더 가까운 친구가 없으니 루터의 마음을 변화시켜 보라고 했다. 슈타우핏츠는 자기의 능력으로는 루터를 설득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나는 가끔 루터를 설득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나보나 능력이 뛰어나고 성경을 구사하는 데 있어서 나보다 월등합니다. 당신이 교황의 사절이니 당신의 손에 달렸습니다.”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다시는 루터와 말을 하지 않겠소. 사실 그의 눈은 연못과 같이 깊고 그의 머리에는 놀라운 상상력이 있습니다.”

루터는 카제탄이 자기를 체포할 권한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밤에 몰래 도망쳤다. 뉴른베르그로 도망을 친 것이었다. 뉴른베르그에 숨어 있다가 10월 30일 비텐베르그로 돌아왔다. 추기경 카제탄은 루터와의 면담 내용을 프레데릭 영주에게 보내면서 루터를 체포하여 로마로 보내든지 그를 추방하라고 했다. 한편 비텐베르그로 돌아온 루터는 카제탄과의 면담 내용을 자기의 입장에서 써서 인쇄에 붙여 프레데릭 영주를 더욱 곤란하게 만들었다. “교황의 교서를 부인한다고 해서 나쁜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누구든지 복음을 부인하면 이단이다. 나는 교서를 저주하고 증오한다. 그 교서에 관해서 그리스도의 공로가 면죄의 보화가 된다는 것을 나는 부인한다. 그의 공로는 교황과 상관없이 은혜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공로는 죄를 제거하고 공로를 증가하지만, 면죄부는 공로를 제해버리고 죄만 남겨둔다. 이 아첨자들이 교황을 성경보다 높이고 교황은 잘못을 범할 수 없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성경은 폐하게 되고 교회 안에는 인간의 말만 남게 될 것이다.”

1518년 11월 28일 루터는 종교회의를 열어 자기를 심문해 줄 것을 호소했다. 이와 같은 처사에 대해 프레데릭 영주는 당황하고 어떤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루터는 위험을 느끼며 피신할 각오를 했다. 그때 오스트리아의 잘스브르그로부터 슈타우핏즈의 편지가 날아왔다. “세상은 진리를 미워합니다. 비텐베르그를 떠나 내게로 오시오. 함께 살다가 함께 죽읍시다. 버림을 받은 우리는 버림을 받은 그리스도를 따릅시다.” 루터는 교인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친구들을 초대하여 저녁을 같이 했다. 바로 두 시간 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루터의 입장을 옹호하는 프레데릭 영주의 편지가 도달했다. 루터는 편지를 받아 들고 너무 기뻐하면서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비텐베르그에 남아 있기로 했다.

1518년 11월 9일 교황청은 면죄부에 대한 공식 견해를 나타내는 교서 Cum Postquam을 발표했다. 면죄부의 교리가 아직 교황의 공식 승인을 받지 않았으므로 루터를 이단으로 단정하기가 어려웠고 면죄부에 대한 해석이 지나쳤기 때문이었다. 종전까지는 면죄부를 삼으로 형벌(penalty)뿐 아니라 죄책(quilt)까지도 사해진다고 가르쳤으나 이제는 오직 형벌만 면할 수 있고 죄책은 참회의 성례를 통해서 사해진다고 했다. 그리고 지옥의 형벌을 사하는 것이 아니고 지상에서와 연옥에서 받을 형벌만 감해주는 것뿐이라고 했다. 지상에서 받아야 될 형벌은 교황이 사할 수 있으나 연옥에서 받아야 될 형벌은 교황이 그리스도와 성자들이 쌓아 놓은 공로를 하나님께 드리며 기도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교황청의 정책이 이처럼 완화되었음도 불구하고 루터는 계속 교황권을 공격하며 교황과 종교 회의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교회법의 일부는 성경과 모순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므로 도미니칸들은 그를 가리켜 ‘악독한 이단’이라고 불렀고, 교황은 그를 가리켜 ‘죄악의 자식’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추방도 못하고 당장 끌어오지도 못했으니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그 당시 정치적 상황은 1519년 1월 12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Maxmilian)이 죽어 후계자를 택해야 할 형편이었다. 그때 두 후보자가 나타났는데 프랑스 출신 프랜시스(Francis)와 스페인 출신 찰스(Charles)였다. 이 두 사람의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로마 교황청은 이들보다 독일의 프레데릭(Frederick) 선제후가 황제가 되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교황은 프레데릭 선제후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으려 했다.

로마 교황청은 프레데릭 영주의 환심을 사기 위해 특사 밀팃즈(Carl von Miltitz)를 그에게 보내어 많은 특권을 부여했다. 프레데릭이 소장한 성자들의 뼈 하나에 연옥에서의 형벌 100년을 감해주는 특혜를 부여했다. 그리고 황금의 장미를 선사하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사랑하는 아들이여, 이 지극히 거룩한 장미는 성유와 향수가 뿌려졌고 교황의 축복을 받은 꽃이다. 이 장미는 우리 주님의 가장 귀한 보혈을 상징한다. 사랑하는 아들이여, 하나님의 향기가 귀하의 마음 속에 스며들게 하며 밀팃즈가 그대에게 지시하는 것을 다 수행할 것이다.”

독일에 도착한 밀팃즈는 루터가 이제 자기 손 안에 들어 있다고 자신만만해 했다. 그러나 독일 국민들을 만나보고 나서 교황 지지 세력보다 루터 지지 세력이 3배나 강한 것을 발견하고는 1천년의 역사를 통해 루터만큼 교회에 해를 끼친 자는 없었다고 한탄했다. 그리고 1만 두캇을 쓴다 해도 루터는 잡아야 한다고 했다.

밀팃즈가 루터에게 면죄부에 대한 교황의 새 교서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자 루터는 교서가 성경을 한마디도 인용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밀팃즈는 루터에게 공개 토론이나 출판을 삼가 주기를 바란다고 부탁했다. 교황청이 삼가면 자기도 삼가겠다고 약속하자 밀팃즈는 눈물을 흘렸다. 루터는 이를 보고 악어가 거짓 눈물을 흘린다고 논평했다. 밀팃즈는 또한 자기들의 허물을 숨기기 위해 텟젤에게 누명을 씌워 그를 정죄했다. 즉 여행할 때 사치했으며 불륜의 자식 2명을 가졌다고 했다. 텟젤은 수도원에 파묻혀 억울함에 사무쳐 죽어갔다. 그러나 루터는 오히려 텟젤에게 편지하여 그를 위로했다.

출처 : 미국플로다주잭슨빌의 신앙인모임



성경 말씀과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의 확신은 슈타우피츠나 버나드나 스콜라주의자들이나 신비가들에서 찾아볼 수 없는 구원의 빛을 비쳐 주었다. 루터는 성경과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을 기독교의 핵심으로 삼게 되었다. 루터는 이제 Sola Scriptura, Sola Gratia, Sola Fide (그리고 Sola Christus, Soli Deo Gloria)의 모토를 내세우고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 준비를 하게 되었다(Here I Stand, pp.60-67).

 

“라이프찌히 논쟁”

루터와 로마교회 사이에 벌어진 가장 큰 논쟁이 1519년 7월 4~14일까지 라이프찌히(Leipzig)에서 행해진 라이프찌히 논쟁이었다. 로마교회측에서는 잉골슈타트(Ingolstadt)대학의 교수 존 에크(John Eck)를 비롯하여 잉골슈타트 대학과 라이프찌히 대학의 교수들이 참석했고, 루터측에서는 루터를 비롯하여 비텐베르그 대학의 교수 칼슈타트(Carlstadt)와 멜랑톤(Melanchthon) 등이 참석했다.

에크가 먼저 도착하여 라이프찌히 시의회가 제공한 76명 호위병의 호위를 받으며 시가를 왕래했다. 비텐베르그 일행은 며칠 뒤 도끼로 무장한 200명의 학생들과 함께 도착했다. 토론이 라이프찌히 성의 강당에서 벌어졌다.

첫날 모든 사람은 성 토마스 교회의 여섯 시 미사에 참석했고 오후에는 회의 진행에 관한 규칙들에 관해 논쟁을 벌였다. 한 증인은 당시 논쟁자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마르틴은 중간 키에 걱정과 연구로 몸이 야위어서 살갗 위로 드러난 뼈를 거의 다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남성적 힘에 넘쳤고 가슴에 파고드는 힘찬 목소리(clear, penetrating voice)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학문이 풍부했고 성경을 손 끝에 잡고 마음대로 구사했다. 그는 다정하고 친절했으며 완고하거나 오만하지 않았다. 칼슈타트는 루터보다 키가 더 작고 얼굴은 찌들은 청어(smoked herring) 모습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굵고 불쾌했다. 그의 기억력은 더디었으나 성내는 데는 급했다. 에크는 가슴팍이 벌어진 육중한 몸과 독일어 악센트의 힘찬 목소리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분명하지 못했고 오히려 거칠었다. 그의 두 눈과 입과 얼굴 전체의 모습은 신학자라기 보다는 백정(butcher)을 연상하게 했다.”

칼슈타트와 에크가 일주일 동안 인간의 타락에 대한 논쟁을 벌인 후, 루터와 에크는 교황의 권위에 관한 논쟁을 벌였다. 에크는 로마 교회와 교황의 신적 권위를 내세우며 “나는 로마 교황을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높이 존경하오”라고 말했다. 그는 로마 교황의 우위성을 주장하며 1세기의 교서를 내놓았다. 그 교서의 내용은 “로마 교회는 그 우위성을 사도들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으로부터 직접 받았으므로 다른 모든 교회와 신자들보다 탁월한 권세를 누린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루터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나는 이 교서들을 배격하오. 거룩한 교황과 순교자가 그런 말을 했을 리가 결코 없소.” 루터의 이 말은 옳았다. 이 교서는 허위 문서로 알려진 이시도리안 교서들(Isidorian decretals)에 속하는 것이었다. 루터는 로렌조 빌라의 도움을 입지 않고 ‘역사 비평’을 훌륭하게 해낸 것이었다. 루터는 로마 교황의 우위성을 주장한 것이 400년밖에 되지 않았으며 초대 교회와 처음 1,100년 동안은 주장되지 않았다고 지적했고, 그리고 그것이 비성경적임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 에크는 루터로 하여금 위클리프와 후스의 입장을 시인하도록 유도했다. 에크는 꼬집어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정죄받은 위클리프의 오류를 그대로 따른다는 말씀이오? 그는 로마 교회가 우위인 것을 인정하지 않아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소. 당신은 또한 베드로가 로마 교회의 머리됨을 부인한 요한 후스의 악질적인 오류를 그대로 따르고 있소?”

이에 대해 루터는 처음에는 적극적인 반박을 하지 못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보헤미아인들의 주장을 배격하오. 나는 그들의 분열을 한 번도 인정한 일이 없었소. 그들이 교회에서 떠나지는 말았어야 했소.” 그러나 점심시간이 되어 회의가 정회되자 루터는 대학 도서관으로 달려가서 후스를 정죄한 콘스탄스 회의(1414-18)의 기록을 찾아 보았다. 놀랍게도 그가 정죄 받은 조목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유일하고 거룩한 보편적 교회는 택함을 받은 자들의 무리이다. 보편적인 거룩한 교회는 하나이다.”

오후 2시 회의가 계속되었을 때 루터는 이렇게 선언했다. “후스가 내세웠던 조항들 중에는 교회가 정죄할 수 없는 참으로 기독교적이고 복음적인 것이 있음을 발견했소.” “로마 교회가 우위인 것을 인정하지 아니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진술이 위클리프의 것이든지, 후스의 것이든지 나는 상관하지 않소. 로마의 우위를 인정하지 아니했던 수많은 희랍 사람들도 구원 얻은 사실을 나는 알고 있소.”

이에 대해 에크는 “네가 만약 후스와 위클리프의 입장을 변호한다면 너야말로 이단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이며 참으로 어리석은 자이다” 라고 소리쳤다. 루터는 다시 “종교회의도 가끔 잘못을 범한다. 종교회의들을 보라. 서로 모순되는 것들이 많지 않은가? 성경으로 무장된 평신도가 오히려 교황이나 종교 회의보다 더 신뢰할 만하다. 성경 때문에 우리는 교황과 종교회의를 거부해야 한다” 라고 단호하게 맞섰다.

에크는 “이것은 보헤미아의 병균이다. 이것은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다” 라고 한탄했다. “만약 그대가 콘스탄스 회의를 거부하고 합법적으로 소집된 종교회의가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대는 나에게 이방인과 바리새인과 마찬가지이다.”

루터와 에크가 다룬 두번째 논제는 연옥(purgatory)에 관한 것이었다. 에크는 구약 외경 마카비 2서 12:45,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 속량을 이루므로 그들이 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를 인용하면서 연옥의 실재를 주장했다. 루터는 마카비서가 구약 정경에 속하지 않고 외경에 속하므로 권위가 없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논쟁의 고장에서 교서와 종교회의의 권위를 부인했고 이제 외경의 권위도 부인했다.

그들이 다룬 세번째 논제는 면죄부(indulgence)와 고해(penance)에 관한 문제였다. 그러나 면죄부 자체에 대한 토론은 없었다. 그러나 고해 문제에 대해서 에크는 계속 루터를 공격했다. “교회는 모두 잘못을 범했고 그대만이 무엇을 참으로 안다는 말인가?” 이에 대해 루터는 답변했다. “하나님은 당나귀를 통해 말하지 않았는가?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말하겠다. 나는 기독교 신학자다. 나는 내가 믿는 진리를 피 흘려 죽기까지 변호하기로 작정했다. 나는 그 진리가 가톨릭 교회에 의해서 선언되었든지 이단에 의해 되었든지 상관치 않고 종교 회의가 인정하든 부인하든 간에 나는 진리만을 고백하겠다.”

논쟁은 18일간 계속되었다. 논쟁 후에 프라그(Prague)에 있는 후스파 지도자들로부터 두 통의 편지가 루터에게 보내졌다. “후스가 한때 보헤미아에 있었던 것처럼 지금 그대 마르틴이 삭소니에 있오. 굳게 서시오!” 편지와 함께 후스의 저서 「교회에 대해서」(On the Church) 한 권이 도착했다. 루터는 고백하기를 “라이프찌히에서 보다 나는 지금 후스의 입장에 더 많이 동의한다”고 했다.

1520년 2월에는 “모르든 알든 우리는 모두 후스파다” 라고 선언했다. 에크는 이때 로마에서 교황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죄악의 자식(son of iniquity)이 이제는 삭손의 후스(the Saxon of Hus)가 되었습니다.”

 

라이프찌히 논쟁(1519년) 이후 루터는 일약 국가적 영웅으로 그리고 국제적 인물로 등장했다. 루터의 저서들이 프랑스, 스페인, 영국, 스위스 그리고 로마에까지 배포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은 당시의 인문주의(Humanism)와 국가주의(Nationalism)와 합세해 크게 확장되었다. 종교개혁과 인문주의는 그 이념과 방법에 있어서 공통점이 많았고 상호 격려의 관계를 유지했다. 물론 근본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종교개혁의 이념이 인문주의나 국가주의의 이념과는 달랐다. 후텐과 지킨겐은 억압받는 독일 민중 편에 서서 민중운동을 펴나가면서 루터에게 무력적 협조를 제공하며 도우려고 했다. 그러나 루터는 이와 같은 제안에 대해 “나는 그들을 멸시하지는 않지만 그들을 사용하려고 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개혁의 이념”

마르틴 루터의 생애 가운데서 1520년은 여러 면으로 중대한 해였다. 로마 교회와의 대립이 격화됨에 따라 그는 외적으로 비난, 공격, 위협 및 저주를 받았으며 동시에 예찬과 격려도 받았다. 1520년은 이 모든 것이 그 절정에 달한 해였다. 교황은 1520년 6월에 루터에게 60일 이내에 로마에 오지 않으면 파문한다고 소환장을 보냈다. 그러나 루터는 그 소환장을 불태웠다. 로마 교회에서는 그를 이단자로 규정하고 그와 그의 저서들을 없애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에 대해 루터는 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밝히고 종교개혁의 의미를 명백히 해 주는 그의 작품들을 출간했다. 루터의 많은 저서들 가운데 1520년에 나온 작품들은 유달리 빛나는 것들이었다. 그 작품들은 1520년 5월에 발표된 「선행론」, 8월에 출판된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서한」, 10월에 출판된 「교회의 바벨론 포로」, 12월에 출판된 「크리스천의 자유」였다.

1) 선행론(The Sermon on Good Works). 소책자로 출판된 이 저서는 평민적이고 교화적인 문체로 개혁 정신을 잘 나타내며 신앙과 선행의 위치와 관계, 믿음의 근본적인 동기 및 율법에 관한 문제를 간명하게 다루었다. 여기서 그는 최고의 선행은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하나님께 구원 얻는 길은 교회에서 명령하는 기도, 금식, 자선 같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뿐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계명을 알고 지키는 것은 선행 중에서 가장 으뜸이며 고귀한 것이다. 계명 가운데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첫째 계명은 다른 모든 계명보다 앞선다.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믿어야 한다. 그의 선행론은 로마 교회의 선행론과 정반대적이었다.

2)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서한(The Address to the Christian Nobility of the German Nation). 불타는 확신과 유창한 독일어로 쓰여진 이 논문은 금방 독일 전 지역에 유포되었다. 이 저서는 세속권을 높이 인정하면서 독일 기독교인 통치자들이 종교개혁에 적극 참여하고 지원할 것을 역설했다. 새 여호수아가 일어나 로마에 있는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게 될 것이라고 암시하면서 첫째는 교회의 권세가 세속권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성벽, 둘째는 교황만이 성서를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성벽, 셋째는 교황만이 종교회의를 소집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성벽이라고 했다.

(1) 첫째 성벽에 대하여 루터는 만민 제사장설을 내세우며 세속 통치자들의 종교적 기능과 권한을 높이 주장했다. (2) 둘째 성벽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당나귀를 통해서 교황을 얼마든지 경고하실 수 있다” 라고 말하면서 평신도들 가운데 오히려 선지자들 보다 더 경건한 신자와 바른 믿음과 은사를 가진 자가 많다고 하였다. (3) 셋째 성벽에 대해 루터는 “예루살렘 회의는 베드로에 의해서 소집된 것이 아니라 사도들과 장로들에 의해 소집되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종교회의가 제정하여야 할 개혁안을 제안했다.

① 교황청의 사치를 일소하고 사도적 검소함을 본받아야 한다. 교황의 3층 왕관과 발 키스를 금해야 한다. ② 교황은 세속 통치를 포기하고 종교적 사건에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③ 교황청에 바치는 세금이 마치 밑 빠진 가방 속에 돈을 넣는 것과 같은데, 각국의 통치자들은 시민들이 교황청에 세금을 내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④ 종교 소송을 로마에서 하지 말게 할 것이다. ⑤ 성지순례를 금할 것이다. ⑥ 갖가지 축제일을 폐지하고 주일날만 성수할 것이다. ⑦ 성직자의 결혼을 허용할 것이다.

이와 같이 이 글 전체를 통해 로마 교회의 타락을 지적하면서 그리스도의 겸손과 청빈을 대조적으로 묘사했다.

3) 교회의 바벨론 포로(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 이것은 루터의 저서 중에서 가장 조직적인 신학적 논문의 하나였다. 에라스무스는 이 글을 읽고 “로마와의 분열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고 부르짖었다. 루터는 이 글에서 성례(Sacraments)가 오류와 남용에 의해 교회에 포로로 사로잡히게 되었다고 지적하며 로마 교회의 성례 제도를 맹렬히 공격했다. 보름스(Worms) 국회(1521년)에서 루터가 심문을 받을 때 그에게 제시된 책이 바로 이 책이었는데, 루터는 이 책이 자기의 책인 것과 그 책의 내용을 긍정했다. 루터는 이 책에서 7성례를 하나씩 논하면서 그 중 성찬과 세례만 인정하였다. 그리고 다른 예전들인 견신례, 혼례, 안수례, 고해성사, 종부 성사는 성례로 인정하지 않았다. 루터가 안수례를 하나의 성례로 보지 않고 그것을 배격함으로 그는 중세의 사제주의(clericalism)를 깨뜨리고 만민제사장주의(priesthood of all believers)의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4) 크리스천의 자유(The Freedom of the Christian Man). 이 논문은 1950년 10월 교황 레오(Leo) 10세에게 보내는 편지에 첨가된 글이었다. 이 논문은 30개조로 된 작은 글이나 진주와 같은 글이었다. 이 논문 가운데서 루터는 크리스천의 자유를 아래와 같이 총괄하였다.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충분한 것은 믿음뿐이다. 그는 의로워지기 위해서 선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롭다. 선행이 그를 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사람이 선행을 만든다. 사람이 신자와 크리스천이 되지 않았다면 그의 선행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선행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높이 예찬한다.” “크리스천은 모든 사람에 대하여 가장 자유로운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한편 크리스천은 모든 사람에 대해 가장 책임이 많은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다.”이 두 가지 명제는 크리스천의 본질을 밝히 보여주는 말이며 서로 모순된 것 같으나 가장 근본적인 크리스천의 자유를 말하고 있다.” “크리스천은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그리스도와 이웃을 위해서 사랑으로 산다. 그는 믿음으로 자기를 너머(above himself) 하나님에게 이르고 그리고 사랑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자기보다 아래로(below himself) 내려온다.”

 

교황은 1520년 6월과 1521년 1월 두 번 루터를 파문하는 파문장을 보냈다. 결국 1521년 4월 독일 보름스(Worms)에서 루터를 심문하기 위해 신성로마제국의 의회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찰스 5세(Charles V, 1500-58)에 의해 열렸다.

“내가 여기 서 있습니다.”(Here I Stand)

독일 국민은 이 회의에서 황제의 힘으로 종교적인 싸움이 해결되기를 기대하였다. 반면에 교황의 대표 알레안더(Aleander)는 루터를 곧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루터는 왕후, 귀족, 성직자들,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의 후원과 프레데릭의 보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제국의 황제도 루터는 쉽게 처형하지 못했다. 프레데릭은 황제에게 루터를 처형하기 전에 그를 심문하고 그에게 자기 변호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했다. 이 두 틈에 끼인 황제는 1521년 4월 16일 루터에게 보름스에 출두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라인강 상류 연변에 위치하고 있는 보름스에 소집된 신성로마제국 회의는 루터의 생애의 절정을 이루었다. 로마 교황의 권위와 면죄부를 비난하였다는 이유로 이단의 낙인을 받게 된 루터에게 최후적인 재판이 벌어지게 된 것이었다. 친구들은 굳이 만류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비록 그를 대적하는 적의 수가 보름스 의회 지붕 위의 기왓장 같이 많다고 할지라도 단연코 가야 한다고 했다. 루터는 민중들의 열광적인 환송과 축복의 함성을 받았다. 그는 몇몇 친구들과 같이 앞뒤에서 민중의 호위를 받으며 4월 16일 회의장에 들어섰다.

1521년 4월 17일 루터가 황제와 제국의 최고의회 앞에 섰다. 로란드 베인톤 박사는 이 중요한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여기서 과거와 미래가 만났다.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는 현대의 시작을 본다.” 트리에르 대감독의 하수인인 엑크(라이프찌히 논쟁 때의 에크가 아님)가 황제 대신으로 루터를 소환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루터의 저서들을 루터에게 제시하면서 그것을 고수할 것인지 철회할 것인지를 심문하였다.

루터는 들릴까 말까 한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책들은 모두 나의 책이요, 그리고 그것보다 더 많이 썼소.” 엑크는 다시 물었다. “그대는 그것들을 전부 변호하는가 혹은 일부분을 철회하는가?” 루터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관련되며 영혼들의 구원과 관련됩니다. 그리스도는 말씀하시기를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그를 아버지 앞에서 부인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너무 적게 말하는 것이나 너무 많이 말하는 것은 모두 위험합니다. 다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기 바랍니다.” 루터가 너무 두려워했는지 모른다. 황제도 에크도 놀랐다. 그러나 황제와 에크는 루터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4월 18일 그날은 왔다. 마침내 루터는 황제와 제후와 그밖의 고급 관리들 앞에 서서 그의 신앙과 신념을 피력했다. 그의 목소리는 분명하게 울려 퍼졌다. 엑크는 전날의 질문을 반복했다. 루터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당신은 어제 나에게 이 책들이 나의 책인지 그리고 내가 그것들을 철회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나의 책이오, 그러나 둘째 질문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모두 한 종류의 것이 아님을 지적합니다. 어떤 것은 신앙과 생활 문제를 단순하게 그리고 복음적으로 취급합니다. 그래서 나의 원수들까지도 그것은 읽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종류의 것은 악한 생활과 교황들의 교훈으로 세상이 황폐된 것을 지적합니다. 셋째 종류의 것은 개인들에 대한 공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엑크는 다시 말했다. “마르틴, 그대는 그대의 책들을 충분히 구분하지 못했다. 초기의 것들은 악하고 후기의 것들은 더욱 더 악한 것뿐이다. 그대는 위클리프와 후스의 오류를 반복하는 것뿐이다. 뿔로 받지 말며 솔직하게 답변하라. 그대는 그대의 책들과 그 속에 포함된 잘못들을 철회하는가 하지 않는가?”

루터는 이제 정중하고 분명하게 답변했다. “귀하가 나에게 단순한 대답을 요구하시니, 나는 뿔로 받거나 이를 드러내놓지 않고 답변 하겠소. 성경과 명백한 이성에 의해 확신되지 않는 한 나는 교황들과 종교 회의들의 권위를 수락하지 않겠소. 왜냐하면 그것들은 서로 모순되기 때문이요. 내 양심은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있소. 나는 아무것도 취소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겠소. 양심을 거스르는 것은 옳지도 안전하지도 않소. 하나님이여, 나를 도와주소서! 아멘.” 어떤 사본에는 “여기 내가 서 있다. 나는 달리 할 수 없다”(Here I Stand, I cannot do otherwise)는 말을 추가했다고 했다.

이런 루터의 완강한 태도에 대해 보름스 의회는 즉시 어떤 처단을 내릴 수는 없었다. 퇴장할 때 그는 독일인들에게 둘러싸였다. 그러나 루터는 군중을 위로하면서 숙소로 갔다. 프레데릭 선제후는 후에 루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마르틴 박사는 황제와 귀족들 앞에서 훌륭하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 그는 너무 대담했다.” 황제는 루터에게 안전 보증서를 주어 귀환시키기로 하였으나, 루터가 귀로에 오른 지 얼마 후에 황제는 루터의 체포령을 내렸다. 그러나 교황청이나 황제도 이 독일 국민의 영웅을 잡아 죽일 수는 없었다. 루터가 귀가의 길을 떠난 지 8일 만인 4월 26일 도중에서 프레데릭 영주는 비밀히 자기 병력을 보내어 루터를 잡아다가 자기의 바르트부르그성에 숨겨두었다.

몇 달 동안은 실제로 루터가 숨어 있는 곳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 교회를 공격하는 그의 글이 계속 나타났으므로 그가 살아서 이 싸움을 이끌어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 시기야말로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그는 이 바르트부르그성에서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1521년 12월에 시작하여 1522년 9월에 완성하여 출판하였다. 루터는 헬라어 원문에서 번역하였다. 루터 이전에도 독일어 성경이 있었으나 라틴어 Vulgate에서 번역하였기 때문에 표현이 까다롭고 읽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그는 특수한 어학의 재능으로 일반이 잘 이해할 수 있는 국어체인 독일 말로 성서를 내놓는 것이다. 이 공헌이야말로 루터가 남겨놓은 업적 가운데서 가장 의의 있는 금자탑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1534년에는 드디어 신구약 성서가 전부 완성되었다.

루터는 마지막까지 개혁 운동을 전개하다가 1546년 2월 18일 그의 출생지인 아이스레벤에서 63세에 세상을 떠났다.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은 매우 광범하게 다방면에 걸쳐 깊은 각성과 개혁을 일으킴으로써 서양사상, 아니 후세 전 인류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계속 정치, 경제, 교육, 윤리, 철학, 문학 그 밖의 여려 지도적인 면에 철저한 변혁을 일으키게 하였다.

 

 

루터의 종교개혁 중심에는 성경 말씀과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있었고 그리고 은혜와 믿음이 있었다. 여기서는 루터의 성경관을 살펴본다.

“구원과 성경”

루터는 종교적으로 매우 민감한 청년이었다. 지옥의 공포가 늘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1505년 수도원에 들어가 8, 9년 동안 수도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항상 구원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기도와 미사와 참회와 예배에 빠지지 않았고 때로는 3일씩 금식도 했다. 로마를 찾아 빌라도의 계단에 무릎을 꿇고 기어 오르며 기도도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허사였다. 루터는 점점 더 깊은 죄의 고민과 지옥의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1514년(혹은 1513년) 가을 어느 날 루터는 빗텐베르그 어거스틴 수도원 탑 속의 서재에서 소위 “탑 속의 체험”이라고 불리는 복음적 체험을 가지게 되었다. 루터는 시편 22편 말씀을 읽으며 이해할 수 없는 놀라움에 사로잡혀 부르짖었다. “어째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어째서? 어째서?” 다음 순간 루터는 벼락에 맞은 듯한 놀라움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나 루터 대신, 나 루터 대신!” 루터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모습은 이제는 더 이상 무서운 심판자가 아니라 사랑과 용서로 가득찬 구주의 모습이었다. 루터는 이제 새로 태어난 듯한 느낌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루터의 구원관에 있어서 성경이 차지하는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볼 수 있다. 중세 교회는 구원과 은혜의 방편으로 성례 제도와 면죄부 제도를 내세웠었다. 루터는 이를 배격하고 성경이 구원과 은혜에 이르는 유일한 문이요 열쇠임을 강조했다.

“그리스도 중심적 성경관”

1514년 빗텐베르그 탑 속에서의 복음적 체험을 가진 이후 루터는 성경 전체를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생생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고 루터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성경의 핵심이 되었다. “성경 전체는 비록 겉으로는 달리 보일지라도 그 속 뜻을 헤쳐 본다면 오직 그리스도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다.” 복음은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했다. “바울과 베드로도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편지들도 복음 이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선지자들의 가르침도 그것이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고 있을 때 참되고 순수하고 적절한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루터는 그의 「시편 강해(1513-1515)」에서 “나는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못박히심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고 했다. 1517년 「일곱 고백의 시편」에서 루터는 다음과 같이 그의 심정을 토로했다. “나는 고백한다. 내가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덜 발견하게 될 때 나는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를 더 많이 발견하게 될 때 나는 결코 빈곤해지지 않는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것을 아시지도 않으시고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것을 알기를 원하시지도 않는다고 나는 믿는다.” 모든 성경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다(롬 3:21). 이와 같은 그리스도 중심적 성서관이야 말로 루터의 특징적 성서관이라고 하겠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

그리스도 중심적 성서관, 즉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려는 성서관은 루터로 하여금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을 구별하게 만들었다. 루터에게 있어 “하나님의 말씀”은 정적인 쓰인 말씀이라기 보다는 살아서 말씀하시는 하나님(God who speaks)이시며 개인과 만나 말씀하시는 분이다. 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에서도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지만 신약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셨다. 즉 신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적 그리스도로 나타났다고 했다.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인 그리스도와 쓰여진 말씀인 성경과의 관계를 기독론적인 표현을 빌어 설명하면서 (1)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나타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글자로 쓰인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나타나신다고 했고 (2)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강보와 구유를 쓰여진 성경에 비할 수 있다고 했다. 이 강보는 소박하고 비천하지만 그 안에 누워있는 그리스도야말로 보화이시다.

루터가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을 구별하므로 성경에 대한 권위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것은 부인할 수 없으나, 루터 자신은 쓰여진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결코 약화시키지는 않았다. 루터는 쓰여진 말씀인 성경의 영감을 의심치 않았다. 마치 성령의 감동으로 쳐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던 것처럼 성령의 감동에 의해 성경이 쓰여졌다고 했다. 쓰여진 말씀인 성경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했기 때문에 루터는 스스로 성경 번역에 온 정력을 쏟았고 그리고 성경 해석에 그의 온 생애를 다 바쳤던 것이다.

“성경 해석”

로마 교회의 인위적 성경 해석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루터는 올바른 성경 해석은 인간의 이성이나 전통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얻게 된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성경의 문을 여시고 그 뜻을 설명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그 뜻을 깨달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성령의 조명이 없을 때 성경은 어두움에 싸인 닫힌 책으로 남게 될 것이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교훈(즉 회개, 죄, 은혜, 칭의 및 예배에 관한)이 성령에 의해서 가르침을 받기 전에는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올 수 없다.

그러므로 루터는 하나님의 계시를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계시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루터는 또한 칼슈타트와 쯔비카우 등 열광주의자들의 지나친 영해(영적 해석)와 비유적 해석을 배격하면서 역사적 및 문자적 해석을 주장했다. 루터는 고백하기를 “내가 수도원에 있을 때 나는 비유적 해석에 숙달하고 있었다. 나는 모든 것을 비유적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로마서를 강의하고 나서부터 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가 비유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리스도가 실제로 누구신지를 알게 되었다.” 루터는 지나친 내적 조명과 직접 계시를 내세웠던 과격파들의 성경 해석에 반해서 어거스틴을 비롯한 초대교회의 전통적 성경 해석 방법을 적용하며 역사적 및 예표적 성경 해석을 채택했다.

 

루터에게 있어서 정치는 결코 중요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의 중요 관심사는 철두철미 그리스도와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말씀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개혁 운동의 진행 과정에서 정치와 무관할 수는 없었다.

“루터와 정치”
루터에게 있어서 정치는 결코 중요 관심사가 아니었다. 1522년 바르트부르그의 피신 생활로부터 빗텐베르그로 되돌아온 루터는 그곳에서 진행되고 있던 과격파 개혁운동을 비판하며 그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인간적인 성급한 방법으로 개혁을 시도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에 근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의 말씀이 일을 이루시도록 우리는 우리의 노력이나 간섭을 배제하면서 수종들어야 할 뿐이다. 우리는 말씀을 전파할 뿐이고 그 결과는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맡겨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오로지 설교하고 가르치고 저술할 뿐 아무도 무력으로 억제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말씀이 일을 이루시도록 수종들 뿐이다.” (“Eight Sermons at Wittenberg, The Second Sermon”)

그러나 루터는 개혁 운동의 진행 과정에서 정치와 무관할 수는 없었다. 1520년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루터는 그의 개혁운동을 지원하고 있던 세속 통치권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촬스 황제가 루터의 성경을 몰수하려 했을 때 루터는 세속 통치권이 영적 영역을 침범할 수 없다고 이를 반박했다. 루터는 1522년 말경 그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여 세속 통치권에 대한 그의 입장을 밝히는 「세속권 어디까지 복종할 것인가?」라는 작품을 저술했는데 루터는 그 가운에서 두 왕국에 대한 개념을 피력했다. “우리는 온 인류를 두 종류로 구분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왕국에 속한 자와 세상의 왕국에 속한 자로 구분한다. 우리는 내적으로는 하나님의 왕국을 만족시키고 외적으로는 세상의 왕국을 만족시킨다.” (Temporal Authority, To what Extent It Should Be Obeyed”)

두 왕국에 대한 개념이 루터가 직면했던 역사적 상황의 산물만은 아니었고 루터에게 전혀 새로운 개념도 아니었다. 프란츠 라우(Franz Lau)가 지적한 대로 “루터에게 있어서 두 왕국에 대한 개념은 그의 신학 체제 전반에 걸쳐 깊숙이 흐르고 있는” 신학적 개념이었고 기독교 전통에서 항상 찾아볼 수 있는 개념이었다. 신약은 ‘육’과 ‘영’ 또는 ‘현세’와 ‘내세’를 구분하는 ‘이원론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고, 어거스틴은 그의 역사 신학을 ‘두 도성’의 관점에서 기술했다.

“이원론적 이해: 두 왕국”
루터는 두 왕국(kingdoms, Reiche)을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civitas Dei, una Dei) 과 ‘지상의 도성’(civitas terrena, altera diaboli)과 같은 의미의 적대적인 두 영적 실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했다. “두 왕국은 상호 끊임없는 전쟁을 계속하는 바, 하나님의 왕국과 사탄의 왕국 사이의 중간 왕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Bondage of the Will”) 사람은 하나님의 왕국에 속하지 않으면 세상의 왕국에 속하게 된다. 두 종류의 사람들을 지배하는 삶의 원리와 동기도 상이하다. “사람은 두 왕국 중 하나에 속하게 된다. 한 왕국에서는 하나님의 율법과 명령에 의해 지배되는 대신 자기 자신의 의지와 생각에 의해 지배된다. 다른 왕국에서는 자기 자신의 생각에 맡겨지지 않고 하나님의 의지와 생각에 의해 인도된다.” (“Bondage of the Will”) 어거스틴 역시 두 도성에 속한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상이한 원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자애’(amor sui)와 ‘신애’(amor Dei)라고 지적했다.

루터의 ‘이원론적’ 세계관은 그의 체험적 신학에 근거하는 바 인간의 죄성과 사탄의 끊임없는 공격을 체험한 그의 체험의 신학에 근거했다. 루터는 바울과 어거스틴처럼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자기 안에서 ‘영’(spirit)과 ‘육’(flesh)이 끊임없이 싸우고 있음과 자기 속에 자리잡은 ‘생래의 죄성’을 항상 의식하고 있었다. 루터에게 있어서 ‘육체’는 인간의 몸과 신체적 특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에 대적하는 모든 죄성을 의미했다. “성경이 육에 대해서 언급할 때 항상 영에 대적하는 것으로 묘사한 것을 보면 육체란 성령과 대적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Bondage of the Will”)

루터는 또한 사탄의 실재를 항상 심각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사탄의 세력이 하나님을 대적해서 항상 역사하고 있음을 의식했다. 말씀의 원수들과 모든 거짓 교훈들과 분파 운동의 배후에서 역사하는 것이 사탄임을 항상 의식하고 있었다. 루터의 ‘밧모섬’인 바르트부르그의 피신 생활 중에서도 루터는 사탄을 심각하게 의식하며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이 적막 가운데서 나는 사탄과의 싸움을 천 번도 더 하고 있다. 사탄의 변신체인 인간들과 싸우는 것이 하늘에 있는 영적인 악의 세력과 싸우는 것보다 훨씬 쉽다. 나는 자주 넘어지지만 하나님의 오른손이 나를 다시 붙잡아 일으키신다. 지금이야말로 힘을 다해 사탄과 대적하며 기도할 때이다. 그놈은 지금 독일을 공격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실까 봐 두렵다. 내가 지금 기도에 너무 게으르기 때문이다.” (Bainton, Her I Stand”) 물론 사탄과 그의 모든 활동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에 존속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최대의 원수이다. 하나님의 세력과 사탄의 세력은 항상 심각한 대결을 이루고 있다. (“Bondage of the Will”) “세상과 세상의 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취할 수도 없고 취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가만히 게실 수도 없고 가만히 계시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 두 신들은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소란이 있을 뿐이다.”(“Bondage of the Will”)

만약 이와 같은 루터의 이원론적 ‘두 왕국’ 개념을 역사적 제도인 교회와 국가에 그대로 적용시켜 이해한다면 잘못된 극단적인 이원론적 사회 정치 윤리관이 초래될 것이다. 많은 루터학자들이 그와 같은 오류를 범했다. 그래서 루터의 ‘극단적인 양분법 윤리’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나타나기도 했다. 루터 자신이 이와 같은 비난을 전적으로 모면할 수는 없다. 그는 때때로 영적 실재를 가리키는 ‘왕국’(Reiche, kingdom) 을 역사적 제도를 가리키는 ‘통치 기관’(Regimente, government)과 혼동하여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이원론적 양분’을 극복하기 위해 ‘실재론적 통일’을 시도했다. 다음에 계속한다.

 

루터에게 있어서 정치는 결코 그의 중요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의 중요 관심사는 철두철미 그리스도와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말씀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개혁운동의 진행 과정에서 정치와 무관할 수는 없었다. 결국 루터는 ‘두 왕국’의 개념을 제시했는데 거기에는 이원론적 요소가 없지 않았다. 루터는 ‘이원론적 양분’을 극복하기 위해 ‘실재론적 통일’을 시도했다.

“실재론적 이해: 두 통치 기관”

루터는 상호 적대적인 두 영적 실재인 두 ‘왕국’(kingdom)의 개념과 더불어 역사적 실재인 두 ‘통치 기관’(government)에 대한 개념을 피력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두 통치 기관을 세우셨다. ‘영적 통치 기관’과 ‘세속적 통치 기관’인 바 전자는 성령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들과 의인들을 산출하고 후자는 비그리스도인들과 악인들을 억제하여 외적 평화를 유지하게 한다. 두 통치 기관이 다 존재해야 한다. 하나는 의를 산출하고 다른 하나는 악을 견제하여 외적 평화를 가져온다.” (Temporal Authority”, p.282).

루터는 세속적 통치 기관을 법과 무력으로 통치하는 ‘국가’를 가리켰고, 영적 통치 기관을 말씀의 법과 사랑의 영으로 통치하는 ‘교회’를 가리켜 사용했다. 루터는 세속 통치 기관의 불가결성을 인간성의 타락에서 찾았다. 대부분의 인간이 악하기 때문에 무력에 의한 견제가 없다면 세상은 혼돈에 빠지고 말 것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통치 기관이 없다면 온 세상은 악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잡아먹게 되고 말 것이다. 결국 세상은 혼돈에 빠지고 말 것이다.” (Temporal Authority”, p.281) 루터에게 있어서 두 통치 기관의 관계는 일치의 관계도 무관의 관계도 아니다. 그 영역이 서로 다르면서도 서로 관련을 가지면서 하나님의 포괄적 통치를 받는다.

“두 통치 기관의 분리”

루터는 지상의 두 통치 기관인 국가와 교회의 기능과 영역을 혼동하는 것을 커다란 오류를 범하는 일이라고 했다. 세상을 복음으로 통치하려는 것도 잘못이고 그리스도인들을 무기와 법으로 통치하려는 것도 잘못이라고 했다. 그런데 중세 교회는 스스로를 신의 도성과 동일시하며 세속 통치권까지 행사하여 국가를 다스리려는 잘못을 범했다. 세속 통치자들은 영적 통치권까지 행사하여 교회를 간섭하려는 잘못을 범했다. 과격파 분파주의자들은 세속 통치권을 전적으로 부인하려는 잘못을 범했다.

루터는 이와 같은 통치권의 혼돈의 오류를 지적하며 두 통치 기관의 분리의 필요성을 강조해서 주장했다. “세속 통치자들은 그리스도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며 교회를 어떻게 운영해야 할 것을 가르치기를 원한다. 거짓 승려들과 분파주의자들은 항상 주인이 되기를 원하며 세속 통치 기관을 어떻게 조직해야 할 것을 가르치기를 원한다. 이처럼 마귀는 양편에서 일하기에 매우 바쁘다” (Psalm, 101:5).

루터가 처한 당시의 역사적 상황은 루터로 하여금 두 기관의 분리를 강조해서 주장하도록 만들었다. 찰스 황제와 독일의 영주들은 루터의 개혁운동에 적대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루터는 세속권이 그리스도인들을 간섭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했다. 루터는 그의 「세속 통치권」의 제2부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그의 입장을 천명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아무 것에 의해서도 지배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믿음 안에서 다스림을 받고 외부적 행위에 의해 다스림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들에게 충분하다.” (Temporal Authority”, p.307)

“두 통치 기관의 통일”

루터에게 있어서 이상적인 세계는 그리스도인들만이 사는 세계였고 그와 같은 세계에는 세속적 통치권이 필요 없었다. 또한 비록 악한 세상 안에서 살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원칙적으로 성령에 의하여 내적으로 지배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세상의 실제적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인류의 대부분은 불신자이고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들 가운데서 살며 죄악의 영향 아래서 살고 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와 질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죄악을 억제하는 세속 통치권이 필요한데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존중하고 그 필요성을 인식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우선적으로 그리스도인들 자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과 세상의 질서를 위하는 것이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속 통치권이나 법률이 필요 없다면 왜 바울이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롬 13:1)고 했고 베드로는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순복하라’(벧전 2:13)고 했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위해서는 법률이나 처벌이 필요 없다. 그것은 그들에게 필요하지도 않고 도움을 주지도 못한다. 그것은 온 세상을 위하여 즉 평화를 유지하고 죄를 처벌하고 악인을 견제하기 위하여 필요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자발적으로 세속 통치권에 복종하고, 세금을 지불하며, 통치자들을 존경하고 통치권을 돕기 위해 모든 봉사를 제공한다. 자신을 위해서는 이와 같은 일들을 할 필요가 없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유익한 일에 자신을 내맡긴다.” (Temporal Authority”, p.279)

루터는 그리스도인들은 원칙적으로는 성령에 의하여 내적으로 지배 받기 때문에 세속 통치권의 직접적인 지배가 필요 없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에 의해서 지배 받는 ‘의인들’인 동시에 아직 옛 성품에 의해서 지배 받는 ‘죄인들’이다. 그리스도인들도 윤리적인 잘못을 얼마든지 범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도’ 세속 통치권에 의해 견제를 받음이 필요함을 인식해야 한다.

루터는 두 통치 기관이 모두 세상을 다스리시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관이기 때문에 서로 긴밀한 연관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오른손’과 ‘왼손’에 비교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두 가지 방법이다. 하나님은 ‘오른손’과 같은 교회와 ‘왼손’과 같은 국가기관을 통해서 세상을 다스리신다.

“두 통치 기관이 모두 필요한데 하나라도 없으면 안 된다.” (Temporal Authority”, p.282) 영적 개종과 외적 평화의 유지가 모두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두 종류의 통치 기관을 세우셨다. 하나님 자신이 두 통치 기관의 설립자요, 주인이요, 관리자요, 보호자이며 심판자이시다. 비록 세속 통치 기관이 사탄의 왕국이 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 기관을 다스리신다. 사탄 자신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봉사하게끔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루터는 두 통치 기관이 하나님의 섭리와 서로 연관되어 있고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속 통치 기관과 직접 또는 간접으로 연관이 되어 있음을 지적했다. 여기서 세속 통치 기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살펴본다.

“세속 통치 기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 긍정적인 면”

루터는 세속 통치 기관에 대해 소극적인 평가를 내렸다. 세속 통치 기관인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는 타락한 인간들을 억제하고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는 데 있다고 했다. 동시에 국가의 존재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법률의 ‘정치적 기능’을 통하여 유지되는 질서와 평화가 그리스도인 자신들에게도 필요할 뿐 아니라 법률의 ‘영적 기능’을 통하여 주어지는 죄의 각성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항상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의인’으로서 율법과 세속권의 억제를 받을 필요가 없고 하나님의 법 안에서 기뻐하는 존재인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은 ‘죄인’으로서 항상 법의 심판을 받으며 자기가 법의 요구를 다 이루지 못함을 깨닫는 과도기적 존재이다. 즉 “그리스도인의 마음 속에는 율법의 시간과 은혜의 시간이 공존한다.” 따라서 세속권은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적용된다. 루터는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서한」 “세속권은 그 기능을 기독교의 온 몸에ㅡ교황이건 감독이건 ㅡ제한이나 차별 없이 행사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속 통치권에 복종해야 하며 세속 통치권을 하나님이 세우신 다른 소명과 마찬가지로 높이 존경해야 한다고 했다.
“세속 통치 기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 불순종의 타당성”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속권을 비판하고 불순종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특히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이 압수당하고 개혁 운동이 위협을 받게 되었을 때 루터는 국가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세속권이 옳게 쓰여질 때 그리스도인들은 자발적으로 내적 사랑의 동기에서부터 세속권의 요구에 복종하지만, 세속권이 신앙과 영적 생활을 침해하려 할 때는 복종할 수 없다고 했다. “귀하여! 나의 육체와 재산에 관한 한 나는 귀하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소. 땅에 관한 당신의 권위의 한계 안에서 나를 명하시오. 그러면 복종할 것이요. 그러나 만약 귀하가 나더러 믿으라고 명하거나 어떤 책들을 없애 버리라고 한다면 나는 복종하지 않겠소.” (Temporal Authority, p. 302).

여기서 루터는 그리스도인들이 세금을 지불하는 것 같은 세상사에 관한 ‘외적’ 사항들과 관련해서는 세속권에 복종하지만, 신앙에 관한 ‘내적’ 사항들과 관련해서는 세속권에 복종하여야 할 의무가 없다고 했다. 롬 13:1과 벧전 2:13에 언급된 통치권에 대한 복종은 ‘외적’ 사항들에만 해당된다고 했다. “바울은 복종의 한계를 분명하게 규정했다.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라. 세속권에 대한 복종은 세금과 공세와 같은 ‘외적’ 사항에만 적용된다. 베드로 역시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를 그와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 인간의 제도는 ‘외적’ 사항들에 제한된다. 그래서 베드로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말했다.(Temporal Authority, pp. 300).

루터는 세속 통치권에 대한 복종의 한계와 세속 통치권의 한계를 규정하면서 정부는 이단을 법으로 다스릴 권한도 없다고 지적했다. 이단은 영적 사항이기 때문에 교회가 말씀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단들이 어떻게 억제될 수 있는가? 그 기능이 통치자들에게 주어지지 않고 감독들에게 주어졌다. 이단은 결코 무력에 의해서 억제될 수 없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싸워야 한다. 말씀이 성공하지 못하면 세속 통치권도 성공하지 못한다. 온 세상을 피로 적시게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이단은 영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Temporal Authority, p. 304). 루터는 이와 같은 불순종의 타당성을 이미 그의 「선행론」가운데서 분명히 나타냈다.

“세속 통치 기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 저항을 피하라”

불순종의 타당성을 인정하는 것이 혁명적 반항이나 무력적 투쟁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었다. 개혁운동의 초기 독일 민중의 지도자 후텐(Hutten)과 지킨겐(Sickingen)이 루터에게 무력적 원조를 제공하려 했을 때 루터는 고맙게 여기면서도 그것을 단호히 거부했다. 개혁은 무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1521년 1월 슈팔라틴(Spalatin)에게 보낸 편지에서 루터는 그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후텐의 요청이 무엇인지 자네도 알 것이오. 나는 피를 흘리면서까지 복음을 위해 싸우려고 하지는 않소. 세상은 말씀으로 정복되며 말씀으로 교회는 재건되는 법이오.”

루터는 「폭동 반박론」에서도 그의 입장을 밝혔다. “나는 폭동을 일으키는 자들을 반대한다. 동기와 이유가 아무리 정당하다 할지라도 폭동은 무죄한 자들을 해치고 그들의 피를 흘리게 하기 때문이다”(A Sincere Admonition to All Christians to Guard Against Insurrection and Rebellion, p. 63). 1522년 루터가 번역한 신약 성경이 독일 여러 지역에서 압수당하고 있었을 때 루터는 백성들에게 책 한 페이지라도 수사관에게 내어주면 안 된다고 권면하면서도 저항은 피해야 한다고 했다. “만약 가옥을 강제로 수사하고 책들이나 재산을 몰수하게 될 때 그대로 참아야 한다. 폭행은 저항으로 대할 것이 아니라 참음으로 대하여야 한다.” (Temporal Authority, p. 302).

이와 같은 입장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악함과 불의를 감수하여야 한다는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의 중요한 요소라고 하겠다. 박해를 당할 경우 다른 나라로 피할 수 있을지언정 반항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법정 투쟁은 삼가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마 5:39에서 하신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말씀의 참 뜻을 알게 된다.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법정에서 법적 유익을 추구하지 않음을 뜻한다.”(Temporal Authority, p. 291).

“세속 통치 기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 적극적 참여”

그리스도인들은 세속 통치 기관에 대하여 저항을 피하고 불의를 감수하는 ‘소극적’ 자세를 취하는데 그치고 마는가? 루터는 비판과 봉사를 통한 ‘적극적’ 참여를 권장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세속 통치자들의 비행을 비판하고 충고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이런 방법으로 통치자들을 책망하는 것은 찬양할 만한 일이고 고상한 일이며 하나님께 대한 커다란 봉사라 하겠다. 만약 설교자가 통치자들의 죄악을 책망하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치안을 방해하는 일 이상의 잘못을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 (Psalm 82:2, p. 50).

루터는 세속 통치자들이 이성에 근거하여 통치권을 바르게 행사하여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무엇보다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몸과 시간을 바쳐 통치 기관에서 일하므로 적극적으로 봉사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스도인들은 몸으로나 물질로나 명예로나 무슨 방법으로든지 세속권을 봉사하고 도와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은 온 세상과 이웃을 위해 매우 유익하고 필요한 일이다. 그러므로 교수형 집행리나 경찰이나 재판관이나 영주나 군주가 모자라고 자기가 자격이 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그 지위를 찾아 봉사를 제공하여야 할 것이다.” (Temporal Authority, p. 285).

“종말론적 및 변증법적 이해”

세속 통치 기관에 대한 루터의 ‘실재론적’(realistic) 이해는 역시 부정적이라 하겠다. 루터는 이 세상의 군주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바보나 악한이 아닌 자는 매우 드물다”고 했고 세속화된 정부를 ‘마귀의 기관’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루터는 모든 군주들이 선하고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원하며 그들에게 충고와 봉사를 제공하면서도 그와 같은 이상적인 국가가 이 세상에서 실현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선한 통치 기관의 중요한 목적은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이 세상을 파멸로부터 보존하고 지상의 평화와 안녕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의 눈은 불완전한 현재의 통치 기관들이 새 것으로 완성될 종말의 때를 바라보고 있었다. (Psalm 101:8, p. 50).

그러므로 루터의 ‘사회 윤리’를 ‘과도기적 윤리’(interim ethics)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마치 루터의 칭의의 교리가 종말론적 기대와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다. 루터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의인이면서도 아직 죄인으로 머무르고 있는 존재이다. 옛 사람이 완전히 사라지고 새 사람이 될 때까지 옛 사람과 새 사람 사이의 갈등이 항상 계속되고 있다. 루터를 ‘이원론자’라고 단정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지만 그의 사상 가운데 ‘이원론적’ 요소가 강하게 작용함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신앙의 영역과 세속의 영역으로 구분했다. 물론 루터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의 동기에서 세속 활동에 참여할 것을 권면하므로 두 영역의 관계성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루터는 세속 활동의 의미를 과소평가했다.

또한 루터가 신정 정치의 이념을 강하게 부정하므로 신앙의 영역과 세속 통치의 영역과의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연관성을 약화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이한 두 영역의 ‘불연속성’이 루터의 ‘변증법적’ 인간성 이해에서 깨어지고 만다. 루터는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지적하기를 죄인인 동시에 의인인(simul justus et peccator) “그리스도인의 마음 속에 율법의 시간과 은혜의 시간이 공존한다”고 했다. 루터는 세속적 영역과 영적 영역의 접촉점이 그리스도인 개인의 인격 안에 존재한다고 했다. 바로 여기서 영적 영역이 세속적 영역으로 침투한다.(Forell, Faith Active in Love, p. 149).

 

 

'교회사자료 > 4.종교개혁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쯔빙글리와 종교개혁  (0) 2010.03.12
칼빈에 있어서 오직 성경  (0) 2010.03.12
독일의 역사와 종교개혁  (0) 2007.04.28
종교개혁사  (0) 2005.11.28
마틴 루터  (0) 2005.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