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개신교 선교 역사 (-1800)
I. 역사적 상황: 모더니즘 A. 르네상스 1. 반종교적 형태: 이탈리아인들 a. 복고주의: 인간중심의 사상, 학문의 부흥, 그리스어연구, 고대 라틴어 연구, 고대 문장이 대대적으로 출판 b. 비도덕적 형태: 중세 금욕주의에 대한 반발 c. 문화 예술 번성: 15세기 중반이후 대부분의 교황이 르네상스의 후원자, 로마에 바티칸 건축, 고대 그리스 라틴 작품 연구로 이단 정신 부활 2. 종교적 형태: 북유럽 a. 신약성경과 히브리어에 대한 관심 고조 b. 교부들의 글이 인쇄 출판 c. 카톨릭의 관습과 종교 행위가 초대 교회와 않이 차이남을 알수 있다. B. 종교 개혁 1. 이단의 등장 a. 알비주아파: 마니교 사상을 수용-카타리파/이원론자/유형적인 것 거부하여 교회 거부 b. 왈도파: 부유한 리용의 상인인 피터 왈도를 추종한 사람들로서 신약성경만 인정, 신약을 체험으로 터득, 연옥과 미사 거부, 남녀 구별없이 평신도로 설교했다. c. 존 위클리프: 1320년 영국 태생,옥스포드 교수, 1376년부터 성직자 비판, 급진적인 개혁 촉구, 교회보다 성경이 믿음의 인도자, 성경을 영어로 번역.청빈 강조, 1384년 사망/롤라드파-이단으로 정죄되어 화형으로 박해받음 d. 존 후스:보헤미아 출신, 위클리프의 영향받음, 1369년 태생, 성직자 훈련 받고 프라하 대학의 총장, 성직자 타락 비판, 신자와 신도를 구분, 면죄부 비판, 1415년 파면되고 이단으로 정죄되고 화형됨, 보헤미아에 전쟁으로 황폐 2. 이단을 저지하려고 도미닉파와 프란시스파가 결성 3. 이단 박해: 종교 재판소, 도미닉이 주도적, 남프랑스에 전쟁을 일으켜 이단 박멸, 왈도파는 알프스 높은 골짜기로 피신하여 개신교로 전향 4. 루터의 종교개혁: 성직자의 영향력을 약화시킴 5. 종교 개혁의 기본 요소들 a. 신약 성경에 기록된 사도시대로 돌아가서 교회의 참된 정신과 실행 결정 b. 만민 제사장: 믿음으로 구원얻는다. 사제불필요 c. 교회를 공식적인 계층 조직으로 보지 않고 신자들의 공동체로 생각 d. 성경을 믿음과 도덕에 대한 최종적인 권위로 여김 6. 종교개혁은 교회 개혁이다.-참종교/ 국가 교회/ 보이지 않는 교회 추구
C. 동인도 회사 http://batavia.UGent.be/ http://batavia.rug.ac.be/B@taviaE.htm 1.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erenigde Oost-Indishe Compagnie 1568년 유트레히트 연합(the Seven United Province of the Free Netherlands)으로 스페인의 필립 2세로부터 독립- 1585년 필립 2세가 무역항인 리스본을 폐항
**네덜란드 독립: http://www.terra.es/personal7/jqvaraderey/155648lc.gif 1596년부터 7년간 항로 개척-14번 60척 1602년 정부 주도로 동인도 회사 설립/ 무역 독점, 독자적인 외교권으로 네덜란드 의회를 대신할 수 있었다. 군기지와 군대를 보유할 수 있었다. 1605년 몰루까 섬과 암보이나에서 포루투칼을 쫓아 버렸다. 1606년 무역 센터의 필요성으로 말라까를 점령하려했으나 실패하여 1619년에 바타비아 현 자카르타를 점령 1641년에 말라까 점령(*하멜 표류기 1653-1666) 1799년 12월 31일 파산 a. 네덜란드의 관심- 장사지 종교 아니다, 본국이지 외국이 아니다, 교회는 국가 아래존재, 전도도 국가의 유익을 위해 b. 선교사의 필요성-직원의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관리, 직원과 결혼한 원주민 관리. c. 문제는 성경교사로 와서 회사직원으로 근무하고 숫자도 적었다(1669-6명, 1680년 8명, 1725년 27명 1749년 12명), 체류시간도 짧았다. 선교가 회사의 할일 d. 선교 방법-학교 설립 2. 영국 동인도 회사(1600-1858년) 1600년 12월 30일 시작 a. 성공 요인: 식민지 확보가 아니라 무역이득, 주식회사, 금본위제, 행정조직 b. 1687년 까지는 영리목적으로 인도네시아 향료 무역-네덜란드에게 패배 c. 1687년 이후 전략적인 목적: 프랑스와 경쟁/ 1786년 페낭 확보, 1795년 말라까 확보, 1819년 싱카폴, 1824년 영홀 조약, 1826년 얀다보 조약, 1852년 앗샴, 마니풀 확보 d. 정책: 1874년 전에는 영리목적으로 평화적인 접근-현지 정치, 문화, 종교에 무간섭 정책// 이후 정치에 간섭 e. 선교: 회사적으로 선교사 지원 안함, 영국 국교회와 분리하지않음, 회사의 한 기관으로 있게 함(the EIC- funded colonial chaplaincy), 기관 목사는 2년간의 계약으로 월급 받는다. 현지인 선교 안함, 현지인과 접촉 적다. 최초의 교회 1819년 페낭의 the church of st. George the Martyr. 교회는 정부 소속(English officialdom), 현지인 선교방법- 학교 세움 http://www.ukans.edu/kansas/medieval/108/lectures/franks_rise.html
D. 신대륙으로 이주와 1차 대각성 운동(1726-1760) 청교도 분리파 홀랜드로 이주했으나 적응못하고 1620년에 메리플라워호를 타고 미국 플리머스에 도착 E. 계몽주의: 17세기 등장하여 18세기 절정● Voltaire, one of many Deists, further develops the rationalism of the "Enlightenment," attacking Christianity and finding in man the center of all things. The French Revolution of 1789 overthrows the traditions of the Church and briefly establishes the goddess of Reason 1. 세계관:이성의 으뜸,주체와 객체의 분리, 신앙을 의지적 인과 법칙으로 대체, 진보주의, 사실과 가치의 긴장, 만사해결 신념, 해방적 자율 사상 2. 과학적인 베이컨의 경험적 인식론과 데카르트의 합리론
II. 교회의 상황 http://www.lib.utexas.edu/maps/historical/shepherd/europe_rel_situation_1560.jpg http://www.lib.utexas.edu/maps/historical/shepherd/central_europe_relig_1923.jpg http://library.sebts.edu/sprescott/Church%20History_files/Protestant%20Scholasticism%20and%20Pietism.htm
III. 선교적 노력 1800년 기독교인 인구의 23.1%(백인 86.5%, 비백인 13.5%), 복음화율 27.3%, 성경번역 67개언어 http://www.wmcarey.edu/carey/missiology/miss.htm A. 16, 17세기 개혁자들과 선교 M.Brecht Pietist Mission 1 http://www.missioncast.net/m-highlight/asiamission/asiamission.htm 1. 선교의 중요성은 성경을 통해서 알고 신자의 의무로 알았으나 조직적이며 구체적이며 적극적이지 못했다. a. 참된 교회의 표시에 대한 이해: 신학적으로 보편적인 선교 지상 명령은 12사도에게만 지정되고 이후 중단된 것이다. 복음은 이미 모든 세상에 알려졌다. 받아들이는 것은 개인에게 달려있고 세속 통치자가 이일에 관여할 수 있다. 이방인 선교는 교회의 교지에 속하지 않고 사도에게 주어진 것이다. b. 유럽의 전쟁과 개신교 내의분열: 유럽이 선교지 c. 17세기의 개신교 스콜라주의(Protestant Scholasticism)로 영적 쇠퇴 d. 수도원제도의 배격으로 인해 대체할 만한 새로운 선교 구조의 상실 2. 칼빈의 새로운 선교 조직 a. 제네바 아카데미 b. 유럽에서 온 900명의 학생들이 흩어져서 개신교 사역자가 되엇다 c. 1555년 프랑스 위그노 성도들과 연계하여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로 만의 박해 받은 개신교도을 위해 식민지 건설 위해4명의 선교사 파송 일단의 위그노 교도파송 3. 급진적인 개혁자(재침례파)들의 선교이해 a. 지상 명령을 모든 신자의 의무로 간주 b. 교회를 순례자로 묘사하고 모든 신자들은 선교사이고 순례자이며 순교자이다 c. 박해로 인해 유럽과 러시아 아메리카로 흩어졌다 d. 각자는 영적인 선수였다. 4.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 자신의 식민지에 기독교 확장 a. 1622년 동인도회사의 위탁으로 라이든에 선교학교인 인도 신학교가 설립되어 동인도 식민 지역 선교를 위해 목사들과 선교사들을 훈련: 개개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재산들을 나눠주도록 부름을 받았는데 특히 무역하는 사람에게 많은 부름이 있다. b. 이방종교와 변증하도록 훈련됨-지역학, 신학, 변증학 c. 12년 간 지속, 12명 선교사 파송, 5년후 귀국 d. 무역과 선교의 밀접현상, 선교의 과제를 종말론과 긍정적으로 연결 5. 선교전략 a. 교회 갱신을 통한 선교 b. 지도자 양성을 통한 교육 선교 c. 교회 중심의 선교: 교회 개척 6. 선교사: 져스티니안 폰 벨츠 남작 (Baron Justinian von Weltz) 처음으로 선교를 시도한 루터교 선교사로 1664년 경 교회의 선교적 책임을 외친 인물이다. 세 종류의 소책자를 발간하여 교회의 선교적 책임이 어떠한 것인지를 주장하였고 그러한 사업수행을 위한 선교회나 기구를 조성할 것과, 선교사를 훈련하는 학교를 개설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시대적으로 순조롭지 못했고 교리적으로 정통을 주장하는 당시 교회들은 영적생명과 선교의 비젼이 많이 결여되어 있었고 반대와 조롱을 받았다. 그는 화란으로 가 남작의 지위도 버리고 “이방인의 사도”라는 명칭을 받고 화란 기아나(수리남)까지 항해하였으나 거기서 수확을 얻기도 전에 죽고 말았다
참고자료 종교개혁과 선교 개혁자들 선교에 무관심했다(?) 이상규 교수 http://www.missiontimes.co.kr/ 개혁자들이 선교에 무관심했던 점에 대한 허버트 케인의 변호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도 [세계선교역사](A Concise History of the Christian World Mission)에서 프로테스탄트가 선교활동을 하지 못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은 4가지 이유로 설명했다. 첫째, 가장 중요한 요소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 때문이었다. 그들은 지상명령이 오직 12사도에게만 주어졌다고 생각하여 사도들이 그 당시에 알려진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완수했다고 가르쳤다. 또 사도직은 직접적인 소명을 받은 것으로 특수한 기능과 기적을 행하는 힘 등은 소멸되었기 때문에 후세대의 교회는 선교사들을 세상 끝까지 파견할 권위도 책임도 없다고 가르쳤다. 둘째, 16세기와 17세기의 프로테스탄트교회들은 숫적으로 로마교에 크게 뒤졌으며, 로마교와의 대결 때문에 선교에 대한 여력이 없었다. 셋째, 아시아나 아프리카 혹은 신대륙 등 선교지로부터 프로테스탄트가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넷째, 프로테스탄트교회 안에는 카토릭 신앙을 전파하는데 현저한 기여를 했던 종교단(수도원 등과 같은 교회조직)이 없었다는 점을 들었다.
긍정적인 견해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개혁자들도 선교에 관심을 가졌다는 주장이 있다. 판덴 베르크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예수의 사랑에 못이겨」(Constrained by Jesus' Love)에서, 루이는 그의「청교도 전통에서의 선교신학」(The Theology of Missions in the Puritan Tradition)에서 개혁자들과 개혁자들의 후예들의 선교에 대한 관심과 선교활동이 지대했음을 기술했다. 심지어 독일 하이델베르그의 선교학교수인 켄시헨(D. H. W. Gensichen)은 “개혁자들을 언급하지 않고는 선교역사를 논할 수 없고, 또 개혁자들의 선교신학을 언급하지 않고는 종교개혁의 역사를 기술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트리니티 신학교 교수인 몽고메리는 루터의 사상은 18, 19세기에 와서 해석자들에 의해 큰 수난을 당했으며 그의 사상은 오해되었다고 루터를 변호하였다. 그는 루터교 신학자인 베르너 엘러트의 말을 인용하여 “사도들이 온 세상에 이미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에 루터가 현재 교회는 전도의 사명이 없다고 말한 것으로 주장하는 현대 신학자들의 사상은 루터와 멜랑히톤에게서 찾아 볼 수 없다고 했다. 또 그는 “바르넥이 지적한 바와 같이 루터는 오늘 우리가 말하는 의미의 선교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선교회를 조직하여 선교사를 보내거나, 선교학의 전문가로 자처하기 보다는 오히려 교회개혁에 몰두했다고 전제하고 루터의 개혁운동 자체가 위대한 선교행위(missionstat)이며, 루터의 사상은 선교사상(missiongedanke)이라고 변호하였다. 이처럼 루터를 변호하는 이들은 루터가 주장한 평신도의 성경연구, 신자의 만인제사장의 원리는 선교를 가능케 했다고 주장한다. 개혁자들도 선교에 관심이 있었다고 주장한 학자들은 루터가 콱유럽과 그 외의 지역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또 선교에 대한 칼빈의 입장과 관련하여 스텐포드 리드(Stanford Reid)는 그의 논문에서 칼빈은 선교에 관심이 많았으며 브라질에 선교사를 파송한 사실을 말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칼빈이 제네바에서 프랑스에 사역자를 파송한 것은 곧 선교였다고 주장하고, 제네바는 선교의 중심지라고 주장한다.
비록 개혁자들이 선교에 관심이 있었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개혁자들의 선교이상은 사실은 만족스럽지는 못했고 이들의 주장은 여전히 빈약하다. 그 이유는 보통 4가지로 설명되고 있는데. 첫째는 개혁자들은 소수였고 개혁자들 간의 신학적 논쟁때문에 다른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며, 둘째는 1648년 30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프로테스탄트는 생존을 위한 투쟁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셋째는 외국의 이교도나 이교국 사람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기 때문이다. 넷째 천주교 국의 나라들이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선교관 그들은 왜 해외선교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는가? 이상규/ 고신대 교수, 역사신학
개혁자들에게도 선교사상이 있었다는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개혁자들이 오늘과 같은 선교사 파송에는 무관심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왜 해외선교나 선교사 파송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는가? 개혁자들은 컬럼부스(1451-1506)나 바스코 다 가마 이후에 살았다. 따라서 비 구라파 세계와 이민족과 이교의 현존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로마 카토릭의 선교사 파송 기구와 그들의 노력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 경건주의가 대두될 때까지 선교사 파송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점에 대해 일반적으로 개혁자들은 그런 상황에 우선 순위를 둘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왔다. 다시 말하면 16세기 종교개혁에는 그 시대의 과제(agenda)가 있었는데, 그것이 교회개혁이었고, 교회 쇄신이 가장 우선하는 과제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또 외적인 상황으로 볼 때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등 천주교 국가들이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외로의 진출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고, 따라서 이방세계와의 접촉의 기회가 없었다고 설명한다. 이런 해명은 타당성과 호소력을 지니지만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서 개혁자들의 선교사상에서 헤아리는 것이 보다 합리적일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그 시대의 과제가 있었고, 그 시대의 교회 개혁이 최우선적인 사명이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고, 개혁자들에게 오늘 우리 시대의 모든 문제에 대한 이해와 식견을 요청하는 백과사전적인 요구는 지나친 욕심이라는 점을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자들에게 있어서 선교가 어떻게 이해되었던가 하는 점을 외적 상황, 곧 환경적 요인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신학적 측면에서 헤아리는 것이 옳을 것이다.
루터(Martin Luter)
사실 루터는 여러 곳에서 유럽과 다른 지역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할 필요성에 대하여 강조한 바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선교상, 혹은 선교실천으로 실행되지 못한 것은 그의 독일을 중심으로 전개된 그의 개혁운동이 영방교회(Landes Kirchen)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그의 개혁운동을 통해 이루어진 국가로부터 독립된 교회는 개인의 자발적인 개종을 강조하고,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루터교회는 특히 농민전쟁을 경험한 1526년을 경과하면서 영방교회적(territorial church)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특히 1529년 1차 스파이에르 제국의회를 통해 선언되었던 “그 지역의 종교는 그 지역 통치자의 종교로”(cujus regio, ejus religio)라는 통치자에 의한 지역별 종교선택권은 루터교적 전통이 되었는데,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강화회의(The Peace of Augsbury)를 통해 이 제도가 굳어졌다. 그래서 해 지역의 사람들은 그 지역 통치자의 종교를 따른다는 방식의 교회 구조는 선교에 대한 관심을 구체화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이런 루터파의 국가교회적 제도는 루터의 국가관에 기초하고 있는데, 그의 국가관은 이미 1515년에서 1546년 사이의 루터의「로마서 강의」에 암시된 두 왕국설에 기초하고 있다. 루터교신학자 칼 브라텐(Carl Brateen)은 개신교의 선교사상의 결여를 비판하면서, 특히 루터 자신도 선교명령을 사도들에게만 국한된 명령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선교부제를 초래하였고, 그의 종말론 사상은 기독교국가 밖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을 억제시켰다고 비판했다. 또 루터교 신학자 엘러트(Werner Elert)는 그의「루터교의 구조」(The Structure of Lutheranism)에서 루터에는 선교활동만이 아니라 선교사상 조차도 없다고 했는데, 이런 비판과는 달리 루터가 선교에 무관심 할 수밖에 없었던 근원적인 이유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루터와 루터파의 교회관, 곧 영방교회적 성격때문이었다.
마틴 부처(Martin Bucer)
부서의 글에서 선교와 관계된 대표적인 언급은 에스겔 34장 16절에 대한 주석이다. 그는 이 글에서 “나는 구원받지 못한 이들을 찾고, 길 잃은 이들을 돌아 오도록 할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고, 복음을 이방 세계에까지 전파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피택된 자를 알지라도 우리는 모든 피조물을 영생으로 인도할 책임을 부여받고있다”고 했다. 부서는 어거스틴과 마찬가지로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로 보았고,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지역적 개념보다는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통치하는 영역이라고 이해했다. 비록 그가 이방 세계에 대한 복음 전파의 사명을 교회의 책무로 강조했으나 그도 그 시대의 아들이었다. 개신교신학의 확립은 종교개혁의 우선적인 과제였고, 스페인과 포루투갈이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어 해외진출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무엇보다도 개신교는 카톨릭의 제도를 부인하면서 선교활동에 매우 효과적인 제도였던 수도원제도까지 거부했으므로 구체적인 선교실천은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시대적 배경 외에도 부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주권적 통치의 개념으로 보아 복음전파를 통해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장소성의 문제로 강조하지 못했다. 이런 점들이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강조하면서도 구체적인 선교실천이 미약했던 신학적 이유였다고 볼 수 있다.
칼빈
칼빈과 선교에 관한 문서는 방대하다. 몇 가지 상이한 견해가 있지만, 칼빈은 선교에 대한 관심이나 실천이 미약했다는 부정적 견해와 선교에 대해서도 상당한 이해와 관심과 실천이 있었고, 그의 선교사상이 후대의 선교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긍정적인 견해로 대별될 수 있다. 선교에 대한 칼빈의 견해나 사상과 관련하여 지나치게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그에게 선교사상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종교개혁 운동 자체가 선교라고 말하거나,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보낸 3년 간의 기간이 선교사역이었다고 말하는 등 선교라는 시각(始覺)에서 그의 생애를 보는 것은 편향된 선교 시가(視覺)이다. 기독교강요, 성경주석을 비롯한 칼빈이 남긴 방대한 문서 속에서 선교와 관련된 언급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하고 해서 그에게는 선교사상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도 정당하지 못하다. 필립 휴즈(Philip E. Hughes)나 칼 스티븐슨(Carl D. Stevens)이 주장하는 바처럼 칼빈의 제네바교회에서는 4명의 성직자와 프랑스 위그노 일단을 리오 데 자네이로 보내 박해 받는 개신교도들을 위해 영지를 개척한 일이 있는데, 이것은 선교사를 파송한 것이며, 제네바아카데미에서 수학한 1백여 명이 넘는 이들을 프랑스에 보내 개혁교회운동을 전개한 것도 선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성경주석과 설교에서 복음증거와 전파를 수없이 언급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존 칼빈, 그는 선교의 영웅인가, 선교의 실패자인가”를 쓴 데이비드 칼호은(David Calhoun)의 평가는 공정하다. “칼빈은 해외선교를 강력하게 추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신학은 선교적이었다. 즉 그의 신학에는 신자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통치아래 포함시키고,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 끝까지 전파하고자 하는 내적 역동성을 포함한다” 칼빈이 오늘 우리가 말하는 선교운동의 기수였다든가 그의 제네바가 선교의 센터였다는 주장은 일면적 진실에도 불구하고 타당한 주장으로 보기는 미흡하다. 사실 그곳은 일차적으로 개혁의 요람이었고, 유럽의 개혁신학의 산실이었다. 또 칼빈이 선교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주장도 옳지 않다. 그는 클로스터(Fred H. Klooster)교수가 적절히 지적한 바와 같이 복음 전파나 해외선교에도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호주의 학자인 이언 머리(Ian Murry)는 그의「청교도의 소망」(The Puritan Hope)에서 칼빈의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 설교(p. 746)를 인용하면서 칼빈은 복음전파와 선교의 이상을 선명하게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칼빈 자신은 구원론적 기반에서 복음이 세계에 전파되고, 땅끝까지 구원이 이르러야 한다는 사상이 분명했다. 칼빈 자신은 선교의 이상을 강조하고 이를 실행하려고 했다할지라도 그의 하나님의 주권사상, 교회론, 혹은 예정론이 16세기와 그 이후 칼빈주의 세계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다시 말하면 선교에 대한 칼빈의 견해를 논함에 있어서 중요한 사실은 칼빈의 신학이 선교사상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비단 칼빈주의자들의 경우만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론에 대한 오해가 선교운동을 저해하는 요인이었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한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인간의 책임을 간과하는 예정론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이교도들을 회심시키고자 하신다면 사람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지 않으시고도 구원하실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이 이교도들을 구원하시려고 하지 않으신다면 사람의 관여는 어리석고도 무의미한 수고가 되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18세기말 윌리엄 케리 당시의 칼빈주의적인 침례교 지도자들의 생각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칼빈의 “우리가 배운대로 그리스도의 나라는 인간의 노력으로 발전되거나 유지되는 것이 아니며, 다만 하나님 혼자만의 일이다”는 오해의 소재였다. 이와 동시에 16세기에 편만했던 종말론, 즉 곧 종말이 임한다는 소위 묵시주의(apocalypticism) 또한 선교의 구체적인 실천을 방해했던 그 시대의 사조였다고 할 수 있다.
낙스
낙스에게 있어서 선교사상을 헤아릴 근거는 다른 개혁자들에 비해 빈약하다. 그에게 있어서도 교회 개혁은 최우선적인 과제였고, 복음 진리의 올바른 확립과 증거, 그 자체가 사실 그 시대의 선교였다. 낙스가 남긴 문서는 루터나 칼빈 등에 비하면 소량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이방세계에 대한 복음 증거의 책임을 강조한 문서가 없지는 않는데, 그 대표적인 문서로 그를 포함한 6명의 존(six Johns)이 작성한 1560년의 스코틀랜드신앙고백서(Scots Confession)를 든다. 4일만에 작성된 25개조로 구성된 이 신앙고백서 표지에서 “이 하나님 나라의 복된 소식은 모든 족속에게 증거되기 위해 전 세계로 퍼져나가야 할 것이고, 그리고는 종말이 올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스코틀랜드신앙고백서는 1647년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는 달리 첫 조항에서 ‘하나님’을 다루고 있어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어 칼빈주의적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같이 선교문제를 별개항으로 치급하지는 않고 있다. 복음 증거와 전파에 대한 책임은 강조하면서도 구체적인 선교행위는 미약했다. 결국 낙스 또한 그 시대의 사조를 극복하지 못했던 것은 그 시대적 한계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평가
비록 개혁자들이 선교에 관심이 있었고, 선교사상을 보여주고 있으나 그 실천은 미약했다. 그것은 그들의 신학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그 시대적 한계, 곧 환경적 상황도 적지 않느 영향을 주었는데, 그것은 보통 4가지로 설명되고 있다. 첫째, 개혁자들은 소수였고 개혁자들 간의 신학적 논쟁 때문에 다른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며, 둘째, 1648년 30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프로테스탄트는 생존을 위한 투쟁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셋째, 외국의 이교도나 이교국 사람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기 때문이다. 넷째, 천주교 국의 나라들이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B. 청교도(Puritanism) 1. 우상적인 의식에서 영국 국교회를 정화한다. 2. 신대륙으로 이주하여 1차 대각성 운동을 이끌었다. 3. 조나단 에드워드(1703-1758)과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1718-1747) 존 엘리어트(John Eliot 미국 인디언 선교의 아버지)의 인디안 선교 4. 선교 전략 a. 교리 교육적인 선교: 인디안에게 성경을 체계있게 조직적으로 가르치기 위해 교리나 성경 공부 학습서를 만들어 인디언에 가르친다. 상황화//설교가 주요수단이고 교육이 이를 보완했다. 하나님의 진노와 지옥의 고통을 강조하는 교리적인 설교/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한 것이 더 효과적-데이비드 브레이너드 b. 선교 기지 중심의 선교:인디언들을 이교적 삶의 터전에서 불러내어 선교사들이 설정한 일정한 장소에 거주하여 교회, 학교, 의료시설을 지원한다. 선교 소도시-이웃과 단절, 접촉점 상실, 이방인 취급, 신자 중심의 폐쇄적 공동체/기독교화와 문명화 동시 추진/ “기도하는 인디언”(Praying Indians) / 기숙사 제도를 학교에 도입: 젊은이 들이 옛 생활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새로운 환경에서 양육되게함 c. 교회 연합적 선교: 프랑케와 조나단 에드워드와 서신교류, 벡스터와 엘리어트 연관으로 인디언 선교 d. 개종자를 교회 안으로 모아들이는것/초기 2년간의 훈련기간요, 1730년대에는 바로 교회 시작 e. 원주민 교사와 목사를 양성하여 훈련/ 현지 일군들만이 원주민들을 효과적으로 복음화하고 목양적으로 돌볼수 있다. 1700년대에 메사추세츠주에서 37명의 인디언 설교가들이 일했다. 5. 선교 신학:타문화 선교사역에 대한 선교 신학적 작업을 교회론적으로 접근, 죄인 구원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예비적 역사로서의 일반 은총의 선재/ 일반 은총을 접촉점으로, 부흥 신학 사상-개혁 주의적 후천년설로 세계적인 교회 부흥과 선교를 통한 주의 재림의 날을 고대 a. 선교 목적: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합으로써 인디언들이 개종하여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아들이고, 교회에 모여 엄격한 규율하에서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인디언들을 청교도와 같이 되게하는 것, 영국식으로 개화시키는것 6. 선교사: 존 엘리어트 a. 인디언 교리문답(Indian Catechism): 미국 인디언의 언어로 출판된 최초의 책. 현지 방언과 영어가 함께 사용된 것이다. b. 이중 언어로 교과서 출판, 읽기, 쓰기, 간단한 수학을 성경공부와 신앙교육과 더불어 가르쳤다. 농사법과 집에서 일할수 있는 기술도 소개하여 문명화된 정착생활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c. 매사추세츠 성경 The massachusetts Bible과 문헌집들 7. 결과와 영향력 a. 계속적인 백인들의 압력으로 기독교 인디언 마을과 목사 교사 양육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b. 엘리옷과 브레이너드의 생애가 수많은 선교 지망생들을 고무시켰다. c. 최초로 해외선교를 전략적 프로그램을 가지고 시작-설교를 통한 전도, 교회의 조직. 기도교적 양육을 위한 교육, 유럽 문명화, 성경 번역, 기독교 문서출판, 현지 언어의 사용, 원주민 목사와 교사의 양성과 훈련
참고자료 David Brainerd Text: Journal and writings of David Brainerd, taken from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Overview: David Brainerd (1718-1747) was missionary to native American peoples of New York, New Jersey and Pennsylvania. His journals were widely read and highly influential. In HTML format. Text courtesy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Keywords: Devoted, humble, heart for God and His work. Read now: The Life and Diary of David Brainerd: With Notes and Reflections. | Mr. Brainerd's Journal, In Two Parts. | Appendices to Mr. Brainerd's Journal. | Mr. Brainerd's Remains, Consisting of Letters and Other Papers .
http://www.wholesomewords.org/biography/biorpbrainerd.html
짐 엘리어트 http://www.intouch.org/myintouch/mighty/portraits/index_77957.html http://www.wheaton.edu/bgc/archives/GUIDES/277.htm
http://cafe21.daum.net/_c21_/home?grpid=1aVt 서원모의 17세기 인디안선교는 실패였다는 논지의 글 서원모의 고대교회사자료실-전체 교회사 30번의 글
C. 독일 경건주의(Pietism) 선교: 제2의 종교개혁 M.Brecht Pietist Mission 2 http://www.missioncast.net/m-highlight/asiamission/asiamission.htm http://lord.kehc.org/articles/pitist.htm http://www.xenos.org/essays/pietism.htm http://sgti.kehc.org/data/person/mgkim/02.htm http://sgti.kehc.org/data/person/mgkim/07.htm 1. 배경: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루터교가 신앙을 올바른 교리에 대한 신념으로 해석) 루터교회 자체내의 종교적 상황에 대한 반동, 죽은 정통주의 라고 생각한 신학 방법과 교리적 업격성에 대한 반동 2. 특색: 하나님에 대한 내적 경험을 실제적인 윤리 생활에 나타나게 하는 것을 주요 가르침으로 삼는다. 신앙적인 경험과 구원의 확신, 경건주의 신학은 '전도의 열정 없는 한 설교의 비젼이 있을 수 없고, 개인적 경건 생활이 없는 한 전도의 열정이 있을 수 없으며, 진정한 회심 체험이 없는 한 개인적 경건 생활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a. 신앙을 신뢰로 본다 b. 평신도의 역할 강조 c. 개인 윤리에 초점 d. 성경 중심 e. 선교의 비젼 3. 역사: 우연에 의해 진행 a. 스페너(spener) 1636-1705 pia desideria b. 스페너는 베를린에 할레(Halle) 대학 설립 1694년 http://www.xenos.org/essays/spenf.htm http://sgti.kehc.org/data/person/mgkim/01.htm http://sgti.kehc.org/data/person/mgkim/06.htm c. 프랑케(Francke, August Hermann 1663 뤼벡에서 태어남 1727년 사망): 신앙은 경험으로 나타나야 하고 선행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당시의 실천적 신학자, 라이프찌히에서 공부시 스페너의 영향을 많이 받고 1687년에 설교준비중 놀라운 하나님체험하고 일생동안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가짐, 졸업후 대학내에서 경건한 자들의 모임을 주관하여 전 도시에 영향을 준다. 결과로 정부의 핍박으로 도시를 떠나 1692년 할레에 새로 생긴 대학의 동양어교수(헬라어와 히브리어)로 취임하고 목회도 시작하면서 독일경건주의의 지도자로 부상하고 개신교정통주의와 대결하면서 할레의 대학은 경건주의운동의 중심이된다. 1695년에 고아원 설립, 여러 자선 단체 설립, 사업체 운영하여 기금마련, 귀족 자녀를 위한 특수 학교 설립, 중국을 사모하는 철학자 라이프니찌에게서 선교의 도전을 받음(선교가 모든 교파를 하나로 묶고 중국철학이 롬 2:15절에 해당된다고 믿음, 고아원이 온세상이 주를 아는 지식으로 가득차게하는 일을 하는 선교적 차원이 있음을 말함). 육적인 일과 영적인 일은 분리되지 않는다. 선교사들의 영적 관리. I d. 진젠도르프(Zinzendorf)백작에게 영향-10살에 귀족학교 입학-16살 까지 공부 e. 뷔르텐 버그의 독일 루터란에게 영향: 지도자 요한 알브레히트 벵겔(Bengel 1687-1752)-핀란드와 스웨덴에 영향줌 f. 여러 종파와 미국에 영향줌 g. Danish Halle Mission(개신교최초의 선교적 사역, 덴마크 왕실의 지원아래 사역): 덴마크는 덴마크 동인도 회사(Danish East India Company, Danske ostindiske kompagni), 1616년에 시작되고 Dansborg 요새를 세우고 1619년 인디아의 남동해안 Tranquebar에 통상기지를 세웠다. 왕 Frederick IV (1671-1730)은 동인도회사의 사목이 현지 인디안을 관리할수 없다는 보고를 듣고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한다. 1705년 덴마크에서 후보생없자 독일에서 선교사 후보생 찾음, 1706 선교사 훈련원을 세우고, 덴마크 식민지인 인도의 트란퀘바르(Tranquebar)에 치겐발크(B. Ziegenbalg 위장병 15년사역)와 프루차우(Henry Plutschau 5년 사역후 다른 사람과 교대) 파송, 덴마크의 식민정부와 갈등. 선교사간 갈등. 선교사역은 1845년 덴마크가 자신의 식민지를 영국에 이양할 때 까지 140년간 지속되었다. 대다수의 선교사는 할레 대학출신이었다. 1707년에 35명에서 1719년에는 428명에 달하였다. 대다수가 신학도. 선교부에는 타밀어 인쇄기가 있어서 성경을 번역 출판했고 여러 자료 또한 출판했다. 식민지적인 선교라 할수없다. 17세기 선교는 교회의 공식적 선교라기보다 개인들의 선교였다. 1732년에 대다수가 타밀인인 1,478명의 신자확보.
4. 선교사 a. 바돌로매 치겐발크(Batholomew Ziegenbalg 1683-1719): 스페너에 의해 부름받음, 하나님은 그의 사역자를 기적적으로 인도하신다. 선교사역을 영적인 집중력으로 수행, 예배와 설교와 교리문답 공부, 교육, 번역사업, 현지언어로 된 문서출팜 등을 강조/ 그는 복음화와 교회 성장을 위해서는 힌두철학과 종교를 연구하여 그 지식을 얻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고 그 일에 정열을 불태웠다. 선교사업에 의료사업을 포함하고 있었다. 예배시에 타밀 서정시를 이용한 최초의 사람들이었다(카밀라주지역). 통전적 선교관. 언어에 재능가짐. 덴마크 식민지 넘어서 다른 식민지에서도 선교, 브라만 계급에게도 선교. 36간 선교. http://justus.anglican.org/resources/bio/107.html http://www.gloryofhiscross.org/apostle10.htm b. 크리스챤 프레데릭 슈발츠(Christian Frederick Schwartz): 영국 지배하의 남인도 선교, 현지 문화의 수용과 적응, 선교사는 침체와 불만을 가지지 말라 http://www.wmcarey.edu/carey/schwartz/schwartz.htm 5. 중심되는 신학요소 a. 교회 개혁에의 관심 b. 교회 개혁의 수단으로서 성경에 대한 강조 c. 생활의 개혁: 성화와 경건에 대한 강조 d. 경험적 요소: 중생에 대한 강조, 회개 회심 중생 강조, 성령론 강조 f. 세상에 대한 희망 6. 영향: a. 개신교에 선교의 비젼이 되살아남. b. 지겐발크의 소식을 프랑케가 일반에 발표하고 프랑케의 친구 울스페르그에 의해 책으로(동인도의 이상야릇한 이야기) 나와서 영국에 번역되고 웨슬리의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이 책으로 선교를 가르침, 선교지 소식지가 계속 발간되어 독일일대에 선교를 알림. 선교와 봉사를 위해 후원금이 필요함을 알림. 후원자들의 입장을 고려한 편집. 울스페르그는 지겐발크를 통해서 선교정보를 알고 독일에 선교를 알린 신학자이다. c. 인도에서의 사역: 최초의 개신교 사역이면서 식민정부와 일정한 거리를 두어서 정치와 관련시키지 않았다. 3년 계약으로 시작하며 연장시킴. 성경번역(지겐발크-신약성경을 번역함. 구약은 사사기까지 하며 선교사역의 기초로 간주. 사역 50년후 성경완역), 루터교입장을 견지하며 소요리문답 번역, 1715년 타밀어로 찬송, 매일 기도사역행함, 부명한 개종을 위한 선교실시. 1720년 교회성도 250명에 달함. d. 구체적인 선교학과 선교사 모델을 제시 e. 선교의 노래를 유행시킴 7. 쇠퇴: D. 모라비안 선교 운동 : 진젠돌프+ 보헤미아 신앙형제공동체 M. Brecht의 Pietist Mission 3 http://www.missioncast.net/m-highlight/asiamission/asiamission.htm http://www.everydaycounselor.com/archives/sh/shistory.htm http://www.npmc.org/hutton/index.htm 1. 진젠도르프 1700-http://www.gospelcom.net/chi/HERITAGF/Issuenos/chl024.shtml http://www.zinzendorf.com/ http://www.csichurch.com/article/william_carey.htm a. 경건 주의의 영향 : 스페너와 프랑케과 친분관게에 있던 할머니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그리스도께 깊은 헌신, 할레에서 공부하며 동인도에서의 선교사역에 대한 것을 알게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깊은 감명과 교회연합에 이상가짐. 프랑케처럼 하나님의 사업의 메니저가 되길 바람, 비텐베르크에서 법학배움. b. 1721년 고향으로 드레스덴: 자신의 영지인 베르텔스도르프로 돌아와서 경건한 신앙공동체를 이루려고하였으나 되지못한 상황에서 신앙의 자유를 위해 피난온 보헤미아의 후스 추종자를 정착하게 했다(피난민 형제 공동체 헤른 후트 600명). 그리고 정통주의에서 이탈한 경건주의자도 합류-제도적 교회보다 신앙 공동체로서의 소수 그룹이 신앙 성장과 영적 훈련에 이상적이라 생각해서 교회 안의 교회 운동일으킴, 정부의 박해로 피난하며 순례하는 공동체로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범세계적인 교회로 생각하여 전 세계에 복음을 가지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공동체.
친첸도르프 Nikolaus Ludwig, Graf von Zinzendorf http://zaigen.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21c0228a&ref=5#ID5 1700 독일 작센 드레스덴~1760. 5. 9 헤른후트. 독일 경건주의 운동을 일으킨 종교·사회 개혁자. 모라비아 교회(보헤미아 형제단)의 지도자로서 세계 개신교 에큐메니컬 운동을 일으키려고 노력했다. 오스트리아 귀족가문 출신의 작센 주 행정관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 외할머니 헨리에테 폰 게르스도르프로부터 자상한 교육을 받았다. 외할머니는 독실한 경건주의자였으며, 중요한 경건주의 신학자 필리프 슈페너와 가까운 친구였다. 이러한 종교교육은 후에 할레에 있는 '프랑케 파이다고기움'에 들어감으로써 더욱 심화되었으며(1710~16), 졸업한 뒤에는 신학을 공부하라는 가족의 뜻을 떨치고 비텐베르크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정식 교육기간은 관습대로 '대여행'으로 끝났는데, 이 여행에서 유명한 칼뱅주의자들과 로마 가톨릭 교회 인물들을 많이 사귀게 되었다. 1721년 드레스덴으로 돌아와 작센 법원에서 하급 직책을 맡았고, 1년 뒤에는 로이스의 에르드무테 도로테아와 혼인했는데, 그녀는 남편의 경건주의 신앙과 찬송가 작곡에 대한 열정에 동조했다. 관직 생활은 오래 하지 않았고, 할머니로부터 베르텔스도르프의 영지 일부를 유산으로 물려받은 뒤부터는 그 영지의 소작인 문제, 특히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난민집단 문제에 몰입하게 되었다. 박해를 피해온 이 ' 보헤미아 형제단' 난민들은 그의 도움으로 작센 헤른후트의 모라비아 교회 정착촌을 발전시켰다. 그의 원래 의도는 엄격히 말해 에큐메니즘적인 것이었다. 그는 슈페너의 가르침에 따라 ' 교회 속의 작은 교회'(ecclesiolae in ecclesia)을 발전시킴으로써 교회를 부흥시키고 결국 여러 교회를 단일 루터 교회로 통일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 색인 : 루터교). 그러나 모라비아 교회체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그는 공동체 중심의 사상을 갖게 되었다. 즉 "공동체 없이는 그리스도교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헤른후트 형제단 협약'(1727)의 규율들은 평소에 친첸도르프 백작이 갖고 있던 이상, 즉 그리스도교도 정착촌을 세워 그리스도와 즐거운 사귐을 갖는 가운데 모든 일상생활을 해나가려는 이상을 구현하는 내용들이었다 (→ 색인 : 유토피아). 헤른후트와 그뒤에 세운 모라비아 정착촌들에서는 가족 중심의 생활이 각자 속한 합창대 중심의 생활로 점차 바뀌어갔는데, 이 합창대들은 나이·성별·혼인 여부에 따라 엄격히 구별된 공동집단이었다. 이 합창대들은 구성원들에게 공동생활장소·음식·옷·일거리를 주었고, 친첸도르프의 혁신적이고 효과적인 교육이론에 따라 어린이 보호와 교육을 충분히 맡아주었다. 어떤 경우에는 이러한 공동체 이상에 따라 소비뿐만 아니라 생산도 공동으로 했는데, 이 경우 공동체는 개인 노동에 대한 대가로 개인에게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주었다. 헤른후트에서 새로운 회원들을 모으는 데 크게 성공을 거두자 귀족사회, 도시의 동업조합들, 루터 교회 등 기성 권위체제는 이에 강하게 반발했다. 친첸도르프는 1734년 정통파 루터교 목사가 됨으로써 자신을 종파주의자로 보는 사람들과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에 대한 충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을 유화시키려고 노력했으나, 2년 뒤 작센 정부의 명령으로 자신의 영지에서 추방당했다. 유배생활 동안 친첸도르프는 모라비아교도들의 해외 선교사업을 정식으로 대표할 수 있도록 '보헤미아 형제단'의 감독에 임명되었다(1773). 친첸도르프는 베테라비아의 헤른하크와 마리엔보른에 모라비아교도의 정착촌들을 세우고, 네덜란드와 발트 해 연안국에 여러 교회를 개척한 뒤 서인도제도에서 지냈다. 나중에는 영국에 모라비아 교회의 토대를 세웠으며, 이곳에서 감리교 목사 존 웨슬리를 다시 만났다. 1741~43년 아메리카를 여행하면서 뉴욕과 펜실베이니아에 모라비아 교회들을 세우고(그 가운데 펜실베이니아 베슬리엄 정착촌이 중요함),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선도하는 데 앞장섰으며,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여러 독일계 개신교 교회를 연합하려고 노력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유럽으로 돌아온 뒤 에큐메니즘 운동의 일환으로 '트로펜'(Tropen:훈련방법들) 사상을 발전시켰는데, 이 사상에 따르면 각각의 개신교 교회들은 공동의 종교진리에 대한 이해와 전달 방법이 다를 뿐, 오직 하나인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를 구체적이고도 타당하게 표현한다는 것이다. 1747년 작센 당국자들은 이전에 내렸던 추방령을 취소했고, 2년 뒤에는 '보헤미아 형제단 교회'를 공식적으로 승인했으며, 1749년 영국의회도 이 교회를 승인했다. 그러나 1740년대에 지나친 행동을 보임으로써 반대자들에게 공격을 다시 시작할 빌미를 주었다. 이 시기에는 친첸도르프의 신학에 담겨 있던 반(反)이성적이고 감정적이고 감성적인 요소들이 더욱 강화되었으며, 특히 헤른하크에서는 그리스도가 겪은 고통을 파헤치는 데 있어서 성적(性的) 경향마저 띠게 되었다. 그는 10여 년 간의 여생을 고통에 짓눌려 지냈다. 세계 여러 지역을 대상으로 추구해온 선교사업 때문에 빚이 쌓여갔고, 자기를 계승하여 모라비아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주기를 바라던 아들 크리스티안 레나투스가 25세에 폐병으로 죽었으며, 1756년에는 아내 에르드무테마저 죽었다. 다음해에 평생 동역자가 되어준 안나 니치만과 재혼했는데, 그녀는 이전에 '베슬리엄 독신 자매들의 합창대'를 이끈 바 있다. 3년 뒤인 1760년 친첸도르프는 헤른후트에서 죽어 그곳에 묻혔다. 친첸도르프가 교회사에 끼친 영향은 그가 상당히 열정적으로 설교했던 경건주의적인 '가슴의 신앙'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당시 계몽주의가 표방한 무신론적 합리주의와 생명력을 잃은 개신교 교리에 모두 반대한 친첸도르프는 공동체 생활을 통해 종교적인 느낌과 감정을 드러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에큐메니즘, 그리스도교도들의 공동생활 추구, 세계 전역의 선교망 구축 등은 그의 설교·찬송·대중기도·신앙책자들에서 거듭 강조된 명제들이었다. 그의 종교적 교리들과 표현양식은 지나친 감이 없지는 않으나, 그당시의 분위기보다는 오히려 오늘날의 상황에 더 어울리는 것이었다. G.L. Gollin 글
2. 보헤미아 공동체 Moravia http://zaigen.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07m3485a&ref=3#ID3 중부 유럽의 한 지역. 중세에는 대모라비아(Great Moravia)라는 왕국의 중심지였으나, 이 왕국은 11세기 보헤미아 왕국에 합병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 모라비아는 지금의 체크에 편입되었다. 서쪽과 북서쪽으로는 보헤미아, 북동쪽에 슐레지엔, 동쪽에 슬로바키아, 남쪽으로는 니더외스터라이히 지방과 맞닿아 있다. BC 4세기경부터 켈트족, 그뒤에는 게르만족이 살았다. AD 6~7세기에는 아바르족이 모라비아를 지배했고 8세기말부터 슬라브족이 정착했다. 이들은 모라바 강에서 이름을 따 모라비아족이라 했으며, 모이미르 1세(830~846 재위) 때 이들의 정치공동체가 발전해 슬로바키아 서부지방 일부를 포함한 통일왕국을 이루었다. 모이미르의 뒤를 이은 로스티슬라프(846~870 재위)와 그의 조카 스바토플루크(870~894 재위)는 보헤미아 전체와 지금의 폴란드 남부, 헝가리 서부를 손에 넣어 대모라비아 왕국을 세웠다. 또한 로스티슬라프는 비잔틴의 선교사 키릴루스와 메토디우스(863 도착)를 초청했고, 그들은 주요 전례문(典禮文)을 슬라브어로 옮겨 보헤미아·모라비아 지방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했다. 그러나 스바토플루크가 죽고(894) 난 뒤 대모라비아는 분열되었으며 결국 906년 마자르족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그뒤 대모라비아의 영토를 놓고 폴란드·헝가리·보헤미아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1029년 모라비아 지방(대모라비아의 서부지역)은 보헤미아 왕국에 합쳐졌고, 그뒤부터는 대체로 보헤미아에 복속되어 있었다. 이 두 지방은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으면서(1526) 행정상 분리되었으며, 1848년 혁명 이후 합스부르크가는 모라비아 지방을 오스트리아의 왕실령으로 만들었다 (→ 색인 : 합스부르크 왕가). 1918년 이 왕실령은 체코슬로바키아의 한 주가 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독일로 넘어갔으나, 전후에 다시 체코슬로바키아가 돌려받았다. 1949년 1월 1일을 기해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모라비아 지방을 보다 작은 여러 개의 행정단위로 나누었다. 1960년 행정구역이 다시 조직되어 옛 모라비아슐레지엔 지방은 남모라비아(이호모라프스키)·북모라비아(세베로모라프스키) 주가 되었다. 보헤미아 형제단 兄弟團 Unitas Fratrum (영)Unity of Brethren. http://zaigen.britannica.co.kr/bol/print.asp?article_id=b09b3919a [2004. 2. 18자 기사] 15세기에 중반 보헤미아에서 후스파의 영적 이상주의에 영감을 받아 생겨난 종교단체. 성서를 신앙의 유일한 규준으로 삼으면서, 소박하고 겸손한 비폭력의 삶을 추구했다. 화체설(化體說)을 부인하기는 했지만, 성찬을 인정했으며 찬송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1501년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찬송가집을 발행했으며, 1579~93년 체크 문학에 일획을 긋는 사건이라 할 수 있는 〈크랄리체(크랄리츠) 성서 Kralice Bible〉를 펴냈다. 루터교와 칼뱅주의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는 〈보헤미아 신앙고백서 Confessio Bohemica〉를 발표해 1575년 루터교의 후스파와 연합하게 되었고, 이 연합체는 1609년 신성 로마 제국의 재가(裁可)를 받았다 (→ 색인 : 보헤미아 신앙고백). 당시 보헤미아에 사는 프로테스탄트들의 반 정도가 보헤미아 형제단이었으며, 모라비아에는 그보다 더 많았다. 16세기 중반 보헤미아 형제단원들은 폴란드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약 2세기 동안 살았다. 페르디난트 1세와 싸움(30년전쟁)에서 체크의 여러 계급들과 합류한 보헤미아 형제단 군대는 1620년 백산 전투(白山戰鬪)에서 패배했는데, 이 패배는 그들이 받게 될 박해의 서곡이었다. 1627년 신성 로마 제국은 모든 프로테스탄트들에게 법의 보호를 박탈하는 칙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보헤미아 형제단은 자신들의 교회·성서·찬송가집과 더불어 멸절되고 말았다. 형제단원들은 강제로 가톨릭교도가 되거나 추방당했다. 남은 자들은 결국 작센 지방으로 피신했고, 이들은 '헤른후터파'(Herrnhuters)라는 이름으로 선교활동을 하며 종교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모라비아 교회와 복음주의 체크 형제교회의 기원은 보헤미아 형제단이다. a. 보헤미아인들이고 후스를 추종하여 전쟁과 박해로 이주한 매우 역동적인 기독교인 무리. 독일 합스부르크가의 반종교개혁으로 피난하여 작센주에 들어왔다. b. 1722년 작센주(Saxony) 헤른후트에 피난처를 찾았다. 크리스챤 데이비드 인도하에 c. 1727년 진젠돌프가 모라비안 교회의 지도자가 됨/ 8월13일이 모라비안 교회의 재탄생/ 요한 일서를 가지고 설교하며 기도하던중 성령의 강한 임재 경험 모두가 땅끝까지 복음 전하는 선교 사명받음
3. 선교의 구조로서의 모라비안 공동체 16, 17세기에 보헤미아 형제단 운동은 반종교개혁 집단에 의한 박해와 베스트팔렌 조약(1648)에 의한 금지조처에도 불구하고 소위 '감추어진 씨앗'인 충성스런 신자들의 노력을 통해 살아남았다. 당시 개신교는 초기의 활력을 대부분 상실한 상태였다. 이 가운데 17세기 후반 독일에서 경건주의라는 형태로 부흥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으로 인해 인근의 모라비아와 보헤미아의 지하 개신교도들이 더욱 동요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독일 개신교 지역으로 도망쳤고, 경건주의는 여러 귀족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젊은 백작 니콜라우스 루트비히 폰 친첸도르프는 감추어진 씨앗을 다시 살려내는 동인(動因)이 되었다. 1722년 보헤미아 형제단의 전통을 따르는 일단의 가문들이 모라비아를 떠나 작센에 있는 친첸도르프 백작의 땅에 정착해 헤른후트를 건설했다. 헤른후트는 순식간에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서 추방된 수많은 사람들과 독일 등지에서 온 경건주의자들로 가득 찼다. 이들은 베르텔스도르프라는 인근 마을의 루터파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성찬식을 거행했으며, 헤른후트에 있는 집회실에서 정규예배 외의 많은 예배를 보았다. 독실한 루터 교회 신자였던 친첸도르프 백작은 피난민들을 국가교회의 틀 속에 묶어두려고 했다. 그는 종파주의자들로 보이는 피난민들에 대해 혐오감을 느꼈지만 그들이 자신의 교회보다 역사가 더 오래된 교회의 남은 자들임을 알고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백작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전통을 부활시키도록 도와주었는데, 그 발전과정은 2갈래로 진행되었다. 이렇게 해서 헤른후트 공동체는 모라비아 교회의 모태가 되었고, 기존의 경건주의 모형을 따르는 여러 공동체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대부분이 루터파 교회이지만 일부 개혁교회도 포함되는 국가교회의 영적 생명력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이곳의 모라비아교도들은 후대의 관점으로 보아 '디아스포라'로 알려졌고, 그들의 수효는 나중에 한 교파가 되었을 때의 모라비아 교회 사람들보다 훨씬 많았다. 1727년 8월 13일 특별 성찬식을 드리면서 형제애로 뭉치는 놀라운 체험을 했고, 이는 공동체 내부의 의견충돌을 없앴으며, 지속적인 복음의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헤른후트는 수년 내에 세계적인 그리스도교 선교 프로그램의 중심지가 되었다. 최초의 디아스포라 전도자들은 1727년에 선교여행을 시작했으며, 1732년 최초로 선교사들이 서인도제도의 흑인 노예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헤른후트를 떠났고, 그뒤 20년 이내에 그린란드, 수리남, 남아프리카, 알제리,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선교사를 파송했다. 이와 같은 선교적 관심, 특히 저개발지역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이후 교회의 특징이 되었다. 1735년 베를린에서 다피트 니치만이 다니엘 에른스트 야블론스키에 의해 새 모라비아 교회의 초대 감독이 되면서 친첸도르프 추종자들은 한 교파가 되었고, 코메니우스의 손자 야블론스키는 장로교회 목사이면서 보헤미아 형제단 감독이 되었다. 모라비아교도들은 니치만의 지도로 활동을 재개했고, 감독·장로·집사의 세 성직으로 이루어진 직제를 만들었다. 헤른후트파는 시민생활과 교회생활이 신정주의(神政主義) 사회로 통합된 독특한 공동체 양식을 발전시켰고 이는 유럽, 영국, 아메리카에 있는 20여 개 모라비아 공동체의 모형이 되었다. 친교 모임을 통한 그리스도교인 양육, 찬양과 악기 연주로 매일 드리는 예배, 기숙학교, 집중적인 해외선교와 디아스포라 전도가 배타적인 모라비아 마을들의 특징이었다. 이들은 수공예품 생산으로 수익을 올려 자신들의 생계와 선교활동에 쓸 경비를 충당했다.http://zaigen.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07m3487b&bm=1#T1
a. 장로제도 b. 이상론: 그리스도의 군대, 헌신된 공동체, 수도원적 공동체, 결혼까지 결정 c. 선교 활동: 평신도 선교운동, 회중을 소그룹으로 나눠각처로 흩어지게 했다. 선교사를 보내는 그룹과 나가는 그룹으로 분리하여 짧은 시간내에 전세계로 선교사 파송- 아프리카 대륙, 북미, 남미, 그린랜드, 남태평양 군도,
1732년 8월 21일 형제교회에서 제비 뽑힌 도버(Leonhard Dober)와 니취만(David Nitschmann)이 평신도 선교사로서 서인도로 가게 되었으며, 그 다음 해엔 다비트(Chrristian David)와 두 명의 형제가 그린란드로 파송되었다. 친첸도르프 자신도 1741-1743년 북아메리카에 머무는 동안 인디안 선교사로서 활동하였다. 1732년에서 1760년 사이에 226명의 헤른후트 형제교회 선교사들이 10개의 선교지에서 활동하였다. 헤른후트 형제들은 선교사역을 시작한지 20년 동안 영국 성공회와 다른 개신교 선교사들이 그 이전에 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선교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들이 놀라운 성과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세계선교가 교회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이며 이 일을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의 공동임무임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1930년까지 헤른후트 형제교회(모라비아 교회)는 거의 3,00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으며 교인수와 선교사의 비율은 12대 1이었다. http://sgti.kehc.org/data/person/mgkim/07.htm
d. 미국 펜실베니아로 / 베들레헴에서 모라비안 경제 특구 형성 1742년 20년간/ 북캐롤라이나주의 살렘-공공 정착촌, 광범위한 수공업과 산업이 일으켜졌고 수익은 선교자금으로 사용됨 e. 진젠돌프 사후(1760) 스팡겐베르크(bishop August Gottlieb Spangenberg)가 계승. 1704. 7. 15 작센 클레텐베르크호엔슈타인~1792. 9. 18 베르텔스도르프. 독일 보헤미아 형제단의 감독. 이 형제단의 지도자인 니콜라우스 루트비히 그라프 폰 친첸도르프의 계승자이며, 북아메리카 모라비아 교회를 설립했다. 예나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다가 1722년 성서 연구, 도덕성, 그리스도교인의 삶을 강조하는 종교운동인 경건주의로 개종했으며 신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728년 친첸도르프가 예나를 방문했을 때 그가 이끄는 조직에 가입했다. 1732년 할레대학교의 신학교수로 임명되었으나, 그곳의 경건주의자들이 친첸도르프와 교제하는 것을 반대하여 이듬해 교수직에서 쫓겨났다. 친첸도르프를 보좌하여 미국의 조지아 주와 펜실베이니아 주를 차례로 방문했고, 모라비아 교회의 선교사업을 감독했다. 필라델피아를 모라비아 운동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그곳에 보헤미아 형제단의 북아메리카 지부를 세웠으며(1740), 펜실베이니아 베들레헴에 공동노동·공동소유의 공동체를 만들었다. 영국에 또 하나의 지부를 조직한 후(1741~42) 다시 독일에서 일했으며, 그곳에 세운 교회의 감독이 된 후 1744년 북아메리카로 돌아갔다. 다시 유럽에서 얼마 동안(1749~51) 지낸 뒤 모라비아 선교사업을 노스캐롤라이나까지 확장했으며, 1762년 마지막으로 독일에 돌아와 보헤미아 형제단 이사회의 임원을 거쳐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선교현장에서 일했을 뿐만 아니라, 후에 모라비아 교회의 신앙 성명서로 받아들여진 〈그리스도교 교리 해설 Idea Fidei Fratrum〉(1779)의 초안을 작성했다. 그의 온건한 태도 덕택에 모라비아 교회의 내부 분쟁이 해결되었으며, 루터파 교회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가 남긴 작품으로는 친첸도르프의 생애에 관한 것(1772~75)과 몇 권의 변증서 및 찬송가가 있다. f. 목회자 평신도 구분없다. g. 교인 60명당 1명의 선교사 파송/ 10% 선교사/ 12대 1 4. 대표적 선교사: 1732년 첫선교사 데이비드 니취만과 레오나르드 도버 세인트 토마스 섬, 아프리카 노예 선교 기초, 목수일로 생계 a. 크리스천 데이비드: 그린랜드 b. 조지 데네: 수리남 c. 게오르그 슈미트: 남아프리카 5. 선교 신학 a. 선교사 훈련학교/ Hernhut Yardstick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그 백성의 분명한 특질과 특성과 강점을 이해하도록 하라는 말을 듣고 파송되었다. 공동체 훈련 b. 소그룹을 통한 자비량 선교: 여러형태의 신앙 공동체 형성(가족, 미혼자, 개인훈련조직), 사업체 운영(상업과 무역)// 문제: 신비주의, 율법주의, 비조직적이어서 도태위험성/ 산업과 사업에 창조적 관심-“자비량 선교와 주님을 위한 이윤 창출” c. 성육신 정신으로 자기 부정, 희생, 헌신, 겸손, 인내, 그리스도의 고난 묵상, 신비적인 참여로 역경 극복//신비적인 체험 중시하는 주관주의 위험성 d. 선교지에 대한 철저한 적응 e. 성령의 사역을 돕는 자로 여기고 복음의 사자요 전도자요 설교자 http://www.mun.ca/rels/morav/links.html http://www.enter.net/~smschlack/#1
김사무엘 (http://cms2.onnuritv.com/anews/Column_detail.asp?num=192&s=C7&chk=C# 근대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윌리암 케리나 감리교의 창시자요 영국 복음주의 신앙의 위대한 부흥을 일으킨 요한 웨슬레에게 가장 큰 영적 영향을 끼친 사람들은 모라비안 교도들이었습니다. 이들은 7세기경에 당시 오스트리아제국의 모라비아 지역에 살던 사람들로써 희랍을 통해 복음을 듣고, 자신들의 언어로 성경을 변역하여 급속히 그들의 민족사이에 복음이 확대되었고 신앙의 뿌리가 깊어졌습니다. 1415년에 복음전도자 죤 허스가 구교에 의해 화형을 당한 사건 이후에 이들에게도 혹심한 종교탄압이 주어져서 모두가 고향을 떠나 유럽의 여러 곳으로 흩어져서, 그들의 신앙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켜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들 중에 한 무리가 1722년에 지금의 독일에 있는 헤른허트에 정착하게 되어 이 지방의 영주인진젠돌프의 보호와 인도와 가르침에 힘입어 근세 선교를 개척한 선교 공동체로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영적 성장을 도운 진젠돌프는 리더로써 다음의 세 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그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빚진 자로서의 헌신과 충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셔서 죽으신 그 사랑이 그의 마음을 점령했고, 또 가득 채웠으며, 죄인을 사랑하사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리시는 그 사랑을 위하여 자신도 생명을 다 하여 살아갈 것을 결심한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가 유랑하는 모라비아의 성도들을 받아들일 때도 바로 이 사랑이 그 동기였으며, 그가 의지한 유일한 능력은 이 사랑이었고, 그들에게 향한 유일한 목표도 바로 이 사랑이었습니다. 이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은, 가르침이나 강론이나 규율로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하나 되는 공동체를 이루었고, 모두가 배우기를 원했고, 스스로 죄를 버리며 그리스도인의 증인되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자원하여 버리고 이 사랑을 땅 끝까지 전하기를 원하는 선교 공동체가 되게 했습니다. 두 번째의 특징은 사귐의 공동체인 코이노니아에 대한 강렬한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성도가 사랑을 만끽하고 또 자라게 하며 그 목표에 이르도록 하기 위하여서는 이 사랑을 표현하고 또 서로 나눌 수 있는 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 사랑받기 원하는 이 욕구는 가르침이나 격려만으로 채워 질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가 서로를 깊이 사귈 수 있으며 주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나누고 서로가 경험할 수 있는 생활을 통하여 얻어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가 소유한 영지에 정착한 300여명의 모라비아인 성도들을 그는 이 사랑으로 5년 동안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이 사랑의 공동체를 직접 체험하고 또 이루어 나가도록 했습니다. 여기에서 자신들을 노예로 팔려나가면서 까지도 그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파송된 기적의 헌신이 이루어졌습니다. 세 번째 요인은 그의 리더쉽이었습니다. 그의 가슴 안에 타고 있는 선교의 불을 그가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 옮겨가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불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그의 주변의 있는 사람들에게 그 뜨거움이 전달된 것입니다. 세움을 받은 모든 리더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능력을 허락하셔서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사랑과 능력을 받게 하시고, 이들을 통하여 또 다른 사람들에게 이 거룩한 영향을 전하게 하십니다.
주께서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알리라 하셨습니다. 진젠돌프의 일생이 남긴 열매는 모라비안선교운동입니다. 이 운동의 특성은 세상에는 기류자요 이방인으로 살다간 선교사들로써 고난을 받기에 합당한 종으로 불리움 받은 것을 특권으로 여겼고, 일마다 때 마다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주님만을 의지하고 살다간 신앙의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세상에 알리는 그 일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명을 쫓아 땅 끝까지 가기를 소원하며 헌신하는 거룩한 무리들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 감리교: 선교를 부흥운동으로 이해 존웨슬레, 찰스 웨슬레, 화이트 필드
III. 특징 A. 선교 구조 초교파선교회-덴마크 할레 선교회(1705), 뉴잉글랜드 선교회, 모라비안 선교회/ 보내는 선교사, 가는 선교사 B. 선교 신학-체험적인 신앙, 상황화, 철저한 헌신 C. 선교의 운동력-신앙과 비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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