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한국교회의 해외선교 활동(1902-1937)

2007. 4. 28. 23:51교회사자료/7.한국교회사

초대 한국교회의 해외선교 활동(1902-1937)

 

19세기 말 미국과 유럽의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이 전파된 그시대는 가난과 무지와 전염병과 국내외 정세적으로 혼란과 수난기에 허덕이는 때였다. 외국인들에 전해준 복음은 곧 한민족에게 한줄기의 생명의 빛이었으며,소망을 주는 생명수였다.

세계선교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가장 성공적인 선교의 효과는 초기의 한국쇼회의 전도와 해외선교로 이어져 신학적으로나 선교적으로 자생력을 갖추진 못한 상태에서도 뜨거운 열정으로 해외선교를 시작하였다. 그당시 인적자원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실정이었다. 사도행전의 사도들의 선교행전과 같이 한국교회는 중국과 만주와 시베리아지역과 몽고와 일본등으로 해외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사울을 안수하여 선교사로 파송한 것과 같은 사건이었다. 1902년도에 최초로 선교사를 해외로 보냄으로 초대한국교회의 선교는 시작되었었다. 그 당시 한국교회의 실정과 1세기가 지난 지금과 비교한다면 기적적인 성장을 한 것이나, 선교에 대한 열정과 그 활동은 상대적으로 오히려 미약하다고 말할 수 있다. 선교 2세기를 맞이한 한국교회는 이러한 초대교회의 해외선교의 열정적인 사명의식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1. 일본

장로회 독노회가 1907년에 조직되면서 최초로 안수받은 목사 7인중 1인인 한석진목사를 동경에 파견하여 주로 유학생들을 상대로 선교 사업을 시작케 하였다. 그후 1911년에 장,감연합 선교회에서 주공삼 목사를 파견하고, 1925년에 임종순,오기선 목사를 각각 일본으로 파송했으며 1924년엔 장,감연합선교회가 오사카에 박연서목사를 파송했다. 1927년엔 자유주의 신학논쟁으로 카나다 선교회를 탈퇴한 주한 선교사 영재형목사가 일본관서 지방을 중심으로 교포선교에 힘썼다. 1930년 이후부터 도쿄,오사카,고베,나고야,교토 등 대도시와 구주지방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 한인 교회가 설립되기를 이르렀다.

2. 시베리아 선교

금세기에 들어서면서 국운이 기울어지자 북만 국경을 넘어 만주, 시베리아에 이르기까지 장을 찾아 이주하여 간 동포의 수가 급증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제3회 장로회 노회는 시베리아 선교를 결의하고 1909년에 최관흘목사를 파송하여 2년내에 2개의 조직교회와 13개의 기도소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1912년 대한감리회도 손정도 목사를 시베리아에 파송하여 장로교 선교 사업과 함께 연합선교에 힘쓰는 중 교세가 급증하기에 이르렀다. 한인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이 성공적인 결실을 맺게 되자, 러시아정교회는 이를 시기하여 국교인 러시아 정교회 산하에서 선교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불응하자 두선교사는 체포되어 결국 투옥되는 박해를 겪게 되었다.

선교의 지속이라는 대명제 아래 최관흘 목사는 본국 교회의 양해도 얻지 않고 러시아 정교회에 가입을 단행하고 말았다. 장로교 총회는 최목사의 개종을 계기로 그를 제적하여 버렸다. 손정도목사는 끝내 정교회 개종에 불응하여 시베리아로부터 추방을 당하고, 선교사업은 일시 중단 상태에 들어갔다. 그후에 러시아 정교회의 간섭이 약화되면서 시베리아에 있는 신설교회들이 장로교 총회와 감리교 연회에 선교사 파송을 청원함으로써 장로교 총회는 수차에 걸쳐 현지를 시찰한 후 1918년에 김현찬목사를 다시 파송하여 선교사업을 계속하게 되었다. 마침 당시 러시아는 혁명의 정치적 변동에 휨쓸려 민심이 불안한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안식처를 찾아 교회로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1922년 교회당 34개,목사 5인,장로8인,소학교 6개,야학교 35개,주일학교 15개,등록교인 1935명이 넘는 교세를 얻게되어 드디어 시베리아 노회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감리교회는 1918년 시베리아 선교를 재개하기로 결정하고 1921년 배형식목사를 파송하여 선교 사업이 다시 크게 재건되었다.

3. 만주선교

감리교회는 1920년에 양주삼목사의 시찰 후 만주선교를 결정하고 1921년에 정재덕,최수영,배형식목사를 초대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1924년엔 최성모,손정노,동석가,김응태목사를 추가로 파송하여 만주전역에 걸쳐 선교를 확정하였다. 장로교회는 1910년에 김진근목사를 처음으로 파송한후 1911년에 신천읍 교회 여전도회에서 김덕선목사를 봉천에 파송했고,1912년엔 평북노회에서 최성주목사를 만주 여러 지방에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만주선교의 발전도 눈부실 만큼 급속도여서 1920년에 남만노회가 설립되고 1921년엔 북만노회가 세워지는 데까지 이르렀다.

4. 몽고선교

몽고지방에도 흩어진 교포들의 요청에 의하여 감리교회와 장로교회가 각각 선교에 착수하였다. 먼저 감리교회의 최성모목사가 1925년에 화홍교회를 설립하여 선교를 확장하여 나갔다. 10년후 1935년에 장로교 총회의 지시에 따라 의산 노회의 지원 아래 조보근목사가 몽고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선교 사업을 시작하였다.

5. 중국선교

장로교 총회는 1912년 총회 조직을 기념하여 중국선교를 결의하고 그 다음해에 김영훈,사병순,박태로 세 목사를 선교사로 중국산동 지방에 파송하였다.

산동성은 공자의 출생지로 외국종교에 대하여 배타적인 일반심리 때문에 선교의 불모지로 알려진 곳이었다. 그러나 선교 30년이 지난 1942년 통계에 의하면 교회 36개,세례교인 1716명으로 증가하여 중국선교 사상 큰 기적을 낳았다. 1917년엔 방효원,홍승환 두 목사를 증판하고 1918년에는 박상순 목사를 다시 파송하였다. 1923년에는 이대영목사를 1931년에는 김순효여선교사를 파송하였고,1937년에는 방지일 목사를 파송하여 선교사업을 확장시켰다. 그밖에 교포가 집결된 상해와 또 남경과 북경에도 한인교회가 설립되면서 독립운동의 요람적인 역활도 감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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