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3. 30. 18:11ㆍ목양자료/1.기독교자료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方舟)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을 칠하라 (창 6:14)
칠월 곧 그 달 십 칠일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물이 점점 감하여 시월 곧 그달 일일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창 8:4 - 5)
터어키의 동부 아르메니아 지역, 소련과의 국경지역에 아라랏(Ararat) 이라 불리는 산이 있다. 또한 이 아르메니아 지역의 옛 이름이 아라랏 이라고 전해진다. 예로부터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이 산을 노아의 방주가 머물렀다고 믿어왔으며, 신성하게 여겨왔다. 마르코 폴로도 그의 동방견문록에서 이곳을 " 만년설로 뒤덮인 아무도 오를 수 없는 그곳에는 노아의 방주가 있다..."고 기록했다.
해발 5,156 m 의 아라랏 산은 넓은 들판에 홀로 솟아 있으며, 그 높이에 견주어 훨씬 더 높아 보인다. 게다가 구름 속에서 어쩌다 잠깐 모습을 보이는 산꼭대기는 흰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어 장엄함과 신비함을 더해 준다. 거기에 대홍수에 관한 전설까지 곁들여졌으므로 사람들은 대대로 이 산을 공경하고 두려워 하였다.
기원전 300년, 바빌로니아의 신관 베롯소스는 '방주 있는 곳까지 올라간 사람들은 언제나 배에서 송진을 긁어내어 악마를 물리치는 부적으로 삼았다' 고 썼다. 기원 초기에는 아르메니아의 수도자 죠지 하고피안 (George Hagoppian)이 방주를 찾으려고 몇 번이나 아라랏 산에 올랐다. 그가 세번째 올라갔을 때, 하나님께서 사람은 이 산에 오르지 말라고 하시며 방주의 나무 조각 하나를 주셨다는 말이 전해 진다. 어쨌든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거의 2 천여년간 아무도 이 신성한 산에 오르지 않았다. 아라랏은 '노아의 방주'와 '에덴동산'이 있었던 성지로, 하나님이 출입을 금한 금역으로 거룩히 여김을 받아왔다.
대홍수에 관한 이야기는 성서뿐 아니라, 아르메니아, 바빌론, 메소포타미아등 중동 지방에 널리 퍼져 있었다. 기원전 3천년 메소포타미아에서 생겨난 수메르 (Summer)의 서사시, '길가메쉬의 서사시' 가운데 200행에 가까운 대홍수에 관한 이야기가 있으며, 기원전 1700년대 바빌로니아 함무라비 때의 점토판에도 '7일 낮 밤 큰비가 땅 위로 쏟아져 내렸으며, 큰 배가 바다로 떠내려 가자 태양신이 나타나 하늘과 땅에 빛을 내려 주셨다'고 씌어 있다.
탐사의 시작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의 방주를 찾아 보려는 일은 19세기에 들어와서 비로소 조직적으로 시도되기 시작했다. 1829년 10월 독일의 파로트(Parrot) 교수가 처음으로 아라랏 산 꼭대기에 올랐으나 방주는 찾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54년 뒤인 1883년 5월, 지진피해를 조사하던 터키 관리들이 빙하에 드러난 나무로 된 검은 물체를 발견했다. 거의가 얼음에 묻혀 있었으므로 전체 모습과 크기를 알 도리는 없었지만, 그 안에는 높이 5 m 짜리 칸막이가 줄지어 있었다고 했다. 그들은 그 물체가 드러누워 있는 모양으로 보아 산등성이를 빙하와 함께 미끄러져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 했다. 온 세계가 놀랐지만, 사진이 없었으므로 미심쩍어 하는 사람이 많았다.
방주 이야기는 1차, 2차 세계대전을 앞뒤로 해서 많이 쏟아져 나왔다. 주로 전쟁터에 나갔던 조종사들의 목격담이었다. 1916년 늦여름, 아라랏 산에서 북쪽으로 40 km 떨어진 곳에 있는 러시아 제국 제3 코카서스 항공 분견대에 근무하던 블라디미르 로스코비카(Roskovitsky) 중위는, 어느날 새 비행기를 시험하느라 아라랏 산 근처에 다녀왔던 일을 기록으로 남겼다.
".... 눈 덮인 산꼭대기를 몇 킬로쯤 돌아서 남쪽으로 날아가니 사파이어처럼 푸른 호수가 나타났다. 산 그늘 쪽은 아직 얼어붙어 있었다. 호수 위를 지나친 나는 한번 더 살펴보려고 기수를 돌렸다. 그때 뒷자리에 탄 동료가 뭐라고 소리치며 호수 가장자리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둥그스름한 지붕으로 덮인 묘하게 생긴 배 한 척이 얼음에 파묻혀 있었다.
나는 낮게 떠서 그 언저리를 몇 번이나 맴돌았다. 그 배는 엄청나게 컸다. 뱃머리에 가까운 한쪽옆은 많이 뜯겨져 있었고, 그 반대 쪽에는 7m 는 됨직한 큰 문이 나 있었다. 우리는 기지로 돌아오자마자 대장에게 그 일을 알렸다. 대장은 자기를 그곳에 데려가 달라고 했다.
나를 따라 호숫가의 배 모양을 살펴 본 대장은 부대로 돌아오면서 그것은 틀림없는 노아의 방주라고 말했다. 1년중에 두 달만 조금 드러나고 열 달은 얼음에 묻히므로 썩지 않고 5천년간 버텨왔을 거라는 것이 대장의 의견이었다. 대장은 이 사실을 로마노프 황제에게 보고 했다.
황제는 얼마 안있어 2개 중대를 보내왔다. 우리는 탐험대와 함께 산기슭 벼랑을 따라 길을 만들며 한 발자국씩 나아갔다. 배 있는 곳까지 닿은 때는 한 달이나 지나서였다.
우리는 그 배의 크기를 재고 사진도 많이 찍었다. 배 안은 몇 백 개나 되는 칸막이로 나뉘어 있었는데, 어떤 방은 아주 크고 천장도 높았다. 마치 코끼리 같은 큰 짐승을 넣으려 만든 것처럼. 또 어떤 방에는 바구니가 겹겹이 줄지어 있어 새들을 넣어두는 방같기도 했다. 어디라 할 것 없이 구석구석에 촛농 같은 것이 두텁게 발라져 있었는데, 선체는 잘 썩지 않는 소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우리는 근처의 봉우리 꼭대기에서, 배의 한쪽에서 떨어져 나간 나무들을 찾았다. 그것들은 일부러 그곳까지 옮겨져, 방 하나짜리 작은 신전을 짓는데 쓰였다. 그 신전은 불에 타 거의 숯덩이로 변해 있었다.
1917년 봄 탐험대장은 사진과 함께 자세한 보고서를 황제에게 보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러시아 제국은 볼세비키 혁명으로 무너졌다. 황제는 그들에게 사로잡혔고, 탐험보고서와 사진들은 신을 믿지 않는 볼세비키 들의 손에 넘어가 없어지고 말았다. 그 뒤 우리 항공대의 몇몇 사람들은 아르메니아를 거쳐 자유 세계로 빠져 나왔다"
로스코비키라는 조종사의 이름은 그가 공산당으로부터 벗어나려고 거짓 이름을 쓴 것이므로, 이 이야기는 오랫동안 꾸며낸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오늘날 전해지는 몇몇 기록에 따르면, 러시아 육군 장교들이 아라랏 산의 큰 봉우리와 작은 봉우리 사이 낙타등처럼 움푹 들어간 기슭으로 파견되었다는 말은 사실이며, 그때 비행사의 이름은 사보로키 중위와 레이진 중위, 지휘관은 콜 대령으로 알려지고 있다.
미국과 소련의 탐사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소련 공군 마스케린 소좌가 1916년의 기록을 확인하려고, 부하로 하여금 아라랏 산을 정찰 비행토록 하였다. 부하는 돌아와서 얼어붙은 호숫가에 반쯤 파묻힌 배가 있다고 보고 했다. 특별 조사반이 그곳에 가서 조사한 바로는 그 배는 나무로 만들어 졌으며 거의 화석으로 변하였고, 길이는 120m가 넘는다고 했다 (성경에는 137m로 되어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알려지지 않은 채 비밀에 붙여졌다.
이 배는 소련 쪽 기슭에 있었으므로 소년공군 조종사들은 많은 자료와 사진을 가자고 있었으나, 단 한 장도 미국인들에게 나눠 준 적이 없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과 소련은 동맹국이었으므로, 미군 조종사들은 1942년 '군사 원조 비행'때 아라랏 산 위를 날 수 있었다. 이때 찍은 사진들이 미군 잡지 '성조지'에 실렸으나 거의가 빨리 지나치면서 얼핏 찍은 사진들이어서 알아보기 어려웠다.
배 모양을 보았다는 몇몇 미국인들 가운데, 1959년 터키에 머물렀던 미공군 제 428 전술 비행 중대의 슈잉하머(Schwinghammer) 소위가 제일 믿음직한 사람으로 꼽힌다.
"터키인 한 사람과 내 친구와 나는 F-100 전폭기를 몰고 아라랏 산으로 갔다. 며칠 전 미국인 교수에게서 노아의 방주가 그 산에 있다고 들었으므로 그 말이 진짜인지 알고 싶었다. 그곳은 소련 국경 근처인데다가, 얼마 전 C-130 수송기가 격추된 일이 있는 터라 우리는 조심스럽게 시계 바늘과 반대로 아라랏 산을 돌았다. 그러자 낙타등과 같이 생긴 산등성이 밑에 배같은 보양이 드러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 모양으로, 너비는 12m 쯤이고 길이는 얼음 위로 드러난 것만 30 m 가 넘었다. 우리는 1,200m 높이에서 빠르게 지나쳤으므로 사진을 찍을 수는 없었다. 나중에 U-2기 조종사가 그것을 촬영했다는 말을 어디선가들은 적이 있지만 사진을 본 일은 없다. 그날 우리는 소련 국경을 넘지 않으려고 서둘러 돌아왔지만, 우리가 본 물체는 틀림없이 네모난 배 모양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의 기독교 교단들은 앞을 다투어 탐험대를 아라랏 산에 보냈다. 그들은 방주를 찾아내어 성경의 기록을 증명하려 하였으나 아직 아무도 방주를 찾은 사람은 없다. 영국과 미국은 몇 차례 대규모 탐험대를 보냈지만, 정보부의 끄나풀이란 핑계로 소련과 터키로부터 번번이 등산 허가를 받지 못했다.
1974년 ERTS (지구 자원 탐사 기술 위성) 가 아라랏 산 위 740 km에서 어렴풋한 물체를 찍어 보내왔다. 미국의 모스 상원 의원은 이것의 크기나 모양이 방주와 꼭 같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주 아라랏 산을 비행기로 측량해온 터키 정부는, 그것은 화산암이 침식되어 우연히 배 모양을 나타낸 데 지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 과연 노아의 방주가 아직 남아 있을까? 지금도 그것을 찾으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아라랏 산에 대한 현대적인 과학탐사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 노아의 방주는 인류의 가슴속에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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