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6. 28. 10:53ㆍ목양자료/2.설교자료
영광의 하나님, 십자가의 하나님(고난의 하나님)
John W. De Gruchy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계시되어진 하나님의 영광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영광의 하나님은 십자가의 하나님입니다. 불행하게도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은 항상 이것을 인식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기치는 십자가 복음에 반대되는 방법으로 사회 참여를 정당화시키는 말로 오용되어 왔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구호는 십자군 전쟁 때에 사용되었습니다. 종교재판 때도 사용되었고 유대인과 이교도들을 박해하는 때에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 선교라는 이름으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합리화시키는 데도 이 말이 사용되었고 전쟁에 참여할 때도, 인종차별을 합리화하는 데에도 이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물론 이 말은 진실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기를 애쓰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음악의 경우에는 바하, 신학의 경우에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의 어머니였던 마더 테레사 수녀 등,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복음을 설교하는 이들이 진실하게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Sola Gloria Dei,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말은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의 행동의 근본적인 동기가 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에 반대되는 일을 행할 때 그 일을 정당화시키는 방법으로 너무나 자주 이 말이 사용되기도 합니다. 북미 여성신학자 샐리 맥파그(Salie Mcfague)가 바로 정확하게 이런 상황을 표현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진정한 신이며, 전능하신 주요 세상 누구에게도 패배하지 않으시는 세상의 왕이시며 그 분을 믿는 우리들 또한 실패할 수가 없다. 그것은 힘 있는 이미지의 그림이고 또 굉장히 위험한 그림이기도 하다.
맥파그(Mcfague)가 여기에서 반대하고 있는 것은 소위 그리스도인의 승리주의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선포했습니다. 주는 우리들 자신만의 주가 아니요 온 세계의 주님이시고 교회는 각각 그 주님되심을 나누어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상 교회는 나머지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 도구입니다. 이런 종류의 종교 제국주의가 기독교 정신을 규정짓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오늘날 이슬람권에 속한 이란의 아야톨라 코메이니에 의해서 아주 강력하게 제기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사는 다른 종교의 신앙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말이 남용되거나 오용되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사회에 약간의 영향이라도 미쳐서 사회가 하나님의 뜻대로 조금 더 좋은 변화를 일으키기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지 않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삶 뿐 아니라 현실 세계 전체의 주로 그리스도를 고백한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당신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들이 주의 나라에서 자리를 얻을 수 없겠느냐고 예수님에게 청탁한 이야기를 떠올리게 됩니다.
'내 아들 중의 한 명은 주의 나라에서 우편에 또 한 명은 좌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당신은 예수님의 대답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주되심의 의미를 권위에서 섬김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되심(Lordship)은 지금 다른 이들로 인한 고통의 관점에서 정의내려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그 안에 있는 지혜를 인류에게 꺼내 보여주었던 팔복의 관점에서 정의된 것이기도 합니다. 진정한 권위를 가지신 분, 진정한 주님은 종입니다. 그는 진실로 다른 이들을 위해서 그 자신 혹은 그를 온전히 내어줄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 이유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하면 기독교 복음은 부활하고 승천하신 주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으키시고 주로 만드신 십자가에 못박히신 메시아의 복음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이셨다.'고 말한 것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신 그의 순종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죽음 때문에 예수님은 주로 알려졌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처음으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아래와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의 비하와 십자가의 수치의 관점으로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누구도 하나님을제대로 인식한 것이 아니며 그의 영광과 위엄 속에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유익한 일이 아닐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소망하는 대로 사회가 새로워지고 정의로와지는 데 이 시대에 교회가 해야할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많은 논쟁들이 있습니다. 과거 독일개혁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이 사회 속에서 실현되고 있다고 확신하면서 시도했던 바로 그 승리주의적 방법은 결과적으로 인종차별이라는 비인간주의를 초래했습니다. 교회들은 인종차별을 반대하여 때때로 다른 면에서 승리주의적 방법을 취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새로운 사회질서 속에서 교린?십자가에서 못박히신 구세주요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교회 본연의 자세에서 멀리 떨어진 방법으로 세상을 움직이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합니다. 이것은 항상 교회에게 시험꺼리입니다.
압제의 틀에서 남미를 해방하고자 하는 투쟁에서 교회는 중립적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정의와 가난한 사람들의 편을 들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편을 들 때 우리는 승리주의,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보다 정치적 권력을 사용하려고 하는 것을 배격해야 합니다. 세상이 권력을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교회가 권력적인 집단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하며, 이렇게 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은 교회가 언제나 십자가 아래 있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에 대한 모든 것과 공의의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할 때 우리는 십자가로 시작해야 하고 십자가로 완성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한 십자가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지혜와 힘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 뿐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좋은 소식이 되는 이유입니다.
정의를 위해서 십자가의 방법으로 투쟁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고통받는 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방법으로 정의를 위해서 투쟁할 때 우리는 힘있는 자들과 우리를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힘없는 자들과 우리를 동일시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핍박하는 자들이 아니라 핍박받는 자들과 같은 입장에 서야 합니다. 게스타포에서 체포되기 얼마 전에 디트리히 본 회퍼는 그 시대 기독교 사상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하류층과 부랑자들과 용의자들과 학대받는 자들과 힘없는 자들과 재활하고자 하는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세계사의 위대한 사건들을 보는 법을 배운다.
본회퍼가 여기서 말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세상에 참여할 때 하나님의 영광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와 고통받는 자들과 동일시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사실로 형성되어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승리자인 그리스도는 우선 희생자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우리가 사회의 피해자의 관점으로 현실을 이해하도록 요청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남미에서 교회는 가장 약하고 힘이 없고 억눌린 사회의 희생자들를 위해 투쟁할 때 승리주의를 피해야 합니다. 이것은 정치적 권력으로 노동자들을 움직이게 될 때, 교회는 반드시 지금 투쟁하는 사람들 편에 선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교회가 새로운 하층민과 새로운 희생자들 편에 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불이익을 당하고 무능력하고 도와줄 이 없는 어린이들 혹은 어른들 편에 설 것입니다.
2세기의 신학자인 이레니우스는 '하나님의 영광은 인류가 충만하게 생동하는 것이다'고 말을 해서 그것의 정의를 잘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창조물인 남자와 여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삶을 발견할 때 나타납니다. 엘살바도로의 순교자인 로메로 대주교는 이레니우스의 말을 한 걸음 더 전진시켜서 '하나님의 영광은 가난한 이들이 풍족한 삶을 살아갈 때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메시지는 크리스챤 승리주의보다는 인류가 삶을 회복할 수 있게 될 때 우리가 영광을 단지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인류의 굴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철학자,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가 하나님이 높아지는 것이 인간의 굴욕을 초래한다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인류의 굴욕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가 높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는 것은 교회가 주님과 같이 교회가 처해 있는 상황 때문에 고통스러워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스카 로메로는 이것을 아래와 같이 기록합니다.
그들이 우리를 미쳤다고 하고 그들이 우리를 파괴주의자, 공산주의자라고 부르고 우리에게 온갖 모멸스러운 별명을 다 붙일 때 우리는 단지 모든 것을 위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축복을 선언하고, 진리에 목말라 하는 이들에게 축복하고 고통받는 자들을 축복한 팔복, 모든 것을 위에서 비천한 것으로 전환시킨 팔복의 파괴적 힘을 설교할 수 밖에 없다.
십자가의 정신으로 행하는 교회는 오해를 받을 것이며, 비난받을 것이며 무시당할 것입니다. 인간의 권력과 지략에 의해서 운영되는 게임의 법칙에 의해서 교회는 시험의 잣대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방법은 세상이 우리들을 생각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다른 이들을 향한 아픈 사랑입니다. 그것은 신약성서에서 우리가 '증인'이라고 번역한 말의 의미를 순교자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죽어가는 것이라고 말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증인들은 보혈로서 인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디트리히 본회퍼와 오스카 로메로 혹은 우리 시대의 많은 이들이 그런 힘을 가질 수 있었고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모델이 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능력있는 그리스도의 증인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를 귀하게 여기는 크리스챤 영성의 궁극적인 정신이며 전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강조했던 것처럼 순교는 그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희생시키기 위해서 부름받은 것은 아닙니다. 이 사실이 자신의 구원과 의와 영광을 구하는 것으로 복음을 전락시키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유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신실한 증인은, 죽음까지도 각오한 특별한 증인은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을 하며 그의 사죄의 은혜에 대한 반응이 있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가 우리에게 주신 자유와 충만한 삶 가운데에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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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프타운 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남아공 론데보쉬 연합교회 설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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