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설교 모음

2008. 12. 22. 23:06목양자료/5.절기자료

크리스마스에 내려온 기쁨  성경: 눅2:15-20

 

오늘은 성탄음악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찬양이라고 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기도요, 또 한편으로는 선포요, 메시지가 되고 또 한편으로는 고백이 됩니다. 바로 전에 성가대의 찬양을 들었습니다만 이 찬양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를 받으시고 함께 돌리시고 그리고 함께 참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찬양과 함께 아울러 잠깐 주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3가지 메시지를 캐내려고 합니다. 먼저 누가복음 2장 8절을 보겠습니다.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당시 '목자'하면 두 가지 보편적인 개념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믿을 수 없는 사람들'로 인식되었습니다. 자신들이 양의 주인이 아니고 단순히 관리자라서 그랬던 것인지 양을 소홀히 돌보고 때로는 양을 훔쳐내고는 거짓말을 하는 경우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못 믿을 사람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둘째로는 당시 유대인의 규례에 의하면 목자의 일은 부정한 일로 간주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사회적인 비천하였고 종교적인 소외를 당했고 심지어는 자신들 마저 자신을 값없이 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실직자들의 참 아픔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식구를 부양 할 돈이 없는 것입니까? 그것도 포함됩니다만 그들의 본질적인 상처는 '쫓겨났다. 쓸모없이 여겨졌다.'는 것에 대한 분노와 아픔입니다.

그런 목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9절을 보세요.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황홀한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여기 주목할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사자가 곁에 서서" 비천하고 종교적으로 소외되어 있고 자신들조차 귀하게 여기지 않았던 그들 곁에 주의 사자가 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목자들을 그렇게 취급하고 있으나 그러나 하늘은 달랐다. "주의 사자, 영광" 이것은 그들과 전혀 관계없는 얘기입니다. 예루살렘의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나 관계 있는 얘기이지 그들의 가슴과 머리 속에는 없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그들에게 주의 사자를 보내시고 영광보이셨습니다, 이것이 성탄의 참 기쁨입니다. 큰 기쁨입니다.

기력을 입은 사람들, 존재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삶의 덧없음에 참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가난함에 불행을 느끼는 모든 사람들, 삶에 지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비취는 빛이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사건입니다. 참다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회복의 사건입니다. 사람들은 사람답게 보지 않고 귀하게 여기지 않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선언하시는 사건입니다. 이번 성탄절을 맞이하여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참되고 큰 기쁨이 임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은 그들에게 들려온 음성이 무엇인가? 10절부터 12절을 보겠습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목자들에게 보다 큰 음성으로 들린 내용은 "온 백성에게"라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존귀한 자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제사장들, 스스로 종교적인 경건성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온 백성'입니다. 자신들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에는 빠졌는데 지금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같은 목자들에게까지도 미칠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그 소식이 무엇입니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차별 없이 내리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땅에 얼마나 차별이 강한 구조로 자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차별은 사람을 찢어 놓습니다. 대립하게 합니다. 증오하게 만듭니다. 실수로 일어나는 차별이야 그저 침 한번 꿀꺽 넘어갈 수 잇는 것이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구조적이고도 의도적인 차별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고 평화를 깨뜨립니다.

성탄절에 주시는 강력한 메시지는 하나님께는 그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셨고, 세리와 창기들과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들의 죄를 경시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주어지는 얼음 같은 차별의 사슬을 끊어 내신 것입니다. 목자들은 여기서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역사입니다. 여러분들에 있는 차별인한 아픔이나 차별을 조장하는 모든 것이 평화와 기쁨으로 바뀌는 놀라운 역사가 이번 성탄절에 이 땅 가운데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통해서 나타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그 소식을 듣고 어떻게 했습니까? 16절부터 18절까지를 보십시오.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목자들이 하나님의 메신저가 되었습니다. 목자들의 삶의 역할이 전혀 달라졌다. 마리아의 가슴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메시지를 전하는 자로서의 역할까지 한 것입니다. 목자가 아니라 사명자가 되었습니다. 성탄절에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탄의 메신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탄절에 우리가 함께 주님의 오심을 기뻐하며 감사하며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역사를 찬양하는 것은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인류의 치유할 수 없는 질병을 고치시기 위해 오신 주님을 가족들과 이웃들과 그리고 교우들과 기뻐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성탄절은 구주가 오셨음을 세상에 선포하는 메신저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이 땅 가운데 나아가야 합니다. 한밤에 졸며 양떼를 지키는 이 세상의 변두리에 있던 존재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알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한 가운데로 들어오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이, 여러분들의 언어가, 여러분들의 모습이 메신저적 의미를 가졌음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 땅 백성들 가운데 구원을 선포해야 합니다. 사랑을 보여야 합니다. 소망을 선포해야 합니다. 죄악의 심각성을 알려야 합니다. 이것이 없는 성탄절은 반쪽의 성탄절에 불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가 바로 이 메신저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자들은 첫 번째 성탄절날 아름다운 경배를 드렸습니다. 20절을 보세요.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찬송했습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영국국왕이 신하들과 귀족들이 집결해 있는 곳에 나타납니다. 그러자 모든 귀족들과 신하들이 엄숙한 자세로 일어나 최고의 예우를 보입니다. 그때 국왕이 말합니다. "여러분 자리에 앉으시오. 나는 여러분들의 친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덧붙입니다. "나는 주님이 아니잖소." 그러자 귀족중 한 명이 "폐하 만일 폐하기 주님이셨으면 저희들은 이렇게 자리에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주님이셨다면 저희들은 무릎을 꿇었을 것입니다."

성탄절은 오신 주님을 큰 기쁨 가운데 맞이하는 날임과 동시에 무릎 꿇는 날입니다. 여러분 모두 내 삶 모두가 주님의 것이며 그래서 주님의 뜻 앞에 100% 순종하겠다는 참다운 경배의 무릎을 꿇는 날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크리스마스가 없는 사람들  성경: 눅 3:1-7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우리 성도들에게는 크리스마스란 하나님께서 친히 육신의 몸을 입고,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성육신(Incamatio, Inacmation)하신 위대한 역사적 사실과, 그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인류 역사가운데 오셨던 참으로 엄청나도 시비한 사건이 아기 예수의 탄생에 감사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날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복잡한 일과, 분주함, 또는 자질구레한 일들로 크리스마스가 어수선해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귀하고 복된 크리스마스를 올바로 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 한 세기를 보내는 마지막 성탄일을 앞에 두고 말씀을 통하여 예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탄생하시던 그 때에 크리스마스의 은혜와 기쁨을 알지 못했던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증거 해 드림으로, 오늘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이 되지 않아야함을 위해 증거해 드리며, 참 크리스마스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증거해 드리겠습니다.


1. 여관 주인입니다.(눅 2:7)

이 여관 주인은 재물에만 눈이 어두웠던 사람입니다. 만삭이 된 여인을 보고도 모른 체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동정심이 없었습니다. 무정했습니다. 그저 돈 벌기에 급급했고, 그저 바빴습니다. 선을 베풀어야 할 기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는 지금 자기 오신 예수님을 맞이하질 못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관 주인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영혼의 방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간적인 재물들이나 사소한 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의 생각이라는 방 속에는 세상의 염려와 걱정으로 가득 차있고, 돈 벌려고 하는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으니,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실 틈이 없는 것입니다.


2. 헤롯 왕 입니다.(마 2:1-3)

예수께서 탄생하실 당시 유대의 분봉왕은 헤롯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광과, 위대함과 왕위를 구하는 정치광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의심을 품고, 결국 자기보다 더 나은 의심 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죽였습니다. 그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질투에 찬 두려움 때문에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기 왕권을 취할까 봐 두려워한 것입니다. 이 권세욕이 있고, 질투심이 많은 이 사람은 불행하게도 자기의 통치기간에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에 평화의 왕이신 주님이 오셨건만 그는 주님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어떠합니까? 자신의 결정과 계획들, 자신의 중요한 일, 자신들의 가치와 도덕을 잃게 될까 몹시 마음을 쓰며 급급해 합니다. 즉 자신들의 방식을 속박 받을까봐 그들은 그리스도께 마음 문을 열고 나오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3.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입니다.(마 2:4)

그 당시 대제사장들(High Priest)은 신학적인 지식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전 관리를 통솔하는 자들이었고, 최고의 행정력, 교육, 지도자적 기량을 갖추어야 한다는 규칙에 의해 선택된, 제사장들 중 으뜸이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성경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서기관들(Secretary)은 어학자들이요, 성경 해석자들이며, 성경의 자료에 관련된 모든 문화와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 두 부류의 사람들은 동방에서 온 박사들의 물음에 정확히 메시야가 태어날 장소를 찾아내었습니다. 그들은 태어난 아기가 정말 메시야인지 가서 확인해 보려고 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지식의 교만함이 가져다준 안일함과 무관심으로 인해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긍심과 자기의의 자부심으로 꽉 차있었기 때문에 메시야가 태어날 줄 알면서도 찾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냉담했습니다.


<맺는말>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올바로 맞이하지 못한 데는 많은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한 이유들에는 세상 돈 버는 재미에 빠져 만삭이 된 여인에게 동정을 베풀지 못하고 크리스마스를 잃어버린 여관 주인이나, 세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질투심에 가득차 자기 땅에 오는 메시야 평화의 왕을 죽이려 했던 헤롯 왕과 같은 사람, 지식으로 인해 오는 교만함과 냉담, 그리고 종교적 의식이나 자기 의에 빠진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은 크리스마스를 잃어버린 크리스마스가 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유를 넘어서 한 가지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불신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믿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크리스마스를 진정하게 보내지 않았다면 나에게 오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십시오. 그리고 이 세상을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던 그의 오심을 믿는 크리스마스가 되게 하십시오. 이번 크리스마스는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참된 구원의 실제가 이루어지게 될 줄 믿습니다.

 


크나큰 기쁨의 선물 성경: 눅2:1-14

 

성탄절은 기쁨의 절기입니다. 성탄은 그 누구에게나 크나큰 기쁨이 됩니다. 그 이유는 이 성탄절에 누구나 하나님의 선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할 때마다 기분이 나쁘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성탄절이 되면 누구나 큰 기대와 함께 기쁨을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100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성탄절은 이 민족의 중요한 명절이 되었고, 이 백성들이 즐거워하는 기쁨의 명절이 되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누가복음 2 : 10에 보면,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 ! 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천사가 목자들에게 전해 준 좋은 소식입니다. 이 좋은 소식(福音, good news)은 구주(그리스도, 메시야)가 나신다는 좋은 소식입니다. 그런데 사실에 있어서 이 좋은 소식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은혜로서 거저 주시는 크나큰 기쁨의 좋은 선물(good present)입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을 통해서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편지를 받을 때 기쁩니다. 이 편지 속에 좋은 소식이 담겨 있든, 좋지 못한 소식이 담겨 있든 간에 일단 편지를 받는 그 순간은 기쁜 것입니다. 더욱이 그 편지 내용이 기쁘고 반가운 좋은 소식이면 더욱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그래서 편지를 읽고 또 읽습니다. 우리가 이같이 편지를 받는 일도 기쁜 일이지만 선물을 받는 일은 더욱 기쁜 일입니다. 그것도 자기에게 꼭 필요한 선물을 받을 때의 기쁨은 더할 나위 없습니다. 성탄절에는 우리들이 아름다운 마음과 정을 담은 성탄절 카드와 선물을 주고 받으며 지내는 참으로 아름답고 복된 기쁨의 절기입니다.

이 아름답고 복된 절기, 기쁨의 성탄절에 여러분들은 어떤 선물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대학 입학시험을 치룬 자녀를 가진 부모님들은 '합격'이라는 기쁜 소식의 선물을 기다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합격의 기쁜 소식을 받은 자들도 있습니다. 한없이 기뻤으리라 믿습니다. 저도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대학에 입학했다는 소식이 이 성탄절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보내 주신 선물 중에 어쩌면 가장 큰 선물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1. 그러나 가장 큰 기쁨의 선물은

그러나 이 성탄절에 우리들이 참으로 기뻐해야 할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직접 찾아오셔서 주신 선물입니다. 그 선물의 내용은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선물이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선물이라는 말씀입니다. 이토록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크나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만일의 경우 우리가 이 크나큰 선물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처럼 불쌍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이것보다 더 하나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해드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2000년 전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귀한 선물을로 주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선물을 기뻐하면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바빠서, 너무나 분주해서 그 귀한 선물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여관마다, 호텔마다 손님이 가득 차서 아기 예수를 영접할 방이 없었습니다. 또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를 맞이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것들은 세상의 욕심과 세상의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탄절은 우리들에게는 기쁜 날일지 모르지만, 하나님께는 슬프고 아픈 날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무나도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아픈 마음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그것도 외아들을 우리들에게 내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RP서 우리들에게 거저 주신 은총의 선물입니다.


이 성탄절에 아기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을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크나큰 선물로 아기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이 성탄절에 이 같은 크나큰 기쁨의 선물이 되시길 바랍니다.


2. 크나큰 기쁨의 선물

어찌하여 아기 예수가 우리들에게 크나큰 기쁨의 선물이 되는 것입니까? 그 선물의 내용이 무엇이길래, 즉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엇이며, 누구이길래 우리들의 기쁜 선물이 되신다는 것입니까? 첫째는 구원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1절에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기 예수는 누구입니까? 구주입니다. 세례문답을 하면서 "예수는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했는데, "예수는 나의 구주입니다, 나의 주님입니다, 나를 죄악에서 건져 주신 구주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나를 구원해 주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새로운 사람이 되어 변화하여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토록 죄인 된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함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멸망 받을 자가 구원 얻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고, 이것보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이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토록 예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둘도 없는 가장 큰 구원의 선물입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기뻐하는 것 입니다.


둘째는 생명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2절에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강보에 싸인 아기는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생명을 강보로 싸서 선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입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더 이상 생명을 연장할 수 없는 죽음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 같은 우리들을 살리기 위해서,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기 위해서 생명으로 오셨습니다. 즉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생명으로 우리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 : 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주셨고, 그 독생자, 생명이신 독생자를 믿음으로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생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자에게 영원히 살 수 있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셋째는 예수님은 '임마누엘'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의 선물입니다. 마태복음 1 :23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은 임마누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총보다 더 큰 은총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의 은총의 선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외롭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외로운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병석에 누워 계시는 분들, 감옥에 갇혀 있는 분들, 외롭고 슬픈 가난한 어머니들이 너무 많습니다. 상점마다 가게마다 선물들이 가득가득 쌓였는데도 그 선물 하나 사서 자식들에게 줄 수 없는 가난한 어머니들이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가난한 어머니들에게는 슬프고 외로운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외로운 사람들과 더불어 해야 하는 날입니다. 성탄의 기쁨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어 가지는 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8 :20에 보면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특별히 이 성탄절에 의지할 데 없는 외로운 사람들과 함께 하는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네 번째의 기쁨의 선물은 평화입니다. 본문 14절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기 예수는 우리의 평화이며, 평강의 왕이십니다(사 9:6-7). 아기 예수가 누구에게 평화입니까? 아기 예수가 아무에게나 평화가 되시는 것은 아닙니다. 아기 예수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입니다. '기뻐하심을 입은 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자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변하여 새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인하여 기뻐하면서 그 선물을 이웃과 함께 나누어 가지며 사는 자, 이 같은 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자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입니다. 이 같은 자에게 하나님께서 평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 같은 자 중에 예수님은 평화가 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 : 27에 보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평안을,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다른 영원한 평안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기쁜 성탄절에 구원의 주, 생명이신 아기 예수, 임마누엘 예수,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받아 크게 기뻐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축복된 성탄 축하    성경: 눅2:1-7


 할렐루야!! 새 천년 첫 성탄주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의 가정가정 위에 평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차고 넘치는 성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성탄의 기원

성탄절이 지켜지기 시작한 것은 언제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문헌 상에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면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 335년경부터 시작되었다는 설과 354년부터 기록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예수님의 탄생일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성경적으로는 증명할 수 없지만 AD175-183에 안디옥 교회의 주교였던 "데오필로스" 기록을 근거로 해서 12월 25일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증명되고 있는바와 같이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시자마자 사탄의 강력한 저항을 받으시고 생명 보존을 위해 애굽으로 피신을 합니다. 그리고 그가 복음을 증거할 때에도 그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은 극소수였습니다. 복음이 확산되는 동안에도 온갖 핍박과 시련으로 얼룩진 상황에서 복음은 증거 되었습니다.

 이런 경황에서 예수님의 생일을 기억하고 축하하고 잔치를 베풀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그러기에 그의 생일이 언제냐? 하는 질문은 사실상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마1:이나 눅2:에 기록된 대로 예수 그리스도 이 땅에 오시었고 임마누엘하사 만민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성탄의 기원을 구지 밝힌다면 후일 구원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 나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만민을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하고 고마워서 그가 이 땅에 오심을 축하하고 기뻐하며 영광을 돌린 것이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요 유래가 되는 것입니다.


2.성탄을 잘못 축하하는 사람들

결국 성탄절을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를 논하는 사람들의 사고는 나를 구원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진정 감사한 사건임을 바로 고백하지 못하는 냉소주의적 발상을 가진 자들의 논쟁인 것입니다. 이런 사고를 가진 현대 신학자들이나 이단들은 성탄을 지키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목청을 돋우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 성탄을 지키라는 명령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은 글자 그대로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고난과 멸시 죽음을 위해 오신 것이요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사건인데 하나님이 그날을 축하하고 기념하라 하실리 만무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 기독교가 성탄을 축하함으로 하나님께 아부하는 것입니까? 결코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성경 눅2:13-14 을 보면 주께서 탄생하실 때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라고 기뻐한 사건이나 또 먼 동방으로부터 세 사람의 박사가 가장 귀한 예물을 가지고 머나먼 길을 달려와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린 사건과 또 어두운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양을 내어버리고 베들레헴 마굿간까지 달려와 말구유에 누이신 아기를 보고 기뻐 경배한 사건을 볼 때 우리도 그 날을 기뻐하며 축하함이 지극히 성서적이요 구원받은 성도로서의 마땅한 본분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박대한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1)여관주인입니다.: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요셉이 호적을 하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내려갔을 때 이미 그곳 모든 여관들은 만원 사례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어느 여관이고 저들에게 방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영생복락을 주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바로 알았다면 결코 이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주의 주인이시며 역사의 주인이시며 왕중에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마굿간에서 출생하시고 누우실 곳이 없어 말구유 말밥통에 누우셨다는 것은 기가 찰 사건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당시 여관 주인들이 죽어 주님 앞에 서서 무슨 말고 변명했을까요? 유구무언이요 쥐 구멍에라고 들어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현대인들 중에도 그의 마음에 세상의 지식과/ 교만/ 세상의 쾌락과/ 탐욕/으로 가득하여 메시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실 빈방이 없어 성탄을 기뻐하고 감사하기는커녕 비난하고 비판하거나 아니면 이날이 자신들의 쾌락을 위해 있는 날인 것처럼 착각을 하고 범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가 아무리 세상 것으로 내 심령이 만족할 정도로 모든 것을 얻었다 해도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지 못했다면 그는 사실 거지요 결국에는 멸망의 구렁텅이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가장 불쌍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욕을 마음으로부터 철저하게 비워버리세요. 쾌락을 비우세요. 교만을 비우세요.  진정 내 마음에 구주 오심을 감사로 축하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두번 째로는 당시의 율법사들과 서기관들입니다. 저들은 성경연구를 주업으로 하는 사람들이기에 메시야가 어디서 날것인지를 환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헤롯이 동방박사들의 방문을 받은 후 저들에게 유대인의 왕이 어디서 나겠느냐? 라는 질문에(마2:5)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관념적인 신앙이라 말합니다. 그저 아는데 그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의 지식은 될지언정 신앙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러기에 저들은 한결같이 예수그리스도에게 도전하였고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데 앞장섬으로서 그 지식이 무용지물이요 자신들을 심판과 저주에서 구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성경적인 지식이 있는가? 가 아니요 그 말씀을 믿는가? 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믿고 따르는 자에게 주님은 천국은 저들의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 (마18:3)


3.성도의 사명:

새 천년 뜻 깊은 성탄을 맞는 성도들의 사명은 하나님의 영적인 생명의 복음이 사탄의 간교와 인간들의 교만한 지식에 의하여, 왜곡되지 않도록 항상 살아 있는 말씀이 되게 해야 합니다. 항상 살아 역사 하시는 예수님이 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서 예수님께서 내 삶 속에서 날마다 새롭고, 힘 있게 역사 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세주이신 주님께서 내 마음 속에 또 다시 새롭게 탄생하시기 위한 계절입니다. 우리는 이날을 통하여 주 예수께서 내 마음속에 계신가를 확인하고, 마굿간 같은 누추한 심령이지만 전능하신 주님을 영접함으로 새로워지고 거룩해지며, 삶이 아름다워지고, 영생을 확신하는 역사가 매년매년 새로워지게 해야 합니다.

이런 생명 있는 영적인 역사가 우리의 심령 속에서 계속적으로 일어나지 않으면, 사탄과 불신자들에 의하여 복음이 무력화되고, 신화화되고.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을 웃음거리가 되게 합니다.

 복음을 복음 되게 하는 사명을 인식하는 계절이 성탄의 계절입니다.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때가 성탄절입니다. 예수의 사랑이 나타나게 하는 것이 성탄입니다. 우리는 성탄을 통하여 주님께서 내 마음속에서 날마다 새롭게 믿어지고, 느껴지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억할 때마다 주님이 내 심령 속에서, 생활 속에서 새롭게 힘있게 역사 하실 수 있도록, 주님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심을 본받아 나를 산제물로 드리는 헌신의 역사가 있어야 됩니다.

 이는 우리가 올바른 믿음과 자세를 가지고 성탄을 맞이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올해 성탄에는 진정 주님께서 내 마굿간 같은 심령에 임하시도록 마음을 열고 우리 주님을 감사함으로 모시는 축복된 성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 번 크리스마스이브  성경 : 사 9:1-7 눅 2:8-20

 

* 옛 언약의 말씀 . 이사야 9 : 1 - 7

* 새 언약의 말씀 . 누가복음 2 : 8 - 20

예수가 탄생할 즈음 팔레스타인에서는 추운 계절을 피한 3월과 11월 사이에 양들을 들판에 내어 놓고 방목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그러나 예루살렘 근방(특히 베들레헴)에서는 성전 제사에 쓸 양을 충당하기위해 1년 내내(겨울철인 12월-2월에도) 양을 방목했다. 그래서 6세기 당시 서방교회의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하여 예수의 탄생일을 12월 25일로 잡았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의 탄생 소식을 들은 최초의 사람이 다름 아닌 베들레헴 들판의 양치기 목자들이었다고 전한다. 구주탄생의 소식이 목자들에게 먼저 전해진 것은 의미 있는 사건이다. 정통파 유대인들은 목자들이 매우 천한 일을 하며 그들이 늘 양떼와 같이 있어서 서기관들이 요구하는 율법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하찮케 취급하였다. 그러한 취급을 당하던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난 것이다. 어떻게 비천한 목자들이 예수의 탄생소식을 최초로 듣고 이를 증거하는 증인들이 될 수 있었을까? 오늘의 본문은 그것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8절은 ; 목자들이 맡겨진 직분에 충성을 다하는 자들이었음을 전한다. 당시 예수 탄생의 때는 팔레스타인의 겨울이었다. 더욱이 베들레헴은 해발 600m의 고산지대였기 때문에 한밤중에 목자들이 양을 지키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자들은 성전에 바쳐질 희생양(제물)을 돌보면서 들판에서 밤을 지새웠던 것이다. 그러한 충성과 열심이 그들을 많은 유대인들 가운데서 최초로 구주 탄생의 복된 소식을 접하는 축복을 얻게 했다.

15-16절은 ; 목자들이 사명감에 불타는 자들이었음을 전한다. 목자들은 베들레헴 교외의 들판에서 양을 치던 중 천사들을 통해 구주 탄생의 실로 어마어마한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천사를 통해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 베들레헴으로 가기로 결심한다. 그토록 오랫동안 대망하던 메시야탄생의 소식을 듣자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구주탄생 장소가 어디인지도 모른 채 즉시로 아기 예수님을 찾아 나선 것이다. 성전의 희생양을 돌보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들에게는 참 하나님의 어린 양이요 속죄양으로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는 일이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었던 것이다.

17-19절은 ; 목자들은 보고 들은 대로 충실하게 증거하는 자들이었음을 전한다. 아기 예수를 찾아간 목자들은 천사에게서 전해들은 말을 그대로 요셉과 마리아에게 전하였다. 즉 목자들은 그들이 믿고 들은 내용을 한치도 더하거나 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예수의 부모들에게 전한 것이다.

돌이켜 보건데 천사들이 목자에게 선포한 말씀과 당시의 상황은 목자들밖에 아는 자들이 없었지만 그들이 충실하게 증거함으로써 또 다른 여러사람들의 입을 통해 결국 누가복음에 묶여져 성서 말씀의 일부로 기록되었으며, 이것은 2,000년이 지난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일점일획의 더함이 없이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들려주고 있다. 바로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의 올바른 자세를 교훈한다. 진실로 복음전파의 사명을 맡은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해야 한다.

20절은 ; 목자들이 주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는 자들이었음을 전한다. 목자들은 당시 팔레스타인의 최하위 계급에 속한 자들이었지만 자신의 신분에 불평하지 않고 맡겨진 직분에 묵묵하게 충성한 결과 구주 탄생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첫번째 축복을 입었으며, 놀라운 이 소식을 널리 전해야겠다는 사명감으로 아기 예수를 방문함으로써 하나님의 계시가 사실로 나타난 것을 목도하는 두 번 째 놀라운 축복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룻밤의 짧은 시간에 말할 수 없이 놀랍고도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직접 체험한 목자들은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이 놀라운 일을 이루신 하나님을 향해 조용히 찬양과 영광을 돌렸던 것이다.

목자들은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어렵고 힘들었지만 그들은 인생 최고 행복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다는 확신과 자기들이 본 것이 한없이 전파될 것이라는 믿음을 안고 기쁨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실로 인생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며 하나님께서는 그 행복의 초점을 인간에게 두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가까이 오시기 위한 방법으로 인간의 가족 어린아이를 택하셨고 베들레헴 마굿간을 찾으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생명이 있고 사랑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 '영광', 사람들에게는 '평화'는 인생의 가장 큰 희망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인가?

인간이 요구하는 영광은 자기중심의 부귀영화이지만 예수가 행한 '하나님께 영광'은 넘어진 자를 일으키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며 가난한 자들과 어린 것들에게 친근히 하시고 잔인과 부정을 미워하시며 모욕을 당해도 반항치 않으시며 원수의 사유를 구하신 영광, 곧 주린 자를 먹이시고 헐벗은 자를 입히시며 실망한 자에게 희망을 주시고 차별 없이 사랑하시며 인간의 평화를 위해 일하시고 만민을 한 형제로 포용하신 그 영광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평화'의 모습을 우리는 신약성서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의식에 고통당하는 자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신다. 그것은 참된 회개와 결심을 통하여 가능하며, 될 수 있으면 피해자에게 보상할 것을 명하셨고 다음에 요구되는 것은 사유함을 얻을 수 있다는 확증이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이 크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자비와 구원이 확보되었으며 참으로 회개하는 자는 사유, 고침, 평강을 얻을수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근심과 공포에 싸인 자에게 평화를 주신다. 근심과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믿음이다. 생(生)이란 허무한 것이 아니라 목적이 있으며, 세상은 무관심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과 능력을 믿을 수 있을 만한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역경에서 헤어날 수 있다. 그러나 생의 허무, 세상의 무관심만을 주장하는 자는 살 길을 찾을수 없는 것이다. 예수는 고뇌와 공포에서 신음하는 자에게 하나님을 믿도록 도와주는 동시에 사랑과 성실로 남을 돕는 과정 중에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게 해줌으로써 평화를 주신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천사들이 노래한 평화이다. 예수가 오심으로 이루어진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해를 보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세계 평화도우리가 하나님이 하고 계시는 '만민을 위한 관심'에 동참할 때 가능할 수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예수의 탄생에 있어서 '목자들의 경배'가 지상의 반응이었다면 '천사들의 찬양'은 곧 하늘의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천사들은 한 입을 모아 찬양하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노래했다. 이 찬양을 투해 예수탄생의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던 것이다. 실로 인류 구원을 위해 메시야를 보내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과 선하심은 정녕 찬양받아야 마땅하다. 즉 하나님은 다른 일로도 영광을 받으셔야 마땅하지만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신 사건은 특히 지극히 높은 곳에서 그 분의 영광이 되는 것이다. 한편 메시야를 보내신 하나님의 이러한 선하심은 이 낮고 천한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주었으며, 참 평화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비롯되었다.

이처럼 허다한 천군천사들에 의해 증거된 믿음의 외침, 즉 하나님의 선한 의지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가 된다는 이 말은 복음 중의 복음이요, 진리중의 진리가 아닐 수 없다.

예수의 탄생 후 최초의 경배자가 바로 목자들이었다는 오늘의 본문은 예수는 영혼의 목자장(牧者長)이시라는 것과, 선한 목자되신 예수는 양들, 곧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 주신 분이라는 것, 예수는 유리방황하는 자들의 생명의 길과 안내자가 되신다고 하는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 인생의 영원한 목자가 되어 주시는 예수탄생의 소식을 기쁨으로 증거한 2,000년 전 목자들의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우리의 입술과 행위로 구주 탄생의 기쁜 소식을 선포해야 함을 촉구하고 있다.

그렇게 될 때 이 기쁜 소식은 진정 모든 인류의 영혼을 구원할 복된 소식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메리 크리스마스 !! (Merry Christmas!!)


 

 주님이 탄생하신 날  본문 마1:18-25

 

크리스마스는 세계적 명절입니다. 그래서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으며, 심지어 다른 종교가 국교로 지정된 나라들도 이 날을 기쁜 날로 지키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이 나신 날입니다. 그는 마구간에서 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요셉이 나사렛에서 목수일을 하며 살았는데 정혼한 마리아와 호적을 하러 조상의 본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갔었을 때 예수님께서 나셨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다윗의 동네라 많은 사람들이 살았으며, 당시에는 작은 베들레헴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여 오는 사람들은 많은데 유할 만한 곳은 적어서, 만삭이 되어 늦게 도착한 요셉과 마리아는 유할 만한 여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겨우 얻은 곳이 마굿간이었습니다. 그날 밤 예수님은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면 불륜의 아들이 아닌가 걱정할 수 있습니다. 잘 아는 대로 성령으로 잉태되었으므로 예수는 하나님의 뜻대로 태어났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되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그러므로 예언에 의한 탄생이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신지 물었을 때, 서기관은 ■유대 베들레헴■이라고 예언된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미 5:2). 그러므로 박사들은 베들레헴에 가서 강보에 싸인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또한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갑자기 하늘에서 천군천사들이 전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눅 2:11■12) 하셨습니다. 그 후 하늘에서 천군과 천사들의 노래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그들은 급히 베들레헴으로 가서 아기 예수에게 절하였습니다.

예수의 나심은 이렇게 성령의 역사로, 또는 하늘의 별과 음성으로 알려졌던, 하나님의 역사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 2천년 역사중에서 12월 25일을 성탄일, 즉 크리스마스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 날을 어떤 마음으로 맞이하며 어떻게 전할 것입니까? 모든 성도들이 바로 알고 즐거워하며, 또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바르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1. 기쁜 날입니다.

인류의 죄악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 주셨으므로, 모든 인간은 그를 기쁜 마음으로 맞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탄하면 ■축하합니다.■라고 인사합니다. 이것은 예수의 나심은 그렇게 기쁘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은 인간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에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주는 것은 일시적이며, 내가 만든 기쁨도 오래가지 못하고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만든 기쁨은 희극에서 웃기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얼굴에서 시작해서 얼굴에서 끝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정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반드시 식고 맙니다.

그리고 인간의 기쁨은 물질로부터 옵니다. 어떤 여인이 미국에서 복권이 당첨되었습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크게 소리를 질렀는데, 그만 심장마비로 쓰러져 죽었습니다. 물질은 좋은 것이지만 위험한 것입니다. 물질이 반드시 인간에게 기쁨을 주지는 못합니다. 어떤 때에는 기쁨의 조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탄생은 인간적이 것만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며, 생명력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오래 지속됩니다. 지금까지 2천 년 동안 왔습니다. 아니, 앞으로 세상 끝날까지 성탄일은 기쁨의 날로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기쁨의 날로 모든 사람들이 축제를 벌이고, 교회마다 좋은 순서로 축하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사는 자신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축하하는 순서들입니다. 교회당에서 밤을 새우며 찬송하고 또한 성도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새벽송을 부르는 것은 매우 즐거운 행사들입니다. 누가 기뻐합니까? 인간적인 목적으로 기뻐하는 사람들은 향락적입니다. 그러나 훌륭한 신앙인들의 성탄에 대한 기쁨은 주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려고, 그 높은 하나님 나라의 보좌를 버리고 이 낮은 세상에 오셨다는 데 기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보다 바로 자신에 대한 긍휼과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에 신앙인은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기쁨은 본질적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2. 깊이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이 날은 모든 신앙인들이 깊이 감사해야 할 날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으로 보내셔서 희생제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죄는 구약시대에 제사들처럼 짐승을 잡아 희생함으로 용서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사는 항상 드렸습니다. 아니, 매일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몸으로 직접 드린 제사는 단번에 드려졌습니다(히 9:28). 구약에서는 짐승의 피를 흘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장 고귀한 피를 흘리심으로 나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고 하셨습니다. 가장 고귀한 피로 인하여 용서해 주셨으니 이 어찌 감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랑은 인간적 에로스가 아닙니다. 그것은 아가페입니다. 에로스는 남녀간의 성적 사랑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아가페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사랑을 예수님을 통하여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어떤 조건이 있어서도 아니요, 아무 조건 없이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을 주시기 위하여 이 낮은 세상에까지 오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쳐 주신 사건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직접 고쳐 주셨고, 직접 귀신을 내쫓으셨고,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도 직접 집에까지 가셔서 일으키셨습니다. 이것은 사랑하지 않고는 결코 있을 수 없는 기적입니다. 이렇게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감사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전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해서도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비유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천국을 소개하셨습니다. 그의 복음은 곧 천국을 전하는 데서 나타났습니다. 그가 세상에 오심은 천국을 알려 주기 위함이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만큼 천국은 귀중한 나라이며, 그 소식은 인간에게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이런 소식을 어디서 들을 수 있습니까? 새로운 뉴스라고 해도 이런 것은 없습니다. 세상에서 들리는 것은 모두 비극적인 것 뿐입니다. 그리고 나를 두렵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소식은 하나님의 나라, 영원한 나라, 생명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소식을 전해 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3. 전파해야 합니다.

크리스마스를 기뻐하고, 노래 부르는 이유 중 하나는 천군천사들의 모범을 따르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떠나서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까지 내려와서 예수의 나심을 전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별을 동원해서까지 예수의 나심을 전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나에게도 같은 책임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기쁜 소식이니 내가 좋아하는 친구에게만 전할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감옥 창살 앞에 가서 성탄 축하송을 부르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세상에 물들어 있는 죄인들을 향해서 큰소리로 외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전할 것입니까? 노래로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성탄절에는 반드시 음악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그 이유도 모른 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음악예배를 드리는 것은 천군천사들처럼 찬송으로 주님의 오심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성도들에게만 들려주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세계를 향한, 아니 우주를 향한 찬송입니다. 이 노래는 교회에서만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마스 캐롤이란 이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많이 불러서,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멀리 가서 노래하고,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노래하고, 어두운 곳이라도, 한 사람이 들어도 필요한 사람에게 성탄절 노래를 들려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음으로 선물로 전합니다. 성탄절에 반드시 있는 것이 선물교환입니다. 교회행사에서도 빠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반인들도 성탄절에는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보냅니다. 가정에서도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라는 전설에 의해서 자녀들에게 양말에 선물을 담아서 줍니다. 이 선물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의미에서 수용해야 합니다. 선물을 받는 것보다 선물을 하는 사람이 성탄을 전하는 일을 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주님의 이름으로 선물을 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선물은 꼭 물질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할 수도 있으며, 또한 사랑의 마음으로 이룩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말씀으로 전합니다. 우리는 성탄절에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때 목사님으로부터 성탄메시지를 듣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나심을 전달받는 시간입니다. 몰라서 받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아는 사람들도 새로운 은총의 역사로, 오늘을 맞는 기쁨의 소식으로 듣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은 평생을 들어도 싫지 않고, 새로운 것이며, 누구에게나 필요한 소식입니다. 말씀은 귀중한 것입니다. 메시지를 잘 듣는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책임이 있습니다.

성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축하해야 할 날입니다. 현대인은 휘황찬란한 네온싸인 속에서 기쁜 성탄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박해가 심한 시대에는 토굴 속에서, 또는 감옥에서 성탄을 맞았고, 표면적인 기쁨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를 건너갈 때, 실제로 공포와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그러나 찬미하며 가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매를 맞고 쓰러졌을 때, 그도 찬송했다고 했습니다. 그 찬송은 슬픔의 찬송이었습니다. 억울한 사람이 부르는 찬송이었습니다. 그러나 찬송이란 기쁨의 표현입니다. 오늘도 저 북녘 땅에서 성탄을 맞아 찬송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많이 흐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나심을 기뻐할 것입니다. 진실로 마음속으로부터 성탄을 축하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자세로 성탄절을 맞이해야 하겠습니까? 바른 믿음으로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그를 찾아왔던 박사들이나 목자들은 오늘 우리들과 같은 기쁨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초조와 공포 속에서 축하했습니다. 그리고 편하지도 못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마구간에서 나셨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성탄은 왔습니다. 우리들은 진실로 가장 아름다운 때에 성탄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가치 있는,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성탄이 되어야 합니다. 최선의 축하를 드립시다.



임마누엘 예수 본문 마1:21-23


유대 땅 베들레헴 들녘에 들렸던 천군천사의 노래처럼 이 성탄에는 하나님께 무한한 영광이요, 땅에 있는 우리 가운데에, 그리고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한 여러 성도들에게는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해마다 맞이하는 성탄절이요, 연말의 바쁜 계절이기 때문에 맞이하는 사람들의 자세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도 하고, 왜곡되기도 하며, 때로는 깊은 감격과 기쁨, 그리고 은총을 느끼는 날이 되기도 합니다. 여러 해 전에 미국 보스톤 가까운 곳에 작은 도시 소머빌에서 성탄절을 맞아 신청 앞에 아기 예수의 탄생 장면을 모형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어떤 장난꾼이 아기 예수를 훔쳐가는 바람에 큰 곤욕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멀리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하여 찾아온 동방박사와 들에서 달려온 목자들의 모습까지도 그대로 있었습니다. 심지어 포대기도 말구유도 다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없었습니다. 휘황찬란한 네온사인도, 트리도, 즐거운 음악도, 그리고 맡은 선물을 받게 되어도 예수님이 없는 크리스마스는 생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모빌 시청 앞처럼 지금도 예수 없는 성탄절을 즐기지 않나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탄생을 설명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는 임마누엘이라는 말입니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의 히브리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크리스마스란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의 의미를 깨닫는 날이요, 그 뜻을 바로 이해할 때 진정한 크리스마스를 지내게 될 것입니다.


1. 우리는 먼저 이스라엘과 예수의 관계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과부 사정은 과부가 알고 홀아비 사정은 홀아비가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같은 처지에 있어 보지 않고는 상대를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거나 통하지도 않게 됩니다. 그래서 독일의 문호 괴테도 "내가 당하는 괴로움은 맛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같은 경우에 처해 보아야 그 사정을 압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계시고자 인간 속에 오셨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셨다고 하더라도 함께 어울리고 통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시되 그가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써 함께 계심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은 예수님에게서 더욱 절실해지고 분명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오셔서 우리처럼 고통하시고 배고파하셨으며, 하나님께 울부짖기도 하시고 눈물 흘리며 울기도 하셨습니다. 또한 피도 흘리셨고, 그리고 죽기까지 하신 삶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고 하시던 주님의 궁핍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궁핍을 이해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시던 모습에서는 제가 홀로 울며 아파하던 일을 보게 됩니다. 또 죽음을 눈 앞에 두고 그것이 엄연한 하나님의 뜻인 줄 아시면서도 "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면케 하소서."라고 기도하시던 모습에서는 가장 인간적이고 우리다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 안에서 우리는 우리를 볼 수 있고 그 안에서 동시에 하나님을 볼 수 있으니, 그분이야말로 우리 속에 오신 하나님이시요,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심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예수 안에서 발견되는 임마누엘의 깊은 의미와 바른 뜻을 알게 될 때 성탄의 의미가 새롭게 될 것입니다.


2. 예수가 우리에게 오신 임마누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말에서 왕이 거지가 되었다는 의미 이상의 엄청난 비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같은 동류에서의 위치나 값의 변동이 아닙니다. 완전히 상상을 초월한 존재양태의 변화요, 엄청난 평가절하입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평등사상을 밑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 제도하에서도 대통령이 어떤 평민과 악수를 나누거나 식사를 함께했다 하면 그것은 큰 뉴스가 되어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소개되는 일이 있음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인간끼리 지위의 차이에서 오는 격차를 좁힌 것도 대단하거든 하나님이 인간되심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비하의 원인이 인간 사랑이라니 이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요한일 4 : 10에서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사 임마누엘 되심은 바로 하나님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죄악으로 눈이 멀고 귀가 먹어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한 채 죽음으로 가면서도 죽음의 길인 줄 모르는 인간들을 구원하사 새로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이 땅에 오셨고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 그가 사람 되심은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오직 인간 사랑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임마누엘 되신 결과 우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사람 되시사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하여 우리에게 오심으로써 우리지위에는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소위 계급장을 달고 있는 친구와 함께 부대 안을 걸어 다닐 때 보다 대위 계급장을 달고 있는 친구와 함께 할 때가 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게 됩니다. 별을 단 장군과 함께 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같이 누구와 함께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평가됩니다. 옛 어른들이 󰡒���친구를 보아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한 말대로 함께하는 사람을 보아 그를 평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게 되었으니, 이 어찌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요한 1:12에 보면 임마누엘 되신 예수와 함께 지내는 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함께 살다보니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보통 변화가 아닙니다. 너무나도 엄청나고 상상을 초월하는 변화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후 5 :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 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는 말씀에서 볼 것 같으면 '새 피조물'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전의 것과 비교해서 조금 나아졌다거나 전의 것에서 진화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새로워진 새 피조물이라는 말씀입니다. 격상되어도 보통 격상이 아니기 때문에 '새 피조물'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티끌만도 못 하며, 굴러다니는 돌덩어리처럼 버려진 인간이었지만 이젠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생명에 의미를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고, 우리의 이 생명을 더욱 고귀하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신 생명이니 어찌 값없다 하겠습니까? 값지고 고귀한 생명이 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루하루가 의미 있고 새로우며 우리 삶의 한발자국 한발자국이 값있고 보람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물러서지 않고 전진만을 생각하는 복된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되시사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시는 임마누엘, 즉 예수님의 탄생은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 :20)라고 하신 말씀대로 우리가 땅에 발을 딛고 살면서도 하늘나라의 시민된 자부심으로 살 수 있게 해준 큰 축복이요,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임마누엘 되신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며, 이 큰 축복과 은혜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다짐하는 올 성탄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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