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12. 27. 23:03ㆍ사진·동영상 자료/2.성지순례 자료
사데 유대인 회당
기원후 3세기 건물로 여겨지는 이 회당은 세계에서 가장 큰 유대교 회당으로 손꼽히고 있다. 바닥은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고, 기둥은 물론 벽들도 대리석 재료를 사용했다.
사데 체육관
유대교 회당 옆의 체육관은 붉은색 벽돌로 쌓은 벽들이 일부 남아 있는데, 수 백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체육관의 엄청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체육관 내부의 정면에 호화롭게 장식된 대리석 기둥과 관람대는 경기를 열광적으로 좋아했던 사데인들의 열정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사데 체육관
체육관과 유대교 회당을 지나 사데를 관통하고 있는 메인도로는 기원전 4세기경의 대리석으로 포장되어 졌다. 비잔틴 시대에는 메인도로 주변에 30 여개의 상점들이 즐비해 있다
사데는 리디아(Lydia)왕국의 수도이며 역사적으로 처음으로 금화를 제조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에 금화를 제조했던 건물은 아직도 작은 시내가 흐르는 한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다. 금과 은을 섞어서 만든 이 금화는 마치 달걀 모양의 타원형이었다. '사데'라는 이름은 리디아 왕국 때부터 불려졌다. 리디아 왕국은 다섯 왕조로 이어졌다. 리디아 왕국이 성장하게 된 것은 기원전 7세기 말 부터였다. 기게스 왕이 리디아의 새 통치자로 등장하면서 리디아는 강국으로 등장하게 된다. 리디아의 왕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은 크로에수스 왕이다. 그는 리디아의 마지막 왕으로서 관대함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엄청난 부를 가진 왕으로도 유명하다. 크로에수스 이후부터 사람들 사이에는‘크로에수스 같은 부자’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크로에수스 왕은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금과 은, 두가지 다른 재료를 혼합하여 금화를 제조한 인물이다. 그의 엄청난 재산은 주로 세금과 무역으로 인한 수입과 사데 지방에서 수거한 금으로부터 축적한 것이다. 기원전 547년에 페르시아가 그리스의 지배하에 있던 영토들을 침략하기 시작하면서 소아시아 역시 위협에 놓이게 되었다. 사데 역시 페르시아에 의해 정복되면서 한때는 공포의 분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막강한 군대를 가진 페르시아도 서서히 힘을 잃어가게 되었고, 이어서 등장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소아시아와 아나톨리아의 지배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기원전 334년에 아나톨리아반도 대부분의 영토가 알렉산더 대왕의 수중에 들어가면서 사데를 통치하고 있던 페르시아는 아나톨리아로부터 퇴출을 맞게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인 셀레우코스가 사데의 새 통치자 되었다. 그후 사데는 베르가마(버가모) 왕국의 통치(기원전 180-133)를 받아 오다가 대제국인 로마의 등장으로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사데는 허무스(Hermus)강 계곡 평야의 한 복판에 있다. 그 평야 북쪽으로는 트몰루스(Tmolus)의 긴 산맥이 우뚝 솟아 있고, 그 산맥에서 여러 구릉과 작은 산들이 톱니바퀴살 같이 뻗어나가고 있다. 그 산 줄기들은 각기 좁은 고원을 형성하고 있다. 원래의 사데는 이들 산줄기 중 하나의 위에 있었다. 고도는 450m였다. 그런 위치 때문에 사데는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았다. 산맥의 양측면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고, 벼랑과 트몰루스 산맥이 만나는 그 곳에만 사데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있었는데, 그것 마저도 경사가 급하고 험준하였다.
사데 토몰루스 산 요새
고레스왕은 사데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크로이수스와 사데 사람들은 개의치 않았다.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은 트몰루스산에 숨어있기만 하면 문제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은 트몰루스산에 숨어있기만 하면 살 수 있다고 자부하는 사데사람들을 가리키며 고레스왕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희들은 살았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목숨이다.” 고레스는 14일간을 포위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다음에“사데성으로 들어갈 방법을 찾아내는 사람에게 특별상을 주겠다고 했다. 어느 날 히에로에데스(Hyeroeddes)라고 불리는 한 군인이 사데성의 발포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때 사데 군병의 한 명이 실수하여 자기 철모를 성벽 총구 너머로 떨어뜨리고는 그것을 찾으려고 절벽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히에로에데스는 그 곳에는 몸집이 작은 사람이면 기어 올라갈 수 있는 틈바구니가 바위 사이에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날 밤 일단의 페르샤 군인들이 그 바위의 갈라진 틈바구니를 통해 사데성으로 침입할 수 있었다. 그들이 발포대 위에 도달했을 때 그 곳에는 보초병 하나 없었다. 사데 사람들은 발포대에 보초가 깨어서 경계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안전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결국 다 잠자고 있다가 사데는 함락된 것이다
주전 330년대 알렉산더대왕의 명령으로 건축이 시작된 이 신전은 ‘다산(多産)과 풍요의 여신’을 위한 것이었다. 전면의 폭이 50m, 길이가 100m, 78개의 석주가 늘어선 웅장한 규모이다. 지금도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석주들이 도열해 있고 특별히 이오니아식의 석주 두 개가 18m나 되는 높이로 하늘을 찌를듯이 솟은 채 남쪽 끝 부분에 남아 있다
사데교회
사데는 사르디스라 하며 현재명은 살리히리이다. 사데 교회는 1세기 중반에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 사도 바울의 제자이며 일곱 집사 중의 하나였던 클레멘트가 사데 교회의 첫 감독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사데 교회는 이 도시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크게 부흥 하였다가 나중에는 쇠퇴하는 우여곡절을 경험한다. 사도 요한이 사데 교회에 편지를 쓸 당시의 교회지도자는 누구였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처음에는 아데미신전을 빼앗아 예배드리다가(4세기경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권세를 얻었을 때쯤)후에 신도의 숫자가 작아져 아데미신전 담 밖에 돌담을 싸놓고 예배드린 것 같다고 한다. 초기 기독교 당시 신도 수는 매우 많았으나 영적으로는 미약하였다. 때문에 "너는 살아있다고 말하나 실은 죽어가고 있다!"란 책망을 받았다. 사데 지역은 황금이 많은 지역으로 재물의 유혹이 있었고 또한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어 신앙생활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현재의 사데교회 유적은 아데미 신전 뒤편에 비잔틴 시대에 벽돌로 지은 교회이다.
오병이어처럼 점점 많아지기를 기원하듯 교회 내부에 있는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의 몸을 한없이 아름다운 배열로 부풀려놓았다
오병이어 교회
팔복교회의 경사진 언덕 바로 밑에 타브가라고 하는 교회가 있는데 이는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기념하여 세워진 교회이다. 헬라어로는 헵타페건(Heptapegon), 히브리어로는 엔 세바(Ein Sheva)라고 하는데 모두 일곱개의 샘이란 뜻이다. 이는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합친 일곱과 관련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현재의 교회는 독일 천주교에서 5세기 비잔틴 교회의 옛 터에 1936년에 세운 것이다. 이 장소가 예수님이 오병이어 이적을 행하신 장소임을 확인할 길은 없다. 1930년대 초 독일고고학자들에 의해서 타브가를 발굴했고 이곳에서 4세기 비잔틴 시대의 유적을 찾아냈다. 그리고 옛 교회 바닥에서 많은 모자이크가 발견되었는데 이 중에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개가 묘사되어 있는 모자이크를 발견했다. 이로써 이곳이 오병이어 이적을 기념했던 교회임을 알았다. 현재 교회 안쪽제단 옆에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개가 바구니에 담겨 있는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가 선명하게 잘 보존되어있다. 이외에도 현재 교회 바닥 밑에는 갈릴리 지역의 동식물을 새겨놓은 많은 모자이크가 있는데 이 그림은 당시 이 지역의 생태계연구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타브가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장소이다. (마16:13-21, 막 6:30-44). 그 이름은 7개의
따뜻한 샘물을 뜻하는 그리스어 헵타페론에서 유래했으며, 아라비아어로 타브가라고 줄여진 것이다.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위임을 받은 최초의 교회가 이곳 해변가에 세워졌다고 한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먹이라”(요21:15-17). 구약성경에 나오는 긴네렛은 게네사렛 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오른쪽 위) 위에 위치한다
타브가에 도착하기 전 좌측 산 언덕을 3㎞ 오르면 팔복산 정상에 오르면 예수가 팔복의 산상보훈을 선포한 것을 기념하는 팔복교회가 있다. 이교회는 여덟가지 복을 상징하는 팔각형 구조로 되어있으며 내부 여덟개의 유리창에 라틴어로 팔복의 내용이 하나씩 아름답게 기록되어 있다. 이 교회는 주후 5세기경에 처음 교회가 세워졌었고, 현재의 아름다운 팔각형의 교회는 프란치스카 천주교회에서 1938년에 지은 것이다.
디베랴
디베랴는 헤롯 안티파스에 의해 세워지고 AD 18년에 낙성되었다. 그는 티베리우스 황제를 기념해 성을 명명했고 그것으로 수도를 삼았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헤롯은 "그것을 갈릴리에서 가장 좋은 장소인 게네사렛 호수에 지었다(Ant. 18.2.3). 도시의 기초가 고대의 공동묘지 위라는 것이 알려지자 엄격한 유대인들에게는 거주지로서 금기시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티파스는 무력으로 디베랴를 식민지화 하는 것을 생각했다."라고 했다 한다.고대 막달라 Taricheae의 폐허가 해변 근처 울타리에 그려져 있다(왼쪽 아래). 이곳은 예수님의 제자인 막달라 마리아의 집이었는데(눅8:2) 1차 유대반란 초기에는 열심당원 활동의 중요한 중심지였고, 후에는 활발한 활동과 로마와의 해상 전투가 있던 장소였다.이방도시로 여겨졌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곳을 방문하셨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재건 이후에는 유대 교육에 주요한 중심지가 되었다.미슈나(AD3세기-탈무드의 1부를 구성하는 유대교의 불성문율집)나 팔레스타인 탈무드(AD 5세기)도 디베랴에서 편찬되었다고 한다.
초기 이름은 BC 15 세기에 통용되던 '하야드'란 의미의 '긴네렛'(수11:2/19:35) 이라 하였고,신약시대에는 '게네사렛' 이라 불리웠다. AD 2세기에는 안티파스가 세운 도시인 디베랴에서 유래한 '다베랴바다'(요 6:1/21:1)로 불리우기도 했으나 오늘날 아랍인들은 '바할 타바리예(디베랴 바다)'라 부른다. '갈릴리' 라는 말은 호수 서쪽에 있는 지방의 옛 이름에서 온 것으로 '원', '주위'의 의미를 갖는다.성경속에서는 결코 선지자가 나올수 없는 곳(요 7:41,52)으로 조롱 받기도 한 곳이었나예수님은 이곳에서 성장 하셨으며 많은 사역을 하셨다(마 2:22-23). 물이 흔치 않은 이스라엘에 큰 강은 거의 없다. 그래서, 비교적 큰 이 '호수'를 '바다'라고 부르기도 한다. 길이는 약20㎞, 폭은 약10㎞, 깊이 약40m, 둘레 51.2㎞ 해수면 보다 200m아래에 있는 호수이다. 따라서 풍랑이 심했던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사마리아성에 대한 언급은 구약에서 100번이상 언급될만큼 자주 등장하지만, 솔로몬 사후50년이 될때까지는 건설되지 않았다. 이 도시가 건설된 것은 B.C 875년 오므리왕에 의해서이다. 왕상16:24절“저가 은 두 달란트로 세멜에게서 사마리아 산을 사고 그 산 위에 성을 건축하고 그 건축한 성 이름을 그 산 주인이 되었던 세멜의 이름을 쫒아 사마리아라 일컬었더라” 여기에 그 이름의 기원이 있다. 그러나 오므리는 이 도성을 완성하지 못했고, 그의 아들 아합에 의해 완성되었다. 이 새로운 수도는 옛 수도 디르사보다 훨씬 진일보한 것이었다. 아합은 두로 왕의 딸과 결혼을 할 만큼 이방 문물을 받아들였는데, 이 성읍은 페니키아의 숙련된 장인들에 의해 건축되어 상아궁(왕상22:39, 암3:15)이라고 불리울 정도였다.
실제 이곳은 복층구조물이 있었음이 왕하1:2~17절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서 치명상을 입었는데, 이를 통해 이 건물이 높았음을 능히 짐작할수 있다. 그후 여로보암 2세(B.C 793~782)때에 사마리아성은 최대의 번영을 누렸으나, 선지자 아모스와 호세아의 사마리아성의 종말 예언처럼, 여로보암2세 사후 얼마되지 않아 B.C 722년에 앗수르의 살만에셀5세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앗수르이 왕조실록이라 할수 있는 annlim에 의하면 살만에셀의 뒤를이은 사르곤 2세가 B.C721년에 사마리아 거민 27,290명을 사로잡아 갔다고 한다. 그래서 이때를 사마리아의 실제적인 멸망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이 사건은 성경 왕하17:23~24절에 기록되어 있으며, 동일한 앗수르 왕(아마도 사르곤 2세)이, 다른 정복지로부터 사람들을 옮겨다가 사마리아 여러 성읍들을 재건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에살핫돈(스4:2), 앗술바니팔(스4:10, 우리말 성경에는 오스납발)에 의해서도 이러한 점령지에 대한 강제 이주정책은 계속되었다. 앗수르왕들에 의해 재건된 사마리아가 오므리가 건설한 것과 동일한 성인지 아니면 인근 지역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북이스라엘의 중심지역이었던것 만큼은 분명하다. 이렇게 해서 재건된 사마리아는 앗수르 속주의 수도역할을 했다. 느4:17에는 산발랏이 사마리아의 총독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알렉산더가 팔레스타인 지역 원정후, B.C331년에 사마리아성은 헬라의 직접 식민지가 됨으로 인해 새로운 전기를 맞게되었다. 퇴역 군인들을 이곳에다 대거 정착시키므로써 헬라화를 더욱 가속시켰다. 알렉산더 사후 B.C 198년까지는 애굽의 톨레미 왕조에 속했다가, 그후부터는 시리아의 셀류키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13권 275~279에 의하면 하스모니안 왕가의 요한 힐카누스가 B.C 107년에 이곳을 점령하고는 흔적을 알수 없을 만큼 완전히 파괴했다고 되어있다. 실제로 이때 이후로는 파괴된채 방치되어 있었다. B.C 55~57년에 로마의 수리아 총독 가비니우스가 사마리아의 복원을 명령해서(유대고대사 14권 86~88), 재건축이 시작되었지만, 이를 완성한 사람은 헤롯대왕이다. B.C 30년부터 시작해서 무려 10년에 걸쳐 이 사업을 진행시켰다. 이때 그의 후견자인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헬라식 이름인 ‘세바스테’라는 이름으로 도시의 이름을 바꾸었다.(전쟁사 1권 403) 오므리왕의 궁전이 있던 그 자리에 헤롯은 아우구스투스를 위한 신전까지 세우게 되었다. 또한 헤롯대왕도 이곳에다 알렉산더대왕 처럼 퇴역군인들을 거주시켰다(유대고대사 15권 292~298). 연금을 지급받았던 사람은 무려 6,000명이나 되고 이들에게 특권을 부여했다. 이들은 갈라디아인, 드라기아인,게르만인등의 외국인 용병들이었다. 그래서 이도시는 더욱더 국제도시화 되었다. 헤롯대왕 사후에는 아켈라오의 영지였으나, 학정으로 실각한후 로마 총독의 직접 통치지역이 되었다. 예수님 당시에도 여전히 총독이 직접 통치하고 있었다. 행8:5,14절에는 마술사 시몬의 본거지로 언급되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대부분의 유적은 로마통치시기인 A.D 180~230년경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사마리아 성 야곱의 우물
이 우물은 헬레나 황후가 세운 교회 지하실에 있다. 처음 교회도 파괴되고 두번째의 십자군 교회도 파괴되었다. 갈릴리로 행하시던 예수님께서는 피곤한 몸으로 사마리아에 도착하셨다 .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우물 곁에 앉아 계실 때 사마리아 여인 하나가 물을 길러 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물을 좀 달라"(요4:3-26)고 하셨다.
북이스라엘 멸망 이후부터는 여러가지 역사적 배경으로인해, 북이스라엘의 거주민들은 온통 혼혈족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로인해 이들은 남쪽 유다지방의 사람들로부터 계속해서 소외당하고, 멸시를 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강제 이주가 북부 지방 사람들에 대한 감정의 기원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해 사마리아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에는 좀더 구체적으로 정의할 필요가 있다. 첫째, 지리적인 의미에서 ‘사마리아’는 ‘사마리아지역’을 의미한다. 사마리아성의 역사를 보면 오므리왕조 이후부터는 사마리아성이 북이스라엘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앗수르이후에는 이곳이 속주의 수도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지리적인 의미에서 사마리아지역이란 사마리아성의 행정적 통치의 영향을 받는 북부지역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 둘째, 구체적 장소의 의미에서 ‘사마리아’는 ‘사마리아 성’을 의미한다. 사마리아성에는 한번도 사마리아인들의 성전이 있지 않았다. 오히려 정치,경제의 중심지이면서, 풍요의 상징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이방문화와 이교의 상징이었다. 세째, 성경에서는 ‘사마리아인’이라고 했을때에는 사마리아지역에 살고있는 거민이라는 의미보다는 그리심산을 자신들의 성지로 여기며, 모세오경만을 정경으로 받아들이는 특수 종교집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의미에서의 사마리아인은 Samaritans로 표현하고, 사마리아성 혹은 사마리아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을 말할때에는 Samarians라고 표현한다. 실제 Samarians들은 강제이주된 사람들, 퇴역군인 등이기에 아예 이방인이거나 혼혈족들이다. 그러나 반대로 Samaritans들은 족외혼을 엄격히 금하고 있기에 오히려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사람들이다
이곳은 아합왕이 겨울에 머물렀던 성(B.C 9세기경)이 있던 곳으로, 이세벨에게 죽임을 당한 나봇의 포도원 자리이다(왕상 21). 골짜기를 건너면 기드온이 300명으로 미디안을 이겼던 모레언덕이 나온다. 각 사람이 그의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깨뜨리며 “주와 기드온의 칼이여!” 외치자 기드온의 작은 군대는 놀랍게도 미디안을 취했다(삿 7). 모레 언덕에서 진친곳은 블레셋이 사울과 싸우기 위해 모인 수넴으로(삼상28:4; 31) 수넴은 또한 엘리사가 한 여자의 아들을 살린 곳이기도 하다(왕하 4:8-37). 모레언덕 뒤로는 나사렛 산맥이 보인다.
여리고는 450Km되는 요르단 계곡 안에 위치한다. 이 계곡은 헬몬산으로부터 남쪽의 아카바만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계곡이다. 이 계곡은 케냐, 탄자니야를 거쳐 모잠비크까지 이어진다. 계곡의 가장 낮은 바닥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해저 396m인 사해 부근이다. 40Km 거리에 있는 예루살렘(해발760m)으로부터 약 1200m를 내려와 덥고 무성한 요르단 계곡에 이른다.여리고는 요르단 계곡 주변의 황량한 사막 정 가운데 펼쳐진 녹색 카페트와 같다. 여리고는 오래 전부터 기름진 토질과 오렌지, 바나나, 대추로 유명했다. 옛날에는 대추의 도시라 불리었다. 여름에는 메마르고 아주 더우나 겨울과 봄에는 수 많은 꽃의 향기 덮여 아름다운 기후를 만든다. 비옥한 여리고는 주전 7000~10000년 전부터 형성된 문명의 중심지였다.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장군의 인도로 팔레스틴 지역으로 들어온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땅에 있는 성중에 최초로 공격한 성이 여리고 성입니다. 다른 성은 열심히 전쟁을 해서 빼앗았는데, 여리고 성은 기적으로 빼앗았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여호수아 6장 15-17절을 보시면 "제 칠일 새벽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 번 도니 ...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 고고학자들과 대영 박물관 탐사팀 등등이 19세기부터 열심히 여리고성의 고고학적 발견을 시도했습니다. 그 결과 이와 같은 사실이 발굴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에 처음 발굴된 이래로 고고학자들의 지대한 관심이 집중된 유적지였다.예루살렘 탐사의 임무를 띠고 팔레스타인에 머물고 있던 영국의 워렌(C.Warren)은 1868년 4월 여리고를 방문,수십명의 인부들을 이끌고 성서시대의 여리고로 여겨지는 `텔 술탄'이란 언덕을 발굴하기 시작했다.약 한달동안 지속된 발굴에서 워렌은 마치 참호를 파듯이 텔의 동서로 이어지는 도랑과 텔의 바닥까지 도달하는 수직 갱을 팠다.하지만 그의 발굴에서 흙벽돌건물의 흔적만 밝혀졌을 뿐 이렇다 할 만한 여호수아의 성벽은 찾을 수 없었다.당시에는 돌로 만든 석조건축물만을 가치 있는 유적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발굴을 지속할 수 없었다.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워렌의 수직 갱은 1만년전에 건설된 신석기시대의 성벽과 망대를 1m 정도 벗어났다. 두번째의 여리고 발굴은 1907년부터 1911년까지 오스트리아의 젤린(E.Sellin)과 독일의 바찡어(C.Watzinger)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뤄졌다.이미 1902년부터 3년동안 이즈르엘 평원의 타아낙을 발굴하여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젤린은 엄청난 흙벽돌의 잔해 속에서 견고한 바윗돌로 기초를 다진 성벽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젤린이 여리고에서 발견한 성벽이 여호수아가 파괴한 성벽이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예루살렘을 통해 온 유럽으로 번져 나갔다. 하지만 발굴이 진행되면서 한 시대의 성벽만 발견된 것이 아니라 여러 군데서 다양한 시대의 성벽들이 속속 드러나게 되자 발굴당사자들은 과연 어느 것이 여호수아의 성벽이냐는 난감한 문제에 부딪쳤다.결국 그들은 기원전 16세기경 파괴된 중기 청동기시대의 성벽을 선택했고,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입성도 같은 시대로 보았다.이 연대를 기준으로 광야생활 40년을 거슬러 올라가서 출애굽사건도 기원전 1500년경 발생한 것으로 추정했다.젤린의 이러한 연대추정은 여리고의 고고학적 중요성을 신봉하는 일부 성서학자들에 의해 오늘날까지도 주장되는 초기 출애굽설을 낳게 된다. 1차대전 이후 팔레스타인을 식민지로 거느린 영국이 이 위대한 발굴을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젤린의 발굴결과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나선 리버풀대학의 가르스탕(J.Garstang)은 1930년부터 새로운 성벽을 찾기 위한 대규모 발굴을 시작했다.특히 그는 처음으로 여리고에서 기원전 3000년~1500년 사이의 무덤들을 발굴했다.이곳에서 함께 출토된 부장품들,특히 잘 보존된 토기들을 통해 여리고의 주거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하지만 7년동안의 발굴결과 가르스탕이 내린 결론은 젤린의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단지 연대를 1백여년 늦추어서 여호수아에 의한 여리고 성의 파괴가 기원전 15세기에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마지막 여리고 발굴은 영국의 여성 고고학자 케년(K.M.Kenyon)이 1952년부터 1958년까지 지속한 것이다.그녀는 이 발굴에서 가장 발전된 발굴기술을 적용,토기 분석을 통해 정확한 연대를 추정한 결과 여호수아 성벽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밝혀냈다.이곳에는 이미 1만년전부터 거대한 성벽과 망대가 건설됐기 때문에 여리고가 공식적으로 세계 최초의 도시라는 것이다.도시문명의 고향인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 기원전 4천년경부터 성벽을 쌓기 시작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파격적인 결과였다.한편 그녀의 `여호수아 성벽'에 대한 연대추정 결과는 이전의 발굴 결과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고고학자 가스텡과 여러 학자들은 여리고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방법으로 정복되었다는 증거들을 찾아냈습니다. 발굴된 성내에는 많은 식량들이 남아있었습니다. 고대의 전쟁은 오랫동안 성을 에워싸고 전쟁을 하기 때문에 식량이 바닥나게 됩니다. 그때 되야 항복을 하고 전쟁이 끝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리고성은 식량이 그대로 남아있는 채로 정복된 것입니다또한 대영박물관의 탐사팀에 의해 여리고성은 여호수아시대에 강도 6.0의 강력한 지진이 발생하여 파괴되었음을 보여주는 지질구조가 발굴되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을 볼 때 여리고 성의 성경적 함락이 매우 신빙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 엘리사 시대에 여리고에 선지자 학교가 있어서 이들이 방문한 적이 있다고 성경에 기록하고 있다.(왕하2:15-19) 그런데 여리고는 성읍의 자연은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해서 토산물이 잘 익지 못하고 떨어졌다고 한다. 이 사정을 들은 엘리사가 물샘에 소금을 넣어 물을 고쳤다고 한다.(왕하2:19-20) 그래서 이샘을 '엘리사의 샘'이라고 부른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이 샘은 옛 여리고의 길 건너편에 있고 당시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많은 사람들이 마셨을 뿐만 아니라 여리고를 지나시며 전도사역을 행하셨던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도 마셨을 것이라고 한다.
예수는 요단강에서 세례받은 후, 즉시 시험을 받았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가에서 돌아오자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서 이끌리시며 (눅1:1-13, 막1:12-13). 성경은 예수께서 금식하고 시험 받은 정확한 장소를 말하지 않는다. 후에 전통적으로 구 여리고의 뒤쪽을 위치한 카란텔산을 예수의 첫째와 셋째의 시험 장소라 한다. 산 꼭대기가 마귀가 예수께 천하 만국을 보여주며 시험한 장소이다. 6세기에 예수께서 머물렀다는 산의 동쪽 동굴에 교회가 세워졌다. 13세기에 교회는 폐허가 되고 1874년에 희랍 정교회가 이곳에 수도원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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