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근대

2007. 8. 20. 00:31교회사자료/5.근세교회사

근대

 

  近代

 

  역사상 시대구분. 세계사에서는 봉건시대·봉건사회 단계가 끝난 다음에 전개되는 시대를 말한다. 그렇지만 봉건시대의 다음 시대를 지칭하는 관점에서 공동체에 대한 ‘나’라는 개인의식의 성립이나 개인존중 등의 ‘개인우월 사상’을 내세워 따진다면 유럽에서는 보통 15∼16세기 르네상스나 종교개혁의 시기 이후가 되고, 자본주의의 형성이나 시민사회의 성립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17∼18세기 이후가 된다. 일반적으로 후자를 근대라고 한다. 이때 르네상스에서부터 절대주의·중상주의가 전개되는 17∼18세기까지의 시기를 근세(近世)라고 한다. 그러므로 근세와 근대는 구분되어 근세 다음에 근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항목차례

近代社會

 

  봉건제사회(封建制社會)가 끝난 뒤에 나타난 사회. 개인을 존중하는 사회로서,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원칙으로 한다. 근대사회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그보다 선행된 봉건사회를 극복해야 했다.

【서양】 〈봉건사회의 변질〉 유럽의 근대사회는 봉건사회 그 자체에서 성립되기 시작하였다. 즉, 유럽의 봉건사회는 11∼12세기경부터 크게 변질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11세기 말부터 시작된 십자군운동이 촉진제가 되었다. 이러한 변질을 나타내는 중요한 현상으로는 우선 경제적 근대화를 들 수 있다. ① 도시의 발전:십자군 이후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지중해 무역과 저지대(低地帶)를 중심으로 하는 발트(북해) 무역이 발전함에 따라 2개의 무역권을 연결하는 내륙의 상업로(商業路)도 발전하게 되어 이탈리아·독일·플랑드르·샹파뉴 등지에 도시가 번영하였다. ② 부역(賦役)의 소멸과 지대(地代)의 금납화(金納化):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화폐경제가 진전함에 따라 영주들은 비능률적인 부역 대신 공납징수(貢納徵收)를 강화하더니 이윽고 농민으로부터 직접 화폐를 입수하고자 생산물지대(生産物地代)를 화폐지대로 바꾸었고, 약간의 해방금(解放金)을 받고 농노(農奴)의 신분을 농민으로 해방시켰다(농노해방). ③ 농민 반란:농민층의 일반적인 상승 기운에 대하여 영주들은 농민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고 부역의 부활을 도모하는 등 봉건강화(封建强化)를 강행하였으므로, 이에 대항하는 농민반란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농민반란은 대부분 진압되었지만 농민들의 자립적 경향이 강해져서 농민들은 차차 봉건적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장원제도(莊園制度)도 해체되어 갔다. ④ 길드(guild)의 변질:농민층의 일반적인 상승과 함께 농촌의 수공업이 발달하고 도시의 수공업자 길드의 독점적 지위는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한편, 도시 길드의 내부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주장(主匠:master) 간의 대립과 주장과 직인(職人:journeyman)과의 대립이 격화되었으며, 특히 그 때까지만 해도 길드와 관계가 없던 상업자본가들이 상당한 세력으로 도매체제(都賣體制)의 지배를 강화하여 길드는 본래의 성격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정치적인 면에서의 변질로서는, ① 로마 교황권의 쇠퇴:십자군운동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교황권의 정신적 권위가 현저히 손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세속적 지배권도 또한 쇠퇴하였다. 본래 교황의 세속적 지배권은 봉건 제후(諸侯)로 하여금 세습적인 황제나 국왕과 대립하도록 조정함으로써 권력이 유지되어 왔으나, 십자군운동 이후 제후나 기사들이 몰락하였고, 반대로 국왕의 권력 강화(집권화)에 의하여 교황의 세속적 지배권은 쇠퇴하였다. 게다가 교황의 이른바 아비뇽 유수(Avignon 幽囚:1309~l377)와 교회의 대분열(1378~1417)에 의해서 그 쇠퇴는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와 병행하여 각지에서 이단운동(異端運動)이 일어나 교회의 혁신, 더 나아가서는 교황의 권위마저 부정하는 경우도 나타나 종교개혁의 선구적 구실을 하였다. ② 중앙집권 국가의 형성:십자군운동으로 전사·도산(倒産) 등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중소영주(中小領主)인 기사나 제후들이었다. 게다가 총포의 사용 등 전술의 변화로 기사의 존재가치가 무용화되면서 제후나 기사들은 점차 국왕의 신하로 변신하였다. 한편, 이에 따라 대두된 도시의 상인자본가들도 지방분권적인 봉건적 지배체제가 상업발달을 저해하는 것이라 하여 국내의 통일과 중앙집권화를 실현하려는 국왕의 노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이리하여 14∼15세기경부터 유럽 각국에서는 점차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형성되어 근대국가로서의 길이 열렸다.

〈유럽 근대사회의 성립〉 봉건사회의 변질에서 싹튼 근대사회의 싹은 l4∼16세기경부터 18세기에 걸쳐 한층 더 성장하였다. ① 도시 중심의 상공업이 15세기 말부터 신대륙·신항로의 발견(지리상의 발견) 등에 의하여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아시아 무역,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 무역 등의 전개로 상업은 세계적인 규모로 발전하였고, 대서양 연안의 여러 도시(리스본·안트베르펜·런던 등)는 세계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도시의 경제적 발전에 수반하여 시민계급의 경제력도 향상됨으로써 근대사회의 주역으로서의 발언권도 가지게 되었다. 한편, 신대륙으로부터 금·은 등의 귀금속이 대량으로 반입되어 가격혁명(價格革命)이 발생하여 해체되어 가던 장원과 봉건적 경제사회는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 ② 로마교황권의 쇠퇴:이단운동의 전개는 16세기 초 M.루터나 J.칼뱅 등의 종교개혁운동 전개에 의하여 결정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다. 종교개혁과 그 뒤를 이은 종교전쟁의 결과로 정치와 종교의 분리, 신앙의 자유 확립 등 근대사회의 기본적 성격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개성의 자각, 또는 폭넓은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의 수립에 크게 기여한 것이 르네상스 이래의 휴머니즘의 발전이었다. 특히 17∼18세기에 보급된 계몽사상(啓蒙思想)은 자유·평등 등의 기본적 인권과 민주주의·사회계약설 등 근대사회의 기본적인 사상을 넓혀서 시민혁명의 사상적 무기가 되었다. ③ 중앙집권국가의 발전은 17∼18세기에 절대주의 국가(절대왕정)를 탄생시켰다. 군대와 관료를 기반으로 절대권력을 장악한 군주가 통치하는 절대주의 국가는 그 본질에 있어서 봉건국가의 재편성이지 결코 근대국가라고는 할 수 없지만, 행정기구의 정비나 관료제도와 같은 통치기구의 집중성(集中性)에서 보면 근대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후, 귀족·승려 등의 봉건적 지배층을 대신해서 시민계급이 집중권력을 쥐고 지배층이 되었을 때 근대국가(정치적 근대사회)가 성립되는 것으로서, 이것이 곧 시민혁명이다. 그러나 시민혁명에 의하여 근대사회가 성립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근대 시민사회의 성립은 산업혁명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산업혁명은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비롯되었고, 19세기 중엽부터는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도 전개되어 자본주의 사회의 확립을 보게 되었다. 따라서 시민혁명과 산업혁명, 이 두 가지가 유럽 근대사회 확립의 필수요소인 것이다.

〈유럽 근대사회의 발전과 성격〉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겪으며 확립된 유럽 근대사회의 특색은, 바로 일반적인 근대사회의 특색이기도 하다. ① 종래의 거간제 수공업(居間制手工業)이나 공장제 수공업을 대신하여 공장제 기계생산이 지배적인 생산양식으로 등장, 값싼 상품을 대량으로 생산하게 되었다. 즉, 생산력의 현저한 증대를 가져 왔다. ② 농업보다 공업이 현저히 발전하여 인구의 도시집중화 현상이 촉진되었으며, 신흥 공업도시가 많이 나타났다. ③ 종래의 지배계급이던 지주·귀족이나 절대왕권에 밀착된 상업자본가 계층이 후퇴하고, 공업생산에 투자하여 대단위 공장을 건설하고 많은 임금노동자를 고용하여 생산에 종사하는 산업자본가의 세력이 커졌다. ④ 이러한 산업자본가의 성장에 수반하여 정치면·경제면에서 많은 민주적 개혁이 시도되었다. 예를 들면, 의회정치의 확립, 선거권의 확대, 경제적 자유(자유무역주의)의 확립 등 한마디로 말해서 정치적 민주주의가 수립되기 시작하였다. ⑤ 공장과 기계 등의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자본가 계층과 노동력 이외에는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한 임금노동자 계층이 완전히 분리되어 사회적으로 계층의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⑥ 산업혁명의 진행과 함께 노동자의 임금이 하락하여 생활상태가 악화됨으로써 노동문제가 발생하였다. ⑦ 이러한 계급대립의 결과, 노동·사회 문제의 발생과 함께 사회주의운동·노동운동이 전개되어,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이상사회 실현의 사상과 운동이 진행되었다. 이들이 대략 유럽 근대사회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가지 성격으로, 19세기 말이 되자 이러한 근대사회에도 여러 변질이 나타나 다시 현대사회로 옮겨 가게 되었다.

【중국】 〈청조의 붕괴와 군벌〉 쑨원[孫文]은 삼민주의(三民主義)에서 중국인을 ‘산산이 흩어진 모래’에 비유하였다. 이는 국민을 결속시킬 근대사회의 유대성(紐帶性)이 결여되어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중국의 봉건사회는, 유럽의 여러 국가는 물론 동양의 다른 국가와도 달라서 할거제(割據制)가 아니고 수많은 공동체 위에 중앙집권적으로 군림하였다. 또한 이러한 공동체 안에는 강력한 지주제(地主制)가 존재하고 있어서 농민을 궁핍으로 몰아넣고 독립 자영농민층의 성장을 억제하였는데, 청조(淸朝) 말기에는 이러한 현상이 극도에 달하였다. 태평천국(太平天國:1850~64)은 이의 타파를 위한 농민전쟁으로 중국의 근대혁명의 선구적 구실을 하였으나, 청조의 비호아래 결속되어 있던 지주들의 연합세력에 의하여 압살되고 말았다. 그 후 1911년에 일어난 신해혁명(辛亥革命)은 청조를 타도하고 공화국을 실현하였는데, 이 혁명은 부르주아혁명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나, 결국은 군벌(軍閥) 세력에 의하여 유린되고 말았다. 즉, 청조를 기구적(機構的)으로 붕괴시켰을 뿐, 변혁은 사회구조에까지 미치지 못한 것이다. 청조라는 하나의 절대정권이 무너진 후에 군벌이라는 복수의 절대정권이 성립되어 중화민국의 공화정권도 이들과 대등한 위치에 있었던 것에 불과하였다. 이 균형을 깨고 전국적 규모의 지배권력을 수립하기 위하여는 서로 투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각 단위(單位)에 열강의 이해가 결부되어 이른바 군벌혼전시대(軍閥混戰時代)를 가져 왔다.

〈반봉건·반제국주의 투쟁〉 군벌들은 그들의 존립 기반을 무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직업적인 사병(私兵)을 양성하였고, 이의 유지를 위한 경비조달을 목적으로 농민들을 착취하였다. 결국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어야 할 계급 간의 대립이 실제로는 군벌의 바탕인 지주층과 착취의 대상이 되는 농민층의 대립으로 나타났는데, 더욱이 유럽의 봉건사회나 근대사회에서 볼 수 있는 단일조직의 사회가 어느 정도나마 형성되어 있지 못하고 공동체 내부의 인간관계(신분질서)가 그 조직의 취약성을 나타내었다. 즉, 유교적 윤리가 폭력정치에 의한 지배를 내부적으로 대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의 변혁은 우선 낡은 인간관계를 타도하기 위한 사상의 변혁이 선행되어야 하였다. 문학혁명(1917)에서 5·4운동(1919)에 이르기까지의 이른바 타도공가점(打倒孔家店), 즉 유교 타도운동의 의의는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5·4운동이 ‘근대화’를 타개하는 전환점이 되기에는 아직 부족하였다. 아편전쟁(阿片戰爭:1840∼42) 이후 중국이 서구 열강들의 제국주의 정책에 말려들고, 개개의 군벌들이 열강들의 이해와 결부되어 각기 봉건적인 구체제를 강화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 근대화의 전망은 어두웠다. 그러나 반제(反帝)·반봉건(反封建)이란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청년학생을 선두로 중국 국민들이 이러한 점에 눈을 뜨게 되었을 때 5·4운동은 급격히 확대되었다. 국민을 눈뜨게 하는 일, 즉 ‘민중을 환기(喚起)시키는 일’은 각자가 올바른 인식을 가지면 되는 것이었다. 봉건제도와 제국주의 하에서 고통받고 있는 중국 국민은 20세기 초의 세계정세와도 연관성을 가지면서 변혁을 향하는 저력을 축적하였다. 쑨원이 5·4운동 시기에 ‘알고자 하는 바는 어렵고, 행하고자 하는 바는 쉽다(知難行易)’라고 설파한 것은 단순히 《서경(書經)》의 말을 역전(逆轉)시킨 것이 아니라 근대사회가 다가왔음을 올바르게 예언한 것이다.

〈근대화와 노동자 계층〉 지역단위로 또는 내재적으로 성숙되어 온 계급대립은 공동체의 최소단위에서 더 격돌하였다. 특히, 연해(沿海)지방과 내륙지방 간의 경제적 불균형으로 인하여 혁명정세에도 불균형이 나타났다. 이리하여 중국의 ‘민주주의 혁명’은 사상변혁을 수반하면서 사회의 최소단위에서의 권력탈취에 의한 혁신으로 지방정권 내부를 구조적으로 전환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를 위해서는 자급자족적인 자연경제체제의 유지가 가능한 범위인 현(縣) 정도의 단위별로 농민들이 ‘단체를 결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단체들이 횡적으로 연결되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을 때 비로소 ‘흩어진 모래’는 굳게 결합되어 구(舊)체제를 무너뜨릴 수가 있다. 이 최소단위인 농민들의 무장단체를 쑨원은 ‘농단군(農團軍)’이라 명명하였다. 쑨원이 농단군의 결성을 착상했을 때 발표한 ‘지권평균설(地權平均說)’은 경자유기전(耕者有其田)의 원칙을 내용으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 근대사회의 바탕이 되는 독립자영농의 창출(創出)을 그가 사망하기 1년 전인 1924년의 국공합작(國共合作)에서 처음으로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과정에서 근대화된 중국사회는 유럽적인 근대사회는 아니었다. 쑨원이 시도했던 경자유기전의 원칙은 농업의 협동제로 변질되어 오히려 중국의 근대화를 역행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한국】 한국 근대화의 기점은 사상적으로 동학(東學)의 대두와 정치적으로 대원군(大院君)의 혁신적인 정책이 시작된 1860년대로 보는 견해와 76년 강화도조약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이 조약을 계기로 유럽 열강과 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되고 부산·원산·인천 등지의 개항통상을 보게 되어 비로소 열강과 우호국가로서 세계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세계 대세에 발맞추어 나가는 개화운동의 세력이 형성되는 반면, 한편으로는 외래문물을 거부하고 봉건적 현상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수구세력(守舊勢力)이 존속하여 서로 대립하였다. 94년 개화내각이 출현하여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중앙관제 및 지방제도의 개혁과 함께 계급타파·노예해방·조혼금지(早婚禁止)·과부의 개가허용(改嫁許容)·과거의 폐지·적서(嫡庶)의 차별 폐지 등을 포고하여 그 개혁은 사회적으로 전면적인 개혁이 되었지만, 실제 사회생활에 있어 즉시 큰 효과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봉건사회 조직의 붕괴와 신시대적 체제의 형성을 의미하는 사실임에는 틀림없었다. 96년 건양(建陽)의 새 연호를 사용함과 함께 음력 대신 양력을 쓰기 시작하였으며, 이듬해 다시 연호를 광무(光武), 국호를 대한(大韓)이라 고치고, 신교육령에 의한 보통학교·중학교·사범학교 등의 설립을 보는 등 비로소 근대국가로서 모든 형식과 체제를 이루었다. 형식뿐 아니라, 실지로도 외세에 지배되지 않는 독립국가·독립국민으로서의 자격을 구비하여야 한다는 자주정신에 의해서 신진투사들이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독립문의 건립, 《독립신문》의 간행,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개최 등으로 한국민의 자주독립의 정신을 내외에 선양하고 국민의 세계 조류에 대한 자아인식을 일깨웠다. 독립협회에 이어 대한자강회 등 많은 정치·교육·문화 단체들이 민중의 계몽과 자각을 촉구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당시 위정자들의 지식과 성의, 그리고 단결·봉사의 정신 부족으로 국내적으로 수구파와 개화파의 알력, 또는 친청(親淸)·친일(親日)·친로파(親露派) 등의 대립과 분쟁, 대외적으로 일본·청국·러시아 등 강대국의 간섭을 받아 국가의 운명은 비운에 빠지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악랄한 지배와 압박·착취에 대한 반항운동으로 독립운동이 계속되었을 뿐 참된 근대화란 요원(遙遠)하였다. 8·15광복 후에는 38선이 그어지고 6·25전쟁까지 겪어야 했으며, 전쟁 후 수립된 제1공화국은 전후 복구사업에 바빴다. 따라서 어느 의미에서는 제3공화국이 들어서면서부터 본격적인 근대화가 추진되었다고 할 수 있다. 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아울러 70년부터 불붙은 새마을운동에 힘입어 한국의 근대화, 특히 산업화는 상당한 진전을 보였다.

  항목차례

十字軍(crusades)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에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 팔레스티나와 성도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전후 8회에 걸쳐 감행한 대원정. 그때 이에 참가한 기사들이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했기 때문에 이 원정을 십자군이라 부른다. 십자군에게서 종교적 요인을 강하게 느끼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와의 싸움이라는 점에서 당연하다. 그러나 이것을 간단히 종교운동이라고 성격지을 수는 없다. 봉건영주, 특히 하급 기사들은 새로운 영토지배의 야망에서, 상인들은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에서, 또한 농민들은 봉건사회의 중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희망에서 저마다 원정에 가담하였다. 그 밖에 여기에는 호기심·모험심·약탈욕 등 잡다한 동기가 신앙적 정열과 합쳐져 있었다. 대체로 십자군시대의 서유럽은 봉건사회의 기초가 다져지고 상업과 도시의 발달도 어느 정도 이루어져 있어서 노르만인의 남(南)이탈리아 및 시칠리아 정복, 에스파냐의 국토회복운동, 동부 독일의 대식민활동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주변 세계와의 경계를 전진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배경에서 십자군도 정치적·식민적 운동의 일환이 될 수밖에 없었고, 종교는 이 운동을 성화(聖化)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원인】 고대 로마제국이 동서로 양분된 후 시리아는 동로마 통치하의 속주가 되고, 7세기 전반에는 이슬람교도인 아라비아인에게 정복되었을 뿐 아니라, 638년 성도 예루살렘이 그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한편 유럽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전파와 더불어 예루살렘을 성도로서 숭앙하는 생각이 점차 높아졌는데, 11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많은 그리스도교도가 개인 또는 집단을 이루어 성지 순례를 떠났다. 그 무렵 동방의 이슬람 세계에서는 셀주크투르크가 세력을 신장시켜 비잔틴제국 영내에까지 진출하고 시리아·아르메니아·소아시아를 지배하고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였다. 1092년 셀주크왕조의 통일이 깨어지고 그 영토는 왕족간에 분할되었다. 이 기회에 비잔틴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비잔틴제국의 재흥을 꾀하여 군사적 원조를 청하는 사절을 로마 교황청으로 보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최초로 십자군을 제창하였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알렉시우스의 요구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왜냐 하면 우르바누스 2세는 성직서임권투쟁(聖職敍任權鬪爭)의 와중에 있었는데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4세보다 우위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동방원정이라는 어려운 사업을 통하여 유럽에서 교황권을 확립하고, 비잔틴에서의 그리스정교회를 로마교회 산하에 통일하려 했던 것이다.

【제1회 십자군】 1095년 11월 27일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클레르몽공의회 회의석상에서 십자군에 관한 연설을 했다. 그는 성지 해방전쟁을 성전(聖戰)이라고 명명하고 종군하는 군사들에게 신의 구원을 약속하였다. 그 후 교황의 호소를 전하기 위하여 각지에 사람이 파견되었다. 교황이 계획한 십자군은 주로 기사(騎士)들로 편성할 예정이었다. 각 지방에 파견된 사람들과는 달리 멋대로 십자군에 대한 열을 부채질하고 다니는 자도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은자(隱者) 피에르는 십자군 사상의 창시자로 불릴 만큼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동쪽을 향해 떠난 것은 농민을 대부분으로 하는 민중십자군이었다. 우선 고티에가 이끄는 일단, 이어서 은자 피에르를 따르는 한 부대가 출발했다. 양군은 헝가리·불가리아를 통과할 때 이미 그곳에서 식량이 떨어져 약탈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럴수록 심한 보복 공격을 받았다. 양군은 합동하여 소아시아에 건너가 투르크군과 싸움을 벌이기는 했으나 결과는 대패배로 끝났다. 그러나 이밖에도 3개의 민중십자군부대가 이어졌는데, 그들에 의해서 유대인 박해가 개시된 것이다. 특히 라이닝겐의 백작인 에미코의 박해는 처참하였다. 십자군에 대한 지나친 열성이 일찍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어단 유대인에게로 쏠렸는데, 거기에는 부유한 유대인에 대한 경제적 증오심도 깃들어 있었다. 이 3개 부대는 헝가리인의 공격에 의해 괴멸되었다. 정규 십자군은 1096년 여름부터 4개 부대로 나뉘어 출발, 육해(陸海) 양로를 지나 이듬해 봄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하였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큰 군세였는데 비전투원을 포함하여 5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 중 주력을 이룬 것은 프랑스인과 노르만인이었다. 합류한 십자군은 니케아 공략을 시작으로 동쪽으로 진군했는데, 그 길은 험난했다. 소아시아를 진군하는 동안 투르크인의 공격, 그리고 심한 더위와 굶주림 등으로 상당수의 인원과 말을 잃었다. 시리아에 도착하여 첫 공격목표인 안티오키아의 공방전에만 8개월이 걸렸다. 점령 후에도 전력 회복과 주변지역을 정복하는 데 6개월을 소비했으며 그 동안 유행병에도 시달렸다. 그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지휘자들이 분쟁을 일으킴으로써 부하들의 불평을 싹트게 했다. 십자군이 예루살렘 전면에 도착, 99년 7월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 거기서 처참한 유혈극이 벌어졌다. 십자군 병사들은 여자와 아이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열광적인 신앙과 이교도에 대한 격한 증오심이 한 덩어리가 되어 십자군의 정신을 형성한 것이다. 당초의 목적을 달성한 뒤에도 십자군 병사들의 일부는 시리아에 정주(定住)하였다. 정복지에는 예루살렘왕국·안티오키아후령(侯領)·트리폴리백령(伯領)·에데사백령 등 4개국이 들어섰다. 또 왕국 안에는 요한기사단·템플기사단, 조금 늦게 독일기사단 등의 종교기사단이 편성되어 성지 방위의 주요 군사력이 되었다. 영주는 성을 거점으로 지배층을 형성하였고 상인은 도시에서 특권을 얻어 이익을 증대시켰으나 농민은 희망도 없이 예속상태에 놓였다. 교회와 수도원이 건립되고 교회조직도 정비되어 유럽의 제도와 관습이 그대로 옮겨졌다.

【제2회에서 제4회까지의 십자군】 1144년 에데사가 이슬람군에게 탈취되자 제2회 십자군이 파견되었다. 프랑스왕 루이 7세와 독일왕 콘라트 3세가 지휘자가 되었다. 시리아에서 다마스쿠스 공격이 계획되었으나 시리아 주재 십자군 병사가 적측의 감언에 속아 전열을 이탈했기 때문에 중도에서 좌절되었다. 그리하여 두 국왕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귀국하였다. 12세기 후반에 이집트의 명군(名軍) 술탄 살라딘이 하틴전투에서 그리스도교군에게 승리를 거두자 그 여세를 몰아 각지의 도시와 요새를 점령하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이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다시 제3회 십자군이 파견되었다. 이번에는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1세, 프랑스왕 필리프 2세, 영국왕 리처드 1세 등이 참가하였다. 프리드리히는 소아시아의 키리키아강에서 빠져 죽었고 남은 군사만 시리아를 향해 진군하였다. 현지에서는 아콘 포위작전이 벌어졌는데도 필리프왕은 1년 8개월 늦게 이 전투에 참가하였다. 게다가 그는 아콘 공략후 곧바로 귀국해버렸다. 리처드왕은 키프로스섬 정복 때문에 필리프왕보다 2개월이나 늦게 도착했다. 그 후 리처드는 살라딘과 교전, 몇 개의 도시를 탈환하지만 예루살렘 해방은 끝내 이루지 못한 채 그리스도교도의 성도 순례와 안전을 보장하는 것으로 그쳤다. 그 후 아콘은 시리아에서의 가장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제4회 십자군은 교황권의 절정기라 할 수 있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에 의해 발동되었다. 군단의 편성은 프랑스인을 중심으로 하였는데, 황제나 국왕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이 점에서는 최초의 십자군과 비슷하였다. 다만 먼젓번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 이슬람군의 거점이된 이집트가 원정의 목표로 결정되었다. 이에 대해 군대의 수송을 담당한 베네치아는 이집트와의 평화적 교역을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약속한 수송비가 모금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십자군은 베네치아의 지시에 따라야 했다. 그들은 우선 달마티아의 츠아라를 치고 이어서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진군하였다. 전부터 베네치아는 비잔틴제국 내에 유리한 상업상 특권을 누리고 있었는데, 최근의 정변으로 그것을 잃은 상태에 있었고 제노바와 피사에 눌려 있었다. 1204년 십자군은 정정(政情)의 혼란을 틈타 비잔틴제국를 무너뜨렸다. 수많은 성유체(聖遺體)와 보물을 약탈당하고 수도의 일부와 항만과 섬은 베네치아 영토가 되었다. 그 밖의 비잔틴 영토도 십자군의 지휘자들에게 분할되어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라틴제국이 성립되었다. 이 제국은 약 반세기 동안 존속하였다.

【제5회 이후의 십자군】 제5회 십자군은 또다시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제창으로 이루어졌다. 이 십자군은 아콘으로부터 이집트에 원정하고, 다미에타를 포위하였다. 작전은 성공하였으며 이슬람측은 다미에타와 시리아를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십자군은 이를 거절하고 카이로에 진격하였으나 격퇴되었다. 제6회 십자군은 신성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행해졌는데 이제까지와는 다른 특징을 가진다. 프리드리히는 ‘세례를 받은 시칠리아의 술탄’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라비아의 풍습에 매혹된 황제였다. 그는 무력이 아닌 외교수단으로 이슬람측으로부터 예루살렘과 그 밖에 영토를 양보받았다. 그러나 그가 돌아간 뒤에는 시리아 주둔 십자군 병사들 사이에 내분이 격화되어 그 사이에 예루살렘도 잃었다. 그리하여 프랑스왕 루이 9세가 이끄는 제7회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루이 9세는 키프로스섬에서 이집트로 건너가서 다미에타를 점령했다. 이때에도 이슬람측은 다미에타와 예루살렘의 교환을 제안해왔으나 전과 같이 이를 거부하고 카이로를 향해 진군했으나 만슬러전투에서 대패하여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잠시 시리아에 머물면서 약간의 항구와 요새를 탈환하고 철수하였다. 그 후 안티오키아가 이슬람군에게 함락되자 루이 9세는 최후의 십자군을 이끌고 출발하였는데, 튀니스를 공격하였을 뿐 그곳에서 죽었다. 시리아에서는 요새가 잇따라 함락되었고, 1291년 아콘마저 빼앗기자 십자군 국가와 그 운동은 종말을 고했다.

【실패의 원인】 제1회 십자군의 성공은 이슬람 세계가 정치적 분열을 한 데에 큰 이유가 있었다. 그 후 이슬람 세력이 통일되자 반격을 당하는 상태가 되었다. 십자군은 전력도 충분하지 못하였지만 시리아 주둔 십자군 병사와 종교 기사단, 새로 도착한 십자군병사, 상인 등은 상호간, 또는 각 내부에서 분쟁이 그치지 않았다. 거기에는 영토문제와 경제적 이익의 문제가 있었고, 또한 형성되어가고 있던 국민적 감정 등에 의한 대립이 얽혀 있었다. 또 십자군 국가에서는 소수의 정복자가 많은 피정복민들을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그 기초는 항상 흔들리는 상태였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무지와 광신과 편협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슬람교도들의 증오심만 부채질하였다. 그리스도교도를 성지로 가게 한 서유럽의 팽창운동은 그 자체의 정체와 더불어 십자군도 종말을 고하였다.

【영향】 십자군운동은 우선 유럽에서 교황권의 후퇴, 국왕 권력의 강화와 중앙집권화, 도시와 상업의 발달, 이슬람문화와의 접촉에 의한 문화의 발달 등 모든 일과 관계가 있다. 즉 교황에 의해 제창된 운동의 실패는 그대로 교황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전사(戰死)에 의해 단절된 귀족가의 소유영지는 왕령(王領)에 편입되어 왕권의 기반을 강화하였다. 십자군운동으로 최대의 경제적 이익을 본 것은 북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였다. 십자군에 참가한 유럽인들은 미지의 이질적인 세계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영향을 과대하게 평가할 수는 없다. 왕권의 강화는 봉건사회 내부 전개에 기본적 요인을 가지고 있었다. 봉건적인 분열상태에 있을 때에만 유럽세계를 관념적으로 통합할 수 있었던 교황권은 왕권에 의한 중앙집권화와 더불어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와 상업의 발달은 십자군운동의 전제조건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대규모의 군대를 먼 곳까지 보낼 수도 없었고 다량의 식량과 무기를 모으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동방문화 유입의 중심지는 시칠리아와 에스파냐였다. 유럽인은 이교문화(異敎文化)에 접하면서도 최후까지 관용의 정신을 배우는 일이 없었다. 또한 제4회 십자군에 의해 와해된 비잔틴제국은 다시 부활하지만 이미 소국에 지나지 않았으며 몰락은 결정적이었다. 그 때문에 비잔틴제국은 이제까지 수행해오던 유럽의 방벽 역할을 잃게 되었다. 이슬람세계에 대한 영향도 컸다. 이슬람교도는 관용의 정신이 풍부했다. 그러나 십자군의 공격을 받게 되자 그들 사이에 점차 비관용성과 민족의식이 고취되었으며, 성전(聖戰)에 대한 정열은 높아갔다.

  항목차례

르네상스(Renaissance)

 

  중세와 근세 사이(14∼16세기)에 서유럽 문명사에 나타난 역사 시기와 그 시대에 일어난 문화운동. 르네상스는 학문 또는 예술의 재생·부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프랑스어의 renaissance, 이탈리아어의 rina scenza, rinascimento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다. 고대의 그리스·로마 문화를 이상으로 하여 이들을 부흥시킴으로써 새 문화를 창출해내려는 운동으로, 그 범위는 사상·문학·미술·건축 등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5세기 로마 제국의 몰락과 함께 중세가 시작되었다고 보고 그때부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를 야만시대, 인간성이 말살된 시대로 파악하고 고대의 부흥을 통하여 이 야만시대를 극복하려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 운동은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전반에 걸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통설인데, 이 운동은 곧 프랑스·독일·영국 등 북유럽 지역에 전파되어 각각 특색있는 문화를 형성하였으며 근대 유럽문화 태동의 기반이 되었다. 이때의 르네상스 외에도 문화부흥 현상이 보인 기타의 시대에 대해서도 이 용어를 사용하는데, 카롤링거 왕조의 르네상스, 오토 왕조의 르네상스, 12세기의 르네상스, 상업의 르네상스, 로마법의 르네상스 등이 이에 속한다. 르네상스라는 개념 형성은 이미 그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 사상의 기본요소는 F.페트라르카가 이미 설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고대를 문화의 절정기로 보는 반면, 중세를 인간의 창조성이 철저히 무시된 ‘암흑시대’라고 봄으로써 문명의 재흥(再興)과 사회의 개선은 고전학문의 부흥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인문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던 크나큰 확신이기도 했는데, 이들은 단순한 라틴 학문의 부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지적(知的)·창조적 힘을 재흥시키려는 신념에 차 있었다. 당시 L.브루니는 자기 시대의 학문의 부활에 대하여 기술하였고, 16세기의 미술가 G.바자리는 저서 《이탈리아의 가장 뛰어난 화가·조각가·건축가의 생애》에서 고대 세계의 몰락 이후 쇠퇴한 미술이 조토에 의해 부활했다고 하여 ‘재생(rinascita)’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다시 볼테르는 14·15세기의 이탈리아에 학문과 예술이 부활했음을 지적했으며, J.미슐레는 16세기의 유럽을 문화적으로 새로운 시대라고 하여 처음으로 르네상스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르네상스를 인간성의 해방과 인간의 재발견, 그리고 합리적인 사유(思惟)와 생활태도의 길을 열어 준 근대문화의 선구라고 보고 이와 같은 해석의 기초를 확고히 닦은 학자는 스위스의 문화사가 J.부르크하르트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860년에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문화》를 발표했는데, 여기에서 ‘시대’로서의 르네상스라는 사고방식이 정착하여 오늘까지의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는 르네상스와 중세를 완전히 대립된 것으로 파악하고, 근세의 시작은 중세로부터가 아닌 고대로부터라는 주장에 이르게 되었으며, 중세를 지극히 정체된 암흑시대라고 혹평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의 연구들은 이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여 르네상스의 싹을 고대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중세에서 찾아야 하며, 르네상스를 근대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도 대두되고 있다.

【역사적 배경】 르네상스는 다면적인 복잡한 국면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간단히 개괄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르네상스에 대한 논의는 이탈리아로부터 출발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발생하여 다른 곳으로까지 파급된 데에는 그럴 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 이래 오랜 역사가 축적되어 온 곳일 뿐만 아니라, 지리적 혜택으로 이슬람세계 및 비잔틴과의 접촉을 항상 유지하여, 이들과 서유럽을 연결시키는 소임을 맡아왔다. 특히 11·12세기의 ‘상업의 부활’과 십자군운동의 참여를 통하여 도시가 활성화하기 시작하였고, 12세기에는 중북부의 많은 도시가 자치도시로 조직되었다. 이들 자치도시들은 주위의 농촌지대도 지배하여 도시국가의 형태를 취하였다. 또, 기존 봉건귀족층과 토지소유자계층은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하게 되었으며, 이들이 도시의 경제활동과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특히 13세기 후반의 경제적 발전기에는 사회계층의 변화도 심하여, 상인의 현실적인 감각이 사회의 모든 면에 침투함으로써 이탈리아 특유의 시민문화의 기반을 형성하였다. 이탈리아는 지리적인 조건과 상업상 교류의 필요에 따라, 이슬람과 비잔틴문화와의 접촉 가능성이 가장 많았고, 또 실제로 그런 교류가 유지되고 있었음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학문의 전통면에서도 스콜라 철학으로 대표되는 서유럽문화의 중심지인 프랑스와는 달리 그들 나름의 독자적 전통을 보유하고 있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이들의 정치는 도시국가의 형태로 운영되었으며, 그리스·로마의 고대문화 역시 도시국가에서 발생·발전한 것이었다. 물론 고대의 도시국가와 이탈리아의 코무네(자치도시)와는 사회적인 기초구조에서 크게 다르지만, 형태 등의 면에는 공통성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고대의 법과 정치이론이 코무네에 적용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이와 같이 특수한 사회구조와 독자의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비잔틴과 이슬람문화권과의 접촉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탈리아 코무네가 르네상스운동의 진원지가 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페트라르카와 초기 르네상스】 고대문화에 대한 동경은 중세를 통하여 계속 이어졌다. 샤를마뉴의 ‘로마제국’이나 오토의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명칭도 사실은 고대 로마황제의 후계자가 되고자 하는 그들의 바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로마의 정통성 계승 의도를 르네상스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르네상스의 특징은 고대문화를 이상으로 하여 신문화를 만들어내려는 자각적인 태도로서, 고대가 지난 후 암흑시대가 있었고 이제 새로운 재탄생의 시대가 도래하였다는, 역사의 3분법(三分法:고대·중세·근세의 시대구분)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운동의 근거는 고전연구로부터 공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고전은 수사학·역사·도덕·철학 등의 인문학이며, 이와 같은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인문주의자라고 불렀다. 이와 같은 새로운 학문에 휴마니타스(Humanitas)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피렌체의 L.브루니였다. 최초의 인문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시인 F.페트라르카는 리비우스의 역사와 키케로의 도덕철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텍스트의 발견과 교정에 전력을 쏟았다. 고대인들의 생각과 생활을 바르게 파악하고 다시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려는 인문주의의 전통은 페트라르카를 출발점으로 하고 있으며,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14세기 이탈리아에는 또한 새로운 스타일의 회화와 조각이 등장하였는데, 공간과 시간을 다루는 데에 고대의 스타일을 부활시켰으며, 조토는 이 분야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G.바사리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고대의 재탄생이란 고대의 모델을 모방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연을 관찰하고 모방하는 능력까지를 일컬었다. 법률 분야에도 새로운 기운이 일어났는데, 볼로냐대학을 중심으로 부활한 로마법 연구는 바르톨루스에 의하여 새로운 체계화가 이루어졌다.

【인문주의 시대】 15세기에 들어서면서 피렌체를 중심으로 인문주의자들의 활동이 일제히 전개되었다. 피렌체공화국의 서기장관(書記長官) C.살루타티는 키케로의 서간(書簡)을 발견하여 고전기(古典期) 라틴어의 수사법(修辭法)을 처음으로 공문서에 도입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소위 ‘시민적 인문주의(civic humanism)’의 확립에 크게 공헌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어떠한 사람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시민의 자유와 그것을 보호하는 공화정(共和政)을 중요시하였다. 이것은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되었는데, 공화정은 로마의 귀중한 유산이며 그것을 보존하는 일은 피렌체의 책임이라는 것이었다. 로마공화정시대야말로 인간의 가능성이 가장 크게 열린 시대였으나, 카이사르를 비롯한 독재자들이 국민의 자유를 빼앗아 버렸으므로 피렌체의 이상은 로마공화정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생각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도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당시 피렌체는 밀라노를 중심으로 북이탈리아를 지배한 비스콘티가(家)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을 받았으며, 살루타티는 적(敵) 비스콘티를 카이사르에 비유하여 독재자로 규정하고 이로부터의 자유수호를 국민에게 호소하였다. 이와 같은 시민적 인문주의는 역시 서기장관으로 봉직한 살루타티의 후계자 L.브루니 때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였다. 그는 저서 《피렌체국민사》에서 피렌체의 자유의 역사는 에트루리아 사람들이 자유도시를 세우기 이전부터 이미 투스카니(Tuscany)의 토양에 깊숙이 뿌리박혔다고 주장하고, 평등은 정의의 균등한 기회에서 실현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밀라노 쪽의 인문주의자들은 로마공화정 말기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고 이를 수습한 것은 카이사르라고 찬미하고 비스콘티를 카이사르에 비유함으로써 그들의 치정(治政)을 합리화시켰다. 피렌체와 밀라노 간에 이와 같은 의견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치정의 정통성을 고대에서 구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15세기 이탈리아의 현실이 과거에 투영된 결과, 고대문화의 부흥은 단지 학문상의 문제에 머물지 않고 보다 넓은 사회적 의미를 지니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인문주의자들은 고대의 역사와 학문을 배우고 여기에서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정치와 도덕의 원리를 구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대인의 생각과 생활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사본(寫本)을 비교하고 정확한 텍스트를 확정해야 하기 때문에 언어문헌학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인문주의자들에게는 이 방법이 단순히 연구의 보조수단이라기보다 참다운 전체적인 인간성을 추구하여 자기를 자각하려는 본질적인 것이기도 하였다. 중세 교황의 세속적 지배권의 근거로 알려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진장(寄進狀)’을 후세(後世)의 위작(僞作)이라고 밝혀낸 L.발라는 이러한 언어문헌학의 대표적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미술에도 고전주의적 이상주의가 확립된 시기로서 회화의 마사치오, F.안젤리코, 그리고 《비너스의 탄생》으로 유명한 S.보티첼리가 있고, 조각에서는 도나텔로가 뛰어났으며, 건축분야에서는 F.브루넬레스키 등이 배출되어 르네상스 미술의 황금시대를 구축하였다.

【르네상스의 변질】 15세기의 인문주의자들은 현실경정(現實更正)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여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활동도 중시하였다. 그러나 15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분위기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지식인들 간에 현실도피의 경향이 현저히 나타났다. 이 무렵 이탈리아에서는 고대문화 부활의 기반을 이루고 있던 코무네 체제가 쇠퇴하고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주장하고 있던 군주국현상(君主國現象)이 발달하였다. 피렌체의 경우 명목상 코무네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1434년 이후 메디치가(家)의 지배하에 놓임으로써 시민적 인문주의는 크게 쇠퇴하였다.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판도는 비교적 단순하였는데, 북에는 스포르차가의 지배를 받는 밀라노와 귀족지배의 공화국 베네치아가 있었고, 중부에는 피렌체와 교회국가, 남에는 아라곤가의 나폴리 등 강국 간에 일종의 세력 균형이 성립하였다. 비교적 소규모의 도시에서도 각기 군주국을 형성하고 화려한 궁정생활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제 공화정의 이상은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으며, 지식인은 궁정에 기식하는 궁정문화인이 되거나, 현세를 도피하는 자세를 택하였다. 또, 비잔틴 학자들의 영향이 더해져서 지식인들은 학문연구 중심의 사변적 경향을 띠게 되었다. 1453년 비잔틴제국의 몰락을 전후하여 플레톤이나 베사리온과 같은 다수의 뛰어난 그리스인들이 이탈리아에 와서 그들의 학문, 특히 플라톤 철학을 전하였고, 그 영향으로 C.메디치는 피렌체에 ‘플라톤 아카데미아’의 창설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그때까지의 시민적 인문주의는 도덕철학·정치학 등에 주된 관심을 두었으나, 15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C.란디노와 같이 명상적(瞑想的)인 생활을 중시하게 되었으며, 플라톤 아카데미아의 중심인물인 M.피치노의 학문도 플라톤의 형이상학과 신학을 결합시킨 것이었다. 이상과 같이 15세기 말부터 16세기에 걸친 문화는 군주들의 보호 아래 궁정적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B.카스틸리오네가 쓴 《정신론 Il Cortegiano》은 이상적 인물로서의 궁정인을 묘사하고 있다. 이탈리아 문학도 단순한 고전의 모방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현상을 나타냈으며, 중세 기사도에 대한 로맨틱한 관심은 귀족적인 서정시의 경향을 띄게 되었고, T.타소와 L.아리스토의 작품이 이를 반영하고 있다. 미술분야에서도 이와 같은 변화가 뒤따르게 되었는데, 개성과 활력에 넘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과 같은 거장이 배출된 뒤로는 차차 바로크 미술양식으로의 전환이 눈에 띄게 나타났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경제적 지반이 쇠퇴함으로써 르네상스에도 변화가 왔다. 오랫동안 동서간의 무역을 독점한 이탈리아 상인들은 외국상인, 특히 절대주의 국가들의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었는데, 영국이나 네덜란드와 같이 국가의 보호를 받는 상인들과의 경쟁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또 에스파냐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신항로의 발견과 동양과의 직접무역은 이탈리아의 경제적 지위를 떨어뜨렸다. 정치적으로도 강대국의 정치적 관여로 이탈리아 내 국가간의 세력균형과 타국가간의 관계가 힘에 의해 지배되어 그들의 독립성조차 크게 위협받게 되었다. 1494년 프랑스의 샤를 8세는 샤를마뉴의 꿈을 재현해 보려는 듯 나폴리에 침입하였으나, 그 기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이탈리아는 에스파냐의 관여와 독일 합스부르크 왕가 및 프랑스 발루아 왕가간의 세력 다툼 속에 끼여 정치적으로 쇠퇴하였다. 신성로마 황제 카를 5세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간에 벌어진 ‘이탈리아 전쟁’은 1521년부터 44년까지 네 차례 되풀이되면서 이탈리아의 국토를 유린하였다. 사실상 합스부르크 왕가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에스파냐와의 연결을 위해서도 이탈리아의 지배는 매우 중시되었다. 후기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였던 로마가 1527년 황제군(皇帝軍)에 의하여 약탈당하면서 많은 문화재가 파괴되었는데, 일반적으로 이 시점을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종말로 보고 있다.

【인문주의자의 활동과 여러 나라의 르네상스】 시민적 인문주의자가 르네상스 초기에 이탈리아의 정치에 적극 참여했다는 것은 앞서 언급하였다. 고대문화에 대한 깊은 지식과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는 인문주의자가 코무네와 군주국에 관직을 구하는 예가 증대하였다. 인문주의적 교양이 출세의 수단이 되는 느낌마저 없지 않았는데, 정치체제는 다르지만 알프스 이북의 절대군주국가에서도 인문주의자를 관료로 등용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조류에 따라 외국으로 나가는 이탈리아 인문주의자의 수도 증가하였다. 이로써 알프스 이북에서의 인문주의의 보급은 이들의 활약에 힘입은 바 크다. 16세기에 들어와서는 프랑스·영국·독일 등 여러 나라가 그들 각자의 문화적 전통과 결합된 독자적인 르네상스를 발전시키기에 이른다. 이탈리아 인문주의자의 대부분이 종교문제에 무관심했거나 플라톤 철학과 신학의 융합을 도모하였음에 반하여, 알프스 이북의 인문주의자들은 언어문헌학적 방법을 성서연구에 적용하여 신앙문제를 취급했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이 지역의 르네상스는 종교개혁과 연결되었는데, 이와 같은 기독교적 인문주의자로는 구약성서의 이해를 위하여 헤브라이어 연구에 헌신하고 이탈리아 유학까지 했던 독일의 J.로이힐린과 프랑스의 종교개혁자 J.르페브르 데타플 등이 있다. 영국의 J.콜레트와 T.모어도 이들의 범주에 속하며, 북방의 기독교적 휴머니스트뿐만 아니라 르네상스시대의 지식인 중에서도 손꼽히는 D.에라스무스도 초대 교회의 순박함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던 인문주의자였다. 이러한 종교적 특징과 더불어 알프스 이북의 르네상스는 절대왕정의 전단계적 과정이라는 특징을 띠었는데, F.라블레와 M.몽테뉴로 대표되는 프랑스의 르네상스는 강한 귀족적·궁정적 성격을 띠며, 이는 곧 루이 14세의 절대왕조문화에 연결되었다. 영국의 경우에도 E.스펜서의 《선녀왕(仙女王)》과 같은 대서사시는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한 송시(頌詩)였으며, 셰익스피어가 낳은 드라마의 극치는 절대주의 아래서 이루어진 것이다. 에스파냐의 경우도 예외일 수가 없는데, 세르반테스의 소설도 가톨릭 신앙과 기사도 정신이 강조되었던 에스파냐 절대주의의 산물이다. 이와 같이 르네상스는 나라에 따라 각기 성격을 달리하며 전개되었던 복잡한 문화현상이고, 따라서 근대문화와의 관계도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가 고전고대(古典古代)의 문화를 의식적으로 부흥시킴으로써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 활동에 종사하는 인문주의자들은 공통의 교양과 언어와 이상을 통하여 공동영역을 분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일부의 지식인에 국한된 것이지만 에라스무스가 독일·프랑스·영국·이탈리아·스위스 등을 주유했던 것과 같이 종교 이외의 세속문화에 대해서도 공통의 지반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근대 유럽의 지식인들의 기본적인 사상은 이곳에서부터 출발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근대과학의 뿌리를 르네상스에서 구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실상 르네상스시대에는 과학상의 중요한 발견이나 창조는 별로 없었다고 볼 수 있으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수기(手記)에 나타난 견해를 근대과학의 예견(豫見)이라고 보았던 종래의 생각도 수정되고 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기록은 중세 말기의 스콜라 학자에 의하여 이미 발견되었던 것을 다만 메모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과학적 측면에서 보는 르네상스의 중요성은 근대과학의 진원지로서가 아니라, 종래의 학자적 사고의 전통과 수공업에 종사하는 직인(職人)의 전통이 결합하는 계기가 되어 실험과 실용의 정신을 낳았다는 데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르네상스 정신은 중세를 이어온 과학의 변화와 더불어 16·17세기의 J.케플러, 갈릴레이 등을 낳게 하였으며, 이는 다시 뉴턴으로 이어졌다.

【르네상스에 대한 여러 견해】 18세기 계몽주의 시대가 등장함과 동시에 학문 부활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갔다. 19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고전부활이 서구문명에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기여를 했다는 사상이 팽배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상 속에서 지적이고 문화적인 관심은 그들 각자의 분야에 따라 이탈리아와 자기 분야와의 관계 탐구에 쏠리게 되었다. J.러스킨과 같은 비평가와 더불어 르네상스라는 용어가 보편화하기 시작하였고, 휴머니즘이라는 말도 고전 스타일의 범주를 넘어선 지적 운동을 가리켜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1855년 J.미슐레가 그의 《프랑스사》의 제7권을 ‘르네상스’라고 이름붙였을 때 그 절정에 달한 감이 있다. 사실 이 책에서 미슐레는 르네상스에 대한 근대적 사상을 거의 모두 다루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그 시대를 중세와 정반대되는 시대로 묘사하고, 그 시대의 정신을 ‘세계의 발견과 인간의 발견’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그의 르네상스관(觀)은 프랑스 중심적인 데에 문제가 있으며, 아마 이러한 경향은 당시 민족주의가 팽배했던 시대적 배경이 가져온 불가피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보다 보수적이며 초연한 입장에 서려고 노력했던 스위스 문명사가 부르크하르트는 미슐레와 같은 민족주의 성향이나 중세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관은 이탈리아적인 것으로서 중세적인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단순히 근대의 시작이라고만 볼 수도 없는 하나의 구분된 시대, 즉 14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일어났던 ‘그 자신의 어머니를 가진’ 문화 시기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주로 새로운 문명의 정신적인 특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새로이 배태된 정신과 이탈리아인의 사회·정치적인 경험을 밀접하게 관련시켜 보려고 하였다. 즉, 14세기의 시작과 함께 생성된 이탈리아의 정치적 경험은 새로운 정신의 발달을 가져오게 하는 조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교황과 황제 간에 진행되었던 오랜 갈등이 이 무렵 막바지에 이르렀고, 이러한 장기간의 투쟁은 양편을 기진맥진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탈리아는 새로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당시 유럽의 어느 곳에서나 봉건주의는 중앙집권적 군주국으로 바뀌어가고 있었고 이탈리아도 예외는 아니어서,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정치적 변화를 겪게 되었다. 공화국이든 군주국이든 간에 이들 국가들의 특징은 ‘개인주의’에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개인주의는 바로 세계와 인간의 발견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정신의 발현에 중대한 소임을 담당한 것이 인문주의자라고 지적하고 있다.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 개념은 이후 엄청난 양의 연구를 촉진·자극하였고, 수많은 논쟁의 근거가 되었다. 일부 저명한 학자들은 부르크하르트의 견해에는 부분적으로 과장과 잘못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그의 해석을 벗어날 수 없다고 인정하고 있다. 또 다른 학자들은 물론 부르크하르트의 입장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이지만 중요한 몇 가지는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 사상에는 동의한다고 할지라도 이탈리아 중심적인 그의 주장과는 달리 유럽의 다른 지역, 프랑스나 독일, 그리고 북부 제국의 르네상스도 이탈리아의 그것과 평행하게 전개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회경제사의 등장은 사회를 보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였고, 르네상스 사가(史家)들에게 새로운 해석으로 도전해왔다. 도시사회와 자본주의가 고대에 기원을 둔 것이 아니라, 중세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하는 이들의 주장은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관에 대한 재해석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인 사포리는 서유럽의 결정적인 르네상스는 11세기 십자군의 출현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선언하였다. 그에 따르면 12세기에 이탈리아에 새로운 사회가 등장했는데, 이때는 도시중심, 상업자본주의, 자치적인 도시국가, 대중의 새로운 문화의 출현으로 특징짓는 시대이다. 레인 또한 르네상스가 12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일어났다고 하는 페거슨의 시대 구분에 동의하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르네상스는 재생이나 시작의 국면으로 볼 것이 아니라, 중세의 말기적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추론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주장이 부르크하르트적인 해석을 앞지를 것인지의 여부는 아직 예견할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어느 쪽이든 르네상스가 하나의 뚜렷한 구획이 되는 역사적 시대 구분 용어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항목차례

종교개혁(Reformation)

 

  16∼17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그리스도 교회의 혁신운동. 이 운동을 통해 오늘날 프로테스탄트라 부르는 교파가 생겼다. 이 운동은 광범위하게 벌어졌는데, 특히 17,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퓨리터니즘도 넓은 의미로는 이 운동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역사적 원인】 로마 가톨릭교회는 아비뇽 교황의 대립으로 생긴 분열 결과, 14세기경부터 그 안팎에서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공의회(公議會)운동이 활발히 추진되어 피사·콘스탄츠·바젤 등지에서 공의회가 열렸으나 문제의 해결을 보지 못한 채 무위로 끝났다. 한편, 프랑스·영국 등 유럽 각국은 근대 국민국가로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중세적 그리스도교 세력은 점차 쇠퇴해 갔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종교개혁은, 본질적으로는 교회의 혁신운동이지만 근대국가의 성립이라는 정치적 변혁과 밀접한 함수관계에 있었다. 본격적인 종교개혁은 M.루터에 의해서 비롯되었으나 루터 이전에도 개혁의 선구자로 불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민중 사이에서 성서적 신앙을 인도한 프랑스의 발도, 롤러드파(派)를 이끌던 영국의 위클리프, 위클리프의 사상을 이어받아 독립운동을 일으킨 보헤미아의 후스, 윤리적 쇄신을 시도하였다가 끝내 순교한 피렌체의 사보나롤라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와 종교개혁과는 본질적으로 성격을 달리한다. 즉 르네상스적 인문주의는 예술적이고 귀족적이어서 참으로 역사를 변혁할 힘을 갖지 못하였다. 이와는 달리 종교개혁운동은 깊이 민중의 마음을 포착하여 역사를 움직였다. 마찬가지로 근대의 서곡이라 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과는 그 출발점과 역사상 미친 영향면에서 볼 때 근본적으로 다르다.

【경과】 ⑴ 독일:종교개혁운동의 횃불은 1517년 10월 31일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수도사이면서 신학교수인 루터가 <면죄부(免罪符)에 관한 95개조 논제>의 항의문을 비텐베르크대학의 성(城)교회 정문에 게시함으로써 올려졌다. 이 항의문은 마인츠의 대주교(大主敎) 교회의 알브레히트가 재정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판 면죄부에 대해 루터가 그 성사적(聖事的) 효과를 신학적으로 문제삼은 것이었다. 이것이 루터 자신의 예상을 넘어 유럽 전체에 파급되는 대운동으로 발전한 것이다. 루터가 이와 같이 가톨릭교회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교리를 근본적으로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4,5년 전 그가 수도원 생활의 악전고투 속에서 바울로의 ‘하느님의 뜻’이라는 복음을 재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는 인간의 영혼 구원이란 인간의 선행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만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확신하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종교개혁의 가장 깊은 근원은 구원문의 정확성을 둘러싼 루터의 내적 싸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95개조 논제>는 경제적으로 로마에 의해 많은 수탈을 당하여 온 독일 국민의 지지를 얻게 됨으로써, 문제가 일개 수도사가 제기한 신학논쟁에서 독일 국민 전체의 정치적·경제적인 문제로 확산되어 갔다. 당초 교황 레오 10세는 이 문제를 경시하였다가 문제의 해결이 어렵게 되자 유화책을 강구하기도 하였으나 루터는 1519년의 J.에크와의 라이프치히 논쟁 때 결정적으로 가톨릭교회와 정면대결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이 논쟁에서 루터는 보헤미아의 후스를 본떠 교황과 교회회의의 가류성(可謬性)을 주장하고 그 권위의 절대성을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20년 6월 드디어 루터에 대한 파문(破門)이 단행되었다. 이어 21년에 루터는 보름스 국회에 소환되어 황제의 심문을 받았는데, 여기에서도 그는 자신의 신앙을 관철하였다. 그는 심문을 받고 돌아가다 작센의 선제후(選帝侯:중세 독일, 곧 신성로마제국의 제후 가운데 황제의 선거에 관여할 수 있었던 7명의 제후) 프리드리히 현공(賢公)의 호의로 바르트부르크성(城)에 보호되어 1년에 걸친 체재 중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다. 이 루터역 성서는 문학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여 독일 국민의 정신적 유산이 되었다. 그러나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 머물고 있던 사이에 비텐베르크에서는 21년 카를슈타트(본명은 Andreas Bondenstein)가 지도하고 있던 과격분자들이 급격한 혁신운동으로 이른바 ‘비텐베르크소요’를 일으키고 있었다. 미사의 폐지, 평신도에 대한 성배(聖杯) 부여, 성상(聖像) 파괴 등은 개혁운동의 논리적 귀결이라 하나, 원래 보수적이었던 루터는 이를 급속하게 실행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이 소요는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서 돌아온 뒤 진정되었지만 그 여파는 22년의 ‘기사(騎士)의 난’ 농민전쟁(1524∼25)으로 발전하였다. 이 무렵부터 개혁운동은 제2단계에 들어가 루터는 한편으로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재세례파(再洗禮派)와 싸우는 양면작전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그는 에라스무스와의 ‘자유 의지론’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 인문주의와도 결별을 하여야만 되었다. 당시 유럽의 정치정세는 복잡하여서 신성(神聖)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독일과 에스파냐를 지배하고 있던 카를 5세는 로마 교황과 손을 잡고 근대국가로서 급속히 부상한 프랑스와 싸워야 하는 한편, 동방으로부터의 투르크의 침입을 경계하여야만 될 어려운 입장이었다. 이 때문에 카를 황제는 독일 국내 제후(諸侯)의 지지를 필요로 하여, 루터에게서 일어나기 시작한 개혁운동을 일방적으로 억제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독일 국내의 정치세력을 양분하는 결과가 되었다. 황제는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국회에서 양파의 화해를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 프로테스탄트측의 제후와 도시는 31년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하고 하나로 뭉쳐서 황제 및 교황측과 대결함으로써 이윽고 독일은 종교전쟁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의 내전에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 사이 루터파 교회는 점차 발전하여, 루터가 죽은 뒤 ‘순정(純正) 루터파’와 멜란히톤을 지지하는 ‘필리피스텐(필립파)’으로 분열되기도 하였으나, 독일 각지에서 꾸준히 성장하면서 확산되어 갔다.

⑵ 스위스와 프랑스:루터의 개혁운동이 면죄부에 대한 신학적 문제 제기,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느님의 뜻’에 따른 복음의 신앙이라는 종교 고유의 문제로부터 비롯된 데 반해서, 츠빙글리에 의해서 시작된 스위스의 개혁운동은 성직자의 결혼, 육식의 자유, 화상(畵像) 철거 등 휴머니즘적 동기에 바탕을 둔 가톨릭적 미신타파 운동으로 일어났다. 여기에 용병제(傭兵制) 폐지와 독립운동이라는 정치적 성격이 첨가되었다. 츠빙글리는 종군사제(從軍司祭)로서 스위스 용병제의 부패와 비극을 체험하였다. 또한 그는 성지순례(聖地巡禮)나 면죄부 판매 등의 부패상을 낱낱이 보고 교회개혁의 필요성도 통감하였다. 그가 처음으로 개혁운동의 기치를 든 것은 1523년의 ‘취리히 토론’이었는데, 이로써 그는 취리히의 콘스탄츠 주교구(主敎區)로부터의 독립과, 여러 종교적 미신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싸움을 개시하였다. 또한 그는 세속의 정치적 권위는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유래하는 것이지, 교회를 매개로 해서 부여된 것이 아니라는 속권독립론(俗權獨立論)을 주장하였다. 츠빙글리의 주도하에 개혁이 이루어진 교회는 뒤에 제네바의 칼뱅파(派) 교회와 합동해서 개혁파 교회로 불리게 되었는데, 그 특색은 성서주의(聖書主義)와 간소한 예배에 있었다. 그에 비해 루터파 교회는 성화상, 기타 예배양식에 있어서는 가톨릭적 요소를 존속시키고 있다. 양파의 차이점과 분리는 29년의 마르부르크 회담에서의 논쟁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회담은 독일과 스위스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결속을 시도하기 위해 이미 의견을 달리하고 있었던 성찬문제(聖餐問題)에 관해서 루터와 츠빙글리가 회담한 것이었는데, 결국 합의를 보지 못하고 루터는 그리스도의 성체(聖體)의 현존(가톨릭적 해석)을 고수하였고, 츠빙글리는 그 상징설(프로테스탄트적 해석)을 양보하지 않았다. 이로써 루터파와 개혁파가 형성됨으로써 유럽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2대 세력이 되었다. 프랑스의 종교개혁은 르페브르, 파렐 등의 인문주의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르페브르는 루터에 앞서 성서적 개혁사상을 품고 있었으나 루터의 개혁사상이 프랑스 국내에 유입된 이래 소르본대학 신학부를 중심으로 찬부 양론이 격렬하게 일었다. 그러나 1521년 4월 소르본측은 결국 루터가 이단임을 단정하고 이때부터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25년 파리 교외 모에서 있었던 르페브르를 중심으로 하는 그룹의 모임이 탄압 해산되자, 지도자들은 각지로 흩어져 이 가운데 파렐은 제네바에 가서 개혁운동을 일으켰다. 그의 개혁운동은 뒤에 칼뱅에게 계승되었는데, 이 칼뱅을 통해 세워진 제네바 교회가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지도하게 된다. 칼뱅은 처음에 에라스무스를 숭배하는 인문주의자였으나 루터의 개혁사상에 끌려 복음주의로 전환하였다. 그는 36년 《그리스도교 강요(綱要)》를 출판함으로써 일약 복음주의의 지도자로 부상하였고, 탄압을 피해서 스위스의 제네바에 자주 들렀다가 파렐의 설득으로 개혁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최초의 개혁운동은 복음적 신앙의 자유가 방종으로 오해되어, 개혁운동자들을 정치적·도덕적으로 민중을 속박하는 자들로 간주한 세력들의 반대에 부닥쳐 실패하였다. 칼뱅은 한때 스트라스부르에 피신하여 그곳에서 프랑스인 난민교회의 목사로 일했으나 40년 초청을 받고 다시 제네바로 갔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제네바에 머물면서 제네바를 프로테스탄트의 일대 근거지가 되게 하였다. 칼뱅은 루터의 의인론(義認論:오직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는 주장)을 계승하였는데, 이 점에서는 두 사람 모두 복음주의의 기반에 서 있었다. 그러나 칼뱅은 구원을 받은 자는 하느님의 도구로서, 하느님의 영광을 빛내도록 적극적으로 활동하여야 할 것(실천주의)임을 강조한 점에서는 루터와 다른 특색을 지닌다. 이와 같은 신앙은 뒤에 퓨리터니즘(청교도주의)에서 현세의 직업에 충실함으로써 스스로 하느님의 예정을 확정하려 하는 독특한 직업윤리를 낳았다. 이같은 직업관은 근대 자본주의 성립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⑶ 영국:위클리프 때부터 로마 교황의 세력권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운동이 있었는데, 헨리 8세의 이혼문제를 계기로 완전히 가톨릭 교회로부터 이탈하여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 이 이혼문제에는 국왕의 개인적 사정뿐만 아니라 내외의 정치적·종교적 정세가 복잡하게 엉켜 있었다. 그리하여 1534년의 ‘수장령(首長令)’에 따라 영국은 국왕을 최고관리자로 하는 독립된 교회가 되었는데, 그 교의 내용은 여전히 가톨릭적이었다. 다음의 에드워드 6세 시대에 들어서자 개혁정책이 단행되어 교회는 현저하게 칼뱅주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메리의 치하에는 다시 가톨릭교회에 대한 복귀정책이 취해져 많은 목사와 신도들이 박해를 받았다. 이같이 영국은 국왕이 바뀔 때마다 그 교회체제에도 크게 변동이 있어 오다가, 엘리자베스 1세 치하에 국운이 융성해지면서 일단 안정을 되찾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중간입장인 중도적 방향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철저하지 못한 개혁에 불만을 품은 청교도들은 장로주의(長老主義)의 스코틀랜드에서 제임스 1세를 맞이하여 보다 철저한 개혁의 실시를 청원하였으나 이들의 희망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탄압을 받았다. 오랫동안 억압되어 있었던 개혁에 대한 기대는 잉글랜드 대 스코틀랜드의 전쟁을 계기로 촉발하여, 드디어 1649년 찰스 1세의 처형을 정점으로 하는 청교도혁명에 이르렀다. 이 혁명은 크롬웰의 주도하에 수습되었으나 이 혁명을 계기로 해서 많은 프로테스탄트파가 생겼다. 오늘날 미국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이 청교도혁명으로 생긴 여러 파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역사적 의의】 종교개혁은 루터의 ‘하느님의 뜻의 발견’에서 비롯되는 그리스도교의 혁신운동이었으나,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에서도 세계적으로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이로써 근대 세계와 근대인이 탄생하였다. 종교개혁 후에는 계몽주의(啓蒙主義)가 일어나, 언뜻 비종교적 합리주의가 근대사회의 특징이 된 것 같이 보였지만, 근대인을 ‘마술’에서 진정으로 해방시킨 것은 단순히 자연과학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합리적·과학적 태도를 표출한 종교개혁의 정신이었다.

  항목차례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

 

  16세기 M.루터, J.칼뱅 등의 종교개혁의 결과로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하여 성립된 그리스도교의 분파. 가톨릭을 구교(舊敎)라고 하는 데 대해 신교(新敎)·개신교라고도 한다. 로마 가톨릭교회 및 동방정교회(東方正敎會)와 더불어 그리스도교의 3대 교파를 이룬다.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은 프로테스트에서 기원했는데, 이 말은 1529년 2월 21일에 열린 독일 슈파이어 국회에서 루터계 제후(諸侯)와 도시들이 황제 카를 5세 등 로마 가톨릭 세력의 억압에 항거한 데서 유래하였다.

【역사】 루터가 독일에서 일으킨 종교개혁은 1526년 이후 독일의 여러 지방으로 확산되었으며, 30년 독일 루터교회의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이 작성된 이후 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 3국으로 확산되었다. 이 종교개혁은 스위스에서도 일어났다. 취리히에서는 츠빙글리, 슈트라스부르크에서는 부처, 제네바에서는 칼뱅 등이 주로 상공업자와 손잡고 프로테스탄트적 종교개혁에 앞장섰다. 이 같은 일련의 교회개혁 운동 과정에서 프랑스에서는 위그노전쟁이, 독일에서는 30년전쟁 등의 종교전쟁을 치르기도 하였다. 그 결과 유럽의 종교적 통일성은 무너져, 독일에서는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었다. 유럽에서는 드디어 각 분파가 형성되었는데, 스위스계의 프로테스탄트를 개혁교회(改革敎會) 또는 장로교회(長老敎會)라고 부른다. 이 개혁교회는 프랑스·영국·스코틀랜드·네덜란드·헝가리·폴란드 등으로 확산되었다. 영국에서의 종교개혁은 유럽 대륙과는 달리 영국성공회(英國聖公會)를 성립시켰는데, 이것은 신학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이유로, 그 후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아 퓨리턴 제파(諸派)로 나뉘어 각각 장로파(長老派)·회중파(會衆派)·뱁티스트파·퀘이커파·메노나이트파 등 여러 교회로 성장하였다. 이들 여러 교회의 신학적 특징은 칼뱅주의뿐만 아니라 교파에 따라서는 재세례파(再洗禮派)나 스피리튜얼리즘의 요소를 간직하기도 하였다. 18세기에 들어서 영국 성공회로부터 갈라져 메서디스트 교회가 생겼고,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파가 주종을 이루었다. 미국은 영국의 퓨리턴 제파에서 나온 교회와 메더디스트 교회를 주종으로 하는 대표적인 프로테스탄트 국가로서, 사상적으로나 문화형성에 크게 공헌하였다. 유럽의 여러 교파가 이식되었고, 기존의 대교파에서 갈라져 나온 많은 교파로 그룹을 형성했다. 이들 프로테스탄트 여러 교회 중에서 잉글랜드의 성공회,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 독일의 루터교회, 네덜란드의 개혁파교회 등은 본래 국가와 결부된 국가교회(國家敎會)이지만, 퓨리턴 이후에는 교회와 국가가 분리되기 시작하여 이른바 자유교회(自由敎會)가 성립하였다. 이와 같은 자유교회 제도가 전형적인 방법으로 시행되고 있는 곳이 미국이며, 따라서 국가교회형의 앵글리칸교회(에피스크탈교회라고도 한다)·루터교회·개혁파교회 등도 미국에서는 자유교회화되어 있다. 프로테스탄트 여러 교회는 모두가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쳐 적극적으로 외국 전도에 힘써 각 교파는 아시아·아프리카·남아메리카 등지에 교회와 미션스쿨·사회사업단체 등을 창립하였다.

【프로테스탄티즘의 특색】 종교개혁은 단순히 가톨릭교회의 타락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신학적인 대립에서 유래하였다. 프로테스탄트 쪽에서 말하는, 루터의 ‘복음의 재발견’이야말로 종교개혁의 출발점인데, 여기서 시작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기본적인 신학적 특징은 다음의 3가지를 들 수 있다. ① 신앙에 의한 의인(義認):프로테스탄티즘은 ‘오직 신앙에 의하여(solfida)’ 또는 ‘오직 은혜에 의하여’ 의(義)로 인정됨을 강조한다. 물론 가톨리시즘(가톨릭교)에서도 ‘은혜에 의하여’를 주장하지만, 거기서는 은혜에 의하여 의화(義化)가 더해져서 드디어 성화(聖化)에 이른다고 하며, 의화는 구제(救濟)과정의 한 단계로 되어 있다. 이에 비해 프로테스탄티즘에서는, 인간은 선업(善業)이 없어도 은혜에 의하여 죄를 용서받는 것인데, 이 같은 죄의 용서가 의인이다. 따라서 똑같은 의인이라도 한편에서는 의화 내지 성의(成義)로 해석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의인 내지 선의(善義)로 해석된다. 선업 없이도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의(義)로 인정하는 신의 은혜를 거저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에 의한 의인’이며, 이 은혜에 대한 감사로서 나타나는 것이 선업이다. 그것은 ‘오직 신앙에 의하여’라고 해도 행위가 무시되는 것은 아니며 신앙과 행위의 관계가 가톨리시즘의 경우와는 다른 것이다. ② 성서원리(聖書原理):가톨리시즘에서는 권위의 통로로서 성서와 교회의 전통이라는 두 가지를 주장하고, 성서의 해석도 교회의 전통에 따라 규정되므로 결국 교회가 성서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대해 프로테스탄티즘은 권위의 통로를 성서에만 한정한다. 교회는 성서보다 우위에 있지 않고 오히려 성서에 기초하여 존재한다. 또한 성서의 정경화(正經化)는 교회로 인하여 이루어졌으나 성서를 진실로 정경화한 것은 성서 자체의 힘이며, 교회는 그것을 인정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③ 만인사제(萬人司祭):가톨리시즘에서는 설교보다도 전례(典禮)가 중요하며, 이것은 담당하는 사제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그 권위는 사도 베드로에게서 전승된 것으로 되어 있다(使徒傳承). 프로테스탄티즘에서는 전례보다도 설교가 중시되어 교직제(敎職制) 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교직자는 제사라는 성격보다도 설교자·목회자(牧會者)의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교직자라고 해도 그 직위에 권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대신 교직자의 신앙과 인격이 중요해지는데, 엄밀하게는 신의 말씀만이 권위이며 교직자는 신의 말씀을 전도하는 기능이다. 원리적으로는 만인이 설교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제사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만인이 바로 제사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전개】 프로테스탄티즘은 루터·칼뱅 이후 17세기에 정통주의를 낳았는데, 18세기의 계몽주의 이후 근대사상과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신학사상의 전개를 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상사에서는 정통주의까지의 프로테스탄티즘을 고(古)프로테스탄티즘이라 부르고, 계몽주의 이후에 새롭게 전개된 것을 신(新)프로테스탄티즘이라고 한다. 18세기의 이신론(理神論), 19세기의 자유주의적 그리스도교 등이 그것인데, 물론 거기에 대항하는 움직임도 일찍부터 일어났으며, 영국의 메서디즘·옥스퍼드운동, 독일의 신앙각성운동·신(新)루터주의 등에서 신앙의 부흥과 교회의 전통으로의 복귀운동이 일어났다. 근대 프로테스탄트의 역사는 이 양자의 결합으로써 구성되었다.

  항목차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1.10∼1546.2.18)

 

  독일의 종교개혁자·신학자. 아이슬레벤 출생. 아버지는 만스펠트로 이주하여 광부로 일하다가 광산업을 경영, 성공하여 중세 말에 한창 득세하던 시민계급의 한 사람이다. 그는 엄격한 가톨릭신앙의 소유자였고 자식의 교육에도 관심을 가졌다. 마르틴은 1501년 에르푸르트대학에 입학, 1505년 일반 교양과정을 마치고 법률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자신의 삶과 구원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무렵 도보여행 중 낙뢰(落雷)를 만났을 때 함께 가던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그 해 7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업을 중단,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갔다. 계율에 따라 수도생활을 하며 1507년 사제(司祭)가 되고, 오컴주의 신학교육을 받아 수도회와 대학에서 중책을 맡게 되었다. 11년 비텐베르크대학으로 옮겨, 12년 신학박사가 되고 13년부터 성서학 강의를 시작하였다. 그는 이때, 하느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접근하고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는 신임을 재발견하였다. 이 결과가 당시 교회의 관습이 되어 있던 면죄부(免罪符) 판매에 대한 비판으로 17년 ‘95개조 논제’가 나왔는데, 이것이 큰 파문을 일으켜 마침내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칙령(破門勅令)을 받았으나 불태워 버렸다. 21년에는 신성로마제국 의회에 환문되어 그의 주장을 취소할 것을 강요당했으나 이를 거부, 제국에서 추방되는 처분을 받았다. 그로부터 9개월 동안 작센 선제후(選帝侯)의 비호 아래 바르트부르크성(城)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다. 이것이 독일어 통일에 크게 공헌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는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썼는데, 처음에는 멸시의 뜻으로 불리던 호칭이 마침내 통칭이 되어 ‘루터파 교회’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에서 파생된 과격파나 농민의 운동, 농민전쟁에 대해서는 성서 신앙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들과는 분명한 구분을 지었다. 그 뒤 만년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회와 종교개혁 좌파 사이에서 이들과 논쟁·대결하면서, 성서강의·설교·저작·성서번역 등에 헌신함으로써 종교개혁 운동을 추진하였는데, 영주(領主)들간의 분쟁 조정을 위하여 고향인 아이슬레벤에 갔다가, 병을 얻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업적은 대부분 문서 형태로 남아 있어, 원문의 큰 책이 100권(바이마르판 루터전집)에 이른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1520)는 《로마서 강의》(1515∼16)와 함께 초기의 신학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루터는 상황 속에서 자기를 형성하고 발언하는 신학자였기 때문에, 만년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저서와 강의를 통하여 그의 사상을 남김없이 토로하였다. 그는 신학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철저한 은혜와 사랑에 두고, 인간은 이에 신앙으로써 응답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하느님께 반항하고 자기를 추구하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자유로운 군주’이면서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이며, 신앙의 응답을 통하여 자유로운 봉사, 이 세계와의 관계가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면에서는 특히 모든 직업을 신의 소명(召命)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 그 이후의 직업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더욱이 이러한 견해는 성서에만 그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실천한 것도 중요한데, 1525년 카타리나와 결혼한 것도 이같은 실천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정세 속에서 이러한 신앙적 주장을 관철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인데, 캘빈이나 다른 종교개혁자와 함께 종교개혁을 르네상스와 함께 근세에의 전환점으로 만들었다.

  항목차례

칼뱅(Jean Calvin, 1509.7.10∼1564.5.27)

 

  프랑스의 신학자·종교개혁자.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방 누아용 출생. 아버지는 지방 귀족의 비서·경리 등으로 일한 소시민이었다. 1523~28년 파리에서 신학을, 그 후 오를레앙 부르주의 대학에서는 법학을 공부했다. 1532년 세네카의 《관용에 대하여》의 주해(註解)를 발표하여 인문주의자로서의 학문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33년 에라스무스와 루터를 인용한 이단적 강연의 초고를 썼다는 혐의를 받고, 은신해 지내면서 교회를 초기 사도시대의 순수한 모습으로 복귀시킬 것을 다짐하고 로마 가톨릭과 결별했다. 그는 이른바 ‘돌연한 회심(回心)’에 의해 복음주의적(福音主義的), 즉 프로테스탄트주의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 35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이단에 대한 박해로 신변의 위험을 느낀 그는 스위스의 바젤로 피신하여, 그 곳에서 36년 복음주의의 고전이 된 《그리스도교 강요(綱要: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를 저술하였다. 이것은 박해받고 있는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해 변호하고 그 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무렵,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위해 함께 일할 것을 G.파렐에게서 요청받고 그의 종교개혁 운동에 참가하였는데, 처음부터 신정정치(神政政治)에 기반을 둔 엄격한 개혁을 추진하려 했기 때문에 파렐과 함께 추방되어,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설교자(說敎者)·신학교수로 있으면서 《로마서 주해》를 저술, 추기경 사드레와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3년 후에는 상황의 변화로 다시 제네바에 초빙되어 거기서 《교회규율》(42)을 제정하고 교회제도를 정비하여, 세르베토스 등의 인문주의자들을 누르고 제네바의 일반 시민에게도 엄격한 신앙생활을 요구하여, 신정정치적 체제를 수립하였다. 제네바는 그 후 종교개혁파의 중심지로서 전 유럽에 영향을 끼쳤다.

 

칼뱅이즘(Calvinism)

 

  프랑스의 종교개혁자 칼뱅에게서 발단한 프로테스탄트 사상. 칼뱅은 신앙에 의한 의인(義認), 신앙의 유일한 규준(規準)으로서의 《성서》 등, 루터의 사상을 계승하고 동시에 독자적인 사상을 발전시켰다. 신의 절대적 주권을 강조하는 신관(神觀), 구원을 받는 자와 멸망에 이르는 자는 영원한 옛날부터 신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고 하는 예정설(豫定說), 성찬(聖餐)에서는 루터의 말처럼 빵과 포도주 속에 그리스도가 현존하는 것이 아니며, 츠빙글리가 말하듯 그것들이 그리스도의 혈육을 상징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성령(聖靈)의 힘으로써 영적으로 관여한다고 하는 성찬론 등이 칼뱅 신학의 특징을 이룬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자기를 신의 용기(容器)로 보는 루터의 수동적인 경건에 대해, 자기를 신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보는 활동주의적 경향을 가졌으며, 사회생활에서의 적극적인 태도를 창출하였다. 또한 루터가 국가권력을 영광화(榮光化)하는 경향을 띤 데 반해, 칼뱅은 저항권을 인정하고 국가에 대한 교회의 자유를 확보하였다. 예배에 관해서도 가톨릭 교회의 미사를 폐지하고 예배를 설교 중심으로 만들었으며, 교회제도에 관해서는 목사·교사·장로·집사 등 4개의 직무를 정하고, 목사와 장로로 이루어진 콘시스토리움에 따라 교회가 운영되도록 하였다. 칼뱅의 사상은 스위스뿐만 아니라 유럽 각지에 파급되어 독일·네덜란드 및 기타 국가의 개혁파, 프랑스의 위그노파, 스코틀랜드의 장로파, 잉글랜드의 퓨리턴 제파(장로파·독립파·뱁티스트파 등)를 탄생시켰다. 또 이러한 칼뱅주의의 전개 속에서 신학적인 발전과 변모를 볼 수 있는데, 그 주요한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즉, 신의 예정을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타락 이전으로 보는 것과 그 이후로 보는 것과의 대립, 그리스도의 죽음을 구원받기로 정해진 자만을 위한 것으로 보는 것과 만인을 위한 것으로 보는 것(아르미니우스주의)과의 대립, 천지창조로부터 완성까지를 신과 인간과의 계약의 실현과정으로 보는 계약신학의 성립 등이다. 이와 같은 발전과정에서 칼뱅주의는 근대 서유럽 문화 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했으며, 근대 민주주의 형성과 근대주의 ‘정신’에 대해, 트뢸치나 M.베버가 지적한 바와 같이 큰 영향을 미쳤다.

  항목차례

近世自然法思想

 

  16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서유럽 사회를 풍미한 자연법 사상. 그로티우스의 이성자족론(理性自足論)에서 출발한 합리주의를 기초로 하며, 그 때까지의 자연법이 신(神)의 뜻인 영구법을 전제로 하고 있는 데 반하여, ‘신(神)일지라도 자연법을 변경할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의 이성을 신의(神意)보다도 위에 두었다. 이러한 합리주의 외에 근세 자연법에는 또한 개인주의와 급진주의의 특징도 있는데, 개인이 가지고 있는 천부적(天賦的)인 불가양(不可讓)의 자유와 권리를 국가의 권력이 침해하는 경우에는 혁명을 일으켜서라도 그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와 같이 급진적·혁명적인 근세 자연법은 미국의 독립전쟁과 프랑스혁명의 사상적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일단 혁명이 성공하자 근세 자연법의 급진성은 점차 사라지고, 법실증주의(法實證主義)가 법이론의 세계에 군림하게 되었다.

  항목차례

경험론(empiricism)

 

  인식·지식의 근원을 오직 경험에서만 찾는 철학적 입장 및 경향. 따라서 초경험적 존재나 선천적인 능력보다 감각과 내성(內省)을 통하여 얻는 구체적인 사실을 중시하여, 전자도 후자에 의해 설명된다는 사고방식이며, 지식의 근원을 이성에서 찾는 이성론·합리론과 대립된다. 철학이론으로서 경험론은 이미 고대철학의 역사 속에 존재한다. 따라서 경험론은 그 역사적 형태에 따라 고대적·근대적 및 현대적인 것으로 구별해야 한다.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sophist), 원자론자, 소크라테스파(派)의 일부(퀴닉파·키레네파 등), 에피쿠로스학파 등이 이 경향에 속하며,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이성주의·초월주의의 경향과 대립된다. 그러나 이 경향이 유력해진 것은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경험적 사실이 중시되고, 또 인식론이 철학의 중심 과제가 된 근대 이후의 일이다. 특히 영국은 경험론의 전통에 있어 대륙의 이성론이나 독일의 관념론 등과는 대조적인 성격을 띤다. 이 경향은 중세에 이미 F.베이컨, W.오컴 등에서 뚜렷하였으며, 특히 후자의 비판적 견해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영국 경험론의 진정한 기원은 관찰과 실험을 중시하고, 연역적 추리에 대하여 개별적 경험에 근거를 두는 귀납법을 제창한  베이컨이다. 이 경향은  T.홉스를 거쳐  J.로크에 이르러 R.데카르트의 생득관념설(生得觀念說:nativism)을 비판하여 모든 인식의 경험에 의해 설명됨으로써 명확화하였다. 로크는 “마음이란 백지 또는 암실이며, 모든 지식은 감각과 반성을 통하여 외적으로 주어지는 문자이며 빛”이라고 하였다. 로크의 경향은 G.버클리와 D.흄으로 계승되어 영국 경험론의 트리오를 이루었다. 그들은 추상개념, 경험의 배후에 있는 실체개념, 인과율(因果律) 등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보였으며, 특히 흄은 추상관념을 비판하여 관념의 기원을 감각인상에서 찾음으로써 위의 경향을 극한으로까지 밀고 가서 I.칸트로 하여금 이성론의 독단이라는 잠에서 깨어나게 하였으나, 상대주의·회의주의적인 결과도 나타냈다. 19세기에 들어서는 J.S.밀 등도 영국의 고전경험론의 흐름을 따랐다. 경험론이라는 큰 조류가 볼테르를 거쳐 프랑스에 유입되자 프랑스 계몽사상, 특히 프랑스 유물론으로서, 근대 세계사를 비약적으로 전진시키는 일대 격류로 변모·발전하였다. 또 영국 경험론은 이와 같은 프랑스의 계몽사상이나 유물론과 합류, 봉건제에서 깨어나지 못하였던 독일을 일깨웠는데, 그것은 단순한 충격에 그치지 않고 독일 관념론 형성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은 철학사상(哲學史上) 유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근대 경험론으로서의 영국 경험론은 이 동안 프랑스 유물론이나 독일 관념론의 형태로 소멸된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19세기 전반에는 영국의 부르주아 라디칼리즘의 철학적 지주가 되었다. 이어 19세기 후반 이후에는, 한편으로 유럽 대륙에서 이른바 ‘과학의 철학’의 여러 조류에서 핵심적인 이론이 되었고, 20세기에 들어서자 논리실증주의의 형태로 나타났다. 한편 미국 대륙에 건너가서는 프래그머티즘이라는 형태로 이론적인 자체 강화를 이루어 오늘에 이른다. 이렇게 경험론의 전통은 헤겔 철학을 정점으로 하는 독일 관념론의 붕괴 이후, 그 반동으로서의 유물론이나 실증주의의 움직임과 결부되어, 19세기~20세기에 서양에 확산되었다. 논리실증주의·프래그머티즘·분석철학 등은 대표적인 현대 경험론이다. 예를 들면, 논리실증주의는 한편으로 사실적(事實的) 여건을 모든 경험과학 이론의 구성과 환원의 기초로 생각하고, 또 한편으로는 전통적으로 선천적 인식으로 간주되어온 논리·수학 등의 필연성까지도 감각적 기호(記號)에 관한 약정(約定)에 뒤따르게 하고 있다. 프래그머티즘은 위의 이원론(二元論)에는 비판적이며, 일원적 연속성과 행동심리학에 의한 인식의 동적인 파악을 강조하지만, 한층 철저한 경험론의 입장에서는 공통된 경향을 보인다.

  항목차례

베이컨(Francis Bacon, 1561.1.22∼1626.4.9)

 

  영국의 철학자·정치가. 런던 출생. 르네상스 후의 근대철학, 특히 영국 고전경험론의 창시자이다. 엘리자베스 여왕 치하에서 국회의원이 되었고, 제임스 1세 치하에서는 사법장관과 기타 요직을 지내 ‘벨럼의 남작’, 이어서 ‘오르반즈의 자작’이 되었다. 1613년에 검찰총장, 18년에 대법관 등 날로 권세가 높아갔으나, 수뢰(收賂) 사건으로 의회의 탄핵을 받아 관직과 지위를 박탈당하고 정계에서 실각된 후 만년을 실의 속에 보내면서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였다. 냉정하면서도 유연한 지성을 가진 현실파 인물이었으며, 근세 초기의 사상가답게 그 역시 천동설을 신봉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하여 반대하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를 완전히 불식하지 못한 전통적인 구(舊)사상의 영향하에 있던 사상가였다. 그러나 그의 기본적인 의도는 스콜라 철학의 불비·결함을 비판하고 새로운 경험론적 방법을 발견·제창하려는 데 있었다. 즉, 그는 우주 일체의 활동의 원인을, 특히 우리들 인간이 자유롭게 지배하고 명령할 수 있는 원인을 규명하려고 힘썼으며, 그러기 위해서 인류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지적 재산의 일람표를 작성하여 거기에 무엇이 결핍되었고 무엇을 보충하여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려고 하였다. 이것을 저서 《학문의 진보》에서 말하였지만, 처음에 《학문의 대혁신》 전 6부의 집필을 구상하여 그 계획을 대규모로 전개하려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간행된 것은 3부뿐이었고, 특히 제1부의 《학문의 진보:The Advancement of Learning》(1605)와 제2부의 《신기관(新機關:Novum Organum)》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서 《오르가논》에 대항하는 것)(20)이 중요하다. 그는 기억·상상·이성이라는 인간의 정신능력 구분에 따라서 학문을 역사·시학·철학으로 구분하였고, 다시 철학을 신학과 자연철학으로 나누었는데, 그의 최대의 관심과 공헌은 자연철학 분야에 있었고 과학방법론·귀납법 등의 논리 제창에 있었다. 그는 우선 인간 지성의 도리의 접근을 방해하는 편견으로서 4종의 이도라(idora:우상 또는 환영)를 지적하였는데, 그것은 ① 종족의 우상, ② 동굴의 우상, ③ 시장의 우상, ④ 극장의 우상 등이다. ①은 인류라는 종족에 대한 보편적인 선입관이고, ②는 개인적 편견으로서, 마치 동굴 속에 있듯이 자연의 빛이 보이지 않는 상태를 비유한 것이며, ③은 언어의 부적당한 사용에 기인하는 것으로, 시장에서 있지도 않은 풍설이 나도는 것과 같은 것이며, ④는 논증의 잘못된 규칙이나 철학의 그릇된 학설과 체계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으로서, 마치 무대 위에서 상연되는 가공의 이야기에 비유되는 것과 같은 것 등을 말한다. 이와 같은 편견을 일소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적 삼단논법은 지식의 확장에 소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실험과 관찰에 기본을 둔 귀납적 방법을 중시하였다. 즉, 그것만이 다수의 사례를 모아서 표나 목록을 만들어 사상(事象)의 본질을 파악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베이컨이 말한 본질은 여전히 중세적 ‘형상(形相)’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자연법칙의 의미도 명확하지 못하며, 수학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자연 속의 보편적 법칙을 양적 관계로서 파악하는 수단을 동반하고 있지 않은 점에서 그 이론이 매우 불충분하였지만, 근대과학의 방법의 중요한 일면을 강조한 것만은 틀림없다. 바꾸어 말하면, 베이컨에 있어 ‘형상’의 탐구는 형이상학이었지만, 그 형이상학의 응용부문은 미신적 마술과 구별된 ‘자연적 마술’이었다. 여기에 르네상스적 마술이 근대과학의 공학적 기술로 전신(轉身)하려 한 전환점이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철학이 지향하는 것은 그와 같은 새로운 마술, 즉 발명·발견을 뜻하는 대로 성취시킬 수 있는 기계공학적 마술의 달성이었는데, 그는 이것을 《뉴 아틀란티스:The New Atlantis》(1627)라는 미완성의 유토피아 이야기에서 항공기·잠수함·인공의 비·합성금속 등의 과학적 발명을 실현하고 있는 이상국의 꿈을 묘사하여 나타냈다. 이와 같이, 과학의 진보에 장대한 꿈을 싣고 과학연구의 방법을 제창하였지만, 그 방법을 실제로 이루는 데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철학 중에서 구현된 방법의 정신, 즉 미래를 예견한 광대한 전망적 정신과 그 지적 전망에 의하여 ‘인류의 왕국’을 확대하여 자연에 대한 인간의 승리를 달성하려고 한 그의 장대한 포부는 그 후에 영국뿐만 아니라 널리 전 유럽의 근대철학에서 그를 선각자 속에 자리잡게 하였다. 베이컨의 실천철학은 그의 문필의 재능을 보인 《수필집》(1597)에서 비체계적으로 논술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기적 충동 외에 사랑이라는 지고(至高)한 덕으로 인간의 존재를 인정하고 후자에 의한 실천적 활동의 중요성을 역설한 점에서 그 후 영국 고유의 사회적·실천적·공리주의적 윤리의 방향을 시사하였다. 저서에, 《학문의 권위와 진보》(1622) 《숲과 숲》(27) 등이 있다.

  항목차례

홉스(Thomas Hobbes, 1588.4.5∼1679.12.4)

 

  영국의 철학자. 맘즈베리 출생. 무명의 목사 아들로 태어나 옥스퍼드대학에서 스콜라철학을 전공하였다. 스튜어트왕조를 지지하는 정치가로 지목되자, 퓨리턴혁명 직전에 프랑스로 망명하여 유물론자 R.가생디와 철학자인 R.데카르트 등과 알게 되었다. 그 후 크롬웰의 정권하에서는 런던으로 돌아와 정쟁(政爭)에 개입하지 않고, 오직 학문연구에 힘썼다. 왕정복고(王政復古) 후에도 찰스 2세 통치하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는 F.베이컨과는 달리 귀납법(歸納法)만이 아닌 연역법(演繹法)도 중시하여, 양자의 상즉적(相卽的) 관계에 의하여 이성(理性)의 올바른 추리인 철학이 성립된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주요저서인 《철학원리》는 제1부 <물체론>(1655), 제2부 <인간론>(58), 제3부 <시민론(市民論)>(42, 47) 등 3부로 나누어졌는데 베이컨 학설보다 더 체계적으로 구축되었다. 제1부 <물체론>에서 그는 자연학(自然學)을 철학의 기초에 두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인(形相因)·목적인(目的因)을 버리고 전실재(全實在)를 물체와 그 운동이라는 동력인(動力因)만으로 설명하려는 유물론, 즉 자연주의 입장을 취하였다. 자연적 물체에 대한 이와 같은 생각을 인위적 물체인 ‘인간’이나 ‘국가’에도 미치게 하여, 감각·감성(感性) 등의 인식의 이론이나 정념론(情念論), 윤리학, 법·사회의 이론에도 적용하였다. 정신은 미세한 물체이고, 인식은 외계의 운동이 감관(感官)에 주는 인상에서 생기며 실재의 모사(模寫)가 아니고 주관적이라 하였다. 이는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으며, 지적인 판단이나 추리는 그 표현수단으로서 언어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후자도 실재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고 개개의 물체만이 실재하는 것이며, 추상적·보편적 개념은 기호(記號)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견해는 중세(中世)의 W.오컴 등에서 현저했고, 또 후일의 영국 경험론에서 보는 고유한 유명론(唯名論)의 전형적인 예이다. 수학(數學)은 앞에서 말한 기호로서의 보편자(普遍者)에 관계되는 지식의 모범이라 하였다. 감정이나 정서에 대해서도 똑같은 원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외적 자극에 대한 이론적 반응이 감각인 데 반하여, 실천적 반응은 쾌(快)·불쾌(不快)의 감정이다. 선(善)이란 쾌이므로 인간이 바라는 것이고, 악(惡)이란 불쾌이므로 인간이 싫어하는 것이다. 의지(意志)는 외적으로 결정되며 결정론(決定論)은 필연이다. 본질적으로 선한 것은 없고, 선악(善惡)·정사(正邪)는 상대적인 것이어서 국가와 법이 성립되었을 때에 그 판정의 기준이 생긴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어서 ‘자연상태’에서는 아무것도 금할 수 없고, 개인의 힘이 권리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만을 끝까지 추구하는 자연상태에서는 ‘만인(萬人)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있고, ‘사람은 사람에 대하여 이리[狼]’이기 때문에 자기 보존(自己保存)의 보증마저 없다. 그러므로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 사람은 계약으로써 국가를 만들어 ‘자연권(自然權)’을 제한하고, 국가를 대표하는 의지에 그것을 양도하여 복종한다. 홉스는 《리바이어던:Leviathan》(1651)에서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를 이상적인 국가형태라고 생각하였다. 그 밖의 저서로 《자연법과 국가의 원리》(40) 등이 있다.

  항목차례

로크(John Locke, 1632.8.29∼1704.10.28)

 

  영국의 철학자·정치사상가. 브리스틀 근교의 링턴 출생. 계몽철학 및 경험론철학의 원조라 일컬어진다. 아버지는 소지주·법률가로서 내란 때는 의회군에 참가하여 왕당군과 싸웠다.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자연과학·의학 등을 배웠고, 한때 공사(公使)의 비서관이 되어 독일 체류 중에 애슐리경(뒤의 샤프츠베리 백작)을 알게 되어 그의 시의(侍醫) 및 아들의 교사 그리고 고문이 되었다. 백작이 실각되자 반역죄로 몰려, 1683년 네덜란드로 망명했다가, 89년 사면되어 귀국하였다. 망명생활 동안 각지를 전전하면서 여러 학자들과 친교를 맺고, 귀국 후 《종교 관용에 관한 서한》(1689) 《제2서한》(90) 《제3서한》(92) 《통치이론》(90) 《인간오성론(人間悟性論)》(90) 등을 간행하여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다. 그 후 관직에 있었으나 1700년 이후 은퇴하여 에식스의 오츠에서 사망하였다. 데카르트 철학과 I.뉴턴에 의해 완성된 당시의 자연과학에 관심을 가졌고 반(反)스콜라적이었다. 《인간오성론》은 그의 영향을 바탕으로 G.버클리, D.흄에게로 계승되었던 경험론과 내재적 현상론(內在的現象論)의 입장에서, I.칸트에 이르러 결실을 보게 되는 인식을 근본 과제로 제기하여 논술한 저서이다. 제1권에서는, 먼저 R.데카르트나 케임브리지 플라톤파(派)의 본유관념(本有觀念)과 원리를 부정하고, 그 위에 제2권에서는, 인지(人智)는 모두 감각과 반성이라는 경험을 통하여 얻어지는 단순관념에 유래하며, 그로부터의 복합관념으로 설명된다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전통적인 ‘실체(實體)’ 개념도 단순관념의 복합이며, 기체(基體)는 그 배후에 상정되는 불가지(不可知)의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단, 색(色)·향(香)·음(音)과 같이 감각에 대하여 상대적인 제2성질과, 연장(延長)·운동·고체성(固體性)과 같이 물(物) 자체에 구비된 제1성질과 구별하여, 전자(前者)는 후자가 감각기관에 자극을 줌으로써 생긴다고 생각하여, 당시의 과학적 실재론을 전제로 삼았다. 또, 불가지인 물적 실체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정신에 대해서도 반성의 관념과 기능적 인격에 의한 설명을 하고 있지만, 정신실체나 신의 존재를 인정한 점에서, 그 문제를 다음의 버클리와 흄에게 남겨 놓았다. 제3권의 언어론은, 스콜라적 실체형상(實體形相)의 비판, 개념론 또는 유명론적(唯名論的)인 보편개념의 설명·정의에 대해서의 견해 등 현대 의미론(意味論)에 통하는 중요한 고찰을 포함시켰다. 제4권은 제3권까지 논술한 것들을 바탕으로 하여 지식의 확실성·가능성·종류 등을 논했다. 제4권에서 자아의 직각지(直覺知)를 지식의 근원으로 하는 것 등 이성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으나, 지식을 관념과 대상 간이 아니라 관념간의 일치 또는 불일치의 지각(知覺)이라는, 관념간의 관계라고 한 것은 후의 경험론의 방향을 보인 것이다. 그에게는 《인간오성론》에서 단편적으로 취급된 이외에는 정리된 윤리서(倫理書)는 없다. 그러나 도덕의 심리적 해명 방법이나 쾌락주의·행복주의의 경향과, 도덕을 신(神)의 법, 자연법, 국법과의 일치에서 구하려고 한 방향 등은 영국 고유의 윤리와 공통된 성격을 보인다. 또, 계시(啓示)의 뜻을 인정하면서도 이성적 논증(理性的論證)의 한계를 넘는 것을 개연적(蓋然的)이라 생각하는 점에서 종교상 이신론(理神論)을 조장하는 입장에 섰다. 법·정치 사상에서는 계약설을 취하지만, 홉스의 전제주의(專制主義)를 자연상태보다도 더 나쁘다고 생각하여 주권재민(主權在民)과 국민의 반항권을 인정하여 대표제에 의한 민주주의, 3권분립, 이성적인 법에 따른 통치와 개인의 자유·인권과의 양립 등을 강조하여 종교적 관용을 역설했다. 그의 정치사상은 명예혁명을 대변하고 프랑스혁명이나 아메리카 독립 등에 커다란 영향을 주어 서유럽 민주주의의 근본 사상이 되었다. 또 교육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당시의 교육법을 통렬히 비판하여 그리스·라틴어 집중주의, 암기식 주입주의를 반대하고 수학적 추리와 유용한 실제적 지식, 신체·덕성의 단련을 중시하였다. 따라서 그 사람의 소질을 본성에 따라서 발전시켜야 한다고 역설하여 가정교사에 의한 교육을 주장했다. 저서로 《금리저하와 화폐가치와 화폐가치 앙등의 결과에 관한 고찰》(91) 《교육론》(93) 등이 있다.

  항목차례

버클리(George Berkeley, 1685.3.12∼1753.1.14)

 

  영국의 철학자·성직자. 아일랜드의 킬케니 출생. 17∼18세기 영국 고전경험론을 대표하는 철학자이다. 1704년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한 후, 1707년에 이 학교의 연구원이 되었으며, 《시각신설론(視覺新說論):An Essay Towords a New Theory of Vision》(1709)과 그의 대표적인 저서가 된 《인지원리론(人知原理論):Treatise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10) 등을 저술하였다. 그 후,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복음(福音)을 전하기 위하여 버뮤다섬[島]에 이상적인 칼리지를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아메리카로 건너갔으나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귀국 후, 33년에 아일랜드 클로인의 주교로 임명되어 지방교화에 힘을 기울였다. 그와 동시에 저술에도 전념하였으며, 만년에는 옥스퍼드로 가서 지내다가 병사하였다. 버클리 철학의 근본명제는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知覺)된다는 것(Esse est percipi)’으로 요약된다. 즉, 그는 능동적인 힘, 작용으로서의 정신실체 등과 그것에 지각되어 비로소 존재하는 ‘관념(idea)’만을 인정하였다. 그는 또 지각되지 않는 추상적 관념의 존재를 부정하였으며, 추상적 보편관념이란 같은 종류의 개개의 사물을 대표하는 기능을 부여한 개별관념이라고 역설하였다. 또, 색·향기 등 제2성질의 주관성에 대하여, 연장·운동 등 제1성질을 지각하지 않고도 실재한다고 생각한  J.로크의 입장을 부정하고, 나아가 물체적 실체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또한 D.흄에 앞서서 관념 사이의 인과율도 부정하였다. 버클리의 관념 및 정신실체 일원론(一元論)의 입장은 독아론(獨我論)과 내재적 현상론, 이 경향을 모두 수반하고는 있지만, 궁극에 가서는 ‘정신은 개아(個我)를 초월한 신(神)’이라고 생각하여, 말브랑시(1638∼1715)에 가깝고 신(新)플라톤주의의 색채를 띤 만유재신론(萬有在神論)으로 발전하였다. 이 경향은 그의 만년의 저작 《알시프런》(1732)과 《사이리스》(44)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그의 의도는 신흥 자연과학의 유물론과 동시대의 무신론·이신론(理神論)·자유사상에 대하여 그리스도교를 변호하는 호교론(護敎論)에 있다고 요약할 수 있다.

  항목차례

흄(David Hume, 1711.4.26∼1776.8.25)

 

  영국의 철학자. 에든버러 향사(鄕士)의 아들로 출생. 에든버러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한때 상사(商社)에 근무하였으나, 문학·철학을 지향하여 사직하고 1734∼37년 프랑스에 체재하였다. 그 곳에서 주저(主著) 《인성론(人性論):A Treatise of Human Nature》을 집필하여, 39년에 제1권 <오성편(悟性篇)>과 제2권 <감정편>을, 40년에 제3권 <도덕편>을 출간하였다. 이어 당시의 사회·정치·경제에 관한 토픽을 다룬 《도덕·정치철학:Essays Moral and Political》(1741∼42)을 간행하여 호평을 받았다. 한편, 평판이 좋지 않던 《인성론》의 제1권 <오성편>을 개고(改稿)한 《인간 오성에 관한 철학논집:An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48)을 내놓았다. 그는 44년 에든버러대학, 51년에 글래스고대학에서 일자리를 구했으나, 모두 무신론자라 의심하여 거절당하였다. 52년 에든버러 변호사회 도서관 사서(司書), 63년 주(駐)프랑스 대사의 비서관, 67∼69년 국무차관을 역임한 후 은퇴하였다. 그의 인식론(認識論)의 의도는, J.로크에서 비롯된 내재적 인식비판(內在的認識批判)의 입장과 I.뉴턴 자연학의 실험·관찰의 방법을 응용해서, 인간의 본성 및 그 근본법칙과 그것에 의존하는 여러 학문의 근거를 해명하는 일이었다. 인간정신의 기본적 단위는 ‘인상’과 ‘관념’이며, 그 원천(源泉)으로서 감각과 반성(反省)이 이에 교차(交叉)한다. 원칙적으로 관념은 인상이 그 밑바탕이며 인상의 원인은 미지(未知)이다. 또한, 지식은 관념의 연합에 의해 성립한다. 따라서 이 연합의 3개의 관계(類似, 接近, 原因과 結果), 또는 7개의 철학적 관계(類似, 同一, 空間·時間關係, 量 또는 數, 性質의 程度, 反對, 原因과 結果)의 고찰이 중요하게 되는데, 특히 인과관계는 중요하다. 이 관계는 접근과 계기(繼起)의 관계에 더하여, ‘원인’에서 ‘결과’로의 ‘이행(移行)’을 포함하는데, 이것은 ‘습관’에 의해 확립되며, ‘신념’에 뿌리박힌 것으로 객관적 필연성은 없다. 물체적 실체(物體的實體), 외계의 실재(實在)도 역시 마찬가지로 신념과 습관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 또한 G. 버클리가 인정한 정신실체(精神實體)도 ‘지각이 지나가는 무대’ ‘지각의 다발’로서가 아니면 부정(否定)된다. 따라서, 흄의 인식론은 표면상으로는 회의주의적(懷疑主義的) 결말에 도달하는데, 그것은 내재적 현상학의 한 귀결이며, I.칸트를 이성론(理性論)의 독단(獨斷)의 잠에서 깨어나게 하였다. 그리고 그 실천철학은 《인성론》의 제2,3편이 ‘감정편’ ‘도덕편’인 것을 보아도 분명한 것처럼, 흄 철학의 목표였다고도 할 수 있다. ‘이성은 감정의 노예’라는 유명한 구절이 대표하듯이, 감정은 오성·지성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으며, 그것이 인상·관념과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점에서만 인식론에 관계된다. 흄은 도덕의 밑바닥에 ‘공감(sympathy)’을 두고, 그것으로 인해서 사람은 상호간에 주고받는 쾌락과 고통의 감정과, 상호간의 덕성(德性)을 판정하는 시인(是認) 및 비난의 감정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그 주장은 특별한 도덕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자연주의적이고, 또한 사회적 성격을 보여 주는 점에서 공리주의적(功利主義的)이다. 종교도 역시 심리적·역사적 분석 수법에 의해 자연주의적으로 해명되며 이신론(理神論)의 입장이 인간 본성을 바탕으로 하는 생활감정에 의해 재해석(再解釋)되고, 기초가 다시 다져진다. 정치·법사상에서는 T.홉스의 ‘자연상태’의 가정(假定)과 계약설을 비판하고, 만인에 공통된 ‘이익’의 감정에서 법의 근거를 구하는 공리주의적 방향을 제시한다.

  항목차례

대륙 합리론(continental rationalism)

 

  17세기의 R.데카르트, B.스피노자, G.W.F.라이프니츠 등과 같은 이른바 유럽대륙의 철학자들에 의해 전개된 철학의 총칭. 유리론(唯理論) 또는 주리론(主理論)이라고도 한다. 그들은 인간의 본질은 이성(理性)에 있으며 인간의 이성은 또한 신의 이성의 일부라는 것을 공통적인 신조로 삼았다. 그들은 인간의 모든 확실한 지식은 생득적(生得的)이며, 명증적(明證的)인 원리로부터 유래하거나 그것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후천적 감각경험으로 말미암은 지식은 모두 혼란하고 불확실하다고 본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명석하고 분명한 제1명제를 정립하고 연역적 방법에 의해서 자연학(自然學)의 수학화(數學化)를 시도하였으며, 스피노자는 그의 주저 《에티카:Ethica》를 기하학적 질서에 입각하여 서술함으로써 일원론적 범신론(一元論的汎神論)을 수립하였다. 라이프니츠 역시 모든 진리를 몇 개의 근본명제로부터 연역함으로써 보편수학(普遍數學)을 확립하려고 하였다. 대륙합리론자들은 신을 실체(實體)로 보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신이라는 실체를 토대로 하여 세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신이라는 무한(無限)실체 이외에 정신과 물체라는 유한(有限)실체를 인정함으로써 정신과 물체는 그 속성(屬性)을 달리하며 서로 독립되어 있다는 이원론(二元論)을 주장하였으며,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와는 달리 유일하고 무한하여 자기원인적(自己原因的)인 신이라는 실체로부터 일체를 연역함으로써 일원론적 범신론을 주장하였다. 또한 라이프니츠는 실체를 무수한 모나드[單子]라고 봄으로써 범신론적 다원론을 수립하였으며, 신의 예정조화(豫定調和)에 의하여 세계의 질서가 유지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대륙합리론 사상은 인간의 마음은 태어날 때는 백지(白紙:tabla rasa)와 같은 상태이다가 마치 백지에 글이 씌어지듯이 후천적인 경험에 의해서 인식이 성립된다고 보는 영국경험론과 대립된다. 대륙합리론은 인간이성의 주권확립이라는 점에서는 시대적 의의가 있으나, 이성의 권능을 과신한 나머지 자칫 독단론에 빠질 우려가 있다. I.칸트의 비판철학은 이러한 대륙합리론과 영국경험론을 지양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항목차례

데카르트주의(cartAsianisme)

 

  데카르트의 철학 및 그 계승자의 철학. 데카르트 철학 중에서도 특히 심신문제(心身問題)나 변신문제(辨神問題)를 중심으로 이론을 전개하였다.

【데카르트의 철학】 그 내용을 도식적(圖式的)으로 나타내면, 이론적 입장에서는 방법적 회의(方法的懷疑)에 의하여 얻은 코기토(cogito)의 명증적 의식(明證的意識)에서 출발하여 정신의 순수성을 확보하고, 동시에 명석판명지(明判明知)의 규칙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규칙과 생득관념설(生得觀念說)에 따라 신(神)과 물질세계의 존재를 증명하고, 정신과 물체는 각각 독립된 실체라는 이원론(二元論)에 도달하였다. 한편, 실천적 입장에서는 반대로 물(物:身)과 심(心)의 합일을 설명하고 그 합일의 결과인 정념(情念)의 통어(統御) 자체 안에 세계의 기계적·법칙적 필연에 대한 인간적 자유의 영역을 인정하였으며, 자유의지의 완성을 이상으로 삼는 도덕설에 이르렀다.

【데카르트학파】 위와 같은 데카르트의 학설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데카르트학파가 고찰의 중심으로 삼은 것은 데카르트가 미해결로 남긴 물심이원(物心二元)에 관한 심신문제 및 섭리[神的必然]와 자유의 이원에 관한 변신(辨神)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해결의 주된 시도로서 N.말브랑시로 대표되는 기회원인론(機會原因論)과 S.스피노자로 대표되는 범신론(汎神論)이 있다. 기회원인론은 세계 사상(事象)의 유일한 작용자를 신(神)이라 하고, 피조물로서의 정신이나 물체는 다만 이 신에 의해 작용된 기회인(機會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이다. 범신론은 데카르트의 기계적 물질세계를 신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 ‘신은 곧 자연이다’라는 견해이다. 피조물의 작용성을 신의 그것으로 대치하려는 이 두 견해 중에서 기회원인론은 신의 작용 또는 신의 대행자로서 세우게 되는 법칙을 일반적인 경우에 한정하고, 이것을 특수화하는 기회인으로서 피조물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를 인정하려 한다. 그러나 범신론은 세계의 법칙적 필연성 자체를 신성(神性)으로 보는 완전한 결정론(決定論)이다. 그런 의미에서 범신론은 데카르트주의의 궁극적인 벽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기회원인론에서 법칙의 작용성이 피조물에 맡겨지고, 또 범신론에서 물체의 본성을 연장하려는 전제를 버린다면 G.W.라이프니츠의 단자론적 세계(單子論的 世界)로 결론지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데카르트주의의 완전한 종언을 뜻한다. 데카르트가 미해결로 남긴 문제를 계기로 삼아 전개된 위의 세 견해는 근대의 자연학을 인정해야 비로소 성립될 수 있는 형이상학의 모든 형태를 거의 거론하였고, 그것이 오늘날에는 현상학·실존주의·마르크스주의 등의 새로운 입장에서 재평가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항목차례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1.24∼1677.2.21)

 

  네덜란드의 철학자. 암스테르담 출생. 포르투갈계 유대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 유대교단의 학교에서 헤브라이어와 성전(聖典)을 공부하였고, 카바라의 신비사상에도 접하였으나, 졸업 후에는 고전어를 공부하고 인문주의적인 교양을 쌓아 점차 이단적인 서구적 사상으로 기울어졌다. 수학·자연과학도 공부하였고, 데카르트 철학에서 결정적 영향을 받았으며, 이 학설에 의거하여 성전과 조상의 학문을 대담하게 비판하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비위를 거슬려 1656년 끝내 파문선고를 받았다. 유대교 광신자 중에는 그의 암살을 기도하는 자까지 출현하였으므로, 그는 각지를 전전하면서 극도로 고립된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 때문에 오히려 한가한 시간이 생겨 연구생활에 몰두할 수 있게 되어 《신(神)·인간 및 인간의 행복에 관한 짤막한 논문》 《지성 개선론:Tractatus de intellectus emendatione》을 집필하였고, 《데카르트 철학 원리:Renati de Cartes principiorum philosophiae》(1663)를 출판하였다. 63년 폴부르크로 이사하였고, 70년 다시 헤이그로 이사하였다. 73년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철학 정교수로 초청하였으나, 사상의 자유와 《에티카(윤리학)》의 완성을 생각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이해에 《신학정치론:Tractatus Theologico-Politicus》을 익명으로 출판하였으나, 이것이 신을 모독하는 책이라고 비난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이 때문에 그는 15년의 세월을 들여 완성한 주저 《에티카:Ethica in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75년 완성)를 생전에 출판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스피노자 철학 그 자체가 사후 100년 동안 무용지물로 매장되었다.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명성과는 인연이 없는 생활을 하였으며, 여가에 렌즈를 갈아서 생활비를 조달하였다. 그는 《국가론:Tractatus politicus》(77)을 마지막 저작으로 남기고 폐결핵으로 죽었다. F.노발리스가 스피노자를 평하여 ‘신에 취한 사람’이라 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며, 스피노자는 “모든 것이 신이다”라고 하는 범신론(汎神論)의 사상을 역설하면서도 죽은 후에까지 유물론자·무신론자로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신이란 그리스도교적인 인격의 신이 아니고, ‘신은 즉 자연이다’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자연에 있어 만물은 신의 형태를 빌린 것이고, 자연을 초월한 곳에 신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있는 개물(個物:個體)은 신의 내적 필연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와 같이 신에서 유래된 인과(因果)의 사슬에 의해 엄밀히 결정되는 필연(必然)의 세계를 말하면서, 인간의 최상의 행복을 추구하려고 한다. 스피노자는 사물에는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는 경향(자존성)이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이것을 근거로 정치와 도덕의 사상을 전개하였다. 인간에게 있어 자율적인 이성의 작용이 자존성(自存性)이며, 도덕의 실제 목적은 이성의 작용으로 생기는 희열에 의해서 얻을 수 있다. 이성의 최고 작용은 신과의 필연적인 관계에서, ‘영원한 형상 밑에서’ 사물을 직관하는 것으로서 이것에 따르는 자족감이 바로 ‘신의 지적 사랑’이며, 여기에서 도덕의 최고 이상이 추구되었다. 스피노자 자신은 무신론자·유물론자로 불리는 것을 매우 싫어하였지만, 그의 철학 특히 자연이라는 범신론이나 연장(延長)의 속성 사고방식 속에는 이러한 해석을 낳을 소지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항목차례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von  Leibniz, 1646.7.1∼1716.11.14)

 

  독일의 철학자·수학자·자연과학자·법학자·신학자·언어학자·역사가. 라이프치히 출생. 그리고 외교관·정치가·기사(技師) 등 실무가로서도 유능하였다. 라이프치히대학의 도덕철학 교수의 아들로 어려서 아버지의 장서 중 철학·고전을 탐독하고 논리학에 흥미를 가졌다. 12세 때 거의 독학으로 라틴어에 통달하였고 1661년 15세 때 라이프치히대학에서 법률과 철학을 수학, 이어 예나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하였다. 이 무렵에 쓴 논문 《개체의 원리:De Principio Individui》(1663) 《결합법론:De Arte Combinatoria》(66)은 주목할 만한 것으로, 그 내용은 후일까지 그의 사상을 일관하였다. 66년 라이프치히대학에 학위를 신청하였으나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였다. 67년 뉘른베르크의 알트도르프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하였으나, 이 대학이 제공한 객원교수의 자리를 사퇴하고, 그곳에서 연금술사들의 결사 로젠크로이체르에 들어가 비서가 되어 화학에 관한 지식을 얻었다. 그는 마인츠후국(侯國)의 정치가인 J.C.보이네부르크 남작과 알게 되어 70년 마인츠후국의 법률고문이 되었다. 정치생활에 들어가 마인츠후국의 외교사절로서 72년 이후 파리에서 활동하였으며, 루이 14세의 침략으로부터 독일의 안전을 지키는 일에 전념하면서도 형이상학을 연구하였다. 또 런던과 파리의 뛰어난 수학자·물리학자들과도 접촉하여 자연과학의 연구를 추진하였다. 《구체적 운동의 이론》 《추상적 운동의 이론》은  70년경에 쓴 것으로, ‘불가분의 점(點)’의 가설에 서서, 운동을 물질의 본질인 것으로 보려는 형태를 취하였다. C.호이겐스, A.아르노, N.말브랑슈, R.보일 등과의 접촉에서는 당시의 최고 수준의 수학이나 데카르트 철학을 흡수하여 많은 논문을 쓰고, 영국 왕립학회회원이 되어, 그 후 우수한 계산기를 발명하였다(74). 그러나 보이네부르크나 마인츠 선거후(選擧侯)가 잇달아 죽었으므로 그는 프랑스에 체류한 채 생활의 기반을 잃게 되었다. 프랑스 학술원의 연금을 받으려는 공작도 실패하여, 76년 브라운슈바이크 뤼네부르크후(侯) 프리드리히의 초청을 받아들여 하노버로 갔다. 그 도중 스피노자와 회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노버가(家)에서는 궁정고문이나 도서관리 등의 일을 맡아, 죽을 때까지 이 자리에서 다면적인 활동을 하였다. 거기에는 공법학자·정치가로서의 활동, 독일 통일을 지향하는 신구 양 교회 및 신교 각파의 통일을 위한 노력, 《지구 선사(先史)》를 계기로 한 일반사의 연구, 언어 연구, 광산의 치수(治水)나 거기에 따른 풍차의 설계·건설, 백과전서의 계획, 아카데미 설립의 노력(1700년 베를린 과학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초대원장이 됨) 등이 포함된다. 이 밖에 그의 이름을 영원히 빛나게 한 수학·자연과학·철학상의 연구도 계속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말년은 불우하였으며, 실의 속에 70세의 생애를 하노버에서 마쳤다. 수학에서는 미적분법의 창시(1684∼86)가 유명하다. 이것은 뉴턴과는 별개로 전개된 것이며, 미분 기호, 적분 기호의 창안 등 해석학 발달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역학(力學)에서는 R.데카르트를 비판하여 ‘활력’의 개념을 도입하고, 그 개념을 주어 역학적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향해 커다란 진전을 남겼으며(86), 위상(位相) 해석의 창시도 두드러진 업적의 하나이다. 철학에서는 데카르트, 스피노자의 철학을 극복하고, 거기에 젊을 때부터의 ‘보편학’의 구상을 체계화한 《형이상학서설(形而上學敍說) Discours de M럗aphysique》(86)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둘러싼 논쟁을 통하여 발전시킨 ‘표현’과 ‘표출’ ‘실체’ 개념의 결실인 유고(遺稿) 《단자론(單子論):Monadologia》(1720)이 유명하다. 실체개념을 논한 논문 중에는 ‘예정 조화(豫定調和)’의 개념을 도입(1696)하기도 하여 베일과의 논쟁을 초래하였다. J.로크의 비평으로서의 유고 《신인간오성론(新人間悟性論)》(1765)이나 《변신론(辯神論):Th럒dic럆》(1710)도 유명하다. 그의 지우(知友)였던 프로이센 왕비 조피 샤를로테를 위해서 쓴 《변신론》은 예정 조화의 입장에서 철학과 종교의 융화를 꾀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상은 독창적인 것이었으나, 한편 신학적·형이상학적 요소(신과 예정 조화)를 지님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변증법적 요소(개별과 보편, 유한과 무한의 연관, 실체의 자립 개념 등)를 갖추고, 신앙고백과 논리적 논증이 공존하여, 기계론을 극복하려고 하면서 모순율을 기초로 하는, 말하자면 모순을 내포한 타협적인 것이었다. 그 배경을 당시 독일의 모순에 가득찬 사회적 생활에서 구하려는 견해도 있다.

  항목차례

모나드론(Monadenlehre)

 

  독일의 철학자  G.W.라이프니츠가 만년에 저작한 소품(小品)의 제목. 후에 P.에르트만이 이름을 붙인 것으로 ‘단자론(單子論)’이라고 번역된다. 이 말은 그의 형이상학설(形而上學說) 전체를 나타내는 데도 쓰인다. 모나드(monad)란 원래가 수학상의 용어로 ‘1’ 또는 '단위’를 뜻하는 그리스어의 모나스(monas)에서 나온 말이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모든 존재의 기본으로서의 실체는 단순하고 불가분(不可分)한 것이며, 이를 모나드라고 이름지었다. 모나드는 원자와는 달리 비물질적인 실체로 그 본질적인 작용은 표상(表象)이다. 표상에는 의식적인 것 외에 무의식적인 미소표상(微小表象)도 포함된다. 표상이란 외부의 것이 내부의 것에 포함되는 것으로, 모나드는 이 작용에 의해 자신의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외부의 다양성에 관계를 가질 수 있다. 모나드에 의해 표상되는 다양성이란 세계 전체를 말한다. 모나드는 ‘우주의 살아 있는 거울’이라고도 하며, ‘소우주(小宇宙)’를 이룬다. 이들 모나드는 각기 독립되어 있고 상호간에 인과관계(因果關係)를 가지지 않는다. 또 ‘모나드는 창(窓)을 가지고 있지 않다’. 창을 가지고 있지 않은 모나드가 각각 독립적으로 행하는 표상간에 조화와 통일이 있는 것은 신(神)이 미리 정한 법칙에 따라 모나드의 작용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 ‘예정조화(豫定調和)’의 생각에 따라 라이프니츠는 심신관계(心身關係)를 설명하고 데카르트적 이원론(二元論)을 극복하려 하였다.

  항목차례

계몽 사상(enlightenment)

 

  18세기 프랑스 사상의 주류를 이루고, 프랑스혁명에 원리를 제공한 사상. I.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1784)를 저술한 후부터 사상사(思想史)에서의 용어가 되었다. 계몽이란, 아직 미자각상태(未自覺狀態)에서 잠들고 있는 인간에게 이성(理性)의 빛을 던져주고, 편견이나 미망(迷妄)에서 빠져나오게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또 신학(神學)에 대응되는 의미에서 철학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 경우, 철학이란 좁은 의미의 형이상학(形而上學)이 아니라, 널리 인간세계나 자연·인생 등에 관한 지혜와 교양을 나타낸다. 또한 신학이 죽음을 주제로 하는 데 대해서 삶의 실학(實學)을 가리킨다. 따라서 계몽사상에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영원의 물음에다가 ‘어떻게 행복해질 것인가’라는 현세(現世)의 과제가 덧붙여진다. 본류(本流)는 몽테스키외, 볼테르, J.J.루소를 비롯한 프랑스의 사상가, 문학가의 여러 저작·작품에 있으나, 그 원류(源流)는 T.홉스, J.로크를 비롯하여 17세기의 영국에서 시작된다. 그리하여 T.레싱, J.G.헤르더를 비롯한 독일의 여러 사상가에게까지 미쳤다. 이런 뜻에서는 18세기의 모든 문학운동·사상활동의 저류(底流)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으며, 각국에 싹트기 시작했던 시민정신의 형상화(形象化)에 있어 매개자의 역할도 하였던 것이다. 영국의 홉스는 프랑스의 R.데카르트와 함께 계몽사상의 원조라 할 수 있으나 고유의 의미에서의 영국 계몽철학은 로크와 D.흄에서 시작된다. 로크는 경험론을 인식론 안에 도입하여, 인간의 자연상태를 자유의 실존이라 규정하였으며, 자유로운 개인이 자유의지에 따라 공동체에 대한 복종을 선택한 이상, 선택은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계약에 의한 것이며, 인간의 자유의 지주(支柱)가 사유재산권의 보유에 있는 이상, 국가는 시민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존재요, 국왕은 그 집행기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프랑스의 계몽사상은 1734년에 출판된 볼테르의 《철학서간(哲學書簡)》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어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1748)을 지어 삼권분립의 원칙을 밝히고, 절대왕정(絶對王政)에 쐐기를 박았다. 또 D.디드로, J.R.달랑베르, 뷔퐁, E.B.콩디야크, P.H.돌바크 등에 의해서 18세기 중엽부터 《백과전서(百科全書)》가 발간되었으며, 종교나 관습·제도의 주술(呪術)에 묶여 있는 인간을 감성적·심정적으로 해방시키고, 앞으로 꽃필 과학에 대한 꿈을 고취하며, 각자가 자신의 주체성 위에 서서 새로운 세계관·처세술·창조에의 참가를 실현하도록 촉구하였다. 볼테르는 《캉디드 Candide》 《자디그 Zadig》를 통하여, 디드로는 《라모의 조카》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을 통해서, 문명의 상식에 등을 돌리고, 태어난 그대로인 자연아(自然兒)로 하여금 현실세계 속을 걷도록 함으로써, 사회와 인간 간의 깊은 상대관계를 알아내려고 하였다. 이 주제는 루소에 의해서 더욱 추구되었으며, 《인간 불평등 기원론》(55) 《신(新) 엘로이스》(61) 《사회계약론》(62) 《에밀》(62) 《고백록》(81·88, 사후 출판) 등을 낳는 원동력이 되었다. 계몽사상은 루소에 의해서 인간성의 전가치체계(全價値體系)로 완성되었으며, 18세기뿐만 아니라 널리 근대 시민사회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루소 뒤에는 G.B.마블리, J.르나르, M.콩도르세 등이 나와서 진보사상을 주창하였으며, 전제정치와 교회에 대해서 공격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계몽사상의 본류는 어느덧 사상을 기술화(技術化)하는 몇 가지 말류(末流)로 갈라졌으며, F.케네, A.R.J.튀르고 등에 의해서 중농주의(重農主義)가 제창되는 한편, 시에예스 등에 의해서 제3신분의 정치론이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항목차례

사회 계약설(theory of social contract)

 

  정치사회 성립의 역사적·논리적 근거를 평등하고 이성적인 개인 간의 계약에서 구하려는 정치이론. 17, 18세기 영국 및 프랑스에서 전개된 이론이며, 부르주아혁명 때에는 근대시민계급의 이데올로기적 기둥으로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이 이론은 국가 기타의 정치적 제도는 실제적·실체적 성격을 잃고, 계약을 지탱하는 개인의 의지에 따라 그 존재가 좌우되는 인공적 가구물(假構物)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종래의 지배질서는 모두가 비판을 당하게 된다. 따라서 사회계약설의 혁명적 성격도 이 점에 있지만 동시에 그 이론적 결함도 또 여기에 있다. 그러나 정치사회 성립의 실증성이 약함에도 불구하고 민주국가의 윤리성을 뒷받침하는 이론적 가치는 간과할 수 없다. 이 이론의 전형적 전개론자로는 T.홉스, J.로크, J.J.루소 등을 들 수 있다. 홉스는 자연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 생각하고 사람들이 자연권을 지배자에게 위양함으로써 평화적인 상태로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하여, 17세기 절대왕정제 이론을 성립시켰다. 로크는 계약에 의해서도 생명·자유·재산 등의 자연권은 지배자에게 위양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입헌군주제의 이론을 선도하였다. 그리고 루소는 인간의 불평등 원인을 사유재산에 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사회계약에 입각하여 각인이 자유 평등을 누릴 수 있는 자연상태를 구상하였다. 즉 인민의 일반의지로서의 국가가 자유 평등을 보장할 수 있는 정치체제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여 프랑스혁명의 이론적인 근거를 세웠다.

  항목차례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6.28∼1778.7.2)

 

  프랑스의 사상가·소설가. 스위스 제네바 출생. 가난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루소를 낳다가 죽자 아버지에 의해 양육되었다. 10세 때는 아버지마저 집을 나가 숙부에게 맡겨졌으며, 공장(工匠)의 심부름 따위를 하면서 소년기를 보냈다. 16세 때 제네바를 떠나 청년기를 방랑생활로 보냈는데, 이 기간에 바랑 남작부인을 만나 모자간의 사랑과 이성간의 사랑이 기묘하게 뒤섞인 것 같은 관계를 맺고, 집사로 일하면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1742년 파리로 나와 디드로 등과 친교를 맺고, 진행 중인 《백과전서》의 간행에도 협력하였다. 49년 디종의 아카데미 현상 논문에 당선한 《학문과 예술론: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을 출판하여 사상가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그 뒤 《인간불평등기원론:Discours sur l’origine de l’in럊alit?parmi les hommes》(1755) 《정치 경제론:De l’럄onomie politique》(55) 《언어기원론:Essai sur l’origine des langues》(사후 간행) 등을 쓰면서 디드로를 비롯하여 진보를 기치로 내세우는 백과전서파 철학자나 볼테르 등과의 견해 차이를 분명히 하였다. 특히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연극에 관한 편지:Lettre ?d’Alembert》(58) 이후 디드로와의 사이는 절교상태가 되었고, 두 사람은 극한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독자적 입장에 선 루소는 다시 서간체 연애소설 《신(新) 엘로이즈:Nouvelle H럏o븉e》(61),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논한 《민약론(民約論):Du Contrat social》(62), 소설 형식의 교육론 《에밀:긩ile》(62) 등의 대작을 차례로 출판하였는데, 특히 《신 엘로이즈》의 성공은 대단하였다. 그러나 《에밀》이 출판되자 파리대학 신학부가 이를 고발, 파리 고등법원은 루소에 대하여 유죄를 논고함과 동시에 체포령을 내려 스위스·영국 등으로 도피하였다. 영국에서 흄과 격렬한 논쟁을 일으킨 후, 프랑스로 돌아와 각지를 전전하면서 자전적 작품인 《고백록:Les Confessions》을 집필하였다. 68년 45년 이래 함께 지내온 테레즈 르바쇠르와 정식으로 결혼하였다. 그 후 파리에 정착한 루소는 피해망상으로 괴로워하면서도 자기변호의 작품 《루소, 장자크를 재판한다:Rousseau juge de Jean-Jacques》를 쓰고,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Les R릚eries du promeneur solitaire》을 쓰기 시작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파리 북쪽 에르므농빌에서 죽었다. 그가 죽은 지 11년 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는데, 그의 자유민권 사상은 혁명지도자들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94년 유해를 팡테옹(위인들을 合祀하는 파리의 성당)으로 옮겨 볼테르와 나란히 묻었다. 평생 동안 많은 저서를 통하여 지극히 광범위한 문제를 논하였으나, 그의 일관된 주장은 ‘인간 회복’으로, 인간의 본성을 자연상태에서 파악하고자 하였다. 인간은 자연상태에서는 자유롭고 행복하고 선량하였으나, 자신의 손으로 만든 사회제도나 문화에 의하여 부자유스럽고 불행한 상태에 빠졌으며, 사악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다시 참된 인간의 모습(자연)을 발견하여 인간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인간 본래의 모습을 손상시키고 있는 당대의 사회나 문화에 대하여 통렬한 비판을 가하였으며, 그 문제의 제기 방법도 매우 현대적이었다. 한편, 그의 작품 속에 나오는 자아의 고백이나 아름다운 자연묘사는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항목차례

관념론(idealism)

 

  이론적이건 실천적이건, 관념 또는 관념적인 것을 실재적 또는 물질적인 것보다 우선으로 보는 입장. 실재론 또는 유물론에 대립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드물게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처럼, 어떤 종류의 관념을 정신과 개체를 초월한 참다운 실재로 보는 입장을 관념론이라고도 하지만, 이러한 입장은 중세철학에서의 용법에 따라 실재론이라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일반적으로 관념론이란, 외계 또는 물질적 세계의 실재에 대한 근세 이래의 인식론적 문제에 관한 입장을 나타내는 경우에 쓰이는 말이며, 이에는 다음과 같은 입장들이 있다. ① 외계 또는 물질적 세계의 존재를 사람이 이에 대해서 가지는 관념으로 환원시켜 개인의 정신과 이를 통괄하는 정신으로서의 신에 대해서만 실재성을 인정하는 주관적 관념론이며, G.버클리의 입장이 대표적이다. ② 외계는 인간 주관의 아프리오리적(a priori 的) 인식의 여러 형식에 따라 구성되며, 그러한 입장에서는 객관적 타당성을 가진 ‘현상(現象)’이라고 보고, 이 현상의 배후에 참다운 실재로서의 ‘물자체(物自體)’를 상정하면서 그 구체적 인식은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 I.칸트의 비판적 또는 초월론적 관념론이다. ③ 외계에 대하여 그 자체로서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 점에서는 전술한 두 경우와 같지만, 이를 어떤 주관에 의존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객관적 관념 또는 정신의 전개라고 보는 절대적 관념론인데, 곧 G.W.F.헤겔의 입장이 전형적인 것이다.

이상의 어느 형의 관념론에서나, 외적(外的) 실재에 대한 내적(內的) 관념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은 인식의 객관성의 기초를 다지는 데 있어 상대주의(相對主義)에 빠질 위험이 있는 반면에, 실천적 사상으로서는 인간 주체의 자발성·자율·자유를 존중하는 태도를 낳는 결과가 된다. 유럽어의 관념론이 동시에 이상주의를 의미하는 것도 이 때문이며, 관념론과 종교와의 친근도 이와 같은 성격의 결과로서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관념론은 극단에 흐르면 현실에 대해서 고의적으로 눈을 감는 이데올로기로서 비판을 받게 되지만, 어떠한 의미로든 인간 쪽의 자발성 없이는 인간의 인식활동·실천활동을 이해할 수 없는 이상, 관념론적인 것은 인간의 현실과 떼놓을 수 없는 하나의 구성요소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항목차례

독일 관념론(Deutscher Idealismus)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중엽까지 독일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관념론적 사상운동. ‘독일이상주의’라고도 한다. J.G.피히테, F.J.셸링, G.F.헤겔이 대표하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은 크다. 그 시대는 프랑스에서는 계몽기에서 혁명기로 들어서는 시기에 해당되며, 근대적 인간과 근대사회로 전환되는 태동을 겪는 때였다. 30년전쟁 이후, 시대의 흐름에 뒤졌던 독일에서도 내면적·사상적인 영역에서 대규모로, 또한 근원적으로 근대적인 인간존재에 대한 반성과 그 구조의 정착이 행하여졌는데 그것이 바로 독일 관념론이었다. 한편 관념론은 이상주의라는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는데, 사상 영역에서 근대적 인간의 이상이 이상의 이면(裏面)에 내재된 관념성·추상성을 노출시켰다는 점에서 독일 관념론의 의미를 찾을 수 있고, 위대함과 동시에 한계가 있었다고 할 것이다. 독일 관념론의 시발점인 I.칸트는 계몽시대의 표어였던 ‘이성’에 대하여 전면적인 반성과 비판을 가하였다. I.뉴턴으로 대표되는 근대의 수학적 자연과학에 대한 인식의 한계를 밝히고, 이론이성(理論理性)으로는 신(神)·자유·영세(永世) 등 종래의 형이상학의 과제를 결정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또한 칸트는 그것의 최종적인 해결을 근대적인 자율적 인격에서 나오는 자유로운 실천영역에서 구하면서, 근대적 이성의 모든 영역에 걸쳐서 그 기초적인 구조를 명백하게 하였다. 칸트 철학으로써는 이론과 실천의 세계가 충분히 통일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난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피히테는 통일적 원리로서 ‘자아’를 내세웠고, 또 셸링은 일종의 무한한 신적(神的)·창조적 원리로서의 ‘자연’에 의거하였다. ‘자아’이든 ‘자연’이든 간에 여기에는 선구자인 프랑스의 J.J.루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무한한 것에 대한 낭만적 동경이 내포되어 있는데, 칸트의 유한적 이성의 입장은 버렸다. 헤겔은 이러한 영향을 받아 역사·자연·사회 등을 비롯하여 유형이든 무형이든 일체의 사상(事象)을 무한한 정신의 변증법적인 자기전개와 자기실현의 과정이라고 보는 이론 체계를 수립하였다. 이와 같이 독일 관념론은 칸트의 이원론적 입장을 넘어서서 일원론적인 통일적 체계를 수립하기 위해 각기 다른 입장에서 계속적으로 시도되었으며, 헤겔에 이르러는 극에 달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독일 관념론이 너무 대담하게 이성주의적인 입장에서 형이상학적 철학으로 치달은 결과, 헤겔 사후에는 그것에 대한 비판적 입장이 나타났는데, 한편에서 A.쇼펜하워 등의 비합리주의적 철학이 발생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헤겔좌파, 특히 L.포이어바흐, K.마르크스, F.엥겔스 등 유물론적 철학이 출현하게 되었으며, F.W.니체와 S.A.키르케고르를 탄생시키는 모태가 되었다.

  항목차례

칸트(Immanuel Kant, 1724.4.22∼1804.2.12)

 

  독일의 철학자. 동(東)프로이센의 수도 쾨니히스베르크 출생. 프랑스 혁명과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그 이전의 서유럽 근세철학의 전통을 집대성하고, 그 이후의 발전에 새로운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 영향은 여러 가지 형태로 오늘날까지 미치고 있으며, 근세 철학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마구(馬具) 제조업자인 아버지와 경건하고 신앙심 두터운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루터교 목사가 운영하던 경건주의학교에 입학하여 8년 6개월 동안 라틴어 교육을 받은 후 고향의 대학에서 공부하고 또 모교의 교수로 일생을 마쳤다. 스코틀랜드에서 이민해 온 변경(邊境)의 소시민 가정에서 장성한 칸트는 프리드리히 대왕 시대의 계몽적인 시민육성책의 혜택도 받을 수 있어 지리적·역사적 조건이 그의 철학으로 하여금 독일적 특수성을 떠나 참다운 ‘세계시민적’인 철학이 되게 하였다. 대학 재학 중에는 당시의 신사상이었던 뉴턴역학에 특히 관심을 두었다. 이 방면에 대한 연구는 대학 졸업 후 10년이 지나 모교의 강사직을 얻은 1755년에 《천계(天界)의 일반자연사와 이론:Allgemeine Naturgeschichte und Theorie des Himmels》 으로 결실을 보았다. 이 저작에서 그는 뉴턴역학의 모든 원리를 확대 적용하여 우주의 발생을 역학적(力學的)으로 해명하려고 하였는데, 후일 ‘칸트-라플라스의 성운설(星雲說)’로 널리 알려지게 된 획기적인 업적을 수립하였다. I.뉴턴의 방법의 철저한 적용이라는 이 대담한 시도는 목적론적 세계관에의 귀의(歸依)와 표리일체를 이루며 그것의 바탕 위에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는 일면을 지닌다. 여기의 내포되는 모순이 의식에 떠오른다면 그것은 커다란 위기에 봉착함을 뜻할 것이다. 이 위기에서 칸트를 구한 것은 J.J.루소이다. 그는 칸트로 하여금 문명에 침식되지 않은 소박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하여 눈뜨게 하고, 여기에다 그 후의 모든 사상적 노력의 숨은 기초를 뿌리박게 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뉴턴, 루소를 두 개의 기둥으로 삼고 D.흄을 부정적 매개체로 하여 중세 이후의 전통적 형이상학을 그 밑뿌리까지 파고들어 전면적 재편성을 시도함으로써 비판철학을 탄생시켰다. 그는 《순수이성비판(純粹理性批判) Kritik der reinen Vernunft》(1781) 에서 뉴턴의 수학적 자연과학에 의한 인식구조에의 철저한 반성을 통하여, 종래의 신(神)중심적인 색채가 남아 있는 형이상학의 모든 개념이 모두 인간 중심적인, 즉 넓은 의미에서의 인간학적인 의미로 바뀌어야 되는 이유를 들고, 나아가 일반적·세계관적 귀결을 제시하였다. 다시 말해서 인간적 인식이 성립되는 장면을 해명해야 할 인간학적 형이상학을 새로 수립하는 일을 통하여, 종래의 신적 형이상학(神的形而上學)이 이론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이유를 제시한 것이다. 제2의 비판서인 《실천이성비판(實踐理性批判)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88)에서 칸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율적 인간의 도덕을 논하고, 실천의 장(場)에서의 인간의 구조에 불가결한 ‘요청(要請)’이라는 형태로 신(神)·영세(永世) 등의 전통적 형이상학의 내실을 재흥시켜 그것이 새롭게 인간학적 철학에서 점유할 위치를 지적하였다. 종교를 도덕의 바탕 위에 두는 이 구상(構想)은 그 후의 《종교론》(93)에서 다시 구체적으로 전개된다. 이상 두 가지 비판서로 명백하게 된 인식과 실천이라는 두 개의 장면을 매개하고 인간의 삶이 영위되는 장(場)의 구조를 통일적으로 파악하여, 새로운 인간학적 철학을 종결짓고자 구상된 것이 제3의 비판서인 《판단력비판(判斷力批判):Kritik der Urteilskraft》(90)이다. 여기서 칸트는 미(美)와 유기체(有機體)의 인식이라는 장면의 분석을 통하여 목적론적 인식의 구조를 명백히 하고, 또한 목적론과 기계론의 관계라는, 일생의 과제이며 동시에 세기적 과제에 비판적 해결을 부여하여 스스로의 철학적 노력을 결말지은 것이다. 이상 3권의 비판서에 의하여 그 토대가 놓여진, 비판철학 사상과 밀접히 관련하여, 또는 그 위에 기초한 사고(思考)를 전개한 기타의 주요 저서로는 《순수이성비판》의 해설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프롤레고메나:Prolegomena》(83), 《실천이성비판》에 앞서 비판적 논리학의 기본구상을 기술한 《도덕형이상학원론(道德形而上學原論):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85), 이것에 기초한 법철학·도덕철학의 구체적 체계를 전개한 《도덕형이상학:Metaphysik der Sitten》(97), 그 자매편으로 자연철학의 체계를 전개한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원리:Metaphysische Anfangsgr웢de der Naturwissenschaft》(86)가 있다. 또 오랜 기간의 강의를 정리하여 출판한 《인간학》(98) 《자연지리학》(1802)은 칸트의 폭넓은 실제적 지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이다. 칸트의 철학은 3권의 비판서 간행 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예나를 비롯한 몇 곳을 거점으로 하여 순식간에 전독일의 대학·논단을 석권하였고, J.G.피히테에서 G.W.F.헤겔에 이르는 독일 관념론 철학의 선두 주자로서, 또 그 모태로서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그 영향은 다시 영국·프랑스의 이상주의철학까지 미쳤으며, 특히 후일의 독일 신(新)칸트학파의 철학은 칸트의 비판주의의 직접계승을 지향한 것이었다. 또한 신칸트학파 퇴조 후에 나타난 수많은 철학 조류도 모두 직접·간접으로 칸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한국루터회가 뽑은 ‘세계를 빛낸 10인의 루터란’의 한 사람이다.

  항목차례

批判哲學(critical philosophy)

 

 《순수이성비판(純粹理性批判)》에 나타난 I.칸트의 비판주의 입장. 즉, 독단론이나 회의론에 빠지는 것을 피하고 이성(理性)의 자기인식을 규명하는 것이 비판주의의 입장으로, 그에 의하면 비판이란 책이나 체계의 비판이 아니라, 일체의 경험에서 독립하여 얻어지는 인식에 관한 이성 능력에 대한 비판이라고 하였다. 19세기 후반 O.리프만의 이른바 ‘칸트로 돌아가라’를 표방한 신(新)칸트 학파는 방법론적인 면에서는 이 입장을 계승하였다.

  항목차례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5.19∼1814.1.27)

 

  독일의 철학자. 독일 관념론의 대표자의 한 사람이다. 작센주 라메나우 출생. 가난한 삼베직인의 아들로 태어나 예나대학 신학과에 입학하였다. 그 후 라이프치히대학으로 전학하였고, 졸업 후 가정교사 시절에 저술한 《종교와 이신론(理神論)에 관한 아포리즘》(1790)은 B.스피노자의 결정론의 영향을 받았으나, 1791년에 칸트 철학을 알게 됨에 따라, 특히 그 실천이성의 자율(自律)과 자유(自由) 사상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 후 쾨니히스베르크로 I.칸트를 찾아 그의 주선으로 《모든 계시(啓示)의 비판 시도》(92)를 익명으로 출판하였다. 이것은 처음에 칸트의 저서로 세인들이 알고 있었으나, 칸트 자신의 정정과 천거에 의해 피히테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다. 92년에 예나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93년 한(Johaanna Hahn)과 결혼하고 97년에 ‘지식학(知識學:Wissenschaftslehre)’에 대해서 몇 가지 중요한 논고를 발표하였다. 98년 《철학잡지》에 포르베르크의 논문에 서문으로 발표한 《신의 세계지배에 대한 우리들의 신앙 근거에 관하여》라는 논문이 무신론이라는 의혹을 받아, 유명한 무신론 논쟁을 야기시켰으며, 결국 다음해 예나대학을 물러났다. 그 후 베를린에서 슐레겔 형제를 비롯하여 낭만파 사람들과 교유하였고, 사상적으로는 신비적·종교적 색채를 더해 갔으나, 동시에 시국(時局) 정치문제에도 활발한 발언을 시도하였고, 특히 나폴레옹전쟁에서 패한 프로이센의 위기에 처하여 행한 《독일국민에게 고함》(1807∼08)이란 강연은 너무나 유명하다. 종군간호사가 된 부인에게서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죽었다. 피히테의 철학은, 칸트가 아직도 통일을 얻지 못한 이론이성(理論理性)과 실천이성(實踐理性)을 오로지 후자에 중점을 둠으로써 통일적으로 파악하려고 한 실천적·주관적 관념론이며, 프랑스혁명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근대적 자아를 자율적인 형이상학적 원리에까지 지양하였다. 그것은 또 F.W.J.셸링에서 G.W.F.헤겔로 계승된 독일 관념론의 발전의 길을 터놓는 계기가 되었다.

  항목차례

셸링(Friedrich Wilhelm Joseph von Schelling, 1775.1.21∼1854.8.20)

 

  독일의 철학자. 뷔르텐베르크주(州) 레온베르크 출생. I.칸트, J.G.피히테를 계승하여 G.W.F.헤겔로 이어 주는 독일 관념론의 대표자의 한 사람이다. 튀빙겐대학에서 신학·철학을 공부하였고 프랑스 혁명에 대한 열광적 공감의 분위기 속에서 헤겔, 휠덜린 등 동창생과의 교우가 그의 조숙한 천분을 발휘할 통로를 형성하였다. 그는 피히테에 의하여 세계의 궁극적 원리로까지 높여진 근대적인 자유로운 ‘자아’를, 객관적 ‘자연’의 방향으로 심화시킴으로써 거기에 궁극적 통일의 실현을 꾀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점차 유미주의적(唯美主義的)인 낭만적 색채를 띠고, 나중에는 종교적·신비주의적 방향으로 변질되어 갔다. 1798년 이래 예나대학 등의 교수직을 역임하고, 헤겔의 사후(1831) 후임으로 베를린대학 교수가 되었다. 헤겔의 입장을 ‘소극 철학’으로 규정하고, 거기에 대한 ‘적극 철학’을 설파하였는데 여기에는 독일의 현실에 강요된 자아의 내면적 굴절이라는 회로를 통하여, ‘이성(理性)’과 ‘체계’를 깨뜨리는 실존철학에의 길이 열려, 그 선구자로도 지목된다. 주요저서로는 《선험적 관념론의 체계:System des transzendentalen Idealismus》(1800) 《인간적 자유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고찰:Philosophische Untersuchungen 웑er das Wesen der menschlichen Freiheit》(1809) 등이 있다.

  항목차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8.27∼1831.11.14)

 

  독일의 철학자. 칸트 철학을 계승한 독일 관념론의 대성자이다. 슈투트가르트 출생. 뷔르템베르크 공국의 재무관 아들로 1788년 뒤빙겐대학 신학과에 입학 J.C.F.휠데를린 및 F.W.셸링과 교우하였다. 졸업 후 7년간 베른·프랑크푸르트에서 가정교사를 한 뒤 1801년 예나로 옮겨 예나대학 강사가 되었다. 처음에는 이미 예나대학의 교수로 활약 중이던 셸링의 사상에 동조하여 잇달아 논문을 발표하였으나, 차차 셸링적 입장을 벗어나 1807년에 최초의 주저 《정신현상학(精神現象學):Ph둵omenologie des Geistes》을 내놓아 독자적 입장을 굳혔다. 이 무렵 나폴레옹군의 침공으로 예나대학이 폐쇄되자 밤베르크로 가서 신문 편집에 종사하였으며, 이어 뉘른베르크의 김나지움 교장이 되었고, 이곳에서 둘째 주저 《논리학:Wissenschaft der Logik》(1812∼16)을 저술하였다. 16년 하이델베르크대학 교수로 취임, 그 동안 《엔치클로페디:Enzyklop둪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e》(17)를 발표하였으며, 18년에는 프로이센 정부의 초청으로 베를린대학 교수가 되었고 곧 마지막 주저 《법철학 강요: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21)를 내놓았다. 베를린 시절은 헤겔의 가장 화려한 시절로서 유력한 헤겔학파가 형성되었으며, 그의 철학은 국내외에 널리 전파되었으나 31년 콜레라에 걸려 사망하였다. 헤겔 철학의 역사적 의의는 18세기의 합리주의적 계몽사상의 한계를 통찰하고 ‘역사’가 지니는 의미에 눈을 돌린 데 있다. 계몽사상이 일반적으로 역사를 고려하지 않고 오직 머리 속에서 생각한 이상에 치중, 이 이상을 현실로 실현해야 하며 또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데 반하여, 헤겔은 현실이란 그처럼 인간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의 과정은 그 자신의 법칙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정해졌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우리가 아무리 이상을 실현하려고 애써도 그 이상이 역사의 법칙적 흐름에 알맞게 부합되어 있지 않는 한 그 노력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역사를 지배하는 법칙에 대해 헤겔은 관념론적·형이상학적인 견해를 가졌으며, 역사는 절대자·신(神)이 점차로 자기를 실현해가는 과정이라 생각하였다. 그에 의하면 절대자는 이성(理性)이고 그 본질(本質)은 자유(自由)이다. 따라서 역사는 자유가 그 속에서 전개해 나가는 과정인 것이며, 단 한 사람 전제군주(專制君主)만이 자유이었던 고대로부터, 소수의 사람이 자유이던 시대를 거쳐 모든 사람이 자유가 되는 시대로 옮아간다. 그리하여 현대는 바로 이 마지막 단계가 실현되어야 할 시대라고 보았다. 헤겔은 이러한 근본사상을 바탕으로 장대한 철학체계를 수립하였는데 그 체계는 논리학·자연철학·정신철학의 3부로 되었으며, 이 전체계를 일관하는 방법이 모든 사물의 전개(展開)를 정(正)·반(反)·합(合)의 3단계로 나누는 변증법(辨證法)이었다. 헤겔에 의하면 정신이야말로 절대자이며 반면 자연은 절대자가 자기를 외화(外化)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논리학에서는 자연 및 정신에 대하여 고루 타당한 규정이 다루어졌다. 그의 철학은 그 관념론적 형이상학으로 인하여 많은 비판과 반발을 받기도 하였지만, 역사를 중시하였다는 점에서는 19세기 역사주의적 경향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으로 평가할 수 있으며, 또 변증법이라는 사상으로도 후세에 다대한 의의를 가진다 하겠다. 1995년 기독교한국루터회가 선정한 ‘세계를 빛낸 10인의 루터란’의 한 사람이다.

  항목차례

변증법(dialectic)

 

  동일률(同一律)을 근본원리로 하는 형식논리에 대하여, 모순 또는 대립을 근본원리로 하여 사물의 운동을 설명하려고 하는 논리. 이 말은 그리스어의 dialektike에서 유래하며, 원래는 대화술·문답법이라는 뜻이었다. 일반적으로 변증법의 창시자라고 하는 엘레아학파의 제논은 상대방의 입장에 어떤 자기모순이 있는가를 논증함으로써 자기 입장의 올바름을 입증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문답법은 소크라테스에 의해 홀륭하게 전개되고, 그것을 이어받은 플라톤에 의해 변증법은 진리를 인식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중시되었다. 근세에 와서 변증법이란 말에 다시 중요한 의의를 부여한 것은 I.칸트이다. 칸트는 변증법(칸트의 경우 보통변증론이라고 번역되지만 원뜻은 마찬가지이다)을 우리의 이성(理性)이 빠지기 쉬운, 일견 옳은 듯하지만 실은 잘못된 추론(推論), 즉 ‘선험적 가상(假象)’의 잘못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가상의 논리학’이라는 뜻으로 썼다. 이와 같이 칸트에 이르기까지의 변증법이란 말은 어느 경우에서나 진리를 인식하기 위해 직접 또는 간접으로 유효한 기술 및 방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오늘날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처럼 모순율(矛盾律)을 부정하는 특별한 논리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이에 비해 변증법이란 것을 인식뿐만 아니라 존재에 관한 논리로 생각한 것은 G.W.F.헤겔이었다. 헤겔은 인식이나 사물은 정(正)·반(反)·합(合)(정립·반정립·종합, 또는 卽自·對自·즉자 겸 대자라고도 한다)의 3단계를 거쳐서 전개된다고 생각하였으며 이 3단계적 전개를 변증법이라고 생각하였다. 정(正)의 단계란 그 자신 속에 실은 암암리에 모순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순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단계이며, 반(反)의 단계란 그 모순이 자각되어 밖으로 드러나는 단계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모순에 부딪침으로써 제3의 합(合)의 단계로 전개해 나간다. 이 합의 단계는 정과 반이 종합 통일된 단계이며, 여기서는 정과 반에서 볼 수 있었던 두 개의 규정이 함께 부정되면서 또한 함께 살아나서 통일된다. 즉, 아우프헤벤(aufheben:止揚 또는 揚棄)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존재에 관해서도 변증법적 전개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존재 그 자체에 모순이 실재한다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변증법은 모순율을 부정하는 특별한 논리라고 생각된다. 오늘날 변증법은 이와 같은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K.마르크스, F.엥겔스의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도 마찬가지로 해석된다.

   항목차례

 

 

  공리주의(utilitarianism)

 

  행위의 기준을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즉 사회의 최대다수 구성원의 최대한의 행복을 구하는 윤리·정치관. 주로 19세기 영국에서 유행한 윤리로서, 정치학설에서 공중적 쾌락주의(universalistic)와 같은 뜻이다. 목적론적(目的論的) 윤리의 한 형태이지만, 이기적이 아니라 보편적이며, 또 내면적 윤리에 대해서 사회적·외면적 도덕의 경향을 나타낸다. 17∼18세기의 고전경험론(古典經驗論)과 신학자·고전경제학자, 19세기의 급진주의자에게서 이 주의를 찾아볼 수 있으나, 이를 단순명쾌하게 정식화한 사람은 J.벤담이며, J.S.밀 부자(父子)에 의해서 계승되었다. 또 밀 이후에도 진화론적 윤리학 및 H.시지윅, G.E.무어, 현대 영국 분석철학자의 규범의식(規範意識) 속에서도 그 경향이 보인다. 벤담과 밀은 행복과 쾌락을 동일시하였는데, 벤담은 쾌락의 계량가능성(計量可能性)을 주장하고 쾌락계산의 구상을 내건 ‘양적(量的) 쾌락주의자’였으나, 밀은 쾌락의 질적(質的) 차이를 인정하여 ‘질적 쾌락주의’의 입장을 취하였으며, 또 내면적인 동기·양심·자기도야(自己陶冶)의 중요성도 인정하여, 심정도덕(心情道德)·완성설(完成說)에 접근하는 경향을 보였다.

 

벤담(Jeremy Bentham, 1748. 2.15∼1832.6.6)

 

  영국의 철학자·법학자. 런던 출생. 변호사를 하다가 나중에 민간연구자가 되었다. 인생의 목적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실현에 있으며 쾌락을 조장하고 고통을 방지하는 능력이야말로 모든 도덕과 입법의 기초원리라고 하는 공리주의(功利主義)를 주장하였다. 그러한 관점에서 쾌락의 계산법을 안출하였으며, 쾌락(플러스)과 고통(마이너스)을 강도·계속성·확실성·원근성(遠近性)·생산성·순수성·연장성(延長性)이라는 7개의 척도를 써서 수량적으로 산출하려고 하였다. 쾌락과 부(富)는 양(量)에 비례하지 않으며, 부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행복은 부의 양이 늘수록 줄어든다고 보고 한계효용을 내세웠다. 행복을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자유방임(自由放任)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한계효용이 점감(漸減)하는 이상, 부가 다른 조건상으로 동일하다면, 보다 평등하게 이를 분배하는 편이 전부효용(全部效用)을 증가시킨다 하여, 분배의 평등을 중시하였다. 공리주의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그는 의회의 개혁과 같은 정치활동에도 관계하였다. 주요저서는 《정부소론(政府小論)》(1776) 《도덕 및 입법의 원리 서론(序論)》(89, 신판 1823) 등이다.

 

밀(John Stuart Mill, 1806.5.20∼1873.5.7)

 

  영국의 경제학자·철학자·사회과학자·사상가. 런던 출생. 경제학자 J.밀의 장남으로 아버지로부터 엄격한 조기교육을 받았다. 밀 자신의 말에 의하면 3세에 라틴어, 8세에 그리스어, 12세에 논리학을 터득하였다고 한다. 이미 10대에 어엿한 지식인으로 성장하여 아버지가 근무한 동인도회사에서 일하면서(1823) 한편으로는 문필생활을 시작하였다. 소년기에 읽은 J.벤담의 저서에 영향받고, 공리주의(功利主義)에 공명하여 공리주의협회의 설립에 참가하여 연구·보급에 힘썼다. 그러나, 1826년 우울증에 걸린 것이 전기가 되어 감정을 경시하고 이성(理性)을 만능으로 보는 공리주의에 의문을 품게 되었으며, 칼라일, 워즈워스, 콜리지 등의 영향을 받아 사상적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65∼68년 하원의원이 되었으며, 사회개혁운동에도 참가하였다. 대표적인 경제학 저서에 《경제학 시론집(試論集)》(1830)과 《경제학 원리: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48) 등이 있는데, 그는 A.스미스나 D.리카도 등의 영국 고전파 경제학 이론을 계승하면서도, 경제공황이나 빈곤 등 새로운 역사적 과제에 대해서도 고려하여, 종래의 고전파 이론의 재구성과 보완을 시도하였다. 즉, 자연적인 생산법칙에 의하여 발생한 사회적 곤란을 분배의 인위적 공정(公正)과 사회의 점진적 개혁에 의해서 회피하려는 이론을 전개하였다. 또한 사회과학의 방법론적 반성으로서 저술한 《논리학체계:A System of Logic》(43), 종래의 공리주의적 자유론을 대신하여 인간정신의 자유를 해설한 《자유론:On Liberty》(59), 정치상의 대의제(代議制)와 분권제(分權制)의 의의를 강조한 《대의정체론(代議政體論)》(61) 등이 있고, 그 밖에 《공리주의:Utilitarianism》(63) 《해밀턴 철학(哲學)의 검토:Examination of Sir William Hamilton’s Philosophy》(63)등의 철학적 저서와, 영국의 여성해방사상 기념비적 문헌이 된 《여성의 종속:The Subjection of Women》(69) 《자서전:Autobiography》(73) 《종교에 관한 에세이 3편:Three Essays on Religion》(74) 《사회주의론》(79) 등이 있다. 그의 사상은 만년에는 점차 사회주의에 가까워져 갔지만, 그의 사회주의는 그 후의 영국에서 마르크스주의와는 다른 개량주의적 사회주의로 발전하였다.

  항목차례

실증주의(positivism)

 

  철학의 방법이 과학의 방법과 다른 것이 아님을 주장하는 철학적인 입장이다. 바꾸어 말하면 과학으로 얻어지는 지식의 총체 이외에 참된 지식은 없다고 하는 입장. 실증주의라는 이름은 자연과학의 방법을 철학에 적용하려고 하였던 생시몽에서 비롯되었고 A.콩트가 실증철학으로서 확립하였다. 그 연원(淵源)은 영국의 경험론과 프랑스의 계몽주의 유물론(唯物論)에 있지만, 그 배경에는 자연과학의 급속한 발달과 공업 사회의 성립이 있다. 실증철학은 프랑스 혁명기의 대표적인 철학이 되었다. 또 E.마하, R.아베나리우스 등의 과학철학도 인식론에서 실증주의의 대표적인 것으로 꼽히지만, 19세기의 실증주의에서는 논리학이나 수학의 역할에 대해 충분한 고려를 하지 못하였다. 1920년대부터 빈 학단(學團) 사람들을 중심으로 제창되기 시작한 새로운 실증주의는 이 점의 결함을 보충하고, 논리학이나 수학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는 한편, 이들 학문이 경험과학과 다르고, 세계에서의 정보를 주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여기에서 이 새로운 실증주의를 논리실증주의라고 한다. 현재는 논리실증주의도 또 얼마간 비판을 받아 분석철학(分析哲學)이라 불리는 것으로 변신(變身)하고 있지만, 이것은 이미 실증주의라고는 불려지지 않는다. 일상 생활에서는 형이상학이나 종교를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고, 오로지 검증이 가능한 증거에 의지하여 여러 가지 문제를 풀려고 하는 사람을 실증주의적인 사람이라고 한다.

 

콩트(Isidore-Auguste-Marie-Franiois-XaviAr Comte, 1798.1.19∼1857.9.4)

 

  프랑스의 철학자·사회학의 창시자. 남프랑스 몽펠리에 출생. 파리의 에콜 폴리테크니크 재학 중 교수 배척운동에 가담하여 퇴학당하였다. 그 후 수학·물리·화학·생물·정치·도덕 등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였으며, 생 시몽을 알게 되어 그의 잡지 편집을 도우면서 그에게서 사상적인 영향을 받았다. 콩트는 여러 사회적·역사적 문제에 관하여, 온갖 추상적 사변(思辨)을 배제하고, 과학적·수학적 방법에 의하여 설명하려고 하였다. “절대적인 격률(格率:maxim)은 하나밖에 없다. 이것은 절대적인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라는 그의 말은,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학설의 의(擬)=절대성을 배격하고, 감각적 경험에 의하여 확증할 수 있는 여러 사실과 이것들의 관계에만 전념한다는 과학적이며 실증적인 상대주의(相對主義)의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다. 또한 그의 유명한 3단계 법칙에서는, 인간의 지식의 발전단계를 신학적·형이상학적·실증적인 3가지로 구분하고, 최후의 실증적 단계가 참다운 과학적 지식의 단계라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실증과학의 체계는 대상의 복잡성에 따라 차례로 수학·천문학·물리학·화학·생물학·사회학(질서에 대응하는 社會靜學과 진보에 대응하는 社會動學으로 구분된다)으로 성립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만년에 클로틸드 드 보 부인과 사귀게 되어, 그녀를 환상적인 애정으로 사랑하였으나, 2년 후 그녀가 죽고, 또 실직하자 친구들의 도움으로 생활하였다. 그의 까다로운 성품 때문에 친구들이 이반(離反)하는 등, 당시의 상황도 원인이 되어 마침내 신비주의에 빠져 인간성을 숭배하는 인류교(그 자신이 대주교이며, 보 부인은 성녀)를 주창하게 되었다. 즉, 전기의 객관적 과학주의는 주관적·종교적 상징주의로 변모하였는데, 이 모순적인 변모 속에 인간 콩트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저서로는 《실증철학 강의:Cours de philosophie positive》(6권, 1830∼42)와 《실증정치학 체계:Syst뢭e de politique positive, ou traite de sociologie, instituant la religion de l’humanit렊?4권, 51∼54) 등이 있다.

  항목차례

유물론(materialism)

 

  물질을 제1차적·근본적인 실재로 생각하고, 마음이나 정신을 부차적·파생적인 것으로 보는 철학설. 정신을 바로 물질이라고 주장하는 입장 또는 물질(뇌)의 상태, 속성, 기능이라고 주장하는 입장 등 여러 입장이 있다.

【용어】 원래 철학용어로서는, 세계의 본성(本性)에 관한 존재론(存在論)상의 입장으로서 ‘유물론’과 ‘유심론(唯心論)’을 대립시키고, 인식의 성립에 관한 인식론(認識論)상의 학설로서 ‘실재론(實在論)’과 ‘관념론(觀念論)’을 대립시키는 것이 올바른 용어법이다. 그러나 실제로 ‘유물론’은 ‘관념론’의 대어(對語)로 사용된다. 그 까닭은 근본적으로 근세철학에서 유물론은 실재론적 입장의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적 실체’에 근거를 두고 존재론이라는 형식으로 자기 주장을 해왔던 데 대하여, 관념론은 유심론적 입장이 ‘사고(思考)하는 우리’에게 근거를 두고 인식론적으로 전개하여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 ‘유물론’으로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친 F.엥겔스가 용어법으로서 ‘유물론과 관념론’이라는 대어를 사용한다는 사실과 그것을 계승한 N.레닌이 ‘오해를 초래하는 것’이라고 하여 ‘실재론’이라는 용어를 배척하였다는 사정도 있다.

【특징】 ⑴ 과학주의:유물론의 근본적인 주장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물질적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 ‘물질’이 무엇이냐 하는 점에 관해서는 여러 입장이 있다. ‘물질’의 특질은 흔히 질료(質料)·불가입성(不可入性)·타성(惰性) 등 대개 자연과학적으로 기술되고 규정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유물론자는 대체로 그 시대의 자연과학이 이룬 성과를 철학적 입장의 근본으로 하는 ‘과학주의적’ 태도를 취한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물질을 ‘우리 의식에서 독립된 객관적 실재’로 보고(물질의 철학적 개념), 물질에 관한 과학적 인식내용에서 원리적(原理的)으로 구별한다. 그러나 그 경우도 자연과학의 성과에 의거한다는 ‘과학주의(科學主義)’로 일관한다.

⑵ 결정론(決定論):유물론에는 이 ‘과학주의’와 관련하여 일종의 ‘결정론’이 있다. 즉 “모든 사물의 변화는 선행하는 물질적 조건과 그것을 포함하는 법칙성을 근거로 결정된다”라는, 존재하는 사물에 대한 인과율(因果律)의 지배를 인정하는 사고방식이다. 한마디로 ‘무슨 일에나 원인이 있다’는 뜻이며 이것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하여 그것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든가 혹은 어떤 법칙성(法則性)에 따른다고 보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자유란 필연성의 인식이다”라고 하여 법칙적 필연성 인식에 근거를 두는 법칙성의 기술적 이용을 인간의 자유로 보고 있으나 이 경우도 ‘법칙에 따르는’ 자유이며 근본적으로는 결정론으로 볼 수 있다.

⑶ 감각론(感覺論):유물론은 이러한 법칙성의 인식에 관하여 감각만을 인식의 원천으로 인정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 까닭은 인식내용의 원천을 물질적인 외계에서만 찾고 내적·주관적인 것은 혼입(混入)을 배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상상력에서 유래하는 것, 감각적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 선험적(先驗的)인 것의 역할은 부정된다. 유물론자 엥겔스가 영국의 경험론을 평하여 ‘부끄럼쟁이의 유물론’이라고 하였듯이 유물론은 경험론과 같이 감각론의 입장을 취한다는 점에서 경험론과 가깝다. 그러나 경험론은 감각의 원인으로 그 자체로서는 비감각적인 실체(유물론이 인정할 수 있는 물질)를 인정하는 일이 없다.

⑷ 무신론(無神論):존재하는 모든 것이 물질적일 때 신이라든지 정령(精靈)이라는 비물질적인 존재는 인정될 수 없다. 게다가 세계의 사상(事象)이 물질적 법칙성에 의하여 결정될 때 세계의 변화를 관장하고 거기에 목적을 부여하는 신적(神的)인 것은 설명의 편법으로서도 배제된다. 이렇게 유물론은 언제나 무신론을 위한 강력한 논리가 되어왔다. 유물론자는 모두 무신론자이며 사상사(思想史)의 측면에서 볼 때 양자는 거의 구별할 수가 없다.

【역사】 유물론이라는 명칭은 18세기에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그 사고방식은 이미 초기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볼 수 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 따르면 원자(原子)와 공간(空間)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의 모든 사물의 성질은 이러한 사물을 구성하는 원자의 모양·크기·위치 및 그 결합의 밀도(密度)로 설명할 수 있다. 모든 현상은 원자의 기계론적인 작용으로 일어나며 필연적으로 결정된다. 영혼의 작용도 원자의 한 작용으로 생각하였다. 유물론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이후, 더욱이 중세에 이르러 쇠퇴하였으나 근세에 이르자 F.베이컨, P.가생디를 선구자로 18세기의 영국과 프랑스에서 각각 독자적으로 발전되었다. 독일에는 G.W.F.헤겔의 관념론을 비판한 L.A.포이어바흐가 있으며 그 영향을 받아 K.마르크스, 엥겔스가 변증법적 유물론(辨證法的唯物論)을 확립하여 현대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항목차례

포이어바흐(Ludwig Andreas Feuerbach, 1804.7.28∼1872.9.13)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바이에른주(州) 란츠후트 출생. 하이델베르크대학·베를린대학에서 수학, 헤겔철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1828년 에를랑겐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강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저서 《죽음과 불멸에 대한 고찰:Gedanken 웑er Tod Und unsterblichkeit》(1830)이 그리스도교를 비판한 것이라 하여 교직에서 추방당하였고, 그 후로는 재야(在野) 철학자로서 저술활동을 계속하였다. 주요저서로는 《그리스도교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entums》(41) 《장래 철학의 근본문제:Grunds둻ze der Phi1osophie der Zukunft》(43) 《종교의 본질:Das Wesen der Religion》(45) 등이 있다. 그의 철학의 공적은 그리스도교 및 관념적인 헤겔철학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유물론적인 인간중심의 철학을 제기한 데에 있다. 그의 철학은 후일, K.마르크스와 F.엥겔스에 의해 비판적으로 계승되었다.

  항목차례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5.5∼1883.3.14)

 

  독일의 공산주의자·혁명가·경제학자. 라인주(州) 트리어 출생. 유대인 그리스도교 가정의 7남매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로 자유사상을 지닌 계몽주의파 인물이었고, 어머니는 네덜란드의 귀족 출신이었다. 자유롭고 교양 있는 가정에서 성장하여 1830∼35년 트리어김나지움(고등학교)에서 공부한 다음, 35년 본대학에 입학하여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미술사 등 인문계 수업을 받았다. 1년 후 본을 떠나 36년 베를린대학에 입학하여 법률·역사·철학을 공부하였다. 당시 독일의 철학계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G.W.F.헤겔의 철학을 알게 됨으로써 마르크스는 젊은 신학(神學) 강사 B.바우어가 이끌던 헤겔학파의 좌파인 청년헤겔파에 소속되어 무신론적 급진(急進) 자유주의자가 되어 갔다. 41년 에피쿠로스의 철학에 관한 논문으로 예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본으로 갔으나, 바우어가 대학에서 해직되는 것을 보고 대학 교수의 꿈을 포기하였다. 마르크스는 42년 1월 새로 창간된 급진적 반정부신문인 《라인 신문》에 기고를 시작하여 그해 10월에 신문편집장이 되었으나, 여러 현실문제를 취급하는 과정에서 경제학 연구의 필요성을 느꼈다. 43년 관헌에 의하여 《라인 신문》이 폐간되자 프로이센 귀족의 딸로 4살 연상인 W.예니와 결혼하여, 파리로 옮겨가 경제학을 연구하는 한편 프랑스의 사회주의를 연구하였다. 42년에 처음 만났던 F.엥겔스와 파리에서 재회하였으며, 엥겔스의 조언에 의하여 경제학 연구에서의 영국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A.루게(1802∼80)와 《독불년지(獨佛年誌)》를 출판하였으며, 이로 인해 프로이센 정부의 요청으로 파리에서 추방되어 45년 2월 브뤼셀로 가서 프로이센 국적을 포기하였다. 그 동안 44년 《경제학·철학 초고(草稿)》와 《헤겔 법철학 비판서설(法哲學批判序說)》을, 45년 엥겔스와 공동으로 《신성가족》과 《독일 이데올로기》를 썼으며,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유물사관의 주장을 처음으로 정립·설명하였다. 47년 P.J.프루동(1809∼65)의 《빈곤의 철학》을 비판한 《철학의 빈곤》을 쓰고, 그해에 런던에서 공산주의자동맹이 결성되자 엥겔스와 함께 이에 가입하여 동맹의 강령인 《공산당선언》을 공동명의로 집필하였는데 이 선언은 그해 2월에 발표되었다. 48년 2월 파리에서 시작된 혁명이 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제국에 파급되자 마르크스는 브뤼셀·파리·쾰른 등지로 가서 혁명에 참가하였으나, 각국의 혁명은 좌절되고 그에게는 잇달아 추방령이 내려졌다. 그는 마침내 런던으로 망명하여 수년간 고립생활을 하게 되었다. 50~64년까지 마르크스는 정신적 고통과 물질적인 빈궁 속에서 지냈다. 대영박물관 도서관에 다니면서 경제학을 연구하는 한편, 51년부터 미국의 《뉴욕 트리뷴》지(紙)의 유럽 통신원이 되었다. 이 때 맨체스터에서 아버지의 방적공장에 근무하고 있던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재정적 원조를 계속하였으며, 마르크스 부인의 친척과 W.볼프(마르크스는 《자본론》을 이 사람에게 바침) 등의 유산(遺産)을 증여받아 마르크스 일가는 경제적 곤란을 덜었다. 59년 경제학 이론에 대한 최초의 저서 《경제학비판》이 간행되었는데, 이 책의 서언(序言)에 유명한 유물사관 공식이 실려 있다. 64년 제1인터내셔널이 창설되자 마르크스는 이에 참여하여 프루동, F.라살(1825∼64), M.A.바쿠닌(1814∼76) 등과 대립하면서 활동하는 한편, 62년부터 구상 중이던 《자본론》 제1권을 67년 함부르크에서 출판하였다. 그러나 제2권과 제3권은 마르크스의 사후에 엥겔스가 85년과 94년에 각각 출판하였고, 처음에 제4권으로 구상되었던 부분은 K.카우츠키에 의하여 1905∼10년에 《잉여가치학설사(剩餘價値學說史)》라는 이름의 독립된 형태로 출판되었다. 마르크스의 마지막 10년은 자신의 말대로 만성적인 정신적 침체에 빠져 있었으며, 최후의 수 년 동안은 많은 시간을 휴양지에서 보냈다. 1881년 12월에는 아내의 죽음으로, 83년 1월에는 장녀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그는 그해 3월 14일 런던 자택에서 평생의 친구이자 협력자인 엥겔스가 지켜 보는 가운데 64세로 일생을 마쳤다.

  항목차례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1.28∼1895.8.5)

 

  독일의 사회주의자. 프로이센 라인주(州) 바르멘 출생. 부유한 공장주의 8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업에 전렴하기 위하여 김나지움을 중퇴하고 바르멘과 브레멘에서 가업에 대한 수련을 쌓으면서, 틈틈이 평론·시 등을 써 F.오스발트라는 필명으로 신문 등에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자유’라는 청년 헤겔주의자 모임에 가입할 수 있었고, 이 모임에서 철학·종교 논쟁에 대한 무서운 선전가로 인정받았다. 1841년 베를린의 근위포병연대에 복무하면서 베를린대학에서 강의를 들었다. 42년 제대 후 아버지가 관계하던 공장에 입사하기 위하여 맨체스터로 가던 도중 쾰른의 《라인 신문》 편집소에서 처음으로 K.마르크스와 만나게 되었다. 영국에 체재하는 동안 사업에 종사하면서 자본주의 분석연구에 관심을 가지면서, 44년 마르크스와 A.루게가 발간하는 《독일-프랑스 연보》에 <국민경제학비판대강(國民經濟學批判大綱)>을 기고하였다. 같이 논문에서 엥겔스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초기 해석과 자유주의 경제이론의 모순점을 제시하여 마르크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같은해 파리에서 마르크스와 재회, 두 사람은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45년 가출하여 마르크스가 사는 브뤼셀로 가서 마르크스와 공동으로 《독일 이데올로기》를 집필하여 인간사회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인식방법인 유물사관(唯物史觀)을 제시하여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기초를 확립함과 동시에, 공산주의의 연대와 결집을 목표로 공산주의 통신위원회를 창설하였다. 47년 공산주의자 동맹을 창설, 제2차 공산주의자대회의 위촉을 받고 48년 2월 마르크스와 공동으로 《공산당선언》을 발표하였다. 그 직후인 2월 프랑스에서 2월혁명이 일어나자 마르크스와 함께 파리로 갔다가 다시 쾰른으로 옮겨 독일혁명을 지도하고 같은 해 6월 《신(新)라인 신문》을 발행하였다. 49년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런던으로 망명하였다가, 맨체스터에서 다시 사업에 종사하여 마르크스의 이론적·실천적 활동을 경제적으로 지원하였다. 69년 사업을 청산하고 다음해 런던으로 이주, 제1인터내셔널의 총무위원이 되어 국제노동운동의 발전에 진력하고 마르크스주의의 보급에도 노력하였다. 83년 마르크스가 사망하자 그의 유고 정리에 몰두하여 《자본론》의 제2·3권을 편집하는 한편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자로서 노동운동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항목차례

마르크스주의(Marxism)

 

  마르크스가 엥겔스의 협력으로 만들어 낸 사상과 이론의 체계. 레닌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사상과 학설의 체계인 마르크스주의는 19세기의 3가지 정신적 주조(主潮), 즉 독일의 고전철학, 영국의 고전경제학 및 프랑스의 혁명적 학설과 결합된 프랑스 사회주의를 그 원천 또는 구성부분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즉, 마르크스주의의 체계는 G.W.F.헤겔, L.포이어바흐 등 19세기 독일의 고전철학에서 변증법과 유물론을, 또 영국의 고전경제학 중에서도 특히 D.리카도의 경제학으로부터 노동가치설을, 그리고 프랑스의 사회주의자들로부터 사회주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계승·발전·통일시킴으로써 형성되었다. 소련의 《철학교정(哲學敎程)》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철학적 유물론과 변증법적 방법론은 그의 학설의 모든 구성부분을 꿰뚫고 있다는 것이며, 레닌은 경제학의 전체를 근본으로부터 개조하는 일, 즉 역사·철학·자연과학·노동계급의 정책과 전술 등에 유물론적 변증법을 적용하는 일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고 하였다. 즉, 마르크스는 철학에 관한 책은 따로 쓰지 않았으나, 자연과 사회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운동·변화한다는 변증법적 견해를 인간사회에 적용함으로써 인간사회의 역사적 발전에 관한 일반적 법칙을 설명하는 유물사관(唯物史觀)을 정립한 다음 공산주의에 관한 자신의 주장을,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도덕적 감정을 근거로 삼았던 것과는 달리, 경제학을 통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필연적 붕괴 위에 건설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노동가치설을 설명원리로 삼고 잉여가치론(剩餘價値論)을 분석장치로 삼아 자본주의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밝힘으로써 그 필연적 멸망을 증명하는 데에 반생을 바쳤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혁명가가 된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경제학적 연구의 결과가 아니다. 그가 혁명을 믿고 주장하게 된 것은 이미 1843∼44년이고, 이 혁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경제학 연구를 시작한 것이다. 엥겔스에 따르면 유물사관과 잉여가치론은 마르크스가 발견한 것이며 이의 발견으로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는 하나의 과학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한편,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에 대비하여 이전의 R.오언, F.M.C.푸리에, 생시몽 등의 사회주의를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비판하였다. 이 같은 이론체계에 입각하여 마르크스는 노동자계급이야말로 혁명의 유일한 주체세력이라고 믿었으며, 이 계급의 계급투쟁으로 폭력에 의한 혁명을 일으킴으로써 계급이 없는 이상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마르크스주의는 그의 사후 K.카우츠키에 의한 사회민주주의와 레닌에 의한 마르크스-레닌주의로 갈라져 마르크스-레닌주의는 19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의 수정과 그에 이은 유러커뮤니즘의 강력한 비판으로 결정적 시련에 봉착하였다. 사회민주주의는 51년 7월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계기로 새로 등장한 민주사회주의(民主社會主義)에 의하여 전면적으로 대치(代置)되었다. 따라서 지난 1세기 이상을 두고 사회사상·정치사상·혁명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온 마르크스주의는 이제 그 하향길에 접어들고 있다.

  항목차례

변증법적 유물론(dialectical materialism)

 

  N.레닌이 볼셰비키당(黨)의 교조(敎條)로 만든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철학교조 및 그것을 다시 공식화한 I.V.스탈린의 유물론 사상. K.마르크스와 F.엥겔스의 사상 영향을 받은 레닌은 당의 세계관적 교조를 만듦에 있어 주로 엥겔스의 자연변증법 사상과 러시아의 G.V.프레하노프의 유물론을 도식화하고 통속화함으로써 이 교조의 모형을 형성하였다. 마르크스는 역사적 유물론을 주장하면서도 ‘변증법적 유물론’과 같은 존재론의 형성을 조심스레 기피했고, 변증법의 논리를 사회와 역사 영역에만 적용하였다. 철학과 과학의 혼효물(混淆物)인 자연변증법을 구성한 엥겔스의 유물론적 진화론은 프레하노프와  K.J.카우츠키를 거쳐 레닌과  N.I.부하린에 의해 변증법과 유물론의 억지결합인 이 교조로서 발전되었다.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술어를 마르크스는 전혀 사용한 바 없고, 1891년 프레하노프의 저서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러나 이 교조의 체계화 과정에서 볼셰비키당의 세계관적 도그마로 공식화되고 이 공식화된 국정철학(國定哲學)이 곧 1936년 스탈린의 저작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이었다. 이 공식화로 스탈린에 의한 철학의 1인 독점이 이루어지고, 그 이후 소련학계에서는 이 철학교조 이외의 모든 철학적 논의가 전면적으로 금지되고 대용종교(代用宗敎)의 도그마로서 스탈린철학의 독점적 지배가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변증법적 유물론’은 결국 스탈린의 국정철학이요, 그 밖의 모든 철학사상의 연구와 토론을 불모화시킨 철학의 1인 독점체제가 된 것이다. 이 철학교조는 소련 공산당의 공식적 철학 이데올로기로서 반복적인 학습을 위한 사상 강제주입의 교정이었고, ‘DIAMAT’라는 약칭으로 통용되는 ‘공산경전(共産經典)’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56년 6월 6일 소련의 모든 고등교육기관에 내려진 ‘DIAMAT의 교정에 관한 당중앙위원회의 결의’에 의해 이 스탈린 교정은 폐지되고, 58년 콘스탄티노프 편(編)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기초》와 60년 쿠시넨 편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기초》를 거쳐 그 후로도 수정이 거듭되어 오늘에 이른다. 우선 이 교조는 마르크스와 특히 엥겔스의 유물론을 계승한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마르크스의 철학을 부당하게도 자연계에까지 확대적용하여 진화론적인 유물론 형이상학으로 만든 것은 엥겔스였다. 엥겔스는 물질을 제1차 실재(實在)로 보고 물질의 물질적·화학적 변화마저도 변증법적 변화와 발전으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는 모든 철학문제를 아주 단순하게 유물론과 관념론의 2분법으로 이해했고 철학자들도 이에 대응되는 2대 진영으로 대립되어 있다고 전제하였다. 즉, “자연에 대해서 정신이 근원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따라서 결국에 가서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세계는 정신이라고 인정하는 사람들은 관념론 진영에 속한다. 자연을 근원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유물론의 갖가지 학파에 속한다”(엥겔스의 포이어바흐論)라고 하였다. 엥겔스의 유물론이 18세기의 기계적 유물론과 다른 점이 있다면,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는 물질을 상정한 진화론적 특성이 가미된 점이다. 레닌은 의식에서 독립된 물질의 선차성(先次性)을 제시하고 사유는 물질인 뇌수의 분비물인 듯이 표현하였다. 레닌의 유물론은 E.마하나  R.아베나리우스의 감각주의적 실증철학으로 인해 그 지위가 위태로워진 물질의 카테고리를 수호하기 위해 감각이나 경험에서 독립된 객관적 실재로서 물질을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인식론으로는 반영론적(反映論的) 실재론을 마련하였다. 그의 반영론에 의하면 의식은 물질의 반영이거나 불완전한 모사(模寫)에 불과한 것이 된다. 레닌은 “유물론은 대개 의식·감각·경험 등과 인간으로부터 독립된 객관적 실재를 인정한다.… 의식은 다만 존재의 반영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하였다. 이 명제(의식은 물질의 불완전한 반영이다)는 그 명제 자체의 진리성(眞理性)조차도 인정할 수 없게 하는 패러독스에 빠져 있다. 즉, 수학적 지식이나 그 밖의 온갖 과학이론들이 물질의 반영이라고 주장한다면, 예를 들어 0의 개념은 물질의 어떤 반영이며 만유인력은 어떤 반영인가 하는 점이다. 여기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적 전제가 아주 소박한 반영론 위에 서 있다는 점에서 가장 심각한 약점을 내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스탈린도 유물론 면에서는 레닌의 통속적 유물론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즉, 스탈린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에서 “물질·자연·존재는 의식 밖에서 독립하여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이다. 물질이 1차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물질은 감각·관념·의식의 근원이며 따라서 의식은 2차적·파생적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의식은 물질의 반영이고 존재의 반영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은 유물론은 G.W.F.헤겔의 변증법과 결합됨으로써 L.A.포이어바흐의 기계적 유물론을 극복했다고는 하지만, 엥겔스의 변증법적 자연철학은 의식의 자각과정에 적용되어 온 변증법을 물리적 자연이나 무생물의 영역에까지 잘못 적용하는 과오를 저질렀다. K.뒤링은 마르크스사상 속의 헤겔 변증법 부분을 비판하면서, 모순은 논리적 관계이므로 자연계에는 모순이 성립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엥겔스는 그의 저서 《반(反)뒤링론(論)》(1878)에서 정곡을 찌른 비판을 가한 뒤링의 논점을 반박하기 위해 자연 속에도 모순이 있다는 실례를 제시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물질의 운동 그 자체가 모순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수학의 +와 -, 물리학에서의 작용과 반작용 등을 들어 자연 속에 모순이 내재함을 인정하려 했고, 특히 직선과 곡선이 동일한 것일 수 있는 고등수학에도 진정한 모순이 있다고 강변하였다. 그러나 그는 보리알이 썩어서 다시 새싹이 나오는 예를 들어 ‘부정(否定)의 부정(否定)’의 법칙을 설명했고, 달걀이 어느 단계에 이르면 그 껍데기와 그 속의 병아리 사이의 모순이 격화되어 달걀이 병아리로 질적(質的) 비약을 한다는 예를 들어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로 이행(移行)하는 법칙’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런 모든 설명에서 생명 있는 물질을 전제하게 됨으로써 엥겔스의 자연변증법 사상은 유물론에서 변질되어 보리·달걀 등 생명체를 기체로 한 진화론적 생명론이 되었다. 레닌도 ‘운동은 물질의 존재방식이다’라고 규정하면서 엥겔스의 자연철학을 계승하여 운동의 범주를 무생명적 물질에서 생명·의식·사유까지 포괄하여 설명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인 범주로 사용하였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변증법 부분을 전개한 것도 엥겔스였다. 엥겔스는 첫째, ‘양에서 질로의 전화(轉化)와 그 역(逆)’의 법칙에 대해서 양적 규정(量的規定)이 일정한 한계점에 도달하면 그 존재의 질은 새로운 질로 전화한다고 하였다. 물은 0 ℃에서 온도가 증가하여 100 ℃에 이르면 비등점에서 수증기로 전환된다는 것, 그리고 빙점과 비등점 사이에서만 물이 물로서 존재하는데 이것이 도량(度量)이다. 이처럼 양과 질의 변증법적인 통일로서 도량관계가 성립된다고 했고 새로운 질이 생기는 질적 비약을 일으키는 한계점을 결절점(結節點)이라 했다. 둘째, ‘제대립(諸對立)의 침투’의 법칙에 대해서도 생명은 스스로의 부정(否定)인 죽음을 본질적으로 내포하면서 삶과 죽음의 모순으로서 자기를 지양한다는 것이다. 셋째, ‘부정의 부정’의 법칙에 대해서도 유기적 생명체의 형태변환(形態變換)을 들어, 씨앗으로부터 그 부정으로서 성장체가 생기고 다시 그 성장체로부터 자기부정에 의해 씨앗이 생기는 과정을 그 예로 들었다. 스탈린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에서 변증법의 법칙을 4가지로 공식화하여 ① 제현상의 보편적 관련과 상호의존성, ② 자연과 사회에서의 운동·변화·발전, ③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이행(移行)으로서의 발전, ④ 대립물의 투쟁으로서의 발전 등 네 가지를 들고 ‘부정의 부정’법칙을 삭제하였다. 공산당의 정치적 신조로서 주로 엥겔스, 레닌, 스탈린 등에 의해 교조화된 변증법적 유물론은 헤겔의 변증법과 유물론의 강제적인 결합, 자연과 사회의 구별 없이 적용된 실증주의적 방법과 존재론화(存在論化), 당적 실천을 위한 이념도구화 등으로 철학적인 반성과 비판 없는 통속화의 표본이 되었다. 비(非)스탈린화(化) 이후 이 ‘DIAMAT’의 교조는 소련과 그 밖의 공산권 내에서마저도 수많은 철학논쟁을 통해 그 이론적 허점과 허위 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적 기만성이 드러났고, 이 교조의 당적 권위를 장악하고 있던 소련 관학계(官學界)에서도 수차에 걸친 자기 수정에 의해 많은 부분에 걸쳐 대폭 수정되어 변증법적 유물론의 중핵이 크게 변조되었다. 이 교조의 철학적 기초를 동요케 한 가장 치명적인 요인은 현대물리학의 발전으로 유물론의 실재개념이던 ‘물질개념의 소멸’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공산주의 운동과 당의 정치적 실천과정에서 이 교조가 현실과 괴리되어 대내적으로 많은 이념분쟁을 야기시켰고, 특히 G.루카치는 스탈린주의와 제2인터내셔널의 객관주의에 대해 반기를 들고 계급의식 등 의식의 적극적 의의를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의식은 물질에 의해 규정된다는 물질결정론적인 유물론은 ‘의식’의 능동적 역할을 강조해 온 레닌주의 이래로 주의주의적(主意主義的)인 혁명적 실천과 갈등을 일으켰고, 먼저 볼셰비키당과 그 이데올로기가 정치권력의 장악을 통해 사회주의적 경제토대로 만든 볼셰비키혁명도 유물론적인 토대결정론으로는 이론적 합리화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50년대의 토대·상부구조논쟁을 통해 소련철학은 토대결정론을 바꾸어 오히려 상부구조인 사회이념이나 이데올로기가 토대에 ‘반작용’할 수도 있다는 내용의 ‘상부구조의 상대적 독립성’ 체제를 들고 나와 변증법적 유물론의 유물론적 기초를 흔들어 버렸다. 이로 인해 소련의 철학교정에서는 물질에 대한 의식의 능동적 역할을 역설하는 새 경향이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이 교조를 결정적으로 혼란에 몰아넣은 것은 55∼58년의 ‘사회주의하의 모순논쟁’이었다. 이른바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주된 모순인 계급적 모순이 해소되었다고 전제할 때 모순이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유물변증법의 법칙에 따라 소련은 이제 더 이상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을 잃고 침체하지 않을 수 없다는 역설적 상황이 야기되었다. 한편으로는 ‘소련과 공산권 내에도 모순대립이 상존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기왕의 변증법교조를 고수해 보려는 보수파와 ‘모순은 오히려 발전의 장애물이다’라고 해서 모순의 지향이나 통일이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고 하여 ‘통일·단결·일치’가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주장하는 관학파가 대립한 것이다. N.S.흐루시초프의 평화공존론도 공산권과 자본주의 제국과의 관계를 서로 용인할 수 없는 모순대립(따라서 전쟁불가피론)으로 파악하지 않고 경쟁적 공존관계로 인정한 점에서 ‘현대판 수정주의’로 낙인 찍히게 된 것이다. 스탈린시대에는 자연과학자도 그의 과학연구에 ‘DIAMAT’의 인용이 의무화되었으나 흐루시초프는 물리학 연구 등 자연과학 연구에 그 강제적용을 면제케 하였다. 맥심 미클루크는 소련 과학문헌의 조사연구를 통해서 소련 과학자들이 그들의 전문적 저작 속에서 변증법적 사고의 법칙을 이용한 단 1건의 예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해서 I.V.미추린, 리솅코 등의 경우와 같이 과학연구에 ‘DIAMAT’의 철학이 도움이 된 예가 없음을 입증하였다. 따라서 스탈린주의의 철학교조였던 ‘DIAMAT’는 공산권 내부에서도, 그리고 서유럽 마르크스주의자들 속에서도 이제 퇴조·사멸되고 말았다고 하겠다.

  항목차례

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

 

  마르크스주의의 근거가 되는 역사관. 유물사관이라고도 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역사에의 적용이며, 그 근본 사상은 역사가 발전하는 원동력은 관념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라고 하는 데 있다. 즉, 사회사(社會史)로서의 역사의 실체가, 자연과 노동에 의해서 자연에 작용하는 인간, 그리고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규제하는 생산 관계 등, 물질적인 것으로 성립되며 그것이 자기를 발전시킨다는 생각이다. 마르크스주의 이전의 역사관에서는 역사의 추진력을 운명·섭리·세계정신 등 초자연적 관념에 두거나, 영웅이나 천재의 정렬이나 능력 등 개인적·우연적 요소로써 역사과정을 설명하는 관념적 역사관이 지배적이었다. 아니면, 기후·풍토 등에 의해서 사회적 사상(事象)들이 결정되어 있는 지리적 결정론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 사적 유물론에서는 인간의 존재에 필요 불가결한 물질적 생활의 생산이 정치·경제·법률·종교·학문 등의 관념을 발달시킨 기초라고 생각한다. 마르크스의 “사람들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제한다”는 사상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사회는 규정적, 제1차적인 것으로서의 토대, 즉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 조응(照應)하는 생산 관계’와 이 실제적 토대 위에 성립되는 ‘법률적·정치적 상부구조’로써 이루어지며 ‘일정한 사회적 의식 형태가 거기에 조응한다’. 그러나 상부구조는 토대로부터 직선적·일방적으로 결정되어 버리는 것은 아니다. 어떤 시대의 법제적·정치적인 여러 관계 및 과학·종교·예술 등 이데올로기의 여러 형태는 동시에 갖가지 모멘트(계기)에 의해서도 규정되어 있다. 나아가 상부구조, 이데올로기의 여러 형태는 하부구조에 대해서 능등적으로 작용한다는 측면도 있다고 한다. 또한 사회혁명의 시기는 다음과 같은 경로에 의해서 생긴다고 생각한다. 사회의 물질생산력이 일정한 발전적 단계에 이르면 현존하는 생산 관계와 모순에 빠진다. 이것을 그 법제면에서의 현상에서 보면 그 때까지의 사회생활이 영위되어 온 소유관계와 모순되어 생산 관계가 생산력 발전의 큰 장애가 된다. 그리고 경제적 기반의 변화와 더불어 거대한 상부구조가 무너진다. 이것은 급속히 이루어지기도 하고 완만하게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리하여 역사상의 여러 시대가 형성되며, 새로운 생산양식이 이루어져 간다. 인류가 거쳐온 기본적 생산양식의 형태는 원시공산제·노예제·봉건제·자본주의·민주주의인데, 여기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移行)되는 시기로서 현대 세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사적 유물론이 마르크스, 엥겔스의 사상형성사 가운데서 명확한 형태에 달한 것은 1845∼46년에 쓴 《독일 이데올로기》에서였다고 본다. 그의 소위 《소외론》에서는 G.W.F.헤겔과 헤겔좌파(左派)의 관념사관을 ‘자연적 인간의 노동’을 기초로 하는 사회파악에 의해서 본질적으로 넘어서기는 했지만 사유재산제의 역사적 성립을 대상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이에 대해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비로소 구체적으로 역사사회의 형성을 파악하는 방법으로서의 사적 유물론이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행복 충전소(大名*大明*大命)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

'교회사자료 > 5.근세교회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근대기독교  (0) 2007.08.20
[스크랩] 현대교회사  (0) 2007.08.20
[스크랩]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0) 2007.08.20
근 세 사  (0) 2007.08.20
세대주의란 무엇인가?  (0) 2007.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