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식의 참된 의미(사 57-58장)

2007. 5. 3. 11:07목양자료/4.기도자료

 

금식의 참된 의미(사 57-58장)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할 때 금식하는 문제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 의미를 오해하고 그것을 평범한 것으로 여긴다. 나는 금식하고 기도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진정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제 성경으로 돌아와서 이 문제를 주의 깊게 살펴보기로 하자.

성경이 처음으로 기도를 언급할 때 금식의 필요성을 말하지 않는다. 당신은 노아와 아브라함이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 모세의 경우는 다소 다르다 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갔을 때 금식하며 기도했다. 그 후부터 성경은 기도할 때 금식하는 문제를 자주 언급한다. 특히 신약에서는 금식이 기도와 긴밀히 관련되어있 음이 분명하다. 신약에서 금식했던 첫번째 사람은 세례요한이었다. 마태복음 11장 18절은 "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라고 말한다. 물론 그것은 요한이 철저히 금식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전혀 세상적인 누림을 갖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한면으로 요한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으며, 다른 한면으로 그는 여전히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마 3:4). 여하튼 그는 금식했던 사람들 가운데 포함되어야 한다.

신약의 기록에서 금식했던 두번째 사람은 주 예수님이었다. 주님이 사역하러 나오셨을 때 하나님 앞에서 사십일간 금식하셨다. 그 후 그분은 그분의 가르침에서 금식하는 것에 관해 말씀하셨다. 그분은 제자들이 그분과 함께 있을 때 금식할 필요가 없지만 그분을 빼앗길 때 금식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막 2:18-20). 그분은 또한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어떤 귀신들은 쫓겨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마17:21, 원문참조). 그러므로 주 예수님의 예를 볼 때 우리는 그분이 실로 금식하는 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그분의 가르침들은 금식하는 것이 실지로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 후 성경은 사도시대 동안 사도들이 자주 금식하며 기도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사도행전 13장에서 안디옥 교회에 있는 다섯명의 선지자 및 교사들은 주님을 섬기는 동안 금식하며 기도했다. 특히 그들 중 두사람이 이방인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때, 그들은 그 두사람을 보내기 전에 금식하며 기도했다. 우리는 금식에 대한 기록이 사도행전 13장에서 그 절정에 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금식과 기도와의 관계를 아주 간략하게 지적했다. 이 기록들로부터 우리는 금식과 기도 사이의 관계, 혹은 기도할 때 금식하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실지로 볼 수 있다.

1. 금식은 큰 책임을 부여받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첫째로, 금식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큰 책임을 받을 때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그러한 때에 사람은 자연스럽게 금식할 것이다. 우리 인간 생활 가운데 있는 체험들도 이 점을 확증한다. 우리가 인간 생활의 여정 가운데 중요한 문제에 직면할 때 음식을 먹을 수 없는 때가 종종 있다. 사실 어떤 일들은 우리를 기쁘게 할 수 있고 더 많이 먹을 수 있게 하지만 또 어떤 일들은 우리를 억눌러서 제대로 음식을 먹을 수 없게까지 한다. 우리가 직면하는 그 일이 너무 크고 책임이 너무 무겁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음식을 먹는 식욕을 상실한다. 그러나 그 일이 잘되고 책임이 없어졌을 때 우리는 해방감을 느끼고 우리의 식욕은 정상적이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큰 일을 부여받을 때 내적인 부담이 너무 커서 의도하지 않더라도 금식하게 된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큰 책임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사십일 동안 먹을 수 없었다. 그후 주 예수님이 사역하러 나오셨을 때 큰 책임을 받으셨기 때문에 역시 잡수실 수 없었다. 이것은 그분이 실지로 잡수실 수 없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그분에게 잡수실 마음이 없었다는 것은 의미한다. 그것은 마치 그분안에 음식을 담을 여지가 없었던 것과 같은 것이다. 사도행전 13장에서 엄청난 책임이 안디옥에 있는 선지자들과 교사들 위에 내려졌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온 존재가 그 책임으로부터 빗나가지 않도록 자연적으로 금식하며 기도했다. 이것이 금식의 첫째 의미이다.

2. 금식은 사람의 절대성의 표시이다.

둘째로 금식은 사람이 절대적으로 하나님 편에 서 있다는 표시이다. 전쟁의 기도에 관한 장에서 우리는 기도가 사람이 사탄을 대항하기 위해 하나님 편에 서 있음을 우주 안에서 선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금식하는 것은 그러한 기도의 절대성을 표하는 것이다. 오늘날 어떤 일에 관해 절대성을 보이기 위하여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금식할 수 있다. 당신이 어떤 일을 위해 기도할 수 있고 또한 먹을 수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절대적으로 하나님 편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것은 당신의 태도가 아직 충분히 확고하지 않음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형제 자매들이여, 당신이 기도할 때 가볍게 금식하지 말라. 금식할 때 당신은 " 여기에 크고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이 일에 있어서 나의 태도와 나의 의도는 하나님의 원수를 대항하기 위해 백 퍼셋트 절대적으로 하나님 편에 서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임을 항상 명심하라.

3. 금식은 법적인 권리을 포기 하는 것이다.

세째로, 금식의 기본적인 의미는 사람의 법적인 권리들을 포기하는 것이다. 인간생활에 있어서 먹는 것보다 더 합법적인 것은 없다. 사람을 창조하신 후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하신 최초의 일이 먹는 문제를 안배하는 것이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그분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신 후 즉시 채소들과 열매들을 사람을 위한 음식으로 정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이 먹는 것은 합법적인 것이다. 금식함으로써 사람은 중요한 일을 부여 받고 짊어지기 위해 그의 가장 합법적인 권리를 포기함을 나타낸다.
금식이 우리의 법적인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다른 여러가지 일들에 있어서 우리의 합법적인 권리들을 포기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금식할 때 우리의 생명을 누리는 것을 기꺼이 제쳐놓지 않는다면 그러한 금식은 무의미한 것이다. 주 예수님의 생활은 그분의 금식하는 것과 조화되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한 사람으로서 지상에서 생활하시는 동안 여러가지 법적인 권리들을 포기하셨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의 전생애는 금식의 원칙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그분은 법적인 권리들을 포기하셨고 합당한 누림들을 버리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매일 금식하시지는 않았지만 매일 금식의 원칙으로 사셨다.

4. 금식은 사람이 자신을 돌아보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네째로 금식은 사람이 자신을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도 돌아보지 않음을 가리킨다. 먹는다는 것은 사람의 생존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먹지 않는다면 사람은 굶어 죽을 것이다. 그러므로 금식을 하는 것은 당신의 목숨을 저당물로 삼는 것이다. 금식할 때 당신은, "나는 내 목숨을 걸고 이일이 성취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목숨을 걸고 그것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때로 어떤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어떤 것에 대해 논쟁하면서 그 단체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떠날 것인가를 저당물로 삼는 수가 있다. 사실 그들은 "당신이 나에게 동의한다면 나는 머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나는 떠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금식하는 것은 당신의 목숨을 걸고 어떤 것을 위해 싸우는 것임을 명심하라. 당신은 사실상 이 일을 놓치기 보다는 차라리 죽겠다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다. 당신은 이 일이 수행되어지게 하기위해 죽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부담을 위해 기도하면서 우리 마음 속으로는 여전히 우리의 장래나 우리의 운명이나 우리의 목숨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기도할 수는 있지만 금식할 필요는 없다. 당신이 진정으로 어떤 일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기 원한다면, 당신의 목숨을 제쳐 놓겠다는 태도를 견지해야 한댜. 이것은 사도바울이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고 말한 것에 따르는 것이다. 바울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있었을 때, 그 여정 내내 믿는 이들은 그에게 "당신이 그곳에 갈 때 틀림없이 쇠사슬로 묶이고 위험을 당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경고했다. 그들은 바울을 한사코 말렸지만 바울은 그것을 참을 수가 없어서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느니라"고 대답했다(행 21:13). 이것이 금식의 원칙이다. 금식할 때 당신은 당신의 권리들을 포기할 뿐 아니라 당신의 목숨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때로 우리의 금식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다만 외적인 표시만 나타낼 뿐 내적으로는 여전히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금식은 당신이 당신의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또한 이 일을 가볍게 지나가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기를 원할 정도로 어떤 일이 당신에게 눌림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 문제를 하나님께 증명할 것이다. 당신에게 그런 강한 느낌이 있을 때, 당신의 금식은 의미 깊은 것이다.

5. 금식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며 사탄을 패배시키기 위한 것이다.

다섯째로, 금식은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사탄이 패배당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금식과 기도의 사례들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거나 마귀를 쫓아내기 위한 것이다. 사람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은 단 한 가지의 예도 발견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금식은 한면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한면으로 사탄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고 결론 지을 수 있다. 아마 당신은 "우리가 질병를 치료하기 위해 금식하며 기도할 때,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 위한 것이며 사탄이 제거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만일 당신의 관념과 관점이 순수하게 하나님의 치료를 위한 것이라면 당신의 금식은 쓸모가 있다. 당신은 긍휼을 받아야 하고 비춤을 받아야 하고 당신의 병이 너무 중해서 전혀 회복될 희망이 없을 지라도 여전히 하나님께 " 오 하나님, 당신이 나를 이 땅에 두신다면 지금부터 나의 모든 날들은 절대적으로 당신을 위해 있을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내가 속히 죽는 것을 허락 하시옵소서, 나는 자신을 위해 이 땅에서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 하나님 내가 오늘 여기서 당신께 한가지 구하는 것은 내가 치료되어 지금부터 전적으로 당신을 위해 살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 당신에게 그러한 상태와 그러한 마음과 그러한 생각이 있다면 당신은 이미 금식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대부분의 질병이 그러한 시점에서 치료되리라고 믿는다.

여기에서 병고침에 관해 몇 마디 추가하고자 한다. 신성한 병고침은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이라고 결코 믿지 말라.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한 그것은 실로 무제한적이지만, 신성한 치료를 받는 사람들에 관한한 거기에는 제한이 있다. 형제 자매들이여, 과거에 거룩한 치료를 받은 사람들이 결국에는 죽었다는 것을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다. 나사로까지도 죽음에서 일으켜진 후 죽었다. 우리는 무제한적인 신성한 치료를 받기 위해 장래 올 부활의 날까지 기다려야 한다. 오늘날 절대적으로 완전하게 치료함 받는 질병은 없다. 교회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과거 이천 년 동안 신성한 치료를 받았지만 오늘날 그들이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모두 무덤안에 있다. 그들은 죽은 상태로 최종적인 치료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다비형제는, "그분이 오셔 사망 무덤서 올리시길 기다려"라고 썼다(한국복음서원 찬송가 44장). 당신과 나는 무덤 속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우리는 죽음 안에 있다. 모든 질병들은 죽음의 요인들이다. 실지로 부활이 오기 전에는 병고침 받은 모든 사람은 다만 일시적인 치료를 받은 것에 불과하다. 오늘날 필요에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한된 치료를 주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이 땅에서 몇 년 더 사는 것을 허락하시지만, 그것은 우리의 건강이나 우리의 수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위한 것이다.

형제들이여, 그러므로 당신이 병들어서 금식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을 치료하시는 것은 아니다. 금식한다는 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원수가 쫓겨나느 데에 있어서 절대적임을 의미한다. 당신이 치료되고 안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당신이 과거에 전적으로 자신을 위해 살았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당신을 또다른 시간동안 지상에 남겨두실 것을 그분께 구한다. 당신은 하나님의 뜻이 당신 안에서 완전히 성취되고 사탄에게 어떠한 근거도 전혀 주지 않기를 갈망한다고 그분께 말한다. 그러나 반복해서 말하지만, 이러한 병고침은 일시적인 것이다. 그것은 그분의 뜻이 당신안에서 성취되기 위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이 아무리 금식하며 기도할 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쓸모 없다. 당신이 금식하며 기도하는 한, 당신의 기도가 하나님에 의해 응답받을 것이라고 결코 생각지 말라. 기도할 때 금식하는 기본적인 원칙은 당신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고 사탄이 제거되는 것을 절대적으로 주의함을 가리키는 것이다. 성경에서 사람이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이 그 기도를 응답하시는 것을 보여주는 예증은 하나도 발견할 수 없다. 당신의 사업이 손해를 볼 때 온 가족이 금식하며 기도한다면 내일 당신의 사업이 성공할 것이라고 결코 상상하지 말라. 이것은 절대적으로 있을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미신이다. 성경에서 기도할 때 금식하는 것은 언제든지 땅 위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갈망을 접촉하여 하나님이 그것을 성취하시기를 구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이 원수를 만나서 그가 쫓겨나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6. 가볍게 금식하지 말라

금식의 의미가 매우 진지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형제 자매들에게 가볍게 금식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다. 우리는 사복음서에서 주 예수님이 빈번히 금식하신 것을 발견할 수 없다. 결코 금식하는 것을 사소한 일로 생각지 말라. 오직 외식하는 바리새인들만이 일 주일에 두번 금식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매우 평범한 것으로 여겼다. 구약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그러한 금식을 심하게 책망했다(사 58장). 하나님은 기도할 때 그렇게 금식하는 것을 받아들이시지 않는다. 금식하는 것을 하나의 종교적인 형태로 여기지 말고 미신적인 필요조건으로 대하지 말라. 기도할 때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금식은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아주 큰 위임을 받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목적을 아주 많이 주의하기 때문에 합법적인 누림에 대한 그의 권리를 기꺼이 포기한다. 그는 또한 기꺼이 그 위임을 위해 죽기까지 투쟁한다. 그러한 경우에 그 사람은 자연적으로 금식할 것이다.

7. 금식은 필요한 것이다.

한면으로 그리스도인은 가볍게 금식해서는 안되지만 다른 한면으로 금식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한번도 금식해 본적이 없다면 분명히 그에게 뭔가 잘못된 것이 있다. 하나님이 결코 그에게 어떤 일을 위임하시지 않았든지 아니면 그가 하나님의 위임을 거절한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당신에게 부여된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을 한번도 느껴본 적이 없다면 그것은 바로 당신이 확고한 태도로 그분의 뜻을 원하고 그분 편에 서기를 원한다는 것을 하나님께 표시한 적이 없음을 의미한다. 당신은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 복음이 전파되든 안되든, 또한 죄인들이 구원받든 받지 않든 당신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당신은 이미 그들을 위해 기도했지만 기도한 후 당신은 여전히 즐겁게 먹고 마실수 있다. 형제 자매들이여 당신의 자세가 그러하다면 당신은 실로 불쌍한 그리스도인이다. 당신은 교회가 황폐한 상태에 있는지 아닌지를 전혀 주의하지 않는다. 당신은 한번도 빠짐없이 식사하는 것만을 주의한다. 당신에게 하나님께 속한 것들에 대해 죽고 사는 자세가 없기 때문에 이것은 당신의 그리스도인 생활에 매우 결여된 것이 있음을 증명한다. 당신이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주의 한다면, 복음에 대한 부담이 당신을 누를 것이며 당신은 죽고 사는 것을 개의치 않고 투쟁할 것이다. 당신은 "오 하나님 복음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몇 사람을 구원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먹거나 마실 수 없습니다."라고 기도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의 의미이다. 당신은 또한 하나님의 집을 너무 관심한 나머지 하나님께 "오 하나님, 내가 죽는 것은 옳지만 교회가 그렇게 황폐한 상태로 있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당신의 교회가 황폐한 문제를 해결하시지 않는다면 나는 차라리 죽겠습니다."라고 기도할 수 있다. 형제자매들이여 나는 이 시점에서 당신이 확실히 금식할 것이라고 당신께 말할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한번도 그러한 체험을 가져보지 못했다면 그것은 두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목적을 주의하지 않거나 하나님의 원수가 얼마나 사나운가를 느끼지 않음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금식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금식하는 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목적을 많이 주의하고 하나님의 원수의 사나움을 깊이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느낌은 당신이 다른 사람들처럼 먹을 수 없고 마실 수 없고 즐거워할수 없으며 금식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당신을 누르고 강요한다.

** 주의해야 할 몇가지 사항들

마지막으로 금식하며 기도하는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몇가지 사항을 보기로 하자. 첫째 어떤 부담이 당신을 금식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누른다면 결코 기도하지 않은 채 금식하지 말것을 명심하라. 당신은 금식하며 기도해야 한다. 최선을 다해서 당신의 금식하는 시간과 금식하는 태도와 금식하는 부담을 기도로 돌이키라 경험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기도할 때 금식하는 것과 같은 것은 전혀 어떤 형식이 없음을 알고 있다. 그것은 생각하는 것이나 암기할 것을 요구하지 않고 전적으로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금식하는 것은 커다란 손실이다. 당신의 몸은 상할 것이며 당신의 생각은 손상당할 것이며 당신의 영까지도 손실을 입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기도없이 금식하면 또한 당신의 부담이 실행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금식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을 누르는 부거운 부담이 있을 때마다. 당신은 최선을 다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러한 기도는 당신의 영에 음식이 될 것이다. 그것은 당신에게 상당한 정신적 위로를 주고 당신의 몸에 힘을 공급할 것이다. 기도하지 않고 금식하는 것은 당신을 소모시키지만 기도하며 금식하는 것은 당신을 공급한다.

그다음 당신이 금식하며 기도하는 동안 너무 여러가지 것들을 당신의 부담으로 삼지 않도록 하라. 당신의 부담과 멀리 떨어진 것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 다만 한 가지 문제를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좋다. 왜 당신은 그렇게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가? 왜 당신은 먹을 수 없는가? 왜 당신은 배고프지 않은가? 당신은 그 한 문제를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복음을 위한 것일 수 있고 교회를 위한 것이거나 어떤 사람의 영혼이 구원받기 위한 것일 수 있다. 우리의 실수는 금식하는 동안 우리의 생각을 여러가지 다른 것들에 두는 것이다. 당신이 너무 여러가지 것들을 위해 기도하려고 주님께 온다면 당신은 금식해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당신이 먹을수도 없고 마실수 도 없는 시점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할 때 참된 금식은 이것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고 하나님의 마음을 접촉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이 하시고자 갈망하는 한가지를 그에게 무겁게 부담지울 것이다. 그는 먹을 수도 없고 마실 수도 없을 정도로 부담을 갖게 될 것이다. 그때 그는 자연스럽게 금식하고 하나님 앞에 가서 기도할 것이다. 그 결과 그러한 기도는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할 것이고 마귀를 몰아낼 것이고 하나님의 권위를 이끌 것이다.

그다음, 당신에게 실로 금식할 부담이 있을 때 당신은 그것을 지나치게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균형을 이루기를 배우라. 결코 "주 에수님은 사십 일 동안 금식하시지 않았는가? 모세도 산에서 사십 일을 보내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내가 팔일이나 십일동안 금식한다 해도 아무 문제 없다"라고 생각지 말라. 이십여년전에 나는 너무 심하게 금식한 한 자매를 보았다. 그결과 그녀의 몸은 극도로 약해지고 그녀의 생각은 아주 지치게 되었다. 따라서 사탄은 그녀를 공격할 기회를 잡았다. 아무도 그녀를 도울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금식한 끝에 죽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면으로 우리는 가볍게 금식해서는 안 되지만 다른 한면으로 우리는 그것을 지나치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떤 시점에서 중단함으로써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끝으로 나는 우리 가운데 아무 것에든지 또한 아무 때에든지 금식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기를 바란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과정에서 언제든지 어떤 일들을 해낼 수 없는 지점에 와야 하고 그때 우리는 그것들을 처리하기 위해 금식하며 기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