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2. 26. 16:30ㆍ목양자료/5.절기자료
구유에 오신 예수님 - 누가복음 2:1-7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은 온 인류의 구세주시며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성탄절입니다. 이 복되고 거룩한 성탄절에 하나님의 신령하신 은혜와 주님의 은총이 우리 중흥교회 성도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금년에도 어김없이 성탄절을 맞이했습니다만, 사회의 분위가가 어두워서 그런지 예년 같지 않습니다. 매년 12월이 되기가 무섭게 거리마다 추리 장식이나 캐럴 송으로 온통 요란한데 금년에는 뜸한 느낌입니다. 차라리 요란한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우리 그리스도인들마저 주변의 썰렁한 분위기에 묻혀 성탄절을 덤덤하게 보낼까 조금은 염려가 됩니다. 우리는 이럴 때일수록 조용한 가운데 말씀을 묵상하며 성탄절의 참 의미를 깊이 되새겨봐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모쪼록 우리의 신앙과 삶이 성숙하게 다져지는 좋은 기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먼저 성탄절이란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보죠. 단순하게 말하면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교회 절기입니다. 그런데 좀 더 정확한 의미를 알아보면 크리스마스라는 이 단어는 그리스도(Christ)+경배, 미사(Mass)의 합성어입니다. 즉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을 경배하는 것, 혹은 우리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께 제사 드리는 것입니다.
성탄절이 지켜지기 시작한 것은 언제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문헌상에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면 기독교가 로마의 종교로 인정 된 이후인 335년경부터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예수님의 탄생일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성경적으로는 증명할 수 없지만 AD175-183에 안디옥 교회의 주교였던 "데오필로스" 기록을 근거로 해서 12월 25일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 베들레헴 땅에 육신을 입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랫동안 메시야 오시기를 기다려 오기는 했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는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알게 해 주신 몇몇 사람만이 오신 왕을 영접했을 뿐입니다.
특히 그가 가난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에 태어나신 것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지금 세계는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를 잊은 지 오래입니다. 이제는 ‘메리 크리스마스’ 라는 아름다운 인사말도 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미국에서는 아무에게나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하는 것을 법으로 금하고 있다고까지 합니다. 성탄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이 그저 Happy Holiday, Season's Greetings와 같은 말들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예수님이 마구간의 구유에 오신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살펴봄으로써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길 원합니다.
1. 여관에 있을 곳이 없었음(적용적해석: 예수님 맞을 여유 없는 인간의 마음)
7절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오늘 본문은 로마 황제 아구스도[Augustus(존엄자), 가이사 아구스도, 옥타비아누스]가 천하에 호적령을 내린 역사적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아기 예수의 탄생이 역사적 사실임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입니다(2절). 당시 요셉은 만삭이 된 마리아를 데리고 나사렛에서 멀리 베들레헴까지 가야 했고, 베들레헴에 몰려든 인파 때문에 변변한 숙소를 찾을 수 없었던 두 사람은 마구간에서 아기를 해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었음이라.” 평범한 표현이지만, 이 말은 예수님 맞을 여유가 없는 인간들의 마음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 사람들은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동물입니다. 탄생하신 이가 아기 예수님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거리의 천사라 해도 좋습니다. 곧 해산할 만삭의 임산부입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에는 두 부부를 위한 여관방 하나 남아 있지 못한 것입니까? 그들을 어떻게 마구간으로 가게 내버려둘 수 있단 말입니까?
물론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은 호적하러 찾아온 다윗의 후손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있을 곳’이 없었다는 것은 여유 공간이 없이 사람들로 붐볐다는 것을 말하지만, 그러나 마리아와 같은 딱한 임산부가 몇 명이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있을 곳이 없었다’라는 표현에서 돈으로 마음이 어두워진 그 시대의 단면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냉대하는 일그러진 사회상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마도 여관 주인은 방을 차지한 손님들에게 프레미엄을 붙여 대목 장사를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마구간에 오신 예수님은 사랑 없는 세계에 사랑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나 베들레헴 사람들은 해산하는 여인에게 방 한칸 내주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민(選民)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와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공의와 사랑으로 행해야 했습니다. 율법에 무어라고 했습니까?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빈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거류민이나 동거인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레 25:35)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베들레헴 사람들은 이 율법을 귀담아 듣지 않고 무시했습니다. 해산하려는 마리아를 모른 체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 정신이 사라진 비정한 사회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당시의 유대 사회는 종교의 빈껍데기만 남은 위선적이고 이기적인 사회였습니다. 걸핏하면 이웃과 싸우고 욕하는 사회였습니다(마 5:21-26). 자기보다 못한 계층사람들을 배타시하는 사회였습니다(마 5:46-48). 완고한 율법주의 종교의 가르침 때문에 서로 정죄하고 비판거리만 찾는 사회였습니다(마 7:1-6). 부모에 대한 도리도 증발되고(마 15:1-6), 입으로만 하나님을 들먹이던 사회였습니다(마 15:8).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의 사회가 이러할진대 당시의 신앙이 없던 로마나 다른 세계는 어떠했겠습니까? 사탄의 권세 아래 온갖 죄악과 불의가 가득했었습니다. 한 예로, 로마의 대철학자 세네카에게 어떤 귀족이 ‘자기의 노예들이 불쌍해 보인다’고 말하자, 세네카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들거든 목욕탕에 가서 즐기고 속히 잊어버리라”고 가르쳤다 합니다.
여러분, 이런 세상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진정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맞아드릴 여유가 없는 삭막한 곳이었지만,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용서해 주시려고 친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의 마음의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어느 교회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라는데요, 성탄 이브 행사의 밤이었습니다. 주일학교 유년부에서 성극을 하게 되었는데 그 성극을 지도하시던 선생님은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 고민이란 '반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성탄 축하행사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는데, 그 반에는 말이 어눌한 아이가 문제였습니다. 고민 끝에 선생님은 그 아이의 배역을 간단한 말 몇 마디만으로 해낼 수 있도록 처리했습니다. “방이 없습니다. 방이 없습니다. 빈방이 없습니다.” 이 말만하면 되도록 내용을 각색해서 그 아이에게 몇 번이나 다짐을 해서 무대에 올려 보냈지만, 내심 초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 아이더러 시킨 말만 하라고 그렇게 다짐시켰는데 한마디를 더 보태는 것입니다.
“방이 없습니다. 방이 없습니다. 빈방이 없습니다.” 그래 놓고서는 “그런데 내가 잘 방은 있습니다.” 라고 한 것입니다. 순간 교인들이 와르르 웃었고, 교사는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이 한마디 말이 그 날 성탄절 메시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웃던 교인들은 이내 심각한 얼굴로 그 메시지를 되새기면서 어떤 해의 성탄절보다 뜻 깊은 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성탄절 이후에는 여러분들의 마음에 예수님을 맞아드릴 여유 공간을 반드시 확보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정성어린 영접 받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기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었음(적용적해석: 예수님은 낮고 천한 자의 친구)
7절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가난한 시골 청년 요셉은 사관을 얻을 길이 없어 급하게 마구간을 빌어 해산실로 썼습니다. 아기가 태어나자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습니다. '강보‘라는 말은 ’찢다‘라는 말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요셉부부는 신생아를 감아 덮을 천도 없이, 가지고 있던 옷을 찢어 아기 예수를 쌌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구유‘(파트네)는 가축의 먹이를 주는 여물통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하늘보좌에서 이 땅에 오셔서, 구유와 같은 가장 낮고 초라한 자리에 누이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낮고 천한 자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미국의 어느 화려한 예배당입니다. 한 흑인 여인이 성탄절 예배를 드리려고 예배당 안에 들어가려다가 제지를 당했습니다. 백인교회이므로 흑인은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벤치에 앉아 기도를 하는데 눈물이 쏟아져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어깨를 두드리며 왜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여인은 울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너처럼 쫓겨났단다.” 그 흑인 여인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습니다. 아!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이셨던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의 친구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8:9 말씀을 찾아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부자이십니다. 그는 창조주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금도 주님의 것이요 은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비천한 우리들의 구세주가 되시고 친구가 되기 위하여 친히 낮아지셨습니다. 친히 비천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생동안 가난하고 비천하게 사셨습니다. 예수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라고 탄식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마음 놓고 주무실 장소조차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도 다른 사람의 나귀를 빌려 타셨습니다.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드실 때도 남의 다락방을 빌렸습니다. 심지어 무덤에 묻힐 때에도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을 빌려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그토록 가난해지고 낮아지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을 맞이할 우리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세상 재물에 마음이 가 있지 않습니까? 세상의 명예와 권세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의 마음으로 지금의 상태로 구유에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1979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테레사 수녀는 인도의 굶주린 군중들,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 길거리에 내버려진 고아들을 돌보는 것이 매일의 일과였습니다. 그의 생활신조는 ‘가난한 삶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자에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보통 사람들로서는 엄두도 내기 어려운 일을 날마다 되풀이했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떻게 해서 계속하여 일 년 365일 똑같은 일을 반복할 수 있습니까?” 그때 테레사가 유명한 말을 합니다. “나는 저 불쌍한 사람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낮고 천한 자들은 모두 예수님의 친구들입니다. 그들을 위해 예수님은 천한 신분으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땅에 오시는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을 돌려서 낮고 가난한 자의 진정한 형제가 되는 길입니다. 오늘 이 성탄절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그들을 살펴보고, 그들의 손을 잡아 주시기를 원합니다.
3. 우리의 부요를 위해 가난하게 되심(적용적해석: 낮고 천한 자를 영화롭게 하심)
고후 8:9 말씀을 다시 봅니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마구간 구유에 오신 것이 단순히 우리의 비천함과 동질성 확보를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본래 부요하신 분이 가난하게 되신 것은 가난한 자를 부요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믿는 모든 사람들을 고귀하게 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낮고 천한 자를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태어나신 장소는 냄새나는 마구간이었으나, 그곳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곳이 되었습니다. 목자들이 양을 지키던 들에서는 하늘의 천군 천사들의 노래가 울려 퍼졌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동방박사들을 인도하던 신비의 별은 아기 예수가 있는 곳을 비추었고, 동방박사들은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면서 경배했을 때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드러났습니다.
예수님 가시는 곳곳마다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드러납니다.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집은 손님으로 참석하셨던 예수님 때문에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벳세다 광야에 나온 수천 명의 사람들은 엄청난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고,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나타난 것입니다.
존 파이어펜트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완전히 실패로 인생을 마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첫 출발은 의외로 훌륭했습니다. 자기 할아버지가 설립한 예일대학을 졸업한 후 상당한 열정을 가지고 교사라는 직업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학생들에게 너무 너그럽게 대했다는 이유로 실패하였습니다. 그는 변호사로도 실패하였습니다. 손님들에게 너무 너그럽고 정의감이 투철해서 돈벌이되는 사건을 맡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사업가로도 실패하였습니다. 물건 값을 제대로 쳐서 받지 못해 이윤을 낼 수 없었고 외상을 너무 잘 주었기에.... 또한 그는 정치가로도 실패하였습니다. 노예 제도 폐지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결과는 낙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실패를 거듭한 존 파이어펜트였지만 그의 마음에는 예수님이 확고히 자리하고 계셨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사회정의를 위해 힘썼고, 사랑을 베푸는 인간이 되기를 바랐으며 인간 정신의 힘에 대한 믿음을 지녔습니다. 그러기에 패배라고 믿었던 그 당시의 일들이 대부분 이루어졌습니다. 교육은 개혁되었으며 소송절차는 개선되었고 신용거래법도 개정되었으며 노예제도는 완전히 폐지되었습니다.
지금도 그의 기념물이 남아있습니다. 성탄절이면 울려 퍼지는 노래 “징글벨” 바로 그가 만든 노래입니다. 세계 수 십억의 사람들이 성탄절이 오면 누구나 한번쯤 불러보는 이 기쁨의 노래를 완전한 실패자가 만들었다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그는 위대한 성공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가난한 자들을 위해 친히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을 영접하는 모든 사람들을 부요하게 하시고 영화롭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내 심령 안에 예수님이 임재하실 때 내 마음이 천국이 됩니다. 큰 기쁨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 가정이 비록 천하고 가난하다 할지라도 우리 가정에 예수님이 임재하실 때 평화의 동산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계실 때 기쁨이 있고, 삶의 변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맞아들일 때 우리의 삶은 천국으로 변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을 영화롭게 만들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이 크리스마스,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세상은 자본주의라는 괴물이 쏟아 붓는 맘몬의식으로 성탄절을 도배해 버린지 오래입니다. 요란하고 야단스러운 구경거리들은 즐비하지만, 정작 성탄의 주인공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여러분, 명심합시다. 예수님은 사회의 가장 그늘진 곳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의 친구로 오셔서 그들의 삶을 천국으로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주님을 맞이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마음을 낮은 데로 돌리시기 바랍니다. 가난하고 천한 자들의 친구가 되는 것이 주님을 만나는 지름길입니다. 성탄절이 가난한 자와 병든 자, 소외된 자의 성탄절이 되게 하십시오.
우리 주님이 아기 예수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우리에게 베푸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또 우리 왕으로 온전히 순복하시기 바랍니다. 더욱 생명 가운데서 자라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성탄의 예수 이름의 축복으로 구원 받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변화 받고 가르쳐 주시고 어떤 두려움도 죽음도 대적도 다 이기고 아버지께 사랑 받고 하나님의 평강으로 넘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기쁘고 복된 성탄절에 다시 한 번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을 인해서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 오늘 주신 말씀대로 저희들로 하여금 주님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낮은데로 마음을 돌려 참 마음으로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며 그들과 함께하는 절기가 되게 하옵시고 그 예수님을 내 마음에 영접하여 예수님의 정신으로 새로워지는 절기가 되게 하옵소서.
사랑의 주님, 이 복된 계절에 이 복음의 소식을 알지 못하고 있는 내 이웃과 형제들에게도 전파하여 모든 민족의 축제일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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