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감독은 평신도에 의해 뽑여야 한다]
하나의 조직이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려면 반드시 권위들이 있어야 한다. 권위자가 없는 집단은 취미활동 집단은 될 수 있을지언정 어떤 목적을 이루고 과업을 성취해내는 일은 할 수 없다. 교회는 취미활동 집단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권위들을 두셨다. 그 권위란 바로 장로들이다.
사도, 선지자, 목사, 교사, 전도자 등은 직분적인 의미가 강한 은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장로와 집사라는 직분과는 별개다. 그 차이를 구태여 들라면, 전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지만 후자는 사람들에 의해서 뽑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도, 선지자, 전도자, 목사, 교사 등도 사람들이 뽑는 직분으로 알고 있지만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그런 것들은 결코 사람에 의해서 임명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사다. 성경에서는 그런 은사를 사람이 임명해서 얻게 된 예가 없다. 오직 성경에는 예외처럼 보이는 사건이 한 번 나오는 데 그것은 사도행전 1장에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 제자들이 가룟유다 대신으로 맛디아를 사도로 뽑은 사건이다. 그것이 올바른 결정이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그것마저도 결국은 투표가 아닌 제비뽑기로 하여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뽑을 수 있는 것은 단지 감독과 집사뿐이며 감독과 장로는 같은 의미로 쓰여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은사로서의 사도, 선지자, 목사, 교사 등은 역할 상 교회의 지도적 위치에 서게 되므로 자연스럽게 장로로 추대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직분과 은사를 혼동하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된다.
실제로 성경은 감독을 뽑을 때 여러 기준을 제시하는 데 그 중에 하나는 다음과 같다.
딤전 3:2 가르치기를 잘하며
이 말씀에 의하면 감독이 되면 가르치기를 잘하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가르치기를 잘하는 사람을 감독으로 뽑을 것을 말씀한다. 즉 사람들이 그 은사를 가진 사람을 발굴하여 세우는 것이다.
직분과 은사는 한사람이 함께 소유할 수 있지만 별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사도이면서 그는 교회 직분이 장로였다. 요한이서에 보면
요이 1:1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라는 말로 서두를 시작한다.
사도 베드로도 자신이 장로임을 밝혔다.
벧전 5: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그리고 장로는 감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음의 성경구절을 비교해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행 14: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
빌 1: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바울은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였다고 하는데 그의 편지에는 장로는 언급하지 않고 감독을 언급했다. 만일 감독과 장로가 별개의 직분이었다면 장로를 누락시킬 일이 없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감독은 바로 장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칼빈은 감독을 장로 중의 특별히 대표되는 사람으로 간주하였다.
각 도시에서는 장로들이 자기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뽑아 '감독'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지위가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생기는 불화를 막으려는 뜻이었다. 그러나 감독에게 훨씬 더 많은 영예와 위엄이 있어서 동료들을 지배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감독은 원로원에서 집정관이 한 것과 같은 일을 했다. 즉 사무에 대한 보고를 하고 의견을 물으며 의견을 말하고 충고하며 권고함을써 모임의 의장이 되며, 모든 행사를 그의 권위로 주관하고 회의 결정 사항을 심사하는 등, 집정관이 한 일들을 감독이 장로회에서 수행하였다.
감독과 장로는 같은 의미인지 아니면 감독은 장로 중의 의장 격인지에 대해 신학자들 간에 약간의 의견차이가 있으나 여기서는 그것이 논쟁될 만한 중요한 주제는 아니다.
내가 지금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어떤 사람이 감독이 될 수 있는가이다.
오늘날 교회의 장로는 대체로 평신도들의 선거에 의해 뽑지만 장로들의 의장 격인 감독(목사)은 그의 영적 성숙도와는 무관하게 단순히 신학교를 졸업 유무와 목사 고시 합격 여부 정도를 기준으로 임명한다. (앞으로 약간의 용어의 혼동이 불가피함을 용납하라. 목사가 은사라고 해놓고 다시 직분으로 간주하고 설명해야 모순적인 태도는 현재 교회들이 목사를 감독과 동일하게 간주하기 때문에 그렇다. )
그런데 신학교 졸업한 사람을 무조건 안수하여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감독으로 세우는 것이 성경적인가?
한번 성경이 제시하는 감독의 기준을 살펴보자.
딤전 3 :1-7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찌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 보리요) 새로 입교한 자도 말찌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찌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위의 말씀에 의하면 감독의 직분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인격적으로나 영적으로나 골고루 잘 갖추어진 사람이어야 하며 심지어 외인(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조차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감독에 해당하는 목사 안수를 줄 때의 기준을 위의 성경과 비슷하게 쓴다면,
그러므로 감독은 학점을 확실하게 채워서 신학교를 졸업한 자라야 하며, 목사 고시에 합격하여 노회에서 인정한 자라야 ...
어떻게 생각하는가? 과연 그것이 성경적인가? 오늘날 목사가 되기 위한 조건은 성경에서 하나도 제시하지 않은 조건이다. 그것은 철저히 편의주의를 따라 만들어 놓은 사람의 계명인데도 오늘날 사람이 정해놓은 조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사이비니 이단이니 하고 비난한다면 그는 정직한 사람도 정의로운 사람도 아닌 단순히 무식한 사람일 뿐이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마 15장 8절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그렇다. 오늘날의 감독(목사) 임명제도는 편의주의와 능률주의에서 나온 사람의 계명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러한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함부로 비난한다면, 그들이야말로 주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주장은 나만 하는 것이 아니다.
루터는 사람의 안수로 목사가 될 수 있다는 개념을 일찍부터 반대했다. 다음의 루터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교황이나 주교가 주는 성별은 결코 사제가 되게 하지 못할 것이며, 만일 교황이나 주교가 주는 것보다 더 높은 성별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아무도 미사를 드리거나 설교를 하거나 사죄선언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교가 성별할 때에 그것은 모두가 동등한 권능을 가진 모든 회중을 대신하여 그들 가운데서 하나를 택하여 그에게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이 권능을 행사하도록 맡겨 주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이것은 마치 다같이 왕의 아들이고 동등한 상속자들인 열 형제가 그들 가운데서 하나를 택하여 자기들 전체를 대신하여 유산을 관리하게 하는 것과 같다. 그들 중의 하나가 다스리는 직무를 맡고 있기는 하나 그들은 다 왕들이며, 동등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중략 .....
옛날에는 이러한 방법으로 크리스챤들이 자기들 중에서 주교와 사제들을 먼저 택하였으며 그런 다음, 오늘날과 같은 허식 없이 주교들의 인준을 받았다. 성 어거스틴, 성 암브로시우스 및 성 키프리아누스가 이렇게 하여 주교들이 되었다.
여기에서 루터는 안수를 줌으로써 다른 평신도와 구분되는 특별한 성직자가 된다는 사고방식을 거절하고 오히려 어떤 그리스도인들의 무리가 자기들 중에 어떤 사람을 추대하여 사제로 삼는 것이 더 올바른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 선배인 종교 개혁자 칼빈은 감독을 임명하는 제도를 루터보다도 더 격렬하게 비난했다.
칼빈의 주장을 살펴보자.
지금은 주교를 선거하는 권리를 평신도로부터 완전히 빼앗았다. 투표, 찬성, 서명 승낙, 기타 유사한 일이 모두 없어지고 전권이 참사회 의원들에게 이전되었다. 참사회 의원들은 마음대로 주교직을 수여하고 직접 신도들에게 소개한다. 신도들에게 그를 검토하라는 것이 아니고 숭배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레오는 이것은 이성이 허락하지 않으며 극악한 사기라고 규탄한다. 키프리아누스는 평신도의 찬성에 의한 선거만이 하나님이 주신 권리에서 유래하는 것이라고 증거하면서, 이와 반대되는 관습은 하나님 말씀에 배치된다는 것을 밝힌다.
.....중략....
그들은 주교 선거에서, 평신도와 관리들은 바르고 건전한 판단력보다도 증오심과 당파심으로 움직이므로 이렇게 부패한 시대에는 문제의 해결을 소수에게 위임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분명히 이것은 개탄해야 할 상황에 있어서의 악에 대한 비상 치료책이었다. 그러나 병 자체보다 치료약이 더욱 치명적인 듯한 이 때에 왜 이 새로운 폐단을 고치지 않는가? 그들은 교회법에는 선거 절차가 정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이 감독을 선거하기 위해 모였을 때, 그들은 하나님 말씀이 정해 놓은 법칙이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들이 가장 거룩한 법에 의해서 제한을 받는 것으로 믿었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하는가?
...중략.....
술고래나 음행자나 지독하게 상습적인 노름꾼들이 주교로 추천되어도 대개는 침묵하거나 심지어 승인한다. 나는 과장하지 않는다. 주교직은 간음하는 자들과 뚜장이들에게 대한 보수가 된다. 총사냥꾼과 매사냥꾼들이 주교가 되는 때에는 아주 잘 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런 추행을 조금이라도 용서한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잘 가르치며, 다투지 않으며 운운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옛날 신자들에게는 훌륭한 법이 있었다. 그러면 왜 선거하는 책임을 신자들에게서 빼앗아 이런 자들에게 옮겼는가?
당시 카톨릭의 사제 임명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칼빈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오히려 총사냥꾼이나 매사냥꾼이 주교가 되는 것이 그 중 잘된 것이라는 칼빈의 한탄이 오늘날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까?
오늘날과 같은 제도대로 신학교 졸업하면 자동적으로 성직자가 될 수 있는 상황이 되면 종교 개혁 당시의 간음하는자, 뚜장이들이 사제가 될 수 있었던 것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다.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라고 자처하는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의 충고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오늘날은 개혁상황이 아니라고 귀를 막는다면 그는 귀머거리로 살도록 내버려두자. 오직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고후 13:8)"라는 사도 바울과 같은 심정을 갖는 사람은 비록 그것이 기득권을 축소시키고 권위의 약화와 약간의 물질적인 손해가 오더라도 기쁘게 감수할 것이다.
교회의 감독은 평신도에 의해 선거로 뽑아야 하며 그 기준은 성경에 나온 대로 적용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검증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함께 생활해본 사람들뿐이다.
사도행전에서는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해서 세운 것을 볼 수 있다.
행 14: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
사도들이 개척자로서 자연스럽게 장로가 된 반면 그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에서는 사도들이 장로를 뽑아서 세워야 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도 사도들이 단독으로 사람을 지명하여 뽑은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의견을 물어서 뽑았을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여기서 '택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키로토네오'라는 단어는 '손을 들어 투표하여 선택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칼빈의 말을 들어보자.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각 교회에 장로를 임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방법에 대해서는 투표를 했다고 즉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라고 기록했다(행 14:23). 그러므로 이 두 사도는 장로들을 '택했다'고 하지만 당시의 헬라 사람들의 선거 풍속에 따라 교회 전체가 거수로 그 소원을 표명한 것이다. 로마의 역사가들도 어떤 집정관이 민회를 열고 새로 치안관들을 '택했다'고 기록한 것이 많은데, 이것은 투표를 받으며 선거를 주관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나는 오늘날의 목사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미 목사가 된 사람더러 물러나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참으로 그들 중에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헌신한 사람도 있고 나는 그런 분들을 볼 때마다 참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생긴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오늘날의 목사가 되는 제도가 많은 사람이 생각하듯 그렇게 성경적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제도에서는 도저히 목사라고 할 수 없는 사람들조차도 목사랍시고 사람들 앞에서 영적 지도자임을 자처할 수 있으며 , 그리고 한번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은 자신이 목사의 은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들어섰다고 생각하고 힘든 그 길을 그대로 걸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비극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신학교는 목사가 되는 필수 과정이 아니다. 신학교가 없어도 교회는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으며 영적 지도자도 얼마든지 배출될 수 있다. 교회 역사 2000년동안 신학교가 존재한 기간은 200년도 안된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준다. 다만 신학교는 불필요하다기 보다는 영적 지도자를 훈련시킬 수 있는 유익한 과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평신도들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영적 지도자가 선출되는 사례를 우리는 세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미국, 남미, 호주 등지에서 그러한 교회들이 점점 많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중국에서도 그러한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중국에는 정부에서 인정하는 삼자교회와 소그룹으로 몰래 모이는 처소(가정)교회가 있다. 그런데 처소교회의 지도자들이 거의 대부분 신학교를 나오지 않은 평신도들이다. 지도자를 어떻게 뽑는가? 그것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영적 통찰력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자연스럽게 무리 중에서 지도자로 뽑히는 것이다. 그것은 명예도, 돈을 버는 직업도 아니기에 경쟁이 치열하지 않다! 그것은 오직 희생이며 헌신일 뿐이다.
한국에서 중국에 신학교를 세우려는 노력을 종종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성령의 사역을 역행시킬 수 있다. 차라리 신학교이라는 학사과정이 아니라 성경을 더 깊이 공부할 수 있게 하는 성경학교를 세우라. 그리고 철저하게 교육기관으로 남아야 한다. 자격은 절대로 수여하면 안된다. 다만 진리를 더욱 연구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 되어야 한다.
나는 신학교의 무용론을 부르짖는 것이 아니다. 신학교는 순수한 연구기관으로 필요할 수도 있다. 성경번역이나 각종 전문지식은 그 분야를 평생을 연구한 사람들의 몫이다.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날 평신도들은 성경을 읽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기존의 교회 제도가 다 쓸모 없고 잘못되었다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존의 교회 모델도 축복하셔서 지금까지 한국교회를 이렇게 부흥케 하셨다. 다만 그러한 제도가 성경적인 유일한 것이며 그 외는 다 잘못되었다는 기성교회의 사고방식이 옳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연구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교회에는 장로가 하나가 아니라 여러 명이라는 사실이다. 성경에 의하면 '장로들...'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행 20 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교회의 장로가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라는 사실은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교회가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혼자보다는 여러 명이 안전하다.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하나님 말씀에서 이탈되지 않도록 경계하는데 여러 명의 장로가 필수적이라고 생각된다. 사람이 비록 거듭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시행착오와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있으며 탐심에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 나라 사업을 망칠 위험도 있다. 그런데 여러 명이 있을 때는 그런 위험이 많이 방지된다. 우리 주위의 교회들을 보아도 한사람에 의해서 독단적으로 운영되는 교회들은 상당수가 성경에서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개인의 탐심에 교회 재정이 남용되거나 교회 직원들 인사에 대해 거의 독재적인 횡포를 부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면 교회는 영적 건강을 잃는다.
그리고 장로는 여러 명이었고 그 중에 의장 격이 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계시록 2,3장에 보면 주님께서 일곱 교회 사자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있다. 그때 일곱 교회 사자들이 단수로 되어 있다는 것은 각 교회를 책임지는 지도자가 있음을 시사해준다.
오늘날 교회들은 대부분 장로들이 여러 명이다. 그러나 장로가 여러 명이라도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교회가 많다는 사실은 개탄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장로들이 단지 목사를 받들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믿는 한, 장로는 더 이상 장로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명확히 알아야 할 것은 목사도 장로 중의 하나라는 사실이다. 평신도와 성직자의 구분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목사와 장로는 엄연히 구분된다고 믿고 있다. 그들 생각에는 장로는 평신도이며 목사는 그들을 다스리는 성직자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성경을 잘 알고 있어야 하는 목회자 중에서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목회자들은 장로를 뽑을 때도 교회의 영적 지도자라기 보다는 단지 재정적인 부족이나 채워줄 수 있는 부자나 목사를 잘 떠받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을 뽑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렇게 뽑은 장로들이 결국은 교회에 가장 큰 암적 존재로 남아서 사사건건 하나님의 사업을 방해하고 참다운 부흥을 막고 있는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나는 어떤 교회든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찬성한다. 그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그 지도자는 장로 중의 하나이며 그는 장로를 지배하는 사람이기보다는 장로들의 의견을 조정하며 회의를 진행시키는 사람에 불과하다. 다수의 장로들은 서로 대립의 관계로서가 아니라 서로 격려하며 권고하며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경계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 일부 교회에서는 지나치게 목사의 권위를 강조하여 스스로 평신도와 하나님 사이의 대제사장으로 자처하며 중세기의 카톨릭 사제에 버금가는 신분을 누리려고 한다. 그 결과 교회가 종종 개인의 탐욕에 의해 좌우되는 처지로 전락하기도 한다.
전에 어떤 형제가 나에게 와서 자기 교회 목사는 예언의 말씀을 빙자하여 전 교인을 자기 수하에 묶어두고 있고 심지어 헌금 강요까지 하고 있는데 누구도 무서워서 거역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순진하고 약한 형제들이 그러한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으려면 올바른 지식이 필요하며 장로들은 적어도 그 정도의 지식은 가져서 그러한 독선을 견제할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또 어떤 교회 목사는 교회가 부흥되려면 목사의 권위가 강력하게 세워져야 한다고 설교하고 있다. 물론 목회자의 권위는 존중되어야 한다. 그럴 때 각 개인에게 유익이 있고 교회도 유익이 있다. 그러나 절대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권위가 되려면 오류가 없어야 하는데 그가 과연 오류가 없는 존재인가? 천주교는 세계에서 오직 한 명인 교황에게 그런 권위를 부여하는데 이것은 전 종교개혁자들이 한 입으로 반대한 교리다.
나는 자신의 권위를 절대화하려는 목자가 있다면 그의 곁을 속히 떠나라고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그는 십중팔구 거짓 선지자다. 그 밑에 있으면 결국 망한다. 예레미야 시대에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고 거짓 선지자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결국 다 망했다. 어떤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는 백성들이 그가 거짓선지자인줄 모르고 믿었을 뿐인데 거짓 선지자와 함께 망하게 한 것은 너무 하지 않느냐고 항변할 지 모르나 성경에 의하면 거짓 선지자만 망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말을 믿고 따른 사람도 똑같이 망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영적 권위는 하나님께서 세워주신다. 스스로 절대권력화 하려는 자는 주님의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마 23장 11절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우리는 좀 더 겸손해야 한다. 그리고 보다 더 양심적이 될 필요가 있다. 목사인 그가 양심적인 사람이라면, 목사인 자신도 탐욕과 음란함과 명예욕에 항상 유혹을 받을 수 있는 연약한 자임을 인정하고 겸손해져야 할 것이다. 목사는 결코 슈퍼맨이 아니다. 초인간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도 스스로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 앞에서 초인간적인 존재로 여김을 받고 싶어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위험스러운 일인가?
내가 알고 있는 형제 중에서 침례교회 목사로 꽤 유능하다고 인정받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형제가 수년간 뉴질랜드에 갔다오고 난 뒤 침례교회가 아닌 평신도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었다. 나는 의아해서 왜 교회를 옮겼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놀라운 대답을 했다. 기성교회에서 목회하면 사람들이 자신을 특별한 사람이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이 싫었다는 것이다. 자기도 똑같은 그리스도인이고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연약한 사람인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자기의 영적 성장에 치명적일 수 있고, 자기 양심도 허락하질 않았기 때문에 결국 그는 교회를 옮길 생각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는 뉴질랜드에 있는 평신도 교회들을 직접 경험하고 나서 더욱 확실하게 결단을 내릴 수가 있었던 것 같다.
사람이 주어진 특권을 포기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그 형제가 그러한 결단을 내린 것이 대단히 존경스러울 뿐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교회가 건전하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여러 명의 장로들이 필요하며 이 장로들이 교회를 성경의 올바른 교훈에서 이탈되지 않도록 서로 격려하며 경계해야 하며, 목사는 장로 중에 한 명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장로는 철저히 성경의 기준을 적용하여 뽑되, 한 개인에 의해서 임명되는 것이 아니라 교인 전체의 투표로 선택되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