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문안교회와 언더우드 목사

2008. 7. 18. 11:14교회사자료/7.한국교회사

 

새문안교회와 언더우드 목사

 새문안교회 창설자, 호러스 그랜트 언드우드(Horace Grant Underwood : 元杜尤(원두우))는 1859년 7월 19일에 영국 런던에서, 존(John)언더우드와 엘리자베스 그랜트 메리(Elizanbeth Grant Maire) 사이의 6남매 중 넷째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 존은 발명가였고 사업가였다. 등사용 잉크, 타자기 잉크리본 등을 명했고 직접 공장을 운영했다. 이같은 사업재능은...


어린시절의 가정환경과 성장기의 신앙적 배경

호러스는 어려서부터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사업으로 바빴지만 주일 오후시간만큼은 아이들과 함께 교회학교에서 보냈다. 그러나 그가 여섯 살 되던 해 가정에 불행이 닥쳐왔다. 그의 어머니와 동생이, 그리고 할머니가 한 해에 사망했을 뿐만 아니라 얼마 안 가 아버지의 사업까지 동업자의 배반으로 실패했다. 따라서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쳐왔고, 이에 그의 아버지는 신대륙으로 건너가 새로운 삶을 개척할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호러스의 나이 열 살, 즉 1869년 그는 두 살 위의 형 프레더릭 윌즈(Fredrick Wills)와 함께 프랑스 볼로뉴에 있는 소년 학교 기숙학교에 들어갔다. 이 학교는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학교였으나, 그들 형제는 그 안에서 개신교 신앙을 그대로 실천했고 그 점에 있어서는 방해받지 않았다.

이 학교에서 2년동안 배운 후, 그는 미국으로 이민가는 가족들과 합류하였다. 뉴저지에 있는 뉴더햄에 정착한 후 아버지는 다시 잉크공장을 차렸고, 점차 자리가 잡혀갔다. 뉴더햄에는 네델란드 개혁교회 교인들이 많았다. 언더우드 가족도 그들과 가까이 지내는 가운데 1874년 12월 전 가족이 개혁교회에 등록하였다. 따라서 언더우드 가문의 교파가 회중교회에서 개혁교회로 바뀐 것이다.

그의 가족은 그로브 교회에 다녔는데 그 교회목사인 메이븐(Maben) 박사는 호러스에게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식구들은 잉크공장 일에 매달렸으나 호러스는 학교에 다니는 특혜를 받았다. 즉 그는 저지시티에 있는 해스부르크 소년학원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메이븐 박사에게서 대학 입시를 위한 특별교수를 받아 1877년에 뉴욕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때 그는 뉴더햄에서부터 뉴욕까지 7마일을 걸어서 통학했고 밤 자정까지 공부하고 새벽 5시에 일어나는 근면성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그가 대학을 졸업하던 1881년 아버지가 별세함으로써 또 한번 큰 슬픔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근면과 성실함으로 자식들에게 본을 보였고 "경이로운 신앙과 열심을 가졌던 기독교인"으로서의 아버지의 신앙과 유산은 호러스에게 전수되었다. 즉 그해에 뉴브런즈위크 (New Brunswick)에 있는 네델란드 개혁신학교(Dutch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목회자로서, 나아가 선교사로서의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언더우드 한국에 들어온 계기

그러면 언더우드는 어떠한 계기와 경위로 한국의 첫 선교사로서 내한하게 되었던 것일까? 그가 선교사 꿈을 갖기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였다고 한다. 그가 열네 살 되던 해에 인도 사람의 강연을 듣고 인도 선교사로 갈 생각을 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대학, 신학교를 거치면서 더욱 확고해 졌으며 처음 그가 가려고 했던 선교지는 인도였다. 신학교에서 배우는 동안에도 선교사로서의 훈련에 목표를 두고 향후 선교 활동에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 1년여 의학을 별도로 배우는 등 나름대로 방향을 잡아나갔다. 신학교 재학중에 뉴브런위크에 처음으로 구세군이 들어왔는데 낯선 그들의 전도방법이 개혁교회 풍토에 어울리지 않았으나 언더우드는 흥미를 갖고 그들의 전도를 지켜 보았으며 어떤 때는 자신도 그들 속에 들어가 찬송을 부르며 전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미국 대학생들 사이에 일기 시작한 선교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런데 그가 본래 선교지로 인도를 택했다가 한국으로 바꾸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1882년 말에서 1883년 초에 이르는 겨울, 뉴브런즈위크신학교 학생 가운데 선교사를 자원한 학생들의 모임이 하나의 발단이 되었다. 이 모임의 한 회원이었던 울트만스(Altmans)가 한국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1882년 체결된 한미수호통상조약으로 은둔국이었던 한국이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는 사실과 1,200~1,300만 되는 인구에 아직 복음이 들어가지 못했으니, 앞으로 한국 선교를 위해 미국교회가 무엇인가를 해야 할 것이라고 하며, 누군가 갈 사람을 찾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1909년 언더우드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상한 바 있다.

내 입장에서 본다면, 나는 당연히 인도로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확신했기에 인도에 가기 위해 몇 가지 특별한 준비를 해 놓은 상태였으며 1년간 의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따라서 어떤 다른 인물이 그곳(한국-필자주)에 가도록 마련되어 있을 것으로 확신하였다. 내 나름대로 생각한 것은 그대로 밀고 나갔는데 1년이 지나도 아무도 자원하지 않았고 어떤 교회도 그곳에 보내려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해외 선교에 있어 지도급 인사들조차 한국에 나가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글을 쓸 지경이었다. 바로 그때 한 메시지가 나를 깨우쳤다. "왜 너 자신이 가지않느냐?" 그러나 인도 선교를 특별한 소명으로 알고 그것을 위해 몇몇 특별한 준비를 한 것 등이 떠올라 쉽게 용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러던 그가 한국을 선교지로 결정한 것은 꼭 1년간의 고민 끝이었다. 그러나 한국 선교사로 파송되는 일도 생각했던 것처럼 쉽게 풀리지는 않았다. 그가 소속된 개혁교회 본부에 2차에 걸쳐 한국 선교 청원서를 냈으나 자금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으며, 이어 미국북장로회 해외선교부에도 같은 요청을 두 번씩 냈으나 이 역시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거절당하였다. 결국 그는 미국에서 목회자로 일하거나 인도 선교사로 가는 것 중에 한 길을 선택해야겠다는 본래의 계획대로 돌아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뉴욕에 있는 한 개혁교회에서 1년에 1,500달러 조건으로 그를 청빙했던 것이다. 언더우드는 인도 선교의 꿈이 좌절된 상태에서 이같은 청빙을 받자 이에 응하기로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드는 또다시 신비한 음성을 들었다.

나는 그런 방향으로 마음을 굳히고 뉴욕교회에 청빙 수락 편지를 써서 봉토에 넣어 막 우체통에 집어 넣으려는 순간, 이런 음성이 들려오는 듯싶었다. "한국에 갈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한국은 어떻게 될까?"나는 편지를 도로 집어넣고 한국에 가기로 다시 한번 결심한 후 센터스트리트 23번지(옛 장로회 선교본부 건물)로 방향을 돌렸다.

언더우드가 다시 마음을 정하고 미국북장로회 해외선교부를 찾아갔을 때엔 총무가 바뀌어 있었다. 훗날 한국 선교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은 엘린우드(F.F. Elinwood) 박사가 총무로 부임하여 그를 맞이하였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미 엘린우드 앞에는 브루클린의 평신도 맥윌리엄스가 한국선교에 써달라고 보낸 1,250달러가 헌금되어 있었다. 이로써 언더우드가 신비한 음성을 들었다는 한국 선교는 현실로 구현되었던 것이다. 그때가 1884년 7월 28일, 선교부가 상해에 있는 알렌에게 한국 파송을 허락한다는 전보를 친 지 6일째 되는 날이었다. 1884년 봄에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그 해 여름에 한국 선교사로 정식 임명받은 것이다.

한국 선교사가 된 언더우드는 그 해 여름을 영국에서 보냈다. 그의 친척들 가운데 에드워드 존스(Edward Jones) 목사가 있었는데 그는 런던선교회 임원이었다. 그를 통해 한국이 어떤 곳인지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고 특히 1866년의 토마스 목사 순교사건에 대해서도 설명을 들었다.

1884년 11월에 언더우드는 네덜란드개혁교회(Dutch Reformed Church) 계통 뉴브런즈위크 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시카고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12월 16일 일본을 향해 출발했다. 여행용 가방 하나, 타자기 한 대, 대형 카메라 하나가 그의 짐 모두였다.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한 언더우드는 약 3개월간 일본에 머물면서 여러 사람을 만났다. 주로 헵번(J.C. Hepburn) 선교사 사택에 머물면서 미국성서공회의 루미스(Henry Loomis)에게서 최근 한국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한 이수정도 만났다. 주로 헵번(J.C. Hepburn) 선교사 사택에 머물면서 미국성서공회의 루미스(Henry Loomis)에게서 최근 한국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한 이수정도 만났다. 특히 이수정은 그의 한국어 어학선생 노릇까지 하였다. 1884년 12월 4일의 갑신정변 실패로 일본에 망명한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파 인사들도 만났다. 한편 주한미국공사 푸트(Lucius H. Foote, 福德)로부터 한국의 정치상황이 정변으로 평온치 못하므로 입국을 연기하라는 개인적인 충고를 받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귀중한 동지를 만났으니 그는 자신과 같은 목적을 갖고 한국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G. Appenzeller)였다. 이 둘은 한국 개신교 선교의 개척자란 칭호를 함께 받으며 둘 사이의 돈독한 우정관계를 끝까지 유지하였다.


두 H.G. 의 우정 -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Horace Grant Underwood 와 Henry Gerhard Appenzeller)

이 두 사람은 하나는 장로교 선교사, 하나는 감리교 선교사로 서로 소속은 달랐으나 여러 가지 면에서 공통점이 많았다. 선교사들 사이에서 두 사람은 "위대한 H.G.들"이란 칭호를 받았다. 둘의 이름(First and Second name) 머리글자(Initial)가 모두 'H.G.'였다는 데서 온 말이다. 둘은 모두 열정적이면서 복음적인 목회자였다. 이들은 모두 한국 선교에 자기 생을 바쳤고 선교활동은 2세에게까지 연결되었다. 둘의 선교활동은 장로교·감리교 양 교회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아펜젤러는 1858년생이다. 언더우드보다 한 살 위인 셈이다. 독일·스위스계로 펜실베니아에서 출생했다. 본래 개혁교회 교인이었으나 18세 때 중생(重生)을 체험한 후 3년 뒤에 감리교회로 교적을 옮겼다. 프랭클린마샬대학에 재학할 때부터 선교사 훈련을 받았으며 1882년에 드루신학교에 입학하면서 해외 선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883년 가을 하트포드에서 전 미국 신학생 수양회가 열렸는데 이때 언더우드와 함께 아펜젤러도 자신의 신학교 대표로 참석했다. 이 모임은 해외선교자원운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모임에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만나거나 친교를 맺은 것 같지는 않다. 아무튼 한국 개척 선교사가 될 신학생 후보는 하트포드에서 처음 함께한 셈이다.

언더우드와 마찬가지로 아펜젤러 역시 첫 선교 대상지는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었다. 그러나 한국을 선교지로 결정하였던 동창생 워즈워드(J.S. Wadsworth)가 개인 사정으로 한국행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자, 아펜젤러가 대신 한국으로 오게 된 것이다. 1884년 9월 그는 미국북감리회 해외선교부 총무 리드(J.M. Reid)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갈 것을 요청받았다. 고민 끝에 그는 한국을 택하였고 그 해 12월 20일에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결혼한 지 3일 만이며 미국북감리회 해외선교부에서 의사인 스크랜턴(W.B. Scrnaton)을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고 목사 안수를 준 지 16일째 되는 날이었다.

아펜젤러는 1885년 2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부인과 함께 일본에 도착하여 1개월여 머물면서 매클레이를 비롯한 일본 주재 선교사들과 한국인 망명객들을 만나 그들에게 한국어를 배우는 등 언더우드와 같은 체험을 하였다.


언더우드 한국에 들어오다

이처럼 별개의 선교본부에 의해 한국에 파송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1885년 3월 31일 나가사키를 출발, 한국을 향하였고 부산에 잠깐 들렀다가 1885년 4월 5일 오후 3시에 마침내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다.

둘은 같은 날 함께 한국에 왔다. 이후 둘은 서로 협력하며 각자의 활동을 추진해 나갔다. 서로"언디"(Undy), "아펜"(Appen)이란 애칭으로 부르며, '언디'는 새문안교회를, '아펜'은 정동교회를 창립했던 것이다.


언더우드의 새문안 교회창설

만주에서 시작된 한국인의 기독교 신앙운동은 의주를 거쳐 국내로 연결되었고 서상륜, 서경조 형제에 의해 서울과 소래 두 곳에 많은 세례지원자들을 확보해 놓고 있었다. 이와 함께 1882년의 한미수호통상조약 체결로 미국장로교 선교부는 한국선교에 관심이 고조되었다. 그 결과 부르클린의 한 평신도인, 맥윌리엄스의 선교기금 헌납으로 미국 북장로교회는 한국선교에 구체적으로 착수하게 되었고 의료선교사로 알렌을, 복음선교사로 언더우드를 임명, 한국에 파견하였으니 그에 의해 새문안 교회가 창설되었다.


언더우드의 발자취 요약(연대별)

1859. 7. 19 영국런던에서 John Underwood 와 Elizabeth Grant Maire 사이의 6남매중 넷째로 출생

(1866. 한국 입국한 토마스 목사 순교)

1869.(10세) 두 살 위인 형 Frederick Wills 와 함께 프랑스 볼로뉴 소년 기숙학교에서 2년간 공부

18**  미국으로 가족 이민(뉴저지 뉴더햄)

1874. 12. 뉴더햄 그르브교회(네덜란드 개혁교회)에 전가족 등록.

그르브교회의 목사인 Maben 박사의 특별한 관심과 애정으로 해스브루크 소년학원에서 공부와 Maben 박사로부터 대학입시 특별교습

1877. 뉴욕대학 입학

1881. 뉴욕대학 졸업.

동년 아버지 별세.

동년 New Brunswick 의 네덜란드계 혁신학교(Dutch Reformed Seminary) 입학.

18** 1년여간 의학을 별도로 배움

1882. 한미수호통상조약으로 한국이 문호 개방

1882. 1882년 말에서 1883년 초에 이르는 겨울, New Brunswick 신학교 선교사지원 학생모임에서 Altmans 가 한국에 관한 논문 발표

18** 1년간 고민 끝에 한국을 선교지로 결정하고 소속 개혁교회 본부에 2차에 걸쳐 한국 선교 청원서 제출했으나 자금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함

18** 미국북장로교회 해외선교부에도 한국 선교 청원서를 두 번 제출했으나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거절당함

18** 뉴욕의 한 개혁교회의 청빙이 있었으나 신비한 음성을 듣고 한국으로 방향을 돌림

18** 미국북장로회 해외선교부에 부르클린의 평신도 맥윌리엄스가 한국 선교를 위해 1,250달러 헌금

1884. 신학교 졸업. 한국 선교사로 정식 임명됨

18** 런던선교회 임원인 친척 Edward Jones 목사로부터 한국에 관한 상세한 설명과 토마스 목사의 순교사건(1866년) 등에 대해서 들음.

1884. 11. 네덜란드 개혁교회 계통의 뉴브런즈위크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음.

1884. 12. 16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으로 향함

일본요코하마의 3개월 체류하는 동안 J.C. Hepburn 선교사 사택에서 미국성서공회의 Henry Loomis 로부터 한국상황을 설명 들었으며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한 이수정을 만남.

갑신정변 실패로 일본에 망명중인 개화파인사 김옥균, 박영효등을 만남.

자신과 같은 목적으로 한국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감리교선교사. H.G. Appenzeller를 만남

1885. 3. 31 나가사키를 출항, 한국으로 향하여 부산에 잠깐 들르다.

1885. 4. 5 오후 3시 제물포항에 도착.

1887. 9. 27 새문안교회 창립.

초기 기독교 접촉과 전래 가능성

한국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온 때가 어제였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분명한 대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다만 서양인 선교사들이 내한하기 훨씬 이전에 이 땅에 이미 복음의 접촉이 있었음은 현재 여러 측면에서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그 중 역사적으로 가장 멀리까지 소급되는 설(說)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른바 '경교(景敎)의 한국 전래설'이다.


경교란 네스토리우스파(Nestorianism) 기독교의 중국 한자음 명칭이다. 주후 431년 에베소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단죄되어 로마에서 추방당한 네스토리우스파는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으며 동방으로 선교사들을 파견하였다. 당시 동서무역로였던 비단길을 따라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들이 중국에 도착한 것은 635년, 곧 당(唐)나라 정관(貞觀) 9년이었다. 알로펜(Alopen ; 阿羅本)을 단장으로 한 선교단은 당의 수도 장안(長安)에 도착하여 태종(太宗)의 환대를 받았다. 태종은 장안에 네스토리우스파 선교단을 위해 대진사(大秦寺)란 사찰을 지어주고 전속 승려 21명을 배속시켜 주었다. 이 네스토리우스파는 처음 페르시아에서 왔다 해서 페르시아의 한자음을 따 파사교(派斯敎)로 불렀으며 로마제국을 상징하는 '대진'(大秦)을 붙여 대진경교(大秦景敎)라 불리기도 했다. 경교란 '큰 종교'란 뜻이다$004

이후 200여 년 간(AD 600~800)네스토리우스교는 경교라 명칭하에 중국에서 상당하 교세로 발전했었다. 즉 불교이 형식과 거의 동일하게 목탁을 치며 예배를 드렸고 불경(佛經)의 형태를 빈 여러 종류의 한문 교리서를 제작하였다. 아무튼 경교는 조로아스터교, 이슬람교(回敎)와 함께 삼이사(三夷寺)라 하여 서방에서 유입된 종교로 중국 안에서 상당한 교세로 번창하였다.


네스토리우스파가 경교란 이름으로 중국에 정착하여 세력을 키워가던 무렵은 우리나라가 당나라와 밀접한 교류가 있었던 삼국시대 말기에서 통일신라 초기에 이르는 시기(7~8세기)라는 점에 주목할 때 그 전래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과 통일 이후에 정치, 사회,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당나라와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해마다 학승(學僧)을 당나라에 보내어 수학하게 하였고 이들이 귀국할 때에는 불경, 불상, 사리 등 불교관계 물품들과 한께 중국에서 생겨난 새로운 학문의 신경향과 사상을 들여왔다. 바로 이러한 점등을 고려할 때 당시 중국 내에서 그 위세를 크게 떨치고 있던 경교가 들어오지 않았겠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아직도 학문적인 결론을 얻지 못한 상태이지만 1928년 고구려 영토였던 압록강 연변의 만주 안산(鞍山) 지역에서 경교도들의 것으로 보이는 무덤에서 출토된 와제(瓦製) 십자가라든지, 1956년 경주에서 발굴된 십자형 돌과 마리아상 그리고 도에 십자가 등은 경교의 한국 전래 가능성을 시사해 주는 유물들이라 하겠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우리나라의 복음 접촉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개연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확실하고 분명한 접촉은 임진왜란(1592~1598) 중에 이루어졌다. 이 전쟁은 일본의 무력 침략으로 인해 엄청난 인명(人命)과 재산의 피해를 입은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이 전쟁을 통해 한국인은 기독교에 접하게 되었다.


두 가지 면에서 그 접촉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이 전쟁 중에 최초로 우리나라에 기독교 성직자가 발을 들여 놓았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에서 한국인들의 기독교 개종이 이루어졌다는 보다 적극적인 의미이다. 이미 일본에는 1549년 예수회 창설자의 한 사람인 프란체스코 사비에르(Francesco Xavier)가 도착하여 선교에 착수, 많은 영주(領主=大名)들을 교인으로 얻고 있었다. 예수회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한 반(反)종교개혁운동으로 일어난 천주교신앙 운동의 결과를 창설된 선교단체이다. 예수회는 우세한 서구의 문물을 일본에 전달하여 호응을 받았으며 '기리시단(切支丹 또는 吉利之丹)이란 이름으로 일본에 뿌리를 내렸다.


임진왜란 중 선봉장으로 한국을 침략한 왜장 고니시(小西行長)가 바로 기리시단 다이묘(大名)였다. 고니시 휘하에 잇던 소오(宗義智), 아리마(有馬信), 오오무라(大村喜前), 마츠우라(松浦鎭信)등 장군들도 기리시단이었다. 고니시는 한국에서 전쟁을 수행하며 휘하 장병들의 신앙지도를 위해 본국(日本)에 있던 예수회 신부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를 불러들였다. 세스페데스는 1593us 12월 27일 응천(能川, Comgai, 진해 부근)에 발을 들여 놓음으로써 한국에 입국한 최초의 성직자가 되었으나, 고니시와 경쟁관계에 있던 불교도 장군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방해로 1959년 6월 본국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2년 뒤인 1597년 3월 다시 한국을 찾은 세스페데스는 1년 6개월 도안 왜군 진중에서 종군사제로 활약하였으나, 일보군의 종군사제였던 만큼 피침략국인 한국에 대한 선교활동은 기대할 수 없었다. 침략군인 일본군의 사기를 양양시켜주기 위한 성사(聖事)에는 성과가 있었으나 침략군인 왜군에 속해 있고 더욱이 이상한 모습을 한 서양인에게 한국인은 누구도 접근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인에 대한 선교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성(城)에서 성으로 용감히 돌아다니면서 자연의 도리에 어긋나는 모든 질서없는 행동과 싸우면서 나쁜 버릇을 바로잡고 성사를 행함으로써 일본인 교우들의 기운을 북돋아 주었을뿐더러 이교도이던 많은 일본 군사에게도 세례를 주었다."고 하지만 한국인에 대해선 전쟁 중 포로가 된 한국인들을 너무 가혹하게 다루지 말라는 충고 정도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결국 세스페데스는 우리나라에 들어온 첫 성직자였다는 사실 외에는 별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일보에 끌려간 한국인 포로들 가운데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생겨남으로써 보다 적극적인 의미의 복음 접촉이 이루어졌다. 7년에 걸친 전쟁 중 일본에 잡혀간 한국인은 대략 6~7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들 중에 전후 양국의 협정으로 귀한한 포로는 7천 명 정도밖에 안된다. 결국 6만 명 이상의 한국인은 마카오·인도 방면에 팔려가거나 일본에서 노예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들 중 소수는 재질(才質)을 인정받아 대접을 받으며 안락한 생활을 할 수도 있었고 좋은 후원자를 만나 고생을 면하기도 했다.


주로 기리시단 가정으로 팔려간 포로들이 그같은 혜택을 입을 수 있었다. 고니시의 딸인 마리아 부인이 고니시에게서 선물로 받은 한국인 2명을 신학교에 보내 성직자로 키운 것이 그 예이다. 임진왜란 후 일본에 끌려간 한국인들 가운데 10년 동안 세례받은 자가 7천명에 이르렀으며, 그 중에는 1606년 이탈리아 로마까지 간 안토니오 꼬레아 같은 인물도 포함되어 있었다.$017


이러한 한국인 교인들의 신앙은 1611년 이후 100여 년 간 계속된 일본 기독교 박해시대 중에 순교의 꽃을 피웠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이후 정권을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1611us 기독교 금압령을 내려 선교자들을 추방하고 교인들을 체포하였다. 이후 크고 작은 박해가 한 세기 동안 계속되었는데 수많은 순교자가 이 기간 중에 나왔다. 이들 순교자 가운데 뚜렷이 '조선인'으로 표기된 인물은 21명에 이르며 그 중 10명은 1867년 순교 복자(福者)의 칭호를 받기까지 했다. 이들은 대부분 나가사키(長崎) 지방에서 순교하였는데 예수회 전도회장이었던 가이오(Caio), 예수회 수사(修士)였던 권 빈센트(權 Vincent) 등 유력한 위치에 있던 인물들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비록 일본에서 이루어진 일이긴 하지만 첫 한국인 고백 교인이 탄생했고 그 중에 상당수 순교자까지 나왔다는 점에서 임진왜란은 한국 교회사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천주교의 수용과 박해

일본에서 싹트기 시작한 한국인들의 신앙은 그대로 한국에 전달되지 못했으나 17세기 중엽부터 중국을 통해 유입되기 시작했다.


일본 선교에 성공한 예수회는 바로 이어 중국 선교에 착수했다.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선구자였다. 1582년 중국에 도착한 그는 중국 문화를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중국인이 원하는 중국식 방법을 쓰며 상류층에 접근하였다. 서양 문명의 이기(利器) 제작을 통해 중국인들의 호감을 샀던 것이다. 그 결과 1601년에는 명(明)의 수도 북경에 들어가 신종(神宗)으로부터 선교사 체재 허락을 받았다.


리치 이후에 들어온 예수회 선교사들도 같은 선교정책을 갖고 우선은 시계·지도·망원경·분수대 같은 이기들을 제작하는 한편 서구 과학을 내용으로 담은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를 찍어 냈다. 이처럼 기독교에 대한 호의적 반응을 얻어가면서 기독교(천주교) 교리를 담은 책들을 조심스럽게 찍어 내기 시작했다. 1603년 북경에서 간행된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가 그 대표적인 저술이다. 이들 한역서학서들이야말로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학자층에게 소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같은 선교사들의 업적, 서양의 이기들과한역서학서들이 한국에 유입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전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당시 한국과 중국은 밀접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명(明) 왕조 이후 들어선 청(淸)국과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을 통해 굴욕적인 관계를 맺은 것이다. 한국에서 파견되는 정기 사절단만도 일 년에 네 차례였고 그 외에도 부정기적인 사절단이 수시로 북경을 방문하였다. 단순한 외교적 업무뿐만 아니라 양국간의 경제 및 문화교류도 이 사절단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1631년 정두원(鄭斗源)이 예수회 신부 로드리퀘즈(J. Rodriques)를 만났으며 병자호란 볼모로 청에 잡혀갔던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북경에 머무는 동안 아담 샬(Adam Schall)과 접촉하였다. 아담 샬은 소현세자를 통해 한국 선교를 실현시키려는 꿈을 갖기도 했으나 귀구 직후 소현세자의 급작스런 죽음(1645)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17세기 초부터 꾸준히 유입된 한역서학서들은 한국인 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었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천주교 신앙이 자연스럽게 퍼져 나갔다. 초기에 유입되어 읽힌 대표적인 한역서학서들로는 《천주실의》를 비롯하여 《칠극》(七克), 《직방외기》(織方外氣), 《교우론》(交友論), 《진도자증》(眞道自證), 《서학범》(西學凡), 《천학초함》(天學哨艦) 등을 꼽을 수 있다.


한역서학서를 통해 서구의 문명과 함께 천주교라는 새로운 종교의 실체를 접하게 된 한국 유학자들은 크게 세 가지로 입장이 나뉘었다. 첫째는 벽위(闢衛)의 입장에서 적극 배격하는 태도였으니 신후담(愼後聃)·안정복(安鼎福)·이헌경(李獻慶)·유몽인(柳夢寅) 등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둘째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의 입장이라 할 수 있는데 동양의 도, 즉 유교의 기본 교리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서양의 이기(利器)들을 수용하자는 태도이다. 북학파(北學派)로 분류되는 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등을 꼽을 수 있다. 셋째는 서학을 전면 수용하자는 입장인데 중부 근기(近畿) 지방의 남인 계통 유학자로서 이벽(李檗)·권일신(權日身)·이가환(李家煥)·정약전(丁若銓)·정약용(丁若鏞)·정약종(丁若鐘)·이승훈(李承薰)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특히 서학파(西學派)란 칭호를 받고 있었는데 서구의 과학기술뿐 아니라 천주교 신앙과 윤리를 전하고자 노력하였다.


정치적인 색채를 따지자면 남인(南人) 계열에 속하는 이들 서학파 유생들 가운데 보다 적극적으로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려는 움직임이 18세기 중엽 이후 나타나기 시작했다. 1770년경 홍유한(洪儒漢)이 개인적으로 소백산 밑 구들리에 들어가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며 죽기까지 신앙생활을 하였다. 거의 같은 시기에 이벽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학자들이 경기도 광주에 있는 주어사(走魚寺)와 천진암(天眞庵)에서 천주교 교리 연구를 위한 강학회(講學會)를 열었다. 이벽·권철신·권일신·정약종·정약전·이승훈·이가환 등이 참석한 강학회는 연구뿐만 아니라 기도와 묵상, 재계(齋戒)를 지키는 신앙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들은 서학서를 통해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고 그것을 실천하던 중 보다 정확한 신앙의 실체를 알고자 이승훈을 북경에 파견했다.


1783년 가을에 동지사의 일행으로 북경에 들어간 이승훈은 그곳에서 북천주당의 그라몽(Louis de Grammont) 신부에게 1784년 2월에 세례를 받고 그 해 봄에 돌아왔다. 이승훈이 북경에서 보고 온 천주교회의 직제를 모방해 한국인 교인들끼리 주교·사제 등을 맡아 교회 조직을 갖추었으니 소위 모의교회(模擬敎會) 또는 가성직(假聖職)시대의 천주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이로써 한국 천주교회는 선교사들의 인도 없이 한국인들의 구도(求道)행위에 의해 자생적(自生的) 교회로 시작되었다. 이 점은 한국 기독교 사상의 가장 큰 특징의 하나이며, 훙 살펴볼 개신교의 교회 창설도 같은 양상을 띤다.


이승훈·이벽·권일신 등이 중심이 된 자생 천주교회는 중인(中人) 김범우·최인길·최창현·지황 등을 입교시켜 신앙의 저변확대를 꾀하는 한편 충청도·전라도에까지 전도하였다. 1794년 말에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하며 교회 조직과 교인들의 신앙지도에 힘쓰기 시작함으로써 그가 입국한 당시 4천 명에 불과했던 교인수는 1800년에 이르러 1만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의 역사는 수난과 순교의 역사였다. 천주교가 수용된 영·정조 시대 이후 대원군 시대에 이르기까지 100여 년 동안 크고 작은 박해사건이 10여차례 있었다. 1785년 봄 이승훈을 비롯한 천주교인들이 서울 명례방 김범우(金範寓)의 집에서 집회를 갖던 중 정부 관리에게 체포되어 김범우 등이 죽음을 당한 을사추조적발(乙巳秋曹摘發)사건을 필두로, 1791년 교인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이 조상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워버린 일로 체포되어 순교한 신해교난(辛亥敎難), 1795년 주문모를 체포하려는 정부에 대항하여 유유일(尹有一)·최인길(崔仁吉)·지황(池璜) 등이 스스로 목숨을 희생시킨 을묘교난(乙卯敎難) 등이 비교적 초기에 당했던 소규모 박해였다. 그 후 1801년 순조의 즉위와 함께 전국적인 범위로 확산된 신유교난(辛酉敎難)으로 천주교는 호된 시련을 겪었다.


주문모 신부 이하 이승훈·정약종·최창현·홍교만·이존창·김건순·강완숙·황사영 등 지도급 인사 100여 명이 순교의 피를 흘렸다. 이 외에 400여 명 교인이 유배됨으로써 천주교 조직은 와해의 위기를 맞이하였다.


이후에도 정부의 천주교에 대한 금압정책은 변하지 않았으며 교회를 재건하려는 천주교이들과 이를 분쇄하려는 정부 당국 사이의 갈등과 마찰은 계속되었다. 1811년과 1825년 천주교인들은 북경 주교와 로마 교황에게 선교사 파송을 요구하는 서한을 발송했고, 이에 1831년 로마 교황에 의해 조선교구가 중국 북경교구에서 독립되어 설정되었다. 이후 파리외방전교회가 한국 선교를 담당하면서 프랑스인 신부들이 입국하여 활약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대응책도 강경하여 1839년에 앵베르(L.M.J. Imbert) 주교 이하 모방(P.P. Maubant), 샤스탕(J.H. Chastan)등 외국인 신부와 정하상·유인길·조신철 등 천주교 지도자들이 순교한 기해교난(己亥敎難)이 일어났다. 이어 1846년에는 최초의 한국인 신부 김대건(金大建)이 순교한 병오교난(丙午敎難)이 일어났고, 1866년 대원군에 의한 병인교난(丙寅敎難)이 일어난 이후 10년에 걸쳐 외국인 신부 9명과 남종삼(南鐘三)·홍봉주(洪鳳周)·장주기(張周基) 등 8,000여 명이 순교하는 한국 천주교 최대의 박해가 일어났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1886년 한불조약(韓佛條約)이 체결되면서 정부 차원에서는 종식되었으니 1784년 이승훈이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영세를 받음으로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100여 년 간 한국 천주교는 박해와 수난 속에서 자란 셈이다. 박해 속에 뿌리를 내린 한국 천주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성을 갖고 있다.


첫째, 한국 천주교는 한국인들 스스로에 의한 자생교회로 출발하였다. 선교사들의 선교행위가 전제되지 않은 한국인들의 자발적인 구도행위는 복음에 대한 한국인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것을 개신교의 경우에서도 거듭 확인된다.


둘째, 박해를 받으면서 나타난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는 신앙의 대중화이다. 처음 천주교를 믿은 유식·양반 계층은 경기도·중부 지역에 국한되었으나 점차 전라·경상, 멀리는 북부 지역의 산간·농촌 지방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즉 한국 천주교 역사는 상류층에서 하류층으로, 중앙에서 지방으로 확산되는 형태로 진행되었으니, 이 점 으 후의 개신교 경우와 상반된 현상이었다.


셋째, 신앙의 대중화에 따라 한글 보급이 확대됨은 물론 새로운 서민문화가 생겨났다는 점이다. 즉 일반 서민의 글인 한글을 이용한 교리서적을 발간해 냄으로써 한글문화를 창출해 냈고 서민들의 노래곡조를 딴 4·4조의 천주가사(天主歌辭)는 근대 가사문학의 한 흐름을 계승한 거이기도 하다. 종래의 양반·유식 계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유교문화의 한계를 탈피한 새로운 형태의 서민문화 형성이 천주교 신앙운동으로 가능하게 된 셈이다.


이같은 천주교회의 한국 선교 역사는 천주교의 역사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으니, 19세기 초부터 전개되기 시작한 개신교의 한국 선교와 직간접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귀츨라프의 내한과 토마스 목사의 순교

개신교 선교사로 한국에 선교적 관심을 갖고 찾아온 최초의 인물은 독일인 선교사 귀츨라프(K.F. Gutzlaff)였다. 그는 네덜란드선교회소속으로 자바·수마트라·싱카포르에서 활약하였고 태국어·중국어·일본어로 성경을 번역하기 했던 학자적인 선교사였다. 그는 1831년 이후 마카오에 머물면서 중국의 개신교 개척 선교사 모리슨(R. Morrison)과 함께 중국 선교에 전념하였다. 1832년 7월 귀츨라프는 동인도회사 선박을 이용, 황해도 백령도 부근과 충청도의 홍주 고대도(古代島)에 상륙하여 통상 및 선교의 가능성을 탐색하였다. 그는 지방 관리를 통해 통상을 요구하는 서한을 정부에 보내는 한편 가지고 간 한문성경을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며 감자 심는 법, 포도주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또 한국인 선비 양씨(梁氏)의 도움을 받아 주기도문을 우리말로 번역하기도 했다. 비록 한국 정부의 거부와 타고 온 선박 사정으로 1개월만에 중국으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그의 내한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 그는 한국인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한 첫 서양인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세스페데스 신부가 내한한 적은 있었으나 그는 일본인을 위한 종군사제였지, 한국인을 대상으로 전교한 것은 이었다. 또한 천주교의 1831년 조선교구가 설립된 후 제1대 교구장으로 브뤼기에르(B. Bruguiere)가 임명되어 1832년 중국에 입국했으나, 1835년 10월 만주 땅 서만자(西灣子) 부근에서 병사함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따라서 귀츨라프가 한국인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접촉한 첫 서양인이었다. 둘째, 그는 1개월 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한국어를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중국에 귀환한 후에 여러 편의 한국어에 관한 글을 발효했다. 본래 어학에 재능이 있었던 그는 짧은 기간에 한국어의 기본 구조를 파악한 후 서양인을 위한 한국어 관계 글을 쓴 것이다. 이 글들은 후에 한국에 올 선교사들의 어학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셋째, 그는 자신의 여행담을 정리, 책으로 발간하여 서양 사회에 한국 선교의 관심을 갖게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은 "주님께서 작성해서 짚어주신 날에는 반드시 열매가 맺힐 것이다"라는 신념을 갖고 고대도 주민들에게 감자 종자와 함께 한문성경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귀츨라프가 한국을 다녀간 지 33년 만인 1866년 영국인 목사 토마스(R.J. Thomas)가 평양 대동강가에서 순교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토마스는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1863년에 중국 상해에 도착했으나 1865년부터는 런던선교회와 손을 끊고 산동성(山童省)에서 독자적인 활동을 벌였다 그는 그곳에서 김자평(金子平)·최선일(崔善一)등 한국인 천주교인들을 만났고 그들을 통해 한국의 정치상황과 교회박해사건등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로부터 간단한 한국말을 배울 수 있었다. 말하자면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의 입국은 한국 천주교인들의 안내와 도움 덕분이었던 것이다. 그의 관심은 서서히 한국 쪽으로 기울어 마침내 1865년 9월 산둥 주재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총무로 있던 윌리엄슨(A. Williamson)의 후원을 받아 많은 한문성경을 가지고 선편으로 연대(煙台)를 출발, 황대호 자라리(紫羅里)에 도착했다. 그는 두 달 반을 그곳에 머물면서 주민들에게 한문성경을 나누어 주었고 한국어를 익힐 수 있었다. 그는 서울까지 가려 했지만 폭풍 때문에 무산되었고 만주를 거쳐 북경으로 돌아갔다. 그는 북경에 머무는 동안 조선 정부에서 온 동지사 일행을 만났으며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한국 선교를 더욱 결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지사 일행이 귀국한 1866년에 대원군에 의한 대대적인 교회박해, 즉 병인교난이 일어났고, 그 와중에서 탈출한 리델(F.C. Ridel) 신부를 지푸(芝 )에서 만나 한국상황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따라서 그가 두 번째 한국에 올 때에는 이미 치열한 교회박해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처음에 그는 프랑스 신부를 살해한 것에 대한 추궁을 목적으로 출발하는 로즈(P.G. Roze)제독의 프랑스 함대에 통역인으로 동승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가 인도지나 방면으로 방향을 바꾸어 떠나자 대신 미국 상선인 제너럴 셔어먼(General Shermam)호를 타게 되었다. 당시 그는 스코틀랜드성서공회 파견원으로 통역을 담당하였다. 윌리엄슨이 준 다량의 한문성경을 가지고 1866년 7월 29일 천진을 출발했다. 백령도를 거쳐 장산곶, 석도, 장사포를 들러 주민들에게 성경을 나누어 주었고 배는 대동강을 거슬러 만경대까지 올라갔다.


토마스의 순교는 어쩌면 예견된 것이었다. 유림(儒林)층을 중심으로 '쇄국양이론'(鎖國攘夷論)을 앞세워 서양과 천주교에 대한 배척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어 있던 때에 외국 배가 평양 깊숙한 곳까지 들어 왔으니 제너럴 셔어먼호와 조정 관구 사이의 무력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은 쌍방의 전투 끝에 제너럴 셔어먼호는 화포공격을 받아 침몰되고 말았다. 전투의 와중에 토마스는 쪽배를 이용하여 강가까지 나왔으나 관군의 포로가 되어 평양 감사 박규수(朴珪壽)에게 끌려가 대동강가 쑥섬에서 처형당했다. 그는 처형당하는 순간까지 한문성경을 뿌리며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다하고자 하였다.


토마스 목사의 죽음은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진 개신교의 첫 순교사건이다. 비록 그는 한국 선교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가 남긴 순교의 흔적은 훗날 선교의 자유가 선포된 후 우리나라에 온 많은 개신교 선교사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또한 그가 뿌린 한문성경은 그것을 주워 읽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의 실체를 알게 해주었고, 후에 개신교의 평양 선교가 이뤄졌을 때 평양교회의 중심인물이 그들 속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복음선교의 상징성 그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순교가 가져다 준 가시적인 큰 영향은 그의 순교를 계기로 영국교회 특히 스코틀랜드성서공회가 한국 선교에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스코틀랜드성서공회의 한국 선교탐색

중국에 개신교 선교가 이루어진 것은 1807년의 일이다. 영국의 런던선교회 소속인 모리슨(R. Morrison)이 마카오를 거쳐 광동에 도착한 이후 런던선교회는 중국에 선교사를 집중적으로 파견하여 중국 개신교 선교의 주역이 되었다. 그리고 1829년에 미국 해외서교협회 파송으로 브리지먼(E.C. Bridgman)이 도착한 이후 미국의 장로교·감리교·침례교에서도 많은 선교사들을 중국에 파송하였다.


1850년대 들어서면서 중국은 몇몇 항구를 외국인들에게 개방했다. 만주의 입구인 영구(營口)도 이무렵에 개항되었다. 이를 계기로 만주 지역에도 선교사 주재가 가능하게 되었다. 만주 선교는 영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개척되었다. 만주의 첫 개신교 선교사인 번즈(W.C. Burns)는 잉글랜드장로교회 소속의 의료선교사 헌터(J.M. Hunter)와 와들(H. Waddel)이 부임했고 1873년에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회의 로스(J. Ross)가 영구에 도착했다. 이처럼 만주 선교는 잉글랜드·아일랜드·스코틀랜드장로교회 선교사들에 의해 추진되었다.


스코틀랜드성서공회는 1863년 윌리엄슨(A. Williamson)을 중국 지푸(芝 )에 파송하여 선교사업을 시작했다. 앞서 살펴본 대로 그는 토마스 목사의 한국 방문을 적극 지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푸·천장대 등지에서 한국인 상인·동지사 일행과 천주교 교인들을 만나 한국상황에 대한 사전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또 1867년 만주 봉황성의 고려문(高麗門)을 방문하여 한국인 상인들에게 성경을 팔기도 했다. 그의 고려문 방문은 1866년 순교한 토마스 목사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한 데 있었지만 이같은 경험을 통해 한국 선교에 관심이 더욱 깊어졌고 그것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였다.


그래서 1872년 8월,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 선교사로 로스가 지푸에 도착했을 때 그를 만주 영구로 보내기로 하고 로스에게 한국인과 있었던 경험을 이야기해 주었다. 비록 윌리엄슨 자신이 직접 한국 선교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토마스 목사를 지원한 점이나 로스를 영구에 파송하여 후에 만주에서의 한글성경 번역사업이 이루어지게 해 주었다는 점에서 그의 업적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처음 교인들의 활동과 새문안 설립배경

만주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한국과 마주하고 있는 지역으로 옛날부터 한국인들이 많이 건너가 집단 한인촌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자연 이곳은 한·중 양국 교류의 중심이 되었고 특히 봉황성(鳳凰城) 아래 있는 고려문은 양국간의 합법적인 교역(交易)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곳이었기에 이곳에는 한국 상인들의 왕래가 잦았다. 특히 의주 출신의 상인들이 많았는데 그들 가운데서 첫 개신교 교인들이 나오게 되었다.


앞의 언급대로 1867년에 윌리엄슨이 이 고려문을 방문한 이래, 1872년 겨울, 영구에 도착한 로스는 이듬해 영구 지역을 순회하였고 1874년 10월에 처음으로 고려문을 방문하였다. 로스는 그곳에서 한국인들을 처음 보게 되었고 그들에게 한문으로 된 성경을 팔며 전도하려고 하였으나 한·중 양국관리의 감시하에 이루어지는 교역현장에서 전도하기란 쉽지 않았다. 로스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다음 한 주간도 교역이 자유롭게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조선인들은 그들과 함께 온 최고급 관리가 돌아가지 않는 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상당한 실망을 느꼈다. 그래서 언젠가 좀더 좋은 시기에 다시 방문해 전도와 복음서 파는 방법을 시도해 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내게 호기심을 갖고 오후 내내 설교하는 것을 서서 들어 주었다. 그런데 그들의 관심은 내가 전하는 교리보다는 내가 입은 옷가지에 더 있었다.


로스의 첫 번째 고려문 방문은 한국이에 대한 선교적 관심을 갖는 것으로 끝났다. r ncp적인 관심의 실현은 2차 방문에서 이루어졌다. 1876년 4월 말에서 5월 초에 걸친 두 번째 고려문 방문에서 한국인 통역자를 만나게 되었다. 의주 출신으로 압록강을 건너다 풍랑을 만나 물건을 다 잃고 상심에 빠져 있던 이응찬(李應贊)을 만난 것이다. 중인(中人) 계층 출신의 이응찬은 로스의 중국인 하인 소개로 로스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로스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의 한국어 선생이 되었다.


로스는 선교 중심기지를 남마주 중시인 봉천(지금의 瀋陽)으로 옮기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영구 지역을 그의 매제되는 매킨타이어(J. McIntyre)에게 맡기고 우장(牛莊)으로 옮겨갔다.


그 후 로스는 1877년 우장에서 한국어 말본인 A Corean Primer를 발행했다. 1백

쪽에 달하는 이 책은 상해에서 인쇄된 것인데 평북 사투리가 그대로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응찬 등 서북 한인들이 이 일에 깊게 관계했음을 알 수 있다. 로스는 계속해서 이성하·김진기·백홍준 등 이응찬의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고 이들과 팀을 이루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대략 1877년경부터 시작된 성경 번역사업은 1879년 5월 로스가 안식년을 맞아 본국에 귀환함으로써 일시 중단되었으나 그가 본국에 돌아갈 때에 이미 복음서와 사도행전 및 로마서의 번역 원고를 가져갈 정도로 많은 진척을 보이고 있었다.


이때 매킨타이어가 한 큰 일은 한국인 4명에게 세례를 베푼 일이다. 그는 만주 영구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 1876년경 번역에 종사하고 있던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것이다. 매킨타이어가 보낸 보고서를 기초로 하여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선교잡지 The United Presbyterian Missionary Record에 당시 한국 선교 상황을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또한 매킨타이어는 조선인 학자 4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들이야말로 내가 분명히 확신하는 바로는, 장차 거두어들일 풍성한 수확의 첫 열매들이다. 아직은 조선이 서방 세계와는 전혀 단절된 나라이긴 하지만 머지않아 고립된 상태가 풀어질 것이며 천성적으로 조선인들은 중국인들보다 덜 사악하고 종교적 경향이 농후한 민족이므로 그들이 일단 기독교에 접촉하게 되기만 하면 놀라운 속도로 기독교가 퍼져 나가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나는 6년전 국경에 가서 한국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들이 중국과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 당시엔 지금과 같은 여유도 없어 내게 조선어를 가르칠 선생조차 초빙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후 사태가 많이 변해 작년에 4명의 조선인에게 세례를 줄 정도까지 되었다. 이들은 모두 학식있는 자들이며 그 외에 11명이 기독교의 본질과 교리를 알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글에 의하면 "장차 거두어들일 풍성한 수확의 첫 열매들"로 4명의 한국인에 대한 세례가 매킨타이어에 의해 베풀어졌으며 그들 외에도 11명의 원입(願入) 교인들이 있었음을 알 수있다. 그러나 처음 세례받은 4명의 누구이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어 확실치 않으나 매킨타이어 자신의 보고서와 한국측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이 인물 가운데 이응찬과 백홍준(白鴻俊)이 들어 있음은 분명하다. 이응찬은 이미 로스와 함께 성경 번역을 한 경험이 있었으며, 로스가 영국으로 간 후 매킨타이어를 도와 성경 번역을 하다가 신앙을 고백한 후 세례를 받았다. 한편 백홍준은 그의 부친이 로스에게 받은 한문성경과 한문으로 된 전도문서<훈아진언>(訓兒眞言)을 고향에서 읽고 기독교를 좀더 알고 싶어 의주 친가들과 함께 스스로 로스를 찾아갔다. 그러나 로스는 마침 본국에 가고 없어 대신 매킨타이어를 만나 3~4개월 함께 생활하며 번역과 교리공부에 전념하다가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여기에 백홍준의 소개로 장차 새문안교회와 깊은 관련을 맺게 되는 서상륜(徐相崙)·서경조(徐景祚) 형제가 만주로 건너가게 되었고 로스가 귀환한 1881년 이후에 서상륜만이 세례를 받았다. 서상륜은 그 후 계속 로스와 함께 봉천에 머물면서 성경 번역 마무리 작업을 도와 1882년에 우리말로 된 최초의 '쪽복음서'인 <예수성교누가복음>과 <예수성교요안내복음>을 펴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것이다.


백홍준·이응찬·서상륜 등 의주 출신 교인들과 그들의 협동으로 이루어진 이상의 신약성경은 로스와 매킨타이어가 만주 선교에 착수한 지 6년 만에 얻은 귀중한 열매였다. 그러면 이상과 같은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한글쪽복음서'가 어떠한 경로로 서상륜에 의해 국내에 반입되었으며 그것이 새문안교회와는 어떠한 연관을 맺고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앞서 살펴본 대로 서상륜은 의주 출신으로 동생 서경조와 함께 만주로 갔다. 대략 1878년경 중국에서 인기있는 홍삼을 갖고 봉천을 거쳐 영구에 이르렀던 서상륜은 갑자기 병을 앓게되었다. 훗날 서상륜은 그때 일을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나는 1878년 병인(丙寅)에 아우 상우(相祐, 景祚는 字)와 함께 장사차 영구(營口)에 갔다가 열병(熱病)에 걸려서 위지사경(危至死境)이 된지라. 이때에 동향(同鄕) 친구들의 주선으로 영국 선교사의 병원에 입원(入院)하여 치료할 새 마근태(馬勤泰) 목사가 매일 병원에 와서 친절히 위로하여 주면서 예수를 믿으라 권하므로 병이 나으면 예수를 믿겠다고 약속하였더니 월여 동안 의사의 정성어린 치료로 완쾌된지라. 약속대로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였더니 나 목사(羅牧師)가 영국으로부터 돌아오매 1879년에 그에게 세례를 받았고 r의 권고로 그 익년에 심양(瀋陽)으로 올라가서 일편으로 번역된 성경을 인쇄하기 시작했다.


위 글에서 마근태(馬勤泰) 목사는 매킨타이어 목사를, 나(羅) 목사는 로스 목사를 가리키며 심양(瀋陽)은 봉천(奉天)을 의미한다. 그런데 위 글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그가 세례를 받았던 해를 1879년의 일이라고 하고 있는 점이다.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로스 목사가 영국에 서 돌아왔던 정확한 연도는1881년이었다. 로스는 1879년에 영국으로 돌아갔다가 1881년 5월에 만주로 귀환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번역사업이 본격화된 것은 1881년 로스가 귀환하면서였고, 그가 스코틀랜드성서공회와 교인들의 지원으로 인쇄기를 봉천에 들여 놓은 후, 한글 활자를 만들어 첫 한글 전도문서인 <예수셩교요령>과 <예수셩교문답>을 찍어낸 것이 1881년 9월의 일이었다. 이런 정황을 종합해 볼 때 서상륜의 세례 연도는 1881년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1881년 로스에게 세례를 받은 서상륜은 봉천에 머물면서 성경 번역 및 인쇄일에 참여하였고 성경이 인쇄되어 나온 후에 매서인(賣書人)이 되어 성경을 갖고 국내에 잠입, 전도인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때 매서인의 활동비는 영국성서공회에서 지원하였다.


이밖에 로스는 자시의 식자공이었던 김청송(金靑松)을 서간도 지역 한인촌에 파송하였고 이성하(李成夏)를 의주 지방에 파송한 바도 있다.. 한편 서상륜은 로스에 의해 서울에 파송되었으니, 1885년 로스가 대영성서공회에 보낸 보고서 중에서 그의 행적 일부를 엿볼 수 있다.


조신인 휘(Hu), 조선인들식으로 쓰면 쉬(Swi)(徐相崙-필자주)라고 하는 전도인 한 사람이 세례를 받은 후 6개월 동안 이곳에 머물러 있다가 자기 나라 수도(서울-필자주)로 떠났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여러분(영국성서공회-필자주)의 매서인으로 활약하고 있는데 최근 직접 이곳에 와 보고하면서 그는 나에게 한국을 방문해 달라고 초청하였습니다. 전에도 편지로 그런 말을 종종 하였습니다. 그가 2년 동안 그곳에 가 일한 결과 70명이 넘는 사람들이 세례받기를 원하고 있으며 그들 중 상당수는 주목할 만한 인물들이라 합니다. 그가 전도해서 믿게 되었고 세례를 받기 위해 그와 함께 온 사람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는 수도 서쪽에 있는 한 도시에'설교당'(Preaching Hall)을 개설하였고 거기에 18명의 신자가 있다고 합니다. 또 다른 개종자는 마찬가지로 수도 남쪽 도시에서 세례지원자 "20명 이상"을 확보해 놓고 있었습니다.


이같은 서상륜의 서울 전도 보고에 접한 로스는 감격하였으니, 이 보고에 의하면 서상륜은 매서인으로 만주에서 파송된 지 2년만에 서울 지역서만도 70명 이상의 세례지원자를 확보하고 있었으며 서울 서보와 남부 두 곳에 '설교당' 형태의 교회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이같은 서상륜의 서울에서의 눈부신 전도활동은 그 자시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있다. 즉 1901년 9월에 간행된<그리스도신문>에 "서선생 상륜의 경력"이란 글이 실려 있는데 만주에서 죽을 지경에 매킨타이어의 도움을 받아 병을 고쳤고 영국에서 돌아온 로스에게 교리공부를 한 후 그에게 세례를 받은 이야기를 한 다음, 자신이 서울에 파송된 사정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예수 씨께서는 내 영혼과 육신의 죄의 결단이 나서 죽음에 빠진 것을 건져 구원하사 영생하는 자기 나라로 옮겨 주시고 그 뿐만 아니라 또 로쓰 목사에게 감동하여 조선국에 전도할 사무를 맡기시매 주 앞에서 로쓰 목사와 그 부인과 함께 엎드려 주께 도와주시며 보호하심을 기도하고 서로 작별한 후 내가 봉천부에서 떠나 바로 조선국 한양으로 올라와서 석달 동안은 남에게 붙어 있다가 남대문 안 창동으로 집을 정하고 올맛나이다.


위의 회고에서 서상륜은 로스와 헤어진 후 곧바로 서울로 올라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함 사실은 서상륜의 목적지가 처음부터 의주나 소래가 아닌 서울이었음을 확인시켜 주는 중요한 단서로서, 의주나 소래 전도는 서울에 이를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 2차적인 성과였음을 시사해 준다. 아무튼 서상륜은 처음부터 서울을 전도의 목적지로 삼았고 그가 외국 선교사가 서울에 입국하기 전 이미 70여 명의 세례지원자들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주목할 만한 일인 것이다. 바로 이 토대 위에서 새문안교회가 설립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상륜의 목적지가 서울이었다고 해서 의주나 소래의 전도 성과, 특히 소래교회 창설에 대한 그의 업적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새문안교회가 조직될 때 서울 지역보다는 소래 지방에서 올라온 교인들이 그 창설의 주역들로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주와 소래, 특히 소래교회의 창설과 새문안교회의 설립과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서상륜이 매서인이 되어 국내에 들어온 때는 1882년 말에서 1883년 초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서상륜은 로스가 마련해 준 선교비의 지원과<예수성교누가복음>및<예수성교요안내복음>등 한글성경과 교리서를 갖고, 로스 부부와 "함께 엎드려 주께 도와주시며 보호하심을 기도하고 서로 작별"하였던 것이다. 국경을 통과하다가 별정소 검문에 걸려 성경을 압수당할 뻔했으나 요행히 관리의 도움으로 간신히 의주 고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동생 경조와와 함께 고향을 떠났고 그 자신은 서울에, 동생 경조는 친척이 있는 황해도 소래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들이 의주를 떠난 것은 만주에서 선교사와 접촉했다는 사실이 소문으로 알려져 신상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서상륜은 처음 계획대로 서울에 올라와 석달동안 남의 집에 살다가 남대문 안 창동에 거처를 정하였다. 한편 만주에서 가져온 성경은 이미 의주에서 모두 소비해 버렸기 때문에 전도할 방법이 막연했다. 그러던 중 1884us 봄에 로스가 배편으로 성경과 전도문서를 보내왔다. 그것들이 인천 세관에 걸려 묶여 있을 때 당시 한국 정부 외교 고문으로 있던 뮐렌도르프(P.G. Von Mollendorff)의 도움으로 찾을 수 있었다. 서상륜은 이것을 갖고 전도하기 시작했고 소래에 있는 동생을 불러올려 그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그때까지 동생 경조는 기독교에 입교한 것은 아니었다. 이 부분에 관한 서경조(徐景祚) 자신의 기록을 들어보기로 한다.


1883년 계미년(癸未年) 장연(長淵) 송천동(松川洞)에 이주(移住)하게 된지라. 이때에 백씨(伯氏)는 심양(瀋陽)에 들어가 라 목사에게 수세(受洗)받고 매서직분을 받고 조선 경성에 이거(移居)하시고 상경(上京)하란 하서(下書)를 받고 상경하니 마침 그때 심양으로부터 책상자가 청상편(淸商便)으로 비밀이 나온지라. 신약전서와 덕혜입문 등 서를 가지고 래(來)하여 비밀이 신약을 두어 번 보아도 알 수 없는지라 그러나 이 책 속에 기이한 술법이 있으리라 하고 차차 모를 것은 심히 생각하여 보기를 수차 나려 보니 더러 알 것이 있는 동시에 전에 기이한 술법을 얻어 보랴 하더 마음은 없어지고 예수고를 마음이 깊이 들어가는 동시에 극 교를 하면 피살하리라 하는 마음이 또 생겨 심중전(心中戰)이 일어 나는지라


위의 서경조 자시의 신앙고백의 내용으로 보아 형 상륜으로부터 1884년 성경과 <덕혜입문>(德慧入門)등 전도문서를 받아 소래에 돌아올 당시까지도 기독교를 믿으면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앞서 세례받을 결심을 하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다. 따라서 이 시기까지 그는 고백 교인은 아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소래교회의 조직 연도를 1884년 이전으로까지 소급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된다. 서경조는 그 후 형이 가져온 성경과 전도문서를 읽는 과정에서 비로소 구도적(求道的) 교인이 되었고 점차 주변에 교인집단이 생겨났던 것이다. 김윤오(金允吾)·김윤방(金允邦)을 중심한 광산 김씨, 의주에서 내려 온 서씨, 그 외에 안씨 가문 사람들 가운데 점차 서례지원자들이 나오게 되었다.


아무튼 소래 지방의 전도 및 교회 조직의 주역이 서경조였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서상륜의 역할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서상륜은 서울 지역 전도에 전력하였으며, 소래 지역은 동생인 서경조가 중심이 되었다. 그 결과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70명 이상의 세례지원자들을 확보해 놓고 있었다. 훗날 언더우드 선교사가 "선교사들은 복음의 씨를 뿌리러 왔으나 이미 뿌려진 복은 씨의 열매를 거두어 들일 수 있었다."고 말하였던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였던 것이다.




미북장로교 선교부의 한국 선교 배경

위에서 보듯 한국의 경우 복음 수용은 외국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 교회가 처음으로 설립된 것은 내한(來韓)한 첫 선교사, 언더우드(H.G. Underwood)의 입국으로 가능했으며 그 첫 교회가 새문안교회였다. 따라서 새문안교회 창립 경위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언더우드 선교사가 어떠한 경로와 과정을 거쳐 한국을 선교지로 찾게 되었는가를 상세하게 밝혀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미국의 개신교, 특히 언더우드를 파송한 북장로회 선교부가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된 거은 1882년 이후였다. 토마스 목사가 순교한 제너럴 셔어먼호 사건(1866)과 뒤이어 이 사건의 책임을 물어 미국 정부가 함대를 강화도에 상륙, 양국간의 군사적 충돌을 일으켰던 신미양요(1871)로 점차 미국 사회에 한국이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우리 정부는 이때까지도 미국에 대해서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쇄국정책을 주장하던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어 대외적 정책의 변화에 따라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 일본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고 이어 서방 여러 나라와도 국교를 맺게 되었는데 그 중 제일 먼저 미국과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한미수호조약의 결과 1883년에 초대 주한 미국공사로 푸트(L.H. Foote)가 내한 하였고, 한국측에서는 같은 해 7월에 민영익(閔泳翊)을 전권대사로 한 보빙사 사절단을 미국에 파견하였다. 이들 보빙사 일행은 9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기차편으로 뉴욕을 거쳐 워싱턴으로 갔는데 이 기차여행 중에 미국북감리교 목사이자 교육자인 가우처(J.F. Goucher)를 만나게 되었다. 가우처는 이 낯선 동양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한국을 알게 되었고 선교의 가능성을 파악하게 되었다. 이에 가우처는 1883년 11월 우선 2천 달러를 뉴욕에 있는 미국북감리교 해외선교부에 보내 한국선교를 위해 사용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또한 그는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던 매클레이(R.S. Maclay) 선교사에게도 연락을 취하여 한국 선교의 가능성을 직접 타진해 보도록 하였다. 그 결과 매클레이는 1884년 6월 24일에 내한하여 7월 8일까지 머물면서 당시 외무아문(外務衙門)에서 일하던 승지 김옥균(金玉均)의 알선으로 학교와 병원사업은 해도 좋다는 국왕의 윤허(允許)를 받아 냈던 것이다. 매클레이는 일본으로 돌아가 이 사실을 본국에 알렸고 이에 따라 미국북감리교 서교부는 한국에서의 학교와 병원사업을 할 선교사 물색에 나섰다.


그러나 정작 선교사를 한국에 먼저 파송한 선교부는 미국북장로회측이었다. 이같은 한국 정부의 선교 윤허 소식은 곧 언론매체를 통해 미국 교계에 알려졌고 미국북장로교회측은 서둘러 한국 선교를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미국북장로회 선교부는 당시 중국 상해에 머물고 있던 의료선교사 알렌(H.N. Allen)을 첫 한국 주재 선교사로 파송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정식 선교사의 이름으로 들어올 수 없어서 미국공사관 공의(公醫) 자격으로, 1884년 9월에 내한하였다. 이로써 미국북장로회의 한국 선교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알렌은 공사관 공의로 활약하면서 조심스럽게 선교의 가능성을 탐색해 나갔다. 그러던 중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 개화파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1884년 12월 4일(양력)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났으나 3일만에 실패한(三一天下) 일이 있었다. 그 결과 정변을 일으켰던 김옥균·서재필·윤치호·박영효 등 평소 기독교에 호의적인 자세를 취하였던 개화파 세력은 일단 붕괴되고 말았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기독교를 달갑게 생각지 않고 있던 다시 수구파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민영익(閔泳翊)이 정변에서 부상을 입었는데 이를 알렌이 치료해 줌으로써 왕실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듬해 그는 고종 황제로부터 부지와 건물을 하사받아 광혜원(廣惠院)이라는 근대식 병원까지 개설할 수 있었다. 이 광혜원이야말로 한국 정부가 인정한 최초의 선교활동 보장구역이었다. 바로 이같은 정황에서 첫 복음선교사인 언더우드가 내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수정의 활동과 맥윌리엄스의 선교비 회사

언더우드가 한국에 첫 복음주의 선교사로 부임하기까지의 또 다른 배경으로 1882년 일본에 건너간 이수정(李樹廷)의 활동은 빼놓을 수 없다. 이수정은 임오군란 중에 민비의 생명을 구하는데 공을 세우고 고종의 호의에 힘입어 신사유람단 일행으로 일보에 건너갔던 중인 출신의 인물이었다. 그가 일본에 건너갈 때의 목적은 근대 농업분야의 기술 등을 배워 오려는 데 있었다. 그런데 그가 만난 농학자 츠다센(津田仙)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이수정은 이러한 기독교인, 츠다센의 권고와 자시의 신분상의 한계를 깨닫고 기독교에 입교할 것을 결심, 1883년 5월에 도쿄에서 일본인 목사에게 세례를 받아 한국인 중 일본에서의 첫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후 그는 일본에 와 잇던 미국성서공회의 총무 루미스(H. Loomis)와 연결되어 그의 권고로 성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한문성경에 우리말 이두(吏讀)식 토(吐)를 단 형태의 성경 번역 작업을 하여 18884년에 요코하마에서 이를 발행하였다. 그 내용은 신약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이었는데 1년 사이에 이 작업을 끝마칠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 다음으로 그는 마가복음을 순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에 착수하여 1885년 초에<신약마가전복음서언해>라는 제목의 한글성경까지 번역, 발간하였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일본을 거쳐 한국에 들어올 때 바로 이 성경을 갖고 입국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세계 선교 역사상 유래가 없는 일로서 외국의 첫 선교사가 피선교지에 들어가면서 그 나라말로 된 성경을 가지고 들어가는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수저의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은 선교사 초청(招請)운동에 크게 기여했다는 접이다. 즉 그는 1883년 7월과 12월에 미국교회에 선교사를 보내달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보냈고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던 녹스(G.W.Knox) 목사도 이를 적극 홍보하고 나섰다. 이에 힘입어 이수정의 청원서가 선교잡지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 게재되었고 이에 미국 시민들의 '미지의 나라'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 결과 1884년 2월 뉴욕시 브루클린에 있는 라피�교회(Lafayette Presbyterian Church) 교인이며 미국북장로교회 해외선교부 위원 중 한 명이었던 맥윌리엄스(D.W. McWilliams)가 한국 선교를 위해 5,000달러를 희사하겠다는 아래와 같은 내용의 편지가 미국북장로회의 해외선교부에 전달되었다. 이 사실은 미북장로교측이 한국 선교를 시작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주목할 만하다.


안녕하십니까?


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 판단할 때 현 시점에서 한국에 선교사를 보내 일을 시작하는 것이 현명하고 시기적절한 일이라 생각되신다면 선교사 두 명이 2년간 일할 경비를 부담하겠습니다. 경비 지급은 1년 2회로 미리 내겠으며 총 경비는 4차에 걸쳐 5,000달러가 될 것입니다. 이 기금은 프레더릭 마퀸드(Frederick Marquand)의 유지를 받아 저의 집안에서 마련한 것인데 그분의 뜻은 '국내든 국외든 교육사업에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펼치는 좋은 사업이라면 어떤 일이든 돕고 북돋아 주는 데'에 있습니다.


이러한 맥윌리엄스의 제의는 선교부에 의해 곧바로 받아들여졌고 그 해 5월에 맥윌리엄스는 약속한 선교기금 중 1차분 1,250달러를 선교부에 보내왔다. 이 '프레더릭 마퀸드 기금'은 미국북장로회 한국 선교의 기초가 되었다. 선교부는 마침 상해에 있던 알렌이 한국 선교사로 자원함에 따라 그를 1884년 7월에 한국 의료선교사로 임명하였고, 한편 교육사업을 겸할 복음선교사를 구하던 중 언더우드가 자원하자, 그를 교육 및 복음선교사로 한국에 파송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새문안은 언더우드 목사의 한국행(韓國行)을 가능케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맥윌리엄스와 그가 속해 있던 라피�교회와의 남다른 인연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언더우드 목사의 신앙배경과 내한 경위

만주에서 시작된 한국인의 기독교 신앙운동은 의주를 거쳐 국내로 연결되었고 서상륜·서경조 형제에 의해 서울과 소래 두 곳에 많은 세례지원자들을 확보해 놓고 있었다. 이와 함께 1882년의 한미수호통상조약 체결로 미국장로교 선교부는 한국선교에 관심이 고조되었다. 그 결과 브루클린의 한 평신도인, 맥윌리엄스의 선교기금 헌납으로 미국북장로회는 한국 선교에 구체적으로 착수하게 되었고 의료선교사로 알렌을, 복음선교사로 언더우드를 임명, 한국에 파견하였으니 그에 의해 새문안교회가 창설되었던 것이다.


새문안교회 창설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 元杜尤)는 1859년 7월 19일에 영국 런던에서, 존(John) 언더우드와 엘리자베스 그랜트 메리(Elizabeth Grant Maire) 사이의 6남매 중 넷째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 존은 발명가였고 사업가였다. 등사용 잉크, 타자기 잉크리본 등을 발명했고 직접 공장을 운영했다. 이 같은 사업 재능은 맏아들인 존(John T.)에게 전수되어 미국에서 유명한 타자기 및 잉크제조회사를 운영하게 되었다. 언더우드 가문에 있어 정신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아버지 존의 외조부인 알렉산더 워(Alexander Waugh) 박사였다.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에딘버러대학을 졸업한 후 런던의 웰즈 스트리트 회중교회 목사로 시무한 그는 1790년대 성공회, 장로회, 침례회, 감리회 및 회중교회 등의 연합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795년 유명한 런던선교회가 창설될 때도 멤버로 참여하였다. 그는 12인으로 구성된 실행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임되어 런던선교회의 선교사 파송과 선교정책에 깊이 간여하였고, 28년간 이 선교회의 심사위원회 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또 영국성서공회의 해외 선교에도 관심을 갖고 1804년부터 그 일에 참여하는 등 워 박사의 초교파적인 선교활동은 언더우드 가문에 신앙적으로 깊은 영향을 끼쳤다.


호러스는 어려서부터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사업으로 바빴지만 주일 오후시간만큼은 아이들과 함께 교회학교에서 보냈다. 그러나 그가 여섯 살 되던 해 가정에 불행이 닥쳐왔다. 그의 어머니와 동생이, 그리고 할머니가 한 해에 사망했을 뿐만 아니라 얼마 안가 아버지의 사업까지 동업자의 배반으로 실패했다. 따라서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쳐왔고, 이에 그의 아버지는 신대륙으로 건너가 새로운 삶을 개척할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호러스의 나이 열 살, 즉 1869년 그는 두 살 위인 형 프레더릭 윌즈(Frederick Wills)와 함께 프랑스 볼로뉴에 있는 소년 기숙학교에 들어갔다. 이 학교는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학교였으나, 그들 형제는 그 안에서 개신교 신앙을 그대로 실천했고 그 점에 있어서는 방해받지 않았다.


이 학교에서 2년동안 배운 후, 그는 미국으로 이민가는 가족들과 합류했다. 뉴저지에 있는 뉴더햄에 정착한 후 아버지는 다시 잉크공장을 차렸고, 점차 자리가 잡혀갔다. 뉴더햄에는 네덜란드개혁교회 교인들이 많았다. 언더우드 가족도 그들과 가까이 지내는 가운데 1874년 12월 전 가족이 개혁교회에 등록하였다. 따라서 언더우드 가문의 교파가 회중교회에서 개혁교회로 바뀐 것이다.


그의 가족은 그로브교회에 다녔는데 그 교회 목사인 메이븐(Maben) 박사는 호러스에게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었다. 다른 식구들은 잉크공장 일에 매달렸으나 호러스는 학교에 다니는 특혜를 받았다. 즉 그는 저지시티에 있는 해스브루크 소년학원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메이븐 박사에게서 대학 입시를 위한 특별 교수를 받아 1877년에 뉴욕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때 그는 뉴더햄에서부터 뉴욕까지 7마일을 걸어서 통학했고 밤 자정까지 공부하고 새벽5시에 일어나는 근면성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그가 대학을 졸업하던 1881년 아버지가 별세함으로써 또 한번 큰 슬픔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근면함과 성실함으로 자식들에게 본을 보였고 "경이로운 신앙과 열심을 가졌던 기독교인"으로서의 아버지의 신앙 유산은 호러스에게 전수되었다. 즉 그해에 뉴브런즈위크(New Brunswick)에 있는 네덜란드개혁신학교(Dutch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목회자로서, 나아가 선교사로서의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이처럼 언더우드가 신학을 하게 되기까지는 크게 세 가지 환경이 작용했으니, 첫째는 외증조부 워 박사에게서 비롯된 회중교회적인 신앙 분위기, 특히 초교파적인 선교신학에 뿌리를 둔 경건주의 신앙환경이고, 둘째는 아버지의 근면과 성실성, 새로운 것을 발명하고 개척하는 모험심과 창의적인 가정 분위기이고, 셋째는 미국에 이주한 후 신앙지도였다고 말할 수 잇다. 이러한 남다른 가정환경과 신앙적 배경이 그로 하여금 한국의 첫 선교사의 영예를 차지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면 언더우드는 어떠한 계기와 경위로 한국의 첫 선교사로서 내한하게 되었던 것일까? 그가 선교사 꿈을 갖기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였다고 한다. 그가 열네 살 되던 해에 인도 사람의 강연을 듣고 인도 선교사로 갈 생각을 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대학, 신학교를 거치면서 더욱 확고해졌으며 처음 그가 가려고 했던 선교지는 인도였다. 신학교에서 배우는 동안에도 선교사로서의 훈련에 목표를 두고 향후 선교활동에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 1년여 의학을 별도로 배우는 등 나름대로 방향을 잡아 나갔다. 신학교 재학 중에 뉴브런즈위크에 처음으로 구세군이 들어왔는데 낯선 그들의 전도방법이 개혁교회 풍토에 어울리지 않았으나 언더우드는 흥미를 갖고 그들의 전도를 지켜보았으며 어떤 때는 자신도 그들 속에 들어가 찬송을 부르며 전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미국 대학생들 사이에 일기 시작한 선교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런데 그가 본래 선교지로 인도를 택했다가 한국으로 바꾸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1882년 말에서 1883년 초에 이르는 겨울, 뉴브런즈위크신학교 학생 가운데 선교사를 자원한 학생들의 모임이 하나의 발단이 되었다. 이 모임의 한 회원이었던 울트만스(Altmans)가 한국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1882년 체결된 한미수호통상조약으로 은둔국이었던 한국이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는 사실과 1,200~1,300만 되는 인구에 아직 복음이 들어가지 못했으니, 앞으로 한국 선교를 위해 미국교회가 무엇인가를 해야 할 것이라고 하며, 누군가 갈 사람을 찾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1909년 언더우드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상한 바 있다.


내 입장에서 본다면, 나는 당연히 인도로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확신했기에 인도에 가기 위해 몇 가지 특별한 준비를 해 놓은 상태였으며 1년간 의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따라서 어떤 다른 인물이 그곳(한국-필자주)에 가도록 마련되어 있을 것으로 확신하였다. 내 나름대로 생각한 것은 그대로 밀고 나갔는데 1년이 지나도 아무도 자원하지 않았고 어떤 교회도 그곳에 보내려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해외 선교에 있어 지도급 인사들조차 한국에 나가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글을 쓸 지경이었다. 바로 그때 한 메시지가 나를 깨우쳤다. "왜 너 자신이 가지 않느냐?" 그러나 인도 선교를 특별한 소명으로 알고 그것을 위해 몇몇 특별한 준비를 한 것 등이 떠올라 쉽게 용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러던 그가 한국을 선교지로 결정한 것은 꼭 1년간의 고민 끝이었다. 그러나 한국 선교사로 파송되는 일도 생각했던 것처럼 쉽게 풀리지는 않았다. 그가 소속된 개혁교회 본부에 2차에 걸쳐 한국 선교 청원서를 냈으나 자금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으며, 이어 미국북장로회 해외선교부에도 같은 요청을 두 번씩 냈으나 이 역시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거절당하였다. 결국 그는 미국에서 목회자로 일하거나 인도 선교사로 가는 것 중에 한 길을 선택해야겠다는 본래의 계획대로 돌아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뉴욕에 있는 한 개혁교회에서 1년에 1,500달러 조건으로 그를 청빙했던 것이다. 언더우드는 인도 선교의 꿈이 좌절된 상태에서 이같은 청빙을 받자 이에 응하기로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드는 또다시 신비한 음성을 들었다.


나는 그런 방향으로 마음을 굳히고 뉴욕교회에 청빙 수락 편지를 써서 봉토에 넣어 막 우체통에 집어 넣으려는 순간, 이런 음성이 들려오는 듯싶었다. "한국에 갈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한국은 어떻게 될까?"나는 편지를 도로 집어넣고 한국에 가기로 다시 한번 결심한 후 센터스트리트 23번지(옛 장로회 선교본부 건물)로 방향을 돌렸다.

언더우드가 다시 마음을 정하고 미국북장로회 해외선교부를 찾아갔을 때엔 총무가 바뀌어 있었다. 훗날 한국 선교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은 엘린우드(F.F. Elinwood) 박사가 총무로 부임하여 그를 맞이하였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미 엘린우드 앞에는 브루클린의 평신도 맥윌리엄스가 한국선교에 써달라고 보낸 1,250달러가 헌금되어 있었다. 이로써 언더우드가 신비한 음성을 들었다는 한국 선교는 현실로 구현되었던 것이다. 그때가 1884년 7월 28일, 선교부가 상해에 있는 알렌에게 한국 파송을 허락한다는 전보를 친 지 6일째 되는 날이었다. 1884년 봄에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그 해 여름에 한국 선교사로 정식 임명받은 것이다.


한국 선교사가 된 언더우드는 그 해 여름을 영국에서 보냈다. 그의 친척들 가운데 에드워드 존스(Edward Jones) 목사가 있었는데 그는 런던선교회 임원이었다. 그를 통해 한국이 어떤 곳인지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고 특히 1866년의 토마스 목사 순교사건에 대해서도 설명을 들었다.


1884년 11월에 언더우드는 네덜란드개혁교회(Dutch Reformed Church) 계통 뉴브런즈위크 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시카고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12월 16일 일본을 향해 출발했다. 여행용 가방 하나, 타자기 한 대, 대형 카메라 하나가 그의짐 모두였다.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한 언더우드는 약 3개월간 일본에 머물면서 여러 사람을 만났다. 주로 헵번(J.C. Hepburn) 선교사 사택에 머물면서 미국성서공회의 루미스(Henry Loomis)에게서 최근 한국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한 이수정도 만났다. 특히 이수정은 그의 한국어 어학선생 노릇까지 하였다. 1884년 12월 4일의 갑신정변 실패로 일본에 망명한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파 인사들도 만났다. 한편 주한미국공사 푸트(Lucius H. Foote, 福德)로부터 한국의 정치상황이 정변으로 평온치 못하므로 입국을 연기하라는 개인적인 충고를 받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귀중한 동지를 만났으니 그는 자신과 같은 목적을 갖고 한국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G. Appenzeller)였다. 이 둘은 한국 개신교 선교의 개척자란 칭호를 함께 받으며 둘 사이의 돈독한 우정관계를 끝까지 유지하였다.


이 두 사람은 하나는 장로교 선교사, 하나는 감리교 선교사로 서로 소속은 달랐으나 여러 가지 면에서 공통점이 많았다. 선교사들 사이에서 두 사람은 "우대한 H.G.들"이란 칭호를 받았다. 둘의 이름(First and Second name) 머리글자(Initial)가 모두 'H.G.'였다는 데서 온 말이다. 둘은 모두 열정적이면서 복음적인 목회자였다. 이들은 모두 한국 선교에 자기 생을 바쳤고 선교활동은 2세에게까지 연결되었다. 둘의 선교활동은 장로교·감리교 양 교회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아펜젤러는 1858년생이다. 언더우드보다 한 살 위인 셈이다. 독일·스위스계로 펜실베니아에서 출생했다. 본래 개혁교회 교인이었으나 18세 때 중생(重生)을 체험한 후 3년 뒤에 감리교회로 교적을 옮겼다. 프랭클린마샬대학에 재학할 때부터 선교사 훈련을 받았으며 1882년에 드루신학교에 입학하면서 해외 선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883년 가을 하트포드에서 전 미국 신학생 수양회가 열렸는데 이때 언더우드와 함께 아펜젤러도 자신의 신학교 대표로 참석했다. 이 모임은 해외선교자원운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모임에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만나거나 친교를 맺은 것 같지는 않다. 아무튼 한국 개척 선교사가 될 신학생 후보는 하트포드에서 처음 함께한 셈이다.



언더우드와 마찬가지로 아펜젤러 역시 첫 선교 대상지는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었다. 그러나 한국을 선교지로 결정하였던 동창생 워즈워드(J.S. Wadsworth)가 개인 사정으로 한국행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자, 아펜젤러가 대신 한국으로 오게 된 것이다. 1884년 9월 그는 미국북감리회 해외선교부 총무 리드(J.M. Reid)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갈 것을 요청받았다. 고민 끝에 그는 한국을 택하였고 그 해 12월 20일에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결혼한 지 3일 만이며 미국북감리회 해외선교부에서 의사인 스크랜턴(W.B. Scrnaton)을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고 목사 안수를 준 지 16일째 되는 날이었다.


아펜젤러는 1885년 2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부인과 함께 일본에 도착하여 1개월여 머물면서 매클레이를 비롯한 일본 주재 선교사들과 한국인 망명객들을 만나 그들에게 한국어를 배우는 등 언더우드와 같은 체험을 하였다.


이처럼 별개의 선교본부에 의해 한국에 파송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1885년 3월 31일 나가사키를 출발, 한국을 향하였고 부산에 잠깐 들렀다가 1885년 4월 5일 오후 3시에 마침내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다.


둘은 같은 날 함께 한국에 왔다. 이후 둘은 서로 협력하며 각자의 활동을 추진해 나갔다. 서로"언디"(Undy), "아펜"(Appen)이란 애칭으로 부르며, '언디'는 새문안교회를, '아펜'은 정동교회를 창립했던 것이다.



정동에 정착

언더우드 목사가 서울에 들어와 처음 정착한 곳은 정동(貞洞)이었다. 정동이야말로 한국 개신교 선교의 뿌리를 내린 처음 밭이었다. 바로 이곳에서 새문안교회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정동은 조선시대 황화방(皇華坊)에 속해 있었다. 조선왕조를 건설한 태조(太祖)는 1934년에 수도를 개성에서 한성으로 옮겼다. 그리고 한성을 5부 52방(坊)으로 구획하였는데 지금의 정동 지역은 서부(西部) 취현방(驟賢坊)에 속해 있었다. 1396년 태조의 제2왕비인 신덕왕후(神德王后)가 별세하자 태조는 그를 경복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성안 취현방 언덕에 장시지냈다. 그리고 능 이름을 정릉(貞陵)이라 하였다. 그러나 태조 말년에 왕자의 난이 일어나 당시 세자로 있던 신덕왕후 소생의 방석(芳碩)이 살해되고 신의왕후(神懿王后) 소생인 방원(芳遠)이 정권을 잡고 1400년에 태종(太宗)으로 즉위하였다. 1408년에 태조가 별세하자 태종은 신덕왕후의 능을 동북쪽 성밖 북한산 기슭에 있는 사을한리(沙乙閑里-오늘의 정릉동)로 옮기게 됨으로써 취현방 능터는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지역 이름만큼은 그대로 정릉동(貞陵洞)으로 불렸고 이것이 줄어 오늘의 정동이 된 것이다. 취현방은 세종 때에 이르러 황화방에 흡수되었고 영조 시대 이후 서부 황화방 소정동계(小貞洞契)로 불리다가 고종 갑오경장(1894) 때 행정지역이 재편성되면서 서서(西署) 황화방과 소정동(小貞洞), 대정동(大貞洞)으로 나뉘어 불리게 되었으며 한일합방 후인 1914년에 소정동, 대정동을 통합, 오늘의 정동으로 행정 명칭이 확정되었던 것이다.


정릉동은 정릉이 옮겨진 후 별다른 역사적 기록을 남기지 못하다가 1593년 선조(宣祖)가 이곳에 행궁을 조성하고 '정릉동 행궁'이라 이름을 붙임으로써 왕조 역사속에 다시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이 정릉동 행궁은 광해군 때(1611) 와서'경운궁'(慶運宮)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07년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純宗)의 즉위녀에 오늘의 덕수궁(德壽宮)으로 다시 이름이 바뀌었다. 이 궁은 고종(高宗)때 크게 중건하였고 아관파천(1896~1897) 이후 고종 황제가 이곳으로 이어(移御)하여 별세하기까지 기거한 구한말 정치적 소요와 비운을 간직한 궁이었다.


뿐만 아니라 1882년 한미수호조약 체결 후 1884년 초대 주한공사로 푸트(L.H. Foote)가 부임하면서 당시 정동에 있던 한림(翰林) 민계호(閔啓鎬)의 저택을 구입, 공사관으로 사용하게 되고 뒤이어 영국공사관과 러시아공사관도 덕수궁 주변에 자리잡게 되자 외교적으로 중심지가 되었다.


언더우드 목사의 첫 번째 집도 이곳 정동에 마련되었다. 미국공사관 공의(公醫) 자격으로 그보다 6개월 먼저 와 있던 알렌이 그 집을 마련해 주었다. 언더우드는 1885년 4월 26일자 편지에서 그 사실을 밝히고 있다.


알렌 박사가 사들인 집은 아주 좋은 위치에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미국공사관 도로 옆에 있으며 같은 언덕에 영국공사관도 있습니다. 이 집이(공사관을 제외하고) 외국인이 소유하고 있는 유일한 재산이었던 관계로 최근의 소동중에도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렌도르프 소유의 집도 있었습니다. 그는 순시병을 두고 집을 지켰으나 많은 피해를 입었고 건물 한 채는 불에 타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서교부 건물만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그 집은 강노(姜魯) 정승 소유의 집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으며 ㄴ자형 토지에 ㄷ자형 사랑채를 포함 세 채의 집 건물이 들어 서 있었다. 그리고 언더우드가 직접 작성한 지도에서 보듯 세 채의 건물 중 ㄷ자형 건물(언더우드 사저) 왼편에 독립된 一자형 건물을 교회로 사용하였으니 이것이 새문안교회의 첫 예배당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곳은 정동 13번지 일대로 후에 감리교회 여선교부에서 구입, 여선교사 기숙사로 사용되면서 '그레이 하우스'(Gray House)로 불렸으며 지금은 서울 예원학교 교정에 포함되어 있다. 바로 이곳이 정동 13번지로서 새문안교회의 탄생지였던 것이다.



교육을 통한 선교 모색

1884년 9월에 외부(外部)를 통해 미국인 선교사 매클레이에게 전달된 고종의 선교 윤허는 외국인들의 국내 활동 범위를 의료(병원)과 교육(학교)활동으로 국한시켰다. 이에 따라 미국감리교에서 의료선교사로 스크랜턴을, 교육선교사로 아펜젤러를 선발해 보냈듯이 장로교에서 의료선교사로 알렌을 선정하여 미리 파송했고 뒤이어 교육선교사로 언더우드를 파송했던 것이다. 따라서 언더우드 목사의 초기 활동은 교육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알렌이 설립한 제중원(濟衆院)에 나가 그를 돕는 것으로 한국에서의 첫 일을 시작했다.


원(제중원-필자주)에는 새 의사의 도움이 필요한 형편입니다. 알렌 박사는 아주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매일 아침 병원에 나가 하루 4~6명씩 수술을 해야 합니다. 그는 다른 의사의 도움과 조언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매일 오후에 병원에 나가 돕고 있습니다. 매일 평균 70명씩 새 환자들이 찾아옵니다.


내한하기 전 본국에서 1년 동안 의학을 공부해 둔 것이 이때 언더우드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제중원 교사'가 그의 공식적인 직함이었다. 그는 병원에 나가 알렌을 도우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인과 접촉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먼저 한국인 어학 선생을 채용해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의 첫 어학 선생은 천주교인었는데 전에 천주교 신부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 경험이 있을 뿐 아니라 신부들과 함께 한불사전 편찬에도 참여한 바 있는 유능한 어학 선생이었다. 언더우드는 '이 나라에서 제일 훌륭한 선생'을 얻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를 통해 한국 말과 한국 문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7월부터는 그에게 영어를 배우려고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는 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사업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아이들 몇 명이 찾아옵니다. 저는 그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학교로 사용할 수 있는 건물만 있다면 지금 바로 시작하더라도 상당수 학생들을 불러 모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직은 내 존재가 그다지 큰 호응을 불러 일으키지 못하고 있지만 그 중에 열두 명 정도 사내아이들을 뽑아 가르친다면 제가 어학을 배우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인재들로 키우는 동시에 한국어를 직접 공부하는 데 소비되는 시간도 보충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병원에 출입하면서 정기적으로 그를 찾아와 영어를 배우려는 서너 명의 학생들이 생겼고 그는 이 학생들을 모아 매주일 주일학교 형태로 운영하였다. 1886년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오늘날의 학교 형태는 아니지만 우선 거리의 고아들을 데려다 먹이고 입혀주며 가르치는 고아학교의 설립을 구상하고 이 뜻을 미국공사 폴크(G.C. Foulk)를 통해 한국 정부의 외부(外部)에 전하자, 그 해 2월에 외부 김윤식(金允植)의 이름으로 학교 설립 허가를 통보해 왔다. 김윤식이 이때 미국공사 앞으로 보낸 공문 내용을 보면 당시 한국 정부는 적어도 종교활동이 아닌 고아나 극빈아동을 위한 사회사업에 대해서는 매우 협조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안련(安連, Allen), 혜란(惠蘭, Heron), 원덕우(元德愚, Underwood) 3인(三人)이 아국정부(我國政府)와 백성을 위하여 부모 없는 아이와 가사(家舍) 없는 아이를 구제하라 하고 집을 정하여 먹여 살리고 교장을 두어 한문과 국문과 공예지업(工藝之業)을 가르쳐 나라에 쓰이게 하신다 하오니 이는 세계상의 으뜸가는 선정(善政)이라. 우리 정부에서 생각지 못한 일을 이처럼 실시하랴 하시니 누가 듣고 좋아하지 아니하겠소. 본(本) 독판(督瓣)도 불승감사(不勝感謝)하오며 이 말씀을 우리 대군주(大君主)께와 정부에 여쭙고 인민의에게도 일러서 귀국의사의 후의를 칭송하게삽고 무슨 조역할 일이 있든지 주선할 일이 있거든, 서로 의논대로 하겠습니다.


당시 정부에서 미처 돌볼 생각도 못하고 있던 고아들과 극빈아동을 위해 외국인들이 자진하여 고아원을 개설, 그들에게 먹이고 입히며 교육까지 시키겠다는 의도를 높이 치하했던 것이다. 이에 크게 힘을 얻은 언더우드 목사는 즉시 집에서 걸어 몇 분 안 되는 길 건너편의 한옥 한 채를 구입하여 아쉬운 대로 교실로 쓸 수 있도록 개조하였다. 이 자리는 지금 이화여자고등학교가 있는 곳으로 한국 정부가 주선해 준 결과 쉽게 부지와 건물을 얻을 수 있었다. 다음은 학생을 모집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학생을 모집하는 일은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선교사들이 잘 먹여 살찌워 잡아먹는다느니, 미국으로 데려가 노예로 판다느니 심지어는 남색(男色)을 즐기기 위하여 사내아이들을 데려가려고 한다는 등 좋지 못한 소문이 돌고 있던 때라 학생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고아나 길가에 버려진 걸인들 중에서 학생을 구해야만 했다. 선교사들이 설립한 초기 학교가 하나같이 고아 내지 가난한 학생들로 시작되었던 연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언더우드 목사는 어학선생이 추천한 천주교인 한 명을 특별히 고용해 서울시내 고아나 걸인 형편을 조사하게 했다. 그 천주교인은 나흘 만에 당장 구호가 필요한 고아 한 명을 데리고 왔다. 이 고아 한 명으로 고아원이 시작되었으니 정식으로 시작된 날짜는 1886년 5월 11일이었다. 감리교의 아펜젤러도 그날 개원예배에 함께 참여했는데 언더우드 목사는 고아원 설립 1년 후 본국에 보낸 편지에서 고아원 설립 당시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약 1년 전 고아원을 개설했습니다 1886년 5월 11일에 한 아이를 데리고 그 사업을 시작했는데, 당시 한 명만의 입학 허가를 받아 낸 상태고 다른 세 명은 입학 여부를 검토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날 저녁 이곳에 있는 선교사들이 모여 기도회를 갖고, 그 사업을 하나님게서 축복하고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일들을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인지를 가르쳐 주시길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우리 사택과 바로 붙어 있는 꽤 넓은 한옥 한 채를 사서 약간 수리했는데 집 값은 아주 적당했고 수리비까지 포함해서 약 500달러 정도가 소요되었습니다.


고아원은 시작한 지 2개월도 못되어 원생이 10명으로 늘었다. 고아들을 데려다 재우고 먹이고 입혀주는 등 정성껏 돌봐주며 가르치자 점차 한국인들의 오해도 풀렸고 자연히 교육활동에 자신감도 생겼다. 이 고아원은 뒤에서 상술하겠지만 언더우드의 뒤를 이어 후에 마펫·밀러 등이 맡아 보면서 보다 학교의 형태를 갖춘 영신학교(永信學校)로 발전했으며 그 후 게일에 이르러 오늘의 경신(儆新)중·고등학교의 모습을 갖기에 이른다. 이같은 교육사업을 통해 언더우드는 한국 정부와 일반대중의 인정을 받게 되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본래의 목적지인 복음전도를 점차 펼쳐 나갔던 것이다.



첫 세례교인 탄생

언더우드 목사가 한국에 온 후 처음 2년간은 위에서 보듯 교육사업과 한국어 공부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의 한국어 공부는 어학 선생과 함께 천주교 신부들이 앞서 펴낸《한불자전》을 대본으로 하여《한영자전》을 만드는 일과 감리교의 아펜젤러와 함께 이수정이 번역한 <신약마가복음서언해>를 대본으로 하여 수정본 <마가의 전한 복음서언해>를 번역하는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남는 시간은 제중원과 고아원에 나가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종교집회에 대해서는 아직도 한국 정부가 분명히 반대 의사를 표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개적인 집회는 불가능했다. 따라서 치외법권을 가진 외국인 선교사들도 공사관 내에서만 예배가 가능하였다. 선교사들의 첫 주일집회는 언더우드 사택에서 1885년 7월부터 시작되었다. 알렌이 본국에 보낸 한 서한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현재 매주일 저녁마다 언더우드 씨 집에서 주간예배(weekly service)를 드리고 있습니다. 6주 전부터 예배를 드렸는데 우리 모두 예배를 인도하는 데 신중을 기하고 있습니다. 감리교 형제들도 기꺼이 참석하고 있으며 이 일이 우리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편지를 쓴 것이 1885년 8월 12일이므로 6주를 거슬러 올라가면 언더우드 사택에서 장·감 선교사들이 모여 주일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날은 1885년 7월 5일이 된다. 이 집회는 선교사들과 외국 국적을 가진 기독교인들만이 참석하는 제한적인 종교집회였다. 1885년 말이 되면 장로교 선교사로 언더우드, 알렌 외에 의료선교사 헤론(J.W. Heron) 부부가 참석했고 감리교에서 아펜젤러 부부와 스크랜턴 부부 및 그의 모친 외에 미국공사관 직원들도 참여하였다. 이 모임은 해가 바뀌면서 더욱 그 규모가 확대되기 시작하여 외국 선교사들의 기도회에 한국인이 참여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곳에서 기도주간을 가졌습니다. 하루 저녁에는 한국인 몇 명이 참석했습니다. 우리는 다음 번 기도주간에는 더 많은 한국인들이 예배에 참석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선교사들 위주의 예배집회에 한국인들이 조심스럽게 참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해 봄에 고아원을 개설함으로써 선교활동이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될 수 있었고 마침내 1886년 7월 18일 주일에 한국에서 첫 한국인 세례가 베풀어졌다. 노도사(魯道士)란 별명을 가진 노춘경(魯春京)이 그날 세례를 받은 것이다. 서울 근교에 살고 있던 그는 처음에는 기독교를 반대했으나, 기독교에 관한 한문 서적을 읽으면서 그 태도에 변화가 왔다. 1885년 봄 어느날 알렌의 집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책상 위에 있는 한문으로 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발견하고 그것을 집에 가져가 밤을 새워 읽은 후 그의 태도에 큰 변화가 온 것이다. 그 이튿날 아침에 그는 성경을 손에 들고 언더우드 목사를 찾았고 이때 언더우드 목사로부터 또 다른 한문으로 된 교리·전도문서 등을 받아 읽고 난 후부터 기독교인이 될 것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후 노춘경은 선교사들의 영어 예배집회에도 여러 차례 참석하는 등 5~6개월의 탐색 끝에 마침내 결단을 하고 자원하여 엄중한 문답을 거친 후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았다. 언더우드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이 "첫 열매"에 크게 감격하였음은 물론이었다. 그것도 선교사들이 나가 전도해서 얻은 열매가 아니라 스스로 찾아와 진리를 탐구한 후 자진해서 세례를 받은 것이므로 선교사들이 느낀 감격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세례받은 노춘경으로부터 자기처럼 세례를 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한두 명 더 있다는 말을 듣고 또 한번 감격했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 정부의 입장은 완고하였고 선교사 중에도 알렌 같은 이는 본격적인 복음선교의 위험성을 경고했지만 복음전도의 열기는 선교사들 사이에 점차 고조되어 갔으니, 그만큼 새문안교회 창설의 분위기도 무르익어 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