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은 이들이 묻혀 있는 공원묘지를 즐겨 찾는다.

2007. 12. 8. 20:23회원자료/1.휴게실

 

 

 나는 죽은 이들이 묻혀 있는 공원묘지를 즐겨 찾는다.

 

살아있는 자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따스하고 평온한 삶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곳엔 삶이 있다.

묘비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생면부지의 그 사람이 언제 어디서 어떤 삶을 살다가 몇 살에 죽었는지 가늠해 보노라면,

그리고 남은 가족들이 묘비에 새겨놓은 사랑의 고백을 읽노라면

어느새 그들이 내게 살아와 지나간 그들의 역사를 들려주고

그들이 살던 고향이야기며 삶의 애환을 속삭여 주는 듯하다.

사랑하는 부모 아내 남편을 생각하며,

때로는 사랑하는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가 애절한 가슴으로 새겨놓은 묘비문에서

그들이 위로와 사랑 가운데 세상을 떠났음을 확신하게 된다.


한 많은 세상에 한 맺힌 생을 살다 죽어간 영혼들이 왜 없으랴마는

그곳은 용서와 화해와 사랑의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난 자들이

남은 자들을 마음으로 품으며 조용히 눈감고 있는 곳,

영원한 평화를 얻은 사람들이 묻혀 있는 곳이다.


무덤 속 그들에게서 영원한 평화와 사랑을 느낀다.

그들에게서 인간의 부패성이 아니라 영원성을, 죽음을 극복한 영원한 삶을 느낀다.

죽음은 없다.

인생이여, 영원을 살아라.

이리하여 묘지는 내게 죽은 자를 묻어둔 곳을 넘어 살아 있는 나의 욕심을 묻는 곳이 된다.

나의 영원한 생명을, 나의 부활을 고백하는 곳이 된다.

욕심으로 찌든 인간에게 사랑과 생명을 선포하는 곳이 된다.


살아 있는 인간들에게 사랑의 마지막 말, 사랑의 전부를 남기고 영원을 알리는 그곳에

 

어찌 천국의 평화가 흐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독일 사람들이 공원묘지를 '프리드호프'(Friedhof:平和園)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평화롭게 누워있는 이들 영혼 앞에서

미움과 반목, 시기와 질투로 세상을 살아가는

메마른 내 이기적인 영혼과 배타적인 우리 사회를 부끄럽게 바라보며

나는 그들의 혼을 달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고요한 침묵에 압도되어서 평화로운 위안을 얻는다.

내가 그들의 혼을 달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모두를 용서한 그들의 혼이 나의 영혼을 어루만지며 달랜다.

정적 속에 퍼져있는 평화로운 분위기에 압도되어

나는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할 용기를 잃고

오히려 그들에게 살아 있는 내가 평화롭게 살도록 빌어 달라고 기도하게 된다:

죽은 영혼들이여 우리 살아있는 불쌍한 영혼을 위해 빌어주소서.


옮겨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