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9. 28. 23:06ㆍ목양자료/2.설교자료
벧엘에서 생긴 일
구약의 말씀 / 창세기 28:10-19
서신서의 말씀 / 데살로니가전서 5:16-24
복음서의 말씀 / 누가복음서 17:11-19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믿음의 조상 야곱이 도망가다가 밤에 잠든 사이에 꿈을 꾸었는데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가 있고 그 위에 천군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하나님이 직접 사다리 꼭대기에 올라가서 축복을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실 야곱이란 사람은 우리가 믿음의 조상으로 존경하지만 한 일은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을 합니다. 형님 에서를 속여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산 사람. 엄마와 둘이 짜고 양가죽을 손에 걸치면서 자기 형처럼 털 난 팔을 대고 아버지한테 가서 축복을 받은 사람.
사실 이런 얘기들은 인간적인 얘기이기는 하나 성경 말씀에 쓰인 대로 이게 축복의 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얘기를 기록한 성경 말씀이 사실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있는 그대로의 기록이기 때문에 사실은 기쁩니다.
성경에 천상의 얘기만 가지고 성경 말씀 썼을 거 같은데 구약성경이 때로는 악한 사람의 이야기 인간의 면모를 고스란히 들춘 이야기를 적으니 그래서 참 아름답습니다. 너무 인간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적인 얘기 뒤에 또는 그 배경에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은총의 이야기가 써있습니다.
야곱은 얌체 같은 동생이었지만 어차피 아버지를 통해서 축복을 받은 이상 축복을 누릴 권한이 생겼습니다. 어머니와 짜고 축복을 갈취했지만 그러나 이제 축복 받은 야곱이 어머니의 고향으로 도망을 갑니다.
얼마큼 도망갔느냐 하면 도망간 장소가 오늘 벧엘이라 이름 하는 곳인데 성경 주석에 을 봤더니 85km 정도 혼자 걸어서 왔다고 돼있습니다. 지금도 먼 길이지만 옛날에도 굉장한 길일 겁니다. 그걸 혼자 도망가는 신세입니다.
너무나 지쳐서 오늘 루스라 이름 하는 곳에서 돌을 베개 삼아 잠이 들었다고 하는데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의 마지막 한계점입니다. 얼마나 추웠겠습니까? 야곱의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잔 침상 중에서 가장 차가웠던 침상. 아마 그럴 겁니다. 여기서 축복받은 야곱이 하나님께 호소하는데 호소할 때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사다리를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순간에 지금 네가 누워있는 가장 차가운 땅, 최악의 상황, 여기서 이 땅을 차갑다고 생각지 마라. 이 땅을 네가 번식시킬 모든 종족들의 중심이 되게끔 이 땅을 축복의 땅으로 만들겠다. 최악의 상황을 최선의 상황으로 뒤바꿔 주겠다. 이걸 가리켜서 아마 기적이라고 하면 될 겁니다.
야곱은 선조들과 똑같이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한 번도 못 만났습니다. 야곱이 직접 만나지도 못하고, 들어보지도 못한 그 하나님을 아주 차가운 산속에서 돌베개를 베고 자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천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믿고 야곱이 일어나서 그곳에 자기가 베었던 베개를 기둥삼아 집을 짓고 작은 신전 하나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만들어 놓고 하는 말이 이곳은 내 최악 웅덩이지만 이곳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 하나님의 집. 벧엘. 하나님의 침상. 내가 누워 있었는데 사실은 이제 하나님이 눕기로 하고 동고동락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은 축복받은 분이긴 하지만 아브라함에게도 비참한 최악의 상황이 있었습니다. 늙게 된 아브라함이 아내와 함께 아들 하나를 주셔서 낳았는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하나님이 야속하게도 바치라고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지요.
하나님의 축복받은 하나밖에 없는 늦둥이 아들을 데리고 가서 산 제물로 바치라니! 이를 위해 장작더미를 갖고 아내와 함께 가는 모습.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 아브라함의 최악의 상황은 모리아산에서 아들을 바치라고 하는 명령. 하나님은 지독히도 차가운 인간이십니다.
바치는 순간에 하나님이 모리아산에 희생 제사 명령을 취소하시고 다른 숫양 하나를 보내 대신 제사를 지내게 하고 이삭을 살려 주었습니다. 그 이삭이 난 아들이 야곱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존경하는 분이시긴 합니다만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다 체포해서 죽이기로 하고 열혈 당원의 입장으로 가다가 그만 눈이 멀어 고꾸라졌습니다.
최고의 학자, 열성적인 유대신봉자,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란 사람에게 걸려서 눈이 먼 사람. 아마 사도 바울은 3일 후에 고백을 해서 하나님의 사도가 됐지만 눈이 먼 순간부터 하나님 나한테 이럴 수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 아마 최악의 상황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눈 먼일 때문에 사도바울은 최고의 선교사가 됐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믿는 구세주입니다만 이 분의 최악의 상황은 뭡니까? 예수께서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를 지고 죽을 때에 장면. 골고다 언덕에서 피를 흘리고 몸을 찢기면서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에게 항변하시는 예수. 왜 나한테 이런 운명을 허락하십니까?
그 예수가 누웠던 무덤은 얼마나 차가웠겠습니까? 그분이 지셨던 십자가는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 위인마다 다 이런 차가운 인생, 차가운 침상이 하나씩 있습니다.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사람은 얼마나 그곳이 차갑겠습니까?
거기서 바라는 희망은 뭡니까? 하나님 이 침상을 하나님의 침상으로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혹시 몸은 건강한데 우리의 사고방식 우리의 모든 삶의 역정 속에 혹시 가장 차가웠던 경험을 해보신일 있습니까? 가장 가슴 아프다고 느끼신 일 있습니까? 가장 외로웠다고 좌절 해보신적이 있습니까?
그곳이 바로 하나님께 호소할 장소입니다. 최고의 위기가 최고의 기회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에게만 나타났지만 야곱 이후에는 하나님이 잘 나타나시지 않았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저희 집이 시골이라 초등학교 갈 때 산길이어서 가긴 가는데 꼭 가운데 묘소가 몇 개 있어서 이른 아침이나 날이 어두워지면 얼마나 무서웠는지 지금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 가다가 혹시 맹수라도 와서 저 잡아먹히는 일 없게 하시고 귀신이 나타나서 저를 엄습하게 하지 마십시오. 귀신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는데 그러고 다녔습니다. 미국의 얘기인데 우리와 같은 얘기입니다. 어느 아버지가 저와 비슷한 시골길로 자기 자식이 학교를 다니게 한 모양입니다.
한번은 숲속에서 곰이 나타나서 으르렁하니까 이제는 죽었구나 생각을 하는데 조금 눈 감은 사이에 뻥 소리가 나더니 숲속에 서 있던 아버지가 곰을 죽이고 아들을 살려냈습니다. 아들이 불평 합니다. 아버지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버지 말입니다.
나는 네가 산골길을 가면서 용감하고 간이 좀 크라고 일부러 네가 가는 길을 옆에서 보이지 않게 숲속 길로 가며 총을 가지고 너를 보호하고 다녔다. 이유는 너와 항상 동행했지만 숨어있는 방식으로 내가 동행했다. 너를 큰 사람 되게 하기 위해서. 저는 총 가진 아버지가 같이 가지는 않았지만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시골길을 다녔습니다. 그리고 공동묘지 가는 걸 어렸을 때 늘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릴 때나 성년이 됐을 때나 솔직히 동행을 해주시는데 어떤 방식으로 동행을 해주시냐 하면 항상 숨어계신 방식으로 동행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직접 본 일이 없었고요 하나님의 음성을 제가 들은 적도 없었습니다. 저 이렇게 설교합니다만 하나님이 누군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말씀에 쓰여 있고 역사하신다니까 제가 믿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믿는 하나님이 저하고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은 저와 동행 하신다. 저는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제 앞에 계시다는 걸 믿고, 제가 보지 못하는 것, 듣지 못하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그 분의 역사하심을 제가 믿기 때문에 이 믿음 하나 때문에 제가 오늘 여기 섰습니다.
이 믿음이 하나님은 숨어 계시지만 동행하십니다. 문둥병자 열 명이 왔다고 하는데 이 문둥병자들이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살려 달라 했더니 예수께서 살려주고 나서 이런 명령했다고 성경말씀에 쓰여 있습니다.
제사장에게 보여라. 당시에는 문둥병자는 최악의 질병인데 문둥병이 낫고 나면 반듯이 제사장을 찾아가서 제사장이 우슬초를 꺾어서 새를 목 따 죽여 피를 우슬초에 발라서 사람의 얼굴과 몸에 뿌려줍니다. 말하자면 종결 예식입니다. 그리고 나면 제사장이 속제 재물로 드리고 종결 예식을 한 다음에 일종의 건강 진단서를 끊어 줍니다.
글로 끊어주는 게 아니라 예배를 통해서 이 문둥병 환자가 이제 나았습니다. 문둥병의 아픔은 몸의 아픔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문둥병 가지고는 가정에 가서 가족과 재회할 수 없습니다. 사회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완전히 따돌림 당한 좌절입니다. 문둥병이 나았다는 말은 몸만 나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회복입니다. 인간관계의 회복입니다. 같은 밥상에 앉을 수 있다는 인간성의 회복입니다. 예수께서 고쳐주고 제사장한테 보여라. 건강진단서 받아와라 그랬더니 아홉 사람은 가서 안 오고 한 사람만 왔다고 합니다. 이 한 사람 이름이 사마리아 사람. 유대교 사회가 배척하던 사마리아 사람. 아무리 건강해도 훌륭해도 지식이 있어도 사마리아 출신이란 이유 때문에 유대 사회에 낄 수 없는 소외된 자들. 이 사람은 질병도 앓았고 소외의 질병도 앓았습니다.
예수가 고쳐줬더니 사마리아 사람은 감사합니다. 육체 질병 나았으니 제사장한테 받아오겠습니다. 제 사회적 정신적 질병까지 고쳐주었으니 소외 현상을 고쳐주었으니 예수님께 와서 감사의 말을 드렸습니다. 예수의 말씀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 믿음이 뭐냐 하면 육신의 질병 낫는 것도 믿음입니다.
믿음이 뭐냐 하면요 영적인 회복도 믿음입니다. 우리가 환자일 때 기도할 때 하나님 제 질병을 낫게 해주십시오. 기도하는 것 좋지만 제가 제 육신과 상관없이 저를 지탱하기로 하늘의 혼이 제가 다시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도록 기도해 주시고 인도해 주십시오. 믿음은 육과 영을 회복시키는 능력입니다.
믿음을 가진 자들이 육신의 질병은 낫는다고 하지만 영의 병까지 나아야 됩니다. 육신의 질병만 낫는 걸로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면 우리가 죽으면 어떡합니까? 육신이 떨어지면 그걸로 우리와 교제는 끝납니까? 육으로 사는 것만이 제 생의 목표라고 하면 언제까지 살아야 합니까? 추모식은 왜 합니까?
우리 육이 하나님의 은총을 담는 그릇이기는 하나 육만이 아니라 영까지도 하나님의 능력을 담는 그릇입니다. 우린 육으로도 살지만 영으로도 삽니다. 육으로 살면서 가장 힘들 때 최악의 상황일 때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는데 하나님을 좀 찾아봅시다. 아플 때도 괴로울 때도 좀 찾읍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내 숨어 계시는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걸 믿으시면 숨어계신 하나님 저희 하나님인줄 믿고 고백을 하고 감사하면 되는데 아홉 명의 문둥병 환자는 건강 진단서만 관심이 있었을 뿐 사회에 다시 사회인으로 회복하고 인간 공동체를 회복하는 영적 건강 진단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속적으로만 살지 마십시오. 육으로만 살지 마십시오. 영을 가진 육으로 사십시오. 그러면서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께 이렇게 호소합니다. 하나님 저희한테 왜 이렇게 힘든 짐을 주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힘든 짐을 준 하나님은 그 짐을 짊어 질수 있는 어깨도 주었지 않느냐. 믿음이 뭐냐 하면 세상을 살다가 시냇물이 흐르는걸 보고 시냇물이 흐르는걸 보면 시냇물들이 모아서 바닷물들이 있다는 것도 알아야지. 산을 그리면서 시내만 보고 바다는 없다고 하지 말고 시냇물이 모여 합치면 바다도 있느니라.
믿음을 가지면 보는 것만 믿는 게 아니고 마시는 것만 믿는 게 아니고 먹는 것만 믿는 게 아니고 먹다보니 먹을거리를 주시는 창조주가 있다는 것도 알아야지. 믿음은 보는 것만이 아니라 믿고 나면 알기도 해야지 육신의 눈에 안 보인다고 감성적으로 내 감성에 안온다고 감성을 넘고 육을 넘고 무한대 공간에 있는 우리 영적인 하나님을 모른다고만 하면 안 되지 않느냐.
믿으면 진실 된 믿음은 반듯이 알아야 한다. 작은 삶의 공간에서 느끼는 것만 하나님이라 하지 말고 내가 필요할 때만 하나님이라 하지 말고 항상 믿으면 더 큰 것도 알아야지. 여러분 믿으면 아셔야 합니다. 믿는 만큼으로 아는 것을 제한시키지 말고 믿으면 더 큰걸 아시고 더 기쁜걸 아시고 하나님이 그곳에서 항상 같이 계시다는 것도 아셔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도리고 믿음입니다.
그런 말씀을 사도바울은 이렇게 요약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지 아십니까? 일용할 양식은 매일매일 먹고 사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말이고 다음날 먹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일급제가 아니고 일용 노동자가 일급 받지만 혹시 미국에서 아르바이트 하신 분들은 주급 받지요. 지금 평이하게 월급을 받습니다. 한 달에 한번씩. 이것도 발전해서 한꺼번에 받지는 않지만 연봉제가 돼가지고 일 년 단위로 봉급을 계산합니다. 갈수록 터울이 넓어지는데 신앙의 일부를 받고 싶으시면 매일매일 여러분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뭘 받아야 됩니다.
일주일에 한번 오시는 분은 주급 받는다고 생각하시지요. 혹시 한 달에 한 번씩 하나님 만나고 싶으면 월급 받는다고 생각을 하시구요 일 년에 한번 오시면 연봉 받는다고 생각하시지요. 사도바울의 충고입니다. 일급을 받던 주급을 받던 월급을 받던 연봉을 받던 항상 기도하라.
최종의 목표는 일급이냐 연봉이냐를 생각하지 말고 내가 숨 쉬는 살아있는 공간마다, 살아있는 순간 마다 하나님께 기도해라. 그리고 기뻐함도 일주일에 한 번씩 기뻐하지 말고 항상 기뻐해라. 중요한 것은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면서 항상 삶에 감사하십시오. 아홉 명은 기뻤고 기도했습니다. 한명은 거기다가 감사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감사하는 사람부터 내가 다시 출발 하마. 내가 베푼 은혜에 최악의 상황에서 감사할 줄 아는 사람부터 내가 하늘나라 약속을 지키겠다. 예수님의 약속은 유대 땅에서 시작했지만 예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 전파된 것은 이방 나라입니다. 유대 백성의 장점은 믿었습니다. 기뻐했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까지 했습니다. 단점이 뭔지 아십니까?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혹시 살아가시면서 어려운 일 당하셨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시고 감사하십시다. 감사하는 곳에서 새로운 장이 열린답니다.
주님의 축복이 기도하는 사람, 기뻐하는 사람, 감사하는 사람에게 항상 임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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