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3. 26. 22:11ㆍ일반자료/6.좋은글 자료
옷을 팔아 책을 사라 -빅터 솔로몬 저
<1>유대인의 승리
유대인은 패배의 쓴잔을 마시며 살아남았다.
중동 지역에서 이스라엘과 아랍 연합국들이 맞붙은 1967년 6일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였다. 우연히 친구 하나가 이스라엘을 방문해 한 이스라엘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이 전쟁에서 이기리라는 확신에 넘쳐 있었다. 내 친구는 그 이스라엘 사람이 너무 지나친 확신을 가졌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이스라엘 인구는 고작 250만 명뿐이지 않습니까? 주위의 아랍은 1억 수천만 명이나 되는데 어떻게 이스라엘이 이긴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단 말이오?”라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유대인이 어째서 250만 명뿐입니까? 우리에게는 나치에게 학살당한 600만 명이 더 있지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 독일의 유대인 말살 계획에 따라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강제 수용소의 가스실로 끌려가거나 총살되거나 혹은 고문으로 죽어갔다. 한 민족이 이렇게 단숨에 600만 명의 동포를 잃은 것은 큰 패배가 아닐 수 없다. 승리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그러나 유대인은 “죽임을 당한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지금도 유대인의 삶의 한 부분으로 함께 살아있다”고 믿는다.
유대인의 경전 <탈무드>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 사람의 눈은 거의가 흰 부분이며 검은 부분은 조금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눈의 희고 밝은 부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검고
어두운 부분으로 보는 것이다.
기원 후 73년에 로마제국은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다. 로마 시내에는 개선문이 세워지고 로마 제국은 유대 정복을 기념하는 금화를 만들었다. 로마 사람은 승리의 축배에 취하고 유대인은 패배의 쓴잔을 마셨다. 그러나 오늘날 로마 제국은 사라졌지만 유대인은 살아 남았다. 그 동안 유대인은 패배에 패배를 거듭했지만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자연과학, 사회과학, 예술, 정치, 사업 같은 인간 활동 전 영역에서 빛나는 업적을 쌓으며 뛰어나게 성공한 민족의 하나가 되었다.
패배를 참고 견디는 자가 진정한 승리자가 된다는 것을 역사는 말한다.
유대인은 패배의 날을 기념한다
사람이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여 현실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자신의 실패와 패배를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에 달려 있다.
세계를 통털어 패전과 패배의 날을 기념일로 지키는 민족은 유대인을 빼고는 없다. 다른 모든 민족은 빛나는 승리의 날만을 기념하고 축제를 벌인다.
<하가다>는 유대의 민족 문학서 또는 역사서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책에 유대인의 가장 큰 축제일인 유월절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그 이야기는 “우리는 이집트 바로의 노예였다”는 구절로 시작된다.
전 세계 민족 문학에서 이렇게 굴욕이 가득 찬 패배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기록이 또 어디 있을까?
게다가 자기들의 힘으로 바로에게서 해방을 쟁취했다고 쓰지 않고 해방이 “되었다”라고 수동형으로 썼다. 그것은 자신들의 힘으로 해방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해방을 시켜주셨다는 뜻이다.
유월절에 유대인은 식탁에 몇가지 상징적인 음식을 차린다.
①쓴나물⇒ 패배의 쓴잔을 되씹기 위한 것
②무교병(마초-Matzoh)⇒ 종살이 할 때 먹었던 고난의 떡
③삶은 달걀⇒ 모든 식물은 열을 가하면 연해지고 말랑말랑해진다. 그러
나 달걀은 열이 가해지면 오히려 굳고 단단해진다. 유대인들은 고난
속에서 신념과 결의가 굳어지는 것을 교훈하기 위해 이것을 먹는다.
④아라자⇒ 식후에 마시는 음료로 최후 승리와 최후 해방을 상징한다.
이렇듯 유대인은 과거의 비참한 노예 생활을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종살이를 직접 체험하고 실감함으로 미래를 쌓아올린다.
그들은 유월절 밤에만 이집트에서의 종살이와 해방을 추억하고 기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절기와 경축일마다 그들은 반드시 자신들이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고 거기서 탈출한 과거에 대해 언급하고 기도하면서 자신들의 현실을 살핀다.
유대인들은 아직 승리한 것은 아니지만 승리의 날이 반드시 오리란 것을
믿는 민족이다. 다음의 예가 그것을 증명한다.
①1928년 미국 ‘대공황’ : 많은 미국인들이 재산을 잃고 재기 불능의 앞날을 비관하며 자살했다, 그들은 패배의 현실을 똑바로 바라볼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유대인은 패배에 익숙했고 모든 것을 잃더라도 곧장 다른
분야로 옮겨 재출발해 사업을 개척했다.
②이스라엘과 아랍의 전쟁 : 오늘날 입 속까지 무장을 했다고 할 만큼 속속들이 전쟁 채비를 하고서 이스라엘을 에워싸고 있는 아랍 나라들을 보자. 그들은 1948년의 이스라엘 독립 전쟁에서 이스라엘에게 처음 패했다. 수에즈 전쟁에서도 졌다. 그리고 1967년의 이른 바 6일 전쟁에서도 아랍 나라들은 이스라엘에게 철저히 격파 당했다. 그러나 아랍 나라들은 패전을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그들은 실패에서 건진 교훈이 없으므로 국내 경제나 사회 개발 같은 것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 그래서 백성들은 가난에 찌들어 있다. 그러나 아랍의 위협으로 이스라엘은 오히려 분쟁이 사라지고 긴장과 단결 상태가 고조되어 국가 발전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역설적이지만 이스라엘 발전에 가장 크게 이바지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아랍 나라들이다.
묘지는 희망의 상징이다
유대인이 살아남는 비밀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희망을 버리지 않는 민족이라는 데 있다.
<미드라쉬>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으로 여행을 떠났다. 사막은 뜨겁기만 하고 갈 길은 멀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는 목이 타고 피곤하여 죽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가 “끝까지 해보자, 머지않아 곧 동네가 나타날 거야” 하며 힘을 내라고 아들을 부추겼다. 아버지와 아들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얼마쯤 가자 묘지가 나타났다. 무덤들을 본 아들의 얼굴에 절망이 떠올랐다. 그러자 아버지는 “묘지에 가까운 곳에는 동네가 있는 법이야. 그러니 좀 더 힘을 내거라” 라고 말했다.
유대인에게 묘지는 종말이나 죽음의 상징이 아니라 생명과 희망의 상징으로 남는다.
지혜는 칼보다 강하다
요한 벤 자카이라는 랍비의 이야기이다.
벤 자카이는 로마군이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을 때의 사람이다. 그는 그 당시 가장 위대한 랍비로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로마군에게 포위된 예루살렘 성에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안 그는 로마군 전선으로 가서 사령관에게 면회를 요청했다. 로마군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는 벤 자카이가 훌륭한 학자라는 것을 알고 흔쾌히 만나 주었다. 벤 자카이는 베스파시안스를 만나자마자 “황제여!”라고 불렀다. 참으로 해괴한 일이었다. 그는 황제가 아니라 로마군 사령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벤 자카이와 베스파시아누스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전령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 로마 황제가 죽고 원로원이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선출했다는 것을 알렸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그의 예언 능력에 탄복하여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했다. 벤 자카이는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성전을 구해달라고 할까? 아니, 그렇지 않다. 성전은 유대인을 구할 수 없다. 지키고 보존해야 할 것은 건물이 아니라 <토라>와 그것을 가르치는 랍비들이다.
벤 자카이는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야브네 거리를 파괴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야브네는 지중해에 있는 작은 마을로, 인구도 적고 생산성도 적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대학이 있고 많은 학자들이 그곳에서 <토라>를 가르치고 있었다. 황제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나서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부탁하는 일이 너무 하찮은 일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로마군이 예루살렘 성안으로 밀어닥쳤다. 성전은 파괴되고 약탈은 거듭되었다. 그러나 야브네 거리만은 고스란히 남았고 예루살렘이 파괴되는 동안에도 벤 자카이는 야브네에서 <토라>를 가르쳤다.
그리고 벤 자카이의 생각대로 후일에 유대인은 로마를 이길 수 있었다.
로마인은 칼을 아들에게 대대로 전한다고 한다. 그러나 유대인은 자신의 내적인 것을 전한다.
유대인은 그 많은 패배를 통해 무엇을 배웠는가? 비록 겉으로는 어떤 힘에 의해 패배를 당하더라도 자기 자신에게 패배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을 배웠다. 외면적인 패배와 내면적인 패배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다.
<2>유대인의 진실
유대인은 쫓기며 평화를 얻었다
오늘날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평화가 존귀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압제의 역사를 살아온 유대인만큼 평화에 대해 생생하게 이해하는 민족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유대교의 가르침에 따라 평화를 존귀하게 여겨왔고 이 세상은 반드시 평화로와야 한다고 배웠다.
따라서 유대의 역사에 군인으로서 영웅이 된 사람은 없다. 유대인은 군인을 빛나는 존재로 생각한 일이 없으며 위협을 받지 않은 이상 무기를 잡으려고 생각하지 않았다.
유대인은 폭력을 업신여겼다. 이것은 동물에 대한 그들의 생각에 잘 나타나 있다. 유대인의 율법은 동물을 도살하는 방법을 상세히 규정하고 있다. 이 독특한 동물 도살법을 ‘슈우다’라고 하는데, 동물에게 전혀 고통을 주지 않고 죽이는 방법이다. 이 계율은 매우 엄격히 지켜졌다. 도살법이 제대로 지켜지는지 랍비가 입회하여 검증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유대인에게 오락을 위해 사냥하는 일 따위는 있을 수도 없다.
유대 계통의 독일인 시인 하이네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를 통틀어 유대인은 짐승이 사냥꾼에게 쫓기듯이 몰이를 당했다. 그러나 유대인은 동물에게도 몰이를 하지 않았다.”
과거를 현재형으로 말한다
유대인에게 과거는 자동차의 백미러와 같다. 자동차를 앞으로 가게 하려면 백미러가 꼭 있어야 한다. 백미러는 앞쪽으로 달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뒤로 달리기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달려가려면 뒤를 돌아보는 일이 필요하다.
<탈무드>는 옛날을 말할 때에도 과거형으로 적지 않고 반드시 현재형으로 적는다. 진실이란 과거나 현재나 미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실은 모든 시대에 존재하는 것임을 나타내려고 현재형으로 적는 것이다.
나는 여러 해 동안 미국 펜실베니아 주에 있는 한 교도소의 랍비로 봉직한 일이 있었다. 내가 일한 교도소에는 2,000명 남짓한 기결수가 복역하고 있었다. 그 중에 유대인은 네 명, 많을 때에는 여덟 명 정도였다. 이것은 미국 전체 죄수의 수에 비해 유대인 수가 극히 적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나는 유대인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의 가정 환경과 경력을 조사해 보았다. 그 결과 유대인 죄수들 모두 공통된 사실이 있었다. 즉 그들의 부모 중 어느 한쪽은 비 유대인이라는 것이다.
미국 전체의 범죄자와 불량 소년과 알코올 중독자 가운데 유대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통계표에 계산해 넣기 어려울 만큼 극소수이다. 이것을 뒤집에 생각한다면 비 유대인 가정의 약점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3>유대인의 지식
유대교는 어머니 종교이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을 영어로 ‘투 프레이(to pray)'라고 하고 히브리어로는 ‘히드 파레이르’라고 한다. 영어의 ‘프레이’란 말은 ‘하나님께 청합니다’, ‘하나님께 부탁합니다’란 뜻이다. 히브리어의 ‘히드 파레이르’란 말은 ‘스스로를 평가한다’, ‘자신을 달아보거나 측정해본다’란 뜻이다
그러므로 유대인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은총의 부탁만이 아니라 기도할 때마다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의 율법에 비추어 올바른가를 스스로 평가하는 일이다. 따라서 유대인은 기도할 때마다 율법에 맞도록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신의 삶을 살피어 죄에서 멀게 한다.
지식도 한 나라의 국력이 될까
우리는 ‘국력’이란 말을 자주 한다. 국력이란 한마디로 한 국가의 역량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국력을 논할 때 몇 가지 언급되는 것들이 있는데, 그 첫째가 ‘인구’, 둘째가 ‘천연 자원’, 셋째가 ‘지리적 조건(국토)’ 등이다. 역사가 보는 대로 이러한 것들을 국력이라고 한다면 유대인에게는 국력이라고 말할 만한 것이 없다.
유대인의 인구는 극소수이며 언제나 전 세계 인구의 0.5%쯤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천연 자원도 없다. 그나마 유대인은 2,000년에 걸쳐 국토도 없이 남의 나라로 떠돌아다녔다.
그러나 유대인에게는 풍부한 신본주의 사상과 세계적인 지식이 있었다. 역사를 통틀어 유대인은 전 세계에서 가장 문맹률이 적었다. 또한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저버리지 않은 강한 사명감이 국력을 지탱하는 기둥이 되어 유대인의 단결을 지켜주었다.
유대인은 옛날부터 강력한 목적 의식을 지녀왔다. 이 억센 목적 의식을 오랫동안 잃지 않은 것은 유대인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으면서도 굳게 뭉쳤기 때문이다.
유대인이 흔히 인용하는 예로 전쟁에서 돌아온 부상병의 이야기가 있다.
미국의 뉴욕 시 5번가를 휠체어에 탄 병사, 목발에 의지한 병사, 한쪽 눈을 잃은 병사들이 참혹한 전쟁을 치른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듯 행진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 상처도 없고 건강하게 보이는 병사 한 사람이 그들과 함께 걸어왔다. 길가에 서 있던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이 나와 “이봐요 군인 아저씨, 당신은 왜 이 대열에 끼여있죠?” 라고 물었다. 젊고 튼튼한 몸을 가진 그 병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다만 걸어가라고 해서 걷고 있을 따름입니다. 나는 내 이름도 모르고 내가 지금 무엇 때문에 걷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때야 비로소 사람들은 그 병사가 어떤 충격 때문에 기억 상실증에 걸린, 부상병 중에서도 가장 불행한 사나이임을 알게 되었다.
한 민족이 정체성을 잃어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큰 비극인지를 빗대어 말한 것이다. 유대인들이 자주 인용하는 이야기이다.
<4>유대인의 안식일
유대인의 세계관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
안식일은 유대인이 살아남는 데 큰 역할을 한 무기이다. 안식일은 히브리어로 ‘사밧’이라고 하는데, 금요일의 해지는 때부터 토요일의 해지기 바로 전까지의 하루를 말한다.
유대인의 안식일은 가정의 날이다. 가족과 함께 지내는 날이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특별히 정결하게 몸을 씻고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을 뿐 아니라, 가장 좋은 음식을 준비해 먹으며 가족사와 교육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무엇보다도 가족이 모여 함께 기도를 한다.
유대인은 이런 가정 의식을 유대인 전체로 확대시킨다. ‘크랄 이스라엘’이라는 히브리어는 ‘유대인 모두가 한곳에서 태어난 가족’이란 뜻이다. ‘크랄 이스라엘’이란 말은 세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을 수평적으로 결속시킬 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수직적으로도 결속시킴을 뜻한다. 그리고 그 ‘크랄 이스라엘’이라는 유대인의 세계관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 유대인에게 가정은 그들을 지켜주는 산성이요, 요새이다.
유대가정에서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생각해주는 것은 가르쳐서 아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느껴서 익히는 것이다. 나는 가정의 따뜻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자라났다.
우리집은 청결했고 방에는 책들이 빽빽이 쌓여 있었으며, 또한 <토라>나 <탈무드>, 세계 정세, 예술 등이 우리 가정의 일상적인 이야기였다.
그러나 바깥세계는 전혀 딴판이었다. 오락을 찾고 술을 마시고 교양 없는 생활로 흥청거렸다. 무엇보다도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바깥 세계 사람들은 지식과 진실 탐구를 소홀히 여겨 무지하다는 것이다.
그들도 일요일이되면 가족과 교회에 나가 기도하며 사랑을 말하지만, 일요일이 아닌 날에는 유대인에게 돌을 던지며 미워했다. 나는 바깥 세계를 볼수록 유대인의 세계가 얼마나 바르고 사랑이 넘치며 정의를 높이고 섬기는가 깊이 인식한다. 그리고 아울러 강한 자부심을 가진다.
인생의 짠맛에 절여져 있기에
유대인은 미국에 와서 거주지를 고를 때 집이 훌륭하다거나 정원이 있다거나 하는 것보다는 가까운 곳에 좋은 학교가 있는가를 잣대로 삼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걸어서 학교에 갈 만한 거리에 있는 집이어야 했다.
전세계 유대인은 태어나면서부터 3개 국어를 자연스럽게 배운다. 자신들의 모국어인 히브리어, 자신이 살고 있는 지방의 방언, 그리고 제3국어이다. 다양한 언어와 문화 습득은 국제화의 무형 자산이다. 나 역시 우리 집에서는 이디쉬 말로, 친구들과는 영어로, 학교에서는 히브리어로 이야기했다.
또한 유대인들은 음악과 예술을 배우며 자란다. 나는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다. 우리집은 가족끼리 종종 합주를 하곤 했다. 누나 골다는 만돌린을 뜯고, 여동생 라헬은 피아노를 쳤으며, 아버지와 형 시몬은 바이올린을 켰다. 유대인의 가정은 어느 집이든지 가족 단위의 합주를 할 수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연주하는 가정 창가에 모여 앉아 음악을 듣곤 한다.
<5>유대인의 비즈니스
유대인의 비즈니스에는 유대의 역사가 담겨져 있다
유대인은 장사 솜씨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유대인이 장사꾼이 된 것은 그것에만 그들의 살 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유대인은 냉혹한 차별 속에서 억압받으며 살아왔다. 중세에 유대인에게 허락된 생업이라고는 장사뿐이었다. 그 까닭에 유대인은 늘 선구자로서 새로운 분야에 손을 대어 발전해나가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생명처럼 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자동차 업계에서 선구자 역할을 한 미국의 닷지 형제와 프랑스의 헨리 포드로 일컬어지는 시트로엥이 유대인임은 유대인의 개척정신을 보여주는 한 예다. 또 뉴욕시 매디슨가(街)의 광고 업계, RCA를 비롯해 라디오와 텔레비전 따위의 통신 산업, 곧 오늘날 정보 산업으로 불리는 분야를 유대인이 개척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 사정에서이다.
천국 문 앞에서 맨 먼저 묻는 말
랍비 라바는 <탈무드>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했다.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가면 천국의 문 앞에서 맨 먼저 묻는 말은 “너는 장사를 정직하게 했느냐?”라는 것이다. 이것이 죽은 후에 받는 첫 번째 질문이다.
랍비들이 하나님께서 너는 얼마나 자선을 했는가, 혹은 기도를 했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장사를 했느냐는 질문을 맨 먼저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일이다.
<미드라쉬>에는 장사를 정직하게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성서의 세계를 실현하는 것이라는 구절이 있다. 상거래에서 부정을 저지르는 자는 성서를 파괴하는 자라고 경고하고 있다.
13세기 위대한 랍비 모세 벤 야곱은 “고객의 피부색이나 종교를 불문하고 팔려는 상품에 흠이 있으면 그 사실을 사려는 사람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이것이 유대의 계율이다”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이름난 랍비였던 모세 이삭은 “양복을 재단하고 남은 자투리를 손님에게 되돌려주는 양복점이나 품질 좋은 가죽으로 구두를 만드는 양화점이나 무게를 속이지 않는 정육점은 다음 세상에서 랍비보다 더 중요한 삶을 누리게 된다”라고 말했다.
유대인의 도덕은 일반적이면서도 일상 속의 구체적인 일들과 하나하나 결부되어 있다. <탈무드>에서도 매우 구체적인 예를 제시한다. 물건을 지나치게 비싸게 팔아서는 안 된다는 것에서부터 품질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규정하고 있다. 만약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이라면 이러한 상도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일본에 ‘사무라이’의 도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에게는 장사하는 도, 즉 상도(常道)가 있다.
유대인 사업가는 과음하지 않는다
민족마다 술을 좋아하는 정도는 다르지만 모두 술문화가 있다. 그러나 유대인은 과음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술 취하는 일이 없다. 따라서 유대인은 비즈니스를 할 때 언제나 냉정할 수가 있다. 실제로 비즈니스를 위한 칵테일 파티에 가면 유대인 비즈니스맨들은 십중팔구 생강을 가미한 청량 음료수나 사이다를 마신다. 그리고 언제나 맑은 머리로 사업 계획을 세운다.
유대인은 언제나 정당한 값만 받고 판다
과거에 많은 나라들이 상거래를 할 때 자기 나라에 유대인이 없으면 일부러 찾아가 데려오곤 했다.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 유럽 대부분의 국가 뿐 아니라 작은 후진국에서도 자국의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유대인을 초청했다. 그러나 그러한 처지이면서도 유대인이 지나치게 성공하면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곤 했다.
이와 같이 유대인은 중세 동안 계속하여 다른 민족들로부터 박해를 받아왔다. 그 까닭은 유대인이 비즈니스의 재능이라는 양날의 칼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유대인에게 가해진 집단 폭행은 유대인들이 차지한 경제적인 지위를 박탈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 땅에서 다시 시작하거나 다른 땅으로 옮겨가서 빈손으로 다시 출발했다. 그리고 성공하면 다시 박해를 받는 순환적인 운명을 되풀이했다.
그렇다면, 그러한 운명 가운데 살아나는 큰 무기는 무엇이었을까?
1)끈기- 나라도 무기도 없었지만, 하나의 비즈니스가 불타서 없어지면 곧장 다른 비즈니스를 생각해내고 다시 도전했다.
2)의지- 이 불굴의 의지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에서 나온 것이다.
3)자기 신뢰, 자신감- 비즈니스가 깨지더라도 그것을 다시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이다.
4)높은 교육 수준- 비즈니스는 높은 교육 수준과 지능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유대인 중에는 문맹이 없다.
유대인은 조국애와 도덕심을 가지고 비즈니스를 한다. 비즈니스를 하면서도 반드시 ‘키드쉬 하셈’을 생각한다. 키드쉬 하셈이란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뜻인데, 자신의 평판을 유지하거나 유대인의 명예를 부끄럽게 하지 않음을 가르킨다.
나의 할아버지는 폴란드에서 모자점을 경영하셨다. 할아버지는 만약 당신이 판 모자에 조금이라도 흠이 있거나 어떤 결함이 드러나면 손님의 집까지 찾아가서 얼마를 돌려주었다. 바른 장사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 바른 일을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동족끼리 거래한다
유대인은 사업에 조금만 성공하면 형제들을 자신의 비즈니스에 끌어들이는 식으로 가족끼리의 연결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또한 유대인은 모든 것을 가족 단위로 생각하면서 민족을 하나의 큰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유대인이 민족 자체를 하나의 큰 가족으로 생각하는 것은 비즈니스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이와 같은 의식은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대인 비즈니스맨들을 협력 관계로 묶어둘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유대인 비즈니스맨이 사업차 세계 어느 곳을 들른다면 그는 우선 유대인 회당이 어딘가를 찾으면 된다. 이것은 그가 경건한 유대인이므로 기도 드리기 위해 회당을 찾는 것만은 아니다. 그곳에 가면 각종 실질적인 정보와 숙소 등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예배당은 기도와 예배를 위한 곳이지만, 유대교 회당은 가정과 마찬가지의 장소이다. 이런 자리에서 서로 이야기하는 가운데 정보를 주고 받으며 새로운 비즈니스를 구상하거나 의논하기도 하고, 때로는 열기에 찬 사업가들끼리 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또한 그 자리에서 동포 비즈니스 클럽이 생기기도 한다.
돈은 하나님 것이다
그 사람의 됨됨이는 돈에 대한 관심으로 알 수가 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미술품을 사는 데 쓰고, 어떤 사람은 사업에, 어떤 사람은 술과 여자를 위해 쓴다. 그렇다면 유대인은 무엇 때문에 돈을 버는가?
첫째는 교육이다.
둘째는 자녀들이 가정을 이룰 때 도와주기 위해서.
셋째는 자선을 위해 돈을 번다.
히브리어로 선행을 ‘미쓰바’라고 한다. 그리고 유대인은 선한 일을 할 때마다 ‘바하’라고 말해야 한다. 그것은 ‘축복’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을 존중한 자기의 행위를 축복하는 말이다. 그러나 자선을 베풀 때에는 ‘바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자선은 선행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행위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돈을 자기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 다만 관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대인이 자선하는 것은 당연히 하더라도 지나친 자선은 잘못이라고 가르친다. 말하자면 중세 기독교에서처럼 자신의 재산을 다 내놓고 거지 신세가 된 성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대교에서는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재물이 넉넉하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라는 격언이 있다. 가난이 미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탈무드>에서도 자신을 쪼들리게 할 만큼의 자선은 엄격히 말리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러한 행동이 오히려 사회에 더 무거운 짐이 되기 때문이다.
<6>유대인의 교육
아이는 세 살 적부터 가르쳐라
교육은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두뇌를 명석하게 이끌어주는 것이다. 영국의 철학자 C.P. 스노우는 "유대인은 타고나기를 머리가 우수하므로 지능지수가 높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은 옳지 않다. 유대인은 어릴 때부터 교육이라는 문화에 둘러싸여 자라난다. 그리고 세 살이 되면 <토라>와 <탈무드>공부를 시작한다.
아이에게 처음으로 <탈무드>를 읽힐 때 부모는 반드시 꿀물 한방울을 책에 떨어뜨리고서 아이에게 입을 맞추게 한다. 이것은 <탈무드>에 대한 애착을 갖도록 하는 동시에 공부가 사람에게 매우 달콤한 것임을 가르쳐준다.
공간보다 시간이 더 중요하다
유대인들은 기도를 드릴 때 일요일에는 “오늘은 안식일에 대해서 첫 번째 날이다”라고 제창한다. 화요일에는 “오늘은 안식일에 대해서 두 번째 날이다”라고 제창한다. 즉 똑같은 말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각 요일에 해당하는 말을 바꿔가면서 하는 것이다.
안식일이라고 하면 글자 그대로 푹 쉬는 날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유대인의 안식일에는 또 다른 중요한 뜻이 있다. 곧 이날은 교육의 날인 것이다. 안식일에 가정에서 나누는 화제는 오로지 교육에 관계된 것들 뿐이다. 아버지는 한 주일 동안 자녀의 교육이 어떤 과정으로 진행되었는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거의 학교 공부에 대한 것만 질문한다. 지난 한 주일 동안 무엇을 얼마나 배웠느냐고 묻는다. 이것으로써 아들은 학교 공부를 복습함과 동시에 아버지 앞에서 시험을 보는 셈이 된다.
이런 관습은 유대인으로 하여금 교육에 대한 전통적인 자세와 배우는 일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를 더욱 다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와 함께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아이들이 이해하는 분위기도 이루어진다.
옷을 팔아 책을 산다
14세기의 저명한 유대인 계몽가 임마누엘은 그가 지은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돈을 책을 사는 데 써라. 그 대가로 거기서 황금과 지성을 얻을 것이다.”
또 <세이카 하슈 딘>이라는 책에서 그는
“만약 잉크가 책과 옷에 동시에 묻었거든 먼저 책에 묻은 잉크부터 닦아내고 난 다음에 옷에 묻은 잉크를 처리해라. 만약 책과 돈을 동시에 땅에 떨어뜨렸다면 먼저 책부터 집어올리라.” 고 일렀다.
아이는 우물이다
유대인은 아이를 우물과 같다고 생각한다. 우물은 퍼내면 퍼낼수록 새로운 물이 솟아난다. 그러나 퍼내지 않고 그대로 버려 두면 그 물은 썩거나 말라버린다.
기도책을 읽으려고 글을 배운다
유대인 거리(게토)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고 드나든 곳은 도서관이다. 그러나 그 곁에 있는 기독교인 거주 지역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드나든 곳은 술집이다.
오랜 세월 동안에 유럽에서는 많은 사람이 글을 읽지 못했다. 그러나 유럽인에게는 초등학교에서 글을 깨우쳐주는 의무 교육이 아주 최근에 생긴 일이지만 유대인에게는 그리 새로운 일이 아니다. 이미 몇 천년 전부터 그렇게 해온 것이다.
유대인 아이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났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같은 배를 타고 여행을 했다. 부자는 다이아몬드와 황금과 온갖 보석이 들어 있는 큰 가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그가 가진 것이라곤 지식 뿐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타고 있던 배가 태풍을 만나 침몰하고 말았다. 그 부자와 가난한 사람은 모두 벌거벗은 채 구조를 받았다. 그 부자는 가지고 있던 보물을 몽땅 잃어버렸음은 말할 것도 없다. 구조 받은 뒤에 두 사람 중에서 더 많이 가진 사람은 어느 쪽이겠는가?
이 이야기는 유대인에게 특별한 뜻이 있다. 그 배가 만난 태풍은 유대인이 오랜 세월에 걸쳐 기독교인으로부터 받은 박해를 상징한다. 또 이 이야기는 교육이 재산보다 더 중요함을 말한다. 가진 것이 없더라도 교육만 있으면 새로운 거리에서 새롭게 출발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훈은 유대의 어머니들이 그들의 아들들에게 거듭거듭 가르치면서 2,000년 가까이 내려왔다.
랍비는 유대를 상징한다
가르친다는 말을 히브리어로 ‘야로’라고 한다. ‘야로’의 본래 뜻은 ‘인도한다’, ‘앞서가면서 뒷사람을 따라오게 한다’는 것이다. 지식을 전달하거나 가르친다는 뜻이 아니다. 말로만 가르치고 그 길을 같이 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동반자가 됨을 뜻한다.
<탈무드>의 가르침에 따르면, 만약 자기 아버지와 교사가 한꺼번에 해적에 붙잡혀 노예 시장에 팔려갔는데 한 사람 밖에 사올 돈이 없다면 먼저 교사를 구해야 한다. 아버지는 다만 자식을 세상에 데려왔을 뿐이지만, 교사는 사람을 영원한 세계로 이끌기 때문이다.
유대의 랍비는 다른 종교의 성직자처럼 종교의 문제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생활에 대해서도 지도한다. 예를 들면 랍비는 짐승이 정당하게 도살되었는지 어떤지를 가려내야 한다. 또 소나 양이나 닭의 목을 단번에 베는 칼을 감정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랍비를 임명할 때 그 임명장의 마지막 구절을 보면 “요레 요레 야덴 야덴”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것은 “사람을 가르쳐도 좋고, 재판을 해도 좋다”라는 뜻이다.
유대인 거리가 박해를 받아 불에 타서 모든 학교와 책을 잃게 되었을 때에도 랍비는 살아있는 도서관으로서 유대인의 가르침을 지켜왔다.
다른 민족들은 그들의 상징으로 깃발, 건물, 경치 같은 것을 택하지만 유대의 상징은 랍비, 곧 교사이다. 그들은 백성들 사이에서 태어나 백성들의 모든 생활을 지도해왔으므로 결코 권위로만 살아온 것이 아니다.
7.유대인의 동질성
유대인은 한 우산 밑에 모여 산다
이전에 모르던 유대인들이 만나자마자 서로 도와주는 것은 유대인 세계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다. 유대인이 알지 못하던 유대인을 처음 만나는 것은 새로운 무한의 세계가 열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미드라쉬>에 이런 말이 나온다. 아무리 힘이 센 남자라도 다발로 묶은 갈대는 꺾지 못한다. 그러나 갈대를 한 개씩 한 개씩 꺾으면 어린아이라도 그것을 꺾을 수 있다. 유대인은 언제나 힘을 뭉쳐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유대인은 소화가 안 되는 민족이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슬러 가다가 고래 뱃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때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랬더니 그 고래는 육지 가까운 곳에 와서 요나를 토해버렸다. 요나는 되살아났다.
<토라>에 나오는 이 이야기에는 많은 해석이 따른다. 사람이 고래에게 먹혔다면 고래의 뱃속에서 소화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요나의 운명이 아니었다. 요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고래에게 동화(同化)되기를 거부한 것이다.
실제로 반 유대주의자들은 “유대인은 삶든지 굽든지 어쨌든 먹을 수가 없다”, “유대인은 소화가 안된다”, “유대인을 우리편으로 만들 방법은 없다”는 말들을 하곤 한다. 또 고대에 많은 나라의 정부들이 유대인은 소화가 안 되므로 훌륭한 시민이 될 수 없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나는 유대 세계는 정의에 바탕을 둔 세계이므로 유대인을 나라 밖으로 토해버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러시아도 유대인을 소화시키지 못하고 있는데, 러시아를 고래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러시아가 고래처럼 유대인을 먹기는 했으나 끝내는 소화시키지 못하고 그들을 이스라엘이나 그밖에 다른 나라로 토해버려야 했다.
역사적으로 그 어떤 제국이나 힘센 나라도 유대인을 삼킬 수는 있었지만 결코 소화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문화와 교육의 정도가 저급한 사람은 남에게 저주를 퍼붓고 폭력에 호소한다. 그러나 교육의 정도가 높은 사람은 상대를 욕하거나 주먹을 쓰는 대신 우스갯소리로 대꾸한다.
유대인은 갇힌 동족을 해방시킨다
유대인 사이에는 거리가 없다, 그들 사이에는 관계가 있을 뿐이다.
유대인의 성전인 <탈무드>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하나는 율법을 기록한 <할라카>이며, 다른 하나는 전설을 기록한 <하가다>이다.
<하가다>는 13세기부터 14세기에 걸쳐 프랑스와 아라비아에서 편찬되었다. 이 책에는 유대 세계를 묘사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그 중에 여러 인종이 한 배를 타고 항해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갑자기 배가 해적의 습격을 받아 선객들은 모두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다. 선객들은 한 사람씩 값이 매겨져 일꾼으로 팔렸는데, 먼저 크고 힘센 로마 청년이 작업장 일꾼으로 팔렸다. 그리고 아리따운 희랍 여인이 어떤 자의 첩으로 팔렸다. 그리고 유대인 차례가 되었다.
노예 상인이 “이 자는 유대인입니다, 몸도 좋고 일도 잘한답니다” 라고 외쳤다. 이때 재빨리 값을 부르는 자가 있었다. 여러 사람이 값을 더 얹어 엎치락뒤치락 했으나 결국 그자가 유대인 노예를 갖게 되었다. 그 사나이는 유대인 노예를 데리고 시장을 떠나자, 얼마쯤 후 그에게 “샬롬” 하고 인사를 했다. 그 사람은 유대인이었던 것이다.
유대인은 유대인이 곤궁에 빠진 것을 보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구해준다. 물론 그 노예를 산 유대인은 그와 전혀 만난 적도 없고, 그를 자유롭게 해준 일로 인해 그를 다시 만날 일도 없을 것이다. 또한 어떤 보상을 받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동족이다.
‘비드온 슈바임’이라는 히브리어는 유대인은 붙잡힌 동족을 해방시켜 줄 의무가 있다는 뜻이다. 어떤 유대인이 이방인들에게 노예가 되면 유대인들은 반드시 몸값을 치르고 그를 구출해냈다. 그 몸값은 유대인 사회가 헌금하여 충당하는 것이 통례였는데, 이런 돈을 ‘비드온 슈바임 자금’이라고 했다. 이때는 넉넉한 사람이거나 가난한 사람이거나 모두 헌금을 했다. 이 헌금을 위해서는 유대인 사회에서 가장 존귀한 성경마저 팔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유대인의 ‘비드온 슈바임’은 아직도 살아있다. 히틀러 시절 나치의 전 고관이나 지휘관 가운데는 유대인에게 매수되어 유대인을 자유로운 지역으로 놓아준 대가로 오늘날 스위스 은행에 엄청난 돈을 예금해 두고 있는 자들이 적지 않다.
이 ‘비드온 슈바임’ 자금으로 구출된 유대인들은 지금 전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다. 누가 누구에게 구출되었느냐 하는 것은 유대인에게 중요하지 않다. 어떤 사람이 자기를 구해주었는지조차 모르는 일도 많다. 그렇더라도 상관없다. ‘비드온 슈바임’은 유대 민족이 살아남는데 지금까지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름을 욕되지 않게 하라
유대 문화의 특징은 ‘키드쉬 하셈’이다. 이 말을 직역하면 ‘이름을 성별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인다’ 라는 뜻이다. 이 말은 <토라>에서 왔다.
랍비 시몬이 아랍 상인에게서 나귀 한 마리를 샀다. 그런데 나귀를 살펴보니 갈기 쪽에 값비싼 보석이 장식되어 있었다. 물론 아랍 상인은 나귀를 팔 때 보석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랍비 시몬은 그 아랍 상인을 찾아가 보석을 돌려 주었다. 아랍 상인은 반갑고 놀라서 이렇게 외쳤다. “선생의 하나님만이 찬양을 받으소서!”
바른 행위를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이다. 19세기 후반에 독일의 유대인 지도자로서 유명했던 랍비 레이필드 하시는 <열아홉의 우질의 편지>라는 책속에서 “유대인은 유대인이란 사실을 숨겨서는 안된다. 유대인이 남의 존경을 받기 위해 유대인임을 밝히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유대인은 정의의 민족이기 때문이다”라고 서술했다. 유대인의 생활은 항상 키드쉬 하셈에 의해 유도되고 있으므로 유대인이 유대인으로 살아남는 한 세계 어느 곳에서도 존경을 받을 것이다.
<8>유대인의 유머
고난 속에서 웃음을 배운다
고난은 웃음을 낳고 웃음은 힘을 낳는다. 웃음은 승리자에게만 있는 특권이지만 유대인은 패배를 당하고 나서도 웃음으로써 그 패배를 이겨낼 수 있었다.
너무 심각하게 꼬치꼬치 생각하는 사람은 외곬으로 빠지기 쉽다. 미국의 흑인에게는 유머가 결여되었기 때문에 폭력으로 기울어지기 쉽다라는 말도 있다. 사람은 세상에 대해서도 웃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웃을 수 있어야한다. 고도의 문화를 가진 민족일수록 유머 감각이 발달되어 있다. 문화와 교육의 정도가 저급한 사람은 남에게 저주를 퍼붓고 폭력에 호소한다. 그러나 교육의 정도가 높은 사람은 상대를 욕하거나 주먹을 쓰는 대신 우스갯소리로 대꾸한다. 또한 조크 속에는 사물을 그저 부풀려 웃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 숨어있다. 유대인의 조크는 그들이 강요받은 고난의 삶을 반영한다.
유대인이 미국에 이민 왔을 무렵 야구는 아주 새롭고 진기한 경기였다. 하루는 이민 가족 아들이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오늘 다저스가 양키즈에게 이겼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이렇게 반문했다.
“그것이 유대인에게 좋은 일이냐?”
여러 나라와 땅들을 이리저리 쫓겨다니면서 유대인들은 무슨 소식을 들으면 맨 먼저 “그것이 유대인에게 좋은 것이냐?”라고 묻는다. 유럽에서 유대인이 어떤 처지에 살았는지 알지 못한다면 이런 조크가 왜 우스운지 알기 어렵다.
독일에서 있었던 일이다.
유대인 남자 둘이 길을 가고 있었는데 한 남자는 증명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마침 옆에서 경찰관이 걸어왔다. 그때 증명서를 가진 남자가 말했다. “경찰관이 오면 나는 느닷없이 뛸 테니 자네는 태연히 걸어가게”
경찰관이 가까이오자 그는 도망치는 토끼처럼 내뺐다. 경찰관이 곧바로 그를 뒤쫓았다. 그 유대인은 2킬로미터쯤 달아나다가 멈추어 섰다. 경찰관이 그에게 증명서를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태연하게 경찰관에게 증명서를 내보였다. 경찰관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런데 왜 달아난거야?” 라고 물었다. 그는 “제가 요즘 병원에 다니는데 의사가 하루에 2킬로는 달리라고 해서 말이죠, 나는 나으리께서도 뛰시길래 병원에 다니시는 줄 알았죠” 하고 능청을 떨었다.
<9>유대인의 돈
유대인의 상술이 좋을 수밖에 없는 이유
누구나 ‘유대인’ 하면 ‘돈’을 연상하는 것 같다. 유대인의 뛰어난 상술은 고난의 떠돌이 생활에서 비롯된 것이다. 역사는 유대인을 이스라엘에서 추방했다. 땅을 잃고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 유대인은 장사꾼 외에는 달리 살아갈 길이 없었다. 유대인은 교육 수준이 높아 읽고 쓰고 셈하는 능력 뿐 아니라, 사물을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또한 유대인은 전세계에 흩어져 있으면서도 같은 민족이라는 강한 연대의식이 뛰어나 어디서나 하나로 묶일 수 있었다. 따라서 유대인끼리는 언제나 긴밀하게 정보를 주고 받으며 국제적인 교역의 그물을 치고 있었다.
<10>유대인의 저항
유대인은 불타도 없어지지 않는다
유대인은 어떠한 고난의 불에도 타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도 전세계에 살아남아 세대 차이 없이 신본주의 신앙으로 뭉쳐있다. 그들의 교육과 신념, 끈기와 희망은 그들을 어느 곳으로 이주하던, 어떠한 탄압을 받던 변함 없는 유대인으로 살아남게 만들고 있다. 단순히 살아남는 것에서 지나, 경제를 비롯한 각 방면에서 세계를 운영할 지도세력으로 성장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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