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1. 22. 17:35ㆍ신학자료/1.신학자료
교회의 세속화와 새로운 종교개혁
류장현 (한신대 출강, 조직신학)
1. 들어가는 말
복음의 씨앗이 이 땅에 떨어진지 1세기가 넘었다. 그 동안 한국 교회는 "선교의 기적"이라고 평가받을 만큼 급성장을 했다. 그것은 고난 당하는 민중들의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희망과 교회 지도자들의 헌신적인 노력 그리고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앞만 보고 달려왔던 우리 자신의 모습을 냉철하게 되돌아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 왜냐하면 교회의 급성장에 따르는 부정적인 현상들이 이미 여러 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오늘날 목사의 권위와 신뢰는 땅에 떨어졌고, 교회는 이미 정신적, 사회적 영향력을 상실했으며,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의 자녀보다 더 세속적인 타락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 교회는 세상의 가치관과 문화에 깊이 물들어 있다. 그것은 단순히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변화라는 외적 요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도전에 올바로 대처하지 못하고 휩쓸려 가는 교회 자체에 일차적 책임이 있다.
이러한 교회의 세속화와 관련해서 이미 교회 갱신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부분 교회의 세속화에 대한 현상적 분석과 교회 갱신의 당위성을 주장하는데 머물렀다. 즉 교회 성장주의, 개인적 기복신앙, 개교회주의와 교파주의에 대한 비판과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으로서 제도적 변화를 요구했지 왜 교회에서 이러한 문제들이 일어났는지를 신학적으로 분명하게 해명하지 못했다. 그것은 교회의 세속화에 대한 임시적 처방이지 근원적 치유는 아니다. 문제는 겉 가지가 아니라 썩은 뿌리이다. 따라서 이 글은 교회의 세속화의 근본 원인을 신학적으로 규명하고 그 극복을 위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2. 교회의 세속화와 그 현상들
1) 세속화의 원인
a)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상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상실했기 때문에 세속화되었다. 그 동안 교회는 '온전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지 않았다. 예수가 선포한 것은 그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마4:23, 막1:14-5). 그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그는 제자들과 공동체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도록 명령했다(마10:7-8, 눅10:17-20. 요14:12). 그러나 교회는 이 복음을 선포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선포한 예수만을 선포했다. 즉 예수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가르침, 선포 그리고 치유를(마9:35)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셨지만 교회와 신학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그것을 가리키는 그의 손가락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에 대한 무익한 신학적 논쟁만을 했다. 몬타누스 운동을 이단으로 정죄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성령론적 열광과 종말론적 희망을 상실하고 기독론과 삼위일체에 대한 신학적 논쟁에 빠졌으며 마침내 성령의 출원 문제로 동서 교회로 분열되었다. 그들이 고백한 니케아 신조(325년)와 칼케돈 신조(451년)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고백이 빠져 있다. 그것은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상실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러한 교회 전통을 이어받은 16세기 종교개혁은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종교개혁은 궁극적으로 직접적인 하나님 체험에 근거한다. 종교 개혁자들의 '새로운 하나님 인식'이 종교개혁의 원인이며 추진력이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 나라'를 포기했다. 그것이 종교개혁의 한계이며, 라가츠에 의하면 "종교개혁의 타락"이다. 그밖에 모든 종교개혁의 한계는 이 하나님 나라의 포기와 관련되어 있다. 종교 개혁자들은 "예수를 바울로, 그 나라를 종교로, 제자직을 신학으로" 대치하였다. 그것은 엄청난 역사적 오류이며 그리스도의 사역의 완전한 변질이었다. 특히 루터의 종교개혁은 예수가 아니라 어거스틴적으로 잘못 이해된 바울에게로 되돌아 갔으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의인론으로 대치했다. 또한 세상적 나라와 영적 나라를 날카롭게 분리하는 루터의 두 왕국론은 하나님 나라를 개인의 영혼과 저 세상을 위한 희망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가 요구한 사회적 구원을 상실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한 인간의 노력과 행동은 무시되었다. 인간은 오직 기도와 희망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릴 뿐이다. 그와 함께 종교개혁은 자본주의 사회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고, 그 혁명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신학적 일"이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사회 개혁을 동반하지 않은 '종교' 개혁에만 한정되었고, 이러한 한계 속에서 토마스 뮌쳐와 재세례파들의 사회 개혁이 종교 개혁의 보충으로 나타났다.
한국 민중은 종말론적 희망 속에서 복음을 받아들였다. 복음은 그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의 희망이었다. 초기 한국 교회는 성령으로 충만한 종말론적 교회였으며 또한 민족적, 민중적 교회였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1920년대 이후 일본의 문화 정책과 회유 정책에 의해서 이 종말론적 희망과 성령론적 열광을 상실했으며 그 결과 내세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으로 사회 참여와 변혁을 등한시하는 "주일만의 교회"가 되었다. 그것은 한국 교회의 자기 정체성의 상실이었다. 그리고 한국 교회는 해방 이후 정교 밀착과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반공 이데올로기와 결합하여 점점 보수화되었으며, 1960년대 이후 조국 근대화의 구호 속에 시작된 급속한 경제 발전의 영향은 기복신앙을 더욱 심화시켰다. 여기에 로버트 슐러와 노만 빈센트 필 등의 적극적 사고 방식은 교회 성장주의와 기복신앙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한국 교회는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겪으면서 16세기 종교개혁이 이미 행한 것같이 하나님 나라와 세상을 위한 그의 정의를 포기하고 오직 저 세상의 희망만을 선포하며 개인의 영혼 구원에만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상실은 한국 교회를 세속화시켰다.
b) 초자연적 요소의 상실
하나님 나라는 현실적인 나라이며 동시에 초자연적인 나라이다. 참된 기독교적 사상과 삶은 이 하나님 나라의 양극적인 성격에 의해서 규정된다. 따라서 기독교적 신앙의 토대와 힘은 초자연적 원천에 의존해야 하며 현실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초자연적 세상에 확고하게 토대를 두고 있는 신앙만이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사적 힘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오직 이 초자연적 세계만이 자연적 세계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현대 철학과 자연과학의 영향으로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을 상실했으며, 이러한 초자연적 요소의 상실은 교회의 세속화를 촉진시켰다. 물론 합리주의에 기초한 자연 과학의 발달은 인간에게 새로운 문명의 혜택은 주었지만 인간 이성의 능력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을 미신으로 제거하려는 과학적 맹신주의로 말미암아 기독교는 사물에 대한 초자연적인 숙고와 의미를 추구하는 능력을 상실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역은 세상과의 화해를 통해서 변질되었고, 기독교는 역사주의와 종교적 상대주의에 빠졌으며, 신학은 세상적 문화의 척도를 기독교의 진리를 해석하는 척도로 받아 들였다.
성서의 초자연적 진리는 주로 자연과학적 세계관의 영향 아래서 숙고되었다. "옛 의미의 초자연적인 것이 폐지되었다. 하나님의 섭리를 세상의 자연적 질서로 인식하고 그것에 제한시키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기적은 이 세상에서 가장 의심을 가지고 관찰되어지는 낯선 것이 되었다……종교가 하나님을 대신하고, 종교적 발전이 하나님의 창조적 섭리를 대신하고, 종교적 천재성이 예언자들이 말한 성령을 대신하고, 자연법칙이 기적을 대신한다." 특히 실존주의적 성서 해석은 성서 안에 있는 모든 기적을 제거해 버렸고, 현대 신학은 기적의 신학적 의미만을 추구했다. 성서의 초자연적 요소는 그들에게 "성인이 된 시대"의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신화적 또는 종교적 세계관의 산물일 뿐이다. 또한 현대 신학은 세속화된 문화의 척도들로 기독교적 신앙과 삶의 모든 구성 요소를 해석하고 판단했다. 그리고 "이러한 척도에 상응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설명되었다. 따라서 신적 동인은 인간적인 것을 위하여, 절대적인 것의 동인은 상대적인 것을 위하여, 초자연적인 것의 동인은 단순히 자연적인 것을 위하여 제거되었다." 라가츠에 의하면 이러한 신학적 작업은 "사상의 타락"과 "현대 문화에 대한 기독교의 항복"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초자연적 진리의 상실을 통하여 철저히 세속화되었다. 초자연적 요소를 회복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우리가 진심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 창조주라면 왜 초자연적 요소를 믿지 못하는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행한 기적이 있고 불름하르트가 행한 기적이 있지 않는가? 오늘날 교회가 기적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프로이드와 융의 심리학이 신유의 은사를, 경영과 경제의 논리가 성령의 역사를 대신한다. 왜 우리는 성령의 은사 대신에 심리학과 경영학을 더 신뢰하는가? 그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 때문이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을 살아 계신 창조주로 고백하는 한 성서에 나타난 초자연적 요소들을 부인할 수 없다. 성서의 메시지와 그리스도의 사역이 가지고 있는 모든 초자연적 요소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통해서 다시 살아날 것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오늘도 역사 속에서 기적을 통해서 일한다. 우리는 성서의 초자연적 요소들을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의 나라의 도래와 관련해서 새롭게 이해해야 한다.
c) 하나님 체험이 없는 신앙
기독교 신앙은 교리와 신조에 대한 지적인 승인이 아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는 달리 체험의 종교이며,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 체험에 기초한다. 초대 기독교 공동체는 오순절 날에 성령 체험을 통해서 역사적으로 태동되었고, 예수의 제자들은 바로 그 날에 부활하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체험했다(사도행전 2장). 바울의 신학은 그의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체험을 전제하지 않고는 올바로 이해될 수 없다(사도행전 9:1-7). 성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 속에서 삼중적으로 체험한 하나님에 대한 증언이다. 구약 성서가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체험한 야훼 하나님에 대한 증언이라면 신약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체험한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증언과 그것을 나를 위한 구원의 사건으로 확증한 성령 체험에 대한 증언이다. 따라서 하나님 체험이 없이는 성서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성서 해석이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 체험과 우리의 하나님 체험과의 만남이다. 이때 비로소 성서는 문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다(히브리서 4:12).
하나님 체험이 없을 때 교인들은 선교의 열정과 확신이 없는 미지근한 신앙 생활을 하며 교회는 세속화된다. 오늘날 교회는 이 하나님 체험을 무시하거나 잘못된 하나님 체험에 빠져 있다. 올바른 하나님 체험은 성서의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다. 성서의 하나님은 교리 문답의 하나님과 이론으로 정교하게 장식된 신학의 하나님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 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다(출애굽기 3:6, 누가복음 20:37-38). 하나님은 살아 계신 분이기 때문에 교회나 신학에 갇힐 수 없다. 하나님은 그들보다 더 크신 분이시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또한 현실적인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삶과 무관하신 하나님이 아니다. 그는 인간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인간의 고통과 질고를 짊어지신 현실적인 하나님이다(출애굽기 3:7, 이사야 53:4-6). 성서는 이 현실적인 하나님을 야훼라고 부른다. 출애굽기 3장 14절에 의하면 야훼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그것은 독일어로 표현하면 "Ich bin da"이다. 여기서 독일어로 da라는 말은 장소적 의미와 시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Ich bin da는 '나는 그 때, 그 곳에 있다'이며 현실적인 하나님을 의미한다. 성서가 말하는 야훼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과 질고를 짊어지고 사는 삶의 자리 또는 우리가 슬플 때, 절망 가운데 있을 때, 병들었을 때, 실패했을 때 우리와 함께 하시는 현실적인 하나님이다. 마태복음 1장 23절에는 이 야훼 하나님을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로 해석했다. 현실적인 하나님은 고난 당하는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정의와 구원의 하나님이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열매 맺는 땅 즉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해방의 하나님이며(출애굽기 3:8-9), 또한 슬픔, 절망, 질병,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구원의 하나님이다. 이와 같이 성서의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 현실적인 하나님 그리고 정의와 구원의 하나님이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는 십계명의 제1계명은 바로 이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의미이다(출애굽기 20:1-6, 비교, 호세아 13:4). 우리는 바로 이 성서의 하나님을 우리의 삶 속에서 체험해야 한다.
오늘날 교인들은 하나님을 올바로 체험하지 못했거나 또는 이미 체험은 했지만 세상의 일로 넘어져서 에베소 교회처럼 "첫 사랑"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계시록 2:4) 신앙과 생활이 분리된 형식적 신앙 생활과 성장과 성숙이 정지된 화석화된 신앙 생활을 한다(계시록 3:15-16). 하나님 체험이 없는 목회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교회 성장이나 응답 받는 기도의 비결이 있는 것처럼 선전하는 집회나 책들에 의존하며 성령의 능력이 아니라 세상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하나님 체험이 없는 교회는 성장할 수 없으며 세속화될 수밖에 없다. 참된 교회의 성장과 신앙 생활은 먼저 목회자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또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교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도록 인도하는데 있다. 하나님 체험을 부정하는 것은 현재 성령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 망각증"이다. 오늘날 신앙의 문제는 '하나님은 존재한다. 그는 참으로 살아 계신 주님이시다'를 체험을 통해서 확증하는 것이다.
2) 세속화의 현상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지 않고 초자연적 요소를 부인하며 하나님 체험이 없을 때에 교인들의 영적 생활은 황폐해지고, 교회는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여 세속화된다. 그래서 교회는 성령의 능력이 아니라 인간적 재능을 선호하고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아니라 세상 나라의 권력을 추구하며 하나님이 아니라 물신을 숭배한다. 그리고 교회는 자신의 이런 추악한 세상적 모습을 감추기 위하여 위선자가 된다. 우리는 오늘날 정치적 메시아를 희망하며 세상적, 종교적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 목사, 신학자들의 무익한 신학 논쟁, 대형 교회를 지향하는 교회 성장주의, 큰 교회에서 많은 월급을 받는 목사를 영력과 능력이 있는 목회자로 평가하는 물량적 성공주의, 평신도 위에 군림하려는 목회자의 권위주의와 교회 행정 및 재정의 독점, 십자가의 고난이 없는 물질적 축복만을 강조하는 값 싼 은총의 선포와 이기적 신앙 생활, 직업화된 제자직과 목회자들의 윤리적 타락, 개교회주의와 교회의 사유화, 분파주의, 고난 당하는 민중과의 연대성과 교회의 연합 활동의 약화를 물질주의적, 쾌락주의적, 이기주의적 세상 문화에 물든 교회의 세속화로 규정할 수 있다. 세속화된 교회는 그 자신이 세상의 가치관과 문화에 깊이 물들어 있기 때문에 세상에 대하여 예언자적 사명을 담당할 수 없다. 이러한 교회는 오히려 사회적 고난을 외면하고 더욱 자신의 안위와 이익만을 생각하며 또한 영적 능력과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생명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정치적, 사회적 불의를 승인하고 묵인하는 민중의 아편이 된다. 따라서 세속화된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다.
교회의 세속화의 배후에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방해하고 위협하는 교회주의, 인간적 영웅주의(또는 자기 의) 그리고 종교적 이기주의(또는 맘몬주의)가 있다. 그것은 모두 하나의 원인에서 나온 하나님의 적대자들이다. 그 원인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믿지 못하는 '불신앙'이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적인 수단과 방법을 애용하고 하나님의 상실에서 오는 공허함을 교회의 겉치장과 물신 숭배로 채우며 마침내 자기 의에 빠져서 하나님의 적대자들이 된다. 우리는 교회 성장을 무조건 반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패배주의이다. 교회가 제도와 조직이 아니라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성장'하고 '성숙'해야 한다. 성장하지 않는 교회는 죽은 교회이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 성장주의의 배후에 놓여 있는 교회주의이다. 그것은 종말의 지연이 아니라 종말에 대한 오해에서 생겼다. 교회주의는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부정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의 거부이다. 교회주의는 교회를 하나님 나라의 진리의 소유자로 생각하며 영원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천년 왕국을 교회와 동일시하는 어거스틴을 지지하며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선포한다. 그 때문에 그들은 교회를 크게 짓고 아름답게 꾸미며 유명한 성악가와 비싼 악기로 성가대를 만들고, 헌금을 많이 내고 교회에 충성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 생활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관심사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교회와 종교적 의식이다. 그들은 예언자의 소리(이사야 1;10-17, 아모스 6:21-24, 미가서 6:6-8)를 듣지 않으며, 예수가 교회를 세우러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려 왔다는 것을 잊어 버렸다.
교회는 결코 진리의 소유자도 영원한 존재도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함께 소멸될 존재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파루시아 사이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하여 일해야 한다. 교회는 모든 조직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치는데 합당하도록 만들고 모든 재정을 이 일에 우선 사용해야 한다. 그것이 교회가 해야 할 가장 핵심적인 일이며 이 일 속에 교회의 정체성이 있다. 그리스도의 파루시아는 시작되었다. 그는 이미 문밖에 있다. 따라서 교회는 언제나 '출애굽의 교회' 또는 언제나 버리고 떠날 수 있는 '천막 교회'라야 한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태복음 6:33). 이것이 교회가 해야 할 첫 번째 과제이다. 물량적 성공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가장 무서운 적은 인간적 영웅주의 곧 인간의 자기 의 이다.
물량적 성공주의를 자랑하는 사람들은 '보라! 내가 몇 년만에 이렇게 큰 교회를 세우고, 우리 교회는 수 천명 또는 수 만명의 교인들이 있다'고 자랑한다. 그들은 자신의 종교적 재능을 과시하고 교회의 성장이 자신의 능력과 재능으로 이룩한 업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들도 그것이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주어진 특별한 종교적 능력에 의한 것으로 생각하여 그들의 종교적 재능을 존경한다. 그것은 자신의 의와 공로를 드러내는 신바리새파주의이다. 교회의 성장은 하나님의 승리이지 '나의 승리'가 아니다. 성공의 열매도 실패의 열매도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승리의 열매를 독점할 권리가 없다. 오히려 그 성공 앞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찬양하고 자신의 무력함을 고백해야 한다. 영광을 받을 실 분은 '내가' 아니라 오직 한 분 하나님이다. 이러한 고백이 없을 때 목회자는 교회를 사유화하고 세습한다. 그것은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자기 의와 관련된 또 하나의 악은 목회자의 정신적 독재와 권위주의이다. 일반적으로 한국 교회는 목사가 교회의 행정과 재정에 절대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비합리적인 주장을 하고 무리한 요구를 할지라도 반대를 하지 못한다. 오히려 교인들은 침묵을 순종의 미덕으로 간주하며 심지어 주의 종에게 반론을 펴는 일은 저주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목회자의 정신적 폭력이며 독재이다. 목사의 직분은 섬기는 직분이지 지배하는 직분이 아니다(마태복음 20:25-26). 목회자는 "타오르는 검을 지닌 천사"가 아니다. 교회의 주도권은 목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도로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목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말씀을 선포하는 일이다(사도행전 6:1-4). 그는 말씀을 선포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으로서 다른 은사를 받은 사람과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자이다. 목사가 장로 위에 장로가 집사 위에 있을 수 없다. 은사에 우열이 없는 것처럼 직분에 우열이 있을 수 없다. 목사는 권위가 있어야 한다. 그의 말이 영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권위는 목에 힘을 주고 교인을 지배하는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설교와 봉사와 영적 능력에서 나오는 섬기는 권위여야 한다.
종교적 이기주의에는 물질적 이기주의와 분파적 이기주의가 있다. 그들은 모두 한 가지 원인 곧 물신을 숭배하는 맘몬주의에서 기인한다. 종교적 이기주의는 성서적 참된 복(마태복음 5:1-11)이 아니라 단순히 자신의 물질적 축복만을 추구하며 더 나아가 물질적 축복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신앙과 하나님의 은혜를 판단한다. 종교적 이기주의는 물질적 축복과 하나님의 축복을 동일시한다. 그것은 불의하게 재산을 축적한 사람의 양심을 위로할지는 모르나 참된 축복의 개념은 아니다. 십자가 없는 물질적 축복은 맘몬의 축복이지 하나님의 축복은 아니다. 종교적 이기주의는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참된 신앙인이 아니라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이나 헌금을 많이 내는 사람에게 교회의 직분을 판다.
그리고 자신만이 하나님의 진리를 소유하고 있으며 구원의 방주라고 선포하면서 자신을 세상과 구별된 특별한 영역으로 만들고 같은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끼리 분파를 만들어 교회를 분열시킨다. 그들은 민족의 문제, 고난 당하는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교회의 연합 활동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오직 이익이 되는 일만을 찾아다닌다. 그들은 심지어 하나님의 은사를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하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은총이 아니라 돈으로 계산한다. 내가 이 만큼 헌금을 했으니까 하나님은 그것에 상응하는 반대 급부를 나에게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고 설교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자판기의 하나님'으로 만드는 우상 숭배이다.
교회주의, 인간적 영웅주의 그리고 종교적 이기주의에 사로잡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아니라 종교로서의 교회이다. 그런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방해하는 장애물로서 폐지되어야 한다. 불름하르트는 일찍이 교회 안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적대자들을 보았고 예수가 참으로 우리들 가운데 살아 있기 위해서 죽어야 하는 것은 먼저 교회라고 외쳤다. "죽어라, 그래야 예수가 산다". 세속화된 교회는 죽어야 한다 그래야 예수가 살 수 있다.
3. 새로운 종교개혁의 원리와 방법
1) 종교개혁의 원리
세속화된 교회는 인간의 자기 의를 들어내는 종교적 집단이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로서 해체되어야 한다. 여기에 종교개혁과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이라는 과제가 있다. 그러나 새로운 종교개혁은 단순히 16세기 종교개혁의 유산과 과제를 받아들이거나 초대 교회로 돌아가는 데에 있지 않다. 그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계시의 계속성을 부인하는 경직된 신앙을 반영한다. 하나님은 항상 그 시대에 필요한 말씀과 모습으로 자신을 새롭게 나타낸다. 따라서 우리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은 16세기 종교개혁의 시대와는 완전히 달라야 한다. "하나님은 실제로 시대를 넘어서 있지만 또한 시대와 함께 하신다. 그는 각 시대에 특별한 어떤 것을 말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종교개혁의 시대와 참으로 다른 어떤 것을 말해야 한다." 새로운 종교개혁은 우리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교회가 놓여 있는 토대를 전면적으로 바꾸는 일이며 그 일을 통해서 기존 교회와 완전히 다른 형태의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는 일이다. 이러한 새로운 종교 개혁의 원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새로운 종교개혁의 성격은 교회의 탈세속화에 대한 요구와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교회를 제도적으로 바꾸려는 순수한 "교회 운동", 종교 자체의 영역에서 추상적 내면성으로 가는 "신앙 운동"과 지식인의 상아탑에서 시작되고 소수의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신학 운동"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기독교의 세속화에 대한 반동이다. 그것이 새로운 종교개혁의 근본 성격이다. 그러나 새로운 종교개혁은 루터의 '종교' 개혁처럼 종교적 영역에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종교적 고난만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고난에서 인간을 해방하는 모든 삶의 영역의 혁명이어야 한다. 따라서 그것은 루터의 '종교' 개혁과 토마스 뮌쳐의 '사회' 개혁의 성격이 종합된 형태의 운동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새로운 종교 개혁은 교회의 세속화에 대한 반동으로서 종교적-사회적 혁명이 될 것이다.
둘째: 새로운 종교개혁의 출발점은 사회과학적 인식이나 세속화된 교회에 대한 단순한 비판과 부정이 아니라 직접적인 하나님 체험을 통하여 인식한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근거해야 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종교개혁은 "우리가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새롭게' 이해하고, '새롭게' 체험하는 바로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모든 예언자적 혁명의 근원이었다. 루터는 은혜의 하나님을, 칼빈과 쯔빙글리는 전능하고 거룩한 하나님을 체험했다. 그들의 이 직접적인 하나님 체험,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16세기 종교개혁의 원인과 힘이었다. 새로운 종교 개혁의 원인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신학과 교회를 넘어서 하나님 자신에게로 되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새로운 종교 개혁을 통해서 우리가 다시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될 것이다.
셋째: 새로운 종교 개혁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며 동시에 하나님 나라에 상응하는 '세계 가족 공동체'의 형성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아버지됨 안에서 인간의 형제됨과 하나님의 자녀됨이 실현된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Familia Dei)이다. 이 하나님 나라에 상응한 세계 가족 공동체는 모든 민족, 종교, 문화 그리고 이념의 장벽을 넘어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지배하고 모두가 서로 형제이고 하나님의 자녀인 사회를 의미한다. 새로운 종교개혁은 이러한 세계 가족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서 16세기 종교개혁처럼 바울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더 나가서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그것을 통해서 방법이 아니라 목적이 될 것이며, 저 세상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이 하나님 나라로의 귀환은 새로운 종교개혁의 의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직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준비하는 가장 아름다운 삶의 자세가 될 것이다.
2) 종교 개혁의 방법
새로운 종교개혁은 교회 제도의 개혁을 통해서 교회를 갱신하려는 정통주의적 방법과 "교회 안에 작은 교회"에서 경건한 사람들을 육성하고 그들의 자발적인 신앙의 헌신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교회를 개혁하려는 경건주의의 방법 그리고 기존 교회를 전면 부정하는 탈교회적 급진주의적 방법을 통해서 성취되지 않는다. 정통주의적 방법은 제도의 개혁에 치중하여 그 제도를 운영하는 인간의 변화를 간과했으며 -먼저 변해야 하는 것은 인간이지 제도가 아니다, - 경건주의적 방법은 기존 교회의 회유 때문에 라틴 아메리카의 바닥 공동체처럼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났으며, 급진적인 탈교회적 방법은 기존 교회를 전면 부정함으로서 뮌쳐의 종교개혁과 80년대 초 민중교회처럼 반개혁 세력의 강한 저항과 교인들의 지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솔직히 말해서 여기서 종교개혁의 구체적 방법을 서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미 새로운 종교개혁의 원리에서 밝혀졌듯이 새로운 종교개혁은 오직 하나님 체험을 통한 새로운 하나님 인식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새롭게 인식한 사람만이 그 방법의 비밀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시는 때에 자신이 선택한 사람에게 개혁의 과정 속에서 그 때 그 때 필요한 방법을 말씀하실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행위의 계시"를 통해서 역사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직접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교회 현장의 문제와 관련해서 세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a) 신학으로부터의 해방
교회의 세속화는 '신학의 빈곤'이나 '빈곤의 신학'에서 발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학이 교회의 세속화를 촉진시켰다. 따라서 교회의 세속화는 새로운 신학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신학으로부터의 해방'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다. 신학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특별히 정적이고 완성된 세계와 신성에 근거한 그리스 철학과의 결합의 산물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은 두 사상 세계의 혼합이다. 신학과 신학자는 언제나 하나님의 계시와 그의 나라의 복음을 신학화하고 교의화함으로서 그 생명력을 말살한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과 그의 나라의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모든 인간의 관심사가 아니라 전문가를 위한 일로 만들어 "하나님을 독점"한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과 인간의 직접적 관계를 파괴하며 특히 종교적 전문가(예. 신학자와 목사)와 평신도를 분리한다. 그것이 신학과 신학자들이 범한 잘못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는 사랑'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셨고 역사 안에서 행위의 계시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인간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에(요3:11) 개념과 이성, 논리와 체계가 아니라 오직 체험과 믿음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21세기의 신학의 주된 과제는 신학 속에 갇힌 그리스도와 교회를 해방하고 신학자들이 독점하고 있는 신학을 비전문화 하는 일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새로운 신학은 하나님과 그의 나라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신학과 신학자로부터 해방을 돕는 신학이 될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신학을 폐지하기 위하여 신학을 공부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대학 교육으로서의 신학 교육은 한계가 있다. 6년 동안의 신학 교육과 3년의 목회 경력 후 준목고시에 합격하면 목사가 되는 것과 평범한 의사가 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대학 교육으로서의 신학 교육은 전문가를 양성할 수 있지만 참된 목회자를 양육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육체적 노동과 영적 기도 그리고 학문적 지식을 종합적으로 교육할 수 있는 수도원식 신학 교육이 필요하다. 그래서 신학 교육이 단순히 신학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영성과 경건의 훈련과 지식을 함께 습득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직접적 관계성은 신학으로부터의 해방을 통해서 회복될 것이다.
b) 만인제사장직의 회복
성직 계급은 교회가 세상을 승인하고 권력을 추구하거나 권력과 결합된 모든 곳에서 나타나는 교회의 세속화의 산물이다. 그것은 종교와 권력의 잘못된 결합에서 발생했다. "권력으로서 종교와 종교로서 권력은 성직 계급을 생산하고 그것을 형성한다. 왜냐하면 그것의 본질이 바로 종교가 권력이 되고 권력이 종교가 되는데 있기 때문이다." 성직 계급은 자신이 진리를 소유한 자라는 교만한 생각에서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별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직접적 관계를 방해하는 종교적 분열을 의미한다. 성직 계급은 그 자신이 종교적 소유자이기 때문에 정신적, 종교적 소유가 만들어 내는 교만, 위선 그리고 불신앙이라는 근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종교와 권력의 잘못된 결합을 통해서 발생했기 때문에 오직 그 결합을 폐지함으로서만 극복될 수 있다. 그 결합은 하나님과 인간의 직접적 관계성이 회복될 때 파괴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루터가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글"에서 베드로 전서 2장 9절에 근거해서 주장한 만인제사장직을 교회 안에 정착시켜야 한다. 루터는 이 논문에서 세례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제사장이며 안수 받은 목사와 평신도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다. 슈페너는 루터가 말한 만인제사장직을 "영적 제사장직"으로 부르고 그들은 거듭난 사람들로서 세속화된 교회를 개혁할 수 있는 소금과 누룩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성직자의 특권은 이미 성령의 강림으로 폐지되었다. 구약 시대에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졌던 성령의 은사가 오순절 사건을 통해서(사도행전 2:1-13)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짐으로서 예언자와 제사장의 특권은 폐지되었다. 목회자와 평신도는 이제 지배와 복종의 관계,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고 받아들이는 주체와 대상이 아니라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만인제사장직이 교회에 정착될 때 봉건적-수직적 교회 질서는 민주적-수평적 교회 질서로 바뀌며, 교회의 운영은 투명해지고, 목사의 정신적 독재와 권위주의는 극복될 수 있다. 목회자와 평신도는 다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선교의 주체이다. 그들은 상하 관계가 아니라 서로 섬기는 자들이며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받은 성령의 은사는 우열이 있을 수 없다. 또한 다원화된 사회에서 목사가 팔방미인이 되어 모든 하나님의 사역을 담당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비효율적이다.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다같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선교의 주체가 될 때 교회의 세속화는 극복될 수 있다.
c) 성서의 부활
새로운 종교개혁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풍성해지고 살아 움직일 때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성서의 부활을 전제한다. 성서는 헬라 철학의 정적인 요소, 축자영감설의 하나님의 말씀과 문자의 동일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포기한 16세기 종교개혁의 한계 그리고 자연과학의 발전과 현대 철학의 영향으로 변질되었다. 성서는 이제 세상을 변화시키는 생명의 책이 아니라 죽은 문자가 되었다. 성서는 "성령의 내적 조명"을 통해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하며, 전문가들이 독점한 성서를 다시 민중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 때 성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서 불의한 세상을 변화시키는 혁명의 책과 가난한 자들을 위한 민중의 책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교회를 부흥시키는 방법도 교회의 세속화를 극복하는 방법도 성서에서 찾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성서와 씨름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데 오늘날 목회자들은 성서를 멀리하고 교회 부흥의 수단으로 교회 성장의 성공과 방법을 배우기 위하여 이곳 저곳에서 실시하는 세미나를 찾아다닌다. 그들은 소외 교회 개척과 부흥에 성공한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했고 성서에서 어떤 방법을 찾았는지를 보지 못하고 그들의 방법을 그대로 자신의 목회에 적용한다. 그것은 자신의 하나님 체험과 성서에서 교회 부흥의 모델과 방법을 찾아 목회에 적용하는 창조적 목회가 아니라 남의 결과만을 인용하는 인스턴트 목회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어떤 일에 어떤 방법으로 쓸 것인가를 진지하게 묻지 않는 직업적 목회자들이다.
특히 교회는 정보화 시대와 관련해서 젊은이들의 문화적 기호에 맞는 프로그램의 개발과 시설을 확보하여 청소년층에 선교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현대 문화에 대한 항복이다. 교회는 젊은이들의 문화적 기호를 끝없이 충족시켜 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교회의 본연의 사역도 아니다. 교회는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을 체험 할 수 있는 각종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여야 한다. 교회가 부흥하고 개혁되기 위해서는 먼저 먹고 마시고 오락을 즐기는 소그룹을 만들고 멀티미니어를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모이면 뜨겁게 기도하고 열심히 성서를 공부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하고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 안에 작은 교회"들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 교육을 통해서 교회 안에서 풍성해질 수 있다. 그것을 위해 주일 학교를 확대 개편해야 한다. 주일 학교를 어린이들만의 교육 기관이 아니라 모든 교인들이 참여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 생활을 배우고 익히는 교육의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목사와 교인들은 생각보다 훨씬 무지하다. 목회자는 6년 동안의 신학 교육으로 모든 교육을 마친 것이 아니다. 목회자들이 변화된 시대에 적응할 수 있고 새로운 신학을 배울 수 있는 재교육의 장을 마련하여야 한다. 교인들도 주일 설교를 듣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교회 교육을 통해서 기독교에 대한 지식과 신앙 생활에 대한 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를 통해서 풍성해질 수 있다. 설교는 자신의 지식이나 학문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현학적 설교는 오히려 영혼을 잠들게 한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고 강력하게 증언하고 대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설교는 설교자의 하나님 체험에서 나온다. 하나님 체험이 없는 설교자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 있는 설교를 할 수 없다. 따라서 목회자가 가장 먼저 할 일은 하나님을 체험하는 일이다.
교회의 세속화는 성서 연구, 교회 교육 그리고 설교 등을 통해서 교회 안에 하나님 말씀이 풍성해지고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성서 안에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사람들이 차고 넘칠 때에 극복될 수 있다. 그들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누룩의 역할을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를 변화시키는 강력한 수단이다. 성서는 민중을 잠재우는 아편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다이나마이트이다. 성서는 또한 신학과 목회에 대한 원전이다. 성서 보다 더 훌륭한 신학서와 목회서는 이 세상에 없다.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 안에서 살아 움직일 때 새로운 종교개혁은 완성될 수 있다.
4. 나가는 말
새로운 종교개혁이 지향하는 참된 교회 공동체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의 정의의 나라를 희망하는 '종말론적 공동체'이며 그것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신앙 공동체'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하여 세상의 악과 싸우는 '해방 공동체'이며 이 싸움의 무기인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는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은사 공동체'이다. 우리는 교회의 세속화를 극복하기 위하여 먼저 하나님 체험을 통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가져야 하며 하나님과 인간의 직접적 관계를 회복하여야 한다. 그것이 새로운 종교개혁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우리가 세속화된 교회를 비판하고 교회 개혁의 원리와 방법을 찾아낸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원리와 방법을 각 교회에서 실천하는 의지이다. 그것은 자기를 부인할 때 생긴다(마태복음 16:24).
한국 교회의 성장을 이끌어 오신 분도 하나님이며 오늘의 교회 세속화를 극복하시는 분도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하여 인간을 필요로 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부름에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하는 사람을 통하여 이 새로운 일을 하실 것이다. 그 사람은 모세와 엘리야처럼 '나는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라고 자신의 무능력을 고백하고 자신을 철저하게 죽이는 사람이다(출애굽기 3:11, 열왕기상 19:4). 그 때 살아 계신 하나님은 인간의 무능력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실 것이다. 이미 때가 찼다. 새로운 종교개혁의 요구가 엄청난 힘으로 폭발할 것이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이사야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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